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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파정공파 세차약기 직계도 | 을사보 세계(경기 용인) |
시조(始祖) 신호(臣扈) 문하찬성사 2세 윤부(允孚) 개성부윤 3세 인진(麟晋) 전라감사(완백) 4세 존(存) 사헌부감찰 5세 이충(以忠) 운봉현감 6세 질(晊) 병조좌랑 7세 응종(應鍾) 예조판서 8세 능파정 휴(貅) 사헌부지평 9세 고옥 인량(仁良) 생원 10세 둔암 언우(彦佑) 창의 의병장 11세 미능재 은수(訔秀) 참봉, 군자감정 불취 12세 지헌 의민(誼民) 창의 13세 익세(翊世) 배 제주양씨 14세 득교(得僑) 배 광산김씨 15세 창수(昌壽) 16세 극상(極祥) 17세 이안(履安) 18세 서(墅) 19세 세진(世鎭) | 시조(始祖) 신호(臣扈) 문하찬성사 2세 윤부(允孚) 개성부윤 3세 인진(麟晋) 전라감사(완백) 4세 재(在) 문과 감사 5세 이량(以良) 감찰 6세 곤(日崑) 묘 나주 한천(寒川) 7세 참문(參文) 묘 상동 8세 원손(元遜) 진사 묘 상동 9세 언우(彦佑) 묘 성서(城西) 하마치 10세 은수(訔秀) 참봉 묘 신촌 투수동 11세 의민(誼民) 임인(1602)생 계묘(1663)졸 12세 세익(世翊) 배 평산신씨 배 제주양씨 13세 운중(運中) 배 광산김씨 14세 진후(鎭垕)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
□ 을사보의 4세 재(在)공 부기(付記)
가. 장손 화순파(주6) 수단(收單)
< 권지1 >
재(在) 文監司 墓在杆城云 世派自羅州來不見於舊譜故姑爲別附於下篇
재(在) 문과 감사, 묘는 간성(杆城)에 있다고도 한다. 지파가 나주에서 왔는데 구 족보에 보이지 않으므로 잠시 하편에 별도로 붙인다.
9세 인량(仁良) 進士 收單晩到於刊出後故付下篇
9세 인량(仁良) 진사, 족보단자(수단)가 간행 후 늦게 도착하였으므로 하편에 붙인다.
< 하편 부록 >
아래기록을 보면, 수단하여온 지파의 기록은, 12세 은수 – 13세 의민- 14세 명세- 15세 창우/창주 – 16세 인상/길상/익상/극상/두상/휘상/기상 – 17세~19세 까지다. 극상공 후손의 경우, 17세 이안 – 18세 서(墅) – 19세 동진(東鎭, 을사생)(주7) 까지다.
□ 작성주체
족보를 보면 의민(誼民)공의 장자 후손이 중심이다. 13세에서 15세 까지는 명세(命世)공 자손만 있으며, 13세 “호세-익세-위세”공 자손기록이 없다. 비로소 16세 이하에서야 전 후손이 망라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이 기록은 의민공의 장손 명세-태교-창우·창주-인상가, 즉 화순(和順) 세거 후손이 주축이 되어 작성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주6) 작성주체를 볼 때 ‘순천파’라가 보다는 ‘화순파’라 볼 수 있다.
주7) 현재 족보는, 18세 서(墅)공의 자(子)는 1852년 임자생인 세진(世鎭)이지만, 을사보 발간 당시 동진(東鎭)이라는 아들을 두었으나 후일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나. 용인파 수단(收單)
< 족보 하편(下篇) >
四世 在 此波子孫自羅州居龍仁云而謹按諸宗錄帖則無配位與子孫又考來單則六代(주8)名字與諱仁良同仁字恐或爲以字然以下三代(주9)加錄則此派姑祔下篇以俟後日憑考焉
4세 재(在), 이 파는 자손이 나주에서 오고 용인에 거주한다고 한다. 조심스레 모든 종록첩을 살펴보니 배위와 자손이 빠져있고 또 가져온 단자를 살펴보니 6대(주8)의 이름과 휘 ‘인량(仁良)’의 ‘인(仁)’자가 혹시 ‘이(以)’자로 되지 않았는지 걱정이며, 3대(주9)가 추가 기록되어있다. 이에 따라 이 파는 잠시 하편에 싣고 후일 고증을 요한다.
주8) 6세 ‘인량(仁良)’을 5대로 잘못 씀
주9) 6세 곤, 7세 참문, 8세 원손, 즉 장손 화순파의 수단이 ‘인량-언우-은수’ 인데, 용인파는 인량공과 은수공 사이에 “곤-참문-원손‘이 추가되어있다
다. 양파 수단(收單)의 차이점
을사보 부록에 실린 두 계파가 주장하는 소목에 언우공 상대(上代)의 차이와 별도로 13세 14세의 휘(諱)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4세의 경우, 현재 휘자는 ㅇ교(ㅇ僑) 돌림이지만, 당시에는 말씀 언(言)변을 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순파 | 용인파 | ||
언우공 상대(上代) : 재공계(在公系) | 언우공 상대(上代) : 능파정공계(凌波亭公系) | ||
13세 | 14세 | 13세 | 14세 |
명세(明世) | 태교(台僑) | 세명(世明) | 태교(台僑), 자 국노(國老) |
| 상교(相僑) |
| 담(譚), 자 국구(國耈) |
| 우교(右僑), 자 국초(國礎) |
| 훈(訓), 자 국초(國礎) |
호세(好世) | 유(諭) | 세호(世好) | 유(諭), 자 칭원(稱遠) |
| 제(言弟) 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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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세(翊世) | 덕교(德僑), 자 선여(羨汝) | 세익(世翊) | 함(諴), 자 선여(羨汝) |
| 득교(得僑), 자 양보(良甫) |
| 운중(運中), 자 양보(良甫) |
| 윤교(潤僑) |
| - |
| 재교(再僑) |
| 인(言寅) |
위세(緯世) | 해(諧) | 세위(世緯) | 해(諧) |
| - |
| 전(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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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탁(世倬) 진사, 무후 * 부 희민(熙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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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 글씨 부분은 을사보에 싣지 않았다. 누락인지 고의 누락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이 부분으로 이 기록이 장손파의 기록임을 추측할 뿐이며 후손들은 화순을 새로운 세거지로 삼았다.
4. 19세 정세진(鄭世鎭)공의 사설
ㅇㅇ辭說
昔乙巳譜跋文中 有順天派龍仁派同祖彦佑公而來歷不明一是一非云 大抵龍仁派在何處家耶 考下文籍而然乎 去實造虛獘眞飾僞以奸害人 則何事不爲何人不傷㢤 爲其孫子子痛憤憤 余之先世在西水口時 門事或不聽宗派之議ㅇ 丙寅派譜不同門議而主管䥴刊之ㅇ累年致意至乙巳年宗派族丈權氏主設譜役親子孫之散在列邑 棄其远不見之時闇然造無據之說ㅇ責墓所失傳斥吾族於下篇自作跋文借述族丈運宗氏名而歸咎也 然唱唱神眼如電其可掩乎 文蹟唱然在在其能詮乎 此丈素拙文字不能著述可知矣 及其迄役之際余之祖考與和順族祖(주10)ㅇ三員忿怒趨進譜所大端生梗憤辭無數宗大權氏慚愢無言 始刊吾先之昭穆添譜而下篇跋文時不劃改曰譜單已爲分派復將來改刊則役區財乏以待後日重譜時援去云云 而好言誘之余祖考且進族丈運宗氏宅無數詰責則運宗氏曰非吾所知主管者之所爲也 累累介明故祖考雖忍遯庵居常言此事訓示子孫 故以余之不肖聞得其記焉 悲夫在西水口時無此設焉 居草洞時無此事 戊子單唱然明著 丙寅譜詳略盡述焉 戊子丙寅後七十八年再乙巳棄古蹟而始造此表歷不明之設錯紀世繼倫理之悖甚矣 眞若明不則何云 此詭踈脫而當知罪罪乎 是造無據之設自懼其心也 甲子年石塘都事公(주11)見此文(주12)而破惑曰是宗族間相爲矛盾飾僞以害門悶之事也 昭穆向載而跋文不去曰其子孫一無來言姑存以待後日之辭ㅇ 族丈履民氏(주13)親鑑此事來言于余之先考余方年幼侍惻聞設如昨矣
ㅇ壬辰之亂士夫家許多倡義剿滅倭賊吾之九世祖遯菴公(주14)奮然起旅戰至淸州殞亡繼義將參奉公(주15)代領其兵斬戡甚多太和堂處士公(주16)丙子亂與二弟(주17)起義至畸庵鄭先生(주18)陳紏畵方略聞和事成痛哭南下 實吾鄭之生光一門同力褒享可也 所謂後族孫妄生邪心錯亂昭穆忝奪先祖 其罪何歸子孫不絶文獻盡奪乎 天可誣乎地可易乎 殃心及哉門中或不知事實疑吾來歷者有之痛莫甚焉 憤莫淚焉 幸今門議齊脊誠力刊譜欣惑無己跋文中自順天龍仁波至以俟後日之考證焉三四行書拔去不䥴切望云云 家運不泰數他鄕不能顯揚先祖見此凌辱之文 天乎人乎自然血淚滿襟耳
宗下世鎭畧記所聞書上
生員公先祖兩代(주19)墓所(居庐:거려) 三代倡義之際逃亂寄生於外宅而且宗孫(주20)无后故遺失云而此是傳家之遺言耳
지난 을사보(1845년 초간보) 발문에 순천파(順天派)와 용인파(龍仁派)가 있는데, 모두 언우공(彦佑公)을 똑같이 선조라고 하니, 그 내력이 불분명하여 한편으로 이렇고 한편으로는 아니라고 시비가 운운하였다. 도대체 용인파(龍仁派)란 어느 곳의 어느 집인가! 어느 문적을 살펴보아도 그러하다. 음해하는 사람이 진실을 왜곡하고 없는 사실을 지어내 진실에 대해 거짓으로 꾸몄으므로, 무슨 일이든 하여서는 안 되고, 어느 누구라고 상처를 내어서는 안 된다. 그 손자 되는 사람으로서 통분을 금할 수 없다.
나의 선대께서 서수구(西水口)에 사실 때에도 집안 일(문사門事) 또는 종파의 의론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 앞서 병인파보(1806년) 시에도 집안의 의론이 같지 않아 여러 해 치의(뜻을 전함)하였는데도 주관자가 준간(간행)하였다. 1845년 을사년에 종파의 족장 권씨(鄭權)가 보역(족보편찬)를 주관하였는데, 친자손이 여러 곳에 떨어져 흩어져 살고 멀어서 내왕하여 볼 수가 없었다. 이 때 근거도 없는 흐릿한 말이 꾸며졌다. 묘소 실전의 책임을 나무라며, (을사보) 하편에서 우리 가문을 배척하고, 발문을 조작하고, ‘운종씨(鄭運宗:을사보 발문)’의 이름을 빌려 기술하여 허물을 덮어씌웠다. 주구장창 번개와 같이 귀신같은 안목을 주장하는데 가히 숨길 수 있는가! 문적이 뚜렷이 존재하고 (발문 내용은) 능히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 어른이 글이 서툴러 저술할 수 없다는 것을 알만하다.
족보간행 시에 할아버지께서 화순의 일가 할아버지(주10)와 함께 세분이 크게 분노하여 서둘러 보소에 가셨는데, 대단히 불편하여 분한 말을 수없이 족장 권씨에게 말하였으나 부끄러움에 아무 말도 못하였다. 발간 시 나의 선대 소목(세보)을 보첨으로 두고 발문 쓸 때도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미 족보 수단을 마쳤으므로 분파(貴波)는 장래에 다시 개간하고 (지금은) 발간 재정도 부족하므로 기다려 후일 중간(重刊) 시에 반영하라” 운운하면서 나의 조부(정이안)를 좋은 말로 미혹하였다. 또 족장 ‘운종씨(運宗氏)’에게 달려가 무수히 항의하니, 운종씨가 말하기를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주관자의 소치이다”라고 말했다. 누누이 일일이 밝히고 할아버지께서는 비록 꾹 참고 조용히 초막에 살면서 항상 이일을 말씀하시며 자손에게 훈시하였다. 그래서 불초는 그 들은 바를 여기에 적는 것이다. 슬픔에 잠긴 아버지께서는 서수구에 살 때의 일을 말씀하지 않으셨다. 초동(草洞)에 살 때도 이 일은 없었다.
무자년(1768년) 단자에서 분명히 말하고, 병인보(1806년) 발간 시 상세하고 간략하게 다 말하였다. 무자 병인 후 78년 다시 을사년(1845년)에 옛 기록을 꺼리어 멀리하고 이 내력이 분명치 안다는 말로 잘못 꾸며지기 시작된 것은 후손으로 이어오는 세계의 벼리(뼈대와 규칙)를 어지럽혀 그 윤리적 폐단이 극심한 것이다. 진실로 불명하다고 어떻게 말하는가!
이는 벗어나려고 둘러대는 것으로 마땅히 자기가 지은 죄를 아는 것이다. 이러한 조작이 근거가 없다는 말은 스스로 그 마음이 두렵다는 것이다. 갑자년(1864년)에 석당 도사공(주11)이 이 문안(주12)을 보시고 의혹(疑惑)을 풀며 말하기를 “이는 종족 간 서로 모순되고 꾸며댄 허위(飾僞)로서 가문을 해치는 답답한 일이다. 소목(昭穆)을 싣고 발문(跋文)을 없애지 않는 것은 그 자손이 남아있는 것과 내려오는 말이 하나도 없어 후일의 논증을 기다린다는 것이다.”하였다. 족장 ‘이민씨(履民氏)(주13)가 이 일을 보시고 오셔서 말씀하시기를, “자네 선친에게서 내가 어릴 때 옆에서 들은 일이 마치 어제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임진왜란에 사대부가는 허다하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초멸하였다. 나의 9대조 둔암공(주14)도 분연히 일어나 전쟁터를 전전하며 청주에 이르러 운망(순절)하시고, 참봉공(주15)이 의병장을 대신 이끌어 적을 무수히 베었다. 태화당 처사공(주16)도 병자호란에 두 동생(주17)과 창의하여 기암 정선생(주18) 의병진에 합류하여 적을 무찌를 방략을 세웠으나 화의가 성사(삼전도굴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남쪽 고향으로 돌아오셨다. 실로 우리 정씨를 빛내셨으니 일문이 힘을 합쳐 기리고 제향 함이 마땅하다.
이른바 족손이 함부로 사심을 일으켜 소목을 어지럽히고 선조를 첨탈하여 욕되게 하였다. 어떻게 자손들에게 죄가 돌아오게 하며, 끊임없이 문적(가전된 기록)을 다 빼앗아 버린단 말인가! 가히 하늘을 속이고 땅을 뒤엎는 일이다. 앙심이 문중에 재앙을 미치게 하고, 혹 사실을 알지 못하고 우리 집안의 내력을 의심하는 자가 주는 고통이 실로 막심하다. 분하여 울 수도 없다. 다행히 집안(鄭門)의 의론이 어지러움을 정리하고 족보를 발간함에 정성을 다하며, 기 발문 중 “순천파로부터 용인파에 이르기까지 후일의 고증을 기다린다. 라는 서너 줄의 서발을 없애고 인쇄하지 못함이 몹시 절망스럽다” 운운하였다. 가운이 편안치 않고 타향을 수없이 전전하며 이름을 빛내지 못하였는데, 선조께서 이 능욕스런 문안을 보시고 피눈물 가슴 가득 흘리심을 하늘이여! 사람들이여! 듣고 계시는가!
후손 세진(世鎭)이 들은 바 약기를 적어 올리다.
생원공 양대(주19) 묘소를 가려하시며 삼대가 창의하실 때, 난을 피하여 외가에 의탁하여 더부살이하고 또 종손(주20)의 후손이 끊겨 집안 문적이 유실되었으므로, 이 글은 집안에 내려오던 유언을 쓴 것이다.
주10) 화순족조(和順族祖) 일찍이 나주에서 화순으로 이주하신 16세 인상(麟祥)공가의 이중(履中, 1754~?)공과 이태(履兌 1762~?)공은 연배로 보아 연세가 너무 높아, 18세 기룡, 기순공 등이신 듯하다
주11) 도사공(都事公) : 정오규공의 현손, 응교공파 전라도사(全羅都事) 19세 정구석(鄭龜錫 1798~1865), 호 석당(石塘)
주12) 1845년 을사보의 정운종공 발문
주13) 17세 정이민(鄭履民) 1806~1884, 부 운조(運祚), 선대께서는 8세 지평공 서(犀)공 이래 광산 대촌면(大村面) 일대에 세거하셨다. 선영은 대촌면 산정등(山亭嶝)이며, 현재 주소는 광주시 남구이다.
주14) 10세 정언우
주15) 11세 정은수
주16) 12세 정안민
주17) 12세 정의민, 정희민
주18) 정홍명(鄭弘溟)
주19) 생원공 양대 : 9세 정인량(鄭仁良 1535~?)과 배 남평문씨
주20) 종손 12세 정안민
* 귀구(歸咎) : 남에게 허물을 돌려씌움
* 추진(趨進) : 빨리 나아감
5. 족보편찬 사적(史蹟)
을사보의 서문과 발문 그리고 19세 세진공의 사설을 살펴보면, 이미 1700년대에 여러 번 족보편찬 노력을 해 오신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1736년에 15세 삼회재(三悔齋) 정오규(鄭五奎)공이 응교공파 11세 창문(昌門)공의 손자이자 겸재공의 백부(伯父 큰아버지)되시는 13세 시설(時卨, 1621~1681)공가의 세차약기를 기초로 병진초보(丙辰草譜)를 편찬하신바 있다. 무자년(1768년)과 무오년(1798년), 병인년(1806년)에도 광주정씨 총보의 발간 시도가 있었다.
2001년 신사보에서 1845년 을사보의 정권공의 발문을 해석하면서, 무자년은 1828년, 무오년은 1858년(“이는 1838년 무술년의 잘못인 듯하다.” 라는 주석을 달았다)으로 보았으나, 발문과 서문에 나오는 분들의 생몰년 등을 종합할 때 재해석이 필요하다.(카폐 을사보 서발 참조)
< 광주정씨 족보 편찬사 : 2017년 광주정씨총람 >
족보명 | 도유사(都有司) | 구 분 | 서문(序文) | 발문(跋文) 기술 |
병진초보(1736년) |
| 묵필본 |
| 정오규(鄭五奎) |
무진세보(1808년) | 정홍규(鄭弘規) | 묵필본 2책 | 정홍규(鄭弘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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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보 초간본 (1845년) | 정석린(鄭錫麟) | 목판본 | 홍재룡(洪在龍) 정석린(鄭錫麟) 정권(鄭權) | 정운종(鄭運宗), 정기(鄭璣) 정구석(鄭龜錫) |
갑자보 중간본 (1864년) | 정오신(鄭五臣) 정석린(鄭錫麟) | 목판본 | 정구석(鄭龜錫) | 정오신(鄭五臣), 정석린(鄭錫麟) 정이민(鄭履民), 정제인(鄭濟寅) 정석홍(鄭錫鴻), 정관수(鄭觀洙) |
병인보 파보 1866년 | 정이의(鄭履毅) | 판서공 파보 2책 | 정이의(鄭履毅) * 강진 수인사 출간 | 안창신(安昌信) * 3세 정구당(鄭九塘) 후손 파보 |
경술보 파보 1910년 | 정이형(鄭履瀅) | 완백공 파보 2책 | 정이형(鄭履瀅) | 정한필(鄭漢珌), 정시림(鄭時林) * 3세 정인진(鄭麟晋) 후손 파보 |
임자보 파보 1912년 | 정화용(鄭和用) | 동백공 파보 천지인 3책 | 정화용(鄭和用) | * 3세 정구진(鄭龜晋) 후손 파보 |
을축보 3중간본 1925년 | 정봉림(鄭鳳林) 정화오(鄭和五) | 석판본 | 정봉림(鄭鳳林) | 정화오(鄭和五), 정홍림(鄭泓林) 정영필(鄭英珌), 정두환(鄭斗煥) 정규상(鄭圭祥), 정우림(鄭羽林) 정영식(鄭榮植), 정감우(鄭鑑禹) |
병신보 4중간본 1956년 | 정영필(鄭英珌) 정정환(鄭政煥) | 석판본 3책 | 정영필(鄭英珌) 정정환(鄭政煥) | 정준석(鄭晙錫), 정영석(鄭英錫) 정화형(鄭和馨), 정규종(鄭圭綜) 정정식(鄭正植), 정규림(鄭圭林) |
정사보 5중간본 1977년 | 정재구(鄭在九) | 활자본 | 정재구(鄭在九) | 정용학(鄭用學) |
신사보 6중간본 2001년 | 정기호(鄭琦鎬) | 활자본 3책 | 정상원(鄭相元) 신명휴(申明休) 정완호(鄭琓鎬) | 정광철(鄭光喆), 정재성(鄭在成) |
< 투수동(현재 투주投珠), 마치(馬峙, 亍峙)의 위치 비정 >
* A(마치) : 마치의 아래 줄기가 하마치이고 하마치 서쪽이 서당골인데, 족보에 ‘서수구외(西水口外) 하마치(下馬峙)’라 하므로 서당골과 투수동이 ‘서수구’가 아닐까 생각된다. ‘투수동(投水洞)은 지도상 하마치의 서남쪽에 ‘투주’라고 부르는 지명이 있는데 서당골에서 투주지역 일대로 추측된다. 월정봉 북쪽에 금성산(錦城山)이 있다.
6. 능파정(凌波亭)공 후손의 세거지(世居地) 변화
일반적으로 선대의 묘소 소재지와 거주지 간에 상당한 연관성이 있다. 교통과 생활수단의 변동이 쉽지 않고 지역적 배타성이 있던 조선시대로서 세거지를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출사하신 분들은 근무지에 터 잡을 수도 있고, 전란기간 중에 처가나 외가 쪽에 기대며 옮아갈 수도 있다.
능파정공 후손들의 세거지를 살펴보면, 나주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신 지파가 보인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세차별 장차별 묘소 소재지를 조사하여 보고자 한다.
ㅇ 투수동, 하마치, 금성산, 금산은 나주(羅州) 인근으로 모두 같은 지역범위 내에 있다.
9세 인량(仁良) 나주 금산 칠전(七田)
10세 언우(彦佑) 배 광산김씨 나주 신촌면 하마치(下馬峙, 下亍峙) 쌍조
11세 은수(誾秀) 배 장택임씨 나주 투수동 쌍조
12세 안민(安民) 나주 투수동(投水洞), 배 여흥민씨 투수동, 무후(无后)
의민(誼民) 나주 투수동(投水洞), 배 금성나씨 나주 북금성산(北錦城山) 연화방축상
희민(凞民) 부지(不知)
ㅇ 언우공가의 후손은 절손(絶孫)되거나 일소 부지소거(不知所居)된 집안을 제외하면, 13세의 명세(明世)공가와 익세(益世)공가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세거지는 나주와, 화순, 순천(전 승주) 일대이다.
□ 명세(明世)-태교(台僑)-창주(昌宙)-인상(麟祥) 장손가 : 화순(和順)
16세 인상(麟祥)공 시절에 나주 투수동에서 화순 압곡(鴨谷)으로 이전하셨다. 현재 지명은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이다.
□ 명세(明世)-상교(相僑)-창후(昌垕 의병장)-익상(益祥)가는 본래 세거지인 나주(羅州)를 지켰다.
□ 익세(益世) 장손 익상(益祥)가 : 구례(求禮) 문척면 → 순천(順天, 전 승주昇州) 황전면
13세 익세공가는 14세 득교(得僑)공이 섬진강 남안(南岸)의 구례 문척면(文尺面)으로 이주하셨다가 대부분 후손이 15세와 16세 극상(極祥)공에 이르러 구례의 남쪽 경계와 이웃한 순천 황전면 일대로 이주하여 세거지로 삼았다.
반면 익세공 차남 윤교(潤僑)공가는 나주에서 순천 주암으로 이주하셨는데 후손의 소재지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 익세(益世) – 기상(麒祥)가 : 구례 → 순천 서면
< 11세 의민공 후손 묘소 소재지 현황 >
13세 | 14세 | 15세 | 16세 |
명세(明世), 세명(世明) 1631~1713 배 나주나씨 -나주 투수동 조고(祖考) 동원(同原) 쌍조 | 태교(台僑) 1653~1718 -투수동 월령(越嶺) 배 천안김씨 -순천 주암리 정구산(丁龜山) | 창우(昌宇) 배 삭령최씨 -순천쌍암면유목동 합조 | 홍상(弘祥) 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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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주(昌宙) -나주 투수동안산(案山) | ①인상(麟祥) 1721~1792 -화순압곡삼소락(三所洛) 배 김해김씨 -오성산(五城山) | ||
배 김해김씨 -화순 압곡(鴨谷)삼소락 | |||
상교(相僑, 담譚) 1663~1740 배 이천서씨 -나주서수구외(西水口外) 하마치 재신산(宰臣山) 상하조 | 창후(昌垕) 1694~1775 1728 창의(倡義) 배 광산김씨 -나주 금성산 음마치(飮馬峙) 상하조
| 길상(吉祥) 1734~? 배 이천서씨 -순천 황전면(黃田面) 미초촌(美草村) *자(子) 이하(履夏) 이하(以下) 부지(不知) | |
②익상(益祥) 1737~? 배 창녕조씨 -나주 금성산 음마치 창암(昌岩) 상하조 | |||
호세(好世), 세호(世好) | 유(諭) | 창대(昌大) 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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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세(益世), 세익(世益) 1639~? 배 제주양씨 -구례 문척면(文尺面) 선단동(仙壇洞) 합조 | 덕교(德僑) 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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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교(得僑, 운중運中) 1694~? -구례 문척면(文尺面) 외천동(外川洞)
| 창수(昌壽) 1720~? -순천 삽치 대산막동 (大山幕洞) | ③극상(極祥) 1754~? 생부 창복 -순천 삽치 대산막동 (大山幕洞) 배 순창조씨, 산막동 배 의령남씨, 산막동 | |
배 김해김씨 -구례 문척면(文尺面) 외천동(外川洞) 장등 | |||
창복(昌福) 1721~? -구례 방광면(放光面) 홍두동(鴻頭洞) | ③두상(斗祥) 1761~? -순천 황전면 산막동 배 인천이씨 -순천 황전면 산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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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이천서씨 -나주 도림면(道林面) 방동(房洞) | 배 광산김씨 -순천 황전면(黃田面) 삽치(霅峙) 대산막동(大山幕洞) | 배 광산김씨 -순천 황전면 산막동 | |
윤교(潤僑) 1703~? 배 서산류씨 -나주 도림면(道林面) 방동(房洞) 웅치촌(熊峙村) 상하조 | 창석(昌碩) -계양동(鷄良洞) 배 김해김씨 -순천 두모동(斗毛洞) * 순천 승주읍 두월리
| 유상(有祥) 무후 | |
휘상(徽祥) 1774~? 배 인천이씨 -순천 주암면(舟岩面) 전암동(傳岩洞) *자 이기(履基) 1817~? 손자 찬(瓚) 1842~? 이하(以下) 부지(不知) | |||
재교(再僑, 인言寅) -나주 남평(南平) 덕지 동(德之洞) | 창건(昌乾) -장흥 노동치(蘆洞峙) 배 흥덕장씨 -장흥 문암촌(文岩村) 피학동(被鶴洞) | ④기상(麒祥) 1763~? -순천 서면(西面) 강림산 (講林山) 배 흥덕장씨 -순천 서면(西面) 비월리 (飛月里) 내동(內洞) | |
배 이천서씨 -장흥 유치면(有治面) 발맹산(鉢孟山) | 창곤(昌坤) 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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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세(緯世), 세위(世緯) 1653~1718 배 천안전씨 -보성 정곡면(井谷面) | 근(謹) | 몽후(夢垕) 무후(无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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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諧) 무후(无后) 전(詮) 무후(无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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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간글자는 용인파 수단
16세 | 17세 | 18세 | 19세 |
①인상(麟祥) | 이주(履柱) 1751~? 배 광산이씨 -순천 황전면(黃田面) 미초촌(美草村) 섬등(蟾嶝) | 재(載) 1782~? 생부 이하(履夏) 배 순창조씨 -(순천) 담동(曋洞) 쌍조 | 규진(奎鎭) 1819~? -구례(求禮) 외산면(外山面) 탑동(塔洞) 산제등(山祭嶝) 배 순창조씨 -탑동(塔洞) 산박등(山樸嶝) *현 구례군 산동면 탑동리 |
이중(履中) 1754~? 배 제주양씨 -순천 주암면(舟岩面) 정구산(丁龜山) 주등(舟嶝) | 기룡(基龍) 1807~? 배 경주정씨 -화순 압곡(鴨谷) 삼소락 | 하진(夏鎭) 1739~? -화순 압곡 굴등(窟嶝) 배 남양홍씨 -화순 압곡(鴨谷) 삼소락 | |
배 광산김씨 -화순 압곡(鴨谷)삼소락
| 기순(基順) 1809~? 판치(板峙) 외야미등 | 태현(泰鉉) 1852~1911 -화순 압곡(鴨谷) 삼소락 | |
배 진주정씨 -광주 사동(寺洞) 안산(案山) | 배 충주박씨 -광주 방하동면(芳荷洞面) 사동(寺洞) 전등(前嶝) | ||
| 배 서산류씨 -화순 압곡 상촌(上村)후 | ||
| 옥진(沃鎭) 1856~1905 배 순흥안씨 -화순 압곡(鴨谷) 삼소락 | ||
배 전주이씨 -화순 압곡(鴨谷)굴등(窟嶝) | |||
백진(百鎭) 1859~1920 배 경주김씨 -화순 압곡(鴨谷) 삼소락 | |||
이태(履兌) 1762~? -서치(西峙) 배 수원백씨 -(화순?) 유동(柳洞) | 시(土寺) 1793~1850 배 남평문씨 -유동(柳洞)
| 도진(道鎭) 1822~1888 배 밀양박씨 -유동(柳洞) 선영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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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익상(益祥) | 이혁(履赫) 1766~? -나주 서수구외 상마치 배 광산김씨 -나주 투수동 안산 | 훈(塤) 1797~? 배 성주이씨 -나주 창평 서면 성산촌 | 달진(達鎭) 1825~1864 배 전주최씨 -나주 금성산 |
지(墀) 1802~1852 배 금성오씨 -나주대화면가마등(加馬嶝) | 대진(大鎭) 1836~? 배 광산김씨 -나주대화면가마등(加馬嶝) | ||
희(土喜) 1804~1876 배 성주이씨 -나주 금산 | 영진(永鎭) 1830~1871 배 광산김씨 -나주 금산 칠전(七田) | ||
훈(壦) 1806~? 배 죽산박씨 -광주 고룡면 비치(飛峙) | 국진(國鎭) 1839~1894 배 광산이씨 -나주 금산 칠전(七田) | ||
덕진(德鎭) 1849~? -고룡면 서당동(書堂洞) 배 광산김씨 -자력동(自力洞) | |||
태진(泰鎭) 1852~? 배 광산김씨 -투주동(投珠洞) | |||
원진(源鎭) 1854~? 배 함평노씨 -점등(店嶝) | |||
③극상(極祥) | 이안(履安) 1797~? 생부 두상 -배 장흥임씨 -순천 황전면 산막동 | 서(墅) 1818~1880 배 풍양조씨 -순천 황전면 산막동 | 세진(世鎭) 1852~? 배 광산이씨 -순천 황전면 산막동 |
지(址) 1829~1913 배 상주박씨 -순천 황전면 산막동 | 찬진(燦鎭) 1854~1890 배 목천장씨 -순천 황전면 산막동 | ||
③두상(斗祥) | 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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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기상(麒祥) | 이주(履周) 1802~? -배 장흥임씨 -순천 황전면 산막동 | 용(墉) 1830~? -순천 서면 불단동(佛壇洞) 배 성주배씨 -순천 서면 불단동(佛壇洞) | 하진(賀鎭) 1868~1946 -순천 서면 불단동(佛壇洞) 배 여산송씨 -순천 서면(西面) 비월리 마구동(馬丘洞) |
7. 용인파와 4세 재공의 후손
용인파가 누구인지를 살펴보기 위하여 족보에 실린 후손들의 주거지 또는 묘소 소재지를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4세 재공 이하 5세 이량(以良)공부터 8세 원손(元孫)공 까지 기록이 어떻게 내려왔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언우(彦佑)공을 기점으로 상대와 하대간 유대를 확인하기 위하여 세거지와 묘소 소재지가 연관되어야 한다.
< 재(在)공 세계 >
4세 | 5세 | 6세 | 7세 | 8세 | 9세 |
존(存) | 이충(以忠) | 철(瞮) | 참동(參仝) | 호(虎) | 응성(應星) |
웅(雄) 1472~1533 | 응규(應奎) 1508~1564 | ||||
절(晣) | 응종(應鍾) | 서(犀) 1488 해(獬) 1491 휴(貅) 1522~1558 표(彪) 1499~1551 추(貙) 무후 사(獅) 1514~1581 | 인수 1505~1566 인근 1532~1591 인량 1535~? 인홍 1530~1589
인방 1562~1625 | ||
질(晊) 무후 | 외손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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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以孝) | 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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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在) | 이량(以良) | 곤(日崑) 강(日崗)무후 | 참문(參文)
| 원손(元遜)
| 부지(不知) * 언우(彦佑) |
족보자료에 6세 곤(日崑)공 이하 3대의 묘소는 나주 한천(寒川)(주21)이라고 하는데, 현 지명에는 보이지 않고 글자의 뜻대로라면 깊은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차가운 냇가 마을이라는 곳이다. 그 외 6세 곤공의 성씨는 하동정씨, 7세 참문(參文)공 배위의 본관이 광산이씨, 8세 원손공의 배위는 남평문씨로서 이 지역 토호 성씨이다.
□ 순천파는 있어도 용인파는 없다
장자파 명세(明世)공파의 인상(麟祥)공가는 화순으로, 익상(益祥)공가는 나주에, 차자파인 익세(益世)공파의 극상공가는 순천 황전면에, 기상(麒祥)공가는 순천 서면에 세거하였으므로, 능파정공파는 화순, 나주, 순천의 세 지역에 기반을 두었다. 어느 후손들도 거주지나 묘소 소재지가 경기도 용인지역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을사보에서 말하는 ‘용인파’는 그 증거가 보이지 않으며, 신뢰성이 희박하다.
이 사설에서 말하는 무슨 조작과 허위로 진실을 가렸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을사보 편집인의 속 뜻을 알 수 없으므로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외견상, 상대의 세목을 4세 재공의 후손에 붙이는 근거는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 이 분들의 묘소가 실전되지 않고 당시 보존되었다면 논란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실전의 책임도 문제 삼았다는 언급이 있다.
4세 재공 ~ 8세 원손공의 자료가 어디서 채록(採錄)되었는지 궁금하다.
<2001년 신사보 시조사실, 22세 정기호 박사> 시조공의 근원을 찾기 위한 여러 설중에, 병진초보를 편찬하신 노학재(老學齋 또는 삼회재) 정오규공의 부설(附設)에, 양촌공파 13세 정계광(鄭啓光)은 가승(家乘)에서 “간성(刊城)(주22)에 사는 종인(宗人) 수(扌秀)(주23)의 11대조가 관찰사 재(在)인데 그 묘갈에 문하시중 광남부원군(光南府院君) 휘 기진(期進)(주24)이 시조라고 되어있다 라는 글을 보았다고 하고, 또 합천(陜川)에 사는 재공의 후예가 “재공의 비문에 이도(以道)(주24), 세운(世雲)이라는 두 이름이 있는데, 찬성사공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라고 하였다. 이래저래 4세 재공의 소목(昭穆)과 찾지 못하는 비석은 수수께끼 그 자체다.
적어도 재공의 후손들이 1845년 을사보 발간 당시에도 광주정씨의 범주 내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순천파든 용인파든 그 후손들의 돌림자와 세거지 범주가 일관되어 있으므로 이 중 일부 가문을 재공 후손으로 분리할 근거도 없다.
주21) 현재 족보는 나주(羅州) 차천(次川)이다.
주22) 간성(刊城) : 강원도 고성군의 간성(杆城)이라면 광주정씨의 세거지와 동떨어진 곳이다.
주23) 한자로 ‘수(扌秀)“자를 쓰신 분은 보이지 않는다. 족보에 ‘수’자를 쓰는 분은 , 1. 수(修) 응교공파 14세, 2. 수(收) 자의공파 14세(1681생), 3. 수(輸) 지평공파 14세(1741생), 4. 수(授) 자의공파 16세(1767생), 5. 수(燧) 승지공파 12세 분으로 능파정공파 분은 보이지 않는다. 특히 거주지가 경상도 합천이라 하니 부합되지가 않는다.
주24) 광남부원군(光南府院君) 정기진(鄭期進), 정이도(鄭以道) 이런 분들도 검색되지 않는다.
첫댓글 며칠간 울진에 가기 때문에 부랴부랴 올립니다. 고칠 부분은 다녀온 후 보완하겠습니다. 우리 광주정씨에 족보학 과목이 있어야겠습니다. 연구할 부분이 무수히 쏟아지네요. 을사보 이후에 어는 중간본부터 현재 체제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으나, 19세 세진공의 주장이 반영된 듯합니다. 언우공가의 문적이 창후 종손가가 무후되면서 산질되었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이지만, 종손가의 손이 끊기면 차손가가 문적을 이어받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