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김애자
가을엔 밤이 길어서 좋다. 올가을엔 퇴계 선생의 시집을 읽다가 만보(晩步)라는 시가 좋아서 프린트기로 뽑아 책상 앞에 걸어놓고 밤이 이슥하도록 시의 뜻을 마음에 새기며 지낸다.
내 인생 홀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숙원은 오래도로록 풀리지 않는다.
내 마음 속 이야기 나눌 사람 아무도 없어
고요한 이 밤에 거문고만 탄다.
我生獨何爲 宿願久相楩 無人語此懷 謠琴彈夜靜
선생께서 이 시를 지었을 때가 지금처럼 갈가마귀 떼들이 빈 들녘으로 날아오르는 늦가을인 듯싶다. 시의 행간에서 느껴지는 허전한 소회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성리학의 대가였던 선생께서도 인생이란 문제만은 오래도록 풀리지 않는 숙제였던 모양이다. 사위는 고요한데 거문고를 앞에 놓고 줄이라도 타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노학자의 인간다운 애상에서 친근감을 느낀다.
이렇듯 계절에서 묻어나는 허허한 정서는 나의 마음에도 동요를 일으킨다. 아무리 책을 펴들고 앉아 성현들의 말씀으로 잡도리를 쳐도 소멸하는 것들의 허망한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은 양 넘겨버릴 수 없어 자주 뜰로 내려가 별자리만 찾다가 들어와 책을 펴들곤 한다. 물론 하나를 심어 열을 거두는 수확의 기쁨도 없지는 않았다. 해마다 우리집 광에는 때깔 좋은 고구마와 알토란과 은행이며 잘 영근 들깨가 먹을 만치 쌓인다. 알밤도 두 말 가까이 모래를 섞어 고무함지에 갈무리 해둔다. 몸통을 반 이상 흙 위로 내밀고 있는 청무는 보기만 해도 믿음직스럽다. 또 김장감으로 심어 놓은 배추도 포기마다 노란 고갱이가 단단하게 들어차 있다. 겨우내 우리 내외가 파먹을 양식이 그들먹한데도 속은 비어 밤이면 가슴이 시리다.
한 달 전이다. 밤나무 단지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수수밭에 세워 놓은 허수아비 소맷자락으로 찬바람을 피해 숨어든 귀뚜라미란 녀석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줄 모르고 죽을 힘을 다해 울고 잇었던 것이다. 뉘 들어주는 이도 없는 외진 산골짜기에서 울음으로 저 존재를 알리는 그 진지함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자신의 존재를 저토록 확연하게 밝혀보지도 못했고, 진지하게도 살아오지도 못 했으며, 그리움을 품어 홀로 아름다워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새 잎이 돋아났다가 떨어지고, 강설이 퍼붓고 하는 것들이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인 줄로만 알고 살았었다. 육십 중반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꽃이 피고 질적마다 내 생애의 길이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날 허수아비 소맷자락에 숨어서 우는 귀뚜라미와 소쇄하게 쓰러지는 풀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울음으로 한 생을 살다가 가는 귀뚜라미나, 폭여 아래서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꽃을 피우고 씨를 맺고 땅에 묻고 가는 풀들의 조용한 퇴영이 엄숙해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갈색 연미복을 입고 뒤늦게 출연했던 낙엽송도 나목이 되어 내공을 다지며 나이테 하나를 더 키울 준비를 끝내가고 잇었다. 성근 나뭇가지 사이로 드러나느 푸른 하늘이 그래 무정해보이기도 하다가 유정해 보이기도 했던 것이다.
퇴계 선생께서는 오랫동안 풀지 못했던 인생이란 숙원이 이 가을엔 내 안에서 나를 흔들고 있다. 내 생애에서 ‘희망’이라든가, ‘열정’이라는 단어를 더는 인생 노트에 적어 넣을 수 없게 된 것도 몹시 서글프다. 그래서 가끔은 깜박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 싶은 구차한 욕심을 부려본다. 다시 태어나면 지금처럼 수동적으로는 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온 경험으로 봐선 삶이란 사람이 마음 먹은대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내 어찌 모르랴. 저마다에게 주어진 생의 울타리 안에서 바장거리다가 마무리도 제대로 짓지 못하고 중도에서 떠나기 십중팔구인 것이 인생인 것을.
올가을에도 된서리가 산꼭대기에서부터 초혼을 부르며 니려온다. 곡소리도 없이 나뭇가지마다 내걸린 빛바랸 옷가지들이 만장처럼 나부낀다. 제각기 저만큼의 생을 살다가 조용히 회귀에 닿는 나뭇잎들의 몸짓이 스산하다. 언젠가 나도 육신이란 낡은 허물을 벗어놓고 소실될 한점의 추상이란 사실을 알아버렷기 때문일 것이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밤바람이 창문을 흔든다. 누가 지나가고 있는 것일까. 어둠의 치마꼬리가 별빛마저 휘감아 버릴 칠혹의 밤길을 어느 나그네가 발걸음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을까. 문득 퇴계 선생님처럼 산중의 외로움을 여섯 줄 현 위에 올려놓고 단가라도 한 곡 타고 싶다. 그러나 내게 거문고조차도 없어 더욱 쓸쓸할 뿐이다.
(2008)
첫댓글 이 가을에 어울리는 수필 잘 읽었습니다. 폭염이 지나가고 나면 꼭 센치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저도 인생의 길이를 속으로 계산 합니다.
너무나 짧아져버린 그 길이에 새삼 놀랍니다. 좋은 수필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경건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