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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자를 본 발람(21-27)
인간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자신의 자유 의지로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문을 열고 자신을 망치는 길로 들어섭니다. 바로 발람이 그러한 인물에 대한 전형적인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과 하루 만에 그의 길을 막으신 이유는 발람의 여행 의도가 사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의 심중에 ‘이스라엘의 저주’를 계획하며 그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21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22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23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24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25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누르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26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27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21-27)
하나님께서 발람이 모압 왕 발락에게 가서 선포하도록 허락하셨기에, 발람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모압의 고관들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길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면서 그를 죽이려고 하셨습니다. 가라고 하시고는 간다고 진노하시는 것이 뭔가 어색해 보입니다. 22절은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라고 표현했지만, 아마도 ‘그가 갔을 때’(NIV) 정도가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가는 것 자체가 진노의 이유는 아닐지라도 그가 어떤 마음의 의도를 가지고 갔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았어도, 발람 자신은 재물에 대한 탐욕이 있었고,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시 한번 단단히 경고하실 필요가 있었다고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의 길을 막아섰습니다. 그를 막으려고 섰다고 표현하기 위해 히브리어 사탄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대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격적인 존재로 사탄이 등장하곤 하지만, 구약성경에서 사탄은 단순하게 ‘대적자’ 혹은 ‘반대자’를 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의 역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칼을 들고 발람 앞에 서 있는데, 정작 발람은 이 사실을 보지 못합니다. 최고의 선지자가 바로 자신 앞에 있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그렇지만 당나귀는 여호와의 사자가 앞에 서 있는 것을 봅니다. 본문에서 발람의 보지 못함과 발람의 당나귀가 보는 것에 대한 언급을 각각 세 번씩 언급함으로 ‘보다’라는 주제를 뚜렷하게 강조하고, 또 대조하는 의도가 보입니다. 세 번에 걸쳐 나타나는 발람과 당나귀 사이의 대조는 반복할 때마다 지역적 범위가 좁아지고 긴장은 높아져 갑니다. 성경에서 당나귀는 사람을 운송하는 수단(창 22:3; 삼상 22:3;25:20 삼하 17:23; 19:27; 왕상 2:40)과 물건을 운반하는 수단(창 42:26;45:23; 수 9:4; 삼상16:20;25:18)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성경에서 당나귀는 정결하지 못한 짐승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음식이나 희생 제물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나귀는 어리석고 통제하기 어려운 짐승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이 때문에 완고하고 어리석은 나귀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선지자 사이에 나타나는 뚜렷한 대조는 본문이 주요하게 이끌고 가는 이야기의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귀가 먼저 칼을 들고 길에 마주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그로 인해 나귀는 급히 원래 가려던 길에서 벗어나 들판으로 벗어났습니다. 밭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원문은 ‘들판’입니다. 하지만 24절에서 포도원을 언급하기 때문에 포도밭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발람은 말을 듣지 않고 길에서 벗어나는 나귀를 때렸습니다. 두 번째 장면은 하나님의 사자가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마주 서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24). 피할 길이 없습니다. 이때도 선지자 발람은 보지 못했고 나귀는 보았습니다.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기 위해 몸을 담벼락으로 밀착했습니다. 이 과정에 발람의 발이 담 사이 벽에 끼어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도 상황을 보지 못한 발람은 다시 채찍질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장면은 더 심각해졌습니다. 더 이상 피할 곳도 없는 좁은 골목에 섰습니다. 꼼짝없이 죽은 목숨처럼 보이지만, 이번에도 발람은 보지 못하고 나귀는 보았습니다. 피할 길도 없었기에 나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습니다. 상황을 알지 못한 발람은 더욱 노하면서 나귀를 때렸습니다. 나귀는 세 번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고, 발람은 세 번 보지 못했습니다. 나귀는 세 번 피했고, 발람은 세 번 채찍질했습니다. 만약 발람의 손에 칼이 있었으면 나귀를 죽었을 것입니다(29). 그 만큼 이야기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발람과 나귀의 대화(28-30)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우리의 길을 막으십니다. 비록 발람은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 발람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계획과 길이 막힐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리고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가고 있습니까?
28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29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30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28-30)
이 순간 여호와께서 나귀의 입을 여셨습니다. 매우 특이한 장면입니다. 성경에서 동물이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장면은 창세기 3장에서 뱀의 경우를 제외하면 이곳이 유일합니다. 실제 나귀는 인간의 말을 할 수 있는 구강 구조나 기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귀는 말을 하고, 더 놀랍게 발람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기보다 그 말을 다시 받아 대화를 나눕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귀를 통해 당신의 뜻을 전달할 수 있는 분임을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악한 이방인 선지자의 입술을 열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당신의 축복 계획을 전달하실 것임을 압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장면은 보고 말하는 나귀를 통해 앞으로 자신이 보고들은 바를 말할 발람의 미래 사명을 예시하고, 하나님께서 경고하시는 대목입니다.
발랄과 나귀의 첫 대화는 자신을 무책임하게 채찍질하는 발람에 대한 나귀의 책망으로 시작합니다. 나귀는 지금까지 주인에게 순종했고, 주인은 오랫동안이 나귀를 타고 다녔습니다. 나귀가 충성되게 자신의 직무를 잘 감당했다는 사실을 주인인 발람도 인정합니다(30). 발람과 나귀의 이러한 대화는 발람이 가도 좋다는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갔지만, 여전히 주인인 하나님의 명령보다 자기중심적인 목적을 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나귀의 행동과 나귀의 말을 통해 발람의 잘못을 꾸짖고 계십니다. 발람은 곧 이스라엘 백성을 세 번 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들을 세 번 축복하게 될 것입니다.
발람과 여호와의 대화(31-35)
욕심은 우리의 눈과 귀를 어둡게 합니다. 욕심 때문에 눈이 어두워진 발람은 여호와의 천사를 보지 못하고, 나귀의 책망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책망을 들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눈과 귀를 밝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31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32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33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 34발람이 여호와의 사자에게 말하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당신이 나를 막으려고 길에 서신 줄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이 이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나는 돌아가겠나이다 35여호와의 사자가 발람에게 이르되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발람이 발락의 고관들과 함께 가니라(31-35)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드디어 발람은 칼을 빼어 들고 자기 앞에 서 있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발람은 즉시 고개를 숙이고 엎드렸습니다. 이에 하나님의 사자는 발람을 책망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책망한 내용은 나귀가 자신에게 했던 말의 반복입니다. 발람은 자신의 길을 막고 있는 것이 나귀라고 생각하고 나귀를 세 번에 걸쳐 쳤으나, 결국 자신을 막아 세운 이가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문은 발람이 진노 아래 있게 된 이유도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발람을 막아 세운 것은 발람의 생명을 지키는 결과를 가져왔음이 분명해졌습니다. 당대 가장 잘 알려진 선지자인 발람은 나귀보다 못합니다. 나귀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죽이려 했지만, 정작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았고, 발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셈입니다.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된 발람은 즉시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기뻐하지 않으시면 돌아가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발람이 모압 왕 발락에게 가는 것 자체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최종적인 당신의 뜻을 전달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가 가도록 허락하셨을 때 주신 말씀을 그대로 반복한 것입니다(20). 발람이 탐욕에 눈멀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선포하지 않는 일이 없도록 다시 한 번 경계하고 다짐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려 하는 당신의 뜻을 적극적으로 이루어갈 의지를 보이십니다. 다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깨달은 발람은 발락을 향해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그는 완전한 사람도, 선한 사람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계획의 선한 도구로 사용될 준비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탐심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뜻을 보고 따를 수 없습니다. 삯을 위하여 어그러진 길로 가는 발람은 탐심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사자를 볼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14-16절에 베드로가 발람을 불후의 싹을 자랑하다가 자기 불법을 인하여 책망받은 인물로 제사하였습니다. 그는 물질에 마음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재차 물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탐심에 눈이 어두어질 때 하나님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고집스럽게 자기 뜻만 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오늘도 탐심을 경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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