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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권
1)
『중아함경』 제27권 「범달행경(達梵行經)」(대정장1,p.600상).
2)
혹은 “반대로 신악행(身惡行)을 성취한 이는 흑의(黑衣)의 빛깔과 유색의 의성(意成)을 획득하게 된다.” 백백업을 논의하면서 무색계의 선업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무색계 중에도 가의(可意) 즉 참으로 애호할만한 백업이 존재하지만 명료하게 ‘백’이라고 시설할 만한 백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흑ㆍ백의 업은 이숙과로서 생유와 중유가 존재하고, 신(身)ㆍ어(語)ㆍ의(意)의 3업이 존재하는 곳에서만 설할 수 있는 것으로, 무색계에는 이 중에 중유의 이숙과 신ㆍ어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본론 제24권 ‘중유의 형상과 4유’; 제36권 ‘표ㆍ무표업의 계지분별’ 참조) 백백업의 하나로 분별하지 않은 것이다. 『구사론』(제16권, 고려장27,p.571중; 대정장29,p.83중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725) 상에서의 논설은 이러하다. “전(傳)하여 설(說)하기를, “만약 어떤 처소에 중유와 생유의 두 가지 이숙과 신ㆍ어ㆍ의의 세 가지 업을 갖추고 있을 경우, 그곳에서는 [흑ㆍ백업을] 설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흑ㆍ백업을] 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경주(經主) 세친은 이를 전설(傳說)이라 하여 불신하였는데, 이는 『대비바사론』 제114권(한글대장경122,p.315)의 9설 중 제3설로 설해지고 있다.
3)
이는 “그렇지만 계경 중의 어떤 곳에서는 ‘무색계의 선업을 백 등이라 한다’고 역시 설하고 있다.”고 한 『구사론』(앞의 책) 상에서의 경주(經主) 설에 대한 해명이다.
4)
욕계의 선업을 흑백업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한 상속의 소의신에 어떤 때에는 선, 어떤 때에는 악의 업과 그 과보가 나타나기 때문으로, 어떠한 업이나 이숙과도 백이면서 흑인 경우는 없다.(후술)
5)
즉 앞에서 욕계에서는 선한 업과(業果)의 상속 중에 악업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욕계의 선업을 ‘흑백업’이라 하였는데, 그렇다면 악한 업과의 상속 중에도 선업이 섞여있을 것이기 때문에 ‘백흑업’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인데, 그렇게 이름하지 않고 다만 ‘흑업’이라 이름한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난문.
6)
“욕계 중에서는 악이 선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구사론』 제16권, 고려장27,p.571중; 대정장29,p.83하; 권오민 역,p.726); “불선은 자지(自地)의 선을 끊을 수 있어도 선은 자지의 불선을 끊을 수 없다.”(『대비바사론』 제114권, 앞의 책,p.318) 즉 욕계의 악은 그 성질이 강력하여 선과 섞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악업과 그 과보는 단지 ‘흑’의 명칭으로만 일컬어지는 것이다.
7)
『중아함경』 제49권(대정장1,p.739중), ‘阿難, 是法一向可, 一向樂, 一向意念, 無漏無受, 魔所不及, 惡所不及--’
8)
『품류족론』 제6권(한글대장경117,p.131) “유죄법은 무엇인가? 불선과 유부무기법이다. 무죄법은 무엇인가? 선과 무부무기법이다. 흑법과 백법, 유부법과 무부법, 순퇴법과 비순퇴법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백법이 곧 무죄법으로 그것은 바로 선법이다는 뜻이다. 즉 이렇듯 경과 근본 아비달마에서 무루법을 백법이라 하였음에도 무루업을 비흑비백업이라고 한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난문.
9)
욕계의 견혹(見惑)을 끊는 견도 중의 고ㆍ집ㆍ멸ㆍ도법지인과 구행(俱行)하는 네 가지 사업(思業)과 욕계 수혹(修惑)을 끊는 수도의 아홉 가지 무간도 중 제9 무간도를 제외한 앞의 여덟 가지 무간도와 구행하는 사업은 오로지 욕계의 불선업만을 멸진한다.
10)
욕계의 불선업을 끊는 열두 가지 무루의 사업과, 욕계 선ㆍ불선업을 끊는 제9 무간도의 사업, 그리고 여기에 색계의 네 가지 염오를 끊는 제9 무간도의 네 가지 사업을 더한 열일곱 가지.
11)
즉 욕계의 선업이든 색계의 선업이든 제9 무간도에 이르러 비로소 끊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
12)
일반적으로 법에는 법 그 자체가 단진(斷盡)되어야 할 것과, 그 자체는 단진될 필요가 없지만 그것을 반연(攀緣)하는 번뇌를 단진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전자를 자성단(自性斷)이라 하고 후자를 연박단(緣縛斷)이라고 한다. 이러한 논의를 업에 적용시켜 보면, 흑업은 물론 자성단이지만 선업은 연박단에 속한다. 왜냐하면 선업은 비록 성자일지라도 일으켜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에 근거하여 일어난 번뇌는 단진해야 한다. 이러한 연박단에 속한 선업은 번뇌가 있는 한 단진되지 않은 것이므로 각 지의 번뇌를 모두 단진하는 단계인 제9 무간도에 이르러 비로소 끊어지게 되는 것이다.
13)
모니업은 『중아함경』 제5권 『등심경(等心經)』(대정장1,p.449하)에서 ‘적정(寂靜)’으로 설해지고 있으며, 3청정은 동 『수유경(水喩經)』(동,p.454상)에서 ‘정행(淨行)’으로 언급되고 있다.
14)
여기서 마음 즉 의(意)는 심왕(心王)의 다른 이름이며, 의업은 사(思)의 심소를 말한다.
15)
모니(mauna, 구역에서는 牟那) 즉 적정(寂靜, 또는 寂黙)은 오로지 마음을 본질로 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적정의 마음 자체는 알기 어려우며, 신ㆍ어의 작용을 통해 추리될 뿐이다. 그래서 추리의 근거인 신ㆍ어업과 추리되는 마음을 ‘모니’로 설정한 것이다.
16)
묘행에 대해서는 후술함. 번뇌구란 근본번뇌에서 파생된 뇌(惱)ㆍ해(害) 등의 여섯 가지 지말번뇌를 말하는 것으로, 본론 제54권에서 상론함.
17)
여기서 그릇된 모니(사모니)란 외도들의 무익한 무언(無言)의 행 등을 가리키며, 그릇된 청정(사청정)이란 외도들이 소처럼 살고[牛戒] 개처럼 사는 것[狗戒]을 해탈도로 여기는 삿된 금계를 말한다.
18)
『장아함경』 제8권 『중집경(衆集經)』(대정장1,p.50상). 여기서는 신(身)ㆍ구(口)ㆍ의(意)의 3악행과 3선행이라는 말로 설하고 있다.
19)
보광(普光)에 『구사론기』(제16권)에 의하면 이는 경부(經部) 비유자의 설이다. 즉 유부에 의하는 한 의업은 사(思)를 본질로 하는 것으로서, 이는 ‘탐’ 등의 악행이나 무탐 등의 묘행과는 다른 존재이다. 다시 말해 ‘탐’ 등이 바로 의업이라면 업과 번뇌는 동일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경량부에 있어 ‘탐’과 ‘무탐’ 등은 ‘사’의 분위(分位) 차별일 뿐이기 때문에 이 같은 난문을 제기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계경(『구사론』 제16권, 고려장27,p.572상에서는 『故思經』)은 『중아함경』 제3권의 『사경(思經)』(대정장1,p.437하). ‘云何意故作三業?-- 一曰貪 二曰嫉恚 三曰邪見…….’
20)
누(āśravā)란 번뇌의 다른 이름으로, 여기에는 41가지의 욕루와 52가지의 유루, 15가지의 무명이 있는데, 이는 바로 유정을 생사에 머물게 하고 유전시켜 끊임없이 6근을 통해 번뇌를 누설하는 자량이 되기 때문에 ‘누’라고 이름한 것이다.(본론 제53권 ‘3漏 등의 본질’ 참조)
21)
『구사론』 제16권(고려장27,p.572상; 대정장29,p.84중; 권오민 역,p.732). 본론 「업품」 첫머리(제33권 ‘업의 본질과 종류’)에서 이미 ‘업에는 사업(思業, 의업)과 사이업(思已業, 신ㆍ어업)이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의업을 바로 원인으로서의 번뇌라고 해도 어떠한 과실도 없다는 뜻이다.
22)
“이를테면 ‘애’와 구기(俱起)하는 사(思)는 비록 그 자체 색법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상이 거칠게 나타나기 때문에 신ㆍ어의 표업과 마찬가지로 능히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어 다른 이로 하여금 알게 한다. 그래서 실제로는 [외부로] 나타나는 성질[表性]의 것이 아니지만, 일시 ‘나타나는 것’이라고 설하게 되었으며, 이런 까닭에 경에서도 다만 ‘온갖 애가 나타난 것이 바로 의업이다’고만 말하였을 뿐이다.”(본론 제33권 ‘신업과 어업의 자성’ 참조)
23)
만약 번뇌가 바로 업이라면 무명과 행은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하며, 업장(業障)과 번뇌장(煩惱障) 또한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세 가지 장애[三障]는 업장ㆍ번뇌장ㆍ이숙장으로, 본론 제43권에서 상론함.
24)
열 가지 악업도란 살생ㆍ투도(偸盜, 혹은 不與取)ㆍ사음(혹은 欲邪行)ㆍ양설(兩說, 혹은 離間語)ㆍ망어(妄語, 혹은 虛誑語)ㆍ악구(惡口, 혹은 麤惡語)ㆍ기어(綺語, 혹은 雜穢語)ㆍ탐욕(혹은 貪)ㆍ진에(혹은 瞋)ㆍ사견으로, 악행이 거칠게 나타나는 것을 말하며, 열 가지 선업도란 이 같은 악업도를 ‘떠난 것[離]’으로, 묘행이 거칠게 나타난 것을 말한다. 여기서 ‘거칠게 나타나는 것[麤顯]’이란 가행에 의해 드러나는 근본업도를 말한다.
25)
『구사론』(제16권, 고려장27,p.572중; 대정장29,p.84중; 권오민 역,p.734)에서는 단막시라고 하지 않고 시공양(施供養)이라고 하였다. 즉 술을 마시지 않고 공양을 베푸는 등의 업은 특별히 현저한[麤顯] 업이 아니기 때문에 묘행이기는 하지만 선업도가 아니다.
26)
즉 욕사행(혹은 사음)을 제외한 살생ㆍ불여취ㆍ허광어ㆍ이간어ㆍ추악어ㆍ잡예어의 악업을 타인을 보내어 짓게 할 경우(이를 ‘遣他業’이라고 한다), 표업 없이 무표업만이 성취된다. 즉 업도가 성취되는 순간 자신은 실제로 업을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27)
자신이 직접 살생할 경우에는 상대방이 죽는 순간, 다시 말해 근본업도가 성취되는 순간 표업과 무표업이 동시에 획득된다. 그러나 만약 바로 죽지 않으면 견타업(遣他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때리고 칼로 베는 등의 가행은 살생의 업도를 성취하지 않기 때문에 살생의 표업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후 그것에 의해 상대방이 죽었을 경우 그 때에는 살생의 무표업이 획득된다.
28)
업도의 가행과 근본과 후기는, 이를테면 어떤 한 행위의 예비적 행위(혹은 준비단계)ㆍ본격적 행위ㆍ본격적 행위에 따르는 부수적 행위를 말한다.(후설)
29)
근본업도의 제2찰나의 무표를 시발로하여 생겨난 것을 일컬어 ‘후기’라고 하기 때문에 무표업은 결정코 존재하는 것이다.
30)
이를테면 살생의 근본업도를 성취하고 나서 다시 이와 유사한 때리고 자르는 등의 업을 짓는 경우.
31)
이는 『구사론』(제16권, 고려장27,p.573상; 대정장29,p.85상; 권오민 역,p.737) 상에서의 정설이다.
32)
짐승 등을 희생(犧牲)하여 산신 등에 대해 제사지내는 것을 말한다.
33)
친구 사이를 이간질하여 자기가 살해하려는 원적을 돕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34)
‘목숨이 끊어지는 찰나’는 이미 목숨이 이미 끊어진 상태(즉 死有의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후술), 앞서 말한 ‘양의 목숨이 바로 끊어지는 찰나의 표업과 무표업을 바로 살생의 근본업도라고 한다’고 진술은 유부의 종의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35)
유부에서는 능살자(能殺者)가 먼저 죽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소살자(所殺者)와 동시에 죽을 때에도 능살자는 살생의 업도를 성취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본권 後說) 그런데 만약 능살자와 소살자가 동시에 죽었다고 할 경우, 상대방의 목숨이 끊어지는 찰나에 근본업도를 성취한다고 하면, 이미 죽은 능살자가 살생의 업도를 성취한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36)
소살자(所殺者)가 바로 죽는 순간의 능살자(能殺者)의 표업은 가행의 표업일 뿐 업도의 표업이 아니다. 즉 그것은 근본업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원인을 일시 결과(업도)의 명칭으로 시설하였다는 뜻이다.
37)
목숨을 마치는 상태[命終位]란 이미 목숨이 끊어진 상태가 아니라 여전히 목숨이 붙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때의 표업은 업도가 아니라 가행이라는 뜻이다.
38)
이런 까닭에 살생의 근본업도를 “가행의 표업에 따라 죽임을 당하는 자(예컨대 양)의 목숨이 바로 끊어지는 찰나의 표업과 무표업”이라고 정의하였던 것이다.
39)
『발지론』 제11권(한글대장경176,p.247).
40)
『대비비사론』 제118권(대정장27,p.616하; 한글대장경122,p.429). “여기서는 살생[업도]가 아닌 것을 살생[업도]라는 말로 설하고, 가행이 아닌 것을 가행이라는 말로 설하였으니, 이를테면 살생의 가행을 역시 살생[업도]라고 말하였으며, 살생의 후기도 역시 가행이라 말하였으니, 이것을 여기서의 약비바사(略毘婆沙)라고 한다.”
41)
비바사사는 앞서 『발지론』의 문장을 해석하여 ‘후기를 가행이라는 말로 설하였다’고 하였지만, 여기서 다시 ‘아울러 근본도 가행이라는 말로 설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양설은 서로 모순되는 것 같지만 비바사사에 의하는 한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을 죽이고자 하여 죽였음에도 죽은 줄 모르고 계속 타격하였을 경우, 이는 후기인가 가행인가? 그리고 죽는 순간의 타격은 근본인가, 가행인가? 따라서 후기를 가행이라는 말로 설할 수도 있고(『발지론』의 경우), 근본 역시 가행이라는 말로 설할 수도 있다(비바사사의 경우)는 것이다.
42)
『잡아함경』 제37권, 제1049경(대정장2,p.274중). 이하 탐ㆍ진ㆍ치 3불선근에 근거한 10업도의 차별에 대해 분별한다.
43)
다시 말해 ‘모든 업도가 다 탐ㆍ진ㆍ치라는 세 가지 불선근에 의해 성취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뜻이다.
44)
다시 말해 ‘모든 업도가 3불선근에 의해 성취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행의 경우는 모두 3불선근에 의해 성취된다’는 뜻이다.
45)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양 등을 희생하는 관습을 맹신하여 그것을 제사의 참된 법이라고 여겨 살생하는 것을 말한다.
46)
원문은 염습(染習)의 마음이나 『구사론』 제16권(고려장27,p.574상; 대정장29,p.85하; 권오민 역,p.742)에 따라 ‘염착의 마음’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47)
『구사석론』(제12권, 대정장29,p.241중)에 의하면, 빈나가외도(頻那柯外道).
48)
『구사석론』(앞의 책)에서는 “구사바(瞿娑婆) 제사를 행하는 중에 어떤 여인은 물을 마시고 풀을 씹으니, 이러한 이들은 그의 부모[親]에 집착하고, 혹은 고모나 이모 자매 혹은 동성(同姓)에 집착한다”로 번역하고 있다.
49)
앞서 유여사(有餘師)는 “탐(貪)ㆍ진(瞋)ㆍ사견(邪見)의 경우는 잠시 현재전할 때를 설하여 근본업도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가행과 후기의 차별이 없다”고 하였지만(주31 참조), 유부에서는 여기에도 역시 가행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럴 경우 탐 등의 가행이 어떻게 탐 등의 불선근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는가? 하는 뜻이다.
50)
혹 어느 때는 탐욕에 의해, 혹은 진에에 의해, 혹은 사견에 의해 탐욕 등의 업도가 생겨나기 때문에, 탐ㆍ진ㆍ치라는 업도의 가행도 세 불선근으로부터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51)
다시 말해 불선의 가행을 떠날 때가 바로 선의 가행이며, 불선의 근본을 떠나는 것이 바로 선의 근본이며, 불선의 후기를 떠나는 것이 바로 선의 후기이다.
52)
이상 일백삼갈마(혹은 白四羯磨). 이는 수계의 작법으로, 수계할 때 갈마사(羯磨師)가 참석한 대중들에게 아무개에게 수계한다는 사실을 고한 다음, 수계의 가부를 세 번 묻는 형식. 즉 세 번째 작법을 마칠 때 선업도의 근본이 생겨나게 된다.
53)
‘네 가지 의지처’란, 항상 걸식하고, 나무ㆍ숲ㆍ동굴 등에서만 지내며, 분소의(糞掃衣)만을 입고, 진기약(陳棄藥) 만을 사용하는 것으로, 비구계 수지 이후의 의식주에 관계된 네 가지 생활양식을 말한다.
54)
여기서 ‘구경(究竟)’이라 함은 성판(成辦) 혹은 종료의 뜻으로, 모든 악업도가 탐 등의 3불선근에 의해 완전하게 성취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주44) 참조.
55)
미움이 지극하면 사려가 없어 앞뒤를 되돌아보지 않는다. 이에 반해 탐의 경우는 사려가 섞이어 되돌아봄이 있다.
56)
만약 탐ㆍ진 등의 업도가 치근(癡根)으로 말미암아 구경에 이른다고 한다면, 어떠한 악업도에도 ‘치’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들도 모두 치근으로 말미암아 구경에 이른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57)
즉 첫째 품류인 살생ㆍ추악어(惡口)ㆍ진에는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며, 두 번째 품류인 불여취(혹은 투도)ㆍ욕사행(혹은 사음)ㆍ탐욕은 다른 유정이 갖고 있는 자구(資具, 부녀자도 여기에 포함됨)를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며, 세 번째 품류인 사견은 명색(名色) 즉 5온 상에서 일어나며, 네 번째 품류인 허광어(혹은 망어)ㆍ이간어(혹은 兩舌)ㆍ잡예어(혹은 綺語)는 말, 즉 명(名)ㆍ구(句)ㆍ문신(文身) 상에서 일어난다.(후술)
58)
요컨대 살생ㆍ추악어ㆍ진에는 다만 외적 사물이 아니라 오로지 유정을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업도이다.
59)
그러나 추악어(악구, 남을 성나게 하는 말)의 경우, 비록 명신 등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일지라도 오로지 외적인 것(즉 말)에만 의지하여 성취되는 것이라고는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또한 추악어를 내뱉을 때에는 어떠한 가식의 말도 하지 않기 때문에 ‘명신 등에 근거하여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고 ‘유정처에 근거하여 일어난다’고 하였다.(『현종론』 제22권 참조)
60)
즉 죽인 자가 죽임을 당한 자와 동시에 죽었을 경우 가행의 근거가 되었던 몸이 이미 단멸하고 다른 소의신(중유)이 생겨났기 때문에 살생의 업도를 성취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살생의 가행을 일으킨 몸과 그 결과를 원만하게 하는 몸 역시 이미 다른 것이기 때문에 물음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이다.
61)
즉 동일한 상속에 근거하여 가행을 일으킨 자가 바로 결과를 원만하게 하는 자라고 하는 경우, 능히 죽인 자 역시 죽었을 때와 살아있을 때의 상속은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소의신이 생겨났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자보다 먼저 죽었을 때에는 죄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논증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62)
죽임을 당한 자가 지금은 부모가 아니지만, 오로지 동일한 상속이라 할 경우 전생이나 후생에 부모였거나 부모일 수 있기 때문에 역시 무간죄를 획득한다고 말해야 한다는 뜻이다.
제42권
1)
이는 살생업도의 세 번째 조건인 ‘다른 유정이라는 생각[想]’에 대한 하나의 예이다. 즉 살생업도는 바로 죽이려고 하는 유정을 자각해야 성취되지만, 설사 불명료한 경우일지라도 죽여야겠다고 결심하고 착오 없이 죽이면 업도를 성취하게 된다는 말이다.
2)
이 난문은, 법보의 『구사론소』(제16권)에 의하면 정량부(正量部)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즉 정량부에 의하면 일련의 행위는 찰나에 이루어지지 않으며, 그 소멸 역시 찰나멸하지 않고 잠주멸(暫住滅)하기 때문에(이를 ‘行動說’이라고 함) 살생의 업도는 성취될 수 있지만, 유부에 의하는 한 행위는 이루어지는 순간 찰나멸하기 때문에 다 찰나로 이루어지는 살생의 업도는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이다.(본론 제33권; 제34권 참조) 혹은 유부에 의하는 한, 목숨 또한 찰나에 생멸하기 때문에 살생 자체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이다.
3)
등불이나 요령소리도 찰나 찰나 생멸하지만, 바람이나 손에 의해 소멸하듯이(공명하는 요령에 손을 대면 소리는 그친다) 목숨 역시 능히 죽이는 자에 의해 끊어진다. 『구사론』 제16권(고려장27,p.575중; 대정장29,p.86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749)에 의하면, 살생에는 식풍(息風) 즉 호흡을 끊어 상속하지 않게 하는 것과 생(生) 즉 목숨을 끊어 상속하지 않게 하는 것 등 두 가지 유형을 설하고 있는데, 본론에서는 후자에 근거하고 있다.
4)
여기서 ‘목숨과 체온’ 등으로 설한 가타란,
5)
원문은 ‘有命身名有命者’이지만, 『구사론』(앞의 책)에 따라 ‘有根身名有命者’로 고쳐 번역하였다.
6)
죽은 비구의 소유물은 다른 이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기 때문에 ‘회전물(廻轉物)’이라고 하는데, 그 소유자가 이미 갈마의식을 마쳤다면 결계(結界, sīma 즉 교구) 내의 스님들에 대해 죄를 짓게 되지만, 아직 갈마를 마치지 않았다면 일체의 승가, 즉 사방승가(四方僧伽)에 대해 죄를 짓게 된다.
7)
구역에서는 하도(下道), 즉 항문과 같은 곳으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8)
제다(caitya)는 탑묘(塔廟) 즉 사당을 말하고, 형처(abhyavakāśa)는 출가자가 수도하는 고요한 곳 즉 정적처(寂靜處)를 말한다.
9)
임신하고 있을 때는 태아에 손상을 주기 때문이며, 젖을 먹이고 있을 때는 젖이 줄어들기 때문이며, 재계를 받는 중에는 그것이 근주계의 한가지여서 계를 어기게 되기 때문이다.
10)
이는 환언하면 처첩이 지아비의 허락도 받지 않고 제멋대로 재계를 받고 있을 때에는 범하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11)
다른 이의 부인에 대해 또 다른 어떤 이의 부인이라고 생각하고서 비범행을 행하였을지라도, 그것은 결국 다른 이의 부인에 대해 사음의 가행을 일으킨 것이고 아울러 가행에 따른 업도를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12)
가행의 대상과 업도가 구경에 이를 때 현전하는 대상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즉 a를 죽이려고 가행을 일으켰으나 착오로 b를 죽였을 경우 살생의 업도를 성취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의 부인인 a를 범하려 하였으나 착오로 b를 범하였을 경우에도 욕사행의 업도를 성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b에 대한 고의적 의지의 발로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13)
즉 비구니를 범할 때 욕사행의 업도를 성취하게 되는 것은, ‘그이가 국왕에 의해 수호되기 때문’이 아니라 재계를 지닌 처첩의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14)
이를테면 보지 않은 것임에도 염오심에서 달리 생각하여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
15)
이를테면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할 경우, 그 때 화자의 말은 세 찰나에 걸쳐 이루어지지만 허광어의 근본업도는 최후찰나인 ‘다’에서 성취된다.
16)
이는 “앞에서 말한 ‘뜻을 이해하였다’고 함은 결정코 어느 때에 근거한 것인가? 이미 듣고 나서 올바로 이해한 것[正解]에 근거하여 ‘이해하였다’고 한 것인가, 아니면 바로 들으면서 능히 이해한 것[能解]에 근거하여 ‘이해하였다’고 한 것인가?”(『구사론』 제16권, 고려장27,p.576중; 대정장29,p.87중; 권오민 역,p.755)에 대한 해명이다.
17)
여기서의 논의는 사실상 ‘말의 뜻을 이해한다고 함은 어느 순간에 이루어지는가? 듣고 난 다음인가, 들으면서인가?’에 대한 것이다. 만약 전자라면 그 때에는 이미 어표와 이식(耳識)이 소멸하였기 때문에 업도는 오로지 무표일 뿐이며, 말이 나타내는 뜻은 제6의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무표의 업도만이 성취되는 과실은 없겠지만 다 듣지 않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아직 의식(意識)에 의해 올바로 분별하지 못하였다면 어떻게 그것을 ‘능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올바른 이해’는 그 말을 다 듣고 난 다음 제6의식에 의해 성취되지만(그럴 경우 그것은 다만 허광어의 무표업일 뿐이다), ‘속아 넘어 간 자의 이해’는 이해를 장애하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들으면서 이식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 본송에서 이해의 갈래로서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에 대해 분별하고 있는 것이다.
18)
이는 『장아함경』 제8권 「중집경(衆集經)」(대정장1,p.50중)에서 설해진 것으로, 앞의 여덟 가지 허광어는 4불성어(不聖語), 뒤의 여덟 가지는 4성어이다. 이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 제171권(한글대장경124,p.479이하)에서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다.
19)
즉 안식(眼識)에 의해 증득된 것을 ‘보여진 것[所見,dṛṣṭa]’이라 하고, 이식(耳識)에 의해 증득된 것을 ‘들려진 것[所聞, śruta]’이라 하며, 의식(意識)에 의해 증득된 것을 ‘인식된 것[所知, vijñāta]’이라 하며, 그 밖의 비(鼻)ㆍ설(舌)ㆍ신식(身識)에 의해 증득된 것을 ‘알려진 것[所覺, mata]’이라고 한다. 이 설은 『구사론』(고려장27,p.576하; 대정장29,p.87중; 권오민 역,p.757) 상에서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로 전해지고 있다.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 제121권(한글대장경122,p.496)을 참조할 것.
20)
이에 반해 『구사론』(같은 책)에서는 “향ㆍ미ㆍ촉 세 가지는 무기성이기 때문에(『바사』의 세우설), 죽어 감각이 없는 상태와 같기 때문에(『바사』이 대덕설) 다 같이 ‘알려진 것’이라고 이름하였다”고 설하고 있다.
21)
아뢰야(ālaya)는 애착의 뜻으로 집장(執藏)이라 번역되며, 니연저(nkānti, 혹은 niyati)는 집착의 뜻으로 집취(執取)로 번역된다.
22)
『잡아함경』 제13권 제312경(대정장2,p.89하). 여기서 대론자 대모(大母)는 마라가구(摩羅迦舅, Mālunkyā-putta).
23)
향ㆍ미ㆍ촉경은 ‘보여지는 것’ ‘들려지는 것’ 의식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향 등의 세 가지 경계대상을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경에서는 그러한 세 대상에 대해 설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뜻이다.
24)
즉 이 경에서 부처님이 대모에게 한 말씀의 참 뜻은 6경에 대한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를 다만 그 명칭대로 이해해야 하지 그것을 확대 해석하여 각기 학술적인 개념으로 정의하여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즉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경험된 것, 다시 말해 ‘보여진 것’ ‘들려진 것’ ‘알려지고 인식된 것’으로, 경험되지 않은 초경험적 사실(예컨대 자재신)에 대해서는 욕망을 일으키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탐착하는 것은 마치 토끼 뿔에 대해 집착하는 것과 같은 쓸데없는 일이며, 이에 관한 논의 또한 다만 희론일 뿐이라는 것이다.
25)
이상 『구사론』 제16권(고려장27,p.577상; 대정장29,p.79하; 권오민 역,p.758-759). 여기서 유여사는 보광에 의하면 경부(經部), 법보에 의하면 경부 여사(餘師)이다. 즉 범주론적 실재론에 입각한 유부에서는 경에서 설한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를 각각 실재하는 주관(6식, 사실 정통 유부는 根見家이므로 6근이겠으나 요별 판단은 識의 작용이므로 6식임)과 대상과의 관계로 규정하여 안식에 의해 알려진 색경을 ‘보여진 것’, 이식에 의해 알려진 성경을 ‘들려진 것’, 제6의식에 의해 알려진 법경을 ‘인식된 것’, 그리고 비ㆍ설ㆍ신식에 의해 알려진 향 등의 세 경계를 ‘알려진 것’이라 하였다. 이에 반해 경량부에서는 인식방법(pramāṇa,量)에 따른 인식의 종류로 이해하고 있다. 즉 직접지각(현량)으로서 5근과 제6 의근에 의한 지식은 무분별지각과 유분별지각이라 할 만한 ‘보여진 것(所見)’과 ‘인식된 것(所知)’, 증언(성언량)에 의한 지식은 ‘들려진 것(所聞)’, 추리(비량)에 의한 지식은 ‘알려진 것(所覺)’. 그럴 때 ‘각’은 반드시 향ㆍ미ㆍ촉의 세 가지 대상에 한정되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26)
여기서 고사(古師)는 『구사론』(앞의 책)에서 ‘선대(先代) 궤범사(軌範師)’로, 보광에 의하면 학유가론자(學瑜伽論者), 법보에 의하면 경부사(經部師). 그의 설은 다음과 같다. “안근에 의해 현견(現見)되는 것을 일컬어 ‘보여진 것’이라 하고, 다른 이로부터 전해들은 것을 일컬어 ‘들려진 것’이라고 하며, 스스로 자기 마음을 움직여 구상[思構]한 온갖 것을 일컬어 ‘알려진 것[所覺]’이라고 하며, 스스로 내적으로 감수한 바와 아울러 스스로 증득한 바를 일컬어 ‘인식된 것[所知]’이라고 한다.” 즉 현재찰나 안근에 의해 현견된 것(색경)을 ‘보여진 것’, 이근의 경계와 타인으로부터 전해들은 것(聲境)을 ‘들려진 것’, 스스로 마음을 움직여 사유하여 아는 것을 ‘알려진 것’, 내적 직관 내지 자증(自證)하는 것을 ‘인식된 것’이라고 하였다.
27)
즉 경에서는 분명 ‘보여진 것’에 대해서는 눈[眼根]이 본 것, ‘들려진 것’에 대해서는 귀[耳根]가 들은 것, ‘인식된 것’에 대해서는 마음[意根]이 인식한 것이라 하였으며, ‘알려진 것’의 경우 이러한 말만 설하였을 뿐 그 내용에 대해서는 설하고 있지 않지만, 그것은 이치상 당연히 나머지 세 가지 근(비ㆍ설ㆍ신근)에 의해 파악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28)
『잡아함경』 제13권 제312경(대정장2,p.90상중). 일친(日親)은 『잡아함경』에서 일종존(日種尊) 즉 석가종족의 세존을 말한다. 참고로 원문의 제1구는 ‘見色已失念 妄增愛相者 心便受愛染 及住於耽著.’이지만, 『잡아함경』에서는 제1구는 ‘若眼已見色 而失於正念 則於所見色 而取愛念相’이다.
29)
즉 경의 뜻은 ‘색을 보고서 실념하여 보여진 것에 대해 탐착하면 애착이 일어난다’는 것으로, 색이 ‘보여진 것’이라고 분명하게 분별하였음에도 유여사는 5근이 직접 지각한[現證] 색 등의 5경을 ‘보여진 것’이라고 하였다.
30)
앞서 유여사는 5근의 경계대상으로서 5근이 직접 지각한 것이면 ‘보여진 것’, 다른 이가 설한 것이면 ‘들려진 것’, 스스로의 마음으로 헤아려 인허(認許)한 것이면 ‘알려진 것’, 의근에 의해 직접 지각된 것이면 ‘이해된 것’이라고 하였으며, 여섯 번째 경계대상인 법경의 경우 ‘견’을 제외한 세 가지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31)
여기서 ‘뒤의 논사[後師]’는 앞서 경주가 다시 인용한 고사(古師). 주26) 참조.
32)
즉 앞서 고사(古師)는 스스로 자기 마음을 움직여 구상[思構]한 것을 ‘알려진 것[所覺]’, 스스로 내적으로 감수한 바와 아울러 스스로 증득한 바를 일컬어 ‘인식된 것[所知]’이라고 하여(주26 참조) ‘알려진 것’이 ‘인식된 것’보다 선행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는 뜻이다.
33)
이상 ‘보지 않은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등의 허광어를 논의하면서 파생된 ‘견(見)’ 등에 대한 방론을 마치고, 계속하여 말에 의한 것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허광어에 대해 논의한다. 즉 허광어는 일반적으로 생각한 것과 다른 말을 발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인데, 그것을 몸으로 나타내어 성취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34)
『대비바사론』 제118권末(한글대장경122,p.434). 선인이 분을 품고 저주할 때는 몸을 움직이지도, 말을 발하지도 않고서 살생을 행할 수 있다. 그리고 ‘업을 장양할 때’란 포살(布薩,poṣadha, upavasatha)을 행할 때를 말하는 것으로, 『구사론』 제16권(고려장27,p.577중; 대정장29,p.88상, 권오민 역,p760)에서는 ‘포쇄타(布灑他)’로 번역하고 있다. 포살은 우파바소타(優波婆素陀)ㆍ우파바사(優波婆沙)ㆍ포사타(布沙他) 등으로 음역되며, 공주(共住)ㆍ선숙(善宿)ㆍ장양(長養)ㆍ정주(淨住) 등으로 의역된다. 즉 포살 때 죄가 있음에도 침묵하여 참회하지 않으면 몸을 움직이지도 않고 말을 발하지도 않고 거짓말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35)
『구사론』 제16권(앞의 책). 욕계의 무표업은 반드시 표업에 수반되는 것인데, 어떻게 신(身)ㆍ어(語)의 표업을 갖지 않는 선인의 분심(憤心)과 포살 때의 침묵이 업도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힐난이다.
36)
선인이 신업도 어업도 일으키지 않고서 다만 분심(憤心)만으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 경주의 힐난처럼 거기에 표업도 무표업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살생죄 또한 성립하지 않아야 하지만, 그것은 분명 살생죄이며, 살생죄인 한 그것으로도 업도를 성취한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경주는 이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37)
다시 말해 ‘신ㆍ어의 두 갈래에 근거하여 [악한] 의지를 일으키지 않고, 죽이고 속이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업도가 성취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며’.
38)
신체적 동작을 행하지 않고 말을 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의사 표시이기 때문에 부동(不動)과 침묵 역시 일종의 어표업이라고 볼 수 있다는 뜻이다.
39)
교진여 등 다섯 비구는 어표업에 근거하여 무표(별해탈율의, 즉 구족계)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견도를 증득함으로써 획득하였다.(본론 제37권 ‘세 종류 율의의 획득조건’ 참조)
40)
선인은 마음에 분함을 품을 때 그의 행동거지와 말투가 변하며, 저주할 때 몸을 움직이고 말하게 되는데, 이 또한 살생의 업도를 낳게 한 표업의 일종이라는 뜻이다.
41)
이간어의 업도는 염오심에서, 자신이 허물어뜨리려고 하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해, 착오 없이, 허물어뜨리는 말을 발하고, 상대방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할 때 성취된다.
42)
따라서 추악어의 업도는 염오심에서, 자신이 헐뜯고 욕하려고 하는 바로 그 사람에 대해 착오 없이, 비애(非愛)의 말을 발하고, 상대방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할 때 비로소 성취된다.
43)
본송 제1구 ‘염오심에서 남을 허물어뜨리려는 말’에서의 ‘말’을 제4구 ‘온갖 더러움이 잡예어이다.(諸染雜穢語)’에도 적용시켜 ‘온갖 더러운 말이 잡예어이다’로 이해해야 한다는 뜻이다.(본 번역에서는 편의상 이미 적용시켜 번역하였다) 곧 잡예어의 업도는 염오심에 의해, 말을 발함으로서 성취되기 때문에, 허광어ㆍ이간어ㆍ추악어도 역시 잡예어가 될 수 있다.
44)
『잡아함경』 제29권 제803경(대정장2,p.206상). 여기서는 안나반나념(安那般那念)을 밝히면서 이 같은 식념관(息念觀)에서 세간의 탐애를 끊고 욕(欲)을 떠나 청정하며--온갖 의혹에서 벗어나 선법에 마음의 결정을 획득하면 5개(蓋,欲貪ㆍ瞋恚ㆍ惛眠ㆍ掉悔ㆍ疑)를 멀리할 수 있다고 하였다.
45)
본론 제41권 ‘선ㆍ악의 10업도와 묘ㆍ악행의 관계’ 참조.
46)
전륜왕이 통치하는 시대와 북구로주에서 일으킨 욕탐은 다른 이의 재물에 대한 거친 욕탐이 아니기 때문에 탐업도를 성취하지 않는다.
47)
이를테면 『잡아함경』 제37권 제1039경(대정장2,p.271하); 『중아함경』 제3권 「사경(思經)」(대정장1,p.437하) 등에서는 인과를 부정하는 등의 열한 가지 사견을 언급하고 있는데, 본송에서는 선ㆍ악업을 부정하는 사견만을 언급하였고, ‘등’라는 말속에 그 밖의 나머지 사견, 이를테면 인과업보와 성자 등을 부정하는 사견이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다. 계경에서 설한 완전한 문구는 이러하다. “시여도 없고, 제사도 없고, 묘행도 없고, 악행도 없고, 묘ㆍ악행업의 이숙과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미도 없고, 아비도 없고, 화생(化生)의 유정도 없고, 세간에 사문 혹은 바라문, 아라한도 없다.” 이 같은 견해는 육사외도 중의 아지타 케사캄발린(Ajita Kesakambalin)이나 막칼리 고살라(Makhali Gosāla)의 주장으로, 이러한 경향의 도덕부정론자를 로카야타(Lokāyata) 즉 순세파(順世派)라고 한다.
48)
탐ㆍ진ㆍ사견의 세 가지는 그 자체 업(즉 思業)이 아니지만, 사업의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다시 말해 사업에 구체적인 방향을 부여하는 의처(依處) 혹은 길[道]이 된다는 점에서 ‘업의 도’ 즉 업도라고 일컬은 것이다. 이에 대해 비유자는 ‘탐’ 등의 세 가지는 바로 의업이라고 주장한다. 즉 사(思) 등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부에 의하는 한, ‘탐’ 등의 법은 ‘사’의 한 유형으로서, 그것들은 모두 마음의 한 상태[分位]일 뿐이기 때문이다.
49)
신(身)의 세 가지와 어(語)의 네 가지 업도는 바로 사(思)가 작용하는 의처(依處)가 되기 때문에 또한 업의 길이기도 하다.
50)
원문은 ‘具顯業道業業道業’이지만, 『현종론』(제22권)에 따라 ‘具顯業道業業道義’로 고쳐 번역하였다.
51)
여기서 세간의 『기론』은 『구사론』 제17권(고려장27,p.78중; 대정장29,p.88하; 권오민 역,p.766)에서는 세전(世典)으로, 파니니(Pāṇini)의 문법(i.2.64). 즉 ‘복합어가 다를 때조차도 단일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함. “오로지 업의 길인 뒤의 세 가지와, 업이면서 업의 길인 앞의 일곱 가지를 다같이 ‘업도’라고 하는 하나의 명칭으로 설정한 것은, 종류는 달라도 ‘업도’라는 명칭이 동일하기 때문으로, 세간에는 많은 종류의 마차가 있지만 그것을 모두 마차라고 이름하는 것과 같다.”(『구사론寶疏』 제17권)
52)
즉 신ㆍ어업에는 업으로서 신ㆍ어업과 [사]업의 길로서의 신ㆍ어업 두 가지가 있지만, 업도라는 명칭으로 통일하였다는 뜻이다.
53)
다시 말해 “이살생(離殺生) 등의 일곱 가지와 무탐(無貪) 등의 세 가지를 업도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54)
주45); 본론 제41권 ‘선ㆍ악의 10업도와 묘ㆍ악행의 관계’ 참조.
55)
악업도의 근본이 증가하면 안팎으로 도덕적으로 악한 현상이 증가하고 좋은 현상은 감소하며, 악업도의 근본이 감소하면 그 반대이이지만, 가행과 후기의 경우 내외의 현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에 업도라고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56)
상품의 원만한 사견만이 능히 단선근(斷善根)의 원인이라면, 탐ㆍ진ㆍ치의 불선근으로서 선근을 끊는 것과 이욕할 때 제일 먼저 끊어지는 것이 상품 즉 증상(增上)의 불선근이라고 한 『발지론』 제2권(대정장26,p.925상;한글대장경176,p.38)의 논설과 상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난문이다.
57)
‘사(vastu)’를 원인으로 해석한 것에 대해서는 본론 제17권에서 논설한 ‘무사법(無事法)에서의 사의 의미’를 참조할 것.
58)
즉 마을은 불에 의해 태워졌지만 그 불의 원인은 도적이기 때문에 도적이 마을을 태웠다고 하듯이, 선근은 상품의 사견에 의해 끊어지지만 사견의 원인이 불선근이기 때문에 『발지론』에서 그같이 설하였다는 뜻이다.
59)
즉 『시설족론』 중에서 사견에 의해 3계의 선근을 끊게 된다고 한 논설은, 그것에 의해서는 욕계 생득선 만이 끊어진다고 하는 지금의 주장과는 상위하지 않는가? 하는 힐난이다. 『대비바사론』 제35권(대정장27,p.183상; 한글대장경119,p.239)에서는 『시설족론』의 ‘만일 개미알을 해치고서 조금도 뉘우치는 마음이 없으면 그는 상계의 선을 끊은 것이다’는 논설을 인용하고 있다.
60)
즉 단선근자에게는 상2계의 선근이 일찍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비달마 본론에서의 ‘끊어진다’고 함은 더욱 성취하기 어렵게 된다는 뜻에 근거하여 그렇게 설하였다는 것이다.
61)
여기서 가행의 선근이란 후천적 노력에 의해 획득된 문(聞)ㆍ사(思)ㆍ수소성(修所成)의 선근으로, 이것은 단선근의 가행위에서 이미 끊어졌기 때문이다.
62)
자계(자신이 속한 세계)ㆍ타계를 대상으로 하여 일으킨 사견을 자계연ㆍ타계연이라고 하고, 유루인 고ㆍ집제와 무루인 멸ㆍ도제에 미혹하여 일으킨 사견을 유루연과 무루연이라고 한다.
63)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정의(正義)에 따르면 유루연ㆍ자계연 뿐만 아니라 무루연ㆍ타계연의 사견도 역시 단선근의 힘을 갖고 있다. 즉 타계연과 무루연의 사견은 비록 소연에 따라 증성(增盛)하지는 않을지라도 동류인과 변행인에 따라 증성하여 강력한 사견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여사(有餘師)는 무간도와 해탈도에 의해 번뇌가 끊어지는 것처럼 선근도 인과를 비방하는 두 가지 사견에 의해 끊어진다고 하였으며, 다른 유여사는 “선근을 끊는 사견은 오로지 유루연과 자계연으로, 타계연과 무루연의 사견은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에 그것과 상응하는 것에 따라 증성할 뿐 소연의 경계에 따라서는 증성하지 않는다.”고 하였다.(『구사론』 제17권,고려장27,p.578하-579상; 대정장29,p.89상; 권오민 역,p.769)
64)
9품의 선근은 수소단의 번뇌와 마찬가지로 점진적으로 끊어지는 것으로, 하하품의 사견에 의해 상상품의 선근이 끊어지며, 나아가 상상품의 사견에 의해 하하품의 선근이 끊어진다.
65)
여기서 본론은 『발지론』 제2권(한글대장경176,p.38). 즉 본론에서 이미 ‘최후 운운’하였으므로 일품(一品)에 의해 단박에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66)
상동. 즉 ‘상품의 불선근이 능히 선근을 끊는다’고 함은 일품 단(斷)의 의미로(다시 말해 단박에 끊어진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뜻이다.
67)
『구사론』 제17권(고려장27,579상; 대정장29,p.89상; 권오민 역,p.771)에서는 이를 여시설자(如是說者)의 설로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만약 그러한 율의가 바로 이러한 마음의 품류에 의해 등기된 결과라고 한다면 이러한 품류의 마음이 끊어질 때 그러한 율의를 버리게 되니, 결과와 원인의 품류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율의가 이러한 9품의 선근에 의해 인기된 것이라면 선근과 율의는 동시에 버려진다는 것이다.
68)
악취의 염오혜는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선근을 끊을 수 없으며(불염오혜 역시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에 들 수 없다), 천취의 경우 선악의 이숙과가 바로 나타나므로 인과를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선근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69)
남섬부주에서는 특히 심(尋)ㆍ사(伺)가 강하기 때문이다.
70)
『발지론』 제15권(앞의 책,p.352). 즉 점차로 명종하는 상태에서 22근 중 안ㆍ이ㆍ비ㆍ설의 4근과 여ㆍ남근은 이미 버렸으며, 단선근자일 경우 신(信) 등의 5근과 3무루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오로지 신근(身根)과 의근과 명근 그리고 5수근만을 성취하는 것이다. 곧 아비달마 본론에서 ‘동승신주(비제하주)와 서우화주(구타니주)도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으므로 그곳에도 역시 단선근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71)
『발지론』 제16권(앞의 책,p.370); 『대비바사론』 제156권(한글대장경124,p.141). 즉 여근을 성취한 이는 여(女)ㆍ신(身)ㆍ명(命)ㆍ의근(意根)과 낙(樂)ㆍ고(苦)ㆍ희(喜)ㆍ사근(捨根)을 성취하며, 그 밖의 신(信) 등의 5근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바로 여근의 몸에서도 선근이 끊어지는 경우가 있다는 증거라는 뜻이다.
72)
여기서 견행자란 자신의 의견이 맹리(猛利)한 이를 말하고, 애행자란 의견이 확실하지 않고 우유부단한 감정적인 이를 말한다.
73)
다시 말해 남ㆍ여를 제외한 선체(성불구자) 등이 선근을 끊지 못하는 것은 애행자와 동일한 유형의 인간이기 때문이며, 또한 애행자나 선체와 같은 유형의 인간은 악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염오혜와 불염오혜가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선근을 끊을 수 없다.
74)
본론 제12권 ‘득과 비득-총설’ 참조.
75)
즉 선근을 끊는 것(斷善根)은 인과부정의 사견에 의해 생겨났기 때문에, 선근을 잇는 것(續善根)은 ‘인과가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疑], ‘존재한다’고 확신[有見]할 때 성취된다.
76)
아비를 죽이고, 어미를 죽이고, 아라한을 죽이고, 불신(佛身)에 피를 내고, 승가의 화합을 깨트리는 5역죄(또는 무간죄) 중의 한 가지 이상을 범한 이는 무간업을 받기 때문에 현신에 선근이 속기(續起)하지 않는다.
77)
『중아함경』 제27권 「아노파경(阿奴波經)」(대정장1,p.600).
78)
과거세에 익힌 것을 원인(즉 동류인)으로 하는 사견이 선근을 끊었을 경우, 내세 지옥에서 죽으려고 할 때 비로소 깨닫게 되고, 사교(邪敎)와 같은 외적 조건에 의해 선근이 끊어졌을 경우 지옥에 태어나려고 할 때, 다시 말해 중유로 존재할 때 비로소 깨달아 선근을 잇게 된다. 왜냐하면 내적 원인의 의한 사견은 견고하여 쉽게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79)
다시 말해 ‘의요가 허물어졌다’고 함은 마음속으로 인과를 부정하는 것을 말하며, ‘가행이 허물어졌다’고 함은 그러한 생각이 실제로 이행된 것을 말한다.
80)
의요와 가행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견’은 내적 의식판단이며, ‘계’는 외적인 형식이다. 따라서 마음속으로는 이미 사견을 가졌을 지라고 계를 지키고 있을 경우 능히 현세에 선근을 이을 수 있지만, 두 가지가 모두 허물어졌을 경우에는 소의신이 괴멸한 후 선근을 잇게 된다.
81)
사정취에 떨어지는 자란 역죄를 지은 자를 말하는 것으로, 제1구는 선근을 끊었을지라도 사정취에는 떨어지지 않는 경우로서, 인과를 부정하면서 실제로는 역죄를 짓지 않은 육사외도의 일인인 포랄나 즉 푸라나 카샤파(Purāṇa kāśyapa) 등이 그러하다. 제2구는 선근은 끊지 않았을지라도 사정취에 떨어지는 경우로서, 부왕을 시해한 후 부처님께 귀의하여 인과의 도리를 믿은 미생원왕(아자세왕) 등이 그러하다. 제3구는 선근도 끊고 사정취에도 떨어지는 경우로서, 승가를 파괴한 제바달다(천수) 등이 그러하다. 제4구 선근을 끊지 않았고 사정취에도 떨어지지 않는 경우로서 거짓말하는 자 등이 그러하다.
82)
탐ㆍ진ㆍ사견 중의 하나가 현기할 때와, 일찍이 사자를 보내어 욕사행을 제외한(욕사행에는 가행이 없기 때문에 제외하는 것임) 여섯 가지 신ㆍ어업 중의 한 가지를 짓게 하여 업도가 구경에 이르렀을 때(즉 먼저 가행으로 악업을 지어 그것이 구경에 이르렀을 때) 탐 등의 염오심이 일어나지 않았을 경우, 한 가지 업도만이 ‘사’와 함께 일어난다.
83)
『구사론』 제17권(고려장27,p.580상; 대정장29,p.89하; 권오민 역,p.775). “혹은 일찍이 가행으로서 악한 색업을 짓고 불염오심이 현전하였을 때, 그(가행으로 지은 색업) 중의 하나가 구경에 이르는 경우를 말한다.”
84)
상동.
85)
남을 보내어 살생하였을 경우라도 그것이 성취될 때 탐 등이 일어났다면, 두 가지 업도(살생과 탐)이 사(思)와 구전한다.
86)
『구사론』 제17권(고려장27,p.580상; 대정장29,p.89하; 권오민 역,p.775).
87)
탐을 일으킬 때 잡예어가 성취된다고 하는 경우, 이는 ‘사’와 함께 탐ㆍ사견ㆍ잡예어의 세 업도가 구전하는 경우이다.
88)
원문은 ‘他婢等住船等中, 犯邪行時, 盜離本處.’ 다른 이의 여종과 배를 타고 나가 욕사행을 범하는 경우, 욕사행과 투도의 두 가지 업도를 동시에 성취한다는 뜻이다.
89)
이를테면 진에가 일어나 다른 사람의 닭 등을 죽이고 훔칠 때, 세 업도가 '사’와 함께 일어난다. 『구사론』(앞의 책) 상에서는 3구전에 대해 다만 이 같은 사실로만 논설하고 있다. “세 가지가 구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진심(瞋心)으로써 다른 이에게 소속된 생(生)을 동시에 죽여서 훔치는 것을 말한다.”
90)
즉 허광어를 설할 때에는 탐욕ㆍ진에 중의 한가지와 허광어ㆍ이간어ㆍ잡예어가, 추악어를 설할 때에는 진에ㆍ이간어ㆍ추악어ㆍ잡예어가 구전(俱轉)한다.
91)
허광어(망어 즉 거짓말)와 추악어(악구 즉 욕설) 등은 함께 일어나지 않는다. 예컨대 욕설을 할 경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92)
이를테면 세 가지 의업도 중의 한 가지가 현전할 때, 일찍이 각각의 사자에게 명하여 신ㆍ어업도의 일곱 가지 중 네 가지ㆍ다섯 가지ㆍ여섯 가지를 행하게 하여 그것이 구경에 이르는 경우이다.
93)
욕사행에는 반드시 탐욕이 구기하기 때문에 여덟 가지이다
94)
여기서 ‘뒤의 세 가지 업도’란 탐ㆍ진ㆍ사견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각기 성질을 달리하기 때문에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 없다.
95)
어떠한 경우에도 음행을 행해서는 안 되는 비구니에게 사람을 보내어 음행을 하게 하였을 경우에는 죄업이 된다는 뜻이다.
96)
즉 다른 이를 보내 살생하게 하는 것은 필시 살생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살생죄에 저촉되지만, 다른 이를 보내어 살생하지 않게 하는 것은 반드시 살생에서 떠나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 살생에서 떠나려는 의지를 갖지 않았더라도 다른 이를 보내어 살생하지 않게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다만 이것으로 이살생계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97)
본론 제41권 주6) 참조. 그렇기 때문에 살생을 짓게 한 것은 살생죄에 저촉되지만, 짓지 않게 한 것은 이살생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98)
안근이 훼손된 경우 안식도 그 공능이 미약하다.
99)
예컨대 피부의 색은 선악의 마음과 무관하지만, 신체적 형태[身形]는 마음에 따라 선악의 성질을 갖는다.
100)
서로 유사한 각각의 법에 차별이 있는 것처럼, 다른 이를 시켜 살생한 것과 살생하지 않게 한 것에는 차별이 있다는 뜻이다.
101)
현현하지 않는 처중(處中)의 선, 즉 비율의비불율의[隱相]까지 모두 설하면 한 가지 내지 열 가지 업도가 사(思)와 구전하지만, 율의[顯相]에 의거할 경우 한 가지와 다섯 가지와 여덟 가지는 구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선사(善思)는 반드시 무탐ㆍ무진과 상응하기 때문에 1구전이 제외된다. 유색의 율의에 포섭되는 업도는 최소한 이(離)살생ㆍ이투도ㆍ이비범행ㆍ이망어의 네 가지와 구기하며, 여기에 선사와 구기하는 무탐ㆍ무진이 더해지기 때문에 5구전이 제외된다. 또한 필추율의는 7지(支)를 갖춘 것으로, 악ㆍ무기심일 경우 7구전이지만 선심일 경우 여기에 무탐ㆍ무진이 더해지기 때문에 8구전이 제외되는 것이다.
102)
두 가지 선업도가 구전하는 것은 두 가지 경우이다. 첫째, 별해탈율의를 획득하지 않은 이에게 선한 전5식이 일어날 때, 5식은 ‘견(見)’이 아니기 때문에(본론 제6권 ‘견ㆍ비견 분별’ 참조) 정견을 제외한 무탐ㆍ무진의 두 가지 업도만이 사(思)와 구전(俱轉)한다. 둘째, 무색정에 근거하여 진지와 무생지가 일어날 때, 무색정에는 수심전의 무표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본론 제77권 ‘4무색정’ 참조), 진ㆍ무생지는 견(見)이 아니기 때문에(본론 제73권 ‘忍과 智와 見의 관계’ 참조) 오로지 제6의식과 상응하는 무루의 무탐ㆍ무진의 두 가지 업도 만이 ‘사’와 구전한다.
103)
무탐ㆍ무진과 더불어 정견이 일어나는 때로서, 이때 만약 별해탈율의도 받지 않고 정(定)에도 들지 않았다면 세 가지 신업과 네 가지 어업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3구전이다.
104)
악ㆍ무기심이 일어났기 때문에 무탐ㆍ무진ㆍ정견의 세 가지 의업은 존재하지 않으며, 근사 등의 율의를 받았기 때문에 세 가지 신업와 한 가지 어업(離허광어)이 구전한다.
105)
선한 전5식이 일어났기 때문에 무탐ㆍ무진이, 근주 등이기 때문에 신업의 세 가지와 어업의 한 가지 율의가 구전한다.
106)
산선(散善)의 의식이 일어났으나 아직 정려생율의와 무루율의를 획득하지 않고서 근주 등의 율의를 받을 때, 의업의 세 가지 선근과 신업의 네 가지 율의가 구전한다. 또한 악ㆍ무기심으로서(다시 말해 탐ㆍ진ㆍ사견을 떠나지 않고서) 필추율의를 획득할 때 세 가지 신업과 네 가지 어업이 구전한다.
107)
수심전의 색이 없이 정견과 상응하는 선한 의식이 현전하고 필추율의를 획득할 때, 혹은 정견과 상응하는 마음이 현전하고 수심전의 색, 즉 정려생율의ㆍ무루율의를 획득하는 경우에도 열 가지 선업도가 구전한다.
108)
탐ㆍ진ㆍ사견을 떠나지 않고 1계(戒)를 받았을 경우. 즉 율의에서는 1지(支)의 악업도를 원리(遠離)하는 일이 없지만 처중(處中, 비율의비불율의)의 선에서는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5구전ㆍ10구전의 경우는 무탐과 무진과 더불어 정견이 현재전할 때 2계ㆍ5계를 받았을 때를 말한다.
109)
여기서 ‘성취’란 존재 가능성을 말하며, ‘현행’이란 실제로 작용하여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110)
북구로주의 수명은 천세로서 중간에 요절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살생의 업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111)
즉 북구로주에서는 여인을 소유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음행을 행하는 것인가 하는 난문.
112)
천취는 천을 살해하지 않지만 혹 어느 때 아수라 아귀를 살해하기도 한다. 『대비바사론』 제4권(한글대장경118,p.94)에 아수라와 삼십삼천 사대왕중천이 싸우는 이야기가 나온다.
113)
『대비바사론』 제172권(한글대장경124,p.514)에서 어떤 이는 아소라(阿素羅)를 천취에 속한다고 하였는데, 그럴 경우 그들이 서로 싸웠다면 천취도 결국 천취를 죽인다는 말이다. ‘머리를 자르고 허리를 자르면’의 원문은 ‘斬首中裁’이나 『구사론』 제17권(고려장27,p.580하; 대정장29,p.90중)에 따라 ‘중(中)’을 ‘허리[腰]’로 번역하였다.
114)
성자로서 무색계에 태어난 자는 이미 과거세에 7선업도를 성취한 자이기 때문에 미래세 욕ㆍ색계에 태어나더라도 7선업도를 성취하게 되며, 무상천에 태어난 성자도 거기에 들기 전에 제4정려의 정려율의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나올 때에도 역시 제4정려의 정려율의를 성취하게 된다. 그래서 과거ㆍ미래의 무루ㆍ정려율의를 성취한다고 설한 것이다.
115)
이는 특히 무색계의 성자가 과거ㆍ미래의 무루율의를 성취하게 되는 까닭을 밝힌 것으로, 과거세에 욕계 미지정과 4정려(본론의 ‘6지’는 ‘5지’의 誤寫인가? 『구사론』 제17권, 고려장27,p.581상; 대정장29,p.90중에서는 5地임) 중의 어느 곳의 소의신을 근거로 하여 무루율의를 일으키고 멸하였을지라도 무색계에 태어날 때에는 반드시 과거세에 일으키고 소멸한 무루율의를 성취하니, 무루법은 명종할 때 기사(棄捨)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미래세에도 이미 과거에 성취하였으므로 욕계와 색계 4정려 중 어느 것에 의해서든 무루율의를 닦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현재 무루율의를 성취하고 있다고 설한 것이다.
116)
다시 말해 ‘오로지 성취될 뿐이다’고 말한 것은.
117)
다시 말해 ‘무색계에는 대종이, 무상천에는 선정의 마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118)
여기서 ‘익힌다[習]’고 함은 가행을, ‘닦는다[修]’고 함은 근본업도를, ‘많이 짓는다[多所作]’고 함은 후기를 일으키는 상태를 말한다.
119)
동류인(同類因) 등류과(等流果)의 관계는 동류로서 서로 유사한 유위제법의 전후찰나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사견을 익히고 내지 많이 지을 경우, 사견이 증대한다고 해야 한다는 뜻인가?
120)
『구사론』 제17권(고려장27,p.581중; 대정장29,p.90하; 권오민 역,p.783).
121)
『구사론』 제17권(상동). 즉 인간의 목숨으로 태어난 것은 선업의 등류과이고, 여기서는 다만 다른 사람보다 수명이 짧은 것이 살생의 등류과라는 것을 말하였을 뿐이라는 뜻이다.
122)
수명의 단축과 후설(後說)하는 생활에 필요한 도구의 윤택함이 적어지는 것을 모두 증상과라고 말할 경우, 살생업도의 결과에 여러 차별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전자를 등류과로 설하였다는 뜻이다.
123)
사는 곳이 험난해지면 친구의 왕래가 끊기게 되니, 이것이 바로 이간어의 증상과이다.
124)
이상의 이숙ㆍ등류ㆍ증상의 과보는 예컨대 한 번의 살생업도에 의해 초래되는 것인가, 아니면 각기 다른 업도에 의해 초래되는 것인가? 하는 난문이다.
125)
여기서 위광(ojas)이란 생물의 온기와 활동의 연원이 되는 것으로서, 정기(精氣)로 번역됨.
126)
『잡아함경』 제28권(대정장2,p.198중 이하). 여기서 8사지란 8정도(正道)에 반대되는 8사도(邪道)를 말하는 것으로, 색업은 그 중에 외적으로 발동(發動)되는 어ㆍ신업을 말한다.
127)
『계온경(Śīlaskandhika)』이란 『유부비나야잡사』 제40권(대정장24,p.413상)에서 야사(耶舍)비구가 10가지 비법(非法)을 논의하면서 인용하고 있는 『장아함』 「계온품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장아함』 제14권 「범동경(梵動經)」(대정장1,p.89중)에서도 세존은 코끼리 따위를 키우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즉 여기서는, 코끼리 싸움 따위를 보는 것도 일종의 탐에 의해 일어나는 신ㆍ어업의 사명이라고 훈계하였기 때문에 가무(歌舞) 등도 사명에 포섭된다는 뜻이다.
제43권
1)
‘도(道)’에는 무간도와 해탈도가 있는데, 전자가 혹(惑) 즉 번뇌의 득(得)을 끊는 대치도라면, 후자는 그 같은 끊어짐을 증득하여 임지하는 대치도이다. 본론 제63권 ‘인(忍)ㆍ지(智)의 작용과 순서’ 참조.
2)
이를테면 욕계 미지정에 의한 유루의 무간도는, 후 찰나에 그것과 동등하거나 수승한 미지정을 초래하고(등류과), 희락(喜樂)을 초래하며(이숙과) , 욕계의 번뇌를 끊고 택멸을 증득한다(이계과).
3)
다시 말해 ‘구유’란 무간도와 동시에 생겨나는 수(受) 등의 상응법과 생(生) 등의 불상응법을, ‘해탈’이란 무간도에 의해 무간에 인기된 해탈도를 말하며, ‘소수’란 미래세에 이와 동류의 선을 닦는 것을, ‘단’이란 무간도의 힘으로써 번뇌를 끊고 증득하는 택멸(이를 不生사용과라고 함) 등을 말한다.
4)
결과가 선행하는 일은 없기 때문에 과거의 유위법은 증상과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이는 『구사론』(제17권, 고려장27,p.582상; 대정장29,p.91중; 권오민 역,동국역경원,2002,p.788) 상의 정설이다.
5)
사용과는 상응인과 구유인의 결과로서 원인과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며, 증상과는 그 적용범위가 가장 넓은 능작인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6)
무루도는 이숙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숙과를 초래하지 않는 것이다.
7)
유루의 선ㆍ불선업은 번뇌를 끊는 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계과가 제외되는 것으로, 자지의 가애(可愛)ㆍ비가애의 이숙과와, 동등하거나 수승한 상사법의 등류과와, 선ㆍ불선업에 의해 견인된 구생 혹은 무간생 법인 사용과와, 앞서 생겨난 법과 선ㆍ불선업 자체를 제외한 그 밖의 일체의 유위법인 증상과를 초래한다.
8)
무루ㆍ무기업은 이숙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숙과를 제외한 것이며, 번뇌를 끊는 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계과를 제외한 것이다.
9)
원문은 ‘次辯果門業有果相’이지만, 『구사론』(제17권, 고려장27,p.582상)과 『현종론』(제23권)에 따라 ‘次辯異門……’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갈래[門]를 달리하는 [온갖] 업’이란 3성(性)ㆍ3세(世)ㆍ제지(諸地)ㆍ3학(學)ㆍ3단(斷)의 업을 말하는 것으로, 이하 이러한 다섯 갈래의 업과 그 같은 법의 인과관계를 밝힌다.
10)
여기서 ‘가장 마지막에 설하게 되는 본송’이란 업(業)과 결과의 인과관계를 분별하는 다섯 갈래 중 마지막인 ‘3단(斷)의 업과 3단법의 인과관계’에서의 본송을 말한다. 즉 앞의 본송에서는 “이 모두를 순서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는 말이 생략되었다는 뜻이다.
11)
이하 ‘3세의 업과 3세법의 인과관계’ 등의 경우도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세 가지 업이 각기 원인이 되어 그 순서대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세 법을 몇 가지의 결과로서 갖게 되는지 분별해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12)
이상에서 각기 이숙과는 무기이기 때문에 제외되고, 원인과 결과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등류과가 제외되며, 이계과는 택멸무위, 즉 선이기 때문에 제외되는 것이다.
13)
무기법이 불선업의 등류과가 되는 경우는 두 가지로서, 첫째 견고소단의 탐 등 일체의 불선업은 견고소단인 유신견과 변집견을 등류과로 삼으며, 둘째 고제ㆍ집제 하에 있는 변행혹(遍行惑)으로서의 불선업도 견고소단과 견집소단의 유신견과 변집견을 등류과로 삼는데, 전자는 동류인으로서 획득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변행인으로서 획득하는 것이다. 즉 견고소단의 불선업과 견고ㆍ견집소단의 변행혹은 각기 동류인과 변행인이 되어 유부무기인 유신견과 변집견를 낳기 때문에, 불선업은 무기법을 등류과로 삼는다고 하였다.(혹은 반대로 유신견 등에서도 탐 등의 견고소단의 불선법이 낳아지기 때문에 무기업도 불선업을 등류과로 삼는다.) 그리고 여기서 품류란 유신ㆍ변집 2견과 상응하는 심소와, 아울러 구유하는 4상 등을 말한다. 변행혹이란 그 힘이 특히 강력하여 자계(自界)의 5부의 염오법을 두루 낳는 원인이 되는 견고소단의 유신견 등의 5견과 의(疑), 견집소단의 사견ㆍ견취와 ‘의’, 그리고 견고ㆍ견집소단의 무명(11遍惑)을 말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8권에서 상론한다.
14)
전주(前註) 참조.
15)
다시 말해 불선업이 불선법을 세 가지 결과(이숙과와 이계과를 제외한 등류ㆍ사용ㆍ증상과)로 삼는 것과 같다.
16)
이계과는 무위법이기 때문에 3세에 떨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시간적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제외되는 것이다.
17)
이숙과는 앞서 생겨난 원인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등류과는 전 찰나(無間)에 멸한 원인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각각 제외된다. 그리고 현재법이 과거법을 결과로 삼지 않는 것은, 전법(과거법)은 후법(현재업)에 의해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후설)
18)
미래세에는 전후가 존재하지 않아 동류인과 변행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본론 제16권 ‘6인과 삼세의 관계’ 참조), 그것을 원인으로 하는 등류과가 제외되는 것이다. 만약 동류인 등이 존재한다면, 전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체성(體性)이 유사한 결과와 서로 간에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숙인ㆍ이숙과의 경우 각기 선ㆍ악과 무기로서 그 체성이 다르기 때문에 미래세 잡란되어 존재하더라 그같은 과실은 없다.(본론 제16권 ‘동류인’ 참조)
19)
이계과는 시간[世]에 제약되지 않을뿐더러 지(地)에 계속(繫屬)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제외되는 것이다.
20)
유루업이 다른 지의 법을 이숙과와 등류과로 삼지 않는 것은, 이숙과는 자지(自地)에 의해 초래되는 결과이기 때문이며, 등류과는 원인과 동일한 지에 계속(繫屬)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21)
이숙과는 유루업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제외한 것이며, 무루업은 이숙과를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3계에 계속(繫屬)되지 않을 뿐더러(본론 제16권 주91의 본문 참조) 9지의 모든 무루법에 대해 동류인이 되기 때문에 등류과를 제외하지 않은 것이다.
22)
유학법은 무루이기 때문에 이숙과를 낳지 않으며, 유위이기 때문에 이계과를 낳지 않는 것이다.
23)
이숙과는 유루업을 원인으로 하기 때문에 제외하는 것이며, 또한 원인(유학업)과 결과(비학비무학법)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등류과를 제외하는 것이다.
24)
유학의 법은 무학의 업에 비해 저열하기 때문에 등류과가 되지 않으며, 또한 저열한 유학의 법은 무학의 업에 의해 인기되지 않기 때문에 사용과가 되지 않으며, 이숙과와 이계과가 되지 않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25)
원문은 ‘理應言二, 謂加等流’. 그러나 왜 이 말이 더하여 졌는지 알 수 없다. 『현종론』(제23권)에서는 『구사론』(제17권, 고려장27,p.582하; 대정장29,p.91하)에서와 같이 이 말을 삭제하였다.
26)
견소단의 법(즉 견도에 의해 끊어지는 불선법)은 무기가 아니며, 또한 비소단(非所斷, 즉 무루)이 아니기 때문에 이숙과와 이계과가 되지 않는 것이다.
27)
비소단법은 무루이고 선이나 이숙과는 무기이기 때문에 이숙과를 제외하는 것이며, 견ㆍ수소단법은 유루이나 비소단법은 무루이기 때문에 서로 동류ㆍ변행인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등류과를 제외하는 것이다. 또한 견소단법은 무간ㆍ구시에 비소단법을 낳지 않기 때문에 사용과를 제외하며, 견소단의 업은 번뇌를 끊는 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계과를 제외하는 것이다.
28)
견소단의 법은 무기가 아니기 때문에, 수소단과 동류가 아니기 때문에, 비소단이 아니기 때문에 이숙ㆍ등류ㆍ이계과를 제외하는 것이다.
29)
비소단법(끊어지지 않는 법)은 무루이기 때문에 이숙인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숙과를 제외하는 것이다.
30)
구역에서는 순서대로 여리작업(如理作業), 비리작업(非理作業), 비리비비리작업(非理非非理作業).
31)
“이를테면 온갖 유정으로서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하고,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고,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하고, 마땅히 이와 같이 착의(著衣)하고, 마땅히 이와 같이 먹어야 하는 일 따위에 대해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을 경우, 이를 일컬어 ‘마땅히 지어서는 안 되는 업’이라고 하니, 그것들은 세속의 예의(禮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구사론』 제17권, 고려장27,p.583중; 대정장29,p.92상; 권오민 역,p796)
32)
즉 염오와 선의 업을 제외한 무부무기의 업으로서 궤칙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허무는 것도 아닌 업을 ‘마땅히 지어서도 안되고 짓지 않아서도 안 되는 업’이라고 이름한다.
33)
온갖 유정은 유정으로서의 보편성 즉 동분을 갖고 있기 때문에 유정이라 불리는 것으로(본론 제12권 참조), 그 같은 동분을 획득할 때 비로소 유정의 생이 현상하게 된다. 그리고 유부에 의하는 한 유정의 생을 현상시키는 보편적 동분은 한 가지 업에 의해 초래되며[一業能引一生], 남녀ㆍ빈부ㆍ귀천 등의 개별적 동분은 다수의 업에 의해 초래된다[多業能引圓滿一生]. 이때 전자 즉 총보(總報)를 초래 인기하는 업을 인업(引業, 구역에서는 총보업, ākṣepeka-karma)이라 하고, 후자 즉 별보(別報)를 초래하여 유정의 일생을 다양하게 원만 장엄시키는 업을 만업(滿業,구역에서는 별보업, paripūraka-karma)이라고 한다.
34)
즉 한번의 생이 다수의 업에 의해 일어났다고 하는 경우, 어떤 업에 의해서는 태어나고 죽는다고 하면서 다른 어떤 업에 의해서는 그 같은 일이 없다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뜻이다.
35)
조작 증장의 뜻에 대해서는 본론 제40권 ‘정(定)ㆍ부정업(不定業)과 이에 따른 4업’ 참조.
36)
원문은 ‘時分果業定不定受無決定故.’ 비유자(譬喩者)가 업을 4구로 분별하여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는 결정되어 있어도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할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과,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하는지는 결정되어 있어도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는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과, 두 가지 모두가 결정되어 있는 업과,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 등의 8업설을 주장한데 대해 중현은 시간 자체는 이숙과를 떠나 별도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제1구와 제2구의 분별을 부정하였다.(본론 제40권 ‘비유자의 8업설 비판’ 참조) 즉 비유자는 ‘업은 다생(多生)에 걸쳐 이숙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본론 제40권 참조) ‘한 번의 생은 다수의 업에 의해 인기된다’거나, ‘한가지의 업은 능히 다수의 생을 인기한다’고 하는 이설이 제기된 것이다.
37)
유부 이론상 후생을 초래하는 업은 이숙과 그것을 낳는 시기가 결정된 정업인데, 만약 한 가지 업이 여러 생을 초래한다면 어느 생에서 그 과보를 낳게 될 것인가? 설혹 여러 생을 낳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에 그 상이 동일하여 종국에는 1생이라고 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0권 ‘업은 다생에 걸쳐 이숙한다는 비유자 설 비판’ 참조할 것.
38)
보광의 『구사론기』(제17권)나 법보의 『구사론소』(제17권)에 의하면, 이 물음은 경부(經部)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즉 동분 내지 제법의 개별적 실재성을 부정하는 경량부의 경우, 업은 그 세력에 따라 전변 상속하며 차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생의 산출이 가능하며, 그래서 이와 같은 무멸, 즉 아나율(阿那律, Anirudha)의 예를 들고 있는 것이다. 아나율은 부처님의 사촌동생으로, 천안(天眼)제일로서 십대제자 중의 일인. 그는 일찍이 숙세에서 대기근을 만나 한그릇의 밥을 무환(無患)이라 이름하는 독각에게 보시한 공덕으로 이와 같은 과보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중아함경』 제13권 「설본경(說本經)」,대정장1,p.509상)
39)
이러한 무멸존자의 본사(本事)는 『대비바사론』 제20권(대정장27,p.99중하)에 나온다.
40)
다시 말해 한번 먹을 것을 베푼 것을 인연으로 하여 다수의 사업(思業)을 지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삼십삼천과 부귀한 가문 내지 석가종족으로 태어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41)
1가율사발나(kārśāpna)는 최소단위의 액수로서, 이를테면 1원. 『대비바사론』(상동)에서는 “비유하자면 적은 양의 씨앗을 몇 년 동안 농사지어 점차 증가하여 백천 섬이 되었을 때 ‘나는 적은 종자로써 오늘 백천 섬을 획득하였다’고 노래하는 것과 같다. 또한 어떤 상인이 한 푼[一金錢]으로 오랫동안 무역하여 천만 전을 벌었을 때 ‘나는 한 푼을 점차 불려 이제 천만 전으로 만들었다’고 노래하는 것과 같다”고 논설하고 있다. 이는 즉 한 푼이 바로 천만전이 된 것이 아니라 다만 천만 전의 최초의 원인이 된 것이듯이, 무멸존자의 본사(本事) 또한 한 번의 시식(施食)이 다생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첫 번째 생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42)
이같이 일생 즉 하나의 중동분(衆同分)을 인기하는 하나의 업을 인업(引業)이라 하고, 3계ㆍ9지ㆍ5취ㆍ4생ㆍ4성ㆍ남녀ㆍ재가 출가ㆍ유학무학 등의 개별적인 과보를 초래하여 유정의 일생을 다양하게 원만 장엄시키는 다수의 업을 만업(滿業)이라고 한다. 주33) 참조.
43)
예컨대 살생업의 종류라고 하면, 살생업 모두를 포함하는 말로서 결코 한 가지의 업이 아니다.
44)
여기서 사람의 몸[人身]이란 신근(身根)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중동분을 말한다. 즉 신근은 만업에 의해 초래되는 별보(別報)이다.
45)
‘업과 동일한 과보를 초래하는 법[一果法]’이란, 심ㆍ심소법이나 생(生) 등의 4상과 같은 업과 상응ㆍ구유하는 선ㆍ불선의 유루법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법도 역시 생을 인기하고 원만하게 하지만, 그렇지 않은 법은 세력이 저열하여 생을 원만하게는 하여도 인기하지는 않는다.(후술)
46)
여기서 두 종류는 생을 인기하고 원만하게 하는 유루법과 생을 원만하게는 하여도 인기하지 않는 유루법.
47)
업장(karma varaṇa)ㆍ번뇌장(kleśa varaṇa)ㆍ이숙장(vikāya varaṇa)은 모두 무루성도를 장애하고 선근을 장애하여 일어나지 못하게 하므로 ‘장애[障]’라 이름한 것이다.
48)
번뇌에는 자주 일어나는[數行] 하품의 번뇌와 그 성격이 지극히 맹리(猛利)한 상품의 번뇌가 있지만, 수행의 번뇌는 항상 일어나는 것으로 억제하고 끊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를 번뇌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억제하고 끊는다[伏除]’고 함은 유루의 7방편(3賢과 4善根)으로써 억제하고[伏], 견도로써 끊는 것[除]을 말한다.
49)
“하품을 인연으로 하여 중품을 낳고, 중품을 인연으로 하여 다시 상품을 낳아 그것을 억제하고 끊을 도가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구사론』 제17권, 고려장27,p.584상; 대정장29,p.92하; 권오민 역,p.801)
50)
3악취는 고통과 우치 때문에, 북구로주는 무상을 감득(感得)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무상천은 외도가 최고의 단계로 믿는 바이기 때문에 능히 성도와 그 가행으로 나아가는 것을 장애한다. 그래서 이를 이숙과로서의 장애, 즉 ‘이숙장’이라고 이름한 것이다.(次頌 장행 참조)
51)
욕계 경생(經生)의 성자는 여덟 번째 생을 초래하는 일이 없으며 반드시 일곱 번째 생에서 열반에 든다. 따라서 여덟 번째 생을 초래하는 업이란 필시 성도에 들지 못하는 이생의 업을 말한다.
52)
다시 말해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이기 때문이며.
53)
『대비바사론』 제115권(대정장27,p.600중). 참고로 바사에서는 첫 번째를 ‘자성’으로 설하고 있다. “‘자성’이 [쉽게 관찰되고 쉽게 알 수 있다고] 함은 이러한 5무간업의 종성(種性)은 결정코 극중한 악업이기 때문이다.”
54)
여기서 유여사설은 경주 세친의 설(『구사론』 제17권, 고려장27,p.584상중; 대정장29,p.92하; 권오민 역,p.803)로서, 업장을 갖은 이의 차생(次生)은 지옥이고, 번뇌장을 갖은 이의 차생은 악취이기 때문에 양자 모두 무겁다고 한 것이다.
55)
사문성(śrāmaṇya)이란 청정한 무루도를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도를 지닌 이를 ‘사문’이라 한다.(본론 제67권 참조)
56)
선체(ṣamḍha,無根)나 반택가 등에 악계 즉 불율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본론 제39권 ‘선ㆍ악율의를 성취하는 유정’ 참조.
57)
‘참’은 마음의 자재성, 혹은 공덕 있는 자를 공경하는 것이며, ‘괴’는 저열한 법을 혐오하는 것, 혹은 자신의 죄과나 자타의 비방을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본론 제11권 ‘無慚과 無愧’ 참조)
58)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아귀와 방생이 그들의 어미를 해치는 것은 무간죄에 저촉되지 않는다. 즉 아귀와 방생의 경우도 그들 부모의 은혜가 적으며, 또한 스스로도 극중한 참괴심이 없기 때문에 설사 어미를 죽이더라도 무간죄를 성취하지 않는다.
59)
비인(非人)의 부모란 알이나 방생 등으로부터 태어나는 경우로서,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2권 ‘4생(生)’ 참조.
60)
인취의 세 주에도 물론 성도를 증득하지 못하는 선체 등의 이숙장이 존재하지만, 대개의 경우 남ㆍ여근을 성취하여 성도의 그릇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북구로주 등에서는 아예 성도를 증득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주 51참조) 이숙장이 존재한다고 한 것이다. 참고로 북구로주의 유정의 수명은 천 세(歲)이지만, 그들은 인취 중에서 복력(福力)이 가장 강성하여 근기가 둔(鈍根)하고, 박진(薄塵)하며, 다양한 온갖 쾌락을 섭수하여도 허물이 되지 않을 뿐더러 죽으면 반드시 천취에 태어나기 때문에 무상을 깨달을 수 없다.(본론 제31권 ‘선취의 유정’ 참조)
61)
본론 제34권 ‘경량부의 신표업설 비판’(주43의 본문) 참조.
62)
그러나 그럴 경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어머니를 죽이려는 등의 의지[思]만으로도 무간업을 성취한다고 해야 한다.
63)
“이를테면 먼저 가행(加行)의 단계에서 사유사(思惟思, 즉 그렇게 사유하려는 의지)를 일으켜 ‘나는 당래 마땅히 해야 할 여차 여차한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을 일컬어 ‘사업’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사유하고 난 다음 작사사(作事思, 즉 행위 하려는 의지)를 일으켜 앞서 생각했든 바에 따라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고 말을 발하는 것[動身發語]을 일컬어 ‘사이업’이라고 한다.”(본론 제34권 ‘경량부의 신표업설 비판’)
64)
5무간업 중에서 어미를 죽이고 아비를 죽이고 아라한을 죽이고 악심으로 부처의 몸에서 피를 나게 하는 것은 바로 신업이고, 화합승가를 파괴하는 것은 바로 어업이다.
65)
여기서 세 가지는 어미를 죽이고 아비를 죽이며 아라한을 죽이는 것이다. 부처의 몸에서 피를 나게 하는 것은 살생의 근본업도가 아니라 다만 가행일 뿐이다. 그 이유는 후설.
66)
허광어는 파화합승(破和合僧)의 본질이지만, 그것을 원인으로 하여 승가의 화합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결과를 원인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혹은 허광어는 능히 파괴하는 것[能破], 승가는 파괴되는 것[所破]. 즉 허광어가 능히 승가의 화합을 파괴하였기 때문에 주체의 능동력에 따라 ‘파화합승’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67)
승가의 파괴란 화합성을 상실하는 것, 즉 화합성의 비득(非得)을 의미하기 때문에 무부무기로서 불상응행법에 포섭된다. 따라서 ‘승가의 파괴’ 자체는 무간업이 아니며, 무간업인 허광어의 결과이다.(후술)
68)
1대겁은 성(成)ㆍ주(住)ㆍ괴(壞)ㆍ공(空)의 각기 20중겁, 즉 80중겁을 1대겁이라 한다. 즉 기세간이 먼저 생기고 제일 나중에 허물어지기 때문에 유정은 성겁의 제2중겁에서부터 괴겁 제19중겁까지만 머문다. 특히 지옥의 유정은 가장 나중에 생겨나고 가장 먼저 괴멸한다. 본론 제32권 ‘괴(壞)ㆍ성(成)ㆍ중(中)ㆍ대(大)의 4겁’ 참조.
69)
주겁의 20중겁은 무량의 수명으로부터 10세에 이르기까지가 제1중겁, 그로부터 8만세에 이르고 다시 10세 이르기 까지가 제2중겁, 이렇게 증가와 감소를 18번 되풀이한 후 다시 8만세에 이를 때가 제20중겁이다.(본론 제32권 ‘주겁’ 참조) 즉 경에서 승가를 파괴한 제바달다(提婆達多)는 인간의 수명이 4만세에 이를 때 다시 인취에 태어난다고 하였으므로 지옥에서 1중겁을 완전히 채우지 않았다는 것이다.
70)
모든 햇볕이 장애가 되는 것이 아닐지라도 ‘햇볕이 장애가 된다’고 하고, 도적이 마을 전체를 불태우지 않았더라도 ‘도적이 마을을 불태웠다’고 할 수 있듯이, 일부의 중겁 동안만 이숙의 과보를 받을지라도 그것을 1겁 즉 1중겁이라고 해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71)
역죄(逆罪) 즉 무간업은 반드시 다음 생(무간생)에 이숙과를 받는 것이라면, 다수의 역죄을 지었더라도 무간지옥에서의 생을 한 번만 받을 것이며, 그럴 경우 다른 역죄의 과보는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 처음에 한 번 무간지옥의 생을 이미 초래하였다면 그 밖의 역죄에는 과보가 없게 될 것이 아닌가? 하는 난문. 유부의 답: 무간지옥에서의 생은 한 번만 받지만, 그 강도가 지은 역죄에 비례하여 증가하기 때문에 과보가 없다고 할 수 없다.
72)
어떤 이가 지옥의 과보를 초래할만한 악업을 짓고 다시 무간업을 지었을 경우, 앞서 지은 악업에 따라 지옥의 과보를 이미 받았다면, 뒤에 지은 무간업의 과보는 무엇인가? 따라서 다수의 역죄를 지은 경우에도 거듭하여 지옥의 과보를 초래한다고 해야 한다는 반힐(反詰).
73)
본론 제40권 ‘업은 다생에 걸쳐 이숙한다는 비유자 설 비판’, 특히 같은 항 주38)의 본문에 대한 비판 참조.
74)
다시 말해 재가자나 비구니 등의 몸과 마음[依止]에는 위덕이 없기 때문에 허광어가 성취되지 않으며, 따라서 승가는 그들에 의해 파괴되지 않는다.
75)
여기서 ‘견행자’란 성질상 이지적인 면이 강하여 의지가 강건한 이를 말하고, ‘애행자’란 비교적 정에 약하여 정리에 이끌리기 쉬운 자를 말한다.
76)
여기서 ‘증정’이란 7각분(覺分)에 의해 4제의 이치를 증득함으로써 획득되는 불ㆍ법ㆍ승 3보와 계(戒)에 대한 청정한 믿음을 말한다.(본론 제72권에서 상론함) 참고로 『구사론』(제23권, 고려장27,p.585중; 대정장29,p.93중; 권오민 역,p.809)에서는 성자의 승가가 파괴되지 않는 이유로 “모든 성자는 법성(法性)을 증득하였기 때문이다”고 논설하고 있다.
77)
‘인법’을 획득한 자란 4선근(순결택분의 內凡位. 즉 무루 견도지에 접근한 단계) 중의 세 번째 단계를 획득한 현자(賢者)를 말한다. 본론 제61권 참조.
78)
승가의 화합이 깨어지면 그 날 밤 안에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다음날 아침에까지 지속하지 않는다. 이는 제바달다가 승가의 파괴를 기도하였지만 그 날 밤에 사리불의 권고에 의해 다시 화합하였던 사실을 가리킨다.
79)
제바달다의 5법에는 이설이 있다.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파승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破僧事)』 제10권(대정장24,p.149중)에는 “유락(乳酪)ㆍ어육(魚肉)ㆍ소금을 먹지 않으며, 재단한 옷을 입지 않으며, 촌락의 가옥[村舍]에서만 머문다”고 설하고 있으며, 『십송률』 제36권(대정장23,p.259상)에서는 “납의(衲衣)만을 입고, 걸식만을 하며, 하루 한 번만 먹으며, 노지에 머물며,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또한 남전 『출라박가』Ⅲ.3에서는 “평생토록 숲에 머물며, 걸식하고 초대식(招待食)에는 응하지 않으며, 분소의만을 입고, 나무 밑에서만 지내며, 어육(魚肉)을 먹지 않는다”로 전하고 있다.
80)
‘파법륜승(破法輪僧)’이란 제바달다가 부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별도의 교단을 세운 것과 같은 분열을 말하고, ‘파갈마승’이란 동일교구에서 포살이나 갈마작법의 규칙을 달리함으로 말미암아 분열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81)
현전승가의 교구[界]는 최소한 네 명 이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법륜승의 분열은 최소한 두 그룹으로 분열되는 여덟 명과 불도(佛道)와는 다른 주장을 하는 이사(異師) 한 명 등 아홉 명이 필요한 것이며, 갈마승의 분열은 특정한 주장자에 의해 분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최소한 여덟 명이 필요한 것이다.
82)
“법륜을 굴리신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를 말하며”(『구사론』 제18권, 고려장27,p.585하; 대정장29,p.93하; 권오민 역,p.811)
83)
부스럼[皰, arbudā]이란 성교 즉 정계(正戒)ㆍ정견(正見)에 대한 사계(邪戒)ㆍ사견(邪見)의 과실이나 허물(dosa)를 말하는 것으로, 사계란 앞서 언급한 제바달다의 5법을 진정한 도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사견이란 이러한 5법을 믿고 8정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84)
‘지(止, 선정)’의 제일은 목건련이고, ‘관(觀, 지혜)’의 제일은 사리불. 제바달다의 경우에서 보듯이 승가에 이설이 생겨 분열의 조짐이 보이면 이들이 설득하여 다시 화합하게 하였다. 따라서 제일의 쌍벽을 이루는 두 제자가 나타나기 전에 승가가 파괴되었다면 화합시키기가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자연히 승가의 파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85)
불멸 이후 어떤 이가 ‘내가 바로 진실의 대사(大師)이며, 여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 대중들이 그를 힐책하여 ‘대사가 세상에 머물러 있을 때는 가만히 있다가 지금 여래께서 열반에 들고 난 이후에야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하고 상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승가의 파괴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86)
여기서 현겁이란 성ㆍ주ㆍ괴ㆍ공의 대겁(제32권 참조) 중에서, 현재의 대겁을 말한다. 과거의 대겁은 장엄겁(莊嚴劫), 미래의 대겁은 성수겁(星宿劫). 현겁의 주겁에 구류손불(拘留孫佛)ㆍ가섭불(迦葉佛)……석가모니불 등 천불이 출현하는데, 석가모니불 시절의 제바달다에 의한 승가의 파괴는 그가 가섭불 시절에 행한 파승가의 과보라는 것이다.
87)
즉 부모는 자식의 토대이자 근원[田器]이기 때문에 살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서, 이는 ‘법의 근원에 대해 깊이 믿어야 한다’고 한 세존의 말씀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는 뜻이다.
88)
부모의 모습이 바뀌었다[形轉]고 함은, 아버지의 남근이 여근으로 전환되고, 어머니의 여근이 남근으로 전환된 때를 말한다. 그 때는 이미 옛날의 부모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역죄를 성취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하는 난문이다.
89)
이 같은 성전환[轉形]과 부모를 살해하는 무간죄의 관계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제119권(한글대장경122, p.443)에서 논설되고 있다.
90)
“혹 여자의 명근을 떠나게 하였지만, 그가 어머니도 아니고 아라한도 아님에도 무간죄에 저촉되는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무간죄에 저촉되는 경우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아버지의 모습이 여자로 바뀌었을 때이다.”
91)
“그녀(앞의 여인)의 피는 몸이 생겨나게 된 근본이기 때문에 [역죄를 성취하는 것은 앞의 여인에 대해서이다].”(『구사론』 제18권, 고려장27,p.586상; 대정장29,p.94상; 권오민 역,p.814)
92)
중유는 무대(無對)로서 금강석 따위도 능히 이를 차단하거나 장애할 수 없다.(본론 제24권 ‘중유의 여러 특징’ 참조)
93)
“이를테면 아들이 몽둥이를 쥐고 아버지 몸에 기어오른 뱀을 후려치거나, 어머니를 평상에 숨어있는 도적으로 여기고서 죽인 경우가 그러하다.”(『구사론』 제18권, 고려장27,p.586상; 대정장29,p.94상; 권오민 역,p.814)
94)
그가 아라한임을 알지 못하고 죽였을지라도 ‘상대방을 무조건 죽여야겠다’고 생각하고 죽였다면, 그러한 결의 중에 ‘아라한이면 죽이지 않겠다’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역시 역죄를 성취하게 된다는 뜻이다.
95)
이는 ‘아라한인 아버지를 죽였을 경우, 경에서 설하고 있듯이 두 가지 역죄를 지은 것인데, 어떻게 한 가지 역죄를 성취한다고 하는가?’ 하는 난문이다. 아버지인 아라한을 죽인 시흠지(Śikhaṇḍin, 이후 頂髻王이 됨)의 이야기는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 제46권(대정장23,p.878)에 나온다. 『대비바사론』 제119권(한글대장경122,p.443)에서는 시등지(始騫持).
96)
유부에 의하면 일단 무간업의 가행을 일으켰을 때에는 필연적으로 그것의 근본업도를 성취하게 되며, 그 중간에 염오를 떠나 성자의 과위를 획득하여 가행업을 영원히 소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97)
여기서 본론은 『발지론』 제11권(대정장26,p.972상; 한글대장경176,p.248).
98)
지만은 Aṅgulimāla(鴦掘摩羅). 바라문 스승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였다가 그녀의 모함으로 스승이 천명을 죽여 그들의 손가락으로 목거리를 만들어 오면 법을 일러주겠다고 하자, 999명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그의 어머니를 죽이려고 하였다가 부처님을 만나 정법을 듣고 귀의하였다.
99)
시리구다(Śrīgupta, Sirigutta). 부처님을 불구덩이[火坑]에 빠트려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후 죄를 사하고 불제자가 되었다.(『증일아함경』 제41권, 대정장2,p.773하)
100)
지만과 실리구다는 역죄의 가행을 지었지만, 회개하여 불제자가 되었으므로 무간업의 가행이 바뀔 수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힐난이다.
101)
즉 무간죄의 가행을 짓는 도중에 죽었을 경우에는 회개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반드시 지옥에 태어나지만, 가행이 종식되었다면 회개하여 근본업도를 짓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102)
원문은 사라(娑羅)이지만, 다른 판본과 후설(後說)에 따라 바라(bāla)로 고쳐 번역하였다. 바라의 구역은 모도생(毛道生). 어리석은 이[愚夫]를 말한다.
103)
즉 무간업의 가행을 지었을 경우 ‘무간에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야 함에도 ‘불설(佛說)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였으므로 그것은 바뀔 수 있다는 뜻인가?
104)
다시 말해 제다(탑묘)를 돌며 예배하는 일체의 모든 이는 천상에 태어날 수 있다고 하였으므로, 역죄를 지은 이 역시 그 업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105)
다시 말해 승가를 파괴한 이라도 선근을 끊은 이후가 아니라면 능히 그의 무간업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뜻이다.
106)
‘흘다’란 kṛta의 음역으로, 조작의 과거완료형. 다시 말해 ‘조작하고 나서 증장시켰을 경우.’
107)
승가를 파괴하는 것 다음으로 큰 죄는 부처의 몸에서 피를 내는 것, 아라한을 살해하는 것, 어머니를 죽이는 것, 마지막이 아버지를 죽이는 것으로, 후자일수록 은혜가 적기 때문이다.(『구사론』 제18권, 고려장27,p.586하; 대정장29,p.94중; 권오민 역,p.817)
108)
만약 파승(破僧)의 허광어가 가장 큰 죄라고 한다면, 어째서 부처님께서는 10악업 중에서 사견이 가장 무거운 죄라고 설하였으며, 신(身)ㆍ어(語)ㆍ의(意) 세 가지 죄업 중 의업의 죄가 가장 크다고 하였던 것인가? 하는 난문.
109)
앞의 답이 법문의 상위에 따른 해석이라면, 이는 결과의 상위에 따른 해석이다. 즉 승가를 파괴하는 것은 정정에 들지 못하게 하는 등 광대한 최대의 과보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사견은 선근을 끊는다고 하는 점에서, 의업은 많은 유정을 해치게 한다는 점에서 각기 가장 무거운 죄라는 것이다.
110)
무간죄와 동류인 업도 역시 지옥에 태어나지만, 동류업 중에는 순후차수업이나 부정수업도 있기 때문에 반드시 무간, 즉 바로 다음 생에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11)
주정의 보살이란 32묘상이 예정된 보살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4권 ‘보살의 결정적인 상’에서 상론한다.
112)
승가화합의 인연이란, 가람이나 그곳에서 사용되는 자구(資具) 등을 말하는 것으로 그것을 빼앗을 경우 승가는 결집력을 상실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113)
4선근에서 세 번째 단계인 ‘인(忍)’을 획득하면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본론 제61권 참조), ‘정’으로부터 ‘인’을 획득하고자 할 때에는 악취를 초래하는 이숙업이 그것을 지극히 장애하는 것이다.
114)
즉 불환과와 무학과를 획득하면 더 이상 욕계와 색ㆍ무색계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곳의 업이 장애가 되는 것으로, 그곳의 빚쟁이가 그곳을 떠나는 것을 장애하는 것과 같다.
115)
순현법수업은 현세에 이숙하여 미래세를 계박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부정수업 중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는 결정되어 있으나 이숙이 결정되지 않은 업[時定異熟不定業]과, 유위정려의 업 중에서 다른 곳 즉 내세에 이숙하지 않는 업 역시 미래세를 계박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불환과와 무학과를 획득할 때 장애가 되지 않는다. 참고로 『구사론』 제18권(고려장27,p.587상; 대정장29,p.94하; 권오민 역,p.819)에서는 순현법수업 만이 언급되고 있다.
제44권
1)
이하 5단(段)에 걸쳐 묘상(妙相), 즉 32상을 초래할 업을 성취하는 보살(菩薩)에 대해 논설하는데, 먼저 주정(住定)의 상태를 밝히고, 계속하여 그가 닦은 업과 제불(諸佛)에 대한 공양과 6바라밀의 실천 등에 대해 논설한다.
2)
『구사론』 제18권(고려장27,p.587상; 대정장29,p94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820)에는 ‘대장부(大丈夫)의 상’이라고 되어 있다. 32상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과 전륜왕이 갖는 서른두 가지의 상서로운 신체적 특성으로, 『대비바사론』 제177권(대정장27,p.888; 한글대장경125,pp32-37)에서 상론하고 있다.
3)
대 사라가(mahā śālakula)란 대 세력가인 명문을 말함. 원문에는 대바라문(大婆羅門)으로 되어 있고, 현장 역본 『구사론』(제18권)에는 대 바라가(婆羅家)로 되어 있어나, 이는 사라를 잘못 쓴 것임. 진제 역본의 『구사석론』(제13권)에서는 ‘마하사라가(摩訶娑羅家)’.
4)
『대비바사론』 제176권(대정장27,p.886하-887상)에서는 이 같이 문답하고 있다. “문: 만약 모든 유정이 아뇩다라삼막삼보리(즉 等覺)의 마음을 일으켜 능히 물러나는 일이 없다면, 이때부터 보살이라고 해야 하거늘 어떠한 까닭에서 묘상의 이숙업을 조작 증장하여야 비로소 보살이라고 하는 것인가? 답: 보리(菩提)에 대해 결정적이고 취(趣)가 결정적이어야 진실의 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 발심하여서부터 묘상의 업을 닦기 전까지는 비록 보리에 대해서는 결정적이라 할지라도 취는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진실의 보살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5)
즉 ‘보살의 결정적인 상’을 분별하면서 이미 ‘남자의 몸을 받아 태어난다’고 언급하였기 때문에 본 항의 본송에서는 거듭하여 설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6)
보살의 32묘상의 업은 현전하는 부처를 대상으로 하여 일어난 뛰어난 염원(思願)에 의한 것으로, 다른 경계를 대상으로 삼아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7)
서른두 가지의 미묘한 상을 초래하는 업은 부처님을 대상으로 한 염원에서, 노력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사소성(思所成)이며 가행득(加行得) 선(善)이다.
8)
그 이유에 대해서는 후술(後述)하는 ‘석가보살의 6바라밀다 수행’(주16)에서 설명한다.
9)
『잡아함경』 제32권 제914경(대정장2,p.230중). 여기서는 니간타 교도인 도사씨촌장이 부처님의 걸식을 탓하자 지난 91겁 동안 어떠한 사람도 보시함으로써 망한 사람을 보지 못했음을 설하고 있다.
10)
즉 먼저 10업도에 대한 하ㆍ중ㆍ상ㆍ상승(上勝)ㆍ상극품(上極品)의 쉰 가지의 염원을 일으켜 신기(身器)를 청정하게 한 다음 한 가지 미묘한 상을 인기하는 업을 일으키고, 그 후에 다시 쉰 가지의 염원을 일으켜 그것을 원만하게 한다는 뜻이다.
11)
원문은 ‘如熏靜慮’. 그러나 『대비바사론』 제177권(대정장27,p.889하)에 의하면 ‘如雜受靜慮’. 잡수정려는 두 찰나의 무루정려 중간에 유루정려를 닦는 것으로(본론 제65권에서 상론), 전후 쉰 가지 염원 사이에 묘상업을 인기한다는 뜻이다. 바사(婆沙)의 말이 보다 분명하다.
12)
『대비바사론』(제177권, 앞의 책)에 따르면 비심소해(非尋所害). 심(尋)ㆍ사(伺)에 의해 해손 되지 않는 염원이다.
13)
이는 바사(婆沙)의 정설이지만(『대비바사론』 제177권, 대정장27,p.890상), 『구사론』 제18권(고려장27,p.587하; 대정장29,p.95상; 권오민 역,p.824)에서의 제3설이다. 『구사론』에서의 제1설은 본론의 제3설이다.
14)
승관불(Vipaśyin-buddha)의 구역어는 비바시불(毘婆尸佛)이고, 연등불(Dipaṃkara-
15)
석가보살이 대비심에 의해 일체의 유정에 대해 자신의 눈이나 골수를 포함한 일체의 사물을 보시하였지만 그러한 행위의 과보로서 인(人)ㆍ천(天)에 태어나는 뛰어난 생의 차별을 희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로소 보시바라밀다를 닦고 익히어 원만하게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16)
보살은 3아승기겁 100겁에 걸쳐 묘상업을 닦아야 하지만, 석가보살은 여기에서 9겁이 단축된 91겁만으로 묘상업을 성취하였다고 하였는데(주8의 본문 참조), 이하 그 이유를 밝힌다. 저사(혹은 補砂, Tiṣya, Tissa)불은 과거24불 중 제17불. 이때 석가보살의 이름은 수자타(Sujātā).
17)
능적(能寂)과 자씨(慈氏)는 각기 석가모니와 미륵의 의역어. “저사불이 두 제자 중 누가 먼저 근기가 성숙할 것인가? 관찰함에 자씨가 먼저 성숙하고 능적이 나중에 성숙할 것임을 여실히 아셨다.”(『대비바사론』 제177권, 대정장27,p.890중; 한글대장경125,p.44) 스스로의 힘으로는 미륵보살이 먼저 성불하지만, 교화될 경우 석가보살이 먼저 성불할 것이라고 관찰하였다는 뜻이다. 그 이유에 대해 바사(婆沙)에서는 “자씨보살은 자신을 요익(饒益)하게 함이 많았고 다른 이를 요익하게 함이 적었지만, 석가보살은 다른 이를 요익하게 함이 많았고 자신을 요익하게 함이 적었기 때문이다”고 논의하고 있다.
18)
『대비바사론』(제117권, 앞의 책)이나 『구사론』(제18권, 권오민 역,p.826)에 의하면, 여기서 수승한 선정은 화계정(火界定).
19)
원문은 天地此界多聞室 逝宮天處十方無 丈夫牛王大沙門 尋地山林遍無等. 이 게송은 보통 “天上天下無如佛 十方世界亦無比 世間所有我盡見 一切無有如佛者”로 번역되어 암송된다.
20)
유정지(有頂地) 제9 하하품의 번뇌를 끊는 무간도를 금강유정(金剛喩定)이라 하며, 이와 무간에 ‘나는 이미 고(苦)를 알았고, 집(集)을 끊었고, 멸(滅)을 작증(作證)하였고, 도(道)를 닦았다’고 아는 진지(盡智)가 생겨난다. 즉 진지란 번뇌멸진(즉 택멸)의 득(得)과 동시에 작용하는 무루지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5권 ‘무학위’에서 상론한다.
21)
이하 6바라밀다의 방론으로, 보시ㆍ지계ㆍ선정의 세 가지에 대해 논의한다. 여기서 계경이란 보시ㆍ조복(調伏)ㆍ수도(修道)를 설하는 『잡아함경』 제10권 제264경(대정장2,p.68상). 또한 『중아함경』 제11권 「우분유경(牛糞喩經)」(대정장1,p.496하)과, 같은 경 제34권 「복경(福經)」(동,p.646중)에서도 보시ㆍ조어(調御)ㆍ수호(守護)의 세 가지 복업사를 설하고 있으며, 『장아함경』 제8권 『중집경』(대정장1,p.50상)에서는 시업(施業)ㆍ평등업(平等業)ㆍ사유업(思惟業)으로 설하고 있다. 참고로 여기서 ‘유(類)’란 체(體, svabhāva)의 뜻으로, 시류복업사란 바로 보시를 본질로 하는 복업사를 말한다.(주29 참조)
22)
보시ㆍ지계ㆍ수정은 선이기 때문에 ‘복(puṇya)’이라고 이름한 것이며, 신ㆍ어업과 사업(思業)으로써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업(kriyā)’이며, 사(思) 즉 의지의 소의처이기 때문에 ‘사(vastu)’라고 한 것이다.
23)
본론 제42권 ‘업도의 명의(名義)’ 참조. 여기서 업이면서 ‘도(업의 길)’가 되는 것이란 신(身)ㆍ어(語)의 7업도이며, ‘도(업의 길)’로서 ‘업’이 아닌 것은 탐ㆍ진ㆍ사견이다.
24)
신ㆍ어업과 등기하는 사업(思業)은 선이기 때문에,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복’이고 ‘업’이지만, 사(思)는 ‘사’ 자신을 소의로 삼는 일이 없기 때문에 ‘사(事)’가 아니며, 사업과 구유하는 법, 예컨대 수(受) 등의 심소법이나 생(生) 등의 4상은 조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또한 ‘업’이 아니다.
25)
자(慈, maitrī)는 4무량심의 하나로 무진(無瞋)을 본질로 하는 선이기 때문에 ‘복’이며, 또한 ‘자’와 상응하는 사(思)는 그것을 근거로 하여 조작되기 때문에 ‘사(事)’이다.
26)
여기서 ‘어떤 이’란 보광(『구사론기』 제18권)에 의하면 경부(經部) 중의 어떤 이이다.
27)
보시란 주어진 물건과 ‘줄려고 하는 마음’에 의해 성립하기 때문에 주어진 물건도 역시 보시라고 이름할 수 있지만, 참된 보시란 희사의 작구(作具)가 되는 무탐심[能發心]과 그러한 마음에 의해 낳아진 신ㆍ어업이라는 뜻이다. (후술) 본송 제1구의 ‘이것’이란 바로 이 같은 작구를 말한다.
28)
승부욕 등으로 말미암아, 혹은 두려움이나 희구나 탐욕(『구사론』의 경우)에서 보시하는 것은 진정한 보시가 아니며, 오로지 자발적 의사와 이에 따른 신ㆍ어업이 진정한 보시라는 뜻이다.
29)
‘시류의 복’에서 ‘류(類)’는 본질[體, svabhāva]의 뜻이다. 따라서 ‘시류의 복’이란 ‘보시를 본질로 하는 복’이라는 뜻으로, 이는 마치 ‘진흙을 본질로 하는 그릇’을 ‘진흙 종류의 그릇’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30)
‘들려진 종류[聞類]의 지식’ 혹은 ‘보여진 종류[見類]의 지식’이라고 하였을 때, 지식의 본질은 ‘들려진 것’ ‘보여진 것’이 아니라 판단[慧]이라는 뜻인가?
31)
원문은 ‘非彼由此有獲益故’이나 『구사론』 제18권(고려장27,p.588하; 대정장29,p.96상)에 따라 ‘非他, 由此有獲益故’로 고쳐 번역하였다.
32)
원문은 ‘공양(供養)과 보은(報恩)’으로 되어 있지만, 『구사론』(앞의 책)에 따라 ‘공경과 보은’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이상의 인용은 『구사론』(제18권, 고려장27,p.598하-599상; 대정장29,p.96상; 권오민 역,p.832) 상에서의 정설이다.
33)
믿고 지니고 듣는 것은 소위 7성재(聖財,즉 信ㆍ戒ㆍ聞ㆍ慚ㆍ愧ㆍ捨ㆍ慧財로서, 중생이 지극히 빈궁한 것은 이를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의 하나로서, 시주가 이를 갖추었는가, 갖추지 않았는가에 따라 보시의 공덕에도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34)
즉 미묘한 색신을 결여하였다면 색이 결여된 재물을 시여하였기 때문이며, 대중들의 사랑이 결여되었다면 향이 결여된 재물을, 유연하지 못한 몸을 초래하였다면 감촉이 결여된 재물을 시여하였기 때문이다.
35)
유의(有依), 즉 세간의 일곱 가지 복업사란, 비구중(衆)에게 방사(房舍)나 전각을 시여하는 일, 방사 중에 좌상(座床) 내지 와구를 시여하는 일, 방사 중에 새로 지은 청정한 묘의(妙衣)를 시여하는 일, 방사의 대중에게 아침의 죽과 중식을 시여하는 일, 인민들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는 일, 일기가 불순할 때에는 스스로 승원으로 나아가 공양하는 일, 비구들로 하여금 풍우한설(風雨寒雪)에 옷이 젖을까 근심하지 않게 하여 밤낮으로 편안히 선정 사유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원림이란 승가를 위한 건조물, 일상의 먹거리는 돈이나 장전(莊田) 등을 말한다. 즉 방사(房舍)가 없거나 와구 의복이 없는 이, 여행자나 병자, 간병인 등 그들의 괴로움에 따라 보시의 과보에는 각기 차별이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앞서 언급한 계경이란 『중아함경』 제2권 「세간복경」(대정장1,p.427)으로, 본론 제35권 주24)를 참조할 것.
36)
곰의 인연은 이러하다.: 옛날 어떤 사람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갔다가 눈을 만나 길을 잃고 추위와 굶주림에 죽게 되었는데, 곰 보살이 그를 자신의 굴로 데리고 가 먹을 것을 주어 구해 주었다. 마침내 날이 개이고 길이 열려 하산하는 중에 사냥꾼을 만나 그 곰이 사는 곳을 일러주고 고기를 나누어 갖자 망은의 악업보로 말미암아 바로 팔이 떨어지는 대환(大患)을 만나게 되었다.(『대비바사론』 제114권, 한글대장경122,p.322) 사슴의 인연담은 이러하다.: 뿔이 눈같이 희고 털이 아홉 가지 색으로 빛나는 사슴보살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주었는데, 마침 왕이 그 사슴을 잡기 위해 거처를 알려주는 이에게 많은 상금을 준다고 하자 그 사람이 은혜를 잊고 알려주자 바로 나병의 과보를 받게 되었다.(『보살본연경』 하권 「녹품(鹿品)」대정장3,p.66하) 이 본생담은 모두 순현법수업의 예증으로 인용된 것이다.
37)
7성재(聖財)에 대해서는 주33)을 참조할 것.
38)
즉 그 밖의 ‘보은시’란 일찍이 보시 받은 이에게 보답으로 행하는 보시, ‘구보시’란 보답을 기대하여 행하는 보시, ‘희천시’란 하늘에 태어나기를 기대하여 행하는 보시, ‘요명시’란 명예를 추구하여 행하는 보시이다.
39)
『중아함경』 제47권 『구담미경(瞿曇彌經)』(대정장1,p.722중), 이 경에서는 여래ㆍ연각ㆍ4향4과ㆍ이욕선인ㆍ정진자와 정진하지 않는 자ㆍ축생에 대한 사사로운 보시[私施]에 대해 설하고 있다.
40)
앞에서 복전에는 취(趣)ㆍ괴로움ㆍ은혜ㆍ덕의 네 가지 차별이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부모와 최후생의 보살은 은혜의 복전이고, 병자는 괴로움의 복전이지만 법사는 어떤 복전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같이 묻게 된 것이다.
41)
이를테면 불상을 훔쳐 예배하였다면 근본업도의 죄는 무겁지 않지만, 그것을 녹였을 경우는 무거우며, 이때 불상을 훔친 업의 이숙과는 후기에 의해 크게 결정된다는 뜻이다.
42)
예컨대 동일한 살생업도라고 하더라도 축생을 죽인 것과 어미를 죽인 것은 그 경중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업은 대상[田]에 따라 경중이 성취되기도 한다. 혹은 동일한 대상이라 하더라도 근본업도에 따라 경중을 성취하기도 한다. 예컨대 부모를 죽이면 다른 이를 죽이는 것보다 무겁지만, 부모의 물건을 훔치면 다른 이의 물건을 훔치는 것보다 가벼운 것이다.
43)
앞에서는 여섯 가지 종류에 근거하여 업의 경중을 분별하였지만, 여기서는 완전하게 성취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따라 업의 경중을 분별한다.
44)
여기서 조반(助伴)이라 함은 주인(主因)을 돕는 부차적인 원인 내지 조건을 말하는 것으로, 예컨대 어떤 사람이 불여취(不與取)를 행한 후 다른 이의 처첩과 음행을 행하거나 다른 이를 죽였을 경우, 이때 불여취의 업은 조반을 갖기 때문에 단순한 조작업이 아니라 증장업으로 보다 무거운 업이다.
45)
원문은 ‘或不施福無失’이지만, 『현종론』(제24권)의 다른 판본에 따라 ‘或不受用物, 福無失’로 고쳐 번역하였다.
46)
즉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4무량심에 머물거나 정견의 선정을 닦을 때에도 다른 이가 이를 수용하는 일이 없으며, 다른 이에게 섭수되어 그들을 이익 되게 하는 일도 없지만 자신의 뛰어난 선심에 의해 복이 생겨나게 된다.
47)
이는 제다에 공양하고 보시하는 공덕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시물을 베풀고 예배하는 것과 같은 일은 필경 무용하여 헛된 것이 아닌가? 하는 힐난에 대한 해명이다. 즉 마음으로만 공양하지 않고 신ㆍ어업으로써 보시하고 공경하면 더 한층 많은 뛰어난 복이 생겨나기 때문에 제다에 대한 보시와 공경은 쓸모 없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48)
“말도가(末度迦, mṛdvīkā), 『구사석론』에서는 葡萄)의 종자로부터는 말도가의 열매가 생겨나니, 그 맛은 지극히 달콤하며, 임바(賃婆, nīmbā)의 종자로부터는 임바의 열매가 생겨나니, 그 맛은 지극히 쓰다.”(『구사론』 제18권, 고려장27,p.590하; 대정장29,p.97중; 권오민 역,p.843)
49)
보시의 공덕은 밭에 좋고 나쁨의 관계없이 다른 이를 이익 되게 하고 즐겁게 하려는 시주의 마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그것으로 인해 결코 좋지 못한 과보가 초래되는 것은 아니다.
50)
성죄란 굳이 금지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가 죄인 살생ㆍ투도ㆍ사음ㆍ망어ㆍ기어ㆍ양설ㆍ악구 등 신3 어4업을 말하며, 차죄란 그 자체로서는 죄가 아니나 그것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는 음주나 비시식(非時食) 등을 말함.
51)
열반에 의지하는 계(戒)라고 함은, 이를테면 열반을 목표로 하여 계를 지닐 경우 그것은 청정계이지만, 재부(財富)나 생천(生天)과 같은 유루의 과보(『구사론』 제18권에서는 ‘수승한 생’)를 얻기 위해 계를 지니는 경우 그것은 불청정계라는 뜻이다.
52)
첫째와 둘째는 불선의 근본업도와 그 방편을 떠나는 것이며, 셋째는 욕(欲)ㆍ에(恚)ㆍ해심(害尋)의 세 가지 나쁜 각(惡覺)의 뇌란에서 떠나는 것이며, 넷째는 삼보(三寶)를 섭수 호념(護念) 하여 온갖 무기심으로부터 떠나는 것, 또는 4념주에 머물면서 계를 섭수 호념 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부재(富財)나 뛰어난 생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정 즉 열반을 획득하기 위해 계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잡아비담심론』 제8권(대정장28,p.933중; 한글대장경177,p.683) 참조.
53)
『증일아함경』 제21권 「苦樂品」(대정장2,p.656중).
54)
여래의 타도(tathāgatasya dhātu)란 여래가 남긴 몸[遺身], 즉 사리(sarīra)를 말하며, 졸도파(stūpa)는 탑파, 혹은 탑을 말한다.
55)
사방승가(cāturdiśa saṃgha)란 현전승가(現前僧伽)와는 반대로 미래에 출현할 승가까지 포함하여 시간적ㆍ공간적으로 한정되지 않은 승가를 말하며, 네 가지 물건[四事]이란 음식ㆍ의복ㆍ와구(臥具)ㆍ의약품을 말한다.
56)
이는 『구사론』 제18권(고려장27,p.591중; 대정장29,p.97하; 권오민 역,p.847)에서는 선대 궤범사(軌範師)의 설. 『구사론기』 동권에 따르면, 선대 궤범사는 경부 혹은 대중부사(師), 혹은 유부 이사(異師).
57)
범보천의 수명은 신장의 길이가 1유선나이듯이 1겁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1권 ‘유정의 수명의 길이’ 참조.
58)
진제(眞諦)에 의하면 열 가지 뛰어난 행이란, 앞에서 언급한 네 가지 이외 부ㆍ모ㆍ아라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스스로 정법 중에 출가하고 다른 이를 출가하게 하고, 아직 법륜이 구르지 않는 곳에 법륜을 굴리는 것이다.(『구사론기』제18권 참조)
59)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40권 ‘업은 다생에 걸쳐 이숙한다는 비유자 설 비판’; 제43권 ‘인업과 만업’ 참조. 1원이 만원이 되었다고 할 때, 일원이 바로 만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백원이 되고 천원이 되어 만원이 되듯이, ‘1겁에 걸친 쾌락’이란 거듭한 생의 총합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60)
『구사론』(고려장27,p.591하; 대정장29,p.98상; 권오민 역,p.848)에서는 이 유여사의 설을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로 전하고 있다. 앞의 유여사는 1범복을 1겁의 천락(天樂)이라 하여 그 양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데 반해 이 논사(비바사사)는 추상적인 무제약수로 해석하고 있다. 즉 32묘상 각각은 백 복의 업에 의해 초래되는데, 그 때 1복의 양은 ①부처님만이 아는 것이다. ②근불보살(近佛菩薩,최후신의 보살)을 제외한 일체 유정이 닦은 부락과(富樂果)의 업, ③3천대천세계를 낳는 업의 증상력.(주13 참조)
61)
12분교란 부처님의 설법양식을 12가지 형식으로 분류한 것으로, 첫 번째 계경(sūtra, sutta)은 부처님의 교설을 간결하게 정리한 산문. 수트라는 ‘실’이나 ‘선(線)’의 의미로, 실에 꽃을 꿰어 화환을 만들 듯이 간단한 산문을 연결하여 작성된 불타의 설법을 말한다.
62)
응송(또는 重頌, geyya, geya)이란 앞의 계경의 내용을 운문(시)으로 반복하는 형식의 설법. 『이부종륜론』에 의하면, 유부는 “부처님의 설(경)은 모두 요의가 아니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본론 제1권 ‘아비달마의 설자(說者)에 관한 세친의 불신 비판’ 참조.
63)
기별(혹은 記說 授記, vyākaraṇa, veyyākaraṇa). 간결한 문답형식의 법문. 참고로 대승에서 기별 혹은 수기라고 하면 성불의 예언을 의미한다.
64)
이는 아마도 상좌(上座)의 말일 것이다. 즉 상좌는 “성교(聖敎)에서 설하고 있는 온갖 사실로서 부처님 스스로 표석(標釋)한 것, 다시 말해 스스로 나타내고서 스스로 해석한 것을 일컬어 요의경이라 하며, [그렇지 않은] 그 밖의 계경을 일컬어 불요의경이라고 한다”고 하였다.(본론 제27권 ‘요의경과 불요의경에 관한 상좌와 경부설 비판’ 참조)
65)
풍송(또는 偈頌 伽他,gāthā). 운문의 형식으로, 앞의 응송이 계경의 내용을 반복한 것이라면 이것은 『법구경』이나 『장로게(Theragāthā)』처럼 독립된 형식의 시구(詩句)이다. ‘구(句)’의 구성에 대해서는 본론 제14권 ‘명(名)ㆍ구(句)ㆍ문(文)의 수량에 대하여’를 참조할 것.
66)
자설(또는 無問自說, 感興語, udāna)이란 감흥에 의해 스스로 설하는 법문형식.
67)
연기(또는 因緣, nidāna)란 율 조문의 성립사정에 관한 에피소드.
68)
비유(avadāna)란 원래 말 그대로 종의를 나타내기 위한 예증의 뜻이지만, 인과업보 설과 관련하여 어떤 이(대개는 불제자)가 뛰어나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가 과거세(전생 혹은 本生)에 영웅적인 행위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과거세의 영웅담을 말한다. 석존의 전생담도 비유의 일종이지만(이를 ‘보살비유’하고 함), 이와는 별도로 ‘본생(本生)’이라 부른다.
69)
본사(itivṛtaka, itivuttaka)란, 남전에 의하면 ‘세존에 의해 설해진 것을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는 정형구로 시작하고 끝나는 법문을 말지만(이 경우 ‘如是語’라고 함), 유부에 의하면 ‘그와 같이 전해 내려오는 옛날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러나 석존의 과거이야기는 ‘본생’, 불제자의 과거세의 이야기는 ‘비유’라는 명칭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것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그 밖의 이야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70)
본생(또는 前生談, jātaka)은 석존의 전생이야기.
71)
방광(vaipulya, vedalla)이란 중층적인 교리문답. 참고로 대승에서는 『대방광불화엄경』에서 보듯이, 심오한 뜻을 광설한 대승경전을 말한다.
72)
희법(또는 未曾有法, adbhuta dharma, adbhuta dhamma)이란 희유한 공덕이나 부사의(不思議)한 경계에 대한 법문.
73)
논의(또는 優波提舍, upadeśa)란 교리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 이를 마트리카(matṛka, 論母 또는 本母), 또는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라고도 한다.(후설)
74)
다시 말해 “아직 선근이 생겨나지 않았고 정법에 들지 못한 초입자(始業位)에게 선근을 심고 정법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 수트라를 설하였으며.”(『대비바사론』 제1권, 대정장27,p.1하-p.2상)
75)
『대비바사론』 제1권(대정장27,p.1중-p.2상; 한글대장경118,p.21 이하)에서는 삼장의 차별에 대해 명칭[名]ㆍ근거[依處]ㆍ내용[所說]ㆍ목적[所爲] 등 여덟 가지 관점에서 논의하고 있다.
76)
여기서 ‘분’은 인(因)의 뜻으로, 세간의 복과, 번뇌로부터 해탈하여 열반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량과, 4제의 진리성을 결택하여 무루지를 낳게 되는 가행의 원인을 순복분(順福分)ㆍ순해탈분(順解脫分)ㆍ순결택분(順決擇分)이라고 한다.
77)
순해탈분의 선업이란 해탈에 수순하여 그 원인이 되는 5정심위(停心位)ㆍ별상념주ㆍ총상념주의 3현위(賢位)를 말하는 것으로, 본론 「현성품」 제59~61권에 걸쳐 논설한다.
78)
순결택분의 선업이란 무루성도의 과보를 초래하는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의 4선근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본론 「현성품」 제61~63권에 걸쳐 상론한다.
79)
본 단은 업론의 여설(餘說)로서, 세간 일상사와 관계하는 업 자체에 대해 분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여기서 ‘서’란 글을 쓰는 것[書字]이고, ‘인’은 수인(手印, mudra)을 짓거나 도장을 새기는 것[調印]이고, ‘산’은 숫자를 헤아리는 것[語算]이고, ‘문’은 문장이나 시ㆍ노래를 읽고 읊는 것[文章]이고, ‘수’는 계산하는 것[計數]이다.
80)
다시 말해 글씨[書]와 도장[印]은 원인에 결과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과 도장을 새기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업의 본질은 신업(즉 색온)과 그것을 능히 등기시키는 수ㆍ상ㆍ행ㆍ식온이다.
81)
“안온(安隱)한 것을 설하여 ‘선’이라 이름하는데, 이를테면 열반 중에서는 모든 괴로움이 영원히 적멸하여 최고로 안온하니, 이는 마치 어떠한 병도 없는 상태[無病]와 같다. 이는 곧 ‘승의(paramārtha, 궁극적인 것)’에 따라 선의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그래서 열반을 승의선이라고 이름한 것이다.”(본론 제36권 ‘3성의 근거가 되는 4종의 선ㆍ불선과 2종의 무기’ 참조); 본론 제40권 주2) 참조.
82)
즉 일체의 유위법과 허공ㆍ비택멸의 무위법은 앞에서 논설한 선과 상주(常住)의 상(相)을 갖지 않기 때문에 ‘유상(有上)의 법’이다.
제45권
1)
12연기의 첫 번째 지분(支分)은 무명이었다.
2)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2중; 대정장29,p.98중;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854)에서는 다음의 열여섯 가지 중 두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여덟 번째, 열두 번째, 열여섯 번째를 제외한 열 가지에 대해서만 약술하고 있다.
3)
즉 온갖 번뇌가 현기(現起)함으로 말미암아 번뇌의 근본인 득(得)이 더욱더 견고해져 끊으래야 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4)
여기서 ‘감임성(堪任性)’이란 작의(作意)를 말한다.(본론 제11권 ‘대선지법’ 참조) 즉 온갖 번뇌가 현기하면 심신(心身)이 거칠고 둔중해져, 심신을 경쾌 예리[輕利]하게 하고 또한 안적(安適)하게 하여 능히 선법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작의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5)
식의 흐름에는 다음 생을 받을 때 부모에 대한 애념(愛念)을 일으키는 속생(續生)의 식과, 소연의 경계에 대해 촉(觸)을 일으키는 촉연(觸緣)의 식이 있다. 곧 번뇌는 후유의 소연에 대해 능히 속생의 식을 일으키며 소연에 대해 능히 염오식을 낳기 때문에 ‘식의 흐름을 인도한다’고 말한 것이다.
6)
견소단(見所斷)은 견도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수소단(修所斷)은 수도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 1부 내지 5부는 4제 각각에 대한 네 가지 통찰(즉 見苦所斷 내지 見道所斷)과 수도의 5부 중 한 가지 내지 다섯 가지 도에 의해 끊어지는 번뇌를 말함.(본론 제46권 ‘98수면으로의 전개’ 참조)
7)
변행혹(遍行惑, 줄여서 遍惑)이란 그 세력이 특히 강력하여 만약 욕계의 그것이면 욕계(自界) 5부의 염오법을 두루 낳는 원인이 되는 견고소단(見苦所斷)의 유신견(有身見)ㆍ변집견(邊執見)ㆍ계금취(戒禁取)ㆍ사견(邪見)ㆍ견취(見取)와 의(疑), 견집소단의 사견ㆍ견취와 ‘의’, 그리고 견고ㆍ견집소단의 무명(전통적으로 이를 ‘7見ㆍ2疑ㆍ2무명의 11변혹’이라 함)을 말한다.(본론 제48권에서 상론)
8)
‘유루연’ 등이라 함은 유루의 법 등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번뇌를 말함.(본론 제48권에서 상론)
9)
‘수증’이라 함은 ‘~을 따라서 증장한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소연수증과 상응수증 두 가지가 있는데, 전자는 소연의 경계와 능히 그것을 반연하는 수면이 서로 연이 되어 번뇌의 힘이 증장되는 것이고, 후자는 번뇌와 그것과 상응하는 심ㆍ심소가 서로 연이 되어 번뇌의 힘이 증장되는 것을 말한다.(본론 제49권에서 상론)
10)
원문은 ‘此因所緣下斷’이나 앞뒤 문맥에 따라 ‘此因所緣不斷’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11)
수소단의 번뇌(修惑)가 9품단(品斷)이라면, 견소단의 번뇌(見惑)는 1품단이다.
12)
본문은 ‘此田彼故成就’이지만, 구(舊) 송본(宋本)이나 문맥에 따라 ‘此由彼故成就’로 고쳐 번역하였다.
13)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2중; 대정장29,p.98하; 권오민 역,p.854). 그러나 현존의 현장역본 『구사론』에서는 전반 1구만이 논설되고 있다.
14)
이에 대해 경주 세친은 “여섯 가지 수면의 본질[體]이 각기 동일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고 하였다.(『구사론』 제19권, 고려장27,p.592중; 대정장p.98하; 권오민 역,p.854)
15)
이를테면 『잡아함경』 제18권 제490경(대정장2,p.127상); 『증일아함경』 제34권 「칠일품(七日品)」 제3경(동p.738하); 『장아함경』 제10권 「십상경(十上經)」(대정장1,p.54중)등에서는 각기 7사(使, ‘사’는 수면의 구역어)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16)
이하 7수면설의 방론(傍論)으로, 욕탐ㆍ진 등의 현행하는 번뇌와 수면의 관계에 대해 논의한다. 이는, 현행하는 번뇌와 수면을 동일한 것으로 볼 것인가, 다른 것으로 볼 것인가? 다시 말해 욕탐수면을 ‘욕탐이 바로 수면’이라는 지업석(持業釋, 동격복합어)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욕탐의 수면’이라는 의주석(依主釋, 한정복합어)으로 해석하여야 할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욕탐은 현행하는 것이므로 수면 역시 현실의 번뇌로서 번뇌의 다른 이름일 뿐이지만, 후자라면 수면은 욕탐을 일으키는 불상응행법으로서 심ㆍ심소와는 다른 별도의 실체여야 한다. 유부의 경우 욕탐의 본질은 탐ㆍ진과 마찬가지로 수면이고, 그것은 바로 현행의 번뇌인 전(纏, parya- vsthāna) 즉 심상응법의 하나로 해석하고 있지만, 대중부의 경우 현행의 번뇌인 욕탐을 야기하는 불상응행법으로 간주하였다. 이에 대해 경량부에서는 수면을 번뇌종자의 뜻으로 해석하여, 번뇌가 잠자고 있는 상태를 수면, 깨어 활동하고 있는 상태를 ‘전’이라고 하였다. 즉 『구사론』(제19권) 상에서 경부사(經部師)는 ‘번뇌종자인 수면은 심상응도 아니고 불상응행도 아닌 마음 자체의 차별공능이다’고 논의함으로서 유부와 대중부를 동시에 비판하고 있는데, 이하 이를 선설(善說)로 평석하는 경주(經主) 세친(世親)과 상좌(上座)의 해석에 대해 재 비판한다.
17)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3상; 대정장29,p.99상; 권오민 역,p.857-858). 참고로 이는 『구사론』상에서 경부사(經部師)의 설로 인용되고 있다.
18)
그러나 마음의 경우는 비록 차별적인 공능 즉 종자로서 상속할지라도 이 같이 관찰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수면으로 설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19)
즉 유정신은 색과 심(識)ㆍ심소(受ㆍ想ㆍ思) 등의 5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인정하였으면서, “수면은 바로 온갖 유정의 상속에 의해 유지되는 번뇌의 종류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것만을 수면종자라고 이름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뜻인가?
20)
즉 노력하지 않고서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수면(번뇌종자)만이 아니라 마음도 역시 그러하며, 괴로움은 수면을 변지(遍知)할 때뿐만 아니라 전(纏, 현행의 번뇌)을 관찰할 때에도 역시 종식되며, 나아가 지자(智者)는 수면뿐만 아니라 5취온도 병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상좌가 제출한 논거는 미확정의 오류[不成似因]이라는 것이다.
21)
경주가 말하듯이 유정의 소의신 상에 수면(번뇌종자)이 항상 수반되고 있다고 한다면, 항상 현행(現行)해야 하지만, 유부에 의하는 한 인연에 의해 작용하는 순간을 현재라고 하기 때문에 오로지 현재에만 현행한다.
22)
여기서 식미제는 승론(勝論, Vaiśeṣika)의 개조 카나다(Kaṇāda, 기원전 150-50무렵). 그는 낮에는 색(色)ㆍ성(聲) 따위를 피해 산이나 숲 속에 숨어들고 밤에만 걸식하고 다녀 올빼미와 비슷하였기 때문에 ‘휴류자(鵂鶹子, Ulūka)’라고도 이름하였는데, 밤이 되면 부녀자나 어린애들을 놀라게 하면서 나돌아 다니다 마당의 맷돌에서 겨에 섞여있는 쌀 알갱이[米齊]를 골라 먹었기 때문에 ‘식미제’(羯拏僕, Kaṇabhuja, 古名은 蹇尼陀Kaṇāda의 의역)라고도 하였다.(『성유식론술기』 제1권末) 그는 세계를 해명함에 있어 실체[實]ㆍ속성[德]ㆍ운동[業]ㆍ보편[同]ㆍ특수[異]ㆍ내속[和合] 등의 6가지 범주[句義]를 설정하였는데, 중현이 경부의 번뇌종자의 차별공능 설을 승론에 비유한 것은 속성구의 중 행(行, saṁskāra)이 이와 유사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행’이란 말하자면 잠재세력으로, 여기에는 반복된 지식의 습득으로 생겨나는 인상(印像, bhavānā)과 반복된 운동에 의해 생겨나는 타성(vega)이 있는데, 전자가 기억이 원인이 된 행[念因]이라면 후자는 작용이 원인이 된 행[作因]이다.『勝宗十句義論』, 한글대장경250, p.592) 참고로 혜월(慧月)의 『勝宗十句義論』에서는 6구의 외에 가능력[有能, śakti]ㆍ불가능력[無能, aśakti]ㆍ보편이면서 특수[俱分, sāmānya-viśeṣa]ㆍ비존재[無說, abhāva]를 더하여 10구의설을 주장하였는데, 여기서 ‘가능력’이란 실체ㆍ속성ㆍ운동으로 하여금 결과를 산출하게 하는 힘을 말한다.(『勝宗十句義論』,p.594). 공능(śakti)이라고 하는 어의(語義)로 본다면 후자가 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지만, 후술하는 바대로 전자(즉 ‘행)에 따라 이같이 말하였다.
23)
『승종십구의론』(앞의 책,p.592), “행(行)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기억이 원인이 된 것[念因]이며, 둘째는 작용이 원인이 된 것[作因]이다. 기억이 원인이 된 것이란 이를테면 자아와 화합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실체에 대한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의 지식의 작용[行]에 의해 생겨난 바를 자주 익혀 차별 지은 것이니, 이것을 일컬어 기억이 원인이 된 행이라고 한다.”
24)
승론에서는 ‘행’을 독립된 하나의 실재로 간주하여 지식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 인정하지만, 경주 세친은 전(纏) 즉 현행하는 번뇌를 떠나 별도의 실체(이를테면 不相應行法)로서의 종자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것이 번뇌의 결과이고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승론보다 저열한 논의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욕탐수면’에서 수면이 욕탐 등의 번뇌를 일으키는 공능(혹은 종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번뇌와는 다른 별도의 실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25)
수계(隨界)는 훈습(熏習)ㆍ공능(功能)ㆍ증장(增長) 등과 더불어 종자의 이명(異名)이다.(본론 제12권 ‘경주의 종자설 비판’ 참조) ‘상좌의 수계설’에 대해서는 본론 제18권에서 상론하였다.
26)
출처미상. 어린 동자(15세 이전의 청소년)나 영해(출생 후 6세까지)는 천진무구하지만 그래도 본능적인 욕탐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수면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27)
유부에서는, 앞서 상좌가 인용한 세 번째 경문 중 ‘아울러 수면도 끊게 된다’는 말을 욕탐전과 아울러 그것에 비롯된 속박[隨縛]을 끊게 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든지, 혹은 욕탐전의 획득[得]을 일시 ‘수면’이라 말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즉 불은 괴로움의 원인이기 때문에 ‘불은 괴로움이다’고 하는 것처럼 ‘욕탐 등의 수면의 득’을 일시 수면이라 하고, 그러한 득을 끊는 것을 ‘아울러 수면도 끊게 된다’고 하였으며, 따라서 욕탐 등의 온갖 번뇌를 설하여 수면이라 이름하였다는 것이다.(『구사론』 제19권, 고려장27,p.592하; 대정장29,p.98하; 권오민 역,p.856-857) 본 상좌의 논설은 이에 대한 반론이다.
28)
유부 득론(得論)에 대한 경량부(혹은 경주)의 비판은 본론 제12권 ‘경주의 종자설 비판’에서 논설되었다.
29)
경량부에서는 심소의 개별적인 실재성을 부정하고 다만 마음의 전변 차별상이라고 주장한다.(본론 제11권 ‘비유자의 심소 무별체설 비판’ 참조) 따라서 심소는 마음과 실체로서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30)
즉 상좌가 주장하는 수계(隨界) 역시 일찍이 어떠한 경에서도 그것을 설한 적이 없으며, 또한 이미 그것에 대해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현행의 번뇌를 일으키는 종자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31)
원문은 ‘由此已遣已遣得言’. 이는 앞서 상좌가 세 번째로 인용한 경설 “마음이 잠시 욕탐전을 일으킬지라도 출리(出離)의 방편을 심구(尋求)하여 참답게 알면, 그는 이로 말미암아 욕탐전을 능히 올바로 제거[遣除]할 수 있을뿐더러 아울러 수면도 끊게 된다”에서 ‘욕탐전을 제거하고 아울러 수면도 끊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끊는다’고 하는 말은 획득된 것을 끊는 것이며, 그래서 유부에서는 여기서의 수면을 ‘번뇌의 득’에 근거한 말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32)
주27) 참조.
33)
색에 근거하여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에 색에 ‘수면’이라는 말을 적용시켜 설하기도 하였다는 뜻이다.
34)
계경에서 전(纏)과 수면이 동시에 끊어진다(‘출리의 방편을 참답게 알면 욕탐전을 능히 제거할 수 있을뿐더러 아울러 수면도 끊게 된다’)고 한 이상, 양자를 다른 것으로 이해하여 현행의 번뇌와 그것의 종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만약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시간을 달리하여 끊어져야 한다.
35)
여기서 3결은 견결(見結)ㆍ계금취결(戒禁取結)ㆍ의결(疑結). 이를 끊고서 예류과를 획득한다.
36)
상좌가 주35)의 경문 중에서의 탐 등을 수면이라고 해석한 것과, 앞서 “아울러 수면도 끊게 된다”는 경설 중에서의 수면을 번뇌의 득(得)으로 해석한 것에 차이가 없다. 즉 탐 등이 바로 수면이라면, 수면을 종자로서의 공능 수계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37)
경량부에 의하면 소의신 중의 번뇌(혹은 선법)의 종자가 손상되어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 것을 ‘단(斷)’이라 한다.(본론 제12권 ‘경주의 종자설 비판’ 참조)
38)
즉 상좌는 “욕탐 등의 번뇌가 바로 수면이라면, 욕탐 등을 수면의 본질이라고 해야 한다”고 힐난하고 있지만, 그 같은 논의를 수면은 욕탐 등의 번뇌에 수반되는 공능이라는 자신의 주장에 적용시킬 경우, 유학의 마음도 욕탐 자체(즉 욕탐에 수반되는 공능)와 동일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에 의하는 한 수면은 욕탐과 별체(別體)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9)
원문은 ‘隨眠與隨眠體異類行相, 旣得相應’. 앞의 ‘수면’은 현행의 번뇌 즉 전(纏)을 의미하고, 뒤의 ‘수면의 본질[體]은 수계 공능으로서의 번뇌종자를 말하는 것인가?
40)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3상; 대정장29,p.99상; 권오민 역,p.858)에서는 이 경문을 『육육계경(六六契經)』이라 명기하면서 ‘낙수에 탐수면이 존재한다’는 후반 구절만을 인용하고 있다. 『육육계경』에서 육육이란 6근(根)ㆍ6경(境)ㆍ6식(識)ㆍ6수(受)ㆍ6상(想)ㆍ6사(思, 혹은 愛)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잡아함경』 제13권 제304경, 제305경(대정장2,p.68하-69하)에서 설해지고 있지만, 인용한 경문과 유사한 내용은 같은 경 제17권 제468경(동p.119중)에 나온다. “낙수를 관하는 것은 낙수에 대한 탐사(貪使, 탐수면의 구역)를 끊기 위해서이다.” 즉 경에서 낙수의 상태에서 탐수면이 현행하는 것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곧 탐수면이 낙수와 상응하여 일어난 상응법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41)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3상; 대정장29,p.99상; 권오민 역,p.859).
42)
즉 낙수의 상태에 탐수면이 존재한다고 함은 종자(이를테면 가능태)로서 존재한다는 말이지 수면이 이미 생겨나 현행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는 뜻이다.
43)
즉 낙수가 가능태로서 탐의 종자를 훈습하고 있을 때(즉 잠자고 있을 때), 그 때를 ‘탐수면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이며, 그것이 현실태가 되면(다시 말해 잠에서 깨어나면) 그것은 수면이 아닌 현행의 번뇌 즉 전(纏)이 된다는 뜻이다.
44)
결과인 탐번뇌에 그 원인(종자)인 ‘수면’이라는 명칭을 일시 설정한 것이라는 뜻이다. 즉 경에서는 ‘탐전(貪纏)이 존재한다’고 해야 하지만, 그 원인에 근거하여 ‘탐수면’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45)
유부에 의하는 한, 욕탐 등을 떠나 수면 자체가 별체(別體)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욕탐 등이 바로 수면이기 때문이다.
46)
원문은 ‘若有性俱, 若卽有性, 於無體法, 理俱不成’. ‘자성[性]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란 속성 내지 작용으로서의 존재를, ‘바로 자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란 법체로서의 존재를 말하는 것인가? 즉 수면의 성격이 어떠하든 간에 경에서 “탐수면이 존재한다”고 설한 이상, 그것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법에 근거하여 설해진 것이라는 뜻이다.
47)
원문은 ‘有謂有體, 是現有義’.
48)
이때 욕탐이 ‘존재한다’는 말은 다른 때가 아니라 바로 욕(欲)이 생겨난 그 때를 말하는 것처럼, “낙수에 탐수면이 존재한다”는 경설의 경우도 낙수가 생겨나는 바로 그 때 탐수면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49)
원문은 ‘非由自體, 由起得故.’ 이 논설은, 계경에서 수면을 수박(隨縛)이라고 함은 지금 바로 일어나[現起] 획득된 것을 전제로 하여 말한 것으로, 경량부가 말하듯이 잠재적인 힘(종자 혹은 공능)이나 그것의 획득을 전제로 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50)
『발지론』 제5권(대정장26,p.943상중); 『대비바사론』 제69권(대정장27,p.355하)에서는 98수면 중 몇 가지가 3계의 이생과 성자에게 수증(隨增)되고 수박(隨縛) 되는지에 대해 논설하고 있다.
51)
바사(婆沙)에서도 분별논자(分別論者)의 설이 자주 인용되지만, 구체적인 학파를 지시하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분별논사란 현존자료에 의하는 한, 대중부(大衆部) 혹은 화지부(化地部)이다. 『이부종륜론』(대정장49,p15하-16상; p.16하-17상)에서는 이에 관한 그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수면은 심(心)도 아니고 심소도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어떤 대상(所緣)도 갖지 않는다. 즉 수면과 전(纏)은 서로 다른 존재로서, ‘전’이 심과 상응하는 것이라면 수면은 상응하지 않는 것이다.” 즉 그들에 의하면, ‘전’이 현재 작용하고 있는 제 번뇌로서 마음과 상응하는 것이라면(그럴 경우 그것은 마음과 동일한 구체적 대상을 갖는다), 수면은 바로 그것을 낳게 하는 잠세적인 힘이다. 따라서 수면은 마음도 아니고, 마음과 상응하는 심소도 아니며, 구체적이고도 특정의 대상을 갖지 않는 추상적 원리로서의 불상응행법이라는 것이다.(주63 참조)
52)
유부에 의하면, 성도가 끊는 것은 번뇌가 아니라 번뇌의 득(得)이며, 이때의 성도를 무간도(無間道)라고 한다.(본론 제63권 ‘忍ㆍ智의 작용과 순서’ 참조)
53)
원문에는 ‘煩惱但以無名相’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판본(宋ㆍ元ㆍ明本)에 따라 ‘상’을 ‘근(根)’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54)
무명의 원인에 대해서는 본론 제18권 ‘노사의 결과와 무명의 원인에 관한 상좌와 경주설 비판’을 참조할 것.
55)
만약 현행의 번뇌를 낳는 수면이 불상응법이라면, 이 경우 하품의 욕탐도 불상응법이라고 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56)
주40) 참조.
57)
앞서 상좌가 인용한 계경에서는 “……욕탐전을 능히 올바로 제거할 수 있을뿐더러 아울러 수면도 끊게 된다”고 하여 ‘전’과 수면을 구별하여 논설하였는데, 지금 여기서 논주가 인용한 경문에는 ‘아울러 수면……’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모두 현행의 번뇌(전)에 대해 말한 것일 뿐이라는 힐난한다면.
58)
원문은 ‘액(扼)’으로 되어있으나 일반적으로 ‘액(軛)’으로 쓰인다. 다 같이 멍에나 결박(yoga)의 뜻이다.
59)
누(漏)ㆍ취(取)ㆍ액(軛)ㆍ수면(隨眠)ㆍ폭류(瀑流)ㆍ개(蓋)ㆍ결(結) 등은 모두 번뇌의 이명(異名)으로,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3권~제54권에 걸쳐 상론한다.
60)
즉 욕탐과 수면을 개별적인 법으로 이해하여 수면을 욕탐 등을 낳는 불상응법이라고 한다면, ‘욕’과 ‘누’, ‘욕’과 ‘취’, ‘욕’과 ‘액’ 등도 각기 다른 법으로 이해하여 ‘누’ ‘취’ 등도 역시 욕탐을 일으키는 불상응행법이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주16 참조)
61)
수면을 상응법이라고 해야 하는 이 같은 세 가지 이유는 법승(法勝)의 『아비담심론(阿毘曇心論)』 제2권(대정장28,p.817하), “以諸隨眠 染惱心故, 覆障心故, 能違善故, 非不相應.”에서 설해진 것이다. 즉 수면이 만약 불상응법이라면 이같이 마음과 관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법승(Dharmaśrī)은 길장(吉藏)의 『삼론현의』에 의하면 불멸(佛滅) 700여년, 『백론소』에서는 800년 중, 보광의 『구사론기』에서는 불멸 500년 중이라 하여 그의 년대기가 일정하지 않다. 『출삼장기집』에서는 그를 『대비바사론』이전 인물로 전하고 있지만, 그의 『아비담심론』은 바사의 요강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번뇌론의 경우 바사와 설을 달리하기 때문에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하는 정통 유부로는 볼 수 없고, 이른바 외국사(外國師)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간주된다. 그의 출신지는 『구사론기』에 의하면 토화라박촉국(土火羅縛蠋國)이다. Tokhara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방지역이다.
62)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2하-593상; 대정장29,p.98하-99상; 권오민 역,p.857). 즉 대중부처럼 수면이 불상응행법이라고 주장할 경우, 마음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등의 작용은 수면의 작용이 아니라 현행하는 번뇌의 작용이라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이는 그들의 힐난에 대한 올바른 논증이 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경주(經主) 세친은 이 같은 의미에서 경부사(經部師)가 설하는 바(주17의 본문)가 가장 뛰어나다고 하였다.
63)
이 같은 점에서 본다면, 앞에서 논설한 분별논사(주51)는 화지부(化地部)의 말종(末宗)인가? 화지부 본종(本宗)은 과미무체(過未無體)를 설하지만, 말종은 과거ㆍ미래의 실유를 주장한다.(『이부종륜론』, 대정장49,p.17상) 그러나 앞에서 논설한 분별논사는 수면을 오로지 불상응법이라고 주장하였으므로 대중부 혹은 화지부이며, 여기서 분별론은 화지부 말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64)
분별론과 독자부에서는, 앞서 수면을 불상응법이라고 주장한 분별논사나 이를 비판한 아비달마논사가 인용한 경론(經論)에 근거하여 불상응법으로서의 수면과 상응법으로서 수면을 모두 주장하였다는 뜻이다.
65)
주33) 참조.
66)
즉 과거ㆍ미래법의 실재성만 인정한다면, 굳이 ‘수면’이라고 하는 불상응행법을 설정하지 않더라도 욕탐 등 생사윤회를 초래하는 현행의 온갖 번뇌가 어떻게 일어나고 유전 상속하는지 밝힐 수 있다고 하는 뜻이다.
67)
앞서 6수면은 탐을 욕탐(欲貪)과 유탐(有貪)의 둘로 나눔에 따라 7수면이 된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욕탐이 욕계의 탐이라면, 유탐은 색ㆍ무색계의 탐이다. 이하 유탐에 대해 논설한다.
68)
욕계에서의 탐은 외문전(外門轉) 즉 의복이나 음식 금전 등 외적인 경계를 추구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욕탐(欲貪)이라 하였으며, 색ㆍ무색계에서의 탐은 내문전(內門轉) 즉 선정의 경계(예컨대 喜ㆍ樂)를 추구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유탐(有貪)이라 하였다.
69)
즉 어떤 이들은 색계와 무색계에서의 존재[有]를 해탈한 존재라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 ‘유탐’이라는 명칭의 수면을 설정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생 외도는 무상천(無想天)의 5백 대겁 동안의 무상을 진실의 해탈로 간주한다. 본론 제5권 ‘무상정’ 참조
70)
‘유(有)’란 내외의 일체의 존재를 포함하는 말이지만, 상 2계의 소연을 의미할 경우 정려심과 그 소의지(所依止)인 신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즉 상계의 유정은 이미 욕탐을 떠났기 때문에 외적 경계에 집착하는 일이 없으며, 오로지 선정과 자신에 대해서만 미착(味著)하기 때문이다.
71)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693중; 대정장29,p.99상; 권오민 역,p.859-860).
72)
외도의 선인도 반드시 욕탐과 진에를 끊어야 색ㆍ무색계에 들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자신의 존재[生身]에 대한 애탐 즉 아애(我愛)는 남아있기 때문에, 앞서 제기한 ‘욕탐수면과는 별도로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는 의문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라는 뜻이다. 즉 상좌는 오로지 외문 즉 욕계대상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탐을 ‘욕탐’, 내문 즉 존재자체를 반연하여 일어나는 3계의 탐을 ‘유탐’이라고 하였다.
73)
여기서 아뢰야(ālaya)는 애착의 뜻으로 집장(執藏)이라 번역되며, 니연저(nkānti, 혹은 niyati)는 집착의 뜻으로 집취(執取)로 번역된다. 이와 유사한 경문은 『잡아함경』 제13권 제312경(본론 제42권 주21의 본문 참조)이지만, 추구하는 내용은 다르다. ‘상좌가 별도로 전승한 경(上座所持契經)’이라는 말로 볼 때 경량부 소전(所傳)의 경전이 따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4)
여기서 『칠유경』이란 지옥유(有)ㆍ방생유ㆍ아귀유ㆍ천유ㆍ인유ㆍ업유(業有)ㆍ중유의 일곱 가지 존재를 설하고 있는 경으로, 현존하는 경에서는 『장아함경』 제10권 『법보경(法報經)』(대정장1,p.236중)이 이에 해당한다. “當知七有. 一爲不可有(즉 不可意의 지옥), 二爲畜生有, 三爲餓鬼有, 四爲人有, 五爲天有, 六爲行有, 七爲中有.” 그리고 ‘극칠유’(혹은 極七返有)란 인천(人天)을 최대한 일곱 번 왕래하고서 반열반에 드는 예류과의 성자. 이는 즉 성교에서는 ‘유’라는 말을 오로지 3계에 두루 적용시켜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1계 내지 3계의 일부에 대해서도 사용하였다는 뜻의 경증.
75)
6수면 중 탐을 욕탐과 유탐으로 나누고, 유탐을 다시 내문전과 외문전으로 나누어 전체적으로 여덟 가지로 분류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76)
주74)의 『칠유경』 참조.
77)
즉 앞(주68의 본문)서 “욕계의 탐은 대부분 욕[탐]의 경계대상인 외문(外門) 즉 외적인 경계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유탐이라 이름하지 않지만, 상(上) 2계의 탐은 대부분 선정의 경계인 내문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유탐’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고 하여 ‘대부분[多分]’이라는 한정어를 사용하여 논설하였기 때문에, 유탐이 모든 경우(예컨대 욕유의 ‘유’)에 적용되지 않더라도 허물이 되지 않는다는 뜻의 해명.
78)
여기서 ‘그러한 차별의 인연’이란, 욕계의 경계대상에 대한 탐ㆍ진은 외도선인이 색ㆍ무색계에 드는 것을 장애하지만, 욕계계의 생신을 반연하는 탐은 장애하지 않는다고 차별하여 논의하는 이유. 즉 그럴 경우 아라한도 욕계의 경계대상을 반연하는 탐은 반박에 끊지만, 생신을 반연하는 탐(즉 아애)은 점진적으로 끊는다고 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79)
여기서 ‘이러한 논증’이란, 앞서 상좌가 욕계생신을 반연하는 탐이 유탐이라는 주장의 논거로 제시한 외도선인의 예증에 따라 ‘아라한도 욕계 소의신에 대한 아만(我慢)과 아애(我愛)를 갖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의 논증.
80)
『안온경』은 『잡아함경』 제5권 제103경(대정장2,p.29하-30중)으로, 후술하는 ‘저 구수’나 ‘구수 안온(安穩)’은 본 경의 설자(說者)인 차마(差摩, Khemaka, 安穩의 뜻). 즉 이 경은 큰 병을 앓고 있는 차마비구와 상좌들이 그를 간호하던 타사(陀娑)비구를 통해 5온 무아에 대해 토론한 것으로, 차마는 “5온은 ‘나’도 ‘나의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였음에도 누진(漏盡)의 아라한이 되지 못하는 것은 5취온에 대해 아만(我慢)ㆍ아욕(我欲)ㆍ아사(我使)를 끊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고 멸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고 하면서 여기서의 ‘아’에 대해 다시 설법하고 있는데, 이하 중현과 상좌 사이의 논란은 아라한을 성취하였다는 차마비구가 이같이 말하게 된 소이에 대한 것이다.
81)
같은 경(대정장2,p.30상).
82)
주 80)에서 언급한 현존의 경에서도 불타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중현과 상좌는 『안온경』으로 일컬어진 이 경을 달리 전승하였던 것인가?
제46권
1)
여기서 ‘견(dṛṣṭi)’이란 먼저 숙고[審慮]한 다음 확인 판단[決度]하는 것(審慮爲先 決度名見)을 말한다.(본론 제6권 ‘見ㆍ非見 분별’ 참조) 5견에 대해서는 본론 제47권에서 상론한다.
2)
98수면이란 탐(貪)ㆍ진(瞋)ㆍ만(慢)ㆍ무명ㆍ의(疑)ㆍ유신견ㆍ변집견ㆍ사견ㆍ견취ㆍ계금취의 10수면이 작용하는 세계 즉 3계(界)와, 끊어지는 유형 즉 4제(諦) 각각에 대한 네 가지 관찰[見道]과 선정을 통한 수습[修道]의 다섯 가지 유형[五部]에 따라 분류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번뇌에는 이지적 측면의 번뇌[迷理惑]와 정의적 측면의 번뇌[迷事惑]가 있는데, 전자는 사설(邪說)ㆍ사교(邪敎)에 의해 일어나는[分別起] 후천적 번뇌이기 때문에 올바른 관찰에 의해 즉각적으로 제거될 수 있는 반면, 후자는 선천적으로 갖는[俱生起] 본능적 번뇌이기 때문에 오랜 시간에 걸친 반복된 수습이 필요하다. 유부에서는 전자를 견혹(見惑) 즉 4제의 진리성의 관찰에 의해 끊어지는 이른바 견소단(見所斷, 여기에는 見苦ㆍ見集ㆍ見滅ㆍ見道所斷의 4部가 있다)이라 하고, 후자를 수혹(修惑) 즉 수습에 의해 끊어지는 수소단(修所斷)의 번뇌라고 하는데, 5견과 ‘의’가 오로지 견소단이라면 나머지 탐ㆍ진ㆍ만ㆍ무명은 양자에 공통된 번뇌이다. 98수면이란 이처럼 10수면을 3계ㆍ5부와 관련시켜 분류한 것이다.(후술)
3)
일체의 수면은 모두 고제(苦諦) 즉 현실의 실상인 무상ㆍ고ㆍ무아ㆍ공의 진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후술)
4)
탐ㆍ진ㆍ만ㆍ무명 중 앞의 세 가지는 수혹(修惑)이기는 하지만 5견과 의(疑)를 반연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며(예컨대 5견에 탐착하므로 그것을 정견이라 주장하고 그러한 견해에 오만해 하고, 나아가 타인을 증오 무시한다), 무명의 경우 그 자체로서 생기하는 독두무명(獨頭無明)이나 5견과 서로 관계하여 생기하는 상응무명은 견소단이지만, 탐ㆍ진ㆍ만과 상응 구기하는 무명은 수소단이자 견소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제법의 인과관계상에서 일시 설정된 5취온을 실유의 자아로 집착하는 유신견은 인과관계상 현행의 결과(이것은 無常ㆍ苦ㆍ無我ㆍ空으로 관찰됨)를 대상으로 하는 염오혜(染汚慧)이기 때문에, 변집견 역시 인과관계 상의 현행의 결과에 대한 영속ㆍ단멸 등의 염오혜이기 때문에 오로지 견고소단이며, 계금취는 자재천(自在天) 등이 세간의 참된 원인이 아님에도 그것을 상주하는 원인이라고 간주하는 염오혜이자 그릇된 금계를 청정도라고 여기는 염오혜이기 때문에 견고소단이고 견도소단이다. 그리고 단멸(斷滅)의 입장에서 행위와 행위의 상속을 부정하는 사견은 원인(집ㆍ도)과 결과(고ㆍ멸)의 구조를 띤 4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견취는 유신ㆍ변집ㆍ사견 등의 저열한 지식을 뛰어난 진리로 견집(堅執)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疑)는 4제에 대한 의심이기 때문에 견4제소단인 것이다.
5)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3하-594상; 대정장29,p.99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 p.863-864).
6)
즉 5견과 의(疑)는 지적 번뇌이기 때문에 당연히 견혹이지만, 앞서 언급한 나머지 네 가지 수면 즉 탐ㆍ진ㆍ무명ㆍ만이 견소단과 수소단 모두와 통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경우의 탐이 견혹이고 어떠한 경우의 탐이 수혹인가 하는 물음이다.
7)
5견이나 의(疑)와 같은 지적 번뇌를 소연으로 삼아 일어나는 탐 등은 견소단(見苦諦 내지 見道諦所斷)이며, 지적 번뇌 없이 다만 습관적으로 일어난 탐 등은 수소단이라는 뜻이다.
8)
변행의 수면(遍行惑)이란 5부의 제법과 두루 관계하는 보편적 번뇌[共相惑]를 말하는 것으로, 98수면 중에서 견고소단의 유신견 등 5견과 의(疑), 견집소단의 사견ㆍ견취와 ‘의’, 그리고 견고ㆍ견집소단의 무명(이를 보통 ‘7견(見)ㆍ2의(疑)ㆍ2무명의 11변혹’이라 함)은 그 힘이 특히 강력하여 만약 욕계의 그것이면 욕계(自界) 5부의 염오법을 두루 낳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본론 제48권에서 상론함)
9)
예컨대 견멸소단의 수면은 끊어지는 법이 아닌 무위택멸 즉 열반(滅ㆍ淨ㆍ妙ㆍ離)에 대한 미혹으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끊어지는지 말했어야 한다는 뜻이다.
10)
고제(苦諦)의 네 행상(行相, 非常ㆍ苦ㆍ空ㆍ非我)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무루지(無漏智)를 고지(苦智)라고 하는데, 욕계에서의 관찰을 고법지(苦法智)라 하고, 대상과 지식이 법지와 유사한 색ㆍ무색계에서의 관찰을 유지(苦類智)라고 하며, 이에 대한 인가[忍]를 고법지인(苦法智忍)ㆍ고류지인(苦類智忍)이라 한다. 유부에 의하면 고법지인에 의해 고제에 대해 미혹하여 생겨난 욕계의 견혹이 끊어지며, 고법지에 의해 이계(離繫) 즉 열반이 증득된다. 즉 여기서 ‘두 가지 법’이란 지(智)와 인(忍)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2권 ‘견도(見道) 16심(心)’에서 상론한다.
11)
‘진’은 전5식이 감수하는 고수(苦受)에서 수증되지만 상계에는 고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진’은 그 성질이 거칠지만 그곳에서의 상속은 삼매[定]에 의해 윤택하기 때문에, 그곳에는 ‘진’이 초래할만한 좋지 못한 이숙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후설)
12)
이상의 98수면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3)
인(忍)과 지(智)에 대해서는 본론 제63권 참조. 이를테면 욕계에서의 4제의 관찰을 법지(法智)라 하고, 색ㆍ무색계에서의 4제의 관찰은 유지(類智)라고 하며, 이 같은 ‘지’의 인가가 ‘인’이라면, ‘인’의 확증이 ‘지’로서, 앞서 이미 관찰한 ‘인’을 다시 관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修)’이다. 견ㆍ수소단의 번뇌는 이러한 인(忍)과 지(智)에 의해 끊어지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설은 몇 가지 방론과 이설에 대해 검토한 후 본권 말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4)
6수면을 견(見)의 차별적인 행상(行相)과 5부(部)와 3계(界)에 근거하여 98수면으로 설정하였다면, 3계의 9지(地) 즉 욕계지ㆍ4정려ㆍ4무색정에 근거하여서도 분류해야 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15)
욕계 1지에 36가지, 색계 4정려 각각 31가지, 무색계 4무색정 각각에 31가지.
16)
변지(parijña, 구역에서는 永斷)란 번뇌의 단멸을 말하는 것으로, 말뜻대로라면 4제의 진리성을 두루 아는 것이지만, 그 결과로서 번뇌가 영원히 끊어지기 때문에 ‘변지’라고 하였다. 그리고 열반이 그러하듯이 번뇌의 단멸이라는 측면에서 98수면 각각의 끊어짐을 변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견소단의 경우 이계(離繫)의 득(得)을 증득하고, 3계 9지의 최후인 비상비비상처 즉 유정지(有頂地)의 5부의 번뇌를 완전히 끊었으며, 자부(自部)ㆍ자품(自品)의 동류인과 타부(他部)ㆍ타품(他品)의 변행인이 되는 번뇌를 멸하였을 때에만, 수소단의 경우 이와 함께 욕ㆍ색ㆍ무색계의 번뇌를 모두 끊어 그것을 초월한 때에만 변지라고 한다. 따라서 견소단의 경우 욕계 견고ㆍ견집소단의 변지, 욕계 견멸소단의 변지, 욕계 견도소단의 변지, 색ㆍ무색계의 견고ㆍ견집소단의 변지, 색ㆍ무색계의 견멸소단의 변지 등 다섯 가지가 있으며, 수도단의 경우 색ㆍ무색계의 견도소단의 변지(여기서 예류과가 성취됨)와 5순하분결이 다하는 욕계 번뇌의 변지(일래과와 불환과)와 색애가 다하는 색계 번뇌의 변지, 그리고 일체의 번뇌가 영원히 다하는 무색계 번뇌의 변지(아라한과) 등 아홉 가지가 있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6권에서 상론함) 곧 번뇌의 단멸이 계(界)에 근거하여 설해지기 때문에 번뇌 또한 이에 근거하여 설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17)
정려(dhyāna)는 비록 심일경성(心一境性, 즉 止)을 본질로 하지만 이와 더불어 헤아림[觀]의 내용을 갖는데, 이를 정려지(靜慮支)라고 하며, 그 내용에 따라 네 단계로 나누어진다. 이를테면 초정려는 심(尋)ㆍ사(伺)ㆍ희(喜)ㆍ낙(樂)의 갈래를 갖추고 있으며, 제2정려에는 이 가운데 ‘심’과 ‘사’가, 제3정려에는 ‘희’가, 제4정려에는 ‘낙’이 제외되기 때문에 정려에 네 종류가 있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7권 ‘정려지’ 참조) 즉 여기서 어떤 이는 ‘희’ 등의 정려지를 공통적으로 포함한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서로 유사하다’는 것이다.
18)
4정려와 4무색정을 근본등지(根本等至, 혹은 根本定)이라고 하며, 아래 단계로부터 8등지 각각에 이르는 과정의 선정을 근분정(近分定)이라고 한다. 이 논설은, 색계와 무색계에는 근본등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려지를 공통적으로 포함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의 유사성을 논의할 수 없다는 뜻인가?
19)
이를 ‘색애가 다하는 색계 번뇌의 변지[色愛盡遍知]’라고 한다. 주16) 참조.
20)
다시 말해 “이미 이계(離繫)한 아래 세 정려의 번뇌와 영단(永斷)을 획득하지 못한 제4정려의 번뇌가 서로 유사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21)
‘하나의 취온 전부’는 색온, ‘다수의 처’는 안 등의 10색처, ‘다수의 계’는 안-신계, 색-촉계, 안식-신식계 등의 15계.
22)
원문은 ‘頗有異生於九十八隨眠永斷, 具成就耶?’이나 아마도 ‘영단’에 ‘불(不)’자가 탈락하였을 것으로, ‘……不永斷……’이 되어야 할 것이다.
23)
원문은 ‘得八十二隨眠永斷耶?’이지만, 82는 28의 오사(誤寫). 여기서 4지(智)는 10지(본론 제73권에서 상론) 중 세속지(世俗智)ㆍ법지(法智)ㆍ유지(類智)ㆍ고지(苦智). 즉 고류지에 머물 때에는 욕계 견고소단의 열 가지 수면과, 상2계 각각의 견고소단의 아홉 가지 수면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24)
『발지론』 제1권(대정장26,p.920하; 한글대장경177,p.15). “이전에 생겨난 견고(見苦)ㆍ견집소단(見集所斷)의 변행수면은 이후에 생겨나는 자계(自界)에 속한 견집(見集)ㆍ견멸(見滅)ㆍ견도(見道)ㆍ수소단의 수면과 그 상응법에 대해 변행인이 된다.” 즉 이상은 옛날의 여러 정리논사들 역시 수면을 지(地)에 근거하여 건립하는 것을 인정하였다는 데 대한 반증이다.(주16의 본문 참조)
25)
‘희’를 떠난 상태가 이희묘락(離喜妙樂)의 제3정려라면, ‘낙’을 끊은 상태는 사념청정(捨念淸淨)의 제4정려라고 할 수 있다.
26)
내등정(內等淨)이란 제2정려에서 더 이상 외적 대상에 조건 받지 않고 그 자체로서 전후 동등하게 상속하는 청정한 믿음을 말한다. 그러나 색계의 4정려가 동일한 계박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내등정도 초정려의 ‘심’과 ‘사’와 구유(俱有)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7)
미상응정(味相應定, 혹은 味等持, 혹은 染等持)이란 전 찰나의 청정한 선정에 대해 애착하는(선정에 대해서는 애착한다고 하지 않고 味着한다고 함) 등지(等持). 등지에는 이 밖에도 정등지(淨等持, 미착을 떠난 청정한 등지), 무루등지(無漏等至, 무루지를 낳는 출세간의 등지)가 있다. 참고로 이 논설은 『발지론』 제17권(대정장26,p.1012하; 한글대장경176,p.426); 『대비바사론』 제165권(대정장27,p.834하)에서 따온 것으로 생각되지만, 거기서는 “미상응의 제2정려는 초정려의 그것(즉 그밖의 것)에 대해 증상연이 된다”고만 설하고 있다.
28)
여기서 ‘네 번째 업’이란 비흑비백무이숙업(非黑非白無異熟業) 즉 무루업을 말하며, 백백 이숙업이란 색계의 선업을 말한다.(본론 제41권 ‘흑흑ㆍ백백 등의 4업’ 참조) 그리고 무루업으로서 4정려 각 지(支)의 염오를 떠나는 제9 무간도와 함께 작용하는 무루의 사업(思業) 네 가지는 오로지 백백의 이숙업을 멸진하는데(본론 제41권 ‘무루업과 앞의 세 업의 관계’ 참조), 만약 색계가 동일한 계박이라고 한다면, 이같이 말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29)
원문은 ‘彼瞋隨眠事非有故.’ 여기서 ‘사(事)’는 소연의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사’의 여러 의미에 대해서는 본론 제17권 ‘무사법(無事法)에서의 사의 의미’ 참조할 것.
30)
후술하는 바에 의하면 이 경은 『칠수면경(七隨眠經)』으로 일컬어지는데, 현존의 경장 중에서는 아마도 『증일아함경』 제40 「칠일품(七日品)」 제3경(제34권, 대정장2,p.738하-739상)에 해당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若欲捨七使者, 當念修行七覺意法”으로 설하고 있다.
31)
부처님의 처소에서 부지런히 범행을 닦는 이유는 오로지 수면만을 끊기 위해서가 아니라 5취온 등 유루의 제법을 염리(厭離)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일곱 가지 수면을 끊기 위해 범행을 닦아야 한다는 것은 그 중의 한 사례에 불과하며, 따라서 7수면 운운 한 것은 확정적인 의미의 요의설이 아니라는 뜻이다.
32)
실제 주30)에서 언급한 『중일아함경』 「칠일품」 제3경은 ‘7’의 항목에서 7수면 각각을 7각지 각각에 배당시키고 있다.
33)
즉 분별논사가 인용한 『칠수면경』에서는 다만 ‘7’이라는 수(數)를 나타내기 위해 온갖 번뇌론의 유형 중에서 7수면을 설한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2법이 존재한다’는 경설에 따라 18계설을 부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18계는 의계(意界)를 안식계(眼識界) 내지 의식계(意識界)로 다시 분류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내법(內法)과 외법(外法)의 2법이듯이, 98수면도 7수면을 다시 분류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34)
‘개(蓋)’란 유부 아비달마에 의하면, 무루5온에 대해 두드러진 장애가 되기 때문에 ‘개’라고 한 것으로, 욕탐ㆍ진에ㆍ혼면(惛眠)ㆍ도회(掉悔)ㆍ의(疑)의 다섯 가지.(본론 제55권에서 상론) 그러나 만약 ‘개’에 오로지 다섯 가지만 존재한다면, 무명 따위는 ‘개’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35)
여기서 ‘네 가지’는 ‘여덟 가지’의 오사(誤寫)일지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대지가 진동하는 것은, 첫째 크나큰 바람이 일어날 때, 둘째 도를 얻은 비구나 비구니 혹은 큰 위신력이 있는 천신이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자 할 때, 셋째 보살이 입태할 때, 넷째 보살이 출생할 때, 다섯째 보살이 정각을 이룰 때, 여섯 째 처음으로 법륜을 굴릴 때, 일곱째 교화가 다하여 목숨을 버리고자 할 때, 여덟째 반열반할 때이다.(『장아함경』 제2권 「유행경」(대정장1,p.15하-16상) 참고로 『증일아함경』 제37권(대정장2,p.753하-754상)에는 천지가 크게 진동하게 되는 여덟 가지 인연에 대해 설하고 있다.
36)
『잡아함경』 제17권 제485경(대정장2,p.123하-124상). 여기서는 우타이(優陀夷)와 빔비사라왕이 각기 수(受)에는 3수(고ㆍ낙ㆍ불고불락수)와 2수(고ㆍ낙수)가 있다고 논쟁하자 부처님께서 “한 가지ㆍ두 가지ㆍ세 가지ㆍ네 가지ㆍ다섯 가지ㆍ여섯 가지ㆍ열여덟 가지ㆍ서른여섯 가지ㆍ백여덟 가지, 나아가 무량(無量)의 수가 존재한다”고 하면서 “세간에서는 수의 뜻을 참답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쟁론하고 서로 위배하며, 마침내 불법의 진실 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고 설하고 있다.
37)
이에 대해서는 주45) 이하에서 해명함.
38)
본론 제45권 ‘근본 6수면’ 참조.
39)
즉 수면을 3계 5부 등에 따라 분류하지 않고 다만 자상(自相)을 지닌 법 자체로서만 구분할 때 여섯 가지라는 뜻이다.
40)
9결은 애(愛)ㆍ에(恚)ㆍ만(慢)ㆍ무명(無明)ㆍ견(見)ㆍ취(取)ㆍ의(疑)ㆍ질(嫉)ㆍ간(慳). 3불선근은 탐ㆍ진ㆍ무명(혹은 癡). 즉 98수면 중 오로지 무기인 색ㆍ무색계의 수면과, 욕계의 소속되는 유신견 변집견 및 이와 상응하는 무명을 제외한 그 밖의 수면은 모두 불선인데, 이 같은 불선의 수면 가운데 이 세 가지는 모든 불선법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불선근’이다. 5개는 욕탐ㆍ진에ㆍ혼면(惛眠)ㆍ도회(掉悔)ㆍ의(疑). 5순상분결은 색계와 무색계의 수소단의 번뇌인 색탐ㆍ무색탐ㆍ도거ㆍ만ㆍ무명. 3업도는 탐ㆍ진ㆍ치의 의(意)불선업도. 3박업은 탐ㆍ진ㆍ무명박의 업. 3연집은 미상. 9결ㆍ5개ㆍ5순상분결ㆍ3박 등에 대해서는 본론 제54권와 55권에서 상론한다.
41)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전술(前述).
42)
주40)의 5순상분결 참조.
43)
견소단의 탐(무명 등과 상응하는 탐)과 수소단의 탐은 체성이 동일한 종류로, 그것은 전체적으로 욕계(즉 散界)의 탐인 욕탐(欲貪)과 색ㆍ무색계(즉 定界)의 탐인 유탐(有貪)으로 나눌 수 있지만, 오로지 수소단인 유탐의 경우 대치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5순상분결에서는 다시 색탐과 무색탐으로 나누게 되었다는 뜻이다.
44)
색ㆍ무색계의 견소단의 탐(무명과 상응하는 탐)은 견도에 의해 동시에 끊어지지만, 수소단의 탐은 8지(地) 각각의 하ㆍ중ㆍ상의 9품의 순으로 끊어진다.
45)
욕계의 탐(貪)ㆍ진(瞋)ㆍ만(慢)ㆍ무명(無明)ㆍ견(見)ㆍ의(疑)의 6수면과, ‘진’을 제외한 색ㆍ무색계 각각의 5수면.
46)
본권 ‘10수면’ 참조.
47)
욕계의 탐ㆍ진ㆍ만ㆍ무명ㆍ의(疑)ㆍ유신견ㆍ변집견ㆍ계금취ㆍ사견ㆍ견취(見取)의 10수면과, ‘진’을 제외한 색ㆍ무색계 각각의 9수면.
48)
고제(苦諦)에 대한 욕계에서의 관찰(인가)과 판단(확증)인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고법지(苦法智), 색ㆍ무색계에서의 그것인 고류지인(苦類智忍)과 고류지(苦類智), 나아가 집ㆍ멸ㆍ도제(道諦) 각각에 대한 4찰나에 걸친 현관(現觀) 등 견도는 16찰나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2권에서 상론함
49)
『잡아함경』 제16권 제403경(대정장2, p.108상).
50)
게송에서의 ‘존재의 속박’이 ‘애’ 즉 탐을 말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어떠한 경우에도 무명을 배제한 ‘애’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용한 게송은 결국 5부의 무명을 끊어야 한다는 내용을 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다.
51)
『잡아함경』 제12권 제298경(대정장2, p.85상). “그 무엇을 무명이라 하는 것인가? 전제(前際, 과거)를 알지 못하며, 후제(後際, 미래)를 알지 못하며, 전후제(前後際, 현재)를 알지 못하며, 내적인 것을 알지 못하며, 외적인 것을 알지 못하며, 내외적인 것을 알지 못하며, 업(業)을 알지 못하며, 보(報)를 알지 못하며와 업보(業報)를 알지 못하며, 불(佛)을 알지 못하며, 법(法)을 알지 못하며, 승(僧)을 알지 못하며, 고(苦)를 알지 못하며, 집(集)을 알지 못하며, 멸(滅)을 알지 못하며, 도(道)를 알지 못하며, 원인을 알지 못하며,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법을 알지 못하며, 선과 불선, 유죄와 무죄를 알지 못하며, 저열한 것과 수승한 것, 염오한 것과 청정한 것의 분별(分別)과 연기도 모두 알지 못하며, 6촉(觸)ㆍ입처(入處)에 대해서도 참답게 알지 못하는 것 등을 무명이라 한다.” 이는 곧 계경에서 무명이라는 말을 전제 등을 포함하여 4제 각각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수면 역시 4제 각각에 대해 설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의 경증.
52)
본론 제25권 ‘무명’ 참조.
53)
즉 경에서 예류과(견도 16심에 이른 자)의 성자는 ‘견(見)’과 ‘의(疑)’를 영단(永斷)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이는 오로지 견소단으로 5부로 차별되지 않으며, 또한 악취로 나아가는 탐ㆍ진ㆍ만ㆍ무명을 끊었다고 하였으므로 수도에 의해 끊어지는 탐ㆍ진ㆍ만ㆍ무명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54)
탐ㆍ진ㆍ만ㆍ무명은 5부(견도의 4부와 수도의 1부)에 통하므로 스무 가지가 되고, 견(見)ㆍ의(疑)는 다만 견소단이기 때문에 여덟 가지가 되어 도합 스물여덟 가지가 된다.
55)
‘견’이 행상의 차별에 따라 5견으로 분류될 경우, 유신견과 변집견은 오로지 견고소단, 계금취는 견고ㆍ견도소단, 나머지 사견과 견취, 그리고 ‘의’는 견4제소단이기 때문에 오로지 견도인 ‘견’과 ‘의’는 열여섯 가지가 되며, 여기에 전주(前註)에서 언급한 5부의 탐ㆍ진ㆍ만ㆍ무명의 스무 가지를 더하여 서른여섯 가지가 된다.
56)
주54)에서 언급한 스물여덟 가지에다 색ㆍ무색계의 5부 각각에 ‘진’을 제외한 스물세 가지.
57)
주12) 참조.
58)
주49) 참조.
59)
주51) 참조.
60)
즉 고제를 관찰하였으면 견고소단의 번뇌가 끊어지고, 집제 내지 도제를 관찰하지 못하였으면 견집소단 내지 견도소단의 번뇌가 현기(現起)한다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실로서 이같이 따져 묻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이라는 뜻의 힐난이다. 만약 집제를 관찰하지 않았음에도 견집소단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끊어졌다(혹은 뽑아버렸다)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집제를 관찰할 때 비로소 견집소단의 번뇌가 끊어진다”고도 말할 수 없다.(후술)
61)
원문은 ‘明無漏緣諸煩惱起’이지만, 다른 판본(宋本과 元本)에 의해 ‘明’을 ‘朋’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여기서 무루연의 번뇌란 무루인 멸제와 도제를 직접적인 대상(攀緣)으로 하여 생겨난 사견ㆍ의(疑)ㆍ무명을 말하며, 견멸ㆍ견도소단에 포섭되는 그 밖의 번뇌로서 이러한 무루연의 번뇌를 대상으로 하여 생겨나는 번뇌를 유루연혹이라 한다.(본론 제48권에서 상론함)
62)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고제에 미혹하여 생겨난 번뇌이다. 즉 견고소단은 무상ㆍ고ㆍ공ㆍ비아에 미혹한 번뇌이다.
63)
원문은 ‘亦無明託迷苦惑生’이지만, 다른 판본(宋ㆍ元ㆍ明本)에 따라 ‘亦無有託迷苦惑生’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64)
여기서 ‘이 같은 사실’은 ‘번뇌가 서로 반연한다’는 예증, ‘그것’은 ‘고제를 관찰하면 나머지 3제에 미혹한 번뇌도 단박에 끊어진다’는 주장. 즉 상좌가 인용한 ‘번뇌가 서로 반연한다’는 예증은 ‘고제를 관찰하면 나머지 3제에 미혹한 번뇌도 단박에 끊어진다’는 주장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65)
원문에는 ‘길상륜(吉祥倫)’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판본(宋ㆍ元ㆍ明本)에 따라 ‘륜’을 ‘論’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66)
『중아함경』 제51권 「발타화리경(跋陀和利經)」(대정장1,p.749상중) 참조. 즉 이 경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옛날에 좋은 말을 다루는 법에 대해 널리 설한 적이 있지만, 이러한 법문은 오늘날 전해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하 이에 준하여 해석할 것.
67)
『중아함경』 제25권 「고음경(苦陰經)」(대정장1,p.587중하) 참조. 이계는 니건(尼犍) 즉 자이나교도.
68)
『중아함경』 제49권 「소공경(小空經)」(대정장1,p.736하-737) 참조.
69)
『잡아함경』 제17권 제485경(대정장2,p.123하-124상); 주34) 참조. 이에 따르면 여기서 4수는 욕계ㆍ색계ㆍ무색계에 계속(繫屬)되는 수와 어디에도 계속되는 일이 없는 수[無繫受].
70)
『중아함경』 제36권 「구묵목건련경(瞿黙目犍連經)」(대정장1,p.655중) 참조. 여기서 우상외도는 마갈타 대신 우세(雨勢), 선정은 사(伺)로 표기되고 있다.
71)
『잡아함경』 제10권 제261경(대정장2,p.66상). 여기서 만자자는 부루나존자, 즉 부류나만다라니자(富留那彌多羅尼子, Puṇṇa mantāniputta).
72)
『중아함경』 제31권 「뇌타화라경(賴咤惒羅經)」(대정장1,p.627하) 참조. 여기서 ‘네 가지 염도’란, 첫째 이 세상에는 보호하는 이도 없고 의지하여 믿을 만한 것도 없다는 것, 둘째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늙음[老法]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 셋째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아 반드시 버려야 한다는 것, 넷째 이 세상에서는 만족하는 일이 없다는 것. 즉 어떠한 경우에도 싫어하거나 만족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갈애에 휘둘리게 된다[無有厭足爲愛走使].(위의 경,p.626하) 다시 말해 갈애의 타사(馱娑, dāsa, 노예)가 된다.
73)
『증일아함경』 제49권 제7경(대정장2,p.818하)에 이와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급고독(給孤獨)은 아나빈기(阿那邠祁, Anāthapiṇḍika)의 의역어. 본명은 수닷다(Sudatta). 사위성의 장자로 기원정사(祇樹給孤獨園)를 건립하여 부처님께 보시하였다.
74)
『장아함경』 제4권 「유행경(遊行經)」(대정장1,p.26중). 이에 따르면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던 이는 경희 즉 아난(阿難)이 아니라 무멸 즉 아나율(阿那律)이다. 참고로 『열반경』에는 南傳 팔리어로 전하는 『대반열반경』과 同名의 法顯역, 『般泥洹經』(失譯), 『佛般泥洹經』(白法祖역), 그리고 『遊行經』 등 다섯 종류의 이본(異本)이 있다.
75)
즉 욕계의 수면은 법지인(法智忍)에 의해, 유정(有頂)을 제외한 상 2계의 수면은 유지인(類智忍)에 의해 끊어진다.
76)
『중아함경』 제44권 『분별대업경』(대정장21,p.707중). 이 경에서 ‘욕탐을 떠났다’는 것은 수혹을 복단(伏斷)하였음을 의미하지만, ‘사견이 현행한다’고 함은 견혹을 끊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즉 여기서 유여사는 외도 이생은 수혹은 끊을 수 있지만, 아직 정지(正智)를 획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견혹은 능히 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77)
여기서 『범망경』은 『장아함경』 제14권 『범동경(梵動經)』(대정장1,p.88), 혹은 『범망육십이견경(梵網六十二見經)』. 즉 그들이 비록 욕탐을 떠났다할지라도 상주론자이기에 상 2계의 제법 뿐만 아니라 욕계의 제법을 대상으로 하여 상견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욕계의 견혹이 남아있는 것이다. 참고로 전제(과거)에 대해 분별하는 견해에는 네 가지 변상론(遍常論)과 네 가지 일분 상론(常論)과 두 가지 무인생론(無因生論)과 네 가지 유변(有邊) 등의 논과 네 가지 불사교란론(不死憍亂論) 등 모두 18견이 있다.(『대비바사론』 제199권, 한글대장경125,p.557 이하 참조)
78)
본론 제45권 주80) 참조.
79)
이생도 역시 하(下) 8지의 견혹과 수혹을 다같이 끊을 수 있지만, 욕계의 혹을 떠났음에도 욕계의 5온을 반연하여 사견을 일으키는 것은 그것을 아직 끊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욕계로 퇴타(退墮)하였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예컨대 제바달다는 4근본정을 획득하고서 신통력으로 어린이로 변화하여 아자세(未生怨)왕의 무릎에 앉아 온갖 재롱을 부리다가 문득 이욕(利欲)을 탐하여 왕이 입속에 넣어준 침을 삼켰다가 부처님의 꾸짖음을 듣고 정려를 획득하였다고 한다.(『대비바사론』 제85권, 한글대장경121,p.233)
80)
즉 오로지 견소단인 무색계 유정지(有頂地)의 견혹(見惑) 스물여덟 가지.
81)
견(見)과 지(智)는 다 같이 혜(慧)에 포섭되는 작용으로, ‘견’은 추탁성(推度性, 추리하여 헤아림)으로, ‘지’는 결단성(決斷性, 결정적 판단)으로 정의된다.(본론 제73권 ‘忍과 智와 見의 관계’ 참조) 즉 ‘견’이 일찍이 관찰한 적이 없었던 것을 지금 관찰하는 것이라면, ‘지’는 거듭 관찰함에 따라 성취되는 결정적 판단이다.
82)
4는 제4의 아라한과, 3은 제3의 불환과, 2는 제2의 일래과, 1은 초과(初果)인 예류과. 예류과는 3계의 견소단의 번뇌를 끊은 이, 일래과는 욕계 수소단 중 제6 중하품을 끊은 이, 불환과는 욕계 수소단 중 제9 하하품을 끊어 더 이상 욕계로 되돌아오지 않는 이, 아라한과는 색계 초정려 제1 상상품을 끊고 나아가 무색계 유정지(有頂地) 제9 상상품을 끊은 이. 그런데 수소단의 번뇌는 반드시 무루도에 의해서만 끊어지는 것은 아니며 유루 세속도에 의해서도 끊어지는 것으로, 일찍이 이생위(異生位)에서 수소단의 번뇌를 끊은 이가 견도 제16 찰나에 이르게 되면 예류과를 초월하여 바로 일래과나 불환과를 획득하기 때문에(이를 超越證이라 함;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64권 ‘견도위의 성자’를 참조할 것), “끊고서 3ㆍ2ㆍ1과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면, 이를 견소단이라 이름한다”고 말한 것이다. 참고로 유루 세속도로써는 유정지 즉 비상비비상처의 번뇌를 끊을 수 없기 때문에 아라한과는 초월증의 성자가 아니며, 따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견소단의 번뇌를 끊고서 증득할 수 없다.
제47권
1)
여기서 ‘[어떤] 원인’이나 ‘가르침의 힘’이란 세세생생 강화되면서 이어온 자아관념이나 『베다』(우파니샤드)와 같은 유아론의 성전을 말한다.
2)
이는 곧 ‘5취온이라는 화합 적취물[迦耶, 혹은 身]은 실재하는 것[薩, 혹은 有]’이라는 말을 ‘살가야(薩迦耶, 혹은 有身)’라고 하였다는 뜻으로, 이러한 실유의 5취온을 단일한 자아로 여기는 것을 살가야견(薩迦耶見, 혹은 有身見)이라 한다.
3)
‘나(자아)’라는 관념은 어떠한 경우에도 육체(色)나 마음(識)ㆍ느낌(受)ㆍ생각(想)ㆍ의사(思) 등을 배제하고서 일어나지 않는다.
4)
『잡아함경』 제2권 제45경(대정장2,p.11중), “만약 사문과 바라문이 자아가 존재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모두 바로 이러한 5음(陰)에서 자아를 보는 것이다.” 즉 아와 아소에 대한 주장을 일으키는 것은 뭔가 특별한 법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5온 상에서만 일어나는 것이라는 뜻이다.
5)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4중; 대정장29,p.100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867). 보광이나 법보 모두 이를 경부사의 해석으로 평석하고 있다. 즉 경량부에서는 ‘살’과 ‘가야’를 동격한정복합어(持業釋)로 해석하여 무상의 5취온이라 하였다. 따라서 살가야견은 비실재인 허위의 5취온에 대한 지식으로(이 경우 壞身見ㆍ虛僞身見으로 번역됨), 이때 견의 소연은 실재하지 않으며 단일하지 않다. 참고로 이 같은 견해는 『대비바사론』 제8권(대정장27,p.36상; 한글대장경118,p.167) 상에서 비유자(譬喩者)의 주장으로 전해진다. “살가야견은 실재적인 대상[實所緣]을 갖지 않는다. 곧 살가야는 실재적인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한 주장이지만, 궁극적으로 볼 때 아와 아소는 실재하지 않는다. 마치 새끼줄을 뱀으로 보고, 나무 그루터기를 사람 등으로 착각하듯이 이것 역시 실재적 대상을 갖지 않는 인식[見]인 것이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는 한, 살가야견은 실재하는 5취온(즉 有身)에 대해 그것을 ‘아’ 등의 단일한 실재로 파악하는 그릇된 지식이란 뜻이며, 그래서 보통 유신견(有身見)으로 번역하는 것이다.(前述)
6)
소(蘇)는 자소(紫蘇, 차조기로 이름되는 꿀풀과에 속하는 일년초). 집악은 전타라(旃陀羅, caṇḍala, 인도의 천민). 즉 냄새나는 자소 중에서도 더 심하게 냄새나는 것을 ‘취소’라 하고, 천민 중에서도 악인을 ‘악집악’이라고 함. 4제의 진리성을 부정하는 것은 이처럼 사견 중의 더욱 사견이기 때문에, 그것만을 ‘사견’이라 일컬었다는 뜻이다.
7)
즉 이 같은 사견은 실유의 4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감손(減損)의 견해이지만, 변집견 중의 상견과 그 밖의 3견은 무상하고 저열하고 실재가 아니고 청정도가 아닌 것을 상주하고 뛰어나고 실재하고 청정도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긍정하려는 증익(增益)의 주장이다.
8)
‘불이나 물에 뛰어든다’고 함은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 몸을 불로 지지거나 갠지스강 등에서 목욕하는 것을 말하며, ‘계금을 수지하거나 자성과 사부에 대해 안다’고 함은 해탈하기 위해 개처럼 살거나[狗戒禁] 재나 소똥을 온몸에 바르는 식으로 고행을 하고, 샹캬학파와 요가학파에서 주장하는 형이상학적 실재인 프라크리트(물질적 질료)와 푸루샤(순수자아)에 대한 식별지(識別知)를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구사론』에서는 이러한 식별지를 ‘수(數)와 상응(相應)의 지혜’라고 하였는데(제19권, 고려장27, p.594하; 대정장29,p.100상; 권오민 역,p.869), ‘수’는 상캬학파, ‘상응’은 요가학파의 의역어이다.
9)
계금취는 견고(見苦)ㆍ견도소단(見道所斷)이다.(본론 제46권 ‘98수면으로의 전개’ 참조)
10)
자재천 등 세간의 원인이 아닌 것을 참된 원인으로 여기는 계금취견은, 자재신 등을 상주하는 것이고 진정한 자아라고 하는 주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5온취집의 고과(苦果) 즉 현실에 미혹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고제(苦諦)를 현관하면 즉각 제거되는 견고소단의 번뇌이다.(『대비바사론』 제119권, 한글대장경125,p.544)
11)
즉 비상(非常)ㆍ무아(혹은 非我) 등의 지식은 오로지 고제를 대상으로 하여 생겨나는 것[苦智]이며, 집제를 대상으로 하여 생겨나는 지식[集智]은 5취온은 씨앗처럼 현행의 고과(苦果)를 낳는 원인[因]이며, 바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 것[集]이며, 끊임없이 상속하며 괴로움을 낳는 것[生]이며, 생기의 두드러진 조건[緣]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아는 것이다.(본론 제61권 ‘난선근’; 제74권 ‘16행상의 실체와 명의’ 참조)
12)
물론 단견(斷見) 자체는 정견이 아니지만, 자아를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상견(常見)에 비해 정견이라는 뜻이다.
13)
여기서 두 가지 견해란 자아를 주장하는 유신견과, 그것을 상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변집견 중의 상견(常見).
14)
‘무상 등의 무루의 행상’이란 고제(苦諦)의 네 행상인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비아(非我).
15)
‘도가 아님에도 [참된] 도라고 여기는 계금취’에는 우계(牛戒)와 같은 유루계를 청정도로 여기는 것과, 도제를 비방하는 사견 등을 청정도로 여기는 것이 있는데, 전자는 견고소단이지만, 후자는 견도소단이다.(주27 참조)
16)
집제(集諦)의 네 행상은 인(因)ㆍ집(集)ㆍ생(生)ㆍ연(緣).
17)
도제(道諦)의 네 행상은 도(道)ㆍ여(如)ㆍ행(行)ㆍ출(出).
18)
외도들은 도제(성도)를 비방하는 사견(즉 非道)에 대해 청정을 획득하는 도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견도소단이라고 한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집제를 비방하는 사견에 대해서도 역시 청정을 획득하는 [도]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러한 도는 견집소단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에 대해 중현은, 집제를 비방하는 사견으로는 능히 번뇌의 집(集) 등을 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사견은 대치도로서 생겨날 수 없다고 논박하고 있다.
19)
사견이란 4제 등의 인과를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전술)
20)
이는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5상; 대정장29,p.100중; 권오민 역,p.872)에서 경주(經主) 세친의 힐난이다. 즉 견도소단의 계금취가 견도소단의 사견 등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면, 그 때의 사견 등은 해탈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인데, 그 같은 사실을 주장하는 외도가 어떻게 그러한 사견 등을 해탈도로 여길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뜻이다.
21)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5상; 대정장29,p.100중; 권오민 역,p.872).
22)
원문은 ‘如正法中, 於涅槃體, 雖有謂實, 謂非實異, 而同許彼是常, 是寂故.’ 유부에서는 열반의 체성이 실유라고 주장하며, 공견론자(空見論者, 대승공관)는 실유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실유론자든 공견론자든 상주 적멸의 열반 자체는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뜻인가?
23)
천수 즉 제바달다(提婆達多)의 5법이란, 첫째는 우유 등을 수용하지 말 것, 둘째는 고기를 먹지 말 것, 셋째는 소금을 먹지 말 것, 넷째는 재단되지 않은 옷만을 입을 것, 다섯째는 마을 변두리의 절[寺]에 머물 것.(본론 제43권 ‘승가의 파괴에 관한 여러 사정’ 참조)
24)
『발지론』 제20권(한글대장경176,p.501-2). 이하 갠지즈강물에 목욕하는 것, 범행을 수지하는 따위의 계금취도 견고소단임을 밝히고 있다.
25)
본론(本論)에서 우계(牛戒) 등을 견고소단이라고 한 것은, 그것 역시 자재천과 마찬가지로 현재 추과(麤果)인 유루의 5취온에 근거하여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26)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5상; 대정장29,p.100중; 권오민 역,p.871). 즉 비도계도(非道計道)는 고제에 미혹한 것이기 때문에 견고소단이라 할 경우, 유루를 소연으로 한 번뇌로서 고제에 미혹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욕계 견고소단은 10수면 전부임), 유루를 소연으로 한 그 같은 번뇌가 왜 견집소단은 되지 않는 것인가? 하는 등의 이유를 밝혀야만 한다.
27)
즉 도가 아님에도 참된 도로 여기는 이른바 비도계도(非道計道)에는 소처럼 사는 유루도(즉 牛戒)를 해탈도라고 주장하는 것과, 도제를 비방하는 사견 등을 청정도로 주장하는 것(이를 親迷道라고 함) 등의 두 종류가 있는데, 전자는 거칠게 나타나는 과상(麤果相, 이를테면 자재천)에 미혹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견고소단이지만, 후자는 직접적으로 성도에 어긋난 것으로서 인과의 상(相)에 대해 별도로 미혹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도소단이다.(『대비바사론』 제199권, 대정장27,p.994,상; 한글대장경125,p.544 참조).
28)
여기서 어떤 한 논사[一師]는 경부종의 논사일 것으로, 4전도의 자성을 이처럼 변집견ㆍ견취ㆍ유신견의 일부라고 하는 주장은 『대비바사론』 제104권(대정장27, p.537상; 한글대장경122,p.80)에서는 ‘유설(有說)’로 설해지고 있지만,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5중; 대정장29,p.100중하; 권오민 역,p873)에서는 정설(正說)로 설해지고 있다. 즉 경주(經主) 세친은 단ㆍ상의 변견(邊見) 중의 상견, 저열한 것을 수승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견취 중에서는 낙(樂)과 정(淨)의 두 가지만을, 아견(我見)과 아소견(我所見)의 유신견 중에서 아견만을 취하여 4전도의 본질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후술하듯이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유신견 중의 ‘아’는 아소에 대해 자재력이 있기 때문에 아소견은 아견에 포섭되며, 따라서 4전도는 견고소단인 2견 반(半) 즉 견취와 유신견 전부와 변집견의 일부를 자성으로 한다고 주장하였다. 참고로 본문 상에서 견취는 견고ㆍ견집ㆍ견멸ㆍ견도소단에 포섭되는 견취의 총칭으로, 여기서는 견고소단의 견취만을 가리키기 때문에, 혹은 저열한 것을 뛰어난 것이라고 집착하는 견취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견취 중에서는’이라고 하였다.(후술)
29)
즉 견고소단인 5견과, 견집ㆍ견멸소단 각각의 사견과 견취, 견도소단의 사견ㆍ견취ㆍ계금취.
30)
『구사론』(고려장27,p.595중; 권오민 역,p.874)에서는 이를 『도경(倒經, Viparyāsa- sūtra)』의 설로 인용하고 있다.(여기서의 ‘倒纏’은 ‘倒經’의 誤寫)
31)
아소견(我所見)이란 의복 등의 물건을 ‘나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견해로서, ‘나’라는 관념은 의복 등의 물건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아견은 자아 자체와 자아에 소속된 것에 의해 일어난다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아의 전도[我倒]는 유신견의 일부가 전부를 본질로 한다는 뜻이다.
32)
계금취는 추탁성(推度性, 추리하고 헤아리는 ‘見’의 성질)이고, 보다 긍정적인 성질[增益]의 번뇌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비록 유루계(有漏戒)일지라도 염오를 떠나 청정을 추구하려는 견해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전도된 것은 아니다. 보광(普光)은 계금취에 대해, 이는 마치 유루의 6행관(行觀, 하지를 거친 것[麤], 괴로운 것[苦], 장애가 되는 것[障]으로, 상지를 고요[靜]하고 미묘[妙]하며 하지의 더러움을 떠난 것[出]으로 관찰하는 행법)의 경우처럼, 궁극적으로는 번뇌를 끊고 열반을 증득할 수 없을지라도 잠시 떠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구사론기』 제19권, 대정장41,p.300중)
33)
변집견 중의 단견과, 사견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관찰하여도,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관찰하는 않기 때문에, 감손(부정적인)의 견해일 뿐 증익(긍정적인)의 견해가 아니다. 여기서 괴사문(壞事門, 『구사론』에서는 無門)이란, 세계를 영원하고 즐거운 것으로 보지 않고 반대로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관찰하여 감손(減損) 파괴하는 갈래의 견해를 말한다. 말하자면 허무주의의 견해.
34)
이를테면 5견을 제외한 탐ㆍ진ㆍ만ㆍ의 등은 한결같이 전도된 것이고 증익의 성질이지만, ‘견’을 본질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추탁(推度)의 성질이 아니다.
35)
『대집법문경(大集法門經)』 상권(대정장1,p.229하); 『칠처삼관경(七處三觀經)』(대정장2,p.876하). 즉 여기서는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에 각기 상(想)ㆍ심(心)ㆍ견(見)의 세 전도가 있어 도합 열두 가지의 전도가 있다고 설하고 있다.
36)
즉 ‘상’과 ‘심’은 추탁(推度) 즉 추리하고 판단하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전도가 아니지만(‘상’은 取像 즉 개념작용, ‘심’은 了別 즉 인식작용임), ‘견’(‘慧’ 즉 판단작용)과 상응하고 그 대상(行相)이 동일하기 때문에, ‘견’의 전도된 힘에 따라 역시 ‘전도’라고 하는 명칭으로 일시 설정하였을 뿐이다.
37)
이를테면 도상(倒想, 전도된 생각)이나 도심(倒心, 전도된 마음)은 세간에서 잘 쓰이는 말이지만 도수(倒受, 전도된 느낌)라고 하는 등의 말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대비바사론』 제104권, 한글대장경122,p.79 참조)
38)
즉 경에서는 “무상(無常)을 상(常)이라고 간주하는 것에는 상(想)과 심(心)과 견(見)의 전도가 있다……”고 설하였음에도(주35 참조), ‘상’ 등을 전도의 본질이 아니라고 할 경우 경설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39)
주40) 참조.
40)
『잡아함경』 제45권(대정장2,p.331상중). 변자재(Vaṅgīsa,구역에서는 婆耆舍 혹은 鵬耆舍). 게송으로써 여래의 덕을 능히 잘 찬탄할뿐더러 言論과 辯了에 막힘이 없기 때문에 변자재임:『증일아함경』 제3권 「제자품」 제4, 대정장2,p.557중). 여기서 변자재는 예류과의 성자로서, 즉 상(想)의 전도가 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이 욕탐에 시달리지만 그 후 무학과를 증득하여 ‘상’의 전도를 끊으면 욕탐이 소멸하여 마음은 청정해진다는 뜻이다. 이는 곧 ‘상’ 등의 전도는 수소단과도 통한다는 경증이다.
41)
『발지론』 제8권(대정장26,p.957상중; 한글대장경176,p.172).
42)
수신행과 수법행은 다 같이 예류향(預流向)으로서, 전자가 일찍이 이생위에서 다른 이의 가르침을 믿고 공경함으로써 가행을 닦은 둔근(鈍根)의 성자라면, 후자는 경전 등을 통해 스스로 증득한 법에 따라 가행을 닦은 이근(利根)의 성자이다.(본론 제64권 ‘견도위의 성자’ 참조) 참고로 이러한 성자가 예류과에 이르게 되면 전자의 경우 믿음의 뛰어난 힘[信根]으로 말미암아 승해(勝解)가 나타나고, 후자의 경우 지혜의 뛰어난 힘[慧根]으로 말미암아 정견(正見)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들을 각기 신해(信解)와 견지(見至)라고 한다.
43)
즉 첫 번째 경문은 예류과가 4제를 모두 관찰하였을 때 4전도도 영원히 끊게 된다는 사실을 설한 것이므로, 4전도가 견고소단이라고 하는 주장은 이 같은 경문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44)
다시 말해 4전도는 온갖 괴로움에 포섭될 수 있지만, 온갖 괴로움은 4전도에 포섭되지 않는다. 따라서 온갖 괴로움을 능히 적멸시키는 4제법을 설하여 4전도의 영단(永斷)을 나타낼 수 있다는 뜻이다.
45)
앞서 ‘전도의 인연’에서 “한결같이 전도되어 있기 때문에, 추리하여 헤아리는 성질[推度性]이기 때문에, 그릇되게 증익(增益)하기 때문에 ‘전도’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46)
여기서 ‘존재[有]에 대한 법지’란 고법지(苦法智)로서, 무상ㆍ고ㆍ무아ㆍ공에 대한 지견(智見).
47)
『대비바사론』 제104권(대정장27,p.536하; 한글대장경122,p.78); 『구사론』(제19권, 고려장27,p.595하; 대정장29,p.100하; 권오민 역,p.876)에서는 유여부(有餘部)의 설. 여기서 견소단이라고 함은 고류지인(苦類智忍)이 현전할 때 완전히 끊어지는 것을 말하며, 수소단이라고 함은 금강유정이 현전할 때 완전히 끊어지는 것을 말한다. 즉 낙상(樂想)ㆍ낙심(樂心)과 정상(淨想)ㆍ정심(淨心)이 수도단이 아니고 오로지 견소단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이를 떠난 견도위의 성자가 욕탐을 일으키는 것인가? 그것은 견도에서는 아직 낙ㆍ정의 심(心)ㆍ상(想)을 끊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48)
『안온경』은 『잡아함경』 제5권 제103경. 이 경문은 본론 제45권 주81)에서 인용되었다.
49)
『도경(倒經)』에 대해서는 주30) 참조.
50)
즉 상좌는 다른 곳에서 ‘4성제의 이치를 두루 잘 아는 자는 전도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였으므로, 여기서 상락아정의 ‘상(想)과 심(心)의 전도가 수소단과 통한다는 말은 자신의 뜻과도 모순된다는 힐난이다.
51)
여기서 두 경은 앞서 이설자가 ‘정리론자(유부)의 12전도 견고소단론’을 비판하기 위해 인용한 두 경문. 즉 거기서는 전도를 견사제소단(見四諦所斷)으로 전하고 있으므로, 12전도 중 ‘상’과 ‘심’의 여덟 전도를 견ㆍ수소단 모두에 통하는 것이라고 하는 주장은 경설에 어긋난다는 뜻이다.
52)
예류과 즉 견도위에서 12전도 중 다만 견(見)의 네 전도만을 끊는다는 상좌설을 해명하는 이 기사는 『구사론』(제19권, 고려장27,p.595하; 대정장29,p.101상; 권오민 역,p.877) 상에서 유여사(有餘師)의 설로 인용되고 있다. 보광에 의하면, 여기서 유여사는 경부사(經部師)이다.
53)
다시 말해 “‘견’의 전도도 종국적으로 수도위에서 끊어지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54)
주35) 참조.
55)
주40) 참조.
56)
여기서 ‘유사’와 ‘무사’의 ‘사(事)’는 원인의 뜻으로, 원인을 갖는 유위법과 원인을 갖지 않는 무위법(즉 열반)의 의미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본론 제17권 ‘무사법(無事法)에서의 事의 의미’ 참조.
57)
즉 견도위의 성자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제행에 대한 상주[常]와 자아[我]의 전도는 일어나지 않으며, 일부 현실의 제행(諸行, 즉 有事)에 대해 즐거워[樂]하고 청정[淨]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있을지라도 그것을 진실의 즐거움이나 청정함으로 여기지는(관찰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것은 다만 산란된 뒤바뀐 소견일 뿐 ‘전도’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12전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견소단이지 수소단이 아니다는 뜻이다.
58)
앞서 “견(見)의 전도와 동시에 작용[俱行]하는 산란되고 뒤바뀐 ‘상(想)’과 ‘심(心)’을 바야흐로 ‘전도’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다. 즉 안온(安穩)성자에게는 이미 5취온에 상주하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견’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에게 일어난 아만 등의 수면은 다만 산란된 뒤바뀜[亂倒]일 뿐이라는 뜻이다.
59)
주56) 참조.
60)
진실로 애호할만한 유위 선법에 대해 애염을 낳는 경우, 그것을 ‘탐’이라 할 수 없듯이, 진실로 열등한 이에 대해 자기가 뛰어나다고 하는 것을 어찌 ‘만’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61)
본론 제12권 주63) 참조.
62)
『발지론』 제20권(대정장26,p.1026중; 한글대장경176,p.499).
63)
원문은 ‘三行次有殊, 成三三類.’이지만, 『구사론』(제19권, 고려장27,p.596상; 대정장29,p.101상) 상의 논설 ‘如是三慢, 若依見生行, 次有殊, 成三三類’에 근거하여 해석하였다. 이는 즉 만ㆍ과만ㆍ비만의 세 가지는 아견을 근본으로 하는 것으로, 상대방의 상태와 그것에 대한 자기 자신의 태도[行解]에 의해 9만을 성취하게 된다는 뜻으로, 『구사론』에서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논설하고 있다. “즉 처음의 세 가지는 순서대로 과만과 만과 비만이며, 중간의 세 가지는 순서대로 비만과 만과 과만이며, 마지막 세 가지는 순서대로 만과 과만과 비만이다.”
64)
세 번째의 ‘자기보다 월등히 뛰어난 이에 대해 자기가 조금 열등하다고 하는 만[我劣慢]’의 경우에는 잘난 체하는 마음[高擧心]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아홉 번째의 ‘그는 나보다 열등한 점이 없다고 하는 만[無劣我慢]’은 잘난 체하는 마음이 아닌데, 그것을 어떻게 ‘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난문.
65)
이는 주48)에서도 인용된 『안온경』(『잡아함경』 제5권 제103경)의 설.
66)
원문은 ‘謂修所斷聖未斷時……’이지만, 『구사론』(고려장27,p.596중)과 『현종론』(동28,p.179상)에 따라 ‘謂’를 ‘諸’로 고쳐 번역하였다.
67)
‘3계의 무상’이란 3계의 중동분 상의 멸상(滅相)으로, 바로 중동분의 존재를 단멸시키는 이 같은 멸상에 집착하는 것을 무유애(vibhāva-tṛṣṇā)라고 한다. 말하자면 비존재에 대한 애탐. 이에 반해 유애(bhāva-tṛṣṇā)는 미래존재에 대한 애탐으로서, 성자는 미래세 용왕 등 악취의 존재를 희구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유애의 일부’가 현행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68)
즉 본송에서 “성자에게 살생의 전(纏) 등이 현행하지 않듯이, 수소단의 그것도 현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有修斷不行]”고 하였지만, 성자인 이상 이미 견소단의 그것은 존재하지 않아 당연히 수소단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수소단……’이라는 말은 의미 없는 말일 뿐으로, 의미 있는 말이 되기 위해서는 “성자에게 [수소단의 ‘만’이] 존재하더라도 일어나지 않는다[聖有而不起]”고 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미단(未斷)의 성자에게 만(慢)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밝힌 차송(次頌)에서 논설되고 있다.
69)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6중; 대정장29,p.101중; 권오민 역,p.881). 즉 살생 등의 ‘전’은 수소단인 신업을 반연하여 일어나며, 허광어 등의 ‘전’은 어업을 반연하여 일어나며, 무유애는 수소단인 중동분 상의 멸상(滅相)을 반연하여 일어나며, 유애의 일부는 수소단인 당래의 소의신을 반연하여 일어난다. 이렇듯 이것들은 모두 수소단만을 반연하는 수소단의 법이지만, 성자로서 그것을 아직 끊지 못한 자일지라도 결코 현행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후설.
제48권
1)
이하 여기서부터 제49권 말(‘세존의 문답방식과 무기’ 이전)까지 98수면의 변행ㆍ비변행, 유루ㆍ무루연, 상응ㆍ소연의 수증(隨增), 불선ㆍ무기, 근ㆍ비근 등의 제문(諸門)에 대해 분별한다. 여기서는 먼저 변행과 비변행에 대해 분별하는데, 변행수면이란 자계(自界)ㆍ자지(自地)의 5부의 법을 반연하여 그러한 법을 더럽히는 작용을 갖는 번뇌를 말하고, 비변행수면이란 오로지 자과(自果)ㆍ자부(自部)의 법만을 더럽히는 번뇌를 말한다.
2)
5부의 번뇌 가운데 자계ㆍ자지의 모든 부(部)의 법을 두루 반연하여 작용하는 것은 그 힘이 가장 강력한 고ㆍ집제 하에 포섭되는 번뇌 중 지적 사유작용과 관계하는 번뇌이다. 즉 견고소단의 유신견 등의 5견과 ‘의’, 견집소단의 사견ㆍ견취와 ‘의’, 그리고 견고ㆍ견집소단으로 앞의 온갖 수면과 상응하거나 독립적으로 일어나는 무명(즉 不共 혹은 獨頭無明)의 열한 가지를 변행수면, 혹은 변행혹(구역은 遍使)이라고 한다. 보통 7견(見)ㆍ2의(疑)ㆍ2무명으로 일컬어진다.
3)
원문은 ‘謂自界地五部法中, 遍緣隨眠爲因生染.’ 이것이 이른바 변행(sarvatra-gā)의 세 가지 근거로서, ①자계ㆍ자지의 5부의 제법을 두루 소연으로 삼으며, ②그 같은 5부의 제법을 두루 반연함으로써 두루 수증(隨增)하며(본론 제49권 ‘상응수증과 소연수증’ 참조), ③5부의 염법을 두루 낳는 원인이 된다. 바로 이러한 세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변행’으로 일컬어진다.(주10의 본문 참조)
4)
3계 각각의 11변행.
5)
즉 상응무명의 경우, 견(見)ㆍ의(疑)와 상응하는 것만이 변행이므로 변행혹에 무명을 온전히 포함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완전한 변행혹은 3계 각각의 견고ㆍ견집소단의 무명을 제외한 스물일곱 가지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
6)
견고ㆍ견집소단의 무명으로서 7견ㆍ2의와 상응하는 것은 변행이고, 상응하지 않는 것은 비변행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7)
즉 변행혹을 아직 끊지 못한 상태에서는 성도를 장애할 뿐더러, 자상속에서 자류(自類)의 번뇌를 인기하여 생겨나게 한다.
8)
본론 제47권 ‘만(慢)의 견ㆍ수소단론’ 참조.
9)
즉 앞(본론 제47권 ‘慢의 견ㆍ수소단론’)에서, 수소단의 번뇌로서 이미 끊어졌더라도 현행하는 것이 있고, 아직 끊지 않았을지라도 결정코 현행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만’이나 살생 등의 전(纏)이 미단(未斷)의 상태에서도 현행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 밖의 다른 수소단은 어떠한 까닭에서 현행하는 것인가? 하는 난문.
10)
원문은 ‘諸隨眠具三遍義, 謂於五部法遍緣隨眠, 及能爲因遍生染法.’ 주3) 참조.
11)
예컨대 견고소단의 사견은 견고소단의 사견을 반연하여 수증하는 일이 없다는 뜻의 힐난이다.
12)
유부에 의하는 한, 변행혹은 자계ㆍ자지의 일체의 유루법을 한꺼번에 반연하는 것이 아니라 5부의 일부씩만을 단박에 반연[頓緣]한다.(후술)
13)
자상혹(自相惑)이란 각각의 법의 개별적인 자상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번뇌로 이는 변행이 아니다. 이에 반해 변행혹은 무상ㆍ고ㆍ무아ㆍ공 등의 다수의 법을 반연하여 일어나는 번뇌(共相惑)이다.
14)
앞서 유여사(有餘師)는 흐릿하고 둔중하여 동요됨이 없는 산야사병(珊若娑病)처럼, 온갖 사업(事業)에 대해서도 다 행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불공무명의 뜻이라고 논설하였다.
15)
친미혹(親迷惑)이란 견소단의 번뇌 중 5견과 의(疑)를 말하는 것으로, 4제 이치에 대해 직접적으로 미혹한 번뇌이기 때문에 ‘친미혹’임. 그 밖의 탐ㆍ진 등은 중미혹(重迷惑). 주33) 참조.
16)
이상은, 변행혹은 능히 5부의 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변행혹 중 살가야견(즉 유신견)이 견고소단일 경우 탐 등도 역시 견고소단이 되어야 할 것이며, 견취가 견멸ㆍ견도소단이듯이 살가야견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17)
보광(普光, 『구사론기』 제19권)에 따르면, 이는 경부사의 난문이다. 즉 앞에서 언급한 열한 가지의 변행혹이 5부의 법을 두루 반연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박에 반연[頓緣]하는 것인가, 점진적으로 반연[漸緣]하는 것인가? 만약 후자가 변행의 뜻이라면, 탐 등도 역시 견(見)에 의해 5부의 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가 모두 변행이 되어야 할 것이며, 전자가 변행의 뜻이라면 실제적으로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변행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예컨대 일체의 유루법을 단박에 ‘뛰어난 것’이라거나 ‘생천의 원인’이라고 간주하여 견취나 계금취가 일어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부에서는 “변행이란 후자의 뜻이지만, 그렇다고 자계ㆍ자지의 일체의 유루법을 한꺼번에 반연하는 것은 아니고, 5부의 일부만을 단박에 반연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경부사는 다시 그럴 경우 아견(즉 유신견)이 작용할 때에는 반드시 아애와 아만도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11변행 이외 다시 집제 하의 아애와 아만도 변행혹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구사론』 제19권, 고려장27,p.596하; 대정장29,p.101하; 권오민 역,p.884) 참고로 『대비바사론』 제18권(대정장27,p.90하)에서는 변행의 자성에 관한 이설을 설하고 있는데, 어떤 이는 일체의 번뇌, 혹은 3계에 통하는 번뇌, 혹은 5부와 통하는 탐ㆍ진ㆍ만ㆍ무명이라고 하였으며, 비유자는 연기의 근본이 되는 무명과 유애(有愛), 분별론자는 무명ㆍ애ㆍ견ㆍ만ㆍ심(心)이라 하였다.
18)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에 의하는 한, 변행이란 5부의 제법과 관계하는 보편적 번뇌[共相惑]을 말하는 것으로, 아애와 아만은 개별적 번뇌[自相惑]로서 아견(我見)과 관계할 뿐 5부의 법을 단박에 반연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변행이 아니다.(『구사론』 제19권, 고려장27,p.597상; 대정장29,p.101하, ‘此二煩惱自相非共, 無頓緣力故非遍行.’)
19)
이를 상연혹(上緣惑)이라 한다.
20)
이미 그러한 하계ㆍ하지의 염법을 떠난 자만이 상계ㆍ상지의 번뇌를 현전시키기 때문에, 상지의 번뇌는 이염(離染)한 하지의 법을 소연으로 삼는 일이 없는 것이다.
21)
즉 “색계의 견고소단의 사견(邪見)으로서 무색계의 고과(苦果)를 비방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내지는 색계의 무명으로서 무색계의 견집소단을 알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상연혹)이다.”
22)
무색계의 공무변처 등의 아래 3지는 상지는 있어도 더 이상 상계가 없으며, 유정처 즉 비상비비상처에는 더 이상 상지도 없기 때문이다.
23)
번뇌가 자계의 법을 반연할 때에는 그러한 소연과 상응법(즉 그러한 번뇌와 상응하는 심ㆍ심소)에 따라 수증(隨增)하지만, 상계를 반연하는 경우에는 수증하지 않는다.(본론 제49권 ‘상응수증과 소연수증’ 참조) 즉 일 찰나의 소연과 상응법에 대해 번뇌가 수증하기도 하고 수증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자계와 상계를 동시에 반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4)
『품류족론』 제5권(대정장26,p.72상; 한글대장경117,p.112).
25)
“바로 그같이 주장된 아ㆍ아소의 존재에 대해 단멸[斷]한다고 주장하거나 상주[常]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일컬어 변집견(邊執見, antagraha-dṛṣṭi)이라고 하는데, 그릇되게 단멸과 상주의 극단[邊]에 집착하기 때문이다.”(본론 제47권 ‘5견’ 참조)
26)
『구사론기』(제19권)에 따르면, 먼저 욕계 중에서 유신견과 변집견을 일으켜 욕계의 5온을 ‘나’이고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하며, 그 다음에 불공무명을 일으켜 대범천을 ‘나’이고 상주하는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인데, ‘견’의 행상은 견고하게 집착하는 것임에 반해 이것은 맹매(盲昧)하여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견’이 아니다. 즉 이러한 불공무명과 상응하는 혜의 심소를 바로 ‘사지’라고 하는 것이다.
27)
원문은, 전자는 ‘我受是我’, 후자는 ‘此受是我.’
28)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7상; 대정장29,p.102상; 권오민 역,p.886).
29)
사견은 선ㆍ악업이나 인과의 진실을 부정하는 감손(減損)의 견해이다. “실유의 존재인 고(苦) 등의 진리[諦]에 대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정의 견해를 일으키는 것을 일컬어 사견(邪見, mithya-dṛṣṭi)이라고 한다.”(본론 제47권 ‘5견’ 참조)
30)
즉 사견은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기는 감손(부정)의 견해인데, 상좌는 이를 반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즉 괴롭고 부정한 생사)을 존재하는 것(즉 즐겁고 청정한 것)이라고 여기는 증익(긍정)의 주장으로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에, 대범천을 반연하여 ‘나’라거나 ‘상주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견해를 사견으로 계탁하게 되었다는 힐난이다.
31)
즉 앞서 언급한 열한 가지 수면과 상응 구유하는 수행법(隨行法, 심ㆍ심소와 ‘生’ 등의 4相)은 11변행과 불가분의 관계로서 동일한 결과이기 때문에 역시 변행이지만, 그러나 득(得)의 경우 3득 중의 법전득(法前得)과 법후득(法後得)은 소득법(所得法) 즉 변행의 수면과 불가불리의 관계가 아니며, 동일한 결과도 아니기 때문에 변행이 아니다.
32)
“제1구 변행수면이면서 변행인이 되지 않는 것은 이를테면 미래세의 변행수면이며, 제2구 변행인이면서 변행수면이 되지 않는 것은 이를테면 과거ㆍ현재세의 변행수면과 구유(俱有)하는 법이며, 제3구 변행수면이면서 변행인인 것은 과거ㆍ현재의 변행수면이며, 제4구 변행수면도 아니고 변행인도 아닌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을 제외한 그 밖의 법이다.”(『구사론』 제19권, 고려장27,p.597중; 대정장29,p.102상; 권오민 역,p.887)
33)
이를 ‘무루연혹(無漏緣惑)’이라고 한다. 즉 이 같은 여섯 가지 수면은 멸ㆍ도제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는 것(그래서 親迷惑이라고도 함)이지만, 그 밖의 탐ㆍ진ㆍ만 등의 견멸ㆍ도소단의 수면은 이 같은 수면을 대상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그래서 그 밖의 수면을 重迷惑이라고도 함).
34)
즉 어두움이 보는 것을 장애하듯이, 무지는 지(智)를 장애하는 것일 뿐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앎의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35)
본론 제28권 ‘무명의 실유논증’ 참조.
36)
즉 3계 9지의 멸제는 서로가 서로에게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37)
욕계제행의 택멸이란 욕계의 유루법을 끊어 증득하는 무위택멸, 즉 열반을 말한다.
38)
도제를 반연하는 욕계계의 사견ㆍ의ㆍ무명수면은 미지정ㆍ중간정ㆍ4근본정이라고 하는 6지(地)의 도법지(道法智)를 반연한다. 즉 미지정의 도법지는 욕계의 혹(惑)을 대치하고, 중간과 4근본정의 도법지는 상계의 수혹을 대치하는데(멸ㆍ도의 법지품은 수혹도 능히 대치할 수 있다; 본론 제73권 ‘법지와 유지의 대치력의 한계’ 참조),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6지의 도법지는 욕계를 관찰하여 일어난 지식 즉 법지(法智)라는 점에서 동류이기 때문에 모두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수면의 소연이 되는 것이다.
39)
상 2계의 8지(4정려ㆍ4무색정)의 도제를 반연하는 세 수면은 미지ㆍ중간ㆍ4근본정과 아래 3무색정이라고 하는 9지의 도류지(道類智)를 반연한다. 9지의 도류지는 자지의 혹을 대치하는 것과 상지의 혹을 대치하는 것의 구별이 있지만, 다 같이 상 2계를 관찰하여 일어난 지식 즉 유지(類智)라는 점에서 동류이기 때문에 모두 상 2계에 계속되는 8지의 수면의 소연이 되는 것이다.
40)
원문은 ‘生依立因更互爲因故.’ 여기서 생인(生因)이란 어머니가 자식을 낳는 것처럼 결과를 낳는 원인을, 의인(依因)이란 신하가 왕에 의지하는 것처럼 결과로 하여금 전전 상속하게 하는 원인을, 입인(立因)이란 대지가 사물을 지탱하는 것처럼 능히 결과를 임지(任持)하는 원인을 말한다.(본론 제20권 ‘대종과 소조색의 연생관계’ 참조)
41)
난ㆍ정ㆍ인ㆍ세제일법의 4선근은 어떤 한 지(地)의 하나의 행상만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4제 16행상(고제의 無常ㆍ苦ㆍ無我ㆍ空과 집제의 因ㆍ集ㆍ生ㆍ緣과 멸제의 滅ㆍ淨ㆍ妙ㆍ離와 도제의 道ㆍ如ㆍ行ㆍ出)으로써 3계 제행의 허물(고ㆍ집)과 그것에서의 출리(멸ㆍ도)를 추구한다.
42)
사견이 고ㆍ집제를 반연할 때는 상계ㆍ상지의 그것도 반연하고, 멸제를 반연할 때는 오로지 자지(自地)의 그것만을 반연한다고 하면서, 도제를 반연할 때는 6지(도법지)와 9지(도류지)의 그것을 반연한다는 것인가? 하는 물음. 참고로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7중; 대정장29,p.102상; 권오민 역,p.889)에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멸제를 반연으로 하는 수면은 자지의 멸제만을 반연하고 다른 지의 그것은 반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도제를 반연하는 수면은 6지와 9지에 동류(同類)로서 통한다는 것인가?”라고 묻고 있다.
43)
멸제는 제지(諸地) 상호간에 인과가 되지 않지만, 도제는 6지와 9지 서로 간에 동류인이 되기 때문이다.
44)
“비록 법지품과 유지품도 역시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될지라도 유지품은 욕계를 대치하지 못하기 때문에, 유지품의 도제는 욕계의 세 수면(사견ㆍ의ㆍ무명)의 소연이 되지 않는 것이다.”(『구사론』 제19권, 고려장27,p.597중하; 대정장29,p.102상중; 권오민 역,p.889)
45)
법지 가운데 멸법지ㆍ도법지는 색ㆍ무색계의 수혹을 끊을 수 있지만, 견혹 즉 견소단의 혹은 절대 끊을 수 없다.
46)
멸ㆍ도제 하의 사견ㆍ의ㆍ무명은 무루도에 의해 끊어지는 것이면서 무루(멸ㆍ도제)를 소연으로 삼는 것임에 반해 멸ㆍ도제 하의 탐ㆍ진ㆍ만ㆍ견취와 도제 하의 계금취는 무루단이지만 무루를 소연으로 삼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하는 난문이다.
47)
‘멸’ㆍ‘정’ 등은 멸제 즉 택멸(擇滅) 열반의 네 행상. 주49)를 참조할 것.
48)
참고로 『구사론』(제19권, 고려장27,p.597하; 대정장29,p.102중)에서는 “청정하지 않은 법을 청정함의 원인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일컬어 계금취라고 하지만, 멸ㆍ도제는 진실로 청정함이기 때문에 계금취의 경계가 되지 않는다. 또한 뛰어나지 않은 법을 뛰어난 법이라고 집착하는 것을 일컬어 견취라고 하지만, 멸ㆍ도제는 진실로 뛰어난 법이기 때문에 견취의 경계가 되지 않는다”고 해석하고 있다.
49)
‘멸제의 상’이란 멸(滅)ㆍ정(淨)ㆍ묘(妙)ㆍ리(離). 즉 5취온 등의 멸(즉 멸제)은 일체의 온갖 유루온의 상속이 다한 것이므로 ‘멸(nirodha, extinction)’이며, 탐ㆍ진ㆍ치의 3재(災)가 종식된 것이므로 ‘정(śānta, calm)’이며, 어떠한 괴로움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므로 ‘묘(praṇīta, excellant)’이며, 모든 괴로움의 원인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에 ‘리(niḥsaraṇa, salvation)’이다.(본론 제74권 ‘16행상의 실체와 名義’ 참조)
50)
‘유루사(有漏事)’를 ‘유루의 소연’으로 번역한 것에 대해서는 본론 제17권 ‘무사법(無事法)에 있어서 사의 의미’를 참조할 것.
51)
다시 말해 모든 번뇌를 전체적인 특성[總相]에 근거하여 설할 경우, 그것들은 모두 ‘탐’과 ‘진’의 두 품류에 포섭될 수 있기 때문에 사견과 의(疑)와 무명만이 무루를 반연하는 것이 아니라 진수면 등도 역시 무루를 반연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52)
자성(prakṛti)과 사부(puruṣa)는 근본원질과 순수정신으로 상캬(數論)학파의 형이상학적 개념이며, 시간(kāla)ㆍ방위(diś)ㆍ자아(ātman)은 바이세시카(勝論)학파의 아홉 실체 중 하나이다.
53)
즉 상좌는 “‘탐’은 즐거움[樂]과 상응하는 번뇌를 모두 포섭한다”고 하였으므로 즐거움과 상응하는 사견도 탐에 포섭되며, 따라서 사견이 멸ㆍ도제를 반연하는 것이라면 이를 포섭하는 탐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54)
다시 말해 어떠한 경우에도 멸ㆍ도제가 원망의 대상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55)
불선업을 일으키는 근본(인연)인 탐ㆍ진ㆍ치의 세 가지 불선근도 탐ㆍ진의 두 가지로만 설해야 한다는 뜻이다.
56)
12지연기에서 ‘애’와 ‘취’는 현재생의 번뇌를 모두 가리키는 총명으로서 사용된다.
57)
‘취’에는 욕취ㆍ견취ㆍ계금취ㆍ아어취 네 가지가 있지만, 12연기에서는 오로지 ‘애’만을 포섭하였다는 뜻인가?
58)
5탁이란 수탁(壽濁)ㆍ겁탁(劫濁)ㆍ번뇌탁(煩惱濁)ㆍ견탁(見濁)ㆍ유정탁(有情濁)으로(본론 제32권 ‘부처와 독각이 출현하는 시기’ 참조), 여기서는 총명인 ‘번뇌’를 ‘견’과는 별도로 설하고 있다.
59)
12연기에서 무명은 과거세의 번뇌를 총칭하는 의미이기 때문에(본론 제25권 ‘무명’ 참조), 번뇌의 상호 포섭관계는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제49권
1)
이하 98수면의 제문분별 중 세 번째인 소연ㆍ상응의 두 가지 수증(隨增)에 관한 분별로, 여기서 ‘수증’이라 함은 ‘~을 따라 증장한다’는 뜻이다. 즉 소연수증이란 번뇌의 대상인 소연에 따라, 상응수증이란 번뇌와 상응하는 심ㆍ심소에 따라 그 힘이 더욱 강성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2)
“여섯 가지 무루연혹(無漏緣惑, 무루를 반연하는 수면)과 아홉 가지 상연혹(上緣惑,상계 상지의 법을 반연하는 수면)은 소연의 경계에서 수증하는 일이 없다.”(『구사론』 제19권, 고려장27,p.598상; 대정장29,p.102상;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892) 즉 앞서 언급한 6무루연혹과 9상연혹은 모두 무루와 상계의 법을 소연으로 삼지만, 소연법이 이 같은 수면에 따라 염오 증장하지 않기 때문에 수증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3)
여기서 ‘섭수’란 어떤 법을 유신견과 아애가 포섭하여 거기에 자기가 있다고 하는 것이며, ‘서로 어긋난다[相違]’고 함은 능연의 혹(유루 혹은 하지의 번뇌)과 소연(무루 혹은 상지의 제법)이 서로 모순되는 것을 말한다.(후술)
4)
원문은 ‘아(鵝)’ 즉 거위로 되어 있지만, 다른 판본에 따라 ‘아(蛾)’ 즉 나방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5)
즉 변행이나 비변행, 자계를 반연하거나 타계를 반연하는 등의 일체의 수면은 그것과 상응하는 심ㆍ심소법에 따라 그 힘이 증장된다.
6)
다시 말해 의(疑)에 의해 수증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7)
즉 ‘제행은 무상하다’는 경문은 유명한 무상게(無常偈, 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의 첫 구로서, 오로지 번뇌가 수증하는 유루법에 대해 말한 것이라면, 제4구 적멸의 즐거움은 번뇌가 수증하지 않는 무위와 무루법을 나타낸다는 뜻의 경증.
8)
상좌(上座) 스리라타도, 수면은 번뇌종자(혹은 공능 수계)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논거로서 이 경문을 인용하고 있다.(본론 제45권 주26) 상좌의 수면관에 대해서는 다시 후술함.
9)
이는 삼세실유설을 논의한 대목으로, 수면자체는 끊지 않은 이상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에 실재하지만 작용하는 찰나가 바로 현재이며, 이미 작용을 마쳤거나 아직 작용하지 않은 상태가 과거ㆍ미래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2권에서 상론한다.
10)
경량부에서는 수면(隨眠)은 현행의 번뇌 즉 전(纏)의 종자(種子)로서, 말하자면 번뇌가 잠자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상응법도 아니며(그렇다고 불상응법도 아니다), 소연도 갖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가지에서 수증하는 일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들에 의하는 한, 수면은 번뇌의 종자ㆍ공능ㆍ수계(隨界)로, 번뇌의 원인적 존재이다.(본론 제45권 ‘경량부의 수면 종자설 비판’; ‘경주 설에 대한 상좌의 해명 비판’ 참조)
11)
수면이 현행의 번뇌에 수반되는 토대 즉 수계(隨界)로서 상응법도 소연도 갖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5온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자아, 진흙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항아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논주의 힐난이다.
12)
색계의 4정려는 각기 그 성격에 따라 4지와 5지를 갖추고 있다.(그러나 무색정은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초정려에는 심(尋)ㆍ사(伺)ㆍ희(喜)ㆍ락(樂)ㆍ등지(等至)의 5지, 제2정려에는 내등정(內等淨)ㆍ희ㆍ락ㆍ등지의 4지, 제3정려에는 사(捨)ㆍ염(念)ㆍ혜(慧)ㆍ락ㆍ등지의 5지, 제4정려에는 행사(行捨)청정ㆍ염청정ㆍ비고락수(非苦樂受)ㆍ등지의 4지가 존재한다.(자세한 것은 본론 제77권 ‘4정려’ 참조) 따라서 그곳의 번뇌는 불선이 아니다.
13)
즉 상2계의 번뇌가 만약 불선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고(苦)의 이숙이 있을 것이지만, 상 2계에는 고의 이숙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곳의 번뇌는 오로지 염오무기이다.
14)
성도(聖道)는 무루의 선법이기 때문에 고(苦)의 이숙을 초래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무기도 아니다.
15)
즉 제4정려에 들어갈 때 불선을 버린다고 하였으니, 제3정려까지는 불선이 존재한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뜻의 힐난이다.
16)
부동심해탈(不動心解脫)이란 더 이상 번뇌에 의해 동요되거나 물러나지 않는 부동법의 아라한이다.
17)
4정단(혹은 4正勤)이란, 이미 일어난 악법은 끊고(斷斷), 계율을 수지하여 아직 생겨나지 않은 악법을 생겨나지 않게 하며(律儀斷), 또한 바른 도를 닦아 아직 생겨나지 않은 선법을 생겨나게 하고(修斷), 이미 생겨난 선법을 지속하고 증장시키려고 노력하는 것(隨護斷)을 말한다. 즉 이미 불선법(악법)을 끊은 자도 4정단을 닦는 것을 인정하였으므로, 색계 제4정려에 든 이에 대해서도 ‘능히 불선을 버리고 선법을 수습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18)
도(道)에는 준비단계에 해당하는 가행도(加行道)와 번뇌를 끊는 무간도(無間道), 더 이상 마음의 상속 상에 획득되지 않게 하는 해탈도(解脫道), 그리고 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승진도(昇進道)가 있는데, 가행도는 3계 9지의 허물을 관찰하여 그것에 대해 싫어함을 낳는 도이기 때문에 염환대치(染患對治,본론에서 염괴대치은 이것의 誤寫인가?), 무간도는 번뇌의 득(得)을 끊는 도이기 때문에 단대치(斷對治)라 하고, 해탈도는 택멸의 득과 동시에 생겨나는 도이기 때문에 지대치(持對治)라고 하며, 승진도는 번뇌의 득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도이기 때문에 원분대치(遠分對治)라고 한다.(이상 4종대치) 즉 인용한 경에서는, 색계나 부동심아라한에게는 더 이상 불선이 존재하지 않지만, 불선을 싫어하여 가까이하지 않는 가행도의 염환대치와 그것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승진도의 원분대치에 근거하여 ‘불선을 버리고……’라고 말하였다는 뜻이다.
19)
즉 계경에서 이미 초정려에 들면 모든 욕악의 불선법에서 떠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힐난한 바와 같은 제3정려까지 불선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다는 뜻의 경증.
20)
이 같은 사실과 후술의 내용으로 볼 때, 경량부와 상좌 스리라타는 욕계와 마찬가지로의 색계에도 비애의 이숙과를 초래하는 불선의 번뇌가 존재한다고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21)
색ㆍ무색계에도 불선의 번뇌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경우, 상계에 그러한 불선의 이숙과를 받을 만한 악취 등의 별도의 처소가 존재한다고 하든지, 혹은 상계의 불선의 번뇌는 이숙과를 낳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는 뜻의 힐난이다.
22)
여기서 ‘원만과’란 생을 장엄하는 만업(滿業)의 결과를 말한다.(본론 제43권 ‘인업과 만업’ 참조)
23)
불선의 번뇌가 낙수(樂受)를 초래한다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말이며, 고수(苦受)도 이것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상 2계의 번뇌는 당연히 낙수도 고수도 초래하지 않는 무기성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24)
즉 모든 번뇌가 무지에 포섭되며, 이때 포섭이란 인생(引生, 혹은 引起)의 뜻이라고 한다면, 일체의 유루 선법도 무명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역시 불선이라고 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25)
“이것은 보시 등과 서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니, 자아의 당래(미래세) 즐거움을 위해 현재에 보시ㆍ지계(持戒) 등을 부지런히 닦기 때문이다.”(『구사론』 제19권, 고려장27,p.598중; 대정장29,p.102하; 권오민 역,p.894) 즉 자아의 상주에 집착하는 이는 당래 그 같은 자아의 복락과 생천을 향유하기 위하여 보시와 지계 등을 닦기 때문에 유신견은 불선이 아니다.
26)
자아의 상주에 집착하여 다음 생에 생천하기 위해 보시 등을 닦을 수도 있지만, 도둑질 등을 행하는 것도 역시 이에 따른 것이다.
27)
참(慚)ㆍ괴(愧) 등의 자성선(自性善)과, 이와 상응하거나(相應善) 이로부터 등기한 선(等起善) 등의 유루선은 본질적으로 생사를 여의지 않은 불선(즉 勝義不善)이지만(본론 제36권 ‘3성의 근거가 되는 4종의 선ㆍ불선과 2종의 무기’ 참조), 그것을 불선이라고는 하지 않듯이, 유신견 등도 선ㆍ불선에 수순하지만, 어느 것으로도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염오성의 무기 즉 유부무기라고 하였다는 뜻이다.
28)
이는 『구사론』(앞의 책) 상에서의 세친의 힐난이다. “천상의 쾌락을 탐하여 구하거나 아만을 일으키는 것도 이 같은 예에 따라 역시 그러하다고(무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탐(貪)과 만(慢) 역시 다른 이를 해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기라고 해야 한다는 뜻의 힐난이다.
29)
즉 유신견은 보시 등의 선행에 수순하기 때문에 무기이지만, 탐과 만은 유신견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에, 선근을 끊고 선우를 배반하게 하기 때문에 무기가 아니라 불선이다.
30)
『잡아함경』 제34권 제969경(대정장2,p.249중). 변집견 중 단변(斷邊)은 현실의 어떤 가치도 인정하지 않고 수용하지 않는 극단적인 허무주의라고 할 수 있다.
31)
『중아함경』 제54권 「아리타경(阿梨吒經)」(한글대장경 중아함경3,p.273)의 6견처(見處)를 참조할 것.
32)
앞서 상좌(上座) 스리라타가 “나로서는 알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변집견 중의 단견(斷見)이 어떻게 열반과 유사하다는 것인지 이에 대한 강한 의문을 나타낸 말이지만, 논주 중현은 이를 되받아 실제로 그러하다고 비꼬아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33)
유신견과 변집견이 이숙인이 아닌 이상, 그것이 불선이 될 수는 없다. 이숙인은 오로지 선ㆍ불선의 유루법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본론 제16권 ‘이숙인’ 참조)
34)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8중; 대정장29,p.102하; 권오민 역,p.894). 『구사론』에서는 이를 선대(先代) 궤범사(軌範師)의 설로 인용하고 있는데, 보광에 의하면 이는 경부(經部)의 선대 괘범사의 설이다. 즉 경량부에서는 살가야견을 현재 신체와 함께 생겨난 허위의 망집(선천적인 俱生身見)과 사유 분별에 의해 생겨난 허위의 망집(후천적인 分別身見)으로 나누어, 전자는 새나 짐승 등에 공통하는 현행의 유신견이지만, 후자는 오로지 사유하는 인간에게만 생겨나는 것으로 불선성이기 때문에 견도소단이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면, 유신견은 오로지 분별신견 뿐이며, 구생신견이라고 하는 것은 유신견이 아니라 불염오무기의 사지(邪智)로서 수소단이다.(후술)
35)
무분별은 ‘견’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무분별의 유신견이 ‘견’에 포섭되고 견도소단이라고 함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뜻이다.
36)
『잡아함경』 제14권 제344경(대정장2,p.94중); 『중아함경』 제58권 「대구치라경」(대정장1,p.790중); 『장아함경』 제8권 「중집경」 등을 참조할 것.
37)
즉 탐ㆍ진과 불선의 치는 견(見)ㆍ수(修)의 5부소단과 통하고, 6식(識)과 두루 상응하며, 각기 탐ㆍ진ㆍ무명수면을 본질로 하며, 일체의 추악한 신ㆍ어업을 낳으며, 선근을 끊는 강력한 가행이 되지만, 5견과 의(疑)는 그 자체 수면성이지만 다른 네 가지 뜻이 없고, ‘만’은 6식과 상응하지 않을 뿐더러(전5식과 상응함) 선근을 끊는 강력한 가행이 되지 않으며, 그 밖의 10전(纏)이나 6번뇌구(垢)는 수면성이 아니다.(이는 隨煩惱로서 본론 제54권에서 상론함) 자세한 것은 『대비바사론』 제47권(한글대장경119,p.504)과 제112권(동122,p.266이하) 참조할 것.
38)
무기근(無記根)에는 유부무기(有覆無記)의 ‘애’와 유부무기의 무명과 유부ㆍ무부의 ‘혜’ 세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 무기의 ‘애’란 상(上) 2계의 5부의 ‘애’를 말하며, 무기의 무명(즉 癡)이란 욕계의 유신ㆍ변집견과 상응하는 무명과 상 2계의 5부의 무명을, 유부무기의 ‘혜’란 욕계의 유신ㆍ변집견과 상 2계의 5부의 염오혜(즉 5견)를, 무부무기의 ‘혜’란 위의로ㆍ공교처ㆍ이숙생ㆍ변화심과 구생하는 ‘혜’를 말한다. 그리고 온갖 무기 가운데 이 세 가지만을 ‘근’으로 설정한 것은 제법을 낳는 뛰어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즉 ‘애’는 바로 번뇌의 뿌리[足]이며, 무명은 온갖 번뇌와 두루 상응하며, ‘혜’는 능히 간택하여 온갖 번뇌를 이끄는 도수(導首)가 되기 때문이다.(『구사론기』 제19권)
39)
여기서 ‘유예의 두 갈래’란, 있을까 없을까? 그럴까 그렇지 않을까? 하는 의혹의 망설임을 말한다.
40)
즉 세간일반에서 관찰되는 뿌리[根]는 아래로 뻗어 내려 견고하게 머물면서 위로는 싹을 낳는 원인이 되지만, ‘의’는 동요를, ‘만’은 잘난 체하여 위로만 지향하는 성질이기 때문에 ‘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41)
『대비바사론』 제156권(한글대장경124,p.155)에 의하면 서방사(西方師), 『구사론기』(제19권) 등에서는 경부(經部).
42)
즉 무기는 비선비악(非善非惡)이기 때문에 ‘중’이다.
43)
다 같이 염오법임에도 불선법은 불선근에 근거하여 일어난다고 하면서 유부무기법은 무기근에 근거하여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선법이 동류의 ‘근’ 즉 불선근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면 염오무기 또한 동류의 ‘근’ 즉 무기근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해야 한다는 뜻의 힐난이다.
44)
무기근의 명목과 수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중현은 앞서 논설한대로 가습미라(迦濕彌羅, 카슈미르)의 비바사사(毘婆沙師)의 설로 세 가지를, 외방제사(外方諸師)의 설로 네 가지를 전하였을 뿐 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45)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喩經)」(대정장1,p.804), 혹은 『잡아함경』 제32권 제905경; 제34권 제965경 등에 이른바 14무기가 설해지고 있다. 즉 세간은 영원[常]한가, 영원하지 않은가, 영원하고 영원하지 않은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닌가? 세간은 끝[邊]이 있는가, 없는가, 있고 없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가? 여래의 사후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 신체[身]와 영혼[命]이 동일한가, 다른가? 이 같은 물음에 대해 석존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하였는데, 이를 무기(avyakta) 혹은 사치기(捨置記)라고 한다.(후술)
46)
혹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石女]의 아들이 흰지 검은지에 대해 묻는 것과 같다.”(『구사론』 제19권, 앞의 책)
47)
이상은 칭우(稱友)에 의하면, 대덕(bhadanta) 라마(羅摩, Rāma)설로서, 유부의 해석에 따를 경우, 두 번째 분별기(分別記)와 세 번째 반힐기(反詰記)도 역시 일향기(一向記)가 되어야 하며, 네 번째 사치기(捨置記)는 침묵이므로 마땅히 대답[記]의 형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힐난이다. 즉 ‘죽은 자는 모두 재생하는가?’하는 물음의 경우, 죽은 이 중에는 재생하지 않는 자도 있기 때문에 ‘죽은 자가 모두 재생하는 것은 아니다’고 한결같이 대답해야 하며, 12연기에서 ‘식’은 ‘행’에 대해서는 결과이지만, 명색에 대해서는 원인이 되듯이, 사람 또한 상대에 따라 수승하기도 하고 저열하기도 하므로 마땅히 한결같이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48)
‘죽은 이는 다시 태어나는 것인가?’하는 물음과 경에서 설한 ‘이미 죽은 이가 시여된 음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물음은 동일한 형식으로, 이미 부처님께서 그것을 분별하여 설하였기 때문에 앞의 물음도 마땅히 응분별기(應分別記)로 대답해야 한다는 뜻이다.
49)
문자(問者)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기(無記)라고 하였다면, 어째서 그것을 응사치기(應捨置記) 즉 ‘마땅히 그냥 내버려두는 것으로서 대답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인가? 하는 물음.
50)
원문은 ‘依二無遮, 是謂問相.’ 예컨대 “이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저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경우처럼, 이것과 저것의 두 뜻 중 어느 한 쪽으로도 판단을 내리지 못하여 판단을 청하는 언어형식을 말하는 것인가? 여기서 ‘어떤 이’는 경부사(經部師)로서, 이러한 물음의 정의 즉 문상(問相) 이하 계속하여 인용되고 있다.(주60, 68 참조)
51)
선질략(Śaṇḍīlya?)은 외도의 논사로서 가습미라(迦濕彌羅)에 와서 벌소라(筏素羅,Vasura?) 아라한과 문답하였는데, 아라한의 침묵(無記)에 패배하였다고 전한다.(『대비바사론』 제15권, 대정장27,p.76하-77상)
52)
『집이문족론』 제8권(한글대장경115,p.179-181); 『대비바사론』 제15권(대정장27,p.75중하; 한글대장경118,p.341-5); 『구사론』 제19권(고려장27,p.599중하; 대정장29,p.103중하; 권오민 역,p.900-901) 참조.
53)
선의 일곱 가지란, 살생ㆍ불여취(투도)ㆍ욕사행(사음)에서 떠나는 신(身)의 세 선업과, 허광어(망어)ㆍ이간어(양설)ㆍ추악어(악구)ㆍ잡예어(기어)에서 떠나는 어(語)의 네 선업.
54)
즉 “그같이 계속하여 끝까지 분별할 경우, 더 이상 대답[記]할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네 가지 문기(問記)의 하나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는 힐난에 대해, 그 같은 분별이 바로 대답 즉 ‘기’로서, 분별과 대답이 별도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55)
‘여기’란 ‘분별기(vibhajya vyākaraṇaṁ)’라는 말. ‘흘타(kritya)’는 전후 시간적 관계에 있는 두 말의 전후관계를 나타내는 앞의 말(vibhajya)의 어미 ya.(본론 제25권 주18 참조) 혹은 앞에서 설한 ‘분별하고서 알게 되었다[分別已解]’에서 ‘……고서[已]’를 말함. 그러나 여기서 중현은 이를 시간적 전후관계로 해석하지 않고 뒤의 말을 한정하는 종속적 연결어미로 해석하고 있다.(후술)
56)
즉 분별기(分別記)에서 ‘분별’과 ‘기’는 다만 시간적인 전후관계로서 존재하는 각각의 개별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떠나서는 ‘기’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물음에 대해 끝까지 분별할 경우, 구체적인 답은 무엇인가?’ 하는 힐난에 대해 분별이 바로 그것의 답이라는 뜻이다.(주54 참조)
57)
여기서 ‘아첨하는 마음’이란 앞서 분별기에서 설한 정직한 마음[直心]의 반대되는 것으로, 뭔가 상대방의 결점을 찾아내려고 논의를 시도하면서 표면적으로는 법을 청문하는 것과 같은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첨(諂)’이란 6번뇌구(煩惱垢)의 하나로, “자신의 마음을 방편으로 은닉하고서 교활한 모략으로써 타인의 마음을 유혹하여 실제의 앎과는 어긋나게 하는 마음의 왜곡[心曲]을 말한다.”(본론 제54권 ‘번뇌구’ 참조)
58)
원문은 ‘此記亦不成詰’이지만, 문맥에 따라 ‘힐’을 ‘기(記)’로 고쳐 번역하였다. 즉 이하 반문의 힐난[反詰]을 어떻게 대답[記]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59)
즉 여기서도 분별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반문의 힐난과는 다른 별도의 대답이 설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기’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힐난이다. 즉 반문의 힐난[反詰]이 바로 대답[記]은 아니기 때문에, ‘반힐기’에 대한 대법 제사의 해석은 올바른 해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60)
주50)의 본문 참조. 즉 유부 비바사사에 의하는 한, 이는 의심의 특성일 뿐으로, 물음이란 다만 그것이 어떠한 형태이건 아직 알지 못하는 뜻을 알고자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청컨대 존자께서는 나를 위해 법을 설하소서’라고 하는 것도 물음의 일종(즉 請問)이라 할 수 있다.
61)
경부사도 응사치기를 해석하면서, “과거 지나간 모든 겁(劫)의 수(數)는 얼마나 됩니까?”라는 예문(例問)을 들고 있다.(주68의 본문 참조)
62)
즉 “도는 상주하는 것인가, 무상한 것인가?”라고 하는 것처럼 두 가지 뜻에 근거하지 않고, 다만 “나를 위해 도를 설해주소서”라고 말하는 것 역시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음의 특성[問相]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다.
63)
앞에서 설한 라마(邏摩)의 힐난(주47의 본문)에 대한 해명을 참조할 것.
64)
즉 앞(‘경부사의 평석 비판’)에서 경부사는, “일체의 죽은 이는 모두 다시 태어나는 것인가?”에 대해 응분별기가 아닌 응일향기로 대답해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동일한 형식인 이에 대해서도 역시 응일향기로 대답해야 한다는 뜻이다.
65)
원문은 ‘故唯應一向答言是有.’로 되어 있지만, 문맥상 ‘유’를 ‘무(無)’로 고쳐 번역하였다.
66)
원문은 ‘汝等意, 謂此眼等界, 無常無常’이지만, 앞서 인용한 동일한 경문에 따라 앞의 ‘무상’을 ‘상(常)’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67)
『염막가(Yamaka)계경』은 『잡아함경』 제5권 제104경(여기서는 焰摩迦), 『세니가(Seniya)계경』은 동 제105경(여기서는 仙尼).
68)
‘두 가지 뜻에 근거하여……’는 앞서 경부사가 정의한 물음의 특성[問相]으로(주50 참조), 경부사는 이에 근거하여 대법제사(對法諸師)의 반힐기에 대한 해석을 비판하였다.(주60 참조)
69)
원문은 世尊未說, 有何未遮, 可說爲問; 世尊說已, 有何所遮, 可說爲答? 앞서 경부사는 물음의 특성을 “두 가지 뜻에 근거하여 [그것을] 부정하는 일[遮]이 없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는데(주50), 이에 따를 경우 응사치기에 대한 예문으로 인용한 경설은 그 자체 문답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힐난인가? 여기서 ‘未遮(부정하지 않은 것)’는 물음의 성립조건이고, ‘所遮(부정된 것)은 물음으로 성립될 수 없는 조건이다. 이에 따르는 한 세존의 기별도 대답이 될 수 없다.
70)
유부 비바사사가 정의한 물음의 특성은 “서로 상위하는 것(명제)이든 혹은 서로 상위하지 않는 것이든, 아직 알지 못하는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인데, 경부사가 인용한 예문에서의 답은 ‘알 수 없다’는 것이므로 문답의 조건을 갖춘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71)
‘경부사(라마)의 평석 비판’ 참조.
72)
주47)의 본문참조. 즉 여기서 ‘다른 종의’란 앞서 논설한 ‘4종의 문답방식에 대한 일반적 해석’.
제50권
1)
‘사(事, vastu)’에는 자성사(自性事)ㆍ소연사(所緣事)ㆍ계박사(繫縛事)ㆍ소인사(所因事)ㆍ소섭사(所攝事)가 있지만(본론 제17권 ‘無事法에서의 사의 의미’ 참조. 『대비바사론』 제56권 한글대장경120,p.119에서는 自體事ㆍ所緣事ㆍ繫事ㆍ因事ㆍ攝受事), 여기서 ‘사’의 의미는 두 번째 번뇌에 의해 계박되는 법으로서의 ‘사’이다. 이를테면 안식 상응의 수면이 ‘능히 계박하는 것[能繫事]’이라면, 그러한 번뇌에 의해 계박되는 색경이나 심ㆍ심소는 ‘계박되는 것[所繫事]’인데, 전자(색경)가 소연으로서 계박되는 것(즉 所緣繫)이라면, 후자(심ㆍ심소)는 상응법으로서 계박되는 것(즉 相應繫)이다.(후술)
2)
변행수면에는 삼세의 소연을 모두 계박하는 세(世)변행과 자신과 동시[自世]에 존재하는 경계만을 모두 계박하는 사(事)변행이 있는데, 본 송에서는 이 두 가지와 모두 통하는 것을 ‘변행’이라고 하였다.
3)
자상혹(svalakṣaṇa-kleśa)이란 자상에 미혹한 번뇌라는 뜻으로, ‘탐’은 좋아하는 대상을, ‘진’은 좋아하지 않는 대상을 소연으로 하여 일어나듯이 특정한 경계에 대해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공상혹(sāmānyalakṣaṇa-kleśa)은 낙수ㆍ고수에 관계없이 어떠한 대상에 대해서도, 다시 말해 다수의 법을 연으로 하여 일어나는 번뇌를 말한다.
4)
아뢰야(ālaya)는 애착의 뜻으로 집장(執藏)이라 번역되며, 니연저(nkānti, 혹은 niyati)는 집착의 뜻으로 집취(執取)로 번역된다.
5)
『잡아함경』 제13권 제312경(대정장2,p.89하). 여기서는 대모를 마라가구(摩訶羅舅, Mālunkyaputta, 혹은 鬘童子)로 음역하였다. 참고로 이 경문은 본론 제42권에서 견(見)ㆍ문(聞)ㆍ각(覺)ㆍ지(知)의 정의에 대한 경증으로 인용되고 있다.
6)
과거세에 이미 생겨나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과 현재 이미 생겨난 탐ㆍ진ㆍ만은 자상혹이기 때문에 삼세의 법을 계박하지 않으며, 다만 자세(自世)의 소연ㆍ상응법만을 능히 계박한다.
7)
즉 과거에 생겨난 탐 등의 번뇌는 이미 소멸하였으므로, 그것에 대해 다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면, 제법 자체는 삼세에 걸쳐 실재하기 때문에(후설) 이미 생겨난 과거의 번뇌 역시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만이 그와 관계하는 소연과 상응법을 능히 계박할 수 있다.
8)
여기서 ‘바로 다음의 글’이란 “미래세의 의식상응의 탐ㆍ진ㆍ만 세 가지는 삼세를 두루 반연하기 때문에 그것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때라면, 그것들은 모두 능히 계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 제4구에 대한 해석이다.
9)
탐ㆍ진 등 정의적인 번뇌인 수혹(修惑)은 견소단의 그것처럼 4제의 관지(觀智)와 무간에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관찰(見)에 따라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품에서 하하품에 이르는 번뇌의 강약(9품)과 선정의 상태(9지)에 따라 81품으로 분류된다. 따라서 욕계(탐ㆍ진ㆍ만) 상상품의 번뇌가 끊어졌을지라도 그 밖의 품류는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본론 제64권 ‘수혹과 그 대치도의 數’ 참조)
10)
『발지론』 제4권(대정장26,p.936상; 한글대장경176,p.86), “만약 미래의 애결(愛結)의 계박이 있으면 과거의 그것 또한 계박함이 있는 것인가? 만약 앞서 생겨난 것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면 계박하지만, 만약 앞서 생겨나지 않았든지, 생겨났더라도 이미 끊어졌으면 계박하지 않는다.”
11)
아직 생겨나지 않은 미래세의 의식상응의 번뇌는 무변(無邊)이고 헤아릴 수 없이 많기 때문에 삼세의 법을 계박할 가능성이 있음은 물론 자신의 소연이 되는 일체의 경계를 계박할 가능성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일어난 것에는 일정한 제한이 있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은 모든 것에 대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으로, 따라서 미래세의 의식상응의 번뇌는 세(世)변행인 동시에 사(事)변행이다.
12)
즉 미래의 미단(未斷)이면서 불생(不生)인 5식 상응의 탐ㆍ진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을뿐더러 경계대상의 제한이 없기 때문에, 가능성으로 말한다면 삼세의 일체법이 이것의 소연이 되어 계박될 수 있다.
13)
공상혹은 의식상응의 법이기 때문에 삼세의 경계를 반연하는 작용이 있어 세변행이며, 현재의 특정한 소연에 제한받지 않고 자신의 경계를 모두 반연하기 때문에 사변행이다.
14)
앞에서 삼세에 걸친 수면과 ‘사(事)’ 즉 수면에 의해 계박되는 소연과 상응법에 대한 계박의 관계를 논설하였는데, 만약 수면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경계대상 등을 계박한다면, 그 때 과거ㆍ미래법은 실재하는 것[實]인가, 다만 가설적인 것[假]인가? 만약 실재하는 것이라면 상주설(常住說)에 빠지게 될 것이고, 가설적인 것이라면 어떻게 능히 계박하고 계박되며, 이계(離繫)가 가능할 것인가? 이하 이 같은 문제에서 야기된 삼세법의 실유에 관한 논설을 전개시키고 있다. ‘삼세실유설’은 그 명칭이 시사하듯이 설일체유부의 가장 특징적인 교설로서, 과거ㆍ미래의 무체설(無體說)을 주장하는 경량부와의 대론은 이론적인 면에서나 양적인 면에서 아비달마불교의 최대의 논쟁이라 할만하다. 특히 본론에서는 제50권~제52권에 걸쳐 『구사론』에서의 세친설과 그 밖의 경부사설을 논파하면서 유부의 실유론을 밝히고 있다. 참고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삼세가 실유라고 하는 말은 세(世) 즉 시간 자체가 실유라는 뜻은 아니다. 유부에 있어 시간은 그 자체 개별적 실체(즉 법)가 아니라 생멸 변천하는 유위제법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 다시 말해 시간(世路, adhvan, 세간의 시간≺世≻은 유위를 근거≺路≻로 하기 때문에 ‘세로’임)은 유위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에(본론 제1권 ‘유위법과 그 이명’ 참조) 바로 삼세 제법의 실유를 의미한다.
15)
원문은 ‘已生未滅, 是爲有相.’ 여기서 어떤 부류란 경량부로서, 이하 유부의 삼세실유론과 더불어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자였던 비유자(譬喩者), 경주 세친, 상좌 스리라타 등 일련의 경부사(經部師)들의 과미무체(過未無體) 현재실유(現在實有)론에 대해 비판한다.
16)
원문은 ‘爲境生覺, 是眞有相.’ 이 한 구절이 중현사상(이른바 新薩婆多)의 핵심이라 할만하다. 중현은 『구사론』상에서 시설된 경주 세친을 비롯한 경부사의 유부 정의(正義)에 대한 온갖 이설(異說)들을 이 한 구절의 해석을 통해 파(破)하고 있다.
17)
이를테면 유정은 색ㆍ수ㆍ상 등의 5온에 근거한 것이며, 항아리는 진흙에, 군대는 개별적인 군인에 근거한 것으로서, 각각은 앎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有]’이지만, 이때 존재는 5온이나 진흙 등을 배제하고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다만 언어적 개념[世俗]으로서의 존재, 즉 가유(假有, prajñpti sat, 혹은 世俗有)이며, 이에 대한 진리가 세속제(世俗諦)이다. 이에 반해 색ㆍ수ㆍ상 등의 5온이나 진흙 등은 더 이상 다른 것에 근거하지 않고서 그 자체(즉 자상)로서 알려지기 때문에 실유(實有, 혹은 勝義有)이며, 이에 대한 진리가 승의제(勝義諦)이다. 즉 여기서 ‘실유’하는 것이란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한 지식의 구성요소 즉 ‘법(法)’을 말한다.
18)
이러한 상대유의 무자상(無自相)을 주장하는 이설(異說)의 비판은 본론 제4권 ‘촉계는 오로지 대종성이라는 상좌설 비판’; 제28권 ‘어두움의 예를 통한 무명의 실유논증’ 등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19)
전자가 과거ㆍ미래법이라면, 후자는 현재법이다.
20)
예컨대 동분(同分)의 안근은 자신의 결과를 인기하는 작용과 ‘본다’는 공능을 갖지만, 피동분(彼同分)의 안근(지금 보고 있지 않은 눈)은 오로지 작용만을 갖는다.(본론 제52권 ‘경주의 위부동설 略難 비판’ 참조) 즉 자신의 결과를 인기하는 수승한 공능을 작용이라 한다.(본론 제52권 ‘작용에 관한 경주의 의혹 비판’ 참조)
21)
항아리는 실유의 법인 지대(地大)에 의해 생겨난 일시적 개념적 존재[假有]이지만, 군대는 5온에 근거한 유정(즉 각각의 군인) 들의 집합이라는 뜻이다.
22)
본론 제51권 주18) 참조.
23)
변처 등이란 8해탈ㆍ8승처ㆍ10변처. 10변처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과 무변의 허공[空無邊]과 무변의 마음[識無邊]이 각기 일체의 처소에 두루 편재한다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80권에서 상론함) 즉 만약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만 앎이 생겨날 수 있다고 한다면, 일체 처소에 두루 존재하는 ‘지’ 등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에 관한 앎(승해는 인가 결정, 작의는 주의 경각의 심소)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야 한다는 힐난이다.
24)
이는 『구사론』(고려장27,p.602하; 대정장29,p.105하;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921) 상에서도 무소연식(無所緣識, 실재하는 대상 없이도 인식은 일어날 수 있다)을 주장하는 경주 세친의 논거로 인용되고 있다.(이것의 완전한 인용은 주68의 본문을 참조할 것)
25)
이를테면 『잡아함경』 제8권 제214경(대정장2,p.54상). ‘有二因緣, 生識. 何等爲二? 謂眼色ㆍ耳聲ㆍ鼻香ㆍ舌味ㆍ身觸ㆍ意法.--眼色因緣生眼識.’
26)
경에서 모든 앎은 소의와 소연에 근거하여 생겨난다고 하였는데, 만약 소연 없이도 앎이 생겨날 수 있다고 한다면, 소의가 없어도 생겨날 수 있다고 해야 하는 것으로, 양자를 차별할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27)
일부 실재하는 대상을 소연으로 하는 지식을 통해 ‘일체의 지식은 실유의 대상을 갖는다’고 주장하는 경우, 과거ㆍ미래법을 대상으로 하는 일부의 지식(즉 의식)을 통해 안식 내지 신식 역시 과거ㆍ미래법을 반연한다고 주장해야 하지만, 안식 내지 신식은 오로지 그것과 동시에 존재하는 현재법만을 반연한다. 일부의 지식이 그러한 것을 일체의 지식에 제한 없이 적용하는 경우, 그것은 논리적 비약(미확정의 오류)일 뿐더러 보다 어려운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는 뜻이다.
28)
다시 말해 인식내용에 차별이 있는 것은 각각의 인식대상이 다르기 때문으로, 만약 비존재[無]도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비존재는 그 자체로서 단일하기 때문에 인식에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한다.(후술)
29)
안각(즉 안식) 내지 신각(신식)과 의각(의식)은 각기 차별적인 경계대상에서 생겨나기 때문에(전5식은 현재의 색 내지 촉을, 의식은 삼세의 법 모두를 반연한다), 유여사의 논증처럼 일부의 사실을 일반화시켜 말할 수 없다는 뜻의 해명이다.
30)
여기서 피차(彼此)는 능증(能證)의 법인 ‘일부 경계대상을 갖는 앎’과 그 같은 사실을 통해 입증되는 소증(所證)의 법. 여기서는 ‘일체의 앎은 경계대상을 갖는다’는 사실이다.
31)
여기서 피차(彼此)는 능증(能證)의 법인 ‘일부 경계대상을 갖지 않는 앎’과 소증(所證)의 법인 ‘경계대상을 갖지 않는 앎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32)
‘일부 소연을 갖는 앎’을 통해 ‘일체의 모든 앎은 소연을 갖는다’는 사실은 증명할 수 있을지라도 ‘경계대상을 갖지 않는 앎도 존재한다[有覺無境]’는 사실은 증명할 수 없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일부 소연을 갖지 않는 앎’이 제시되어야만 하였다는 뜻이다.
33)
본론 제17권 ‘경주 등의 택멸무위 무별체설 비판’에서 논설한 것을 말함.
34)
『잡아함경』 제13권 제335경, 일명 「승의공계경」(본론 제51권 주8 참조)
35)
다시 말해 “외도들은 도를 획득하지도 못하였으면서도 도를 획득하였다는 증상만을 품고서 자아와 같은 실재하지 않는 존재를 실재하는 것이라고 말할지라도.”
36)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2하; 대정장29,p.105하; 권오민 역,p.921). 즉 어떤 대상이 존재하는 것인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의심하는 경우, 그것은 바로 대상에 유무의 차별이 있음을 나타내며, 따라서 ‘유’를 소연으로 삼듯이 ‘무’를 소연으로 삼는 식(識)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37)
불교에서의 일체법은 12처에 포섭되기 때문에, 제13처란 토각(兎角)과 같은 절대적 비존재이다. 즉 그것은 관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상만을 품은 외도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존재의 상(相)을 드러내어 존재한다고 관찰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38)
다시 말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정사(正邪) 승렬(勝劣)의 차별을 말할 수 없다.
39)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2하; 대정장29,p.106상; 권오민 역,p.921). 『구사론』상에서는 인용한 계경(『잡아함경』 제26권 제703경,대정장2,p.189상)의 마지막 구절을 “존재하는 것은 바로 존재하는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할 것이다”로 하여 살(薩, sat, 즉 有)과 비살(非薩, asat, 즉 非有)을 번역하여 옮기고 있다. 이는 곧 계경에서 ‘비살(비존재)을 비살임을 알게 한다’고 설하였으므로 비존재 역시 앎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증. 그러나 중현은 ‘살’과 ‘비살’을 미묘함[妙]과 미묘하지 않음[非妙]의 뜻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원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실제 『잡아함경』에서는 이를 실(實)과 비실(非實)이라는 말로 옮기고 있으며(實卽知實, 不實知不實, 上卽知上, 無上卽知無上), 이런 점에서 후술하는 중현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40)
계경에서 “살(薩, sat)은 바로 살이고, 비살(非薩, asat)은 바로 비살임을 알게 할 것이다”고 설한 후 다시 “유상(有上)은 바로 유상이고, 무상(無上)은 바로 무상임을 알게 할 것이다”고 말한 것은 앞의 말을 강조하여 거듭 설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무상 즉 위가 없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살’과 ‘비살’을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힐난이다. 참고로 경주 세친은 『구사론』에서, 무상을 알게 한다는 것은 바로 고(苦)의 비존재인 열반을 알게 한다는 말이므로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앎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증으로 사용하고 있다.
41)
원문은 ‘有上無上顯妙非妙義’이지만, 문맥에 따라 ‘無上有上……’으로 바꿔 번역하였다.
42)
상동.
43)
이는 앞(주39)서 인용한 『잡아함경』(대정장2,p.189상)의 경문 바로 앞의 설로서, 현존 경설(若所有法, 彼彼意解作證, 悉皆如來無畏智所生)과는 약간 다르다.
44)
즉 “여래는 이에 대한 무소외(無所畏)를 획득하여 능히 바로 이와 같은 제법을 알게 되었다”고 설한 후 바로 제자들에게 “살(薩)과 비살(非薩)에 대해 알게 할 것이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이때 ‘살’과 ‘비살’은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법 중의 미묘하고 미묘하지 않은 출리도와 장애하는 법을 의미한다는 뜻이다.
45)
이러한 경문은 현존 『잡아함경』에는 결여되어 있다.
46)
이 경의 주제는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 내지 누진지력(漏盡智力)의 10력(力, 18불공덕의 하나)으로, 여래의 10력을 결정적인 법이라고 한 이상, 앞의 ‘살’과 ‘비살’은 결코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미묘한 것과 미묘하지 않은 법을 의미하며, 따라서 “경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 할 것이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비존재도 앎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주의 논거는 잘못된 경증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현존 『잡아함경』(대정장2,p.189중) 상에서 본 경설은 “나는, 이는 바로 결정적인 것이지 결정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고 설한다(我說, 是定非不定)”로 되어 있다.
47)
이상 경주 세친이 비유논자의 무경각론(無境覺論)을 옹호하여 『구사론』에서 논설한 두 가지 경증을 비판하였고, 이하 앞서 비유논자가 논설하였던 무경각론의 예증 하나하나에 대해 해명하고 비판한다.
48)
다시 말해 불 바퀴나 자아에 대한 앎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앎이 아니라 횃불의 빠른 회전이나 5온에 대한 전도된 앎이다.
49)
유가사(요가행자)들이 8해탈ㆍ8승처ㆍ10변처 등의 선정 중에서 일으키는 승해와 작의(예컨대 地ㆍ水ㆍ火ㆍ風ㆍ靑ㆍ黃ㆍ赤ㆍ白과 空無邊과 識無邊이 각기 일체의 처소에 두루 편재한다는 작의)도 실재하는 대상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5취온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뜻이다.
50)
즉 경에서 “[욕탐이] 존재하지 않음을 안다”고 한 것은, 대치도에 의해 욕탐이 끊어졌음을 안다는 말로서, 욕탐이라는 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자체가 비존재[無 혹은 非有, 혹은 空]인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유부의 기본입장이다.
51)
본 절(節)에서 ‘앎’이라고 번역한 각(覺)은 각혜(覺慧)의 준말로, 인식의 뜻이기 때문에 ‘마음’이라 해도 무방하다. 앞에서 안근과 색경을 소의ㆍ소연으로 하는 ‘각’을 안각(眼覺)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안식(眼識)과 다르지 않다. 오늘날의 표현방식으로는 ‘생각’이라고 말이 좋을 듯하지만, 외연이 너무 크다고 여겨 채택하지 않았다.
52)
유부 비바사사에 의하는 한, 꿈이란 잠자기 전에 생각한 것이나 천신(天神)의 조화에 의해, 혹은 신체의 리듬이 순조롭지 않을 때 과거의 일들이 회상되어 일어나는 수면상태에서의 지각현상이다.
53)
현실적으로 바다에 사는 뿔을 갖은 토끼는 없지만, 일찍이 이 같은 이야기를 들었든지, 혹은 각기 다른 처소와 다른 시점에 인식하였던 바다, 토끼, 뿔이 동일한 처소에서 동시에 화합하여 나타나게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바다에 사는 뿔을 갖은 토끼’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경계대상을 반연하여 생겨난 것이 아니다.
54)
다시 말해 비존재[無]에 대한 인식은 비존재 자체를 대상으로 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비존재’라고 하는 말(能詮의 名言)을 대상으로 한다는 뜻이다.
55)
다시 말해 ‘비존재’라는 말[能詮]을 통해,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所詮]이 존재하지 않음을 알 뿐이라는 뜻이다.
56)
예컨대 ‘여기에 책이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경우, 이때 비존재의 인식은 책이나 컵이라는 존재를 통해 생겨나는 것으로, 책이나 컵 등이 배제된 비존재 자체는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57)
‘바라문이 아니다’고 말하는 경우, 이 말(能詮)이 비록 바라문을 부정하는 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所詮)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즉 ‘바라문이 아니다’거나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는 말은 크샤트리야나 무상한 것(제행) 등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이다.(후술)
58)
다시 말해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식의 경우, 처음에는 말(능전의 명언)을 대상으로 하여 그 같은 사실을 알지만, 다음 순간 그러한 말에 의해 드러나는 법 자체(즉 제행)를 대상으로 하여 그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59)
원문은 ‘以非有等都無體故.’ 앞서 ‘바라문이 아니다’거나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은 그것이 지시하는 구체적인 대상(예컨대 크샤트리야나 제행의 所詮)을 갖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아무 것도 없다’는 말 등은 그것이 지시하는 구체적 대상을 갖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非有]’은 그 자체 실체(즉 법)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관한 지식은 다만 그 같은 능전의 명언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하였다. 유부에서는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 비존재를 대상으로 하는 앎[緣無覺], 혹은 외계대상을 갖지 않는 인식[無所緣識]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식에는 반드시 실재하는 대상이 존재한다[識有必境]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중현은 본론에서 ‘존재[有]’의 특성을 ‘경계대상이 되어 앎[覺, 혹은 識, 혹은 智]을 낳는 것’이라고 정의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는 일차적으로 과거ㆍ미래법 등 실재하지 않는 법도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경량부에 대한 비판이지만, 이와 같은 장광설의 논의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주장하는 유가행파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고로 후대의 바이세시카 학파에서는 비존재(abhāva)도 실재(vastu)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60)
다시 말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能詮)에 의해 지시되는 ‘비존재[無體]’라고 하는 소전(所詮)의 법 역시 실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토끼 뿔’과 같은 말 역시 그 말에 의해 지시되는 대상이 존재한다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말로 표현된 것인 이상 어떠한 것도 그에 대응하는 실재물이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비존재는 그 자체로서 인식의 직접적인 대상이 될 수 없다.
61)
다시 말해 “소각(所覺,알려지는 대상) 없이 능각(能覺,인식)은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소전(所詮)을 갖지 않은 능전(能詮)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인가?”
62)
네 가지 연은 인연ㆍ등무간연ㆍ소연연ㆍ증상연. 심ㆍ심소법의 생기인연에 대해서는 본론 제20권 ‘제법의 연생(緣生) 관계’를 참조.
63)
인등기(혹은 轉因)가 업(여기서는 발성)을 짓고자 할 때의 마음이라면, 찰나등기(혹은 隨轉因)란 업이 일어날 때의 마음이다.(본론 제36권 ‘표업을 일으키는 두 가지 등기심’ 참조)
64)
말은 그것을 발하려고 하는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 반드시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의미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의미 없는 말을 마구잡이로 내뱉기도 하는 것이다.
65)
이를 ‘비유정명(非有情名)’이라 한다.(본론 제1권 ‘5경’ 중 聲處 참조)
66)
본론 제4권 ‘유소연ㆍ무소연 분별’ 참조.
67)
원문은 ‘非有不應說名爲有.’ 앞서 어떤 이는 “마음[能覺]은 대상[所覺] 없이 생겨나지 않듯이, 말[能詮] 역시 그것에 의해 지시되는 구체적 대상[所詮] 없이 생겨날 수 없다”고 한데 대해, 말은 색법으로 소연을 갖지 않는 것이므로 반드시 소연을 갖는 마음을 동유(同喩)로 삼아 소전의 실유를 논증할 수 없다는 뜻인가?
68)
여기서 ‘그가 시설한 힐난’이란 앞서 중현의 ‘유’의 특성에 대해 비유논자가 힐난한 일곱 가지 중 마지막 힐난인 “만약 일찍이 [발성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말[聲先非有]을 소연으로 삼을 경우, 이때 이러한 능연(能緣)의 앎(즉 識)은 무엇을 소연으로 삼은 것인가?”이다.(주24 참조) 이는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2하; 대정장29,p.105하; 권오민 역,p.921)에서 본문과 같이 광설되고 있기 때문에 본론에서는 ‘경주’ 세친의 서술이라고 구체적으로 명기하여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69)
본론 제17권 ‘경주 등의 택멸무위 무별체설 비판’에서 논설한 것을 말한다.
70)
본론 제17권 ‘경주 등의 택멸무위 무별체설 비판’(주46) 참조. 즉 거기서 경주는 열반(즉 무위택멸)이란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루간택력에 의한 번뇌의 불생과 후유(後有)의 비존재라고 하면서, 계경에서는 다만 가설적 개념으로서의 존재[假有]한다고 말한 것일 뿐이라고 하였다.
71)
본론 제17권 ‘경주 등의 택멸무위 무별체설 비판’(주48) 참조. 예컨대 방음벽이 소리를 차단하여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때 ‘존재하지 않는다[非有]’는 말은 소리의 존재를 근거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토끼 뿔’처럼 궁극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라도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72)
경주 세친은 앞서 “‘[발성되기 이전의] 말은 존재하지 않지만, 미래상태로서 머문다’고 한다면, [그대의 종의에서는] 미래도 실유인데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만약 과거ㆍ미래의 말은 현세에 나타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법] 자체는 [삼세에 걸쳐] 동일하기 때문이다”고 힐난하였지만, 유부에 의하는 한 과거ㆍ미래법은 이미 작용을 마쳤거나 아직 작용하지 않는 상태, 현재법은 지금 작용하고 있는 상태로서 그 차별을 인정하였기 때문에(본론 제52권 ‘삼세 차별에 관한 4대논사의 학설’ 참조), 그같이 힐난할 수 없다는 뜻이다.
73)
즉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한다”는 경설은 법 자체가 그러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의 차별적인 성류(性類)인 작용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 같은 경설로써 유부의 삼세실유를 비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2권 ‘경주의 위부동설(位不同說) 광난(廣難) 비판’, 특히 ‘작용에 대한 경주의 의혹 비판’에서 상론한다.
74)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이나 ‘이미 소멸한 것’은 다만 존재하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으로,(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2권 ‘미생(未生)과 이멸(已滅)에 관한 논란 비판’을 참조할 것.
75)
주16) 참조.
76)
주17) 참조.
77)
과거ㆍ미래가 가유(假有)라는 주장은 경량부만의 종의가 아니다. 『이부종륜론』에 의하는 한, 대중(大衆)ㆍ일설(一說)ㆍ설출세(說出世)ㆍ계윤부(鷄胤部)와 화지부(化地部)의 본종동의(本宗同義)이기도 하다.
78)
즉 가유라고 하는 것은 진흙이나 5온에 근거한 항아리나 자아와 같은 개념적 가설적 존재를 말하는 것으로(주17 참조), 과거ㆍ미래의 법이 가유라고 한다면 무엇에 근거한 가유인지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79)
삼세를 상대적 관계로 이해한 것은 각천(覺天)으로, 그는 이를테면 어떤 한 여인이 그녀의 딸에 대해서는 어머니라고 불리며,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딸로 불리는 것처럼, 어떤 법은 그것에 선행한 법(과거와 현재법)에 대해서는 미래법으로 일컬어지고, 선행한 법이나 다음에 나타날 법(미래법)에 대해서는 현재법으로 일컬어지며, 다음에 나타나는 법(현재와 미래법)에 대해서는 과거법으로 일컬어진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삼세법 각각에 삼세의 상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해 과거법 역시 전후찰나를 구분하여 과거와 미래라 하고 그 중간을 현재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같은 과거 역시 다시 전후 찰나로 구분될 수 있어 시간의 혼란을 야기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52권 ‘삼세의 차별에 관한 4대논사의 학설’에서 상론한다.
80)
주17) 참조.
81)
예컨대 수레는 그것의 근거가 된, 다시 말해 그것을 구성하는 부품이 멸진(滅盡)하면 수레 역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82)
예컨대 수레의 소의(所依)가 되는 부품과 능히 그것에 근거하는 수레(能依)는 절대적으로 관계하지만, 과거ㆍ미래의 법과 현재법은 함께 하지 않는다.
83)
과거ㆍ미래가 가유이고, 오로지 현재만이 실유라고 한다면, 일찍이 현재였던 것이 과거가 되었으므로 실유가 가유가 되는 것이며, 아직 생겨나지 않았던 것이 현재가 되므로 가유가 실유가 된다고 해야 하지만, 실유와 가유가 서로 전변한다는 것은 현실상에서 경험하지 못하였다는 뜻이다.
84)
‘이’ 자가 세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함은, 실담(悉曇)문자의 ‘이(∵)’자의 모양이 세 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대개 그 배열의 위치가 가로도 세로도 아니므로 삼즉일(三卽一) 일즉삼(一卽三), 불일불이(不一不異), 비전비후(非前非後)를 나타낼 때의 비유로 사용된다.
85)
지계(地界)는 견고성[堅相]을 특성으로 하는 물질적 요소로서, 그 자체는 동일할지라도 내적인 그것(육체를 구성하는 것)과 외적인 것(외계를 구성하는 것)은 그 존재양태[性類]가 다르며, ‘수’ 또한 영납(領納,느낌)을 본질로 하는 것일지라도 나의 느낌과 남의 느낌, 괴로운 느낌[苦受]과 즐거운 느낌[樂受]의 차별이 있다는 뜻이다.
86)
즉 안 등의 5근은 다같이 정색(淨色)을 본질[體相]로 하는 것이지만, 견(見)ㆍ문(聞) 등의 공능의 차별이 있으며, 이러한 공능의 차별로 말미암아 안근ㆍ이근 등은 체상(體相)은 동일할지라도 성류(性類)에 차별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다.
87)
『구사론』 제20권(고려장27,p.601하; 대정장29,p.105중; 권오민 역,p.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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