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동이나 대전이나 그곳에 있는 현충원에 갈적엔 땅속에 있는 전우들을 만나러
가면서도 만난다는 생각과 기대로 가곤 했는데.....오늘은 "제발 아니길" "그럴리가.?"
이런 맘으로 어깨가 천근만근...머리속은 점점 새하얗게 되어가고...
65년 6월1일 44년생 軍入隊 서울 병력이 한양대학에 집결,區廳과 洞職員이 軍 當局者와
본인및 거주확인.학력등을 일일히 대조한뒤,그곳에 징집된 우리들은 바로 왕십리 驛
에서 기차를 타고 강경으로 향했다.
6월2일 새벽 한시에 강경역에 도착.걸어서 수용연대에 들어선 우리들은 우리를 마구
몰아 부치는 기간병들과 대치...그 사건으로 그날로 군번을 받고 30교육연대로...
前.後半기 교육을 마치고 서울병력 5~6명은 160 여명의 지방 애들과 함께 앞날의
닦쳐올 운명을 까마득히 모른체,
보병 제9사단으로 배속 받아 gop에 위치한 28도깨비연대 신병교육2중대로...
그리고 나를 포함해 同期 몇명은 우리의 장래를 모르는체...실제상황의 전쟁교육인
원주1하사관학교를 때맞춰 졸업했으니...ㅜㅜㅜㅜㅜ. 그 것도 지원해서...
월남 전쟁에 전투 분대장으로 가기위해 1하사관학교를 그 고생하며 교육을 받았던가...
(나중에 우리 9사단이 전투부대로 파병 결정 됐을 때,全陸軍 사병교육에 유격교육이
없었고 하사관학교처럼,전쟁시 나자신을 보호하고 敵을 射殺 내지는 擊殺 시켜 我軍의
승리를 안겨주는 ... 그런 교육이 절대 부족했다는 걸...[내가 교육을 받아보고 알았음] )
'熱帶와 熱砂의 나라' 거기에 하늘도 잘 안보인다는 정글의 나라.남십자성이 밤하늘에
반짝인다는 나라...말을 들어보면 무척 낭만적이지만...
( ~지나의밤~[시나노 요로시]...일본인들이 승리에 취해 부른 노래라던가)
우리는 그곳에 놀러가거나 영화 촬영하러 가는거 아니잖는가...!!
作戰時, 분대장이 시키는데로 하고 졸졸 따라다니며 순발력만 발휘하면 되는.분대원이면
얼마나 좋은가!
軍隊 지휘자 이상..지휘관급에 부하가 젤 많은 여덟명을 거느리는 者가 분대장 아니던가!
당시 일곱살이기는 하였지만,6,25 사변과 다음해 1.4후퇴 때, 두번이나 피난을 다니며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고단한 피난 생활을 했던 우리 나이들...
전부는 아니지만,난리통에 처참하고 무서던 걸...왠만한 건 다 기억하는 나이...
戰前의 그 참혹했던 전쟁...원효로와 염천교를 잇는 개천가에 팔 다리 떨어져 나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누런 광목의 옷을 입은 어린애들과 민간인 그리고 군인들의 시체가 서로
엉긴채 쳐박혀 죽어있는 처참한 광경들...피난길에도 수없이 봐왔던...
그런 기억을 알고 있는 우리가 어느덧 성인이 되어...군인이 되어..또다시 기억을 더듬어
이유없이 전쟁터에 가야 한다니...
그런곳에"안간다"고 버텼더니 나의 本家에 기관에서 둘씩 셋씩 요원들이 찾아와,
"軍에 있는 자제분이 월남에 안간다고 버티고 있으니 면회를 가서 월남에 가게 하라!!"고,
매일 찾아와서 설득 내지는 협박과 강요를 하니 부모님께서도 눈물을 머금고...
그런 사연을 안고 66년도에 우리는 강제로 월남에 백마 1진으로 파병 됐었지...
너는 나보나 1하사관학교에 먼저가서 66년 1월에 24기로,난 나중에 가서 28기로 졸업을
했지. 졸업후,원래의 우리 소속인 9사단 28연대 2중대로 원대복귀했을 때,
2중대장은 우리를 맞이하며 환호작약...
그도 그럴 것이 下士 계급의 분대장이 절대 부족해 좀 .. 고참들을 하사로 진급시켜 소대
분대장으로 보내는 고육책을 쓰고 있었는데,
하사 몇명이 저절로...그것도 전쟁에 대한 걸 제대로 배운 1군 하사관 출신 하사들이
제발로 찾아왔으니 얼마나 기쁜가.!
그러나 사정을 알게된 우리들이"죽으면 죽었지 월남에 안간다"고, 버티니...중대장도
기가막힐 수 밖에...
"임진왜란" 때도,우리의 백성들은 나라를 지키고자 왜놈들의 칼아래 이슬처럼 사라졌고,
지금의 우리는 나라의 가난을 벗어나고자 목숨을 담보로 월남의 전쟁터로...
억울함과 분함을 참고 우리는 전쟁터 월남으로 향하는 艦船에 몸을 실었었지...
~ 艦船은 떠나간다 아픈마음 안고서 공수래 공수거가 인생이 아니더냐...~
부산 3부두에서 우리를 실은 艦船이 뱃고동 소리와 함께 떠날 때, 부산 3부두가...
"이제 너희들과는 작별이다.살아서 오던지 죽어서 오던지 너희들 할 탓이다."
그러면서 강제로 밀어내는 것 같더군.
멀어지는 3부를 보고 갑판에 주저앉아 울었어.
살아서 돌아와야 저 3부두에 다시 도착해 고향에 돌아 갈게 아닌가!
(그런 모든 설움의 사연 다 생략하고...)

세명이 나랑 동기생 좌측이 송순복 우측이 이강한 (서울애들 사망)가운데는신춬균(경산)

동서울에서 08시 20분 發 유성행 시외버스에 몸을 싣고...

원래는 두시간이면 유성에 도착 하지만,...
고속도로와...대전엔 왠 車가 그렇게 많은지...車가 밀려서.
허기야 내가 출동을 했으니 車도 많고 밀릴 수 밖에.
유성驛에 내려선...(약 3킬로라는데) 현충원까지 걷기로 했다.
소주 한병과 빵 종류좀 사서 베낭에 넣고
현충원 입구에 도착했다.

도약하는 말(馬)동상이

힘차보여 다시 한장 찰칵 -

정문에서 김진억 전우가 있는 곳까지는 313 묘역 까지 왜 이리 먼가...
그런데 흐미..날씨는 왜 이리 덥지?
봄 春字 가진 春川에 봄이 젤 먼저 오기에 그렇게 이름이 지어졌다는데...
내가 대관령에 있을 때,
폭설에 갇혀 고생스럽던게 엊그제 같은데...
大田을 夏田으로 바꿀 정도로 봄을 건너 뛴 여름 날씨라.


이곳 대전 현충원엔 사병들이 제대한지 40년도 지나 타계를 했어도
사진에서 처럼 墓地 안장해줘 너무 감사하다.
측면엔.. 남아있는 가족들 이름도 일일히 다 기록해 주고.

김진억 전우가 묻혀있는 313 묘역이다.






여기엔 최규하 전 대통령의 묘소다.




스코틀란드 사람으로 알렉산드로 뒤마가 지은 "달타냥"이란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어
한국에서도 책으로도 영화로도 "달타냥"은 널리 알려져 왔다.
난 언젠가 부터 이런 생각을 했다.

김의성.이강한.송순복등 三名이 삼총사가 되고
그러나 오늘 이전에 순복이와 강한이를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외국으로
이민을 간줄 알았는데..두명 다 무공훈장 수혜자여서 국내에만 있으면
벌 써 찾았지...
아!! 그런데 순복이가 여기 대전 현충원에 있다니...

(그야말로 어릴적 골목길에서 골목대장들처럼)
춘균인 총사 대장이 되고
나, 김영배는 달타냥
그랬는데
그랬는데 아무리 찾을 려고 애를 써도 찾지를 못했는데
벌써
한줌의 흙이되어 대전 현충원에 묻혀 있는 걸
이제야 알았으니 이게 뭔 전우고 친구란 말인가?!!
시간이 정지 됐었는가...........!!
"순복아! 너 어디가 어떻게 아펐길래 마흔여섯 나이에 세상을 떴드란
말이냐!!
인천에 가서 살았을줄 전혀 몰랐어.
生의 언저리에 머물고 싶을 때 계절도 바람도 잠시 멈춰 줬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