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촌토성(夢村土城)은 가락동과 방이동 일대의 구릉지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긴 타원형의 성곽이다.
성곽의 전체둘레는 2,285m이며 외성을 합할 경우 총면적은 30만 2,500㎡에 달한다.
이 정도의 크기이면 8,000~1만 명 정도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이다.
성은 본성(本城)과 안쪽에 작은 외성(內城)으로 되어 있으며
그 곳에서 백제 초기의 움집터와 기와 및 토기를 비롯한 각종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곳은 백제의 초기 왕성인 "풍납토성"과 함께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된다.
"몽촌토성"은 왕성(王城)과 군성(軍城)의 두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발굴 결과가 아직 명확하게 나오지 않아 확실한 증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중에 갑옷편과 무기가 있어 군성(軍城)의 흔적을 보여주나,
적심석(積心石)을 갖춘 건물지와 조경지(造景池)로 추정되는 연못의 흔적이 나타나고 있고,
각종 중국 도자기 및 와당(瓦當) 등의 유물이 출토되어 왕성(王城)의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5세기 중엽 이후의 고구려 토기들도 출토되고 있다.
이는 고구려가 장수왕 때 풍납토성을 화공(火攻)으로 완전히 페허를 만들어 사람이 살수 없게 하고
몽촌토성에서 거주를 했다는 것과, 그에 따른 "백제의 남천"(南遷)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몽촌토성(夢村土城)은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고쳐만든 "북고남저"(北高南低)의 형태다.
주위는 성내천(城內川)을 이용하여 해자(垓字)를 만들었다.
성(城) 제일 높은 곳에서 성내동쪽을 본 모습.
특이한 것은 성 안쪽은 성에서 상당히 완만한 경사로 되어 있다.
현재도 성 안쪽에서 발굴 중에 있다.
성 안쪽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길.
저 멀리 남한산이 보인다.
이곳은 지형상 보루(堡壘)가 있던 곳이 아닐까 한다.
동남쪽의 성벽은 낮은 대신 목책(木柵)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북쪽 높은 토성은 지형을 이용하여 흙을 보충하여 만든 듯하다.
오랜 세월속에 인공으로 쌓은 흙이 밀려 내려오고 있다.
소나무가 있는 자리부터 흘러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특히 아랫쪽에는 심하게 흘러내려 인공구조물로 더 이상의 훼손을 막고있다.
남쪽은 토성이 건재하다.
조선조 12대 인조 14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나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갔다.
청군(淸軍)들은 이 마을(방이동)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처들어 가려고 했다 .
그러나 이 마을은 남,서,북이 모두 언덕으로 둘러 쌓여 삼태기같이 생기고 마을을 지키는 청년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언덕으로 기어올라오는 청병들을 향해 위에서 활을 쏘고 돌을 마구 던져 방어를 하였다.
결국 청나라 병사들을 하남 고골로 우회하여 남한산성 북문쪽으로 갔다고 한다.
그후 이곳은 마을 주민과 청년들이 오랑캐 침범을 막아 마을을 보호했다하여 "방이(防夷)골" 이라 불리어 졌다 .
그러나 일제 강점기인 1914년, 일본인들은 이런 내용을 싫어하여
꽃다울 방(芳), 힌비름 이(荑),로 한자를 바꾸어 현재의 "방이동"(芳荑洞)이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