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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헌공 나주 임회공 스승 배움길 답사 기행문
매헌공 12대손 이오걸
주관: 매헌공 문중회
집결일시:5월1일 웅촌행정 복지센타 08:00
부산종원:양산공설운동장 07:40 (명곡동명차량탑승)
중간 합류지 울산 함양고속도로 (밀양영남루휴게소)
차량:동백,동천,사무국장,동명 4대 승용차
답사 안내 가이드: 명곡 동명
1) 정렬사(旌烈祠) 참배
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정렬사길 43 (대호동 646)
전라남도 나주시 대호동에 있는 「정렬사(旌烈祠)」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金千鎰, 1537∼1593)과 그의 아들 상건(象乾), 양산숙(梁山璹), 임회(林檜), 이용재(李容濟) 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사당 경내에는 김천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렬사비(전남기념물 48호), 건재동상, 유물관 등이 있습니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저희를 따뜻한 정성과 환한 미소로 맞아주신 관해공 후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평택임씨 회장님과 사무국장님의 따뜻한 환대에 깊이 감사드리며, 한 뿌리의 정을 다시 잇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한 뿌리에서 이어진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새기며, 오늘의 만남이 후손 간 우의와 화합으로 길이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금번 나주 정렬사 참배에 즈음하여, 평택임씨 회장님께서 몸소 현장을 안내하여 주시고 세심히 배려하여 주심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 정성과 후의는 후손 간의 도의를 더욱 돈독히 하는 귀한 계기가 되었기에 이에 기록으로 남깁니다.”
금일 매헌공 후손 일동은 정렬사에 배향된 관해공 임회 선생의 위전에 삼가 참배하옵니다.
선생께서는 임란의 위급한 시절에도 매헌공께 삼년 동안 학문을 가르치시어 도학의 근본을 세워 주셨사오니 그 사은이 실로 하늘과 같사옵니다.
이에 후손 일동, 그 은덕을 추모하며 오늘의 문중이 이어진 연원을 깊이 새기고 삼가 감사의 뜻을 올리나이다
관해공께서는 임진왜란의 난중에도 매헌공이 19세 되던 1593년부터 1595년까지 삼년간 친히 학문을 가르치시어, 그 도학의 기틀을 세워 주신 스승이시다.
이에 후손들은 그 깊은 사은(師恩)을 추모하며, 오늘날 우리 문중이 울산의 명문으로 이어질 수 있었음이 실로 그 가르침의 연원임을 새기고, 양제수춘 회장 이하 후손 일동은 지극한 감사의 뜻을 삼가 기록으로 남긴다.”
관해공 임회 선생의 크신 사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 가르침, 매헌의 도맥으로 길이 이어가겠습니다
訪師感懷(방사감회)
歲次 26年 5月 梅軒公後孫 陽齋 樹春 敬書
四百餘年訪師鄕(사백여년 방사향) 사백여 년 만에 스승의 고향을 찾았고
羅州今日拜遺芳(나주금일 배유방) 오늘 나주에서 그 유덕을 우러러 절하네
宗親遠迎情尤厚(종친원영 정우후) 종친들이 멀리 나와 정성껏 맞이하니
笑語相逢義更長(소어상봉 의경장) 웃으며 만난 정은 더욱 깊고 길어지네
亂中傳道恩難忘(난중전도 은난망) 난중에도 도를 전해주신 은혜는 잊을 수 없고
學脈流光萬世昌(학맥류광 만세창) 그 학문의 맥은 만세토록 빛나리라
今結新交承舊誼(금결신교 승구의) 이제 새 인연으로 옛 의리를 이어가니
同心永續道之光(동심영속 도지광) 마음을 함께하여 도의 빛을 길이 이어가리라
정렬사 유허비 개요
정렬사 유허비(旌烈祠 遺墟碑)는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들을 배향하였던 나주 정렬사가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그 자취를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1966년 남산으로 정렬사를 다시 옮겨 세우면서, 이 유허비를 옮겨 가지 아니하여, 2003년 4월 28일 현 정렬사 경내에 옮기어 세웠다. 앞면에는 적렬사에 봉안된 다섯 선생의 위패 (位牌) 글씨를 그대로 베껴서 새기고, 뒷면에는 선조 39년(1606년) 정렬사를 건립하고 사액(賜額)된 내과, 고종 8년(1871년) 9월에 이 유허비를 세웠다는 년대를 명나라 연호를 사용 새겼으며, 글씨는 유학(學) 나성두가 썼다.
■ 건립 배경
1871년(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비 정책으로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이 철폐됨
나주 정렬사도 이때 철거됨
이에 지역 유림들이 “충절의 정신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같은 해 9월 유허비 건립
■ 배향 인물 (비문에 기록된 충신)
정렬사에는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다음 인물들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문열공 김천일
승지공 김상건
충민공 양산숙
관해공 임회
👉 이들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대표적인 의병·충신들로, 정렬사는 이들의 충의를 기리던 사당이었습니다.
■ 이후 변천
1961년: 유허비를 현재 위치로 이전
1963년: 정렬사 복설 (다시 세워짐)
👉 즉, 이 비석은 “사라졌다가 다시 살아난 정렬사의 역사”를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입니다.
■ 역사적 의미
이 유허비는 단순한 흔적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 충절의 계승
🔹 지역 유림의 역사 의식
🔹 서원 철폐 정책의 현장 기록
🔹 사라진 공간을 기억하는 상징
👉 특히 *“없어진 것을 기억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는 점에서 일반 기념비보다 더 깊은 역사성을 지닙니다.
요약: “정렬사 유허비는 서원 철폐로 사라진 나주 정렬사의 자취와, 임진왜란 순절 충신들의 충의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1871년에 세운 기념비이다.”
2) 임회공 묘소의 제실인 향선재와 임회공 묘소 참배
주소: 전라남도 나주시 내동길 32-8(송월동)
이렇게 40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스승님의 문중을 다시 찾아뵙게 되니 후손된 도리로서 감개무량함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난세 속에서도 학문의 길을 밝혀주신 스승님의 은덕이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하였음을 새기며, 이 뜻깊은 만남을 따뜻이 맞아주신 평택임씨 문중 회장님과 종중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사백 년을 넘어 다시 이어진 인연, 스승님의 문중을 찾아뵙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시간은 흘렀지만 인연은 이어졌습니다 사백 년의 세월을 건너 오늘, 스승의 집안에 다시 서 있습니다 이 따뜻한 만남에 가슴 깊이 감사드립니다”
평택임씨 향선재 대종회는 2023년 직장공 나주 이거 600주년을 맞아, 직장공 휘 첩의 음덕을 기리기 위하여 현성금을 모아 기념식수하고 이 비를 세워 조성된 산소들이 어느 왕가의 묘소로 보인다.
푸른 하늘 아래, 고요히 자리한 선영 앞에 엎드리니 시간은 사백 년의 강을 건너 이 한 순간으로 모입니다.
관해공의 깊은 뜻은 글 속에만 머물지 않고 제자의 가슴에 심겨, 다시 자손의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가르침이 있었기에 매헌공의 학문은 빛이 되었고, 그 빛은 오늘 우리 후손의 길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이 자리에 머리를 조아리며 드리는 것은 단지 예가 아니라, 이어받은 은혜에 대한 고백입니다.
“선조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게 하소서.
오늘의 우리뿐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까지도 바른 길을 배우고, 바른 마음을 지니게 하소서.”
바람이 풀잎을 스치듯,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전해지는 그 뜻과 덕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깁니다.
사백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가르침은 낡지 않았고, 은혜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재배는 끝이 아니라 이어짐의 시작이며, 우리의 다짐은 또 다른 사백 년을 향해 나아가는 작은 불씨입니다.
삼가 머리 숙여 깊은 감사와 함께, 다시 배움을 청합니다.
대종회장님께서 고유문을 작성하셔서 직접 고유하셨습니다.(내용은 별도 추가 예정)
| 贈吏曹參判廣州牧使 觀海林公墓前告由文 증 이조참판 광주목사 관해 임공 묘소에 올리는 고유문 | ||
| 행사명: 광주목사 관해공 임회선생 묘소 참배 일 시:2026년 5월 1일(음력 3월 15일) 장소: 관해공 임회선생 묘소 | ||
| 維歲次丙午五月初 學城李氏梅軒後孫 樹春率諸後孫同來 敬陳薄奠敢告靈前 觀海林公忠義之臣 金湖之姪松江之壻 早歲穎悟文名遠播 歷盡艱難志節愈堅 羅州講學三載承訓 梁山謫所十年隨侍 問學不倦道業日進 師恩如海沒世難忘 嗚呼哀哉歲久情深 音容雖遠德澤猶存 今我後孫追念舊誼 齊心致誠來拜墓下 敢伸微誠 以表感恩 伏願英靈垂鑑此誠 敦倫守道永承遺訓 謹告再拜 | 때는 병오년 5월 초하루입니다 학성이씨 매헌공의 후손들이 회장 이수춘과 여러 후손들이 함께 찾아와 삼가 변변치 않은 제물을 올리고 영전에 아룁니다 관해 임공은 충성과 의리를 지킨 신하이시며 금호공의 조카이자 송강의 사위이십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장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뜻과 절개는 더욱 굳어졌습니다 나주에서 삼년동안 학문 가르치고 가르침을 이어받았으며 양산 유배지에서 십 년 동안 곁에서 모셨습니다 배우고 묻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학문이 날로 깊어졌습니다 스승의 은혜는 바다와 같아 평생 잊기 어렵습니다 아아, 세월이 흘러도 그 정은 깊습니다 모습은 멀어졌으나 덕과 은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 후손들이 옛 정을 기리며 마음을 모아 정성을 다해 묘소에 찾아와 절합니다 감히 작은 정성을 펴서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바라건대 영령께서 이 정성을 굽어살펴 주시고 인륜을 돈독히 도리지켜 가르침을 길이 이어가게 하소서 삼가 아뢰고 다시 절합니다 | |
선조이신 관해공의 산소에 참배를 올리고, 그 깊은 은덕을 다시 마음에 새기는 뜻깊은 자리에 함께 서 있습니다.
세월은 사백 년을 흘렀으나, 한 줄기 뿌리에서 이어진 우리의 인연은 조용한 물길처럼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 덕담을 나누는 이 순간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선조께서 이어주신 인연의 결실이라 생각합니다.
관해공께서 지키고자 하셨던 충의와 도리, 그리고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은 바로 우리 후손들이 이어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아끼고 공경하며 가문의 뜻을 바로 세워 나간다면, 그것이 곧 선조께 드리는 가장 큰 보답일 것입니다.
부디 오늘의 만남이 형제와 같은 정을 더욱 두텁게 하고, 앞으로도 서로 힘이 되는 아름다운 인연으로 길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선조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며, 여기 계신 모든 후손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평안이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정려를 옮겨 모시며”라는 제목 아래, 스승 임회의 삶은 마치 고요한 물결처럼 잔잔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전합니다.
임회는 학문을 단지 지식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배움은 사람을 바로 세우는 길이었고,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었습니다. 그가 매헌공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한 줄의 이력이 아니라, 한 가문의 정신과 흐름을 바꾼 큰 줄기와도 같은 일이었습니다.
정려에 담긴 뜻은 분명합니다. 옮겨 모신다는 것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이 아니라, 그분의 덕과 정신을 오늘의 자리로 다시 불러오는 일입니다.
돌에 새긴 글씨는 바람에 닳지 않지만, 그 뜻은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이어질 때 비로소 살아 숨 쉽니다.
임회의 가르침은 매헌공을 통해 꽃피었고, 그 향기는 사백 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 우리에게까지 닿아 있습니다.
이는 스승 한 사람의 덕이 얼마나 깊고 멀리 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정려 앞에 서면, 자연스레 마음이 낮아집니다. 배움의 시작이 어디였는지, 우리가 무엇을 이어받고 있는지를 다시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비석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된 가르침은 사라지지 않으며, 참된 스승은 시간 속에 묻히지 않는다고. 오늘 우리가 이 정려를 옮겨 모시는 일은 과거를 기리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그 가르침을 이어가겠다는 조용하지만 굳은 약속입니다.
3) 등림사(광주)-평택임씨 사우 참배
[위치]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등임로 414-29(등임동 531-1)
등림사는 조선 명종대 문신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1514~1547]를 주벽으로 송파(松坡) 임식(林植)[1539~1589], 관해(觀海) 임회(林檜)[?~1624] 세분을 제향하고 있는 평택임씨의 사우이다. 임형수는 나주 송월동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북병사를 지낸 임준(林畯)이다.
1531년 사마시에 입격하고 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547년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34세로 사사되었다. 생전에 호당(湖堂)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과 덕행을 닦았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는 『금호집(錦湖集)』상하 2권과 『금호유고(錦湖遺稿)』가 있다.
임식은 임형수의 종자(從子)로 1564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1572년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하였다. 유고로 송파집 1권이 남아 있다.
임회는 임식의 계제로 1611년 5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1624년 이괄의 난 때 순절하니 향년 63세이었다. 유고 『관해집(觀海集)』은 『금호유고』하권 말미에 병철되어 있다.
햇살이 기와 끝에 머물고, 바람이 마당을 천천히 훑고 지나가는 그 오후, 등림사 앞마당에는 말보다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걸음으로 들어선 자리였으나, 막상 사우 앞에 이르니 발걸음은 저절로 무거워지고 마음은 오래된 시간의 문을 여는 듯 숙연해졌습니다.
금호 임형수, 송파 임식, 그리고 관해 임회 세 분의 학문과 절의가 한 처마 아래 숨 쉬고 있는 이곳에서 매헌공의 후손들은 조용히 무릎을 꿇습니다.
돌바닥에 이마를 대는 순간 단순한 예를 넘어서 스승과 제자, 그리고 후손으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맥이 또렷하게 이어집니다.
관해공의 가르침은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매헌공의 삶 속에서 꽃이 되었고, 오늘 이 자리에 모인 후손들의 마음 속에서 다시 씨앗이 됩니다.
누군가의 배움이 누군가의 길이 되고, 그 길이 다시 세월을 건너 또 다른 삶을 밝히는 일, 그 숭고한 이어짐 앞에서, 우리는 비로소 고개를 깊이 숙입니다.
등림사의 고요는 말이 없지만 많은 것을 전합니다.
“배움은 이어져야 한다. 덕은 살아 움직여야 한다.”마치 그렇게 속삭이는 듯합니다.
오늘의 참배는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사백 년을 건너온 가르침에 대한 응답이며, 앞으로 이어갈 삶에 대한 다짐입니다.
조용히 일어나 뒤를 돌아보는 순간, 등림사의 기와는 변함없이 하늘을 이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미 한 걸음 더 깊어진 자리로 나아가 있습니다.
그날의 절 한 번은 시간을 넘는 감사였고, 후손으로서 다시 배우겠다는 가장 낮고도 가장 큰 약속이었습니다.
전라남도 나주시 내동길 32-8(송월동) 등림사(광주)-평택임씨 사우.
[위치]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등임로 414-29[등임동 531-1
[개설] 등림사는 조선 명종대 문신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1514~1547]를 주벽으로 송파(松坡) 임식(林植)[1539~1589], 관해(觀海) 임회(林檜)[?~1624]를 제향하고 있는 평택임씨의 사우이다. 임형수는 나주 송월동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북병사를 지낸 임준(林畯)이다. 1531년 사마시에 입격하고 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활동하였으며 1547년 정미사화에 연루되어 34세로 사사되었다. 생전에 호당(湖堂)에서 함께 공부하였던 이황(李滉), 김인후(金麟厚) 등과 친교를 맺고 학문과 덕행을 닦았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많은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저서로는 『금호집(錦湖集)』상하 2권과 『금호유고(錦湖遺稿)』가 있다. 임식은 임형수의 종자(從子)로 1564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1572년 문과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직하였다. 유고로 송파집 1권이 남아 있다. 임회는 임식의 계제로 1611년 5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1624년 이괄의 난 때 순절하니 향년 63세이었다. 유고 『관해집(觀海集)』은 『금호유고』하권 말미에 병철되어 있다.
매헌공의 스승이신 관해공의 사우를 찾아 깊은 감사의 마음으로 참배를 올린 뒤, 등림사 제실 앞 강당 마당에서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날 우리 문중에서는 매헌공 유집을 관해공 문중 회장님께 정중히 전달하며, 매헌공께서 높은 학문과 인품을 갖추실 수 있도록 가르침을 베풀어 주신 관해공의 은덕에 깊은 존경과 감사를 전하였습니다. 이는 단지 한 권의 책을 전하는 자리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 문중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학맥과 정신을 밝혀 주신 고마운 인연에 대한 마음을 담아 올린 뜻깊은 예였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양 문중이 선현들의 뜻을 받들어 학덕과 우의를 이어가며, 더욱 깊은 인연과 화합으로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나누는 소중한 자리였습니다.
다음에는 우리 매헌정사에서도 회후를 할 수 있는 날을 기약해 봅니다.
4) 32회 한중서법교류전 광주 비엔날레 전시관 참관
「평택임씨」금호공,송파공,관해공시문학 조명전
전시장소- 광주비엔날레전시관 (2, 3관), 광주광역시 북구 비엔날레로 111
전시기간-2026년5월1일(김)~7일(목)
우리 매헌공 문중은 뜻깊은 마음으로 매헌공의 큰 스승이신 관해공의 산소와 정려각, 그리고 재실인 향선제와 등림사를 찾아 정성껏 참배를 올렸습니다.
이어 광주광역시 북구 비엔날레로 111에 위치한 광주비엔날레전시관(2·3관)에서 열린 제32회 한중서법교류전 「평택임씨 금호공·송파공·관해공 시문학 조명전」 개막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 매헌공문중 회장이신 양재께서 관해공 문중과 여러 내빈 인사들과 함께 개막 커팅식을 가지며 양 문중의 깊은 인연과 화합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또한 전시장에 전시된 관해공의 뛰어난 시문과 학덕의 자취를 둘러보며, 선조들의 높은 학문과 정신세계에 깊은 감명을 받는 귀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정을 마친 뒤에는 섬진강 휴게소에서 재첩국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하루의 뜻깊은 여정을 마무리하고 무사히 귀향하였습니다.
이번 참배와 교류의 여정은 약 400여 년 만에 우리 매헌공의 큰 스승이신 관해공의 자취를 다시 찾아뵙고 예를 올린 매우 뜻깊은 하루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문중이 이처럼 이어지고 번창할 수 있는 것도 모두 관해공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과 인품을 이루신 매헌공 조상의 은덕이 있었기 때문임을 다시금 깊이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아울러 먼 길을 함께하며 정성과 예를 다해 주신 모든 종원 여러분들의 노고에도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앞으로도 문중의 화합과 인연이 더욱 굳건히 이어지기를 기원합니다.
謁師感懷(참배 감회)
丙午 孟夏 日鴻 五杰 敬書
四百餘年訪舊蹤(사백여년 방구종) 사백여 년 만에 옛 자취를 다시 찾아
今日恭拜仰師風(금일공배 앙사풍) 오늘 공손히 절하며 스승의 풍모를 우러르네
梅軒承敎成文德(매헌승교 성문덕) 매헌공께서 그 가르침을 이어받아 덕을 이루셨고
學脈相傳世益隆(학맥상전 세익융) 그 학문의 맥은 이어져 세대마다 더욱 융성해졌네
宗親遠至情尤篤(종친원지 정우독) 종친들이 먼 길 함께하여 정이 더욱 깊고
禮意周全義更融(예의주전 의경융) 정성과 예가 두루하여 의리 또한 더욱 화합하네
願繼先賢弘大道(원계선현 홍대도) 선현의 뜻을 이어 큰 도를 널리 펴고
同心萬代振家風(동심만대 진가풍) 마음을 함께하여 만대에 가풍을 떨치기를 바라노라
매헌 도맥가(梅軒道脈歌)
1절 ) 참배감회(參拜感懷) → 사백 년 만에 스승을 찾아뵙는 감격과 경건함
사백년을 지나와서 스승자취 다시찾아
공손하게 큰절올려 높은은덕 우러르네
2절 도맥계승(道脈繼承) → 매헌공의 가르침과 학문의 계승
매헌조상 그가르침 문덕으로 꽃피우고
이어져온 그학맥은 자손대대 더욱빛나
3절 종친화합(宗親和合) → 문중 간의 정과 예, 의리의 결속
먼길함께 종친들이 정성또한 깊고높네
예도로써 서로섬겨 의리더욱 돈독하네
4절 도학선양(道學宣揚) → 선조의 뜻을 이어 도학 정신을 펼침
선현뜻을 이어받아 도학정신 널리펴고
선조정신 이어받아 만대토록 빛내리라
후렴
스승은혜 깊이새겨 매헌도가 이어지네
도학정신 이어받아 문중화합 길이하세
관해와 매헌의 사제 송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