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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 때 양친을 잃은 소년이 있었다. 충남 아산의 외갓집으로 내려온 소년은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는게 하루 일과였다.
일곱 살 때 칡을 캐기 위해 동네 뒷산에 올랐던 소년은 움막에서 한 노인을 만난다.
아흔 여덟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마치 60대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근력도 젊은이 못지않았다.
이런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던 소년은 놀기 삼아 움막을 드나들다 아예 노인의 집으로 들어간다.
소년은 노인을 따라 산으로 약초를 캐러다니고 물지게를 나르면서 그의 몸짓과 발짓을 배운다. 꼬박 13년을 그렇게 했다.
어느 날 노인이 소년을 불렀다. 노인은 "처음 먹었던 마음이 끝까지 변치 않기 바란다"며 "네가 닦은 무예는 선대로부터 물려 받은 것인만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라"는 당부의 말을 남겼다. 몇 개월 뒤 노인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아마 돌아가실 것을 아셨던 모양입니다. 자신의 삶을 정리하려고 하신 것 같아요. 그 뒤에는 스승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때 스승의 나이가 111세였습니다."
스승과 결별한 뒤 계속 이 산 저 산을 떠돌아다니던 그는 1993년 마침내 세상으로 나온다. 그가 '동이무예택견' 고수 박성호(50) 씨다.
# 무인의 길을 간다
동이무예택견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박 회장은 여러모로 특이한 무술인이다. 수련 과정이 영화에서나 나올법하게 극적이며 살아온 역정 역시 보통 사람들과 판이하다. 게다가 그의 분신과도 같은 동이무예택견 자체도 다른 무술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함을 갖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는 각 지방마다 택견이 있었고 박 회장의 무예는 평안북도 택견이다. 송덕기~신한승 선생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택견과는 전혀 다르다. 그 자신도 그 점은 분명히 한다. 가르쳐 준 사람이 다르고 배운 수도 완연하게 구별이 된다는 것이다. 우선 보법에서 차이가 있다. 동의택견에는 네 가지의 '얼르기(기존 택견의 품밟기)'가 있다. '갈지(之)자' '디귿자' '품(品)자' '삼수'보법이다. 이 가운데 동이무예택견은 '갈지자' 보법을 중요시한다. 가장 근본적이고 기본적인 보법인 까닭이다. 보법이 정확해야만 수련 효과가 극대화된다.
동이무예택견의 두드러진 것 중 하나는 현란한 발기술에 있다. 박 회장은 이를 '비각술(飛脚術)'이라고 부른다. 종류만도 깎아내리기 올리기 차기 걸기 당기기 밀기 솟구치기 난간치기 휘몰차기 도리깨질 쟁기차기 등 수십 종을 헤아린다.
"비각술은 평북 태견의 특징이죠. '날파람'이라고도 합니다. 그만큼 빠르다는 뜻입니다. 붕 날아가서 상대를 박치기로 제압하는 시라소니(평북 신의주 태생)도 비각술을 수련했다고 봐야죠."
동이무예택견은 수련방법도 남다르다. 일반 기술 전수 외에 산으로 들어가 약초를 캐거나 산세를 익히는 방법도 배운다. 이는 박 회장 자신이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 무예뿐 아니라 약초공부 등 전반적인 지식을 습득한 데서 비롯된다. 육체적인 기술은 쉽게 터득이 가능하지만 인격 수양은 본인이 부딪쳐 공부하지 않으면 힘들다는 이유도 있다.
생소한 무술이다 보니 박 회장은 전수관을 열었을 무렵, 정통성 논란에 휩싸였다. 박 회장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동이무예택견을 알지 못하는 데다 100세 가까운 노인으로부터 비술을 전수받았다는 사실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른 까닭이다. 더구나 스승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세간에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사이비 무술이라는 극단적인 비난도 나왔다. 박 회장이 애초부터 세상을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면 억울하기 이를데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은 동이무예택견 홈페이지에 비방 글이 올라와도 무시할만큼 면역이 됐지만 한 때 박 회장은 택견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대해 회의를 가진 적도 있었다. 한편으로는 택견의 대중화로 인해 남녀노소 누구나가 쉽게 배울 수 있게 되자 '택견은 약한 무술'이라는 인식이 강해져 동이무예택견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다.
"애초에 동이무예택견이라고 한 것은 택견을 하는 사람들이 보다 좋은 기술을 서로 교환하면서 멋진 전통무예로 만들어보자는 뜻에서였는데 기존 택견과 다르다고 좋지 않은 눈으로 보는 바람에 차라리 이름을 달리 쓸 것을 그랬구나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통 택견은 세간에 알려진 것 처럼 결코 약한 무술이 아닙니다. 강인함과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택견입니다. 기존의 택견을 하시는 분들이 택견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대중화한 공로는 인정하나 오히려 역효과가 난데 대해서는 아깝고 원통합니다."
# 실력이 세간의 소문을 잠재우다
백 마디 말보다는 한 번의 동작을 보는 것이 나은 법. 박 회장이 도복차림으로 몸을 일으켰다. 대전에 있는 동이택견무예연구회 도장에서였다. 박 회장은 최근까지 전북 전주에서 제자들을 지도하다 1개월여 전에 대전에 정착했다.
박 회장의 자세가 심상찮다. 갈짓자 행보를 하며 몇 번 몸을 풀더니 발질을 선보인다. 소문으로만 듣던 그 비각술이다. 눈이 핑핑 돌만한 빠른 속도다. 공중으로 몸을 휙 던지는가 싶더니 번개같은 발차기가 상대 사범의 머리를 강타한다. 이건 또 뭔가. 몸이 마치 물구나무를 선듯한 상태가 되더니 쏜살처럼 발질로 이어진다. 정통으로 맞았다가는 뼈를 제대로 추스리기 힘들 것 같다는 오싹함이 밀려 온다. 공중에서 훨훨 날아다닌다는 표현 외에 다른 수식어가 떠오르지 않을 정도다. 대여섯 번 계속해서 이어지는 발질은 쭉쭉 뻗어 나간다. 가슴을 맞은 사범은 단번에 서너 발자국 뒤로 밀려나간다. 30대 무렵 뛰어가는 토끼도 따라가 잡은 적이 있다는 믿기지 않는 박 회장의 일화가 그제서야 곧이곧대로 들린다.
큰 동작은 반드시 허점이 있는 법. 혹시 정확한 타격이 빗나간다면 상대에게 역습을 당하지는 않을까. 박 회장의 답이 간단명료하다. "맞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야말로 고수다운 자신감이다.
박 회장이 격파에 들어갔다. 튼실한 각목 두 개다. 사범이 11자로 나란히 세웠다. 기합 소리가 한 번 터져나오더니 정확한 발질이 각목을 때린다. 각목이 거짓말처럼 두 동강이 나버렸다. 가격 부위는 발등도 아닌 정강이뼈.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이라면 누구나 군홧발에 정강이뼈를 맞는 이른바 '쪼인트를 까인' 경험이 있을 터. 부딪히기만 해도 아픈 그 정강이뼈로 각목을 부수기까지에는 얼마나 많은 수련이 필요했을까. 박 회장은 각목 12개를 한 번의 발질로 부러뜨린 적도 있다. 이날 만남에서는 직접 접하지 못했지만 그가 발질로 대나무를 칼 보다 더 예리하게 싹뚝 잘라버리는 모습은 지금도 동이무예택견연구회 홈페이지나 인터넷 무술사이트에서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격파는 속도와 힘이 있어야 가능하죠. 만약 사람을 저렇게 찼다면 내상을 입었을 겁니다. 그리고 격파를 할 때는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영원히 깰 수가 없죠."
박 회장은 자신의 무예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어디서나 "동이무예택견 111대 수련자"라고 내세운다. 쉬 받아 들이기 힘든 말. 그렇지만 그의 비각술을 한 번이라도 직접 봤다면 애써 무시하기도 힘들 법하다. 어쩌면 이런 내공이야말로 박 회장이 주위의 온갖 비난을 물리친 바탕이 되었을 수도 있다.
"전 지금까지 제가 고수라는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단지 남들이 모르는 길을 먼저 가고 있을 따름입니다. 진짜 고수란 초능력자가 아니라 한 길을 가면서 남을 무시하지 않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오랜 세월을 산 속에서 살아온 박 회장. 그에게는 산으로 돌아가고픈 소박한 소망이 있다. 어설프게 세상에 발을 내밀었다가 영악한 사람들에게 당한 기억이 남아 있어서다. 현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이를 가만두지 않았다.
"저는 산사람입니다. 앞으로 산 속에다 20~30평 가량의 살림집과 운동을 할 수 있는 넓은 마당을 만들어 제자를 가르치는 게 꿈입니다. 뭐 안되도 할 수 없지요. 제 대(代)에서 안되면 제자들이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전수관이 잘 되지 않아도 별 미련은 없습니다. 저는 정도를 걷고 있기 때문이지요. 사람은 저마다 본분이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다행히 저는 그걸 찾았고 그리고 그 길을 가는 중입니다. 무인으로서는 무인의 길이 마지막 길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