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44> 서장 (書狀)
영시랑(榮侍郞)에 대한 답서 (1)
미리 예상하거나 추측하지 말라
“편지에 보니 조심스럽게 이 한 개 큰 인연(因緣)을 다 밝히고 싶다고 하였더군요. 이미 이러한 마음을 먹었다면 무엇보다도 조급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조급하게 서둘면 오히려 늦어집니다. 또 늦추어서도 안되니 늦추면 게으름에 떨어집니다. 마치 거문고의 줄을 고르는 것처럼 해야 하니, 팽팽하고 느슨함이 적당해야만 비로소 곡조가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다만 매일매일 인연에 응하는 곳에서 때때로 살펴서 파악하되, 내가 남과 함께 옳고 그름과 바르고 굽음을 결단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의 은혜로운 힘을 입은 것이며 결국 어느 곳에서 나오는 것인가 하고 살피고 또 살피다 보면, 평소에 생소하던 길이 저절로 익숙하게 될 것입니다. 생소하던 것이 익숙해지면 익숙하던 것이 저절로 생소하게 됩니다.
무엇이 익숙한 것일까요? 5온(蘊)과 6근(根)과 12처(處)와 18계(界)와 25유(有) 위에 무명의 업식(業識)으로 사량하고 헤아리는 심식(心識)이 밤낮으로 찬란하게 빛나서 마치 아지랑이가 잠시의 틈도 없이 피어오르듯이 하는 것이 바로 익숙한 것입니다.”
세간법과 불법 나눌것이 없지만
사람이 어리석어
불법은 보지 못하고 세간법만 보고있다
세간법(世間法)에 우리는 매우 익숙해 있다. 세간법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익혀 왔다. 그러므로 세간법에 관해서는 이제 따로 배울 필요가 없을 만큼 습관이 되어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위하는 모든 것이 이 익숙한 세간법에 따르고 있다. 이 때문에 우리의 삶은 세간의 삶이라고 한다.
세간법의 특징은 다양하게 나눠져 차별되어 있는 것이고,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며, 나와 남이 나눠져 있는 것이고, 선택하여 취하고 버림이 있는 것이며, 욕망과 좌절이 교차되는 것이고, 더러움과 깨끗함을 나누고 옳음과 그름을 나누며 좋음과 나쁨을 나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이고, 성스럽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며 힘들어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한 순간의 틈도 없이 끊임없이 생멸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이요 세간법이다.
불법(佛法)은 이러한 세간법과 본래 동일한 하나로서 딴 것이 아니지만, 이러한 세간법과는 그 특징이 매우 다르다. 불법은 나눠져 차별되지 않고, 주관과 객관이 나눠지지 않으며, 나와 남이 나눠지지 않고, 선택하거나 취하고 버림이 없으며, 달리 욕망할 것도 없고, 욕망이 없으니 좌절도 없으며, 더럽고 깨끗함을 나누거나 옳음과 그름을 나누거나 좋음과 나쁨을 나누지 않으므로 그 사이에 갈등도 없고, 성스럽고 위대한 것이 따로 없으므로 원하거나 힘들게 추구할 것이 없다.
세간법과 불법이 본래 하나로서 세간법이니 불법이니 하고 나눌 것이 없지만, 사람은 어리석어 불법은 보지 못하고 세간법만 보고 있다. 여기에 우리의 불행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부란 우리의 어리석음을 지혜로 바꾸는 것이다. 법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법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리석음과 지혜 역시 그 자체 법으로 본다면 다른 것이 아니다. 어리석음이 나오는 바탕과 지혜가 나오는 바탕은 동일한 하나의 법이다. 어리석음이 나오는 곳에서 지혜도 나오고 나아가 삼라만상의 온갖 법이 다 나온다. 그 까닭에 일체는 모두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은 아상(我相)이 중심이 되어 익힌 습(習)에 따라 세간법을 살아가므로, 세간법에는 익숙하지만 불법에는 낯설기가 그지 없다. 그러므로 공부하는 사람은 미리 세간법에 익숙한 사고방식으로 불법이 어떠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불법의 공부는 아무런 예상이나 추측도 없이 막연히, 그러나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을 깊게깊게 다져가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한 막연한 기다림이 충분해져서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전혀 뜻밖에 문득 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마음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기도 하지만 너무나 생소한 것이기도 하다. 모두가 습 때문이지만, 불법이 익숙하게 될수록 오히려 세간법은 생소하게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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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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