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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7:36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
창 39:1-5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형통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우리가 읽은 37장 36절은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곳에 미디안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37장에서 이런 말씀을 봅니다.
창 37: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 집어 넣고 그리고 요셉이 가지고 온 음식을 먹다가 무엇을 보게 됩니까?
미디안에서 애굽으로 가는 장사꾼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 중 유다가 이런 말을 합니다.
창 37:26-27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동생을 많이 생각하죠? 그렇습니까?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 들 무엇이 유익할까? 무슨 말입니까?
죽이지 말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라고 합니다.
참 너그러운 형입니까?
그러고 있는데 이스마엘 사람들 다른 표현으로는 미디안 상인들이 지나 갑니다,
그리고 그들을 불러 세워서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려서 그 장삿꾼들에게 은 이십개를 받고 요셉을 팔았습니다.
그전에도 인신매매범들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인신 매매 범들의 기록입니다.
요셉은 자기가 팔려가는 것을 알고 난 다음 형들에게 팔지 말아 달라고 얼마나 사정을 했을까요?
그리고 미디안 상인들은 요셉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서 종의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성경에는 요셉을 누구에게 팔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보디발에게 39장 1절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 39: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그리고 그 다음 말씀은 이런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창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우리 성도님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지 않습니까?
너무나 많이 들은 이야기라고 그냥 다 이해하시고자 마음을 먹었습니까?
말씀을 그냥 받아 들이는 것도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왜?
왜? 라는 물음표도 말씀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한 선지자는 이런 말씀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합 2:1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그리하였더니”
무슨 말씀입니까?
하박국 1장에 보면 하나님께 그는 많은 질문 들을 소다 냅니다.
1장 1절만 보겠습니다.
합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내가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니이까 라는 말씀이죠?
그러한 질문을 소다 낸 다음 파수하는 곳에 서서 하나님께서 어떤 대답을 주실지 보리라는 말씀을 2장에서 합니다.
이런 질문을 가진 사람들은 그러한 답을 듣는다고 언제 제가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궁금하지 않으면 답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창세기 39장 2절을 읽을 때 두 말씀이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라는 말씀이고요? 그 다음은 형통한 자가 되어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한 자가 종으로 팔려 갑니까? 저주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오래 전에 우리 교회에 유명한 목사님이 췌장암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암으로 운명을 달리하시는 목사님이 그분 한분만이 아님에도 그분이 워낙 유명했고 또 영성이 있으신 분으로 많이 알려져 있고 저도 너무 너무 좋아하는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분이 췌장암으로 돌아가시고 난 다음 어떤 분으로부터 어떻게 목사님이 췌장암으로 돌아가실 수가 있는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영성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믿음의 사람처럼 보였지만 어떠하다는 말입니까? 모르는 죄악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 같아서 말을 섞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제가 정말 좋아했던 목사님이 두분이 계셨습니다.
한분은 지금 말씀드리는 그분이고요. 다른 한분은 아직도 살아 계시는 분이십니다.
은퇴하신지 오래 되셨지만 90이 넘으려나 하는데 아직도 초청을 하면 달려 가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주님 오실 때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접해 주실지는 몰라도 제가 너무 좋아했던 목사님이다 보니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참 부담이 되었습니다.
정금자가 당뇨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눈 신경이 탈이 나서 많은 고통을 받았고요.
그리고는 신장이 좋지 않아서 참 조심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의 협력의 부족으로 인하여 운명을 달리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정집사를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을 떨 굴 수가 없습니다.
나중 부활의 아침 만나면 정말 미안했다고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 그를 사랑하는 친구가 전화를 해서 대화를 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하드랍니다.
재림 성도가 어떻게 당뇨에 걸리느냐고요.
너무 믿다 보니 그런 말을 하였는지는 몰라도 그런 말이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는 전화를 끊고 나서 그 말로 인하여 한동안 힘들어 했습니다.
그런 말을 한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고요. 그 친구의 말처럼 재림성도라고 하면서 당뇨에 걸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삶이 될까봐 그것이 두렵다는 식으로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하나님의 사람도 당뇨에 걸릴 수가 있습니까?
신장 투석도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그런 거 받을 수가 있습니까?
취장암에 걸려서 죽을 수도 있습니까? 성경에 그런 내용 있던가요?
예 우리는 지금 창세기 39장 2절을 읽다가 이런 말씀을 나누게 된 것입니다.
요셉을 두고 성경은 기록하기를 하나님께서 뭐를 하셨다고 합니까? 함께 하셨다.
함께 한 사람은 무슨 일이 없어야 된다고 많은 사람들의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까?
적어도 인신 매매범에게 잡혀서 종으로 팔려 가는 일은 없어야 된다.
그러니 무엇이 잘못이라는 말씀입니까? 성경이 잘못입니까? 사람의 사고가 잘못되었습니까? 사람의 사고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과정을 가지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알기 때문에 요셉을 그런 길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로서 어리광 부리는 아들로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요셉을 미워 하는 형들이 하는 일들을 그대로 두고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종으로 팔려가는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애굽의 총리로 세우셨습니다.
과정이 중요하지 않죠? 결과를 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럼 결과가 암으로 돌아가신 분과 투석중 돌아가신 분들은 결과가 그런데요 하실 것입니까?
아직 결과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는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그 부활의 아침에 제가 사랑하였던 그를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도 만날 것이고요.
그날 만날 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날 그 아침에 정말 하나님께서 그대들과 함께 하셨다고 찬양하게 딜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오늘 우리의 삶에 아픔이 좀 있다고 억울해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길만 확실하다면 그 아픔 정도는 참을 수 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가는 길입니다.
정말 여호와 께서 함께하는 길인지 살펴보면서 힘들고 어려워도 때로는 아프고 고통이 있어서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는 길을 가게 되길 축복합니다.
다음은 그리스도인의 형통에 대하여 생각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성경 봅니다.
창 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우리 성도님들은 형통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미가 505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인도 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 하리라”
좋은 찬미입니까? 여러분들도 많이 부릅니까? 한번 불러 볼까요?
만사 형통이 어떤 것을 가지고 만사 형통이라고 합니까?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 지는 것을 가지고 만사 형통이라고 하는 거 맞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9장 2절의 형통과 3절의 형통이 좀 다른 감을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공동번역에는 형통이라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먼저 2절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야훼께서 돌보아 주셨으므로 앞길이 열려 이집트 사람 주인집의 한 식구처럼 되었다”
함께하심을 돌보아 주셨다 그리고 형동을 열려 라는 말씀으로 번역하였습니다.
3절 올려드립니다.
“주인은 야훼께서 그를 돌보아 주시는 것을 알았다. 그의 손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지 야훼께서 잘되게 해주셨던 것이다”
형통을 하나님께서 잘되게 해 주셨다는 말씀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형통이 길이 열리고 잘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해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종살이가 잘 된 것입니까?
집에서 사랑받는 아들로 살아가는 것이 잘 된 것입니까? 무엇이 형통입니까?
나중에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에 대한 이야기를 다음에 나눌 수 있지만 감옥에 있을 때 꿈을 해석해 준 사람에게 당신이 나가면 나에 대한 것을 왕에게 말씀을 잘 드려 나로 하여금 나가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죠?
그런 것을 보면 요셉의 감옥살이가 좋았다는 말입니까? 싫었다는 말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부잣집 사랑받는 아들로 있다고 종으로 팔려 온 것은 망한 것 중에 망한 사람의 모습이죠?
그런데 종살이 하다가 감옥에 들어 갔으니 졸딱 망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런데 그런 과정을 성경은 무엇으리고 기록되었다고요? 형통으로 기록되었다
무슨 말입니까?
보통 사람들의 생각은 누가 생각하여도 형통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무엇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죠?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다르다고 합니까? 생각이 다르다.
그리고 또 무엇이 다르다고요? 길이 다르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제가 고향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월요일에 집을 나서면 목요일 되어야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울진 살면서 시계를 하였기 떄문에 거래처가 모두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당시는 폰이 없었고 전화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랫동네에 도착하여서 집으로 전화를 합니다. 나 왔어 라고요?
아랫 동네에서 우리 집이 있는 동네로 가려면 약 1킬로 정도 산길을 가야 합니다.
건너 편에는 많이 다니지 않는 자동차 도로가 있고요.
그래서 저의 생각에 혹 아이들이 아빠가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려 오면 좋은 길로 오겠지 하고 찻길로 올라 갑니다.
근데 아이들은 빨리 도착하려면 가까운 길로 오실 것이라 생각하였는지 산길로 내려 옵니다.
멀리서 보니까 아이들이 보여요, 소리를 쳤습니다. 성열아 향기야 하고요.
그럼 아이들이 건너 편에서 아빠 소리를 듣고 그 깊은 구렁을 넘어서 아빠에게로 건너 옵니다.
무엇이 달라서 길이 어긋났습니까? 생각이 달라서요.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무엇이 다르다고 하셨습니까? 생각이 다르다.
무슨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까? 성도의 길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만사형통도 내가 원 하는대로 되는 것인 줄 대부분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여러분들도 그러한 생각을 하시고 계시나요?
요셉의 이야기는 그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경이 말하는 만사 형통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결론적인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요셉을 통해 보여주신 만사 형통은 요셉이 원 하는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요셉을 인도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아멘 입니까?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생각과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살아가길 원하시나요?
아니면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길 바라고 살기를 원하시나요?
우리 모두가 다 믿음이 연약하다 보니 내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더 유익한 방식으로 인도 해 주시길 다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가장 유익 되고 가장 선하고 좋은 것임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성경은 결론 적인 부분을 다 보여 주시기 때문에 알 수가 있지만 우리는 결론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대로 기도의 응답이 오지 않으면 의아해 하고 실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실망이 온다고 믿음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실망된다고 더 실망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도 언제 알 수 있습니까? 그날에, 언제요? 주님 오시는 그날에.
저는 함께사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곧잘 합니다.
우리가 이땅에 사는 것은 천국 가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받고 살면 된다고요?
요셉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우릴 인도하시는 그 인도를 따라 가면 과정과 상관없이 결국 우릴 영접하실 분이 계시기 때문에 오늘 어렵고 힘이 들어도 우리를 영접하실 그분만 바라보고 살자고요.
저는 우리 성도님들도 그렇게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문서전도를 하다가 건강 상 이유로 농사를 지으려고 가지고 있는 서적을 다 정리하여서 그 돈으로 송아지를 한 마리 사가지고 왔습니다.
함께하는 사람이 마중을 나와서 소 이까리를 받아 들고서 하는 말 여보 하나님께서 이 소를 달라고 하면 언제든지 드립시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살다가 갔습니다.
부활의 아침 제가 준비 되면 만나게 될 것이라 확신 합니다.
다시 만난 구집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결혼식을 할 때 아는 사람들이 부조 이야기를 하여서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많이 들어 왔습니다.
다 정리 하고 나니까 200만원인가 남았드라고요? 당신 통장에 두고 당신 알아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와서 피아노가 그렇다고 새거는 못하고 중고라도 바꾸자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통장에 얼마 안되는 거 톡 털어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어찌 똑 같은 사람을 만나게 하셨나요? 라고요.
저희들은 이땅에는 정말 미련 없이 살고 싶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도 다 세상에 미련 두지 말고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준비하신 그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때로는 아플 때도 많이 있습니다. 오해도 생기고요. 실망도 느끼고요, 그러면서 우리 하늘 가는거 아닙니까?
우리 모두 그 영원한 행복의 문이 열릴 때 그곳 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한 세상 살이 접고 우릴 기다리시는 주님 앞으로 기쁨으로 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