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19) 고깔
이 진사 사랑방엔 선비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술 한잔 걸친 선비들은 하나같이 이 진사를 졸라댔다.
마지못한 척 이 진사는 병풍 뒤 책장에서 사군자 족자를 꺼내 펼치고 선비들은 감탄사를 쏟아냈다.
사군자는 이 진사 부인의 작품이다.
재색을 겸비한 이 진사 부인 자실댁의 신혼생활은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이레 만에 다가오는 장날이면 남들의 수군거림도 아랑곳없이 이 진사는 자실댁 손을 잡고 장으로 갔다.
챙 넓은 갓에 옥색비단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이 진사도 훤칠했지만
청사·홍사 치마저고리에 장옷을 걸친 자실댁은 하늘에서 갓 내려온 선녀였다.
필방에 들러 먹과 붓을 사고 방물가게에서 노리개를 사고 너비아니집에 들렀다가
저녁나절 집에 오면 얼큰하게 취한 이 진사는 곧바로 안방으로 들어가 성급하게 자실댁을 당겼다.
호사다마라던가.
잔칫집에 다녀온 이 진사가 토사곽란으로 밤새 꼬박 뒹굴더니 한참이 지나도 일어날 줄 몰랐다.
삼십리 밖, 육십리 밖 용하다는 의원 다 불러와 백약을 써도 차도가 없었다.
서너달이 지나자 돈통이 바닥나고 반년이 지나자 곳간의 나락섬을 내다 팔고
일년이 되자 자실댁은 장롱 속의 패물을 들고 금은방을 찾았다.
풀벌레 울어대는 가을밤, 이 진사는 식물인간이 되어 죽은 듯이 누웠고 자실댁은 벽에 기대어
비몽사몽간에 이 진사와 손을 잡고 장에 가던 꿈을 꾸고선 눈물을 쏟았다.
자실댁이 어릴 때부터 친정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가보인 벼루, 수침석당용연을
필방에 내다 팔고 끓어오르는 슬픔을 삼키고 집으로 돌아와 이 진사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서방님을 꼭 일으켜 세우겠습니다. 제 손을 잡고 필방으로 가 제 벼루를 찾아주십시오.”
나루터 주막은 저녁나절 초롱불이 사립문 위에 걸리면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평상에는 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린 최 대인과 노승이 곡차를 마시고 있었다.
최 대인은 거상이다.
우마차에 바리바리 상품을 싣고 다니는 게 아니라 그의 상품은 품속의 쌈지 하나가 전부다.
그 쌈지 속에는 한줌도 안되는 경면주사가 들어 있을 뿐이다.
한해 통틀어 거래라고는 두세번이 전부지만 쌀장수가 백석 거래한 것보다,
새우젓 도매상이 백독을 거래한 것보다 액수가 컸다.
최 대인이 나루터 주막에 보름이 넘게 죽치는 것은 저녁에만 주모의 일손을 도와주는
우아한 여인에게 반했기 때문이다.
숫처녀도 품어보고 기생집 동기도, 주모는 말할 것도 없고 유부녀에 청상과부….
최 대인이 점찍어 넘어가지 않는 여인이 없었는데 주막에서 일 도와주는 여인이
백냥에도, 삼백냥에도, 천냥에도 싫다니!
그날도 노스님과 최 대인이 너비아니에 소곡주를 마시다가 노스님이 한마디했다.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의 부인을 탐하면 큰 탈을 당한다는 옛말이 있어.”
최 대인의 한숨이 평상을 뚫을 듯했다.
최 대인과 그 여인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입이 부르튼 주모가 새로운 묘수를 냈다.
그 여인은 유려한 필체로 각서를 썼다.
보증인으로 노스님과 주모가 도장을 찍었다.
각서를 받아 고이 접어 품속에 넣은 최 대인이 쌈지와 천평칭을 꺼내
경면주사 한돈을 저울질하며 사시나무처럼 손을 떨었다.
경면주사로 법제를 한 한약첩을 먹고 언제 아팠느냐는 듯 이 진사가 벌떡 일어났다.
어느 날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이 진사가 아침에 일어나 머리맡의 서찰을 읽고 대성통곡을 한 후 강가로 나갔더니
신발과 언젠가 이 진사가 사줬던 노리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서찰의 내용인즉
이 진사를 살렸으니 이제 자신은 천지신명과의 약조대로 이승을 하직한다는 것이다.
도도히 흐르는 강에서 자실댁의 시신을 찾는다는 건 부질없는 짓이었다.
자실댁은 죽지 않았다.
최 대인에게 써줬던 각서대로 최 대인과 한달을 살았다.
혼례를 올리고 백년해로하자는 최 대인을 뿌리치고 깊은 산속 노스님의 절로 들어가 사미니가 되었다.
삼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노스님이 자실 사미니와 마주 앉아
“삼년 전에 자실댁은 이승을 하직했네.
삼년상을 치르고 탈상을 했으니 이제 승복을 벗고 속세로 돌아가게” 권하자
사미니는 “불심에 귀의했습니다. 사바세계와는 연을 끊었습니다”라며 고개를 저었다.
탁발 나온 노스님 뒤로 사미니가 가사에 고깔을 눌러쓰고 노스님의 발꿈치만 보고 따랐다.
노을이 빨갛게 물든 강가에 한 남자가 웅크리고 앉아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석처럼 사미니와 그 남자는 얼싸안고 통곡을 했다.
바람에 고깔이 날아가 강물에 떠내려갔다.
첫댓글 아침기온이 뚝떨어진 싸늘한 가을바람이
차갑게 느껴짐니다 환절기 건강관리
잘하시고 즐겁고 행복한 목요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