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여법당<如如法堂>
<4-2, 서 유럽 여행, 피렌체와 메디치 가문>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주입식 교육 위주로 진행했던 우리나라, 그 높은 교육열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이 나오기 힘든 교육 현실의 해결방법으로 '인문학'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죠. 인문학은 비단 우리의 교육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직장인들에게도 강조되고 있고, 인문학과 함께 그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천재들의 증 흥기라고 일컫는 '르네상스'입니다. 르네상스! 천년의 중세 암흑기를 지나서 14~16세기 이탈리아를 통해 일어난 문예 부흥을 말합니다. 브루넬레스키, 기베르티, 도나텔로, 미켈로초, 마사초, 알베르티,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 마키아벨리, 미켈란젤로 등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천재들이 이 시기에 활동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이태리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 수많은 예술 작품과 걸 작품을 낳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왜, 하필이면 이 시기에만 ,전 세계적으로 오직 이탈리아 그것도 주로 피렌체에서 이토록 많은 천재들이 나왔고 활동했던 것일까요?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를 쓴 김상근 교수는 메디치 가문에서 그 이유를 찾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데 메디치에서 시작되어 마지막 직계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까지 약 350년간 엄청난 영화를 누린 가문으로, 메디치 가문에선 세 명의 교황과 한 명의 대공을 배출할 정도입니다. 르네상스는 유럽 전역으로 퍼졌지만, 그것이 시작되고 무르익고 끝난 곳은 바로 피렌체인데요. 이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르네상스를 이끈 예술가들은 거의 대부분, 어떤 식으로든 메디치 가문과 인연이 있었습니다.
아비뇽 유수가 종료되면서, 서방에선 세 명의 교황이 나오게 됩니다. 로마의 우르바노 6세에 반대해서 프랑스와 피사에서 각각 추기경들이 대립교황을 선출합니다.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이하 ‘조반니’)는 피사교황 이었던 교황 요하네스 23세를 구출하기 위해 무려 3만 8천 플로린, 지금으로 치면 약 150억 원이란 엄청난 거금을 쓰게 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폐위된 교황에게 돈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바보 같은 행동입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조반니는 얼핏 그런 무모한 행동을 벌였고, 폐위당한 교황을 잘 모셨을 뿐만 아니라 요하네스 23세가 운명하자, 르네상스의 장인을 불러다가 영묘까지 만듭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은 은행업으로 재미를 보고 있었지만, 3만 8천 플로린이란 거금은 엄청난 부채로 목을 죄었고, 망할 위기까지 몰고 갑니다. 그러나 그런 조반니의 행동은 당시 교황 마르티누스 5세에 눈에 띄었고,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의 주거래은행으로 지정하게 됩니다. 당시 교황청에서 주거래은행으로 지정되는 것은 단순히 교황청의 돈만 관리하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당시 유럽은 교황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왕국과 귀족가문의 주거래은행이 된다는 의미이며, 이것은 전 유럽의 돈이 메디치 은행으로 굴러온다는 의미가 됩니다.
조반니가 메디치 가문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읽었던 탓이 큽니다. 조반니는 단순히 은행업만 잘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르네상스를 이끌어갈 예술가들을 후원했고, 그들 사이에 네트워크를 강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이걸 더욱 발전시킨 인물이 바로 메디치 왕조의 개조라고 불리는 코시모 데 메디치(이하 ‘코시모’)입니다. 코시모는 1463년 마르실리오 파치노에게 의뢰해서 플라톤 전집을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하게끔 합니다, 마르실리오가 학자들이 가져온 플라톤 전집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이것이 유럽에 퍼지면서 ‘빅뱅’이라 불릴 정도로 엄청난 효과를 가져옵니다, 플라톤 철학이 유럽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로마시대 이후 이때가 최초입니다, 플라톤 철학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에게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고, 이를 바탕으로 회화, 건축, 조형의 3대 분야에서 수많은 천재들이 나오면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피렌체를 가면 산토 스피리토 성당, 산 로렌초 성당, 산마르코 성당, 팔라쵸 메디치 등등 수많은 건축물들을 마주칠 수 있습니다. 미켈렌젤로의 다비드 상을 비롯한 갖가지 조각, 브루넬레스키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도나텔로의 청동 다비드 상 등등,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르네상스의 걸작들이 피렌체에 가득합니다. 피렌체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그 자체가 거대한 유적이자 유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박물관에만 소장되어 있어야 할 국보급 유물들이 길 모퉁이만 돌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피렌체,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피렌체는 공화국이었습니다. 당시엔 시민계급들이 성장하고 있었고, 피렌체엔 유력한 가문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말하는 메디치 가문도 그저 명망 있고 힘 있는 가문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공화국인 만큼 모든 공직은 투표를 통해서 결정되었습니다. 당시 피렌체는 명문가가 유지되기 위해선 공직이 그만큼 중요했습니다. 마치 조선시대의 양반들이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 과거급제를 통해 벼슬에 나가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시민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각종 건축물을 만들어서 기증하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었습니다. 여기엔 피렌체가 전통적으로 금융과 상업을 통해 돈을 벌어서 풍요로웠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기증에 앞장선 인물은 메디치 가문이었으며, 코시모는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공직을 위해 기증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편의와 도시의 미관에 일조한 것이지, 그 역할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죠.
메디치 가문의 350년 영화를 보면, 어떤 가문이 영화를 누리는 것은 그만큼의 희생이 따른 다는 것도 이해하게 됩니다. 코시모 당시 메디치가는 아직 피렌체에서 신흥 귀족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겸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가 브루넬레스키의 설계도를 물리치고, 검소한 저택을 지으면서 주변의 시기와 질투를 견디고자 했습니다. 코시모의 손자 로렌초의 경우엔 더욱 극적입니다! 1478년 파치가에 의해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집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에서 부활절 미사가 열리는 것을 노려서 메디치 가문을 놀리고 벌어진 것이다. 이 암살은 미수로 그치긴 했으나, 당시 교황이었던 식스투스 4세가 피렌체 공화국에서 메디치 가문의 힘이 너무 세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암살이 실패로 돌아가자 교황은 나폴리 국왕을 충동질해서 시에나와 루카 등과 연합군을 꾸려서 피렌체를 포위하게끔 만든다. 막강한 적의 침입에 피렌체는 고립되고 모든 물자가 끊기면서 최고의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시민들은 ‘차라리 그때 로렌초가 죽었더라면’이라는 원성까지 나오게 됩니다. 사실상 피렌체의 지도자였던 로렌초는 죽음을 각오하고 홀홀 단신으로 배를 띄워 나폴리 국왕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장장 3개월간에 걸친 담판 끝에 피렌체의 포위를 풀게 만듭니다. 오늘날 로렌초 앞에 ‘위대한 자’라는 수식어가 붙게 된 것은 이때의 활약 때문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수장들은 시대를 보는 혜안과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신용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애썼고, 동방의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피난을 오자, 그들에게 거처를 마련하고, 아낌없는 후원을 했습니다. 코시모는 아무런 조건 없이 예술가들을 후원했고, 그들이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손자인 로렌초가 미켈란젤로를 양자로 들인 것은, 전적으로 코시모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도나텔로 등의 거장들의 명성에 짓눌려서 르네상스를 단편적으로 보기 쉽습니다. 그러나 르네상스가 가능하도록 만든 메디치가의 노력과 그들이 350여 년을 이어간 저력이 무엇인지 읽는 것 또한 우리가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시대정신을 읽고 그것을 앞서서 구현해나가고, 천재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지식의 융합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는 친구였기에 함께 원근법 등을 연구했고, 그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르러서 완성이 되었습니다. 그런 혁명적인 지식은 때론 친구로서 동료로서 제자에게 전달되고, 경쟁관계에서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직계 자손인 안나 마리아 루이사 데 메디치는 피렌체에 자신의 가문의 모든 예술품을 기증하면서 단 한 가지 조건을 걸어서 메디치 가문의 명성을 영원하게 만듭니다.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팔면 안 된다고요. 덕분에 피렌체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습니다. 은행업을 통해 피렌체 거주인의 절반을 직업으로 부리고, 시대정신을 몸소 구현하고, 마지막엔 모든 재산을 기증한 메디치 가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수많은 교훈을 남겨줍니다.<천재들의 도시 피렌체에서 옮겨 첨삭한 글> 이번 여행에서 현지 가이드가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의 설명을 대략 듣고 자료를 찾아서 공유란 글입니다, 피렌체에는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모인 관광객으로 넘쳐나서 생동감이 나는 세계적 관광명소가 된 것을 눈으로 보고 듣고 느낀 여행이었습니다, 여여법당 화정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