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21〉승가청규 제정의 뜻
스스로 지키되 책임의식 가져야
각 나라 풍습 반영하지만 원칙은 고수
스님 한명이 대외적으로 전부를 대표
중국 당나라 때, 종파불교 가운데 화엄종은 중국인의 사유방식과 불교 사상이 절묘하게 부합된 종파이다. 당시 황제들은 이 화엄학의 교리를 통치 이념에 반영하였고, 화엄종의 4조 징관(澄觀)을 국사로 모셨다. 스님은 승통(僧統)으로서 자의대사(紫衣大師), 교수화상(敎授和尙)으로 칭했고, 후대 사람들은 그를 문수보살.화엄보살로 받들었다. 징관은 평소에 늘 당신의 수행지침으로 열 가지 서원을 품고 살았다.
첫째, 사문의 명예를 실추하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둘째, 불타의 가르침에 어긋난 마음을 갖지 않는다.
셋째, 앉아 있을 때는 법계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다.
넷째, 욕망으로 본성을 더럽히지 않는다.
다섯째, 비구니 사찰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여섯째, 속인의 침상에 눕지 않는다.
일곱째, 법도에 맞지 않는 것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여덟째, 정오 이후에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
아홉째, 항상 염주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열 째, 잠잘 때도 발우와 가사를 떼어놓지 않는다.
징관은 살아생전 황제의 스승으로서 세속적인 명예에 노출된 신분임에도 수행자로서의 본분에 철저하셨다. 이 징관스님처럼 수행자로서 귀감이 되는 또 한분이 있는데, 홍일(弘一)스님이다. 몇 년전 지인으로부터 ‘평전을 하나 써보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받은 적이 있는데, 바로 홍일(1880~1942)스님이었다.
홍일은 천진(天津)의 유복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유학을 다녀온 수재였다. 스님은 당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예.그림.음악.문학 등 예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홍일은 당시 가난한 중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자유분방한 서구적인 삶을 누리다가 39세에 출가하였다.
출가 이후 홍일은 ‘승려들이 재가자들에게 비방 받고, 망신당하는 것은 계율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라고 개탄하고, 계율을 연구하였다. 그 스스로 평생 동안 계율을 지켰으며, 맨발로 다니거나 짚신을 신고 다니는 등 철저한 두타행자였다. 평생 스님은 사찰의 주지직도 맡지 않았고, 대중을 거느리거나 제자를 두지 않았다. 일정한 곳에 머물지 않고 운수행각하며, 인연되는 사람들에게 글씨를 써주는 일이 전부였다. 63세에 양로원에서 입적할 만큼 스님에게는 한평생 청정한 계율승으로서의 면모를 남겼다.
중국 비행기를 타면, 승무원이 내가 승려임을 확인하고, 고기나 생선이 들어간 음식을 내놓지 않았다. 운남성 어느 음식점에서는 주인이 고기가 들어간 만두라고 하며, 다른 만두를 내놓기도 하였다. 중국인들에게 승려는 철저히 채식주의자라는 관념이 있는데, 이런 관념속에는 승려에 대한 존경의식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계종 종단쇄신위원회에서 이 시대에 맞는 ‘승가 청규’를 발표하였다. 고무적인 일이라고 본다. <오분율장>에 부처님께서 ‘비록 내가 제정한 법이지만 다른 나라에 있어 풍습상 맞지 않거든 그 풍습에 맞추어도 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니 그 시대, 그 나라 풍토에 맞는 승가 청규가 제정되는 일은 마땅하다고 본다.
이번 청규를 제정한 어른들께서는 강제성을 띠지 않는다며, 자발적인 참여를 언급하셨다. 청규를 지키고, 지키지 않고는 각 승려들의 의식 자세에 맡겨야 할 것이다. 하지만 공적으로는 자신 한 사람으로 인해 승가를 먹칠하면 안된다는 대중의식이 중요하고, 사적으로는 출가자로서 책임의식(因果가 따른다는 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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