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골 성지 - 선교사들의 선교 거점이자 도리 헨리코 신부 순교사적지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734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
손골 교우촌의 형성
초기 교회 가장 큰 박해였던 신유박해(1801년) 이후 많은 신자가 박해를 피해 서울이나 경기도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나 충청도 등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지방에서도 박해가 일어나자 지방에 살던 신자들도 이주해야 했다. 어떤 신자들은 서울에서 더 멀리 떨어진 경상도나 전라도로 피신하기도 했지만 어떤 신자들은 서울 가까이 이동하여 교우촌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 서울 가까이 가서 살아야 신자들 상호 간 연락도 쉽게 할 수 있고 서로 도우며 신앙생활을 더 원활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해박해 이전에 이미 서울 가까이에 몇몇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수원시와 용인시에 걸쳐 있는 광교산(光橋山, 582m) 기슭에 있는 손골 성지도 아마도 그 중의 하나이다. 손골이란 한자 이름 蓀谷(손곡)에서 온 이름인데 “향기로운 풀이 우거진 골짜기”라는 뜻이다.
병인박해 때 손골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한 도리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도리 신부가 손골에 체류할 당시 손골에는 신자들만 살고 있었고 모두 12가구였다고 한다. 이는 도리 신부가 손골에 있을 때 10여 가구가 살았다는 정부 측 기록과도 일치한다. 한편 박해가 끝난 다음 1900년 하우현에 본당이 생겼을 때 그 공소로 편입된 손골 교우촌의 신자가 47명이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의 자유를 얻을 무렵 손골에는 적어도 45-50명 정도의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것 같다.
외국 선교사의 선교 거점
손골 교우촌은 박해시대 선교 거점이 되는 곳이었다. 서양 선교사들이 일단 입국하게 되면 안전한 곳에서 우리나라에서의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곧 선교사들이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와 풍습을 익혀야 했고 조선에서 살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런데 선교사들이 안전하게 머물면서 이러한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신자들만 모여 사는 적합한 교우촌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이런 교우촌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는 일단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그곳에 사는 신자를 믿을 수 있어야 했다.
손골 교우촌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어떤 교우촌보다 선교사들의 신뢰를 받았던 것 같다. 박해시기인 1857년부터 1866년까지 처음 입국한 선교사들은 손골에 묵으면서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적응기간을 거쳤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여름철 농번기를 맞아 사목하는 것을 잠시 쉬는 사이에 손골을 찾아와 피정도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그만큼 손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신앙적으로 견고하여 선교사들이 안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손골 교우촌을 거쳐간 선교사들
현재까지 밝혀진 한국 교회사 관련 자료 중에서 손골이 처음 언급된 것은 다블뤼(Daveluy, 安敦伊) 신부의 편지이다. 다블뤼 신부가 1853년 9월 18일 부모에게 보낸 편지의 발신지가 손골이었다.
손골이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에게 조선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는 장소가 된 것은 1857년이다. 1854년 우리나라에 입국한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는 페롱(Feron, 權) 신부가 1857년 3월 입국하자 그를 손골로 보냈다. 이렇게 맨 처음 손골 교우촌에 거주하면서 조선어를 익힌 선교사는 페롱 신부였다. 그리고 페롱 신부가 손골에 있었던 1857년 최양업 신부는 손골로 페롱 신부를 찾아와 함께 지내다 갔다.
1861년 4월 7일 서울 베르뇌 주교 댁에는 새로 입국한 선교사 4명이 도착했다. 이들 중 조안노(Joanno, 吳) 신부와 칼레(Calais, 姜) 신부는 손골로 배치되었다. 조안노 신부와 칼레 신부가 손골에서 언어와 풍습을 익힌 기간은 1861년 4월 말부터 그해 말까지인 것으로 여겨진다. 조안노 신부와 칼레 신부가 손골에 있던 1861년 성모승천 축일 때는 베르뇌 주교와 랑드르(Landre, 洪) 신부가 손골로 두 선교사를 찾아와 함께 머물며 휴식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조안노 신부와 칼레 신부 다음으로 손골 교우촌에서 언어와 풍습을 익힌 선교사는 1863년 6월 23일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였다. 오메트르 신부는 서울에서 한 달가량 지내고 1863년 7월 말경 손골에 왔다. 오메트르 신부의 손골 생활은 1864년 10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손골에서 언어와 풍습을 익히기 위해 마지막으로 온 선교사는 도리 신부이다. 도리 신부는 1865년 6월 23일 오후 5시경 손골에 왔다. 도리 신부는 손골에서 열심히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중 병인박해 맞게 되었다.
손골 교우촌의 순교자들
손골 교우촌과 관계있는 순교자로는 우선 도리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가 있다.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도리 신부는 손골 교우촌에 함께 지내던 신자들을 모두 손골에서 떠나게 한 뒤 홀로 남아 있다가 체포되어 1866년 2월 27일 오후 1시경 체포되어 3월 7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오메트르 신부는 도리 신부 순교 후인 3월 11일 충남 거더리에서 자수한 후 체포되어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두 순교자 모두 103위 성인에 포함되어 있다.
두 성인 신부들 외에도 손골 교우촌에서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았던 평신도 중에도 순교한 이들이 여럿 있다. 그중에서 병인박해시 손골에 살다가 용인 남성골에서 체포된 이 요한 · 아들 베드로 · 손자 프란치스코 삼대(三代) 의 순교는 너무나 유명하다. 포졸이 한 사람만 잡아가겠다고 하자 그들은 서로 잡혀가겠다고 하여 삼대가 1871년 3월 19일(음) 좌포청(左捕廳)에서 다 함께 순교한 것이다.
이밖에도 병인박해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피해 손골에 숨어들었다가 체포되어 수원으로 끌려가던 중 신봉동 개울가에서 처형된 4명의 무명 순교자도 있다.
손골 순례성지의 조성 과정
손골이 순례성지로 조성하게 된 계기는 한국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도리 신부의 고향에서 시작되었다. 도리 신부의 고향 본당인 프랑스 방데(Vendee) 지방의 생 힐래 드 딸몽(Saint-Hilaire de Talmont) 본당의 주임 죠셉 그를레(Joseph Grelet) 신부가 도리 신부를 위시한 한국 순교자의 시복 시성을 교황청, 프랑스 주교회의 등에 청원을 하고 1963년 직접 한국을 방문해 손골을 순례하고 돌아가서 “조선, 순교자들의 땅(La Coree, Terre de Martyrs)”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를레 신부의 노력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66년 도리 신부 순교 100주년을 맞아 도리 신부가 살았던 한국 용인의 광교산 산속의 손골과 도리 신부의 고향 프랑스 방데 지방의 딸몽을 새로운 방법으로 다시 연결하였다. 농부였던 도리 신부의 부친은 평소 사용하던 화강암(granit)으로 된 맷돌로 똑같이 생긴 십자가를 두 개 만들었다. 그런 다음 하나는 도리 신부 고향에 두고 다른 하나는 그를레 신부에 의해 한국으로 보내졌다. 이렇게 해서 도리 신부가 탄생한 곳과 도리 신부가 선교하러 와서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곳을 연결하고자 했다. 이 십자가는 지금도 도리신부 순교현양비에 올려져 보관되고 있다.
손골이 순례지로 거듭나게 된 데에는 프랑스 쪽의 노력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돌 십자가를 받은 유봉구 신부의 수고도 있었다. 그리고 파티마 성모 프란치스코 수녀회 창립자 고 이우철(李宇哲, 시몬) 신부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순교자의 후손인 이우철 신부는 순교자들에 대해 남다른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손골 가까이 있는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동천리(현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에 모원이 있는 파티마의 수녀들에게 손골을 자주 순례하도록 권하였다.
이우철 신부는 고아들을 위해 성심원을 창립하였는데 서울 잠원동에서 용인시 수지구 동천동으로 성심원을 옮겨 파티마 수녀들과 함께 운영하였다. 그런데 이우철 신부는 성심원 후원자들에게도 손골 교우촌을 소개하고 순례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이우철 신부 사후(死後)에 결실을 맺었다. 1988년 성심원 후원자들로 구성된 성심가족회에서 손골을 개발하기 위해 성지개발위원회를 구성하고 수원교구의 인준을 받아 1989년부터 개발사업을 시작했다. 성심가족회에서는 1991년까지 손골에 경당을 짓고 대형 십자가와 성모상 등을 건립하였다. 또한 도리 신부 순교현양비도 고쳐 세웠다. 이렇게 하여 손골이 순례지로서 거듭나게 되었다.
파티마 수녀원에서는 1997년부터 손골에 수녀를 파견하여 신자들의 순례를 도왔다. 그리고 수원교구에서는 그로부터 8년 후인 2005년부터 손골에 전담 신부를 두고 있다. 이후 손골 관련 문헌 수집과 번역 등을 통하여 내실을 기하는 한편, 2016년 성지 설립 50주년과 병인박해 150주년을 준비하며 십자가의 길을 새로 조성하고, 새 성당과 사제관 신축을 마무리하여 2016년 5월 7일 새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2017년 5월 6일에는 기존의 경당을 보수해 개관한 손골 기념관 축복식을 가졌다. 그리고 성당 지하 순교자들의 방에는 4분 성인과 손골 무명 순교자의 유해를 모셨다.
오후 4시 경 성지 주차장에 도착. 이외로 주차장은 성지 깊숙이 들어온 곳에 있었다. 주차장에 내리면 바로 순례에 들어간다.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도리 신부 순교비와 옆의 예수성심상.
도리 신부 순교비
도리 신부의 고향인 프랑스 딸몽에서 신부의 아버지가 맷돌로 똑 같은 쌍둥이 십자가를 두 개 만들어 하나는 생가에 모시고, 나머지 하나는 한국 손골 성지에 보내 왔다.
당시 손골 공소를 사목하던 수원 북수동 본당 주임 유봉구(柳鳳九, 아우구스티노) 신부가 이것을 받았는데, 유봉구 신부는 그 돌 십자가를 토대로 손골에 도리 신부의 순교를 기념하는 비(碑)를 세웠다. 한국산 화강암으로 큰 벽돌을 만들고 그 벽돌을 쌓아 탑 모양의 순교 현양비를 세운 것이다. 이 비의 맨 꼭대기에는 딸몽에서 보내온 돌 십자가를 올려놓았다. 이 현양비는 1966년 10월 24일 축복되었다. 이처럼 순교자의 출생지와 순교지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긴밀하게 연결이 된 것이다.
현양비 옆에는 예수성심상이 내려다 보며 지키고 있다.
돌 십자가에는 도리 신부 고향 프랑스 방데 지방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이 로고에는 심장 두 개가 표현되어 있다. 2016년 10월 손골을 방문한 도리 신부 고향 교구 뤼송 교구장 카스테(Alain Castet) 주교는 이 두 심장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두 심장에 정치적인 의미가 부여되기도 했었습니다만, 우리 신자들에게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성심을 상징합니다.”
함께 새겨진 글자 UF는 라틴어 Utrique Fidelis의 앞글자이다. “곧 양쪽에 모두 충성한다”는 의미이다. 즉 “신앙에(pour la foi) 충실하고, 왕에게(pour le roi) 충성한다”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러한 의미는 프랑스 대혁명 후 1793년부터 1796년까지 왕정복고를 위해 정부군에 대항한 방데 지방의 역사를 말해준다고 한다.
십자가의 길
도리 신부 순교현양비에서 계곡 쪽으로 십자가의 길이 나있다. 길은 매우 험하다. 손골 성지 안내판과 십자가의 길 기도 안내판이 서 있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 도리 피정의 집에 이르니 집 옆에 성 도리 헨리코 신부 동상이 서 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성 오메르트 베드로 신부 동상도 있다.
▲성 도리 헨리코 신부
1839년 9월 23일 프랑스 탈몽의 작은 바닷가 어촌에서 팔남 매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났다. 뤼송 대신학교에 들어가 소품을 받고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에 들어가 1864년 5월 21일 사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다.
브르트니에르 유스토 신부,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 위앵 마르틴 신부와 같이 1865년 4월 한국에 왔다. 우선 말을 배우기 위해 서울에서 가까운 교우촌으로 보내졌는데 성 헨리코 신부는 용인의 손골리로 가게 되었다.
하지만 도착 이듬해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1866년 2월 28일 배교자 이선희의 밀고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에서 조선에 온 경위와 체류에 대해 심문을 받은 후 3월 7일 베르뇌 시므온 주교와 브레트니에르 유스토 신부, 볼리외 루도비코 신부와 같이 군문효수형을 받고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유해는 절두산 지하 성당에 모셔져 있으나 그중 일부를 분배 받아 손골 성지에 모셔 안치하고 있다.
▲성 오메르트 신부
프랑스 앙굴렘 교구 에제크에서 태어나 1862년 6월 14일 사제 서품을 받고 1863년 6월 30일 조선에 입국하여 수원 샘골에서 전교하던 중 다블뤼 주교의 편지를 받았다. 다블뤼 주교는 편지에서 무죄한 신자들이 잡혀서 재산을 빼앗기고 협박과 고문에 못 이겨 배교하는 불행에 빠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는데 이를 자수 권유로 받아들여 거더리로 와서 자수했다.
1866년 3월 11일 체포되어 1866년 3월 30일 성금요일에 수영 갈매못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다블뤼 주교와 함께 순교하였다.
가까이 가파른 계단이 있어 올라보니 무명 순교자 묘역이었다.
무명 순교자 묘역
병인박해 때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피해 손골에 숨어든 신자 4분이 체포되어 수원으로 끌려가던 중 신봉동 개울가에서 처형되었다. 선참후계(先斬後啓)였다. 이들 순교자들의 이름과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길가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둬 개울가 작은 언덕에 구덩이를 파고 돌로 덮어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곳의 옛 이름이 서봉(시봉)이어서 ‘서봉부락 무명 순교자 돌무덤’이라고 불리며 전해내려 왔다.
수원교구에서는 순교자 현양사업을 하면서 1976년 12월 17일 신봉동에 있던 4위 무명 순교자의 묘를 미리내 성지 무명 순교자 묘역으로 옮겨 모셨다.
손골 성지에서는 손골 교우촌에서 살다 순교했으니 손골에 모시는 것이 합당하다고했다. 그리하여 2013년 10월 22일 4위 무명 순교자들의 유해를 손골 성지 내로 옮겨 모셨다. 무덤 형태는 지하에 석실을 만들어 4위 무명 순교자의 4개의 유해 항아리들을 하나의 광중(壙中)에 합장으로 모시기로 하였다. 물론 봉분도 하나이다.
무명의 순교자 앞에 (이해인)
오래 전에 흙속에 묻힌
당신의 눈물은
이제 내게 와서
살이 있는 꽃이 됩니다.
당신이 바라보던
강산과 하늘을
나도 바라보며 서 있는 땅
당신이 믿고 바라고
사랑하던 임을
나도 믿고 바라고 사랑하며
민들레가 되고 싶은 이 땅에서
나도 당신처럼 남몰래
죽어가는 법을
잊혀지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박해의 칼 아래
피 흘리며 부서진
당신들의 큰 사랑과 고통이
내 안에 서서히 가시로 박혀
나의 삶은 아플 때가 많습니다.
당신을 닮지 못한 부끄러움에
끝없는 몸살을 앓습니다.
당신을 통해 주님을 더욱 알았고
영원의 한 끝을 만졌으나
아직도 자주 흔들리는 나를
조용히 붙들어 주십시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거룩한 순교자여!
오래전에 흙속에 묻힌
당신의 침묵은
이제 내게 와서
살아 있는 말이 됩니다.
성지 성당
이제 성전이다. 순교자의 묘역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2016년 성지 설립 50주년과 병인박해 150주년을 맞아 사제관과 함께 신축한 성당이다.
순교자들의 방
지하에는 순교자들의 방이 있다. 정면 십자고상 양 옆으로 헬리코 도리 신부와 오메르트 신부의 사진이 걸렸고 십자고상 아래에 순교자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네 분의 성인 유해와 무명 순교자의 유해이다.
다블뤼 주교 유해는 2011년 12월 29일 수원교구 이성효 주교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것이며, 오메트르 신부 유해는 2011년 7월 3일 앙굴렘 교구 주교좌성당에서 11시 미사 중에 그곳 교구장이었던 끌로드 다장(Claude Dagens) 주교로부터 받아 모신 것이다. 도리 신부 유해는 2000년 4월 7일 서울대교구에서 나누어 받아 모신 것이고, 김대건 신부 유해는 어느 신자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유해를 기증하여 모신 것이다.
그리고 손골 무명 순교자 유해는 2013년 10월 22일 무명 순교자 묘를 미리내 성지로부터 손골 성지로 옮겨 모실 때 유해를 채취하여 모신 것이다.
순교자들의 길
성전 왼쪽 옆 잔디밭에는 성전의 벽 따라 순교자의 길이 조성되어 있다. 손골 성지에서 순교한 분들을 중심으로 7개의 돌에 새겨 그들의 순교 정신을 받들고 계승하자는 취지에서이다. 잔디밭 맨 앞에 높다란 십자고상과 성모상이 배치되고 십자가 밑에서부터 1처가 시작되어 성전 벽 따라 7처까지 있다.
경내 안내 이정표를 보면 대체로 성지의 시설 구성 위치를 알 수가 있다. 십자가의 길, 순교자 묘역, 성전, 순교자들의 길을 거쳐 이제 남은 것은 성당 아래편에 있는 손골 기념관이다. 손골 기념관과 성지 사무실, 그리고 성 오페르트 쉼터는 한 공간에 있다.
손골 기념관
손골 기념관은 2017년 5월 6일에 개관했다. 새로 전시관 용도로 지은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경당을 보수해 개관했기에 전시실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경당의 제대 후벽과 양쪽 벽면에 설치된 전시대를 통해 전시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전시품 중에는 매우 소중한 자료들이 많다.
특히 이곳에서 순교한 도리 신부와 오메르트 신부의 친필 편지 원본과 유품, 그리고 도리 신부 순교비의 머릿돌 등이 보존 전시되어 있다.
▲도리 신부 관련 유물
1865년 10월 16일 손골에서 부모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등 도리 신부의 편지 원본들은 2007년 10월 17일 도리 신부가 소속되었던 뤼송 교구에서 손골을 순례하면서 손골 성지에 기증한 것이다.
이 침대보는 도리 신부가 신학교 때 쓰던 것인데, 신부의 누이이며 대모(代母)인 뽈린느 도리(Pauline Dorie, 1833-1908년)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2007년 뤼송 교구 순례단과 함께 손골에 왔을 때 기증한 것이다. 후손들은 침대보 조각에 방데 지방의 로고를 손수 수놓아 기증하였다.
▲오메르트 신부 관련 유물
오메트르 신부의 친필 편지 원본 3통,. 특히 오메트르 신부가 1862년 6월 15일 첫 미사를 봉헌하고 부친에게 보낸 상본(像本)과 그 뒷면에 쓴 편지가 있다. 상본이란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 혹은 성인들의 화상(畵像)이나 성서 구절, 또는 성인들이 한 말을 담은 작은 그림이나 카드를 말한다.
이 친필 편지 원본들은 2011년 7월 3일 손골 봉사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 순례단이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가 소속되었던 앙굴렘 교구를 찾아갔을 때 주교좌 성당에서 교구장 주교가 손골 성지에 기증하였다.
전시관 바로 옆에는 성지 사무실이 있고 마당 가에는 오메르트 쉼터 건물이 있다. 건너편에는 도리 피정의 집, 성당, 그리고 성당 뒤에 있는 사제관이 한 눈에 보인다.
오후 5시 마지막으로 수원 성지로 향했다. 이곳을 순례할 수 있으면 하루를 단축하게 된다.하지만 문을 닫았는지 알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