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16. 고도 환인과 고구려 불교 ②
이끼 낀 오녀산성…고구려 영광 되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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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옛 수도> |
사진설명: 해발 820m 산위에 세워진 오녀산성. 동명성왕 주몽이 세운 고구려 최초의 성으로 정상에 올라서면 환인(옛 졸본)지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
집안 일대를 돌아본 것이 2002년 10월22일.그날 밤 곧바로 통화를 거쳐 환인에 도착했다.
어둠에 쌓인 비류수(혼강)를 지날 땐, 오이.마리.협부 등 3인의 조력자와 함께 강을 건너 홀승골성(오녀산성)에 고구려를 건국하던 주몽의 모습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듯 했다.
환인에 이르니 오후 6시. 교포가 운영하는 고려식당에서 저녁을먹고 요동빈관 316호에 투숙했다.
고구려 시조주몽이 건국의 기초를 세우고, 내실을 다졌던 첫 수도 환인. 빈관에서 나와 어둠과 고요 속에 잠들어있는 환인 거리를 걸었다. 빈관에 돌아와 책을 뒤적였다. 학자들의 학설에 동조해 이곳이 고구려 첫 수도고, 혼강이 비류수라고 했지만, 근거가 궁금했다.
고구려 건국 당시 사정을 알려주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광개토대왕비다. 건국과 관련된 비문은 이렇다.
“계속 순행하며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날 때 왕께서 나루에 나아가 ‘나는 황천의아들이고 하백의 딸을 어머니로 둔 추모왕이다.나를 위해 갈대를 잇고 거북이들은 떠올라 다리를만들어라.’고 말했다.
이 말에 따라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이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건널 수 있게 하였다. 비류골(沸流谷)의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짓고 도읍을 세웠다.” 주몽왕이 엄리대수를 건너 첫 도읍을 세운 곳은 홀본인데, 홀본은 비류골에 있고, 서쪽 산위에 성을 짓고 도읍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엔 건국이야기가 좀 더 자세하게 나온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주몽은 오이.마리.협부 등 세 사람과 벗을 삼아 길을 가다가 엄사수(혹은 개사수. 비류수. 지금의 압록강 동북쪽)를 건너, 졸본천에 - 위서에 홀승골성이라 했다 - 다다라 바라보니 그 땅이 기름지고 경치도 좋으며, 산과 강이 험하고 견고했다. 마침내 도성으로 정하였는데 궁실을 지을 겨를이 없어 우선 비류수 가에 간단한 집을 짓고 살았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高)씨로 했다. 동명성왕 4년(기원전 34) 가을 7월, 성곽과 궁성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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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고구려 건국자 고주몽이 건넜을 비로수. 노젖는 뱃사공의 모습은 고주봉 당시에도 비슷했을 것이다. |
광개토대왕비문과 〈삼국사기〉 내용을 종합하면, 엄리대수(엄사수. 비류수)를 건너 졸본천(홀본)에 다다라, 서쪽 산위에 성을 짓고 도읍으로 삼았다. 그 때가 기원전 37년이라는 내용이다.
문제는 엄리대수(엄사수)와 홀본이 어디인가 하는 점.
많은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엄리대수는 혼강이고, 홀본(졸본)은 환인이며, 서쪽 산 위에 세운 성은 오녀산성”이라고 한다. 때문에 환인이 고구려 첫 수도라고 누구나 인정하게 됐다.
기원전 37년에 건국 된 후 발전을 거듭하던 고구려는 2대 유리왕 22년(3)에 집안으로 천도했다. 15대 미천왕이 서안평을 점령(311년)해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고, 17대 소수림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반포하는 등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했다.
당시 불교가 전래된 사정에 대해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소수림왕 2년 전진(前秦. 351~394)의 왕 부견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아울러 전도승 순도(順道)와 불상.경문을 함께 파견해 불교를 전했다.’ 기록된 것에서 알 수 있듯,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372년이었다. 2년 뒤 아도스님도 고구려에 왔다.
불교를 받아들인 지 3년 뒤인 소수림왕 5년,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해 순도스님과 아도스님으로 하여금 각각 머물게 했다. 공식 사절과 함께 온 순도스님이 머물렀다는 점에서 성문사는 관청 건물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372년 소수림왕 2년 불교 첫 전래
초전(初傳) 당시 고구려 불교의 성격을 알기 위해선 전진불교의 특성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전진은 351년 티베트계열인 저족의 부건이 장안(長安. 현재의 서안)을 공략해 도읍으로 정하고 국호를 대진(大秦), 스스로를 천왕대선우(天王大單于)라 칭하며 출발한 나라다. 전진은 특히 제3대 부견왕 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재위 시절 부견왕은 다른 호족 국가의 군주와 마찬가지로 불교를 보호했으며 특히 도안스님(312~385)을 후대했다. 하북성에서 출생한 도안스님은 불교를 토착화(중국화)시킨 대표적 학승.
12세에 출가해 서역에서 온 불도징(佛圖澄)스님에게 사사, 스승 사후엔 문하생들을 지도했다. 전란을 피해 하북.산서.하남의 각 지방을 유랑했으며, 혜원(慧遠)스님을 비롯한 40명의 문하생과 양양에 단계사(檀溪寺)를 짓고 교단을 조직했다. 왕과 귀족들로부터 신임과 존경을 받았던 스님은 379년 부견왕의 요청을 받고 장안(長安)으로 가서 왕의 고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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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위에서부터 고구려 첫 수도 환인에 있는 시장. 2000년 전 고구려인들의 모습을 찾았으나 찾기 힘들었다. |
장안에서 인도와 서역에서 온 축불염 등 역경승들의 대승경전 번역을 돕는 한편, 당시에 유행하던 격의불교(중국 전통사상을 매개로 불교를 해석하는 연구방법)의 결함에 착안, 이역경(異譯經)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진의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이 결과 최초의 경전목록인 〈종리중경목록〉을 지었다. 출가자들의 의식이나 행규를 정하고, 스님들은 모두 석가모니의 ‘석(釋)’을 성(姓)으로 할 것을 제창, 석도안(釋道安)이라 했다.
도안스님은 이러한 노력을 통해 자주적인 중국불교 교단을 창설하고 많은 고승을 육성했을 뿐 아니라, 격의불교적인 종래의 불교연구를 반성.비판하고 경전을 직접 연구하는 방법을 수립하는 등 중국불교 발전에 지대한 공적을 남겼다.
반야경에 관한 14종의 저서를 남기는 등 대승 반야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현재 유행하는, 경전을 서분.정종분.유통분의 3분과로 나누는 전통 역시 도안스님이 확립한 것이다.
이처럼 전진의 불교는 대승사상을 주로 하는 불교였다. 도안스님이 부견왕의 요청으로 장안에 간 것은 379년이고 전진의 순도스님이 고구려에 온 것은 372년이지만, 당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도 대승경전 위주의 불교였을 것이다. 어쨌든 고구려에 전래된 이후 불교는 왕실의 후원으로 발전을 거듭했다.
고국양왕(재위 384~391)은 영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도록 권장”했고, 광개토대왕(재위 391~413)도 392년 “불법을 숭신하여 복을 구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이로 인해 불교는 더욱 활성화됐다.
고구려 수도가 평양으로 옮긴 게 20대 장수왕(재위 413~491)때 이므로, 불교가 전해질 당시의 수도는 집안이었다. 성문사와 이불란사도 집안에 있었다. 그렇다고 평양에 사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광개토대왕 3년, 평양에 9사가 창건됐는데,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펴는 과정에 나온, 평양으로의 천도작업의 일환이었다. 따라서 평양에도 국가 발전을 기원하는 ‘흥국사’나 ‘흥복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당시 집안에 있던 흥복사와 흥국사를 평양으로 옮겼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 고분군들 관리안된 채 버려져
광개토대왕 당시(395년) 동진의 담시스님이 고구려에 들어와 활발히 전도했으며, 제25대 평원왕(재위 559~590) 때 의연(義淵)스님은 위(魏).제(齊)나라의 양대 고승인 법상(法上)스님에게 불교사를 배우는 등 불교연구도 전반적으로 확대돼갔다. 2
7대 영류왕(재위 618~642) 시절인 625년 혜관(慧灌)스님은 일본에 건너가 삼론종의 개조가 됐고, 평원왕 때 담징스님은 일본의 법륭사 금당 벽화를 그렸으며, 지묵.맷돌 등을 전하였다. 특히 혜량(惠亮)스님은 신라에 들어가 진흥왕 때 국통(國統).주통(州統).군통(郡統)의 교단조직에 공헌, 초대 국통이 됐다. 당시 고구려엔 대승불교인 삼론종이 유행했다.
한편, 제28대 보장왕(재위 642~668) 때 보덕(普德)스님은 연개소문의 도교 장려로 백제에 들어가 열반종(涅槃宗)을 개창했다. 보덕스님은 용강(龍岡)에서 출생했다. 평양 서쪽 대보산에 영탑사(靈塔寺)를 창건하고,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도 있었다. 보장왕이 당나라에서 도교를 들여와 널리 전파시키자, 불교가 쇠퇴함을 개탄하고 백제로 가 완산주(전주) 고대산(孤大山)에 경복사(景福寺)를 짓고 〈열반경〉을 강론, 신라 열반종의 개조가 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는 - 말기엔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기도 했지만 -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다대한 역할을 했고, 불교 역시 고구려 역사.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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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오녀산성 성벽. 고구려 유적이 남아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
다음날 아침. 요동빈관에서 출발 비류수를 건너, 고구려 시대 무덤들이 즐비한 ‘하고성자 고분군’과 ‘상고성자 고분군’을 먼저 견학했다.
채소밭으로 변한 넓은 지역 곳곳에 귀중한 무덤들이 ‘버려져’ 있었다. 최근 들어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라고 왜곡하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남의 역사’라고 중국당국이 관리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무덤들을 관리할 시대가 빨리 오기를 기원하며, 나룻배를 타고 비류수를 가로질러 미창구(米倉溝)장군묘로 들어갔다. 무덤 내부엔 들어갈 수 없었다.
오후엔 오녀산성으로 올라갔다. 올라가기 힘들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환인시내와 사방에 한 눈에 들어왔다. 환인댐도 보였다. 정상 곳곳엔 고구려 당시 유적지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서있었다. 동문으로 내려오니 고구려 최초 산성의 성벽이 남아 있었다.
이끼 낀 성벽을 쓰다듬으며 고구려의 역사를 되살렸다. 그러나 지금은 남의 땅. 아쉬움만 가득 안고 걸어 산성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며 산성을 돌아보니 웅장한 모습에 절로 감동됐다. 주몽왕이 나라를 세웠던 첫 산성. 그 산성에 족적을 남겼다는 생각에 온 몸이 고무됐다.
집안.환인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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