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교우 한 분이 큰 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병세가 많이 좋아진 후 만났을 때,
‘요즘은 모든 것이 다 감사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가족들도 직장도 심지어 어려운 주거 형편도
다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에는 목사님의 설교가
왜 저렇게 길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는데,
설교를 좀 더 길게 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형편이 달라지면 마음도 믿음도 이렇게 달라집니다.
그런데 이 깨달음이 귀하지만
건강을 회복한 후에도 변함이 없어야 진정 깨달은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려울 때,
귀한 은혜를 깨닫고 믿음이 성숙하였다가
형편이 좋아졌을 때,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 맙니다.
참 사랑하는 어떤 사역자가 있습니다.
그가 은혜 충만한 모습은 지켜 보는 것만도 흐뭇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영적 기복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얼마안가면 아니나 다를까
낙심 좌절에 빠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시 은혜 충만한 모습을 봅니다.
그의 문제는 은혜는 있지만 한결같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를 돌아봅니다. ‘나는 한결같은가?’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한결같은가?
편안할 때나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나 한결같은가?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한결같은가?
이따금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나는 지금이나 은퇴 이후에나 한결같을까?”
선한목자교회 교인들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나에게나 새 담임목사에게나 한결같을까?”
살아왔던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받은 은혜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받은 은혜는 많은데,
한결같지 못하여
주님이 역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두려어집니다.
여러분은 은혜 충만함과 영적 침체가
반복되는 상태에 있지는 않습니까?
말과 행동이 교회에서와 직장에서가 다르고
집에서 다르지는 않습니까?
목사 앞에서나 가족이나 직장 동료 앞에서나
여러분의 믿음은 한결같습니까?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았는데
세상에서는 믿음이 무너지는 경험은 정말 고통스런 일입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있을 때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것 같았는데,
혼자있을 때는 여지없이 믿음이 무너지는 것
역시 우리를 좌절시킵니다.
요셉이 부럽습니다.
그는 종일 때나 죄수였을 때나 총리였을 때가 한결같았습니다.
“나는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였던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저의 고백이 되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한결같은 믿음이어야 한다고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한결같은 믿음을 갖기를 갈망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눈이 뜨여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영적 상태가
왜 환경이나 형편, 사람에 따라 변하는 것일까요?
환경과 사람을 바라보며 살고 있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입니다.
임마누엘이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준민목사님이 강의 중에 던진 질문 하나가
마음에 깊이 와 닿았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임마누엘의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눈물흘리지 못하는 것은 왜 일까요?”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면 눈물흐르도록 고맙다면
마음에 오신 임마누엘이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면
더 눈물이 나야 정상일 것입니다.
그 만큼 우리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교리적인 지식으로만 알고 있지 실제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결같은 믿음을 가지려면
24 시간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변함이 없으신 주님을 바라보는 자 만이
한결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