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追憶)과 낭만(浪漫)의 먹거리'
- 충무김밥 -
강구안 문화마당 앞 길거리엔 충무김밥을 파는 점포들이 즐비하다. 장사 속으로 모두 원조(元祖)라는 이름을 달고 있다. 그 내력을 알고 보면 크게 틀린 말도 아니다. 물론 충무김밥의 원조는 어(魚) 할머니가 맞다. 맨밥을 김에 싸고 여러 가지 해물을 꼬치로 만들고, 칼로 빚은 무를 멸치 젓갈로 담아 숙성(熟成)시켜 고기잡이배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한다. 그러던 것이 맛나다는 입소문과 81년도 국풍축제(國風祝祭)로 클로즈 업 되면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다. 충무김밥은 국풍이전에 이미 있었다. 그것을 만들어 파는 집들이 크게 서너 군데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어(魚)할머니, 남망산(南望山) 밑 영세집, 태평동의 동문(東門)안 김밥집 등이다. 지금은 교통상황이 달라져 부산(釜山)과 여수를 오가던 여객선(旅客船)이 없어졌다. 하지만 1960~70년대 부산·여수 객선(客船)을 상대로 충무김밥은 그 이름을 드날렸으니 가히 추억과 낭만이 묻어있는 음식이라 하겠다. 부산에서 아침 8시 출발한 여수배가 성포(城浦)에 닿으면 거의 11시 남짓 된다. 성포에서 충무까지 약 30~40분 뱃길이다. 갑판위에 불어오는 해풍(海風)과 다도해의 풍광(風光)을 보며 점심 겸 안주 삼아 소주 한 병 곁들이면 천하일미(天下一味)가 따로 없었다. 충무김밥은 완도산(莞島産) 김에 고성(固城) 쌀로 밥을 짓고 한 입 크기로 맨밥을 싼다. 꼬치에는 주꾸미, 꼴뚜기, 홍합, 갑오징어, 어묵을 맵싸하게 무쳐 꿰고, 소금 간을 덜한 무김치는 멸치젓갈로 후린 것으로 매콤하고 달큼하면서 시원한 맛이 일품이었다. 나는 월사금 때문에 주말이면 부산 배를 자주 탔다. 돌아올 땐 오후 4시 출항하는 금성호를 이용했다. 봄날이면 해가 길어 성포에 도착해도 어둡지 않았다. 갑판위에 앉아 성포에서 올라타는 김밥쟁이 들의 밥을 사서 저녁 대용으로 자주 먹었다. 이젠 낚시를 집어치웠지만 한창 낚시를 할 땐 술안주로 제격이어서 많이도 사서 먹었다. 향수(鄕愁)를 자아내는 이런 토속(土俗)음식이 아직도 고향땅에 남아있다니 참으로 다행이다. 지금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한때 마산 오동동 술집에도 소 등골 같은 특미(特味) 안주가 나왔다. 어느 곳에 가도 지방색 짙은 서민 먹거리 한두 가지는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금성호 3등선실
<강세화>
충무에 갈 때는 금성호 삼등선실이 좋았다.
아무데나 손가방 훌쩍 던져두고 남녀노소 아래 위 따위 눈치 볼 일 없이 벌렁 눕기만 하면 되는 세상에 참 편하고 기가막힌 곳이었다.
영도 다리 밑을 빠져 한 동안은 그냥 누워 가는 데고 가덕 지나 선실 풍경이 조금씩 익숙해 지면 삼등선실에 엉겨 물길 백여리를 오가며 얼핏 얼핏 익힌 얼굴도 더러 있어 오징어 안주 짭잘한 소주잔도 돌아오고 한려수도 바람 맛도 적당히 섞어 금방 얼큰해진 기분으로 그러구러 저마다 왁자지껄 신이 날 때 쯤 거제 성포 김밥아지매 수더분한 손맛에도 정이 쫀쫀 했더란다.
충무 갈 때는 기가막힌 그 맛 때문에 두시간 뱃길에 멀미도 아예 잊었단다.
71 년도에 26 세의 나이로 요절한 통영 출신 가수 김성술(예명 김해일)이 ‘돌아와요 충무항에(김성술 작사, 황선우 작곡)’라는 제목으로 조용필보다 먼저 취입했는데 1970 년 12월 유니버살 레코드사에서 옵니버스식으로 발매된 음반의 B면 두 번째 트랙에 실려 있다. (제작 1970.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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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음악이 있는 혜인의 수경재배 밭 원문보기 글쓴이: 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