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경남역사]금관가야 마지막 왕의 무덤 산청 전(傳) 구형왕릉
산청군 금서면에 있는 왕산(王山) 기슭에 7단으로 쌓은 특이한 돌무덤이 있다. 바로 가락국(駕洛國)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묻힌 곳으로 전해지는 ‘산청 전 구형왕릉(山淸 傳 仇衡王陵 · 사적 제214호)’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돌로 쌓은 왕릉인 산청 전 구형왕릉을 찾았다.
백성 위해 순순히 가락국을 신라에 양위
지리산 천왕봉에서 불과 50리(약 20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왕산 아래에 자리한 산청 전 구형왕릉. 왕릉 주변으로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이 있어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다. 입구에서 만난 양일동 문화관광해설사는 구형왕이 잠든 곳으로 안내한다.
“구형왕은 금관가야(가락국) 10대 임금으로 구해 또는 양왕이라 하며, 김유신의 증조부입니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금관가야의 왕으로 있었죠. 백성이 피흘리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신라에 나라를 넘겼다고 전합니다.”
양 해설사는 돌무덤을 가리키며, 국가유산청에서는 아직도 구형왕릉이라는 확정적인 근거가 드러나지 않아서 전할 전(傳)자를 앞에 붙여 ‘산청 전 구형왕릉’이라 한다고 설명했다.
“나라도 못 지키고 어찌 흙 속에 묻히랴”
구형왕은 왜 김해가 아닌 이곳에 묻혔고, 무덤양식은 가야 양식과 판이하게 다를까 하는 궁금증이 자연스레 생긴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내가 어찌 흙 속에 묻힐 수 있겠는가. 차라리 돌로 묻어다오.”
구형왕은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산청 왕산으로 거처를 옮겨 수정궁을 짓고, 그곳에서 나라 잃은 서러움에 눈물로 나날을 보내다가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유언했다고 한다. 6가야의 맹주(盟主)로서 신라·고구려·백제와 함께 4국 시대를 열어가며 찬란한 가야문화를 꽃피웠던 가락국은 주변 열강국의 세력다툼에 그만 신라에 나라를 내주고 말았다. 수로왕이 나라를 세운 지 490년 만의 일이다. 왕위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홀로 외지고 깊은 산속에 묻히기를 원했던 구형왕의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유언 따라 7층으로 쌓은 돌무덤
왕릉의 형태는 경사진 지형에 잡석(雜石)으로 쌓아 네모반듯한 모형의 단을 이루고 있다. 둘레 100m, 높이 20m, 7층으로 쌓은 돌계단의 높이는 7.15m이다. 무덤 앞 비석과 문인석 등의 석물은 모두 후대에 만들어 세운 것이란다.
“아래로부터 다섯째 계단 중앙에 사각 구멍이 보이나요? 가로·세로 40cm, 깊이 68cm 크기로 감실(龕室)이라고 해요. 여기 사람들은 혼유문이라고도 불러요. 영혼이 드나드는 문이라는 뜻이죠.”
무엇보다 왕릉에는 신비한 현상이 있단다. “이곳은 많은 새들이 날아다니지만, 새가 능 위에 앉지 않고 낙엽 또한 능 밖으로 날려 떨어진답니다. 또 깊은 산속임에도 칡넝쿨이 능 근처까지는 뻗어오다가도 능 바로 앞에서는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어 뻗어 나간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양 해설사의 설명처럼 능 안으로 떨어진 잎이 하나도 없다. 이처럼 구형왕릉은 막연히 신비의 무덤으로만 알려져 왔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산음현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왕릉이라 전한다’는 기록이 알려지면서 구형왕릉으로 추정됐고, 1971년부터 국가사적 제214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산청 전 구형왕릉
위치 산청군 금서면 구형왕릉로 9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