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82회 시편 51장-100장
시편 51편 개인 탄원 시편
“지휘자에게. 시편. 다윗. 그가 밧 세바와 정을 통한 뒤 예언자 나탄이 그에게 왔을 때”(1-2). 이 참회 시편은 전통적으로 2사무12장의 이야기와 관련지어졌다. 시편 51은 시편 50편과 관련시켜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2가지 시편이 모두 성사적인 행위 안에서 화해를 목적으로 하는 참회의 전례적인 성격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자신을 짓누르는 거대한 죄악에 너무나도 무기력한 존재이기에 자신의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느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나약한 인간존재를 그리고 있다. 이런 점을 통해 이 2가지 시편은 이스라엘 공동체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계약의 성실성에 기초하여 기술하고 있다. 다른 이유는 법적인 재판 절차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으로, 소송 - 죄의 인식 - 용서의 청원 - 용서의 허가라는 순서로 이어지고 있다. 시편 50편은 분명 소송에 해당하고, 시편 51편은 죄의 고백과 용서의 청원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시편 51편은 개인 탄원시편에 속하며 라틴 전통에 따라 7개의 참회시편(시편 6: 32: 38: 51: 102: 130: 143) 중에 가장 뛰어난 시편으로 간주되어 왔다. 18-19절이 결론에 해당하며 20-21절은 시온과 예루살렘이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유배시기에 편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시편 51,3-4: 죄에 대한 정화의 호소
“3하느님, 당신 자애에 따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4저의 죄에서 저를 말끔히 씻으시고 저의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하소서”(3-4).
기도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시작된다. ‘불쌍히 여기소서’로 옮긴 히브리말은 ‘하난’은 ‘은혜를 보여주다“라는 뜻이다. 저자는 이미 자아를 넘어서서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놀라운 은혜에 의지하고 있다. 죄의 고백은 이미 의롭게 되는 과정이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슴이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라는 고백하는 죄인을 의롭다고 하셨다(루카 18,13-14 참조).
하느님께 간청하는 이 시편의 배경에는 하느님의 세 가지 속성이 있다. 곧 ‘자애롭고’, ‘불쌍히 여기고’, ‘자비롭다’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에 대해 체험한 것이다. ‘자애’는 구약 성경에서 친척과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있는 강한 충실과 연대감이다. “불쌍히 여기소서”로 옮긴 히브리 명사는 ‘은혜’이다. 이는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회의’를 뜻한다. 저자는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은혜가 무한함을 인식한다. ‘자비’는 같은 어근에서 나온 ‘자궁’의 복수형으로, 기본적으로 어머니가 자기 태 안에 있는 아기를 향해 가지는 강렬한 사람과 애련함을 뜻한다.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가지는 마음이 이 자비이다. 그러므로 자비하신 하느님의 마음은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다.
3-4절에서 저자는 하느님의 세 가지 속성에 견주어 히브리말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용어를 사용한다. 곧 “죄악”(3절), “죄”(4ㄱ절), “잘못”(4ㄴ절)이다. 저자는 이 세 낱말을 사용함으로써 죄의 종류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로 인해 자신이 하느님과 완전히 분리되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동시에 자신의 죄를 철저히 고백함을 드러낸다.
‘죄악’은 하느님과의 관계 또는 공동체 내에서 관계를 파괴하는 행위, 범죄 또는 반항 죄를 말한다. ‘죄’는 범죄와 그 결과와 관련된 왜곡된 모습을 의미한다. ‘잘못’은 지키지 못하거나 도덕적으로 잘못한 것 또는 과실을 의미한다. 큰 죄는 큰 자비를 필요로 한다(히에로니무스). 그래서 그는 용서를 비는 기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한다. 세 가지 죄에 이어 죄를 용서하는 세 가지 동사는 ‘지우다’, ‘씻다’, ‘깨끗이 하다’이다. 이 동사들의 공통점은 ‘씻는 의식’과 관련 있다. 저자는 죄의 용서를 마치 더러운 의류에 빠는 것처럼 말한다. 하느님이 이들 동사의 주체로서 죄인의 자아에 직접 손을 대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하느님은 죄인을 새롭게 할 준비를 하신다. 예언자들은 이런 하느님의 행위를 구원 행위로 표현한다.
“불쌍히 여기소서”, “지워 주소서”, “깨끗이 하소서” 이 3가지 동사는 9-11절과 관련하여 “죄악”, “죄”, “잘못”이라는 죄들을 “지워주소서”, “씻으소서”, “깨끗이 하소서”라고 호소한다. 죄라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구원 계획을 거부하는 행위를 지칭한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완벽함과 교만은 하느님의 지혜와 관련하여 불완전한 자신의 존재를 수용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자는 여기서 주님의 자애와 자비를 호소한다. 왜냐하면 욥기 14,4의 “그 누가 부정한 것을 정결하게 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라는 언급처럼, 주님만이 죄를 씻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시편 51,5-8: 죄의 고백과 용서(하느님의 정의)
“5저의 죄악을 제가 알고 있으며 저의 잘못이 늘 제 앞에 있습니다.
6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에 악한 짓을 제가 하였기에 판결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의로우시고 심판을 내리시더라도 당신께서는 결백하시리이다.
7정녕 저는 죄 중에 태어났고 허물 중에 제 어머니가 저를 배었습니다.
8그러나 당신께서는 가슴속의 진실을 기뻐하시고 남모르게
지혜를 제게 가르치십니다“(5-8).
5절에서 저자는 자신의 죄를 의식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회개를 표현한다. 그는 하느님 앞에 자기의 죄스런 삶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상세히 밝히지 않는다. 그는 죄를 지었다는 일반적인 선언을 하면서 자신이 수치스런 죄에 물들어 있임을 말한다. 이는 인간이 악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음을 암시한다.
6절은 우리야라는 인간의 존재를 망각한 다윗의 행위를 상징하면서 이웃의 존재를, 더 나아가서는 계약의 하느님을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의 죄를 암시한다. 죄는 인간에게서 기인한 것이지 결코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지혜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조명해 주는 역할을 수행한다. 곧 인간에게 해한 악행은 바로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라는 사실이 고백되고 있다.
7절은 죄와 죽음이라는 2가지 실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표현하고 있다. 인간의 실재는 죄를 지울 수 있는 존재인 동시에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죄 중에 태어났다’는 말로 ‘원죄’의 신학적 원칙을 명료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그의 삶에 오랫동안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출생과 잉태 자체를 죄로 보는 것이 아니다. 곧 죄스러움이 성과 연결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죄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언제든지 우리는 하느님께 반역하고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
바오로는 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죄입니다. 사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을 발견합니다. 내가 좋은 것을 하기를 바라는데도 악이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로마 7,17-23). 나의 존재의 정체성을 알고 인정할 때 비로소 주님의 현존이 체험되는 것이다.
8절에서 ‘가슴 속’에 해당되는 히브리 말 ‘투홋’에는 ‘비밀리에, 안에, 어둠 속에서’라는 뜻이 있으며, ‘남모르게’와 대구를 이룬다. ‘가슴 속의’와 ‘남모르게’는 좀더 내면적인 부분을 가리킨다. ‘진실’의 어원은 ‘든든하다’이다. 그러므로 진실의 개념에는 흔들리지 않는 든든함이 있다. 저자는 또한 내면 깊은 곳에서 ‘지혜’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지혜’는 주님을 경외함에서 온다. 이것은 저자가 올바른 행위를 하도록 이끌어 주는 힘이다. 철저히 죄의 영향을 받고 있는 저자에게 내면 깊은 곳에서의 진실과 지혜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9-11: 죄에 대한 정화의 호소
“9우슬초로 제 죄를 없애 주소서. 제가 깨끗해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보다 더 희어지리이다.
10기쁨과 즐거움을 제가 맛보게 해 주소서. 당신께서 부수셨던 뼈들이 기뻐 뛰리이다.
11저의 허물에서 당신 얼굴을 가리시고 저의 모든 죄를 지워 주소서”(9-11)
9절에서 저자는 죄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정화되기를 간청한다. 그는 마치 악성 피부병 환자들(레위 14장)이나 시체를 접촉하는 자(민수 16장)처럼 정결예식을 치르는 것과 같다. “우슬초”는 방향성 식물로서 정결예식에서 사용되었다. 이것은 파스카 축제 때 히브리인들이 문설주와 상인방에 피를 바를 때 사용되었다(탈출 12,22). “죄를 없애주소서”라고 옮긴 히브리말 ‘하타’는 기본적으로 ‘죄를 짓다’라는 뜻이 있지만 강조능동형은 ‘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다. 정결하게 하다’라는 뜻을 갖기도 한다. 저자가 내면 깊은 곳에서 진실하고 지혜롭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그를 씻어 주셔야 한다.
“눈보다 더 희어지리이다”라는 표현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 쓰여 나병 걸린 사람이 눈처럼 하얘졌다고 한다. 그러나 눈은 참으로 깨끗한 것을 나타내는 자연의 표상이다. 이사 1,18에서 “너희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진다”고 한다. 또한 자신들의 죄를 슬퍼하는 사람들은 어둔 색깔의 옷을 입고 더러운 모습을 한다. 여기서 눈보다 더 희어지도록 자신을 씻어달라고 하는 것은 내적 청결과 외적 정화를 뜻한다.
10절에서 죄가 씻긴 결과는 기쁨과 히복을 체험하는 것이다. 기쁨은 깨끗하고 정화된 마음에 합당한 근본 체험이다. 저자는 죄로 인해 얻게 되는 고통과 뼈가 부서지는 것과 동일시했다. 그에 따르면 뼈를 부수신 분은 하느님이다. 히즈키야 임금은 병들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께서는 사자처럼 저의 뼈들을 모두 부수십니다”(이사 38,13). 죄는 하느님과 신인의 관계를 손상시켰다. 그는 이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한다. 곧 하느님의 자애와 너그러움에 대한 신뢰로 삶의 기쁨을 회복하고자 한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육신을 얻어맞는 후에 다시 삶의 기쁨을 되찾게 될 것이다.
11절에서 저자는,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은 오직 하느님이 그의 죄에서 ‘얼굴을 가리실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얼굴을 가리는 것’은 보통 하느님의 분노를 드러내거나 죄인들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한다(시편13,1). 하느님이 얼굴을 가리실 때 저자는 버림받음과 절망감을 느낀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주님께 얼굴을 가려달라고 간청하는데 그의 허물에서 얼굴을 가려달라고 한다. 하느님은 저자의 죄를 바라보지 않고 간과하심으로써 저자를 용서하실 수 있다. 그런 행위는 하느님이 저자의 잘못들을 취하지 않고 그것들을 지워버리시는 분임을 의미한다. 그런 회복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연민에 의해 이루어진다.
민수 19,9과 히브 9,19에 의하면 우슬초는 향기 나는 식물로 정결 예식에 사용된 식물이다. 이사 1,18의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는 내용과 이사 66,14의 “이를 보고 너희 마음은 기뻐하고 너희 뼈마디들은 새 풀처럼 싱싱해지리라. 그리고 주님의 종들에게는 그분의 손길이, 그분의 원수들에게는 그분의 진노가 드러나리라”라는 내용의 의미를 인용하고 있다.
시편 51,12-14: 인간의 영혼
“12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제게 만들어 주시고 굳건한 영을 제 안에 새롭게 하소서.
13당신 면전에서 저를 내치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영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14당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시고 순종의 영으로 저를 받쳐 주소서”(12-14).
12절에서 ‘마음’과 ‘영’은 구약성경의 사고에 따르면 인간의 근본적인 힘이고, 한 사람의 삶의 처지와 방향을 가리킨다. 저자는 ‘깨끗한 마음’과 ‘굳건한 영’을 청한다. 깨끗한 마음은 뜻이 나누어지지 않거나 오직 한 가지, 곧 하느님의 뜻을 행할 것을 추구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의 뜻이 하느님께 열려 있다. ‘영’은 여기서 ‘마음’과 동의어이며 생명력과 의지력의 중심이다. ‘굳건한 영’은 마음과 뜻이 하느님을 향해 굳게 정해진 상태로서 일괄성 있게 실천해 나갈 수 있는 굳센 정신이다.
깨끗한 마음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은 죄의 정화를 요구하기보다는 깨끗한 마음 자체를 요청하는 것이다. 곧 인간의 행동 자체를 바꿀 수 있는 근본적이고 내적인 변화를 요청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만들어” 달라는 동사는 “창조하다” 동시와 동일하다. 따라서 창조하는 능력은 하느님만이 갖고 있는 새롭고 신적이며 정화시키고 영속하는 힘이기에 이제 인간의 죄는 하느님의 성령을 통해 새로운 인간으로 변하게 된다. 저자는 하느님만이 자기를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새롭게 창조하실 수 있다고 믿는다.
저자의 죄의 고백을 통해서 용서뿐 아니라 새롭게 되기를 간구한다. 저자는 ‘새롭게 하소서’라고 한 것은 그에게 죄가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에제키엘 예언서에서 영감을 받았다.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정화하고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시며 그들이 당신의 토라를 지키며 살게 하겠다고 약속하신다(에제 36,24-28). 여기서 회개하는 죄인의 영적 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13절에서 “당신 면전에서”에서는 ‘주님의 현존에서’를 의미한다. 주님의 현존 속에 산다는 것은 충만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현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기쁨의 원천이요 생명 자체이신 주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저자는 “저를 내치지 마시고”라고 하면서 하느님과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에게는 하느님과의 교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거룩한 영”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주님의 거룩한 영은 하느님과 내밀한 친교를 가능케 한다. 죄는 이 친교를 방해한다. 그러므로 거룩한 영은 회개로 초대하는 진실한 영이다. 여기서 저자는 하느님의 거룩한 영을 받은 사람인 것으로 보아 임금으로 추측된다. 사울한테서 주님의 영이 떠났지만 다윗에게는 주님의 영이 임하셨다. 주님의 영이 함께 하셨기에 다윗은 카리스마적 인물이 되었다. 저자는 하느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잃지 않고 그분 가까이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거룩한 영이 자신과 함께하시기를 구하고 있다.
14절에서 “순종의 영”은 직역하면 ‘자발적인 영’, ‘너그러운 영’이다. 이는 구속받지 않은 상태에서 스스로 마음이 움직여 행하는 충실한 이의 자발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주님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다. 저자는 죄 때문에 잃어버린 기쁨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되찾기를 간절히 바란다.
시편 51,15-19: 하느님 마음에 드는 제사
15 제가 악인들에게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죄인들이 당신께 돌아오리이다.
16 죽음의 형벌에서 저를 구하소서, 하느님, 제 구원의 하느님. 제 혀가 당신의 의로움에 환호하오리다.
17 주님,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당신의 찬양을 널리 전하오리다.
18 당신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이다.
19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
15절에서 다윗은 감사의 표시로 악인들과 죄인들에게 증언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한때 자신이 주님 앞에서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회개와 용서의 체험을 그들과 나눔으로써 그들도 회개하고 새 힘을 얻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죄인들을 가르친다. 그는 구원의 기쁨을 혼자만 누리지 않고 모든 죄인이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체험하여 새롭게 되기를 바란다.
16절에서 “죽음의 형벌”로 옮긴 히브리말은 ‘피’의 복수형으로 ‘흘려진 피’를 뜻한다. 여기서 저자는 ‘유혈죄’를 언급한다. 유혈죄는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린 살인으로 인한 죄이다. 다윗의 경우 밧 세바 사건을 들추어 내면 그가 우리야를 죽인 것이 우리야의 아내와 간음한 것보다 더 무거운 죄가 된다. 죽음의 형벌에서 구해달라는 저자의 간청은 ‘죄에 대한 벌로 죽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다. 하느님은 구원의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당신께 돌아와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신다. ‘주님의 의로움’은 그분의 구원 행위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주님의 의롭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이시다.
17절은 전통적으로 성무일도 전례에서 사용되어 잘 알려져 있다. 전례는 17절을 통해 전례 시작 때 사용하여 우리가 하느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우리의 입술을 열어주셔야만 가능함을 제시한다. 입술을 열게 하는 것은 회복의 행위이다. 정화와 새롭게 됨을 통해 저자는 하느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릴 수 있기를 청한다. 그는 입술과 입의 언어기관을 통해 기도드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심을 제시한다.
18절은 형식적인 경신례가 배경이 된다. 저자는 하느님이 제사와 번제를 반기지 않으신다고 한다. 이는 예언서들과 시편 50편과 같이 하느님이 모든 희생제물을 절대적으로 거부하신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저자는 참된 경신례를 강조하려는 것이다. 제사나 번제만으로는 죄를 씻고 악행을 보상받을 수 없다. 하느님이 바라사는 것은 진실, 지혜, 그리고 부서지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내적인 변화이다.
18절에서는 예언서의 근본적인 가르침이 흐르고 있다. 말하자면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공정과 신의, 그리고 겸손이다(미카 6,8). 또한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자애, 공정, 정의를 실천하는 일이다(예레 9,22-23). 그리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신의이다(호세 6,6). 지혜문학에서도 “악인들의 제물은 주님께서 역겨워하시고 올돋은 이들의 기도는 주님께서 기꺼워하신다”(잠언 15,8)고 가르친다. 주님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다시 새로워져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온전히 자신을 바치는 것을 반기신다.
‘주님이 제사를 즐기지 않으신다’고 한 18절과 달리 19절은 “하느님께 맞갖는 제물”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로써 저자는 참된 제자 신학을 제시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 자기 마음을 바치는 것이다. 곧 ‘부서진 영’과 ‘부서지고 꺽인 마음’으로 영과 마음이 새로워진 인간이 하느님께 제사를 바쳐야 한다. ‘부서진 영’과 ‘부서지고 꺽인 마음’은 대구를 이루며, 자신의 죄 때문에 아픔과 고통을 느끼며 회개하는 마음을 가리키는 동의어이다.
참된 제사는 참회 회개가 전재되어야 한다. ‘부서진 영’과 ‘부서지고 꺽인 마음’에 반대되는 것은 자기 만족에 빠져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이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들에게 가까이 계시고 넋이 짓밟힌 이들을 구원해 주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부서진 마음을 하느님께 여는 것이다. 그러면 하느님의 사랑이 부서진 마음으로 흘러들어와 그 마음을 치유하고 새롭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죄에서의 해방과 기쁨을 체험한 인간은 이제 주님의 길, 곧 인간의 역사 속에서 구원으로 인간을 인도하는 하느님의 뜻을 가르치기를 갈망한다. 하느님 없이 사는 죄인들의 회개를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16절의 죽음의 형벌은 피를 불러일으키는 폭력을 의미한다. 즉 우리야의 살인을 암시한다. 하느님의 정의란 의미는 여기서 자비 또는 호의로 해석해야 한다
이제 인간은 하느님을 향해 찬양의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변화된다. 하느님의 구원의 은총은 인간의 말에서 하느님의 말을 전하는 인간으로 변화시킨다. 하느님은 스스로를 낮추어 하느님 앞에 부서지고 꺾인 자세, 곧 부서진 영과 부서진 마음으로 당신께 제사를 봉헌하는 인간들을 반기시는 것이다(이사 58장의 참다운 의미의 단식).
시편 51,20-21: 국가적 전례
20 당신의 호의로 시온에 선을 베푸시어 예루살렘의 성을 쌓아 주소서.
21 그때에 당신께서 의로운 희생 제물을, 번제와 전번제를 즐기시리이다. 그때에 사람들이 당신 제단 위에서 수소들을 봉헌하리이다.
20절에서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은 외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하느님 백성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성전 재건에 대한 문제가 보이는 것은 유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기원전 515년 제2의 성전 재건과 관련되어 있다.
21절에서 “그때는”이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되는데 이는 하느님이 시온을 회복하실 때이다. 주님이 ‘의로운 희생제물과 번제와 전번제를 즐기신다’는 말은 제사와 번제를 반기지 않으신다는 18절의 묘사와 대조된다. 이 또한 참된 제사를 말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있다. 죄의 용서로 새롭게 된 자는 새 예루살렘의 이상적인 시민이 된다. 그들은 참된 회개가 이루어진 후 제사의식을 치른다. 전번제는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제물을 드린 후 그 일부를 취하지 않고 모두 태워 바치는 번제를 말한다.
따라서 시편 51편의 이 마지막 구절은 국가 전례 때에 사용하기 위해 첨가된 부분으로 보고 있다. 이 구절에서 에즈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실현되었던 거룩한 도시와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관한 희망이 예견되고 있다. 시편 147,2과 연관되어 유배이후 예루살렘 성전으로 회귀를 의미한다.
시편 63편 개인 탄원시편-영혼의 목마름
시편 63편은 하느님 현존을 간청하는 개인 탄원 시편에 속한다. 이 시편은 전체적으로 하느님을 ‘당신’으로 부르면서 하느님께 말씀을 드린다. 시편63편에는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혼의 목마름이 잘 표현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을 위험 속에서 주님을 찾는데, 그의 원수들은 거짓말로 그를 공격하는 자들이다.
“1시편. 다윗. 그가 유다 광야에 있을 때”
1절인 머리말은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라는 역사적 배경을 설정한다. 이는 2사무 15-17장에서 다윗이 압살롬으로부터 달아나는 이야기를 암시한다고 본다. 시편 63,10-11에서는 다윗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칼날에 내맡겨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칼을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칼로 망한다. 사실 압살롬은 자기 자신의 반역으로 희생되었다(2사무 1,8,14-15 참조). 이 머리글은 다윗의 영적 삶과 이 시편을 연관 지으려는 의도에서 붙여진 것이다.
“2하느님, 당신은 저의 하느님, 저는 당신을 찾습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에서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
이 시편 저자의 마음이 절절하다. 하느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 그 대상을 향한, 그 간절함이 구절구절마다 녹아 있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은 개인 탄원 시편을 시작하는 전형적인 형식이다. 저자는 하느님께 소외감을 느끼면서도 하느님과의 관계에 헌신하고 있다. 이 헌신이 그의 구원에 대한 확신의 기초이다. ‘찾다’는 ‘열렬한, 간절한, 집중적인 찾음’을 말한다. 이 동사는 ‘새벽’이라는 뜻을 가진 ‘샤하르’에서 유래되어, 원래 ‘새벽을 기다리다’라는 의미에서 ‘부지런히 찾다’를 의미하게 되었다.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합니다”라는 이러한 전적인 신뢰에 전적인 헌신, 이런 것이 바로 신앙이다. 우리가 말은 그렇게 합니다만 이러한 경지에 들어가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상대적인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뢰인 것이다. 신앙은 간절한 마음에서 온다. 마치도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하던 간절히 간구하던 우리 조상들이라던지, 또 지금도 그러한 방식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은 유다 광야와 연결되며 저자의 목마름과 땅의 메마름이 연결된다. 여기서 다윗이 그의 목숨을 노리던 사울을 피해 광야에서 살았던 상황이 연상된다.
“이 몸이 당신을 애타게 그립니다”는 “제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합니다”를 다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몸은 영혼에 반대되는 말이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영혼’ 또는 정신(네페쉬)’과 ‘몸 또는 육(바사르)’을 인간 존재에 관한 분리된 개념이 아니라 서로의 중요한 축을 갖고 있다. 영혼은 하느님을 갈망하며, 몸은 나약하고 불안정하기에 하느님을 찾는다.
따라서 영혼과 육체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시편저자의 인격전체가 하느님을 갈망한다.
“3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고 이렇듯 성소에서 당신을 바라봅니다.”
2절에서는 길도 없고 물도 없는 땅인 광야에서 저자의 영혼과 육신이 하느님을 목말라 한다고 했고, 이제는 ‘성소에서’ 하느님을 찾는다고 한다. 사람은 광야에서 고생하지 않으면, 그곳에서 만나는 악을 당하지 않으면, 하느님이라는 선에 결코 당도하지 못한다(아우구스티누스). 저자는 ‘성소에서’ 하느님을 본다고 한다.
이스라엘 전체에는 성전은 예루살렘 한 군데에 있지만 성소는 몇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건 구분해서 쓰는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세켐 이라든지 몇 군데에 성소가 있었다. 거룩한 곳 어떤 한 장소를 택해서 하느님이 인간과 만나주시는 그러한 곳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을 했는데 바로 그중에 하나이다. 이러한 성소에서 주님을 바라보았다. 무슨 뜻일까? 주님이 보이나?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권능과 영광이 보이는가? 그것이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이 시편저자를 비롯해서 성경에는 그런 표현들이 많다. 이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당신을 바라봅니다”는 보통 성전에서 체험하는 현현에 대한 것이다. ‘보다’는 동사는 예언적인 환시를 받을 때 사용되는 전문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여기서 암시하는 것이 현현이나 환시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저자가 도움과 보호를 구하고 있음을 보여주거나, 그가 어떤 예배의 경험을 통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했음을 제시할 수 있다. “당신의 권능과 영광”도 하느님의 현현을 가리킨다. 이것이 하느님 현존의 상징으로서 계약의 궤나 지성소에서의 보호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장면을 그려본다. 어떤 사람들은 무미건조하게 미사를 드릴 것이고, 어떤 이는 하나의 형식에 빠져 있다거나 정신의 산만한 상태에서 그렇게 미사를 드릴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똑같은 미사 장소에 있는데 어떤 거룩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권능이나 영광으로 말 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마치 베에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사람들이 놀라운 음악적인 경험을 해서 그것을 악보에 적어 내는 거 하고 비슷하다. 그런 작곡가들에게는 음악경험이 권능과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들인데 그들에게는 가능했던 것이다. 오늘 시편저자가 말하는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해 성소에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4당신의 자애가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당신을 찬미합니다.”
저자는 주님의 자애가 생명보다 낫다고 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자애는 생명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애는 하느님 자녀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하느님의 속성이다. 하느님의 자애가 없는 생명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애와 생명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저자의 믿음은 순수한 찬양이 되어 자아를 잊어버리고 초월한 순간에 몰입한 것이다. 교부시대에는 이런 해석으로 신앙을 위해 자기 목숨을 포기했던 순교자들의 믿음, 곧 하느님을 생명보다 소중히 여겼던 순교자들의 믿음과 연관지었다.
“5이렇듯 제 한평생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 부르며 저의 두 손 들어 올리오리다.”
5절은 한 평생 주님을 찬미한다고 말한다. 주님을 찬미한다는 것은 손을 들고 주님을 찬미한다는 것이다.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은 기도할 때의 모습이다. 이러한 영적인 깊이에 들어간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가 주님을 찬미하고 그분의 이름을 부른 것은 모든 기쁨의 원이라고 할 수 있다.
“6제 영혼이 비계와 기름을 먹은 듯 배불러 환호하는 입술로 제 입이 당신을 찬양합니다.” 6절에서 저자는 하느님 현존의 체험을 좋은 음식을 먹고 만족해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비계’와 ‘기름’은 같은 말이다. ‘비계’는 귀하고 만족을 주는 최상의 음식으로 간주되고, ‘기름기’는 고기 가운데 가장 좋은 부분이다. 이것은 성전에서 희생제물이 된다. 레위 7,23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기름을 먹으면 안 된다. 모든 기름은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현존의 체험에 대한 만족감은 하느님 찬양을 불러 일으킨다.
사실 우리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한 달에 한번 소고기 국 먹을까. 그것도 힘들었던 시절이 있었따. 고기라고 하면 특별한 명절 때만 겨우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아주 고대인들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먹는 것이 별로 풍족하지 못하고 생존의 위기 이런 것들이 늘 느끼고 있을 때에 기름진 것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아주 놀라운 경험일 것이다. 아주 즐겁고 흡족한 것이다. 주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귀한 것을 먹고 주님을 찬양하며 기쁨에 머문다.
“7제가 잠자리에서 당신을 생각하고 야경 때에도 당신을 두고 묵상합니다.” 7절은 회고적이다. “잠자리에서”, 그리고 “야경 때”에 하느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저자가 고요하게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걱정하면서 자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잠자리는 그의 안식을 가리킨다. 안식에 들어서도 하느님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저자는 밤의 긴장 속에서도 하느님의 자애를 회상한다. 하느님 현존의 체험으로 얻게 된 좋은 것들은 밤에도 계속 생각되고 묵상된다. ‘밤’은 한편으로 악마와 악령이 활동하는 위험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기도와 묵상 중에 하느님 현존을 찾기에 적합한 시간이다.
“8 정녕 당신께서 제게 도움이 되셨으니 당신 날개 그늘 아래서 제가 환호합니다.”
저자는 이미 성전에서 하느님의 도움을 체험했다. 주님은 저자가 어려울 때 돕는 분이다. 주님의 도움 때문에 저자는 주님의 날개 그늘에서 환호할 수 있다. “당신 날개 그늘”은 주님의 보호를 뜻한다. 저자는 단순히 날개라고 말하지 않고 날개의 ‘그늘’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사람들은 그 그늘에서 구조와 보호를 찾는다. 보호하는 그늘의 기능은 이스라엘 주변 사회 뿐 아니라 이스라엘 자체 내에 있던 왕정 신학의 일반적인 표현이다. 저자는 위기 가운데서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이 자신을 하느님의 보호아래 놓아두는 거임을 안다.
“9제 영혼이 당신께 매달리면 당신 오른손이 저를 붙들어 주십니다.”
9절에서 주님께 대한 갚은 신뢰가 나타난다. 만족한 그의 영혼(6절)은 보호해 주시는 하느님의 돌보심에 매달려 있다. 그는 모든 활기와 감정의 힘을 다하고 온갖 사랑의 힘과 열정을 가지고 하느님께 매달린다. ‘매달리다’로 옮긴 히브리말 ‘다바크’는 ‘확고히 머물다. 바싹 뒤따르다,힘써 쫓아가다,달라붙다’는 의미가 있다. 이 동사는 남자가 여자에게 매달리는 경우에도 사용된다. 창세기에서는 남편과 아내 사이의 결합으로 인한 인생의 친밀한 공동체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되었다(창세 2,24 참조). 또한 룻이 시어머니에게 ‘바싹 달라붙었다’고 할 때도 쓰였다(룻 1,14). 이것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께 충성함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은유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신들보다는 야훼께 매달림을 의미한다(신명 11,22 참조). 주님의 ‘오른손이 붙들어 주시는 것’은 주님 자신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10그러나 내 목숨을 노리는 저들은 멸망으로, 땅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리라.”
드디어 저자의 원수들, 곧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있는데도 원수들의 멸망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저자의 파멸을 추구했던 그들이 스스로 죽어 파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땅속 갚은 곳”은 깊은 저승이다.
“11칼날에 내맡겨져 여우들의 몫이나 되리라.”
11절은 원수들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사형집행인의 칼이나 용사의 칼에 의해 죽고 그들의 주검은 묻히지도 못하고 짐승의 밥이 될 것이다. 시체가 묻히지 못하고 짐승의 밥이 되는 것은 구야성경에서 가장 끔찍한 저주 가운데 하나다 그들은 저승에서조차 결코 편안한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12그러나 임금은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이들은 모두 자랑스러워하리라. 정녕 거짓을 말하는 입은 틀어막히리라.”
의인의 승리와 악인의 멸망이 대조를 이룬다. 원수들의 정체는 거짓을 말하는 자들이다.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이들”과 “거짓을 맘할는 입”이 대조적이다 저자가 고통받은 것은 원수들의 거짓 고발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저자는 하느님께 충실한 자들이 승리할 것임음 확신하다. 여기서 “임금"은 저자와 동일인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저자가 임금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임금은 하느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성전을 돌보고 하느님과 백성을 잇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이들’을 직역하면 ‘그를 두고 맹세하는 이들’이다. 그는 하느님이나 임금이 모두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는 하느님 뿐만 아니라 임금을 두고도 맹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행에서 임금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으로 보아 여기서는 하느님을 두고 맹세한다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입이 틀어막히리라’는 원수들의 거짓됨이 판명될 것임을 의미한다. 찬양하는 입은 열리게 되지만 거짓을 말하는 입은 닫히게 된다.
하느님을 향한 그 갈망이 얼마나 놀라운지 63편에서 우리는 볼 수 있다. 참으로 부럽답.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이러한 영적인 경지에 들어 갈수 있도록 구도적인 삶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말이다.
시편 83편 공동 탄원시편 “하느님, 잠잠히 계시지 마소서!”
시편 83편은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탄식하며 구원을 간청하는 ‘공동 탄원 시편’이다. 하지만 원수들을 향한 저주와 독설 형식의 기도를 감고 있기 때문에 ‘저주 시편’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본문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부분(83,2-9)은 원수들에게 억압받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개입을 요청하는 기도이며, 둘째 부분(83,10-19)은 이스라엘의 원수 앞에서 하느님께서 어떤 태도를 보이셔야 하는지 제안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이 시편을 통해 시련 중에 하느님께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온갖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저자가 시련과 고통 중에 하느님께 어떤 신앙을 고백하는지, 하느님께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
머리말 -“1노래. 시편. 아삽”
머리말을 직역하면 “노래, 악기를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 아삽의”이다. 이 머리말은 탄원과 저주가 담긴 이 시편을 하나의 노래로, 성전 성가대가 악기를 연주하며 부르던 전례 시편으로 제시한다. 따라서 원수에 대한 독설과 저주가 담긴 내용이라 해도, 이 시편은 하느님께 바쳐진 한 편의 기도이며,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해 성전에서 노래한 전례가이다.
아삽은 레위인으로서 다윗시대에 성가대를 지휘한 인물이다. 하지만 전반부에서 열거한 열 나라(83,7-9)의 시대를 참고한다면, 아삽이 이 시편 저자일 가능성은 없다. 다만 다윗시대의 성가대 지휘자를 저자로 내세움으로써 이 시편의 정통성을 강조하고자 했을 것이다.
시편 83, 2-9 구원 개입을 요청하는 기도
2하느님, 잠잠히 계시지 마소서. 말없이 가만히 계시지 마소서, 하느님.
3보소서, 당신의 적들이 소란을 피우고 당신을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치켜듭니다.
4당신의 백성을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당신께 보호받는 이들을 거슬러 모의합니다.
5그들은 말합니다. “자, 저들 민족을 없애 버려 이스라엘의 이름이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6그들은 한마음으로 흉계를 꾸미고 당신을 거슬러 동맹을 맺습니다.
7에돔의 천막들과 이스마엘인들 모압과 하가르인들
8그발과 암몬과 아말렉 필리스티아와 티로의 주민들도 함께.
9아시리아까지 그들과 합세하여 롯의 자손들에게 팔을 뻗쳐 거듭니다. 셀라
이스라엘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 “잠잠히 계시지 마소서.”(83,2ㄱ)라고 요청한다. 이 요청은 “침묵으로 일관하지 마소서”라고 옮길 수도 있다. 여기서 ‘침묵’이라는 뜻을 지닌 명사 ‘도미’는 ‘쉬다’ · ‘침묵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다마’에서 파생되었다. 이 동사는 일반적으로 어떤 노동이나 일련의 작업을 도중에 그만두거나 멈추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하느님, 잠잠히 계시지 마소서.”라는 요청에는 당신 백성과 맺으신 계약 관계를 중단하지 마시라는 청원과 백성의 유익을 위해 하시던 일을 그만두지 마시라는 청원이 담겨 있다.
이어지는 요청은 “말없이 가만히 계시지 마소서.”(83,2ㄴ)이다. 이를 직역하면 “귀먹은 벙어리가 되지 마소서.”이다. ‘귀먹은 벙어리가 되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하라쉬’는 흔히 ‘침묵하다’또는 ‘말없이 가만히 있다’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침묵을 듣지 못한 결과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귀먹은 벙어리가 되지 마소서.”라고 청하는 경우를 시편집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일부러 듣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고, 그들을 돌봐주지도 않으신다는 생각엣 나온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것은 이스라엘과 관계를 단절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일에 무관심하고 그들의 탄식과 구원 요청에 응답하시지 않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하느님께 잠잠히 계시지 마시라고, 곧 당신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해 주시라고 요청한다. 또한 침묵하지 마시라고, 곧 이스라엘이 당하는 불의에 무관심하지 마시라고 간청한다.
이스라엘은 자기네 원수들이 곧 하느님의 원수들이라고 말한다(83,3).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고 그들과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원수들 곧 하느님의 원수들이 소란을 피우며 머릴 치켜든다(83,3). ‘머리를 드는 것’은 승리를 상징하는 행위이다. 원수들은 마치 승리자가 된 듯 하느님 앞에서 요란을 떨면서 하느님의 백성을 무너뜨릴 공략을 모의한다(83,4-5). 83,4ㄱ의 ‘음모(비밀스런 협정)를 꾸미다(교묘하게 세우다)’라는 표현은 적들이 비밀스럽게 모여 하느님의 백성을 거슬러 협정을 맺고, 그것을 추진하기 위한 계획을 교묘하게 세운다는 뜻이다. 그들이 음모를 꾸미는 대상인 하느님의 백석(83,4ㄱ)은 그분의 보호를 받는 이들이다(83,4ㄴ).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한 음모는 곧바로 하느님에 대한 음모로 이어진다.
원수들이 꾸미는 음모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전멸이다(83,5). 하느님께서 보호하시는데도 그분의 백성을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하려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하느님마저 잊혀지게 만들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저자는 원수들이 ‘한마음으로 동맹을 맺었다’(83,6)고 개탄한다. 여기서 ‘동맹’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오 ‘베릿’은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가리키는 특정적인 용어이기도 하다. 드리고 ‘맺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카랏’은 본래 ‘…의 일부를 잘라내다’라는 뜻인데, ‘계약을 맺다’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고대에는 동물을 ‘반으로 잘라’ 그 사이를 지나가는 의식을 통해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이 동사를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을 가리키는 데 사용한다(탈출 24,8; 34,10; 신명 4,23; 5,2). 저자의 원수들의 계약을 베릿과 카랏으로 묘사한 것은 그들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을 거스르기 위해 철저하게 하나로 뭉쳤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다.
원수들의 목록(83,7-9)에서 첫 번째로 언급된 것은 에돔이다. 창세기는 에돔을 에사우의 후손이라고 소개한다(창세 25,30; 36,1). 이집트를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향하는 이스라엘에게 에돔은 자기네 지역을 지나가지 못하게 했다(민수 20,14-21). 이스라엘과 같은 핏줄에서 나온 형제들임에도 에돔은 친족 관계에서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하느님과 이스라엘을 거스르는 원수들의 동맹에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에돔의 죄는 다른 국가들의 죄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스마엘인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이사악의 형제인 이스마엘 후손이다(창세 16,15). 이스마엘인도 이스라엘과의 친족 관계를 거스르고 선조들의 하느님을 거슬러 죄악을 범했다.
모압은 이스라엘이 광야 여정 중에 있을 때 에돔과 같은 죄악을 범했으며(판관 11,16-17), 여호사팟 시절에 암몬과 합세하여 유다 왕국을 거슬러 전쟁을 벌인 민족이다(2역대 20,1-25).
하가르인은 길앗 동편 전역에 흩어져 살던 민족이며(1역대 5,10), 이스마엘인과 마찬가지로 아랍족에 속하고 이스라엘에게 위협을 가하던 민족이었을 것이다. 그발은 사해 남쪽에 위치한 산, 곧 북부 세이르 산에 살았던 민족이다. 암몬은 모합처럼 사해 동쪽에 살았던 민족으로서 룻의 후손들이다(19,30-38). 아말렉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원수이다. 모세시절부터 이스라엘은 아말렉과 싸움을 벌였으며 사울 시대에도 그러했다.
필리스티아는 지중해 해안 지방에 살던 민족으로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까지 이스라엘을 가장 많이 억압하고 위협했다. 티로는 팔레스티나 북부 해안 지방에 살던 민족으로, 솔로몬 시대에는 왕궁과 성전을 건설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지만, 주변 국가와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히기도 했다(이사 23장 참조).
이 시편에서 필리스티아와 티로는 각각 개별 민족일 수도 있지만, 지중해 해안 지방에 살면서 이스라엘에게 위협을 주던 민족을 통칭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시리아는 요르단 동편의 한 종족일 수도 있고(창세 25,3.18 참조), 기원전 9-7세기 고대 근동을 제패한 제국일 수도 있다. 후자라면 아시리아는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 왕국에 군사적 영향력을 가했던 북방 세력으로서, 기원전 722년 북부 이스라엘을 무너뜨려 역사에서 사라지게 하고 남부 유다의 종주국(宗主國)으로 군림하다가 기원전 612년 바빌로니아에 의해 패망한 나라이다.
이처럼 저자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실제로 위협과 억압을 가한 적대국 또는 적대 민족을 언급하면서, 현재 자신과 백성 전체가 처해 있는 위기가 원수들에 의한 절체절명의 시기에 버금간다고 탄식하고 있다.
시편 83,10-19 심판을 요청하는 기도
10미디안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에게 하소서. 키손천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하신 것처럼.
11이들은 엔 도르에서 전멸하여 땅의 거름이 되었습니다.
12그들의 수령들을 오렙과 즈엡처럼, 그들의 제후들을 제바와 찰문나처럼 만드소서.
13그들은 말합니다. “하느님의 목장들을 우리가 차지하자.”
14저의 하느님, 그들을 방랑초처럼, 바람 앞의 지푸라기처럼 만드소서.
15숲을 태우는 불처럼 산들을 사르는 불길처럼
16그렇게 당신의 태풍으로 그들을 뒤쫓으시고 당신의 폭풍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소서.
17주님, 그들의 얼굴을 수치로 가득 채우시어 그들이 당신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18그들이 내내 부끄러워하고 놀라 얼굴을 붉히며 멸망해 가게 하소서.
19그래서 당신의 이름 주님이심을 당신 홀로 온 세상에 지극히 높으신 분이심을 그들이 깨닫게 하소서.
저자는 하느님께 원수들을 향한 여러 형태의 심판을 요청한다. “미디안에서 하신 것처럼”(83,10ㄱ)이라는 표현은 판관 기드온의 이야기를 상기시킨다(판관 7,1-8,21).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미디안 군대를 기드온이 이끄는 삼백 명의 군대를 통해, 그것도 이스라엘군이 직접 싸우지 않게 하면서도 섬멸시키셨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큰 권능으로 섬멸시켜 달라는 것이다. 시스라와 야빈의 사건(83,10ㄴ)은 판관 드보라가 바락 장군과 함께 가나안 임금 야빈과 장군 시스라를 물리친 사건을 상기시킨다(판관 4,6-24). 현재의 원수들을 물리쳐 달라는 요청이 과거 판관시대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현재의 원수들과 과거의 원수들이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으며 동일한 운명을 맞이해야 한다는 생각을 엿보게 한다.
“땅의 거름이 되었습니다.”(83,11)라는 표현은 적군의 시체가 마치 거름을 뿌려놓은 것처럼 땅을 덮었다는 뜻으로, 수많은 적군이 무참하게 죽어 묻히지도 못한 채 버려진 비참한 상황을 묘사한다. 하느님께서 현재의 원수들을 그렇게 징벌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오렙 · 즈엡 · 제바 · 찰문나(83,12)는 모두 기드온과 싸움을 벌인 미디안의 족장들이다(판관 7,25; 8,10). 기드온의 명에 따라 에프라임 사람들은 벳 바라에 이르기까지 요르단 강 나루들을 점령한 후 오렙과 즈엡을 사로잡아 죽이고(판관 7,25) 미디안의 패잔군을 이끌던 제바와 찰문나도 붙잡아 자기 가족들을 죽인 죗값을 물어 처형했다(판관 8,18-21).
계속해서 저자는 하느님께 자연의 이미지들을 활용하여 원수들을 심판하시라고 요청한다(83,14-16). “방랑초”(83,14)는 바람에 굴러다니는 검불더미를 가리키는 명사 ‘갈갈’을 번역한 것이다. “지푸라기”(83,14)는 타작하고 남은 곡식 줄기들(지푸라기, 옥수수 줄기 등)을 가리키는 명사 ‘카쉬’를 번역한 것이다. 두 가지 다 약한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거나 밀려다니는 것으로 하느님의 처벌 앞에서 처하게 될 원수들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곧 원수들이 하느님과 이스라엘을 거슬러 아무리 단단한 동맹을 맺고 교묘한 계획을 세웠다 해도 하느님의 징벌 앞에서는 버텨낼 수 없다는 것이다. ‘불 · 불길 · 태풍 · 폭풍’의 이미지(83,15-16)는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징벌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저자는 하느님께 간청하는 원수들에 대한 징벌과 심판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기도형식으로 드러낸다(83,17-19). 저자는 하느님의 징벌로 원수들이 자신의 한계와 비천한 실체를 깨달아 수치를 당하며 멸망하게 되기를 희망한다(83,17-18). 여기서 저자가 희망하는 원수들의 멸망(83,18)은 그들의 ‘절멸’보다는 ‘악의 종식’을 뜻한다. 그가 바라는 것은 원수들이 주님의 이름을 찾고(83,17)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직관하는 것(83,19)이기 때문이다. 특히 시편 마지막 구절, 곧 “그래서 당신의 이름 주님이심을, 당신 홀로 온 세상에 지극히 높으신 분이심을 그들이 깨닫게 하소서.”(83,19)라는 말을 통해 지금까지 저자가 원수들을 두고 쏟아냈던 저주와 독설이 그들의 회개를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시편 83편은 원수들을 향한 가혹하고 무자비한 저주가 담겨 있지만 보편적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 시편의 핵심은 원수들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하느님의 권능과 영광의 현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의 절대성과 초월성이 세상에 밝히 드러나고 이를 통해 원수들마저도 하느님을 찾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달아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는 희망이 저자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고 있다.
신학적 의미
1) 세상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구원섭리
“하느님, 잠잠히 계시지 마소서”(83,2ㄱ)
우리는 수많은 대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산다. 가족 · 이웃 · 자연 · 사회 · 문화, 심지어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까지 숙고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여러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 ·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서로 생각과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다. 일방적 전달 방식의 관계는 쉽게 무너질 수 있으며, 처음부터 형성이 불가능한 예도 있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관계를 맺는 대상이 사물이거나 무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사람은 인간적인 방식, 곧 말이나 몸짓이 아닌 다른 방식의 대화를 통해 마음을 전달하고 응답을 느끼면서 관계를 유지 · 발전시켜 나간다.
이러한 관계의 특성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비록 하느님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없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그분과 대화를 나눌 수는 없어도 인간은 다른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런데 하느님과의 관계가 뿌리째 흔들리는 경우도 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과의 관계를 단절하려 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거나 그분의 뜻을 알아채지 못해서 발생하게 된다. 많은 경우 ‘하느님께서는 이러이러한 분이시고 이러한 방식으로 응답하셔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인간이, 자신의 이성적 한계와 인간적인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응답해 주시지 않는 하느님을 무관심한 분으로 또는 관계를 단절한 분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 너머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섭리와 그분의 응답을 깨닫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도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께 탄식한 것일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친히 “너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나의 소유가 될 것이다”(탈출 19,5)라고 말씀하시면서 계약을 맺어주셨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원수들에게 멸시받고 억압당하는 데 침묵하실 뿐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현실에서 이스라엘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두 가지였을 것이다. 첫째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 관계를 파기하기로 결심하셨을 가능성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신 백성이 고통을 겪고 있는데 즉각 개입하지 않으실 수 없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하느님께서 어떤 뜻이 있어서 즉각 개입하지 않으실 가능성이다. 이스라엘이 깨닫지는 못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감추어진 섭리를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펼치신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생각은 어느 쪽일까? 이 시편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이스라엘은 두 번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과 자신들의 관례를 영원불변이라고 굳게 확신하고 있었다. 곧 하느님께서는 계속 보이지 않는 당신의 손길을 이스라엘을 위해 안배하신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하느님께 매달리며 구원의 손길을, 원수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간절히 요청한 것이다. 그 마음이 더없이 간절하고 절박하므로 현실을 마치 하느님께서 무관심하신 상황처럼 빗대어서, 원수들에 대한 저주와 독설 형식으로 탄원의 기도를 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믿음을 고백하는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일치 공동체를 이루신 분이며, 반드시 이스라엘을 위해 개입하시고 당신 백성의 구원으로 역사를 섭리하시는 분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한 하느님께 믿음을 고백한다. 저자가 가르쳐 준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결코 무관심하거나 우리의 어려움을 모른 체하시는 분이 아니다. 현상적으로는 그렇게 보이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다 하더라도 우리 편에서 먼저 좌절하거나 하느님을 떠나는 일 없이, 반드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느님께 매달리며 믿음의 끈을 놓지 않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런 믿음을 지닌 그리스도인만이 최종적으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성경이 들려주는 인류 구원의 역사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단 한 번도 당신 백성을 향한 구원의 손길을 거두신 적이 없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먼저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 살길을 찾아 나선다. 그래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그릇된 길을 되돌리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며, 스스로 그분을 떠나 길 잃은 양이 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2) 악을 대하는 신앙인의 태도
“그들이 내내 부끄러워하고 놀라 얼굴을 붉히며 멸망해 가게 하소서”(83,18)
한번쯤 미워하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하거나 그가 곤경에 처해 나를 괴롭게 한 대가를 받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직접 나를 괴롭힌 대가를 치르게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럴 때 신앙인은 하느님께 자신의 억울하고 괴로운 처지를 하소연하면서 곤경 중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한다.
원수들에게 억압을 받으며 존립의 위기에 처해 있는 이스라엘도 하느님께 원수들의 죄악을 고발하면서 그들에 대한 철저한 보복을 요청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기도에는 간과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 곧 하느님께 청하는 보복이 원수들의 완전한 절멸이 아니라 그들의 회개와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바라는 원수의 멸망은 죽음이 아니라 자만과 죄악의 끝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수 앞에서 하느님의 백성이 취해야 할 신앙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이스라엘은 자기네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 회개를 목적으로 하듯, 이스라엘의 원수에 대한 하느님의 보복도 회개가 목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보다도 더 적극적인 사랑의 실천 의지를 담고 있는 생각이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사랑의 실천보다는 완전한 파멸을 목적으로 한 보복이 자주 자행되고 있다. 그것도 자기네가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정의를 실천한다는 명목으로 말이다. 테러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전쟁도 불사하고 적대 국가를 악의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선제 공격하여 파멸시키는 행위가 정당화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상대방을 악의 세력이라고 규정하면서 보복을 자행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와 달리 이스라엘이 열망하는 하느님의 보복은 원수들을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를 부끄러워하면서 스스로 죄악을 근절하게 만드는 것이다(83,17-18). 악한 마음과 행위가 종식되고 세상 모두가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이 유일한 주님이며 구원자이심을 깨닫는 날이 바로 하느님의 보복이 실현되는 날이다. 이스라엘은 그날을 애타게 기다리며 하느님의 개입을 온 마음으로 간청하고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기도는 악에 맞서는 신앙인의 참된 마음과 태도의 본보기를 제시해 준다. 악은 반드시 멸절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그에 물든 사람은 하느님 구원의 대상임을 잊지 말라고 충고한다. 따라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악한 세력들 앞에서 하느님의 철저한 보복을 간청하되, 악인의 멸망이 아니라 회개와 구원을 위한 기도를 바쳐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이 시편에서 이스라엘이 기도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마음에서부터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의 회개를 위해 주님께 기도해야 한다. 그렇다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기도를 바칠 수 있을까? 잠시 침묵 중에 마음으로 그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기도를 바치는 시간을 갖다.
시편 91편 교훈적 신뢰를 담은 순례시편 - 여정의 길에서
순례 시편(시편 15; 84; 91; 122편 참조)은 성전 문 앞에 이르러 주님의 현존 앞에 서있다는 가슴 벅찬 기쁨을 노래한다. 기쁨의 환호가 절로 터져 나온다. 시편 84편의 시작은 이러하다. “만군의 주님 당신의 거처가 얼마나 사랑스럽습니까!”(2절) 시편 122편은 또 이렇게 노래한다. ““주님의 집으로 가세!”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네”(1절). 모두 성전을 두고 기쁨을 표현한 것들이다.
기쁨은 독백의 형태로 홀로 뿜어져 나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성전 안에 있는 이들, 곧 사제 또는 레위인들과 순례 여정을 마친 이들 사이에 나누는 인사말에도 나타난다. 다시 시편 84편을 보면 이러하다. “행복합니다, 당신의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늘 당신을 찬양하리니. 행복합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을 생각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5-6절) 시편 저자는 순례하는 이와 성전에 있는 이 모두가 기쁨에 겨워한다는 사실을 노래한다.
그렇다고 순례시편이 단순히 기쁨만 노래한다고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성전 문 앞에서 ‘가르침’이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전으로 순례를 떠나는 이들이 모두 성전 예식과 문화에 대해 올바른 정보와 이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미카 6,6-8 참조). 그래서 그들에게는 가르침이 필요했다. 시편 15편이 전형적인 성전 앞에서의 가르침을 보여준다.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 누가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지낼 수 있습니까?”(1절) 이 물음에 이어 시편은 누가 성전에 합당한 이들인지에 대해 설명한다 “흠 없이 걸어가고 의로운 일을 하며…” 시편 84,12과 122,4-5이 이러한 성전에서의 가르침을 담아내는 시편들이다.
또한 순례시편은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순례 온 이들이 바치는 기도 장면도 보여준다(시편 84,9-10; 122,6-9 참조). 기도에 대한 예루살렘 주민들의 화답이 순례 온 이들에 대한 찬미 형태로 드러나는 것도 인상적이다(15,5ㄷ; 84,13; 9110-13 참조).
성전으로 향하는 순례의 발걸음은 대부분 성전에서의 축제, 곧 파스카,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을 중심으로 펼쳐졌고, 그 순례의 여정을 기쁨으로 노래하는 것이 순례시편이다. 탄원시편과 감사시편이 하느님의 업적을 노래하는 것이라면 순례시편은 하느님께 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편단심을 드러내는 신뢰의 노래이다.
대부분의 시편이 저자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거나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데, 시편 91편은 조금 다르다. 시편 91편은 어떠한 사람이 하느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원할 때 옆에서 조언하며 격려해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신학자들은 이 시가 공동제사 상황 속에서, 성전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제사장이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확신시켜줄 때 사용했다고 보고 있다.
그것은 4절에서 ‘네가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라는 문구에서 날개가 연상시키는 것은 하느님의 계약의 궤였고, 하느님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자들을 하느님께서 품어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시편은 1절부터 13절까지는 하느님의 보호 아래 마무르는 자가 누리는 안전함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14절부터 16절까지는 하느님의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자들에게 성전 제사장이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
1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호 속에 사는 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에 머무는 이는
2주님께 아뢰어라. “나의 피신처, 나의 산성이신 나의 하느님, 나 그분을 신뢰하네.”
3그분께서 새잡이의 그물에서 위험한 흑사병에서 너를 구하여 주시리라.
4당신 깃으로 너를 덮으시어 네가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 그분의 진실은 큰 방패와 갑옷이라네.
5너는 무서워하지 않으리라, 밤의 공포도 낮에 날아드는 화살도
6어둠 속에 돌아다니는 흑사병도 한낮에 창궐하는 괴질도.
7네 곁에서 천 명이, 네 오른쪽에서 만 명이 쓰러져도 너에게는 닥쳐오지 않으리라.
8오히려 네 눈으로 바라보리라. 악인들이 벌받음을 너는 보리라.
9이는 네가 주님을 너의 피신처로, 지극히 높으신 분을 너의 안식처로 삼았기 때문이다.
10 너에게는 불행이 닥치지 않고 재앙도 네 천막에는 다가오지 않으리라.
11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12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13 너는 사자와 독사 위를 거닐고 힘센 사자와 용을 짓밟으리라.
14 “그가 나를 따르기에 나 그를 구하여 주고 그가 내 이름을 알기에 나 그를 들어 높이리라.
15 그가 나를 부르면 나 그에게 대답하고 환난 가운데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며 그를 해방하여 영예롭게 하리라.
16 내가 그를 오래 살게 하여 흡족케 하고 내 구원을 그에게 보여 주리라.”
시편 91편은 먼저 주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1-13절), 그 삶으로 인해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약속(14-16절)을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시편 90편과 92편의 내용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시편 90편에서는 주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그분의 축복과 호의를 간구하고, 시편 91편에서는 그 간구에 대한 응답을 구원 신탁을 통해 확증하며, 이어지는 시편 92편에서는 기어이 이루시고야 마는 주님의 구원 업적에 대해 찬양을 드린다. 그래서 시편 91편은 주님께 대한 신뢰와 그로 인해 체험한 주님의 보호라는 커다란 두 축의 흐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시편 90편과 92편에는 제목이 있는 반면, 91편에는 제목이 없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90편과 92편과의 연결성 안에서 읽어야 한다). 시편 91편의 내부 구조 안에서도 우리는 이런 흐름을 볼 수 있다. 주님께 대한 신뢰를 온전히 드러낼 때 주어지는 선물은 주님의 보호이고, 이 보호는 무엇보다 주님이 ‘나의 안식처’이심을 확증하는 것이다. 주님을 벗어나면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지고 저녁에 시들어 말라버리는 풀과도 같은 삶이 주어질 뿐이다(90,6). 그분 안에 있으면 오래오래 살아 그분의 구원을 볼 수 있으리라 희망하는 것이 바로 주님께 진실되어 의탁하는 이의 삶이다(91,16).
“전능하신 분의 그늘”(1)
시편 91,1의 특징은 하느님을 부르는 다양한 호칭들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전능하신 분”, “나의 피신처”, “나의 하느님”. 이 호칭들이 사용되는 다른 시편 구절들을 살펴보면, 주님의 크나큰 능력과 그 능력으로 인한 신적 보호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눈에 뛴다(시편 18,3; 46,5; 47,3; 68,15 참조). 아마도 이러한 호칭들을 한꺼번에 쏟아내는 시편 저자의 마음에 자리잡은 생각은 딱 하나, 그분만을 신뢰하여 그분의 보호 아래 머물겠다는 뜻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피신처’라는 말마디에 주목해야 한다. 이 피신처는 주님의 ‘그늘’ 아래 머무는 것인데, 그늘이라는 말마디는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계약 궤 위에 장식된 커룹의 날개를 연상시킨다. 주님의 그늘을 나의 피난처로 삼겠다는 것은 주님의 현존에 나의 자리를 만들겠다는 뜻이다. 그 의지는 ‘머무르다’ 동사와 함께 이해해야 한다. 머문다는 것은 기다림을 위한 ‘지속적 시간’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민수 22,7-13을 보면 모압의 대신들이 발라암의 말을 듣기 위해 하룻밤을 머무른다. 1열왕 3,4-5에는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머무르는 장면이 나온다. 모두 주님의 뜻을 듣기 위해 ‘머물고 있다’.
시편 91편에서는 주님의 그늘 아래 머무는 이유가 시편의 끝 부분에 나타나는데, 곧 구원 신탁을 듣기 위해서다. 사실 ‘피난처(마흐세)’, 그리고 ‘산성(므추다)’이라는 말마디는 다분히 군사적 용어로 인식된다(시편 18,3; 61,4 참조). 시편 저자가 피난터와 산성을 언급하는 것은 원수들의 군사적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의탁하여 그분의 강력한 보호를 간구하고 그 응답을 듣고자 한다. 시편 저자의 유일한 외침이 “나 그분을 신뢰하네.”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91,2). 신뢰의 가시적 표현이 전능하신 분의 그늘, 곧 성전이라는 하느님의 현존으로 달음질쳐 나아가는 것으로 드러난다.
“너는 무서워하지 않으리라”(5)
성전으로 가는 길은 위험천만했다(시편 91,5-6). 밤의 공포, 낮의 화살, 흑사병, 그리고 괴질…. 그러나 이보다 더 위험하고 지독한 것은 이방민족들의 괴롭힘이다(여호 23,13 참조). 이러한 위험요소들은 ‘신적’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밤의 공포”에서 ‘공포(파하드)’는 단순히 자연적인 위협이 아니라 야훼께 맞서는 신적인 존재들이 꾸미는 위협을 가리킨다. 그리고 “낮에 날아드는 화살”은 라삐 전통에서 ‘날개달린 악마’로 해석되는 말마디다. 구약 전통은 “흑사병”과 “괴질” 또한 하느님께 맞서는 악마의 세력으로 이해한다(호세 13,14 참조). 따라서 성전으로 가는 여정에 드러나는 모든 위험요소는 결국 악의 세력에 대한 묘사다. 그러나 악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주님의 보호가 이 모든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한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악의 위협이 천 명을 쓰러뜨리고 만 명을 쓰러뜨리더라도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에게는 전혀 무서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시편 91,7; 참조: 여호 23,10). 악은 그렇게 쓰러져 가고 악인들은 결국 벌을 받을 것이다. 시편 91,3-7의 약속에 대한 보상이 8절에서 드러난다. “오히려 네 눈으로 바라보리라. 악인들이 벌 받음을 너는 보리라.”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라”(11)
주님께 피신처를 두는 이가 누릴 응답은 ‘모든 길’에서 지켜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이다(시편 91,11). 이 약속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걷는 것’과 관련된 단어들이 열거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길’, ‘네 발’, ‘거닐고’, ‘짓밟으리라’. 우리는 이 동사들에서 ‘행렬’을 떠올릴 수 있다.
성전으로 향하는 발걸음, 곧 그분의 거처이자 시편 저자의 피신처로 나아가는 행렬을 암시하는 이 표현들은, 성전으로 가는 여정은 그 어떤 것에도 해를 입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다. 성전으로 가는 행렬은 행여 돌에 다칠세라 떠받들어져 나아가는 행렬이고 사자와 독사, 심지어 용의 위협에도 꿋꿋이 나아갈 수 있는 행렬이다.
그 어떠한 위험 속에서도 안전할 수 있는 이 행렬을 우리는 탈출기에서도 볼 수 있다. “너희는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무엇을 하고 어떻게 너희를 독수리 날개에 태워 나에게 데려왔는지 보았다”(탈출 19,4). 그리고 이사야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사자나 천사가 아니라 그분의 얼굴이 그들을 구해 내셨다. 당신의 사랑과 당신의 동정으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이사 63,9).
시편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여정 속의 보호는 결국 주님의 보호이며, 그 보호는 어떠한 힘도 맞설 수 없는 강력한 것이다. 사실 발에 차이는 돌이나 사자, 그리고 도사는 성전으로 가는 여정에서 맞닥뜨릴 수 있는 사실적 위험요소들이지만, 사자(커피르)와 용(타닌)은 신화 속에 나오는 악마의 존재를 드러내는 말마디다. 주님께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비단 현실적인 어려움만이 아니다. 하지만 영적 어려움, 세상에 펼쳐진 수많은 악의적 가치관의 혼재 속에서도 우리는 주님의 피신처로 묵묵히 나아갈 수 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주님의 보호를 신앙인의 수동적 자세로 환원시켜서는 안 된다. 그분이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서도 안된다. 구약성경을 통틀어서 바로 이곳, 시편 91,13에서 인간이 힘센 사자와 용을 짓밟고 있다. 신적 권능으로나 가능한 ‘짓밟는 일’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주님의 배려 덕분이다. 주님은 장애물을 치워주시는 분이 아니라 장애물과 맞서서 이길 수 있게 해주시는 분임을 시편은 노래한다.
욥기에 나타나는 욥의 경우가 그러하다. 온갖 어려움에 맞서 울고 떼쓰고 욕하며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욥, 그는 결국 그 어려움의 끝에서 참된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위엄 앞에 무릎을 꿇는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도 마찬가지다. 유혹을 피해 가시는 것이 아니라 유혹의 자리에서 한껏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 역시 한 인간의 모습으로 주님의 보호를 노래하는 시편91편의 말씀을 통해 유혹을 이겨내신다(루카 4,10-12 참조). 맞설 수 있는 용기야말로 주님의 피신처로 나아가는 우리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특별한 보호 방법이다.
“내 구원을 그에게 보여주리라”(16)
이제 주님이 직접 말씀하신다. 주님의 응답이 더욱 확실한 방법으로 시편 저자에게 주어진다. 그 응답은 ‘구원’이다. 환난 속에서도 해방을 알리며 영예로움을 선사할 것이고, 오래 살게 하여 구원을 보여주시리라고 주님은 약속하신다(시편 91,15-16ㄴ). 주님이 이토록 확실한 응답을 하신 이유는 분명하다. 그가 그분을 사랑하여 따르고(하샥. 우리말 성경에는 ‘따르다’로 번역되어 있지만, 이 동사는 ‘사랑하여 갈망하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분의 이름을 알기(야다) 때문이다(14절). ‘사랑하다’와 ‘알다’ 동사는 주님과의 ‘계약’을 가리킨다. 주님이 당신 백성을 사랑하셔서 보호하시고 거기에 대한 응답으로 백성들이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신명기와 신명기계 역사서 전체를 흐르는 계약사상의 단면이다(신명 6,4-5; 7,7-8; 10,15 참조). 주님의 계명에 충실한 자에게 주님의 구원이 주어짐은 시편 119,116에서도 볼 수 있다. “주님, 저는 당신의 구원을 바라며 당신의 계명을 실천합니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 곧 계약의 관계는 그분과 오래 살 수 있는 신적 삶의 반열로 우리를 초대한다.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서간은 이렇게 말한다. “몸의 단련도 조금은 유익하지만 신심은 모든 면에서 유익합니다. 현재와 미래의 생명을 약속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이들의 구원자이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 우리가 희망을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1티모 4,8-10). 주님과의 신뢰 가득한 삶이 곧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삶과 맞닿아 있고 현재와 미래의 생명을 보장해 준다. 구원의 자리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그분께 간구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선물이다. 그분이 지금 당신의 입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그를 오래 살게 하여 흡족케 하고 내 구원을 그에게 보여 주리라.”(시편 91,16).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지, 구원을 당하고 외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신앙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정을 통한 다양한 체험이 우리를 웃게 하거나 울게 할 때가 있는데,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놀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극단적일까? 그 놀이가 어찌 달콤하기만 하겠냐마는 무던히 애써서 끝나갈 즈음에 ‘참 잘 했어요.’라고 말씀하실 하느님을 떠올린다면 매번, 매 순간 놀이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