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방가사 경창대회 관람
최옥분
며칠 전 가사작가 권숙희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안동 내방가사 경창대회가 9월30일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한다. 전화 해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사정이 있어서 갈 수 없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기회를 놓치는 게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권 선생님께 전화를 드려 경창대회에 가겠다고 하니, 내일 팔달 역에서 만나 일행들과 함께 가자고 했다.
권 선생님과는 두 번째 만남이지만 내방가사를 통해 서로가 공감하니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처음 본 일행들도 낯설지가 않고, 이웃집 사람들과 언니처럼 스스럼없이 함께 차를 타고 안동으로 갔다.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시청후문에 있는 식당으로가 안동고등어 정식을 시켰는데 반찬과 밥이 푸짐하게 나왔다. 아주머니 음식솜씨가 좋아서 모두가 맛있다고 칭찬 일색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듯이 커피까지 대접받고 부른 배를 안고 행사장으로 갔다.
안내 데스크에서 ‘전국내방가사경창대회 원고모음집’1권을 받고 무대 앞 가까이 가 앉았다. 잠시 뒤 환영사와 격려사에 이어서 경창대회가 시작되었다. 참가자 대부분이 연세가 드신 어른들로 보였다. 참가자는 20명으로 낭독시간은 3분이 주어졌다. 심사원들의 심사가 진행되고, 낭송가의 낭낭한 목소리로 구수한 옛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어매 일생가’와 ‘사친가’는, 애절하게 읊어 목이 메어 눈시울이 뜨거웠다.
‘시어머니 인생회고가’는 일제속국시대 처녀공출을 안 보내려고, 부모님이 14살 어린 딸을 이웃마을 18살 총각에게 시집보냈다. 아들 낳고 알콩달콩 살고 있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남편은 입영영장 받아 전쟁터로 갔다. 대구전투에서 폭격을 맞아, 대구병원에 있으면서 아내에게 어린 아들을 데리고 면회 오라고 편지를 했는데 차비가 없어 시어머니만 갔다. 남편은 마누라와 아들이 보고 싶은데, 어머니만 오셨냐고 했다. 끝내 아내와 아들은 보지도 못하고 일주일 만에 전사통지를 받았다는 시어머니의 사연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었다.
내 아버지도 육이오 참전을 했다, 언니가 태어나고 입영을 했는데, 휴전선 근처 철원 수색대에서 전쟁을 하다 부상을 입고 경주 통합병원으로 후송 되었다. 엄마가 언니를 업고 남사골재를 넘어 날마다 면회 다닌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다행이 아버지는 살아오셔서 내가 태어난 것이다. 내방가사를 통해 가슴 아픈 전쟁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모두의 아버지들의 이야기에 눈시울을 적셨다.
함께 간 곽 선생님은 창작 내방가사를 지어 장려상을 받았다. 곽 선생은 어릴 때 집안 아재가 자주 오셔서, 호롱불 아래에서 읽어주던 ‘한양가’와 ‘단종애사,’ ‘여한가’를 들으면서 자랐다고 한다.
처음 경창대회가사 낭송을 들으며 내 유년의 기억이 떠올랐다. 구성진 가락 속에서 큰엄마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며, 어린 내 모습과 오버랩 되었다. 큰엄마는 한가한 시간이면 가사를 읽으셨고, 나에게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육십갑자를 가르쳐 어른들 앞에서 앵무새처럼 외웠던 기억이 살아났다.
내방가사를 알게 된 것은 지난여름, 국립대구박물관에서 ‘내방가사 이내말삼 들어보소’ 전시회를 보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내방가사는 조선시대 주로 영남지방의 여성들에 의해 우리말과 한글을 활용하여 일생회고가와 시집살이가, 화전가, 교훈가, 등을 창작하고 향유한 세계적인 여성문학 작품이다. 여인들이 주체적으로 자신들의 생각과 정서를 두루마리에 적어서 낭송을 하며 향유하는 과정에서 좋은 글은 필사하여 서로 공유하였다.
‘초기에는 여성에게 유교적 가치관을 전파하기 위해 계녀가 중심으로 창작되었지만, 이후 다양한 소재와 3.4또는 4.4조의 정재 된 운율을 갖춘 형식으로 발전 하였고 개항 이후에는 민족적 가치와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의 가사까지 다양한 내용으로 발전하였다.
내방가사는 전승과 낭독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한국 여성문화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주는 기록물로 강력한 남성중심사회에서 여성들이 한글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삶과 애환을 들어내고 있다.‘ 1)고한다.
행사가 끝나고 일행은 내방가사의 원로이신 박명임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연세가 구십 세 라도 정정하셨다. 그분은 ‘애향가,’ ‘만감지회가,’ ‘소회가,’ 등을 창작하시고 낭송도 하시어 많은 상을 받으신 분이셨다. 집에 가니 창작가사와 필사하신 가사 두루마리가 사과박스에 가득했다. 박 선생님이 읽어주시는 ‘천등산화전가’ 가사낭송을 듣고, 나도 ‘효행가’ 낭송을 따라해 보았다. 가사 두루마리에 기름 먹이는 방법도 배웠다. 생 들기름을 소금 넣지 말고 짜서 솜에 묻혀서, 글 쓴 두루마리에 삼각점으로 드문드문 조금씩 찍어놓으면, 기름이 번져서 부드러운 기름종이가 되어 질기고, 오래 보관할 수가 있다고 하셨다. 많이 바르면 종이가 부서지니 적당히 발라야 한다는 주의도 주셨다.
권숙희 선생님은 상자에 든 가사를 하나하나 체크하고 사진도 찍었다. 창작가사도 있지만, 필사본이 더 많았다. 같은 것이 두 개인 가사는 하나씩 가져가도 된다고 허락해서 선생님의 ‘일생일기’와 달력 뒷장을 재단해 쓴 ‘윷 풀이’가사 2점을 얻어왔다.
박 선생님은 저녁밥을 지어 주시려고 했지만, 선생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안동찜닭을 시켜서 맛있게 먹었다. 시간은 벌써 저녁8시가 지났다. 늦어서 이제 가야겠다고 하니, 누추하지만 어두운데 가지 말고 같이 자고 내일 밝은 날에 가라고 큰엄마처럼 걱정하시며 간곡히 붙드셨다. 그저께 까지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행보가 마치 꿈속인양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이었다.
내년에는 경창대회에 참가 해보란 권유도 받았다. 정말 꿈같은 하루였다 고향 큰어머니를 찾아뵙고 오는 기분이다 가방엔 귀한 선물 2점까지 안고서
1) ‘내방가사’ 한국국학진흥원장 조현재 / 발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