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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2동 성당에서 이루어진 구약입문 강의에 참석하였습니다. 강의 전 거룩한 성시간에 참여할 수 있어서 더욱 뜻깊은 시간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강의 시작하시면서 며칠 전 선거에 참여하기에 앞서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시고 임하셨는지 물으셨어요. 여러 교우분들이 그렇게 하셨다고 답하셨어요. 손을 들어 대답하지는 않았지만 저 역시 그런 기도와 함께 투표를 하였던 것 같습니다. 신부님 강의를 열심히 듣고 배우니 자연스레 변화된 저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육적인 존재인데, 영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육적으로도 건강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영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도 건강해야 합니다. 종교적인 문제에서나 세속적인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문제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는 훈련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그것이 중요합니다.
신부님은 요즘에 "아버지의 뜻"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시고 계시는데, 뜻이란 말은 영어로 WILL이라고 합니다. will은 뜻이라 말할 수도 있고 의지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내 앞에 어떤 의지? 어떤 뜻이 있고 어떤 기대가 있는지, 어떤 꿈이 있느냐에 따라, 그 의지를 알아듣는 것,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영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난 시간에 성경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무엇보다도 "성령의 영감을 받아"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구원의지를 알아볼 수 있어요. 그것들을 알아듣는 과정 안에서 많은 사회적인 사건들과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부님이 학생신부로서 로마에서 공부하실 때 이탈리아 친구 신부님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러 가곤 하셨대요.
어느 날 미사 맨 앞줄에 까만 정장을 입은 남자분들이 두 줄 정도 꽉 차게 서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 본당신부님께 물어보니 "그들이 바로 마피아야." 하고 대답하셨어요.
미사 후 학교에 돌아오시는 길에 세상 안에서 우리도 역시 그들처럼 좋지 않은 많은 일들을 하면서 일상을 보내다가 주일에는 미사를 드리며 살아가는 모습도 있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세상 안에서 해야 할 일들이 참 많다고 느끼셨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분명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모습만은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성서기자의 인간적인 관계, 역사적인 관계, 문화적인 관계에 영향을 받는 것 같고, 따라서 우리는 그 성경 텍스트 문자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 너머의 하느님께서 성서 기자에게 주시는 영감이 무엇인가를 오늘의 언어, 우리 시대의 언어로 어떻게 해석될 것인가? 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마치 우리 공동체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처럼.
성경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구약, 그리고 신약
구약과 신약은 용어로써 계약 신학의 관점에 있는 것 같고 성경 전체를 계약 신학으로 모두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계약 신학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았을 때는 구약과 신약으로 표현할 수 있어요.
구약 : 옛 계약(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
장소 : 시나이 산(이집트를 탈출하고 난 후)
내용 :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약속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율법(torah)을 지킬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땅이라는 것에 문학적인 개념은? 그 안에 생명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에서 생명을 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부활하셨을까요? 하느님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나는 너희가 생명을 누리기를 바란다." 하십니다.
거의 매년 빠지지 않고 나오는 영화의 장르가 있습니다. 바로 좀비영화예요. 좀비는 시체, 죽은 사람들로 살아있는 사람들을 잡아서 죽은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죠. 그런 좀비 영화에서 느껴지는 건 지금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시체처럼 의미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메시지를 주는 것 같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이스라엘과 계약 사건과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가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신약 : 새 계약(하느님과 교회가 맺은 계약)
장소 :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내용 : 하느님은 새 백성인 교회에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고, 교회인 우리는 복음을 읽고 따르는 것을 약속한 것입니다.
구약에 땅이 있다면 신약은 하느님 나라가 있고, 구약에 생명이 있다면 신약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구약에는 율법이 있다면 신약에는 복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복음을 읽고 따르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속해서 질문해야 하고 계속해서 새롭게 깨달야 할 문제입니다.
지난 시간에 시각적인 구도에서 강의해 주셨다면 오늘은 텍스트에 관하여 말씀해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은 모두 46권인데 그중에 5권의 책인 오경이 있고 뒤따라 역사서가 있습니다.
오경과 역사서는 산문문학이에요. 물론 이스라엘이 갈대바다를 건너와 모세의 노래나 미르얌의 노래는 시문학에 해당하지만 전체적인 부분으로 산문문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타락과 폭력으로 변질한 모습에 후회하시지만,
노아와 노아의 방주 그리고 바벨 탑이야기 이후 새로운 시도로 부르신 성조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 성조들의 시기.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이집트로 가고 그곳에서 잘 지내는가 싶었지만 파라오가 그들의 후손을 억압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떠나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었지만 4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고 결국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와서 판관시대를 지내게 됩니다. 그 판관시대를 지낸 후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왕국을 이루게 하셨는데 사울이 첫 번째 임금으로서 성공하지 못하였고 다윗과 솔로몬의 시기에 와서 이스라엘이 크게 번영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죽고 나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라지게 됩니다. 몇 명의 하느님께 충실한 임금들도 있었지만 많은 임금들이 하느님께 충실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이 주전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하고 남유다는 주전 587년에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멸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서 50년 정도의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들은 멋진 나라를 꿈꿨지만 잘지내지 못하고 빨리 종말이 와서 이 세상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때 이스라엘 안에서 혁명이 일어나는데 바로 마카베오 혁명입니다. 마카베오 혁명과 함께 다시 하느님의 백성이 나라를 세우고 주전 70년경에 마카베오 혁명과 함께 생겨난 하스모니아 왕조가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로마제국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역사서의 내용입니다.
세상 창조부터 예수님 오시기 30년전(주전 30년 전)까지의 역사를 모세오경과 역사서에서 읽는다고 합니다.
구약성경의 전반부는 모세오경과 역사서이고 후반부는 시서와 지혜문학 그리고 예언서입니다.
시서와 지혜문학과 예언서는 구약의 시대적인 배열이 있는 것 같아요.
시서에 앞서서 나온 첫 번째 책은 욥기입니다.
욥(히브리 말:히오)은 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오래된 인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말로 욥의 이름은 히오인데 을지문덕과 같은 이름으로 오래 전의 어감을 느끼게 하는 이름입니다. 요즘에 누가 아들을 낳고 을지문덕이라고 짓는 경우는 없어요. 신부님의 앞전 세대의 여성들의 이름에서 자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처럼.
그렇게 히오는 고대의 이름입니다.
욥기를 시문학이라고 하는데 시문학에서 떠올리는 첫 번째 인물은 다윗이에요. 시편 하면 다윗이 떠오르고 뒤따르는 지혜서는 솔로몬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다음에는 예언서가 나오는데 예언서도 역시 시대순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전 8세기의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전 6세기 중반, 에제키엘은 주전 6세기 후반의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12소 예언서들도 시대순으로 배열된 느낌입니다.
구약 성경은 앞부분은 산문문학이고 뒷부분은 시문학입니다. 앞부분과 뒷부분에서 각각의 내용을 꼭 맞추지는 않았지만 시간적으로 배열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입니다.
구약 성경 46권 중에서 제일 중심이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시나이에서 계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키라고 하신 율법(torah), 오경을 히브리 말로 토라라고 합니다. 저희가 보통 성경 통독을 할 때 탈출기 20장에 십계명이 나옵니다. 그러고 나서 레위기 전체가 계약이고 민수기 10장까지 계약의 내용입니다. 그 부분의 내용은 법전인데 그것을 재밌게 읽으실 분은 없을 거예요.
일반적으로 심심해서 율법전서를 읽겠다고 하실 분들은 없을 실 겁니다.
저희가 일반적으로 쉽게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창세기부터 탈출기 20장의 십계명 전까지 그리고 민수기 11장부터 끝까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는 연설문이고 법전의 내용이 있습니다.
모세오경은 이야기와 법텍스트라는 것인데, 법텍스트는 읽기가 쉽지 않아요.
따라서 오늘날 어느 본당 신부님께서 법의 내용을 빼고 이야기 부분만 읽어도 되지 않아요? 하고 물으신다면 그렇게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우선 우리가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텍스트부터 읽으셔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성경에서 그 부분을 없애버리고 지우자고 하시면 두 손 들고 반대를 하시겠지만 신자들이 통독을 하는 경우에는 가능하다고 하셨어요.
하지만 유다인들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유다인들은 구약의 백성으로 그들은 이야기 부분과 함께 읽어가면서 그러니까 그런 연유로 이런 법전이 나온 거야.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고, 유다인들은 그 법전 부분에 굉장히 많은 공을 들입니다. 하지만 그들도 법전을 문자적으로만 보지는 않습니다.
그 문자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한 일을 랍비들이 합니다. 하지만 랍비들의 토라 해석도 각각 다릅니다. 유명한 힐렐과 삼마이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겁니다.
또는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에서 그들을 파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일정한 텍스트에 관해서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의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유다교에서는 전승되는 역사 안에서 자신들의 법전, 토라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좀 체계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후 2세기경에 미슈나란 책이 있었고, 세월이 지나 그것으로 부족해서 미슈나와 토라에 대한 해석을 모아서 5세기경에 나온 책이 바로 탈무드입니다.
여러 책 중에서 간추린 토라, 미슈나, 탈무드 중에서 2025년 유다 랍비들에게 중요한 책은 무엇일까요? 탈무드입니다.
오경이 유다교에서 갖고 있는 위상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설명하셨어요.
오경의 법전, 탈출기 20장의 십계명에서 민수기 10장까지 아우르는 법전이 유다교회 구약성경의 텍스트 안에서 중심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토라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무엇일까요? 하고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명기 6장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반면에 그뿐만이 아니라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말씀으로 이 두 가지가 더해 핵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해서 신부님께서 학문적인 관점에서 토라 전체의 중심에 있는 말씀으로 보는 것은 레위기 19장에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경 전체에 가장 중심에 있는 부분으로 여겨집니다.
유다교에서도 오경은 첫번 째이고 그리스도교에서도 오경은 첫 번째입니다. 오경 중에 첫 번째 책은 창세기입니다.
창세기는 1장부터 50장으로 쓰여졌는데,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1장은 창조에 대한 이야기
12-50장은 성조에 대한 이야기로 볼 수 있겠습니다.
창세기 1,1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일종의 제목입니다. 이 제목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제목인가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이 다릅니다.
1장 1절부터 2장 4절까지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고, 1장부터 11장까지의 제목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고, 창세기 1장부터 50장까지의 제목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 전체의 제목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의 의견들을 통해 보시는 신부님의 견해는 다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은 다르게 창세기 1장 1절~ 2장 4절까지를 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하느님께서 한 처음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의미를 우리가 너무 좁게 해석해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하늘과 땅으로 국한해서 바라본다면, 그것은 저자의 의견과 맞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늘과 땅이라 말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온 세상을,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하느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화성도 안드로메다도, 저희가 알 수 없는 모든 행성의 기원도, 그러한 광활한 우주에 태양계에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신비에 관해서 묵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느님의 창조가 한 개인이 있기 전에 이 세상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꼴값이 있습니다. 꼴에 해당하는 말은 영어로 form이라고 합니다. 어떤 설계 도면에 장르를 만드는 사람의 아이디어가 무엇이 될지 알 수가 없었다는 의미. 꼴을 갖추지 못한 상황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프랑스 작가 중에 장 콕토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그의 시중에 "오늘 아침에도 태양이 떠올랐다."... 시의 제목이 권태입니다.
대치동 공동체가 공동체이기 위해서는 함께 꾸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이라면 대치동 공동체가 꾸는 꿈이 하느님의 뜻과 맞닿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치동 공동체뿐만 아니라 모든 본당 공동체, 한반도 전체에 이루고 있는 국가 공동체의 꿈이 있는 것입니다. 전 세계의 모든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이 지향하는 바는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이었습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나라를 이루겠다는 뜻으로 그런 이상을 꿈꾸었던 의지였습니다.
꼴을 갖추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생각하면서 누군가가 아직 젊은이인지 아닌지에 대한 구별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함께 있으면서 옛날이야기를 하는 분은 젊지 않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고 함께 있으면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젊은것이라고 합니다. 중학생들이 모여서 초등학교 때의 일을 이야기하지는 않잖아요.?!
신부님도 60대 중반의 무렵을 지내시면서 70대, 80대에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에 대해서 꿈꾸고 계획하신다고 하셨어요.
근래에 삼대의 가족분들이 신부님께 찾아오셨는데, 아이가 사춘기를 힘들게 겪고 있었어요. 아이에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너의 지금이 힘들지? 신부님이 부모님이 힘들게 하면 혼내줄게.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자, 너희 아빠 엄마도 부모의 역할을 처음 해보는 거란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그러시고..."
신부님도 사목을 하시면서 처음인 60대의 지금을 보내면서 할아버지 신부님 소리를 듣지 않으시려고,... 처음해 보시는 지금을 우리 각자가 처한 지금의 매 순간이 최초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한편으로는 겸손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흥미진진하게 꿈꿀 수 있어야겠어요. 여러분들 빨리 늙지 마세요! 꿈꿀 수 있는 내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셨으면 해요!"
두 번째로 비어있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공허했다는 의미.
우리가 그리워하는 분 중에 김수환 추기경이 계시죠? 김수환 추기경님이 늘 말씀하셨던 것들 중에 "여러분들 자기 자신을 비우십시오." 하셨습니다. 비운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 것이 아닌데....
김수환 추기경님은 저희에게 저희 자신을 비우라고 하셨어요. 어떤 의미일까요? 그 양면성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 중에서 외로움이라는 말도 있고, 홀로 있음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외로움이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것 같아요. 하지만 홀로 있음은 부정적이지 않은 것 같아요. 영어 단어 중에 loneliness가 있고 isolated가 있어요. 같은 양상인데 다른 것이에요.
외로움에 반해 홀로있음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신부님 주변의 많은 분들이 불행해하신다고 해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홀로 있고 싶고 혼자 있을 때는 외로워요...ㅎ
그리고 신부님 주변에는 행복한 분들도 많이 있어요.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는 함께 있는 즐거움으로, 홀로 있을 때는 그때의 즐거움으로...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나의 홀로있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나의 함께 있음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에 대한 우리들의 선택.
비어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비어있음이 무언가에 대한 기대, 채움으로 비어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쁘지 않아요. 추기경님의 비우십시오는 내 안의 좋지 않은 것들을 비우라는 말씀.... 내 안의 있는 분노, 탐욕과 같지 좋지 않은 것들을 비우고 그 안에 좋은 것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 이웃을 사랑하고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들로 채우기 위해 비우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표현을 우리가 속해있는 로마 가톨릭에서는 자주 쓰지 않지만 동방교회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그리스 말로 kenosis(비어있음)
그 비어있음은 하느님에 대한 뜻에 대한 비어있음입니다.
하느님, 아버지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라는 의미로서.
세상은 비어있었다.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이고 그때 하느님의 영이 등장합니다.
영이라는 것은 가시적인 것일까요? 볼 수 없는 것일까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지가 이제 그곳에 개입합니다.
볼수 없고 의미가 없는 곳인 이 세상에 마치 물 위에 바람이 불듯이, 그 위를 돌듯이 하느님의 창조가 시작됩니다.
첫째, 빛을 창조하십니다.
빛이 있어라. 하시자 빛이 생겨납니다. 창조 이전에는 빛이 없었는데 빛이 생겨난 것입니다.
빛의 존재를 많은 신학자들은 인식과 관련해서 말합니다. 빛을 통해 인간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보고 듣는 것의 최종적인 목적은? 우리들 신앙에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고 최종적으로 들어야 하는 것도 하느님입니다.
구약 성경이 이야기하는 믿음의 첫번째는 보고 듣는 것, 이 세상을 보고 들음으로써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올라가면 두번째 개념이 나오는데 바로 하느님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첫번째에서 두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힘든 것 같아요.
예수님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듣지 못한다."
알아보고 알아듣는 것을 성령의 개념으로 보면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 안에서 동의적 표현입니다.
"너희가 나를 모른다고 하면 나도 너희를 모른다고 할 것이고, 너희가 나를 안다고 하면 나도 너희를 안다고 할 것이다."
"너희가 나를 믿는다면 나도 너희를 안다고 할 것이다."와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빛이 있어라 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을 알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빛의 느낌은 led등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서 배 한척이 이리저미 헤매다 저 멀리서 보이는 등댓불을 보는 느낌일 것입니다.
온 공동체가 불을 끄고 있는데 사제가 뒤에서 초 하나를 켜고 들어오면서 "그리스도 우리의 빛"하는 모습입니다.
예전에 연탄으로 난방하는 집에서 중요한 것은 연탄을 제때에 갈아주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부활 밤미사 때 신자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불을 다 끄고 있다가 부활 밤미사에 와서 불을 옮겨가서 집에 불을 켰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제 다 촛불을 끄시고....." 라고 말합니다.
본래의 저희 교회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그 빛으로 난 이제 한 해를 살아갑니다."라는 마음이 부활 밤 미사에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빛과 어두움을 갈라놓으십니다. 그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그 어두움을 밤이라 부르셨습니다. 이 말씀이 신부님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으로 느껴지신다고 하셨어요.
신학교를 입학하시고 한학기는 정말 거룩하게 잘 사셨어요. 그런데 두 번째 학기에 드는 생각이 신학교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기셨다고 해요. 왜냐면 2학기가 되었는데 밤마다 꿈속에서 여배우들이 등장하게 되었다고.....ㅎㅎㅎㅎ
20대 중반의 무렵이시니 호르몬에 의해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연합니다! 여성분들도 그럴거에요^^)
그렇게 고민을 하시고 성소 담당 신부님을 찾아가 성소가 없으신 것 같다고 말씀을 드렸어요. 그러자 그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어요.
" 그 마음과 싸우지 마라! 너에게 있던 그 마음을 책장 한 곳에 꽂아두어라." 질서 잡으시라는 말씀이셨다고 합니다. 그 신부님의 말씀을 통해 지금껏 잘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하셨어요.
훗날 그 신부님을 만나 뵙고서 "신부님, 신부님 정도의 연세가 되면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나요?"
그 신부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보았는데, 관뚜껑을 닫고 15분은 기다려야 해...."
우리 모두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 안에 질서 잡을 수 있는 것처럼, 집 안에 화장실이 없으면 집안 전체가 화장실이 되어 버리듯이, 휴지통이 없다면 집안 전체가 쓰레기장이 되어 버리듯이, 집안에 화장실을 두면 되고, 쓰레기가 생기면 정리하면 됩니다.
우리 안에 생기는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닌 살아가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사고 싶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싶은 그런 마음은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지나치게 커져 내 자신이 주인이 아닌 그 욕망이 나의 주인이 될 때, 화를 내면 내가 주인이지만 분노가 될 때는 그 분노가 나의 주인이 되어 먹히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는 계속해서 내 삶의 주인으로서 내 자리를 잃지 않는,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자아를 빼앗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뭐뭐 없이는 살수 없어." 그 뭐뭐라는 문장에 어떤 것이 들어가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우리 자신이 주인인지 아닌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뭐뭐에 술이나 담배? 혹은 스마트폰? 우리의 자유를 앗아가는 그 무엇이라면,
그것을 자유에 반대되는 것을 중독이라고 합니다.
단 며칠이라도 스마트폰 끄고 하루를 살아보기, 등으로 중독에서 멀어지는 훈련의 생활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낮과 밤을 갈라놓으셨다는 질서를 잡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각자에게 자기 자리를 찾아 주셨다는 의미로서 또 다른 표현으로 균형을 맞춰주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삶의 지혜, 혹은 생명이 걸어가야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궁창을 만드셔서 물을 갈라 놓으셨다
물은 땅의 대척점에 있습니다. 땅은 생명 물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창조설화는 땅과 물의 갈등입니다. 땅과 물이 갈등하고 땅이 최종적으로 자리 잡고 그 땅 위에서 생명이 시작되는 사건이 바로 창조설화인데,
구약 성경, 지금 이라크,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나오는 많은 창조 설화들 내지는 이집트의 창조설화등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주제입니다. 땅과 물의 갈등에서 신적인 개입이 일어나 땅이 세상에서 자리 잡은 사건입니다.
그렇게 둘째 날 궁창이 등장합니다. 바가지 모양이 둘러싸지니 그 안에 공간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은 바가지 안에 있는 물과 바가지 밖에 있는 물로 나뉘는 것이죠.
그런데 잠깐입니다. 어디 가셔서 "신부님이 그러셨는데 하느님께서 바가지를 만드셨다네~!!!"
하시면 곤란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궁창의 설명이셨습니다. 물을 갈라놓아 자리 잡게 하는 궁창
그리고 셋째 날
궁창 안에 있는 물들이 한 곳으로 모여, 땅(뭍)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땅만 드러났으면 좋겠는데 하느님께서 땅에게 풀과 나무를 자라게 하십니다. 그러자 땅이 풀과 나무를 자라게 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2장 4절을 지은 저자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목적은?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은 우리 하느님이시고, 이 세상에 다른 신은 없어!입니다.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에 창조설화에는 여러 신들이 있는데, 창세기 1장 1절~ 2장 4절의 저자는 하느님 한분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이 "땅 위에 풀아, 나무야 자라라." 하시면 될 것을 왜? 땅에게 풀과 나무를 자라게 하셨을까?
여섯째 날에도 하느님이 땅에게 "모든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배로 기어다니는 짐승을 나타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면 땅 위에서 집짐승과 들짐승, 배로 기어다니는 짐승들이 튀어나오는 모습일 것입니다.
여기서 잠깐! 알아봅니다.(구약 성경의 동물도감)
구약 성경의 모든 동물은 집짐승과 들짐승 그리고 배로 기어다는 동물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저자는 이 세상 창조의 주권은 하느님에게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들 식물이나 동물 모두가 땅에게 빚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세상을 남기실 때도 "세상을 잘 다스려라." 하고 말씀하시는데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세상을 잘 돌보아 주어라."하고 말씀하시며 땅을 잘 돌보아 주어 세상이 생명을 잃지 않도록 하게 하여라. 하고 말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땅으로부터 생명력을 뺏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개발한다고 합니다. 개발한다는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exploit
그것의 두 번째 의미는? 착취하다입니다.
우리는 땅으로부터 많은 것을 착취하고 생명력을 빼앗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콘크리트로 막고 개발하면서 그만큼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때 말씀처럼 땅 위에 풀과 나무를 자라게 하는 어떤 의미있는 일들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부님이 가회동 성당에 부임하시고 땅값이 엄청나게 오르게 되었어요. 삼백 평의 본당 땅값이 삼백억 정도가 되었어요. 그래서 밤을 새워 계산을 해보니 삼백억이면 한달 이자가 일억이었어요. 다음날 본당신자분들에게 "우리가 이 본당을 팔고 나가면 삼백억을 벌수 있는데, 우리가 여기서 나가지 않고 머물러 기도하고 공동체를 이루면 그것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하느님의 경제를 환산할 수 없겠지만 더 가치 있고 올바른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말하셨어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창조 의지에 어긋나는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우리들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대통령이 되신 분의 선거 공약 중에서 다행히도 열 번째에 생태문제에 관한 공약이 있습니다. 새 대통령이 자신의 그 공약을 충실하게 지키는지 신부님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시겠다고 하셨어요.
셋째 날에 땅에서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넷째 날에 하느님께서 큰 빗물체와 작은 빗물체를 만드시고 그 두 빛물체를 통해서 계절과 축제의 시간을 정하십니다.
다섯째 날에 궁창 위를 날아다니는 것들, 물아래에 살아가는 생물들을 만드셨습니다.
여섯째 날에 땅 위의 집짐승과 들짐승 그리고 배로 기어다니는 짐승들을 만드셨는데, 구약에서는 배로 기어다니는 짐승 빼고 집짐승과 들짐승으로 구분하였어요. 우리가 길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런데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낙타를 사람들이 길들이게 되는데(11세기)…
구약 성경을 쓸 때는 낙타가 들짐승이었는데, 그런데 그 구약 성경이 쓰여지는 과정 중에서 낙타가 집짐승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우리의 모상에 대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임금들이 자신을 말할 때 일인칭 복수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은 우리들은 임금들의 후손인 것 같아요.
혼자 생활하는 원룸에 살면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야~ 오늘 우리집 가자!"
우리! 우리를 닮은 우리의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하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이마고 데이(IMAGO DEI),
이마고: 이미지
데이는 신이라는 의미로, 하느님의 모상.
창세기 저자는 인간의 존재를 특별하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되었으니까.
그리고 둘째
이마고 데이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신학적인 요청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우리는 하느님을 닮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약 성경의 전반부를 흐르는 신학적 논리에 해당됩니다. 어떤 제자가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왜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까?"
선생님이 대답합니다. "우리를 만드시고 하느님은 칠일째 되는 날에 쉬셨어.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야."
이것을 우리는 공리라고 합니다. 그 논리에는 더이상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인간의 존재는? 이마고 데이(하느님의 모상)
그 이유는 묻지 않는다.(공리)
그 말씀으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거룩하셨으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닮아갈 때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도 아버지를 흉내내서 너희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도 나를 흉내내서 서로 사랑하여라.
구약에서 이미 이마고 데이가 나왔고 신약에서는 이미타티오 크리스티(imitatio Christi)라는 하는 신학적 용어가 나옵니다.
이미타티오 : 영어의 이미테이션이라는 의미
크리스티 : 그리스도의
그리스도를 모방한다는 의미
나중에 아 캠퍼스가 책을 쓰는데 그 책의 제목이 이미타티오 크리스티이고, 그리스도를 모방한다는 것은 어떤것을 의미하는가? 라는 것으로 그 책의 제목이 준주성범입니다.
준주성범에 흐르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세상을 맡기십니다. 잘 다스려라, 구약 성경의 그 말씀을 인간은 아직까지 반만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느님께서 세상을 나에게 주셨어. 그러니 아버지! 제 맘대로 할게요.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임금으로 오셔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로 왔다.” 그 요한복음의 말씀을 창세기와 연관시켜 봅니다.
“너희는 세상을 지배하여라(너희는 세상을 섬겨라, 세상을 잘 돌보아 주어라)“라는 것입니다.
사제가 본당에서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요? 고 물으시고 답하셨습니다.
사제는 본당 공동체를 섬기는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신부님은 본당 사목을 세 번하셨어요.
본당 신부가 갖고 있는 권위가 참 좋으셨대요. 성당을 둘러보시다 “저 쪽에 화분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하고 읊조리듯 말하셨는데 다음날 화분이 터억!! 자리 잡고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 말조심하면서 살아가야겠구나.‘ 생각하시면서 한마디 말로 그렇게 행동하시는 신자분들을 보고, 그날 밤 깊은 묵상을 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우리 공동체를 살리는 사제인가?’에 대한 성찰을 하시며 신자분들께 부탁하셨습니다. 사제들을 위해 많이 기도해 달라고…
창세기의 이런 7일간의 구도를 정리해 주셨습니다.
첫째 날은 빛이 생겨나고 낮과 밤
넷째 날은 큰 빗물체와 작은 빗물체가 생기고 계절과 축제
따라서 첫째 날과 넷째 날은 시간이라는 개념
둘째 날은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
다섯째 날은 하늘에 사는 것들과 바다에 사는 것들
둘째 날과 다섯째 날은 공간이라는 개념
셋째 날은 하늘 아래 물이 모이면서 땅이 드러남
여섯째 날은 그 땅 위에 사는 동물과 인간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은 생명이라는 개념
창세기 1장 1절~2장 4절까지의 창조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시간을 만드시고, 공간을 만드시어 그 시간과 공간 안에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주신 이 생명의 공간이 아까 말씀해 주신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느님의 창조 질서가 완성되지 못하게 되어 이스라엘의 절망과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종말론이 생겨납니다.
“하느님 이 세상을 없애 버리고 새로 시작합시다!"그래서 이사야서 66장에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전제하는 것은 창세기 1장에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하늘과 땅입니다. 바로 그것은 헌 하늘과 헌 땅입니다. 그것들을 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하느님께서 새롭게 시작하시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옛 생명이 살아갈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그곳에는 새 생명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죽었다가 부활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옛 생명을 가지고 참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것이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창조 신학적 관점에서의 구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침 강복을 해주셨어요.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감사합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