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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성의 역사 : 다크인 침략
다크섬과 마주보고 있는 왕도의 최남단 하이두 지방에서부터 꿈기해 유일의 항구 왕도항까지는 해변에 인접한 저지대이고 끝없이 백사장이 펼쳐져 있다. 이 백사장은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완만하게 오른쪽으로 휘어진 형태를 하고 있다. 백사장은 물에 떠밀려온 조개나 해초를 줍거나 갯벌에서 장난치기 좋아하는 해변의 꼬마들에게는 좋은 놀이터이지만 보통의 어른들은 발과 엉덩이를 더럽히는 해변에는 잘 오가지 않는다. 그러나 리러력 이전(B.R) 12년경의 어느 여름은 달랐다. 바다 저 편에는 멀리 보이기는 했지만 검은색의 천을 매단 나무 상자 같은 것이 빽빽하게 뒤덮여 있었다. 지리적으로 이러한 대 함대를 최초로 목격할 수밖에 없는 하이두 지방의 사람들은 아침부터 해변에 나와 팔짱을 끼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먼 땅 어딘가에서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가 떠내려 오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보이든 안 보이든 바다를 향해 손을 흔들거나 신이 나서 배를 쫓아 해변을 달리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해변에 인접한 지역에서 차례로 일어났다. 이 함대는 꿈성에 영원불멸한 공포의 역사로 남을 ‘다크인 침략’의 전초 함대였고 대 함대가 정박할 마땅한 상륙지점을 찾기 위해 해변을 따라 유유히 북상하고 있던 중이었지만 꿈신 이후로 천 오백년이 넘는 기간을 커다란 분쟁 없이 살아 온 꿈성인들에게는 그저 신기하고 특별한 구경거리였을 뿐이었다. B.R 12년 6월 7일. 다크 함대가 유일한 상륙 가능 지점인 현재의 왕도항에 도착했다. 그 후로 있었던 12년간의 악몽 같은 사태는 평화의 대가치고는 너무도 가혹했다.
그 당시의 꿈성은
전설적인 초대 족장 꿈신의 방침은 1600년간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꿈성인들은 매우 부지런했고 농사기술은 대를 거듭해 내려오면서 발달했다. 생산력이 발달하면서 부양할 수 있는 인구가 늘어났고 여가 시간도 늘어나서 보통의 농사기술을 가진 꿈성인이라면 오후쯤에는 좋아하는 취미나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이것이 현재 꿈성의 그 유명한 ‘전문생활’로서, 오전 내에 생업인 농사를 마친 꿈성인들은 점심식사 후인 오후2시부터 모든 공무, 사업, 학술활동을 시작한다.) 꿈신 이후의 군장들은 속성종자가 전파되지 않아 식량난을 겪는 지역에 속성 종자를 주고 우호를 맺는 외교활동을 주관하는 것이 가장 심리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무력이 사용될 정도의 격한 분쟁이라면 식량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생존과 안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꿈성인들은 군장이 주도하는 정부의 필요성과 역할을 중시했기 때문에 꿈성인 1인의 생산량은 자신은 물론 노동능력이 없는 아기와 노인, 그리고 정부에 기부할 일정량의 식량까지 포함된 것이었다. 정부는 위탁받은 식량으로 운영되어 안보 외에도 농업을 진흥할 관련 사업이나 간단한 치안, 토지분배, 재판, 각종 문화 사업을 맡고 있었다. 이 정부에는 군장인 꿈씨일족이 일하고 있었으나 일반 꿈성인 중에서도 정부에서 일하는 것을 흥미롭게 생각하여 무보수로 일하는 관료가 생겼다. 다른 쪽의 취미를 가진 꿈성인들은 광물을 채취하거나, 물건을 각지로 유통시키거나, 발명을 하거나, 학문이나 요리 재봉 같이 다방면에 걸친 연구를 하기도 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놀기를 원하는 꿈성인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꿈성인을 특별히 사회적으로 지탄하는 분위기는 없었다. 꿈성인들이 취미나 여가를 평가하는 기준은 물질적인 생산력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 시기의 꿈성에서는 아직까지 많은 공직이나 서비스업종이 무보수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차츰 이러한 꿈성인의 여가활동이 점차 예술적으로, 때로는 위대하기까지 한 성과를 거둘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왕도의 한 솜씨 좋은 대장장이는 튼튼한데다가 장식도 화려한 농기구를 만들었기 때문에 많은 속성종자를 주면서까지 그의 농기구를 구매하고자 하는 꿈성인이 줄을 이었고, 소문은 퍼져 나가기 마련이어서 그 혼자만으로는 왕도 전역의 수요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운명에 처한 꿈성인은 아쉬움 반 기쁨 반으로 농사를 그만 두고 ‘전문생활’에만 매진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길드 역시 이러한 초기 형태의 ‘전문생활’에서 규모와 직종이 다양해진 것이다. 꿈성 전역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들을 일컬어 ‘마스터’라고 칭하는데, ‘마스터’라고 불릴 만큼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거나 ‘마스터’수준의 재능과 기술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농사-전문생활의 이중 생업을 하면서 소지역의 수요를 충당하고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데 만족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꿈성인의 경제 활동은 농사와 전문생활의 비율을 각자 사정대로 잘 조절하는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스터’의 능력이 필요한 부분은 엄청나게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를 만들거나 절망적인 부상을 입은 꿈성인을 재봉하는 일, 혹은 무죄를 받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재판 등 특별하고 어려운 부분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희소가치가 높았다. 꼭 ‘마스터’가 개입해야 할 일은 아니더라도 재료가 희귀하거나 일시적으로 수요가 늘어나서 희소가치가 높아져 많은 비용이 필요해지는 부분도 생겨났다. 결국 꿈케 시대에 이르면 꿈성의 경제는 꿈신 시절처럼 식량문제가 모든 것을 해결할 시절이라고는 더 이상 말 못할 시절이 되었다. 많은 토지나 농사짓는 사람이 많은 가족이나 특별한 농사기술을 가짐으로 해서 부자가 되는 전통적인 방법 말고도 희귀한 기술, 탁월한 능력, 희소가치가 높은 재화를 보유하는 방법 등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은 사회에 적지 않은 위화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꿈성 정부는 희소가치가 있는 것들 중 생명과 재산과 정의와 관련되어 중요하기까지 한 물건이나 서비스는 충분한 비용이 없더라도 정부의 원조로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했고, 쌓여가는 재산 때문에 처치곤란을 느끼는 부자들은 세금이나 기부금을 늘림으로써 비용이 많이 들지만 중요한 물건이나 서비스에 일반 꿈성인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희소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해서 다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부자와 일반인은 사치라는 것을 통해 구별되기 시작했다. 요점은 그것이다. B.R 12년 꿈하 시대의 꿈성은 사치는 간혹 있었어도 빈곤은 없었다. 경제력은 완만하게 상승하고 있었고 영토는 고 산맥 북단에서 루즈렉 지방을 망라하고 있었다. 꿈하 시대의 꿈성은 오히려 여러 가지 문제로 머리가 복잡해질 왕국이나 제국시대에 비해 절대적으로 행복했던 시기라고 말 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 당시의 다크왕국은
지질학 적으로 꿈성에 인류가 출현한 것은 800만 년 전이지만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를 통해 역사를 알 수 있는 시대는 200만 년 전이다. 바다 건너의 어떤 문명이나 외부인과 접촉했었다는 사실은 200만년에 걸친 전설시대에도 흔적조차 없었던 일이었고, 천 육백 년의 부족시대 역시 그랬다. 유사 이전에 바다를 통한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학자들이 밝힐 일이지만 문제는 어떤 이유로 해서 200만 년 간 교류가 없던 바다 건너의 문명이 이제 와서 침공이라는 충격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는가 하는 것이다.
다크섬은 2/3이 다크산맥이라는 험지가 차지하고 있는데다 해안을 따라 있는 용천 지역을 제외하고는 배수가 너무 좋은 탓에 대부분 지역이 식수가 부족하고, 따라서 다크섬에는 해안을 따라 도시가 들어서 있다. 얼마 되지 않는 밭작물을 재배하는 것을 제외하면 다크인들은 거의 사냥이나 목축, 약탈로 생활했기 때문에 호전적인 기질이 절로 생겨났다. 다크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지키거나 남의 공동체를 침략하여 식량을 빼앗아 올 군대였다. 작은 섬 안에서 뺐고 뺐기는 역사를 되풀이하던 끝에 B.R 400여년 경에는 강력한 상비군을 두고 다크섬 전역을 통일한 최초의 왕 유테스가 등장했다. 유테스가 이끄는 일족은 ‘테스팔리’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인접한 부족들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일부의 친 테스팔리파 지도자나 부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노예화하여 테스팔리 소유의 농장이나 공방에서 부당한 보수를 주고 생산을 전담시켰다. 이들의 강제적 희생 덕택에 테스팔리들은 군인이나 사제, 관료 같은 귀족 직업에 종사하면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있었고 B.R 298년부터 젤 왕국과의 상습적인 전쟁을 통해 국내의 식량난이나 정치적 불안, 또는 테스팔리 들의 호승심을 무마하고 있었다. 젤 왕국과의 전쟁무대라는 비극적 운명을 300년 가까이 겪은 중악섬은 풍요로운 자연과 높은 생산력, 그리고 양 대륙의 (물론 전쟁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형태였지만) 교류를 통해 이루어진 높은 문명수준을 갖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전쟁 특수를 보는 일부 군수업자나 금융업자를 제외하면 사회 전반에는 너무도 오래 지속된 전쟁 불안으로 인해 완만한 불황의 시대를 맞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중악섬의 운명이야 어찌 되었건 다크섬의 지배계층에게 있어서는 중악섬을 한 번 싹쓸이 할 때 마다 얻는 경제적 정치적 이익은 막대한 것이었고, 젤 왕국과 다크 왕국은 중악섬을 사이에 두고 경쟁적인 관계였다. 그러던 B.R 17년 무렵은 다크 왕국에 중요한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호로테스왕의 사후 테스팔리들은 2왕자 오리테스와 7왕자 욥테스 파로 갈라져 내전에 들어갔는데,(1왕자는 젤 왕국과의 교전 중 전사했다.) 다크 왕국 최고의 군벌인 카라무즈의 딸이 호로테스의 왕비가 되어 욥테스를 낳았기 때문에 욥테스는 카라무즈를 위시하여 다크섬 남부의 군벌세력을 등에 업고 있었다. 반면에 오리테스에게는 선왕 시절부터의 측근들과 카라무즈의 전횡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재야인사들의 지지 외에는 기댈 곳이 없었다. 이미 호로테스왕의 유지는 욥테스파에 의해 도중에 오리무중이 되었기 때문에 선왕의 정통성 부여에도 의지할 수 없었던 오리테스는 군사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B.R 15년까지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B.R 15년 7월경에는 욥테스의 7개 군단에 의해 세팔 시티까지 밀리게 되었고 오리테스는 궁여지책으로 젤 왕국을 추동하여 내전 중인 욥테스의 배후를 치게 했다. 오리테스의 공작을 눈치 채지 못한 욥테스 파는 세팔시티 이북을 오리테스의 영토로 인정해 주고 세팔 시티 이남을 욥테스가 통치한다는 내용의 강화를 서둘러 맺었다. 강화를 맺은 욥테스는 수도인 론도시티에 상륙하려는 젤 왕국 함대를 전면전으로 섬멸한 다음 리냐 시티로 남하하면서 젤 왕국의 잔병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한편 오리테스는 비밀공작으로 젤 왕국이 욥테스에게 패하되 결정적으로 궤멸하지 않도록 욥테스 쪽의 군사기밀을 흘려주면서 욥테스와 젤 왕국의 전쟁을 지연시켰다. 욥테스의 7개 군단은 막강했기 때문에 당시 군사력의 일시적 약화 추세에 있었던 젤 왕국의 선전을 수상하게 여겼고, 결국 B.R 13년에 욥테스는 오리테스와 맺은 강화를 무효로 돌리고 배신행위를 응징하기로 결정했다. 2년간의 휴전을 통해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던 오리테스는 욥테스처럼 막강한 7개 군단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 자신이 범상치 않은 군사적 재능의 소유자였다. 다크섬 남부는 북부보다 땅이 비옥한 편이었고 중악섬이나 젤 왕국과의 험악한 교류를 통해 무역량도 많았기 때문에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형 군벌이 성장할 수 있었다. 오리테스가 척박한 다크섬 북부로 축출될 당시에는 모든 상황이 오리테스에게 비관적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오리테스는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기회를 발견했다. 다크섬 북부의 기마민족을 포섭한 것이다. 세팔시티 남쪽의 대평원에서 벌어진 욥테스와의 전투는 욥테스가 자랑하는 7개 군단의 중무장 보병과 오리테스의 기마군단의 전투였고, 이 전투에서 카라무즈 일족이 무수한 전사자를 냈을 정도로 욥테스는 혹독하게 패했다. 결국 기마군단에 대항할 마땅한 전술을 구상하지 못했던 욥테스는 B.R 13년 11월에 정복시티에서 젤 왕국과 손 잡은 오리테스에게 붙잡혀 처형당한다. 욥테스와 카라무즈를 처형함으로써 내전을 평정한 오리테스에게 젤 왕국은 B.R 15년 경 맺은 비밀조약에 따라 중악섬에서의 패권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조약을 체결할 당시부터 그럴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던 오리테스는 조약을 이행하는 대신 그날로 정복항에서 출항하여 중악섬의 젤 왕국 군대를 펜솔시티까지 내쫓는 것으로 회답했다. 결국 젤 왕국은 B.R 12년 2월 거꾸로 자신이 중악섬에서의 패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말았다.
내전을 신속하게 마무리 짓고 젤 왕국 문제까지 해결한 오리테스는 세팔 시티 이북으로 쫓겨날 때부터 구상하고 있던 계획을 실행하기로 결심한다. 꿈성 왕도의 문헌에는 아무런 공식적인 기록이 없지만 다크왕국의 왕 호로테스는 B.R 22년 경 다중해를 통과해서 왕도로 곧장 흘러가는 ‘뱀장어 난류’가 꿈기해에서 6~9월 사이에 부는 계절풍과 결합하여(이 지역에서는 지속적으로 다크섬 쪽을 향해 역풍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역풍 항해에 능숙하지 못했던 이 시대에는 왕도를 향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다크항에서부터 왕도만에 이르는 거대한 뱃길이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호로테스왕은 이것을 ‘호로테스의 길’이라고 명명했으며 장거리 항해에 적합한 선박을 제조하기 위해 그가 사망하는 B.R 17년까지 조선술을 장려하고 있었다. 오리테스는 선왕의 사업을 실행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하게 내비치는 한편, 새로운 전쟁 준비를 통해 욥테스파로서 자신과 적대했기 때문에 오리테스의 정권에서 불만이나 불안감을 갖고 있는 남부의 군벌들을 흡수하려고 했다. 또한 5년의 내전을 통해 피폐해진 식량난의 해소라는 명분도 있었다. 바다 건너의 풍요로운 땅에 대한 소문은 언제나 있었던 것이었고, 다크인들은 미지의 세계를 정복한다는 기대와 그곳에서 가져 올 무궁무진한 보물에 대한 욕심에 한껏 고무되었다. B.R 12년 6월1일. 랍푸스 장군이 이끄는 오리테스의 전초 함대 402척이 하이두 지방에서 목격되었다.
부족시대의 종말
랍푸스의 함대는 출항 이틀 만에 왕도의 영토에 도달했지만 정박지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바다를 거슬러 6일을 북상한 끝에 7일이 되어서야 왕도항에 기항했다. 왕도인들에 비해 체격이 월등하고, 키는 두 배 가량 큰 다크인들은 왕도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곡물 창고를 마음껏 약탈하고 민가를 불태웠다. 최초로 날벼락을 맞은 도통지방의 사람들은 늘 해오던 방식대로 속성종자를 내주다시피하며 대화를 시도하고 정착을 권유했지만 다크인들은 농사기술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것 같았고 오직 창고에 있는 곡식을 털어 먹는 것만이 유일한 관심사임이 밝혀졌다. 더군다나 그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걸핏하면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이는 습관까지 있었다. 다크인들이 도통지방을 거덜내고 점차 다른 지방의 창고를 습격하러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왕도에는 피난민들이 쇄도했고 소식은 일찍부터 접하고 있었으나 방책을 세우지 못했던 군장 꿈하는 결국 최후의 결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
왕도는 양 옆에 고강과 꿈성강을 끼고 있는데, 이 두 강의 합류지점에는 왕도평야가 있다. 6월 22일에 군장 꿈하는 아들 꿈룽 꿈롱 꿈렁 형제와 정부의 관료들, 그리고 왕도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왕도평야의 곳간을 유린하고 있던 랍푸스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랍푸스의 군대는 3만2천이었고 군장 꿈하 일행(부득이 군대가 아니라 일행이라고 일컬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은 기본적인 무장도 하지 않았고 군대다운 지휘체계도 없었기 때문이다.)은 약 2만 명이었다. 꿈하 일행은 무시무시한 무기를 들고 대오를 갖춘 다크 군대에 겁먹지 않고 다가갔지만 그 다음 일어난 일은 아연실색 하다 못해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군장 꿈하의 일행 2만 명은 다크 군대를 앞에 두고 저마다 큰 목소리로 그들의 행위를 성토하고 규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약 2분 정도 왕도인들의 비난과, 눈물 어린 호소와, 회유를 듣고 있던 랍푸스는 말없이 공격 명령을 내렸고 다크 군대는 무기도 갖지 않은 꿈성인 2만 명을 마치 목자가 양떼를 몰아치듯 두들겨 쫒으며 마음껏 학살했다. 이 최초의 접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에서 랍푸스는 꿈하 가족이 포함된 생존자 5천 명 가량을 포로로 잡았는데, 7월 3일에 왕도에 상륙한 오리테스로부터 전원 처형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이들은 군장 관저에 가두어진 채 산 채로 불 질러지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이 말 할 수 없는 끔찍한 소식은 꿈성 전역에 퍼졌고,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 공포와 재앙의 실체인 다크 군대를 목격할 수 있었다. 당시 꿈성인들의 도시는 도로망과 항구가 정비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강 양 편을 따라 도시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형태였다. 왕도평야 학살의 장본인인 랍푸스는 꿈성강을 따라 북상하면서 강 연안의 도시들을 쓸고 있었고, 차례로 도착한 호른, 예테크, 하마즈의 증원군은 각각 5만, 8만, 7만의 병력을 이끌고 고강을 따라 고 산맥에 이르는 길에 있는 도시들과 요혈강 연안의 도시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 7월 3일에는 오리테스의 10만 본대가 도착했는데, 오리테스는 거꾸로 도통지방에서부터 남하하면서 꿈기해 연안에서 항만공사를 하면서 전리품과 창고의 곡식들을 수송대를 통해 본국으로 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오리테스가 세운 항구들은 20여개에 이르는데, 이후부터 12년간 6월에서 9월까지는 새로운 약탈부대가 왕도로 증원되고, 호로테스의 길이 닫히는 10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는 오리테스가 본국에 식량과 전리품을 꾸준히 보내는 식의 일이 벌어졌다. 항구가 크게 늘어났으므로 다크 군대는 하이두나 주치 지방, 까푸나 큐우시티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출몰하게 되었다. 이 12년간은 꿈성 전역에서 초토가 일어났고 마을과 도시가 파괴되었으며 다크 군대의 학살이 왕도인을 위협하고 있었다. 꿈성인들은 그전까지 무서운 전설로만 알고 있었던 그레이트 데인져 산맥을 향해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망국의 시대가 10년이 넘게 지속되면서 꿈성의 경제 상황은 크게 퇴보했으며 많은 기술자와 학자, 예술가들이 전란의 와중에 희생되었다. 꿈성에 넘쳐 나서 영원히 바닥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속성종자도 그때는 아무도 감히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므로 차츰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다크 인들은 종자를 심을 줄도 거둘 줄도 몰랐기 때문에 아직까지 군대가 휩쓸지 않아 농업이 온전했던 벽지의 평화로운 마을까지 들쑤시고 다닐 뿐이었다.
성왕 꿈기 -피난기와 1차 원탁회담
왕도평야에서 군장 꿈하 일족이 무참한 변을 당한 6월22일의 비극이 있었을 때 장차 구국의 영웅이 될 꿈기는 11세의 소년이었다. 꿈기 소년은 부족시대의 초대 군장이었던 꿈토의 후손이라고 전해지고 있지만 꿈쿠나 꿈코의 직계와는 너무 먼 혈연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 요직을 맡을 수 있는 꿈씨 일족은 아니었다. 기록상으로는 꿈기의 조부가 되는 꿈리가 대통시티에서 세무사를 하고 있었으나, 덥고 습한 대통시티의 기후가 건강에 좋지 않다고 판단되어 자크리아노플을 거쳐 지금의 루즈렉 시티로 이주했다고 한다. 평소에는 인자하지만 탈세에는 가차 없었다고 전해지는 성실한 꿈리와는 달리 아들인 꿈러는 힘 좀 쓰는 동네 젊은이들과 몰려다니며 이 일 저 일 참견하거나 밤늦게까지 꿈성강 지류에서 뗏목을 타고 오르내리며 고성방가를 하는 등 마을의 골칫덩어리였다고 한다. 세무사라는 직업에서도 알 수 있듯 꿈리는 금전출납을 꼼꼼하게 기록하고 타산을 잘 따져 임종 시에는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는데, 불쌍하게도 본인의 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재산을 마음껏 탕진하는 망나니 아들에게 절망하면서 죽었다. 일개 세무사에 불과한 꿈리가 평생 놀고먹어도 다 하지 않을 재산을 모았을 리는 없었으므로 꿈리의 재산도 3년 만에 바닥이 보였다. 그 때 꿈러는 30대에 접어든지 오래였고, 건달 친구들도 이제는 철이 들어 가정에 충실해져 있었으므로 꿈러는 루즈렉시티 경비대원으로 취직하고 자리를 잡았다. 과소비의 버릇을 고치지 못했던 꿈러는 부업으로 친구들과 공동으로 출자하여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댔는데, 꿈기가 8세가 되는 B.R 15년경까지는 사업이 그럭저럭 그의 씀씀이를 메울 수 있을 만큼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크인의 침략’은 어느 누구도 예상 못했던 참변이었다. 하필 그 당시에 꿈러는 새로 시작하는 자크리아노플 간척 사업에 거의 전 재산을 투자하고 있었는데, 알다시피 6월22일의 참변으로 간척 사업에 투자한 돈을 회수할 정부라는 것이 사라지고 말았으므로 꿈러는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뒤이어 7월 11일에 다크왕국에서 온 파리오 장군의 부대가 대통지방에서부터 해변을 따라 북상하며 자크리아노플과 하진시티를 차례로 초토하자, 꿈러는 재산이 아니라 목숨을 걱정해야 할 형편으로 바뀌었다. 이미 루즈렉 시티에는 남부에서 올라온 피난민들이 거쳐 가는 통로가 되었고 루즈렉 시티 주민들 역시 이 대열에 합류했다. 파리오장군의 추격은 집요한 데가 있어서 왕도인들은 왕도 최북단인 루즈렉 시티까지 도망 왔음에도 계속 북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왕도인들은 오른쪽에 강을 끼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식으로 피난을 갔는데, 이 강을 보고 피난 대열의 누군가가 퇴각의 강이라고 탄식을 했기 때문에 그 때부터 ‘퇴각의 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윽고 지금의 미슈지방까지 이른 피난민들 사이에서 다크 군대와 접전이라도 벌여보고 죽자는 목소리가 심심치 않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꿈러였는데, 과연 젊은 시절부터 그와 행동을 같이 했던 과격한 청년들과 감상적인 애송이들이 이에 동조했다. 나머지 피난민들은 퇴각의 강을 따라 북상을 계속했고, 사람들의 걱정과 만류에도 꿈러의 결사대 120명은 미슈지방의 안전늪에 엉성하나마 함정을 깔고 파리오장군의 추격부대를 맞이했다. 역사에는 8월19일인 이날 있었던 꿈러의 게릴라전이 다크 침략 2개월 만에 일어난 최초의 전쟁다운 전쟁이며 저항다운 저항이라고 평가된다. 꿈러의 결사대는 동시에 농기구를 농사짓는 이외의 용도로 사용한 최초의 꿈성인들로 남게 되었다. 꿈러가 늪에 함정을 깐 작전은 성공해서 비온 뒤의 얕은 웅덩이인줄만 알고 돌격한 다크군 몇 명이 함정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다수의 다크군은 늪에 빠진 동료를 징검다리 삼아 밟고 늪을 건너 농기구를 필사적으로 휘두르는 꿈러의 결사대를 덮쳤는데, 주변에는 엄호물도 없었고 결사대는 이렇다할 방어구도, 이렇다 할 진형도 갖추지 못했으며, 다크 군대는 체격과 키가 월등하여 대인전에는 특출난 군대였기 때문에 수십분 만에 결사대는 괴멸하기에 이르렀다. 살아 남은 결사대원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꿈러는 그 중에서도 방향을 잘 잡아 퇴각강을 따라 북상하는 피난대열과 합류할 수 있었던 운좋은 생존자였다. 피난민들은 가족과 지인들의 죽음을 전해듣고 슬픔에 젖었지만 꿈러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면목도 없고 분을 삭이지 못했던 35세의 꿈러는 아무지방에 이르러 11세의 꿈기에게 뒷일을 맡기고 퇴각의 강에 투신하고 말았다. 그간의 피난 행렬에서 퇴각의 강에 몸을 던져 자살한 수많은 꿈성인들의 영혼과 함께 꿈러의 영혼도 어딘가를 배회하고 있으리라.
이 사건으로 나이 어린 소년에 불과했던 꿈기가 느꼈을 슬픔과 다크에 대한 원한은 아마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왕이 되기 전의 꿈기는 다른 꿈성인들처럼 무력한 피난민에 지나지 않았다. 피난민들은 이제 론앙지방까지 밀려올라갔고, 정면에 거대한 강을 마주보게 되었다. 다수가 절망하여 주저앉아 멍하니 강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와중에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추격군의 동정을 살피며 급히 뗏목을 만들었다. 왕도인들은 엉성한 뗏목이나마 타고 꿈성의 5대강 안에 들 정도로 넓은 강을 건넜는데 이것이 8월30일의 ‘눈물의 강 도강’이었다. 피난은 벌써 수개월에 이르렀지만 뒤에는 여전히 다크 왕국의 군대가 뒤쫓고 있었고 앞에는 황량한 미지의 땅이 있을 뿐이었다. 왕도인들은 뗏목 위에 앉아 눈물만 흘렸고 과연 후에 이 강의 이름은 말 그대로 ‘눈물의 강’이 되었다.
눈물의 강을 도강한 피난민들은 지금의 불독 공국 영내에 있는 멍멍 지방에 살던 원주민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원주민들은 자기 영토로 대거 몰려온 피난민들을 달가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험악하게 맞이했다. 피난민들은 겁에 질리고 체념한 나머지 도로 눈물의 강으로 가서 투신할까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때 피난민 중에서 한 사람이 등장하여 원주민 대표와의 협상을 시도했다. 그는 안전늪 전투의 생존자 중 한 사람이었으며 꿈러의 소년 시절부터의 친구였던 35세의 엑박이었다. 엑박은 다크인 만큼은 안 돼도 근육질의 체격에 어릴 적부터 격투기를 즐겨 하던 호전적인 남자였는데, 절친한 친구 꿈러의 죽음 이후로는 그의 아들인 꿈기를 맡아 보살피면서 피난민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당장 영역에서 꺼지라고 으름장을 놓는 원주민들의 기세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엑박의 대담함에 원주민 대표 또한 정색하고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역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우연이자, 사나이들의 호방함과 신뢰로 유혈사태 없이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는 이상적인 장면을 보게 된다. 현재 멍멍시티에는 시장 관저 앞에 넓은 잔디밭이 있고, 거기에 고대인들이 만든 원형 돌 탁자가 있는데, 이곳이 1500여 년 전 그날의 회담 장소였다는 것이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피난민들의 대표로는 앞서 말했듯 엑박이 나갔는데, 그는 이 자리에 소년에 불과한 꿈기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원주민 측에서는 성정이 괴팍하고 끈질겨서 본명보다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55세의 코코가 마을의 기록 담당이자 회계와 산술에 뛰어난 22세의 산츄를 대동하고 회담장에 나왔다. 결국 9월 3일인 이날, 후에 성왕으로 불릴 구국의 영웅과, 철벽의 요새도시를 대대로 통치할 초대 안치공 엑박, 전장의 고비 고비마다 맹수를 이용하는 기동전술로 왕도를 도와 줄 초대 불독공 코코, 왕도대륙 최강의 해군국이자 무역국가로서 경제와 안보를 전담하여 카이저 대륙과의 오랜 경쟁에 한 몫 할 산츄 공국을 세운 산츄가 변방 이름 없는 마을의 낡아빠진 돌 탁자에서 처음으로 조우한 것이다. 한 명은 고아 소년으로, 한 명은 초라한 패잔병이자 피난민으로, 한 명은 성질 더러운 야만인으로, 또 한 명은 원주민 마을에서 가축의 머릿수나 세던 병약한 청년으로. 이들은 단 네 명만 회동한 자리에서 대륙의 현재 정세와, 군장정부의 몰락과, 다크 군세의 위세 등등함과, 초토가 시간문제가 되어버린 멍멍지방의 원주민 마을에 대해 많은 의견을 주고받았다. 코코는 다크 군대쯤은 자랑하는 사냥개부대와 마을의 방위력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엑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엑박은 가는 곳마다 가축과 곡식을 강탈하는 수십만의(게다가 계속 증원 중이다) 다크 군에 맞서 공동전선을 펼칠 필요성을 역설했다. 코코 역시 급한 성미를 접어 두고 이 상황을 어렵지 않게 이해했으므로 산츄가 의견을 내놓아 왕도 피난민들이 멍멍지방을 통과하여 코코의 부족 배후에 자리 잡아 농사를 지으면서 군량과 병력을 제공하고, 전투가 가능한 엑박 일행과 코코 부족이 눈물의 강을 전방에 놓고 적을 방어하기로 합의했다. 그 날 밤 코코가 베푼 잔치에서 피난민들은 오랜만에 잠시나마 근심을 잊고 즐길 수 있었다. 축제를 좋아하는 왕도인들은 꿈신 시절부터 축제의 단골 메뉴인 속성종자쇼를 선보이며 원주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도자의 막사에서는 코코와 엑박, 산츄가 의기투합했고 술이 거나해져서 기분이 좋아진 코코는 꿈기의 후견인이 되어 군장이든 왕이든 되도록 밀어주겠다고 호언장담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이날의 만남은 실제로는 사건이랄 것도 없는 조촐한 모습으로 이루어졌지만 역사는 이들이 이대로 지리멸렬한 운명을 살다 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날의 작은 회담은 최초로 안치, 산츄, 불독이 꿈성왕을 맹주로 하여 상호간의 영원한 수호와 협조를 결의한 제1차 원탁 회담이 되었던 것이다.
성왕 꿈기 -B.R 7년까지의 항전시기
B.R 12년 9월부터 B.R 7년 3월까지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개 원주민 부대와 전투에 미숙한 왕도인들이 어떻게 불독 지방의 방어를 성공적으로 해냈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항전시기를 통틀어 다크 군대는 왕도 전역을 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변경의 불독 지방을 수시로 공격했는데, 그 이유를 알기 원한다면 지금까지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꿈성인이 있는 곳이라면 그레이트 데인져 산맥이라도 농사가 된다”는 농담을 떠올리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애초에 원주민과 왕도인이 수비와 보급을 분업하려고 했던 계획은 1년도 안 되어 원주민과 왕도인이 급속히 융화됨으로써 유야무야되었다. 전투지역의 결원은 항상 있는 것이고, 원주민들은 비록 대수롭지 않은 기술이나마 공유하여 왕도인들이 전투에 참가하여 결원을 보충하길 기대했고, 왕도인들의 속성종자와 농사기술 몇 가지는 현재 전 우주에서 “기적의 농사법”으로 불리는 것이니만큼 누구나 배우고 싶어 했다. 결국 불독 지방의 원주민과 왕도인들이 공동체로 융화하고 결속하는데 다크군이 기여한 셈이 되지만 초기의 전투는 그 공동체의 존망이 가망 없어 보일 정도로 종종 위급해지곤 했다. B.R 7년까지의 항전시기에서 쓰인 전술은 오직 한 가지였는데, 눈물의 강을 도강하고 있는 다크군에게 원주민의 사냥용 화살을 퍼붓고 강변을 따라 설치한 목책 위에서 공격하는 형식이었다. 가축에게나 알맞은 화살은 살상능력이 실망스러운 수준이었고, 목책은 이동할 수가 없어 소극적인 공격이 고작이었으나, 이 5년간의 공세는 다행스럽게도 공백 기간이 충분하고, 소규모부대의 발작적인 습격인 경우가 많았으므로, 왕도인들은 방어를 그럭저럭 해낼 수 있었다. 게다가 B.R 7년이 다 되어가면서, 왕도 본토에서 다크인들을 피해 숨어 살던 왕도인들에게 불독 지방으로 망명간 꿈신의 후예와 그의 가신들이 세운 나라에 대한 소문이 퍼지면서, 눈물의 강을 넘어오는 피난민들은 계속 이어졌고 어느덧 수십만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농업생산량과 병력 또한 늘어났다. 이제는 오리테스도 불독 지방의 망명 정부를 눈치채고 전면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왕도의 재기는 기정사실처럼 되어버렸다.
성왕 꿈기 -B.R 7년경의 정세
B.R 7년에 꿈기는 16세가 되었다. 그때쯤에 꿈기는 이미 저항군의 공식적인 지도자이자 구심점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말 할 나위 없이 저항군의 실질적인 지도자 엑박의 강력한 지지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충성스런 세 명의 가신과 왕도인들의 영원한 지도자 꿈신의 후광을 입고 너무 어린 나이에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주가 된 꿈기는 금방 교만해질 만큼 어리석고 철없는 소년은 아니었으나 반대로 사명감에 짓눌린 나머지 큰 공적을 빨리 세우려고 노심초사하는 조급한 소년이었다. 마침 B.R 7년 3월 3일에 오리테스가 채오지방에서 3개 부대를 정비하여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공세로 나섰으므로 꿈기는 이것을 기회로 받아들였다.
당시 다크전쟁 초반에 왕도에 진입했던 장군과 부대들은 몇 년을 거치면서 본국으로 소환되거나 교대되거나 증원되었으므로(침략 중기까지 전쟁다운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다크로서는 긴박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가볍게 노략질하는 마음으로 왕도를 왕래했던 것 같다.)부대 배치 상황은 B.R 12년과는 달라져 있었다. 고강 남부에서는 벤치치 장군의 부대가 이조 시티를 거점으로 주둔하고 있었지만 약탈과정에서 일어나는 왕도인과의 소소한 마찰 말고는 정규군의 조직적인 공세를 대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기강이 풀어지고 병력도 많이 줄어든 상황이었다.(현재도 왕도에 살고 있는 일부의 다크계 왕도인은 이때의 탈영병 출신이다) 문제는 고강 북부의 다크군이었는데, 각각 요혈강 꿈성강 퇴각강을 따라 오르내리면서 왕도인들을 산맥 쪽으로 몰아붙이면서 약탈하거나 눈물의 강 건너에 있는 저항군을 습격하고, 때로는 현재의 기아와 이바노프 지방에 있는 원주민들을 쫓아(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 험한 산지까지 들어갔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성과 없이 돌아오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리테스는 왕도를 거점으로 요혈강의 1개 부대, 꿈성강의 2개 부대를 지휘하며 상당히 폭 넓게 활동하고 있었다. 오리테스는 처음에 왕도의 식민화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크 본국에서 그러했듯이 왕도인들을 노예로 굴복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왕도인들은 정규군으로 대응하지는 못했지만 다크군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살던 터전을 버리고 꾸준히 도주를 택했기 때문에 점차 왕도는 공동화가 진행되었다. 오리테스는 침략 중기에 들어서야 뒤늦게 왕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다크식의 무력지배를 포기하고 왕도인들의 생업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정치 체제를 정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당시 꿈성 최강의 군주였던 오리테스조차도 그것을 결행하기는 어려웠다. 정복한 부족을 노예로 삼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만 남기고 빼앗아 부유해지는 것으로 지배계급을 유지하는 다크인들로서는 그런 것이 지배자의 특권이자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풍요로운 왕도는 더더욱 그러한 방식으로 지배하고 싶어 했다. 그런 그들에게는 노예의 복지나 권리를 위한 온갖 편의와 혜택을 제공하는 정치 체제라는 것은 단순히 불가능이나 기피를 넘어 생각 하는 것만으로도 모욕적인 일로 여겨졌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예에게 가혹한 행위를 하거나 약탈을 통해 많은 수확을 올리는 것을 통해 지배계급의 위엄을 과시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오리테스는 본인이 어려운 내전의 와중에서 오직 용맹한 군주라는 이름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휘하 장병들로부터 ‘겁쟁이’나 ‘귀족답지 않은 수치스러운 자’라는 비난을 들을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동기는 또 있었다. 오리테스가 본격적인 정부를 창설하지는 않았지만 왕도인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왕도인들에게 느슨하게 대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본국으로 귀환한 병사들을 통해 전해지자, 다크 본국의 분위기가 불온해졌다. 다크는 욥테스의 근거지였던 론도시티에서 다크섬 최북단의 다크시티로 수도를 이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다크 북부의 지배계급은 이제야말로 다크 남부와 왕도를 굴복시켜 획득한 부로 본격적으로 자기 영역을 진흥 시켜 볼까하는 희망에 젖어 있을 때였고, 왕도에서 들여온 속성종자로 비록 농사기술이 미진해서 왕도만큼의 성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한 수확을 보고 있던 참이었으므로 오리테스가 왕도에 눌러앉아 왕도를 본국으로 삼을까봐 두려워했다. (그것은 지역 기반을 중시하는 다크인들에게는 당장 정치의 주변부로 밀려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배계급 사이에서는 슬슬 오리테스 불신론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반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격심한 반발은 오히려 다크의 일반인이나 노예계급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은 같은 정복당한 운명이면서도 왕도인만 관대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어 했다. 그들은 비록 피지배계급이지만 다크인이기 때문에 왕도인들 보다는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왕도의 침략이나 약탈 과정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열을 올린 부류가 바로 이들이었는데, 그들은 왕도로 건너가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겠다는 기대에(이것은 일종의 다크 식‘팔자 고치기’였다) 부풀어 앞 다퉈 군대에 자원했으며, 본국에서 테스팔리들에게 당했던 수모를 마치 보복이라도 하듯이 왕도인에게 가혹하게 대했는데, 그 폭력성은 정작 테스팔리들조차 깜짝 놀랄 정도였다. 어쨌거나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반발로 인해 다크 본국의 유력자들은 오리테스에게 왕도인들에게 인정을 봐주지 말고 ‘도주하는 자들을 감시하고 섬멸하도록’요청했다. 이렇게 해서 왕도 내 다크군의 무분별한 행위들을 자제하게 만들 수 있었던 것들은 전부 없어졌다.
설명한 바대로 ‘왕도인 금족령’은 결정한 당사자인 다크의 지배계급이나 오리테스에게는 별 문제 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일이었으나 그들도 B.R 7년경에는 크나큰 오산이었음을 분명히 깨달았으리라. 그때까지 변변한 군대 조직 하나 만들지 못했던 왕도인이 유독 도주하는데 만큼은 치밀하고 조직적이었기 때문이다. 왕도인들은 각개 무리지어 여러 차례에 걸쳐 소란스럽게 피난을 시도함으로써 다크인의 경계태세를 쓸데없이 강화시키는 일을 하지 않았다. 언제나 마을 하나가 쥐새끼 하나 없이 싹 비워지는 일은 오랫동안 도주할 낌새를 보이지 않고 태연하게 생업에 종사하다가 대거의 피난민이 어디서 발견되었다는 거짓 정보에 속아 다크군이 추격을 위해 병력을 이동한 사이에 일어났다. 그 대거의 피난민은 옆 마을의 왕도인들이 길 위에서 거짓으로 긴 행렬을 연출해서 만든 공작이었음은 말 할 나위없다. 그리고 그들은 다크군이 접근하면 시침을 떼고 마을에 돌아와서는 그때서야 속은 것을 알아챈 다크군이 이미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옆 마을로 이동하는 순간에 신속하게 도주했다. 다크군의 숫자가 비록 많았지만 왕도의 크고 작은 샛길을 모두 감시할 만큼 능력이 남아도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러한 ‘시간차 도주’에 늘 농락당할 수밖에 없었다. 다크군도 병력을 나누어 이동한다든지 마을을 오가는 연락책을 색출한다든지 하는 방법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왕도인들은 꿈토 시절에 개발한 잡초를 이용한 5가지 연락법을 이용했기 때문에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를 통해 여유 있게 대응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는 장기판의 졸이 포나 차 사이를 교묘하게 피해가는 형국이 되었다. (5가지 연락법이란 마을 입구에 있는 잡초의 베어낸 위치, 뽑아낸 자국, 매듭짓는 방식, 밟힌 상태, 싱싱하거나 시들시들한 정도에 따라 각각 다른 것을 의미하게 만든 것이다. 의미는 어떤 사항의 결정 혹은 부결 여부나 마을의 호사 혹은 흉사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것은 마을의 게시판 같은 것으로써 내부인 뿐만 아니라 외부인에게도 개방된 것이었으나 이러한 신호를 몰랐던 다크인들은 오고 가는 사람들을 아무리 감시하고 추궁해도 전령을 찾아낼 수 없었다. 왕도인들은 모여서 한가하게 날씨나 건강, 자식 얘기를 하면서 중대한 얘기를 입 밖에도 내지 않으면서도 자기 마을이나 다른 마을 앞의 ‘게시판’을 보고 어떤 결정이 났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다크인의 기준으로는 왕도인들은 모두 첩자이거나 아무도 첩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대륙 최남단에서 불독 지방에 이르는 길은 느긋한 여행일 경우 3~4년이나 걸리는 방대한 거리이다. 대규모부대는 피했다 하더라도 길목에서 우연히 소규모의 다크군들과 마주칠 때도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고생을 해서라도 일단 눈물의 강을 도강하기만 하면 그 당시에 상당히 조직이 정비된 망명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다크군과의 여러 번에 걸친 접촉을 통해 다크군의 습관이나 규율도 어느 정도 파악하기 시작한 꿈기의 진영은 여기에 피난민들이 경험을 통해 얻은 효율적인 이동체계를 더할 수 있었으며 농기구겸 무기나 맹수부대를 다루는 데도 익숙해졌다. 그러나 앞으로의 꿈성 군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전투법의 혁신은 B.R 7년 이후에 생겨났다.
성왕 꿈기 -B.R 7년 승리와 패배
마침내 오리테스가 채오 지방에서부터 북상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했을 때, 16세의 꿈기는 이제야말로 본격적인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을 직감했고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최초의 접전은 역시 눈물의 강을 사이에 두고 일어났다. 이 전투에서 저항군은 도강을 하느라 정신없는 다크군을 강 건너에서 기다렸다가 섬멸하기로 결정했다. 결전 지점은 현재 멍멍시티와 론앙시티를 잇는 낙루교 부근이었는데, 물살은 세지만 강폭이 최대한으로 좁혀지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미 B.R 11년 경 부터 왕도인들이 임시로 설치한 교각이 있었다. 엑박과 꿈기는 각각 저항군 본대를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지휘했고 불독(불독공 코코)은 사냥개를 풀어 다크군 양 측면을 공략했다. 산츄는 낙루교 밑에 공작부대와 대기하고 있다가 다크군의 선두가 반 정도 빠져나갈 무렵 교각을 붕괴시켜 다크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그러나 다크인들은 수영에 능했기 때문에 그 격류에도 불구하고 강기슭에 도달하는 상당수의 병사들이 있었고, 본격적인 전투는 좌군과 우군의 활약에 달려있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3월 16일의 낙루교 전투는 꿈성 왕도 역사 최초의 승전이 되었다. 특히 이 전투에서 꿈기가 고안한 진형이 큰 성과를 거뒀는데, 이 기술은 추수할 때 비효율적인 움직임을 줄이고 집약적으로 곡물을 수확하기 위해 사용되던 ‘추수 비상각’이라는 농사 기술을 전투 대형으로 응용한 것이었다. 추수 비상각은 논을 따라 잘 심어진 벼에 사용하던 기술인만큼 대오를 갖춘 다크군이 접근할 때 적합했다. 마치 공동 경작을 할 때처럼 밀집 대형으로 일렬씩 늘어선 왕도인들이 키가 크고 다리가 긴 다크인에게 추수 비상각을 사용하자, 하반신에 허점이 많은 다크인들은 균형을 잃고 쓰러져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선봉에 이어 도강을 마친 2대 3대까지 저항군에게 쫓겨나 오히려 눈물의 강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던 오리테스는 두 말 하지 않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오리테스 군이 후퇴하는 것을 본 왕도인들의 기쁨은 컸다. 이 전투를 통해 꿈기는 거의 꿈성 전역의 지지를 얻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 실효성이 의심스러웠던 전투대형이 큰 성공을 거둔데다 더욱이 그것이 그 흔한 농사기술이었다는 점 때문에 왕도인들은 자신감을 얻었고 그 전법의 창안자인 꿈기는 거의 꿈신의 재래인 것처럼 받들어졌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의 나날들도 오래 계속되지는 못했다.
곧 맹렬한 반격이 있으리라고 예상한 왕도인들에게 첫 승리가 있었던 3월 16일부터 계속된 대치 상태는 오히려 맹렬한 불안감을 불러 일으켰다. 아니나 다를까 3개월이나 강 건너에서 노려만 보고 있던 오리테스는 품질 좋은 다크 산 명마를 본국에 요청하여 실어 나르는 중이었고 6월이 되자마자 왕도에 도착한 기마군단이 빠른 속도로 북상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으나 왕도인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만일 오리테스의 기마 군단이 도착하기 전에 강을 건너 승부를 냈다면 12년의 다크 침략전쟁도 절반으로 단축되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다크인들에 대한 공포가 한 번의 대승으로도 씻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저항군 내부에서는 신중론이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6월 6일의 말발굽벌판의 패전으로 이어졌다. 낙루교 건너의 평원은 원래 이름이 없었으나 세찬 물살을 단숨에 가로질러 온 기마 군단 때문에 평원에는 무수한 편자 자국이 생겨 그 후부터 말발굽벌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허나 말에 짓밟힌 것은 벌판뿐만이 아니었다. 그 날 아침 왕도인들은 지축이 흔들리는 굉음과 말 울음소리에 잠이 깨서는 막사조차 챙기지 못하고 도망쳐야했다. 추수 비상각도 맹수 부대도 파괴력이 강한 기마 군단에는 속수무책이었으며 그 날의 전황은 마치 다크 전쟁 초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왕도인들은 퇴각로를 차단하고 있는 다크군의 3군단까지 맞게 되었다. 왕도인들이 전방의 오리테스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는 동안에 3군단은 퇴각강과 눈물의 강 중류를 통해 두 번이나 강을 건너 왕도인들의 배후로 돌아 들어왔던 것이다. 넓은 평원에서 앞뒤로 적을 맞게 된 왕도인들은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퇴각하는 왕도인들은 대부분 격파되었으나 왁왁 지방의 갈대숲 쪽으로 도망친 왕도인들은 운 좋게 부대를 재규합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전투 이후로 저항군의 규모는 2만 정도로 60% 가량이 줄어 위용을 크게 상실했다. 더욱 좋지 않은 일은 그 전투로 불독이 부상을 입어 지휘 일선에서 물러난 일과 안전늪 전투의 악몽을 되살려낸 엑박이 심한 좌절감에 무슨 일이든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하게 된 것이었다. 지도부의 불안한 상태는 바로 저항군의 사기에 영향을 미쳤다. 급기야 산츄가 현실적으로 오리테스에 대한 저항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꿈기에게 조심스럽게 오리테스에게 항복하는 것을 검토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꿈기가 이 제안을 거부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우주의 꽃, 우주 제일의별이라고 불리는 꿈성에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 꿈기는 일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불굴의 정신’이나 ‘결사항전 하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항복을 거부한 것이 아니었다. 본 흐름에서 벗어나는 일이지만 더 자세한 내막을 알기 위해 꿈기라는 인물을 이쯤에서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꿈성의 역사 (인물 열전 : 성왕 꿈기)
앞서 서술했듯 꿈기는 B.R 23년에 태어나 B.R 12년의 다크 전쟁을 겪고 B.R 2년에 기적적으로 재기해서 왕도를 탈환, 그 후 왕도인으로서는 최초로 바다를 건너 다크섬 본토를 공략하고 왕도로 돌아와 리러력 원년에 왕위에 올라 꿈성의 왕국 시대를 열었던 우주에 널리 알려진 영웅이다. 꿈기는 그 후로 리러력 56년까지 전쟁으로 삭막해진 꿈성을 재건하고 달력제정(조부 꿈리와 부친 꿈러의 이름을 따서 리러력이 되었다.), 국어와 도량형 통일, 꿈기 법전 제정, 정부 체제 정비, 군대 창설과 개편, 세율 조정, 도로 항만 공사, 안치공국 요새화, 2차 원탁회담으로 영주국 신설, 영토 개척 등 수없이 많은 왕국시대의 기틀을 닦으며 79세까지 장수하다가 죽었다. 그러나 우주에 널리, 그리고 잘못 알려져 있는 통념은 특히 영토 확장과 오지 탐험이 대부분 꿈건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부분이다. 꿈건은 리러력 12년에서야 태어났고 기아나 이바노프, 에른, 가나, 존을 제외한 중요한 지역들은 모두 꿈기가 다크 전쟁 당시에 개척하거나 꿈기 제위 시에 꿈건과 공동으로 개척했다. 실제로 꿈건이 44세에 제위에 오를 당시에는 왕도의 영토가 안정되어 있어 막상 꿈건은 제위 기간 동안에는 어떤 영토 확장도 시도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토 확장의 공은 그 당시의 왕이었던 꿈기의 공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함에도 왜 세상에는 정복왕 꿈건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을까? 거기에는 씁쓸한 이유가 있다. 아버지를 퇴각의 강에서 잃었을 때 꿈기는 11세였고 그때부터 엑박이 꿈기를 군장의 유일한 후손, 꿈성인들의 진정한 지도자 감으로 힘껏 내세웠기 때문에 꿈기는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세상에서 이름을 얻었다. 지도력을 상실한 불독과 엑박을 대신해 명분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꿈성의 진정한 지도자가 되는 B.R 7년 무렵에도 겨우 16세였을 뿐이었다. 꿈기의 인기와 명성은 그야말로 치솟기 시작해서 꿈성왕도를 재건하고 다크를 굴복시키는 리러력 원년 경에는 신이라는 그혼그리조차 꿈기 앞에서 무색할 정도였다. 그러나 꿈기가 모든 것을 평정하고 제위에 오르자, 아이러니컬한 현상이 일어난다. 약관에 불과한 23세에 세상을 다 얻었고, 또 12년의 전쟁 기간 동안 신화적인 전공과 업적을 이룩했기 때문에, 꿈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엄연히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몇 천 년 전의 영웅마냥 전설속의 인물로 취급당했다. 전설과 망각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꿈성인들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꿈성인들은 도무지 그 피비린내 나는 시절의 전쟁 영웅과 지금 눈앞에서 법을 제정 한다 체제를 정비한다하면서 행정업무에 골몰하는 공무원 스타일의 왕이 동일인물이라는 것이 어색한 나머지 도무지 매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꿈기를 빠른 속도로 잊어버렸다. 이제 사람들이 신나서 떠드는 꿈기왕에 대한 모든 일화가 왜 리러력 10년 경 이전에만 맞춰져 있는지 이해가 되는가? 당시 사람들은 다크 전쟁 이야기를 밤새도록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자기들이 (마치 죽은 사람인 양)이야기하는 꿈기왕이 아직도 왕도의 멋지고 튼튼한 성 안에 건재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깜짝 놀라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세간에서 이렇게 민망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꿈기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꿈기는‘아무래도 내가 죽을 때를 놓친 모양이다’하는 농담을 했다고 하니 전혀 개의치 않은 모양이다. 문제는 꿈기가 신이든 왕이든 귀신이든 그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뛰어난데서 비롯한 것이었으니까.
이제 이야기는 앞서 꿈기가 산츄와 함께 항복을 고려하던 장면으로 돌아온다. 이 장면만큼 꿈기라는 인물이 어째서 위대한 지도자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으리라. 산츄가 도무지 이길 가망이 없다고 말했을 때, 꿈기는 의외로 쉽사리 산츄의 말에 동의했다. 단지 동의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후에 산츄의 회고록에 따르면 꿈기는 우리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방법으로, 그 넓은 강을 두 번이나 건너서, 우리의 배후로 몰래 돌아와 퇴각로를 끊은 것은 오직 용병의 천재 오리테스만이 할 수 있는 탁월한 전술이었으며, 기마 군단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것으로써, 다리가 짧은 왕도인은 승마란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니 앞으로도 기마 군단을 대적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산츄는 오리테스에 대한 칭송으로 들리는 이 말 다음에 꿈기가 바로 ‘그래도 항복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당혹스러웠다. 비단 회고록뿐만이 아니라 산츄는 그 후에도 공석 사석을 가리지 않고 그때 꿈기가 너무도 절망한 나머지 불독 지방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비장하게 전멸하는 것을 원하는 줄 알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때 꿈기의 심중에 저항군이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들어있었다는 것은 그 후 꿈기의 행보로 보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꿈기는 승전과 패전을 비롯한 그간의 수많은 경험을 차분히 되짚어보면서 다크인들의 전략과, 그에 대한 응수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꿈기가 꿈신의 후예라는 것을 내세워 지도자가 되었고 혈통에 대한 집착과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다는 점 때문에 그를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가치관을 지닌 인물로 생각하지만, 막상 꿈기가 가장 의식하고 모델로 삼은 인물이 오리테스였다는 것을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실제로 꿈기는 오리테스의 조선술, 항해술, 진법, 병참술, 전쟁에서의 말의 활용뿐만 아니라 오리테스의 긴 수염까지 따라했다. 비단 오리테스만 모방한 것이 아니라 산츄의 경제 감각, 불독의 과감성과 끈기, 엑박의 신의와 카리스마까지, 꿈기는 일생을 통해 타인들에게 영향을 주기보다는 끊임없이 타인들을 관찰하고 모방하고 영향 받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꿈기는 자신이 영향 받은 인물을 항상 넘어섰다. 엑박이 두 번이나 패전해 치를 떨며 오리테스에 대해 적개심을 불태운 반면에, 꿈기는 담담하게 오리테스의 승리 원인을 분석했다. 하지만 그 당시 산츄는 기마 군단과 배후 습격에 대해 오리테스를 칭찬했다는 꿈기의 말이 어떤 의미인 줄 몰랐을 것이다. 바로 몇 년 후에 그 두 가지가 오리테스를 왕도에서 몰아내는 무기로 사용될 것이라는 사실도. 지도부 막사를 나서며 꿈기는 산츄에게 ‘살아있기만 하다면 재기할 기회는 온다’고 말했다고 한다. 여름대륙을 찾아 떠나기 5일 전의 일이었다.
성왕 꿈기 -B.R 7년 여름대륙을 찾아서
한편 말발굽전투에서 승리한 오리테스는 불독 지방을 여유 있게 순회하면서 5년간 왕도인들이 비축한 곡물을 회수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B.R 7년 후반인 10월경에는 불독 지방 내의 저항군이 흔적도 없이 괴멸된 것 같다는 보고를 접한다. 이미 그 3개월 동안 왕도 패잔병들과의 (한쪽의 일방적인 소탕이었지만)접전이 여러 차례 있었으므로 오리테스 역시 불독 지방에서 저항군들은 씨가 말랐다고 확신하기에 충분했다. 불독 지방에서 저항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은 남아있었다. 꿈기를 비롯한 저항군의 중추 지휘관을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크국은 본거지를 생활의 터전이자 정치적 기반으로 중시하기 때문에 전쟁은 영역의 싸움으로 끝난다. B.R 7년 11월, 저항군의 본부로 쓰여 졌을 듯싶은 붕괴된 요새가 발견되었고 거기에서 다수의 군기를 비롯한 총대장의 유류품을 찾아냈다. 이미 수개월의 수색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오리테스는 저항군의 본거지가 파괴되고 불독 지방 전역을 수복한 것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한다. 그 순간의 오리테스의 판단은 일견 옳은 것이었을 것이다. 이미 세계의 끝까지 밀려난 저항군이 바다에 투신 하는 것 말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저항군이 발붙일 땅은 한 뼘도 남아있지 않으니 그들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가 비참한 최후를 기다리는 운명만 남아있을 뿐이다. 오리테스는 이번 전쟁에서 사로잡은 왕도인(그들은 대부분 피난민이었다) 8만4천을 노예로 삼아 남쪽의 대농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렇다면 오리테스가 폐허가 된 본거지에서 낡고 파손되긴 했지만 옷가지들과 농기구를 찾아낼 무렵, 꿈기와 저항군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 저항군이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전제는 오직 저항군의 근거지가 될 만한 곳이 존재하지 않을 때만 성립한다. 사실, 다크 전쟁 이전 꿈성의 공식적인 영토는 고 산맥에서 루즈렉 지방까지 였고 그 위에는 넓은 공백지라는 것만 알려져 있었다. 다크 전쟁의 피난기를 통해 겨우 불독 지방까지 발길이 미칠 수 있었고 다크인도, 왕도인도, 심지어 불독 지방의 원주민도 그곳을 세상의 끝으로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다른 대륙과 전혀 왕래가 없었던 왕도인들은 아예 제쳐 놓고 중악섬, 젤 왕국과 오랜 전쟁을 하던 다크인들도 젤 왕국 건너에는 광대한 카이저 대륙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새로운 세계나 전설의 땅, 잊혀 진 대륙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문명에나 있는 것이지만 그런 것은 소년이나 철부지 모험가의 상상력을 자극할 뿐인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뿐이고 대부분의 어른들은 헛소리로 치부하기 일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 그 당시 꿈기는 그러한 전설조차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만큼 코너에 몰려있었다. 꿈기가 여름대륙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불독 지방에서 항전하던 때로,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그저 큰 강 아래(눈물의 강이다) 훌륭한 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데 반해, 유독 현재 불독 시티 주변에서 규합한 원주민들 사이에서만 “여름의 섬”이야기가 있는 것에 대해 평소부터 흥미를 느끼곤 했지만 처음에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불독 시티 앞바다에서 한참 나아가면 맑게 개인 여름에만 저 멀리 수평선 끝에 희미하게 보이는 여름 대륙의 뾰족하게 튀어나온 칼킥 반도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얘기(“여름에만 수면 위로 부상하는 그혼그리의 신비한 섬이 있어!”“거기는 낙원이지만 들어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이라더군!”)를 하는 것은 (불독 시티의 원주민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역시나 변두리의 미개한 사고 방식을 입증하는 단적인 증거로 해석되었다.(물론 그로부터 얼마 후엔 그들에게 씌워진 억울한 편견이 싹 사라졌을 것이다) 아무튼 꿈기는 여러모로 비범한 인물이었으므로 원주민들이 떠드는 이야기들 중 정말로 들어주지 못할 정도로 허황된 이야기들을 빼면 과거에 조잡하나마 배를 타고 앞바다에 나가보았을지도 모르는 불독 지방의 원주민이 말하는 그 희미한 땅은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있을 법한 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아무리 꿈기가 그렇게 확신했어도 지도부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바다 건너의 땅 운운하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산츄는 당장 불독 지방 출신들의 증언을 종합적으로 분석했을 때 그런 땅의 존재를 언급하는 증언의 빈도가 낮아 신뢰성이 없으며,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세상의 끝까지 오는 대장정에도 주변 도서가 하나도 없었으므로 있을 가능성이 낮고, 만일 있다 하더라도 바다 건너의 섬에서 나타난 다크인들을(그들은 너무도 흉악하다!) 생각해 볼 때 제2의 다크인들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섬이 무인도거나 최소한 우리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건너 갈 방법이 없다는 등등의 이유를 들어 장장 두 시간의 반대론을 폈다고 한다. 원래 성질이 고약한 데다 허리를 다쳐 기분이 한껏 더러워져 있던 불독은 산츄가 말하는 도중에 끊임없이 투덜거리며 그런 애들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느니 차라리 무기를 들고 오리테스를 덮치자고 꿈기를 윽박질렀다.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꿈기는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끼고 있던 엑박을 구원을 요청하는 눈길로 쳐다보았으나 엑박은 애초부터 오리테스에겐 무엇을 해도 통하지 않을 테니 차라리 그 섬에 있다는 그혼그리를 찾아가 오리테스를 내쫓아 달라고 빌기나 하자고 냉소할 뿐이었다. 엑박의 말 때문에, 궁지에 몰린 나머지 무려 지도자급 회의에서 전설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심각하게 논의하는 자신들의 비참함을 상기한 좌중이 침묵에 빠졌다. 그러나 이때 꿈기는 오히려 그런 엑박의 태도에서 무언가 절묘한 수를 이끌어 낼 아이디어를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아저씨는 그혼그리를 찾아보시겠다는 건가요 아닌가요?”엑박은 대답했다. “흥, 그런 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지만. 하긴 뭘 하기는 해야겠지. 어차피 죽을 거 그혼그리를 찾아간 용감하지만 어리석고 무모한 모험가로 죽는 게 낫겠군. 나는 해도 상관없어.”결국 엑박의 이 말은 꿈기에게 찬성으로 받아들여졌고 꿈기는 재빨리 저항군 사이에서 엑박이 용감하고 적극적으로 무조건 찬성으로 나왔다는 살짝 윤색된 정보를 퍼뜨렸다. 말발굽 전투 이후 엑박의 긍정적인 태도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저항군들은 의견이 나뉘었다. 한쪽은 이 작전을 엑박의 부활, 의욕적인 응전으로 해석했고 한 쪽은 엑박이 우울증 끝에 자멸에 가까운 제스쳐를 보이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엑박은 5년이나 저항군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사람이다. 그와 꿈기가 모두 미지의 땅 탐험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저항군들의 여론을 급속히 일치시켰다. 사태가 이렇게 진전되자 불독은 드디어 의견이 하나로 합쳐져 무언가 행동을 취하게 됐다는 사실 하나에 흥분한 나머지 당장 원기를 되찾아 여기 저기 지시를 내리고 호통을 치러 다니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취할 행동이라는 것이 고작 어린에 잠꼬대라는 사실은 진작에 잊어버렸다) 산츄는 엑박처럼 여름의 섬에 죽으러 갈 생각은 하지 않았으므로 재빨리 이번 탐험의 실패로 인해 살아 남은 사람들이 부담할 재산과 인명의 손실을 계산했다. 산츄의 막사에서는 밤 늦게 탄식과 한숨이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서성이는 그림자가 목격되었다. 그러나 산츄는 지금 말로 소시민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힘 밖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일에 대해 흐름을 바꾸고 조종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여하튼 이틀 후인 7월 8일, 자신의 말 때문에 정말로 여름의 섬으로 출발하기로 결정되었고, 심지어 자신이 선발대의 지휘를 맡게 된다는 사실을 난데 없이 통고받은 엑박은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왁왁 지방의 갈대숲에 은신하고 있던 저항군들은 그레이트 데인져 산맥 바로 밑에 최대한 바짝 붙어 불독 시티로 ‘신속하되 요란하지 않게’라는 어려운 지침을 이행하며 조심스럽게 이동하고 있었다. 출발은 7월 초였으나 불독 전역에서 수색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최대한 다크군을 피해 우회해야 했고, 덕분에 왕도대륙 북단의 이바노프 해를 최초로 접할 수 있었다. 우회하는 도중에 으릉 지방에서는 해변에 접한 대규모의 숲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숲을 통과해 조심스럽게 남하했다. 아마 그 당시엔 그 숲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고, 또 그들의 운명을 어떻게 결정하게 될 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9월경에 불독 시티에 도착한 저항군은 이제 바다를 건널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가을이 되어 이미 여름의 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동안의 여정에서 꿈기에게는 배를 만드는 기술이나 다른 수로 바다를 건널 방법이 있는 것처럼 암묵적으로 믿어지고 있었으므로 꿈기가 바다를 정면으로 마주선 채 오른손을 앞으로 내지르면서 “가!”하는 명령을 내렸을 때 저항군들은 혹심한 절망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논란의 여지가 있고, 또 세간에서는 꿈기왕이 엑박의 등을 낭떠러지에서 몰래 밀어버렸다는 의혹이 제기되고는 있으나, 어쨌든 그 상황에서 가장 먼저 바다로 뛰어들어 작전을 수행한 사람은 엑박이었다. 그리고 싫다고 버티던 선발대원 수십 명도 엑박을 따라 눈물을 흘리며 헤엄치기 시작했고, 절벽 위에서는 나머지 저항군들이 꿈기에 의해 바다로 떠밀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후에 생존한 선발대원들에 의해 “공포의 35시간”이라고 불린 35시간의 실레노스 해협 횡단은 실패로 끝났다. 갑자기 파도가 거칠어지는 부분 때문에 선발대원 30명 중 엑박을 포함한 17명만이 기진맥진한 채로 출발 지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실패는 전적인 결코 전적인 실패가 아니었다. 숨이 턱에 차서 해안으로 돌아 온 선발대원들은 한 명씩 도달할 때마다 하나 같이 다음과 같은 말을 외쳤던 것이다. “정말 있었어! 여름의 섬이 정말 있었어!”하고.
파도 너머 희미한 육지의 형상을 보았다는 대원들의 진술에 의해 꿈기와 저항군들은 날아 오를듯한 기쁨을 느꼈지만 더욱더 바다를 건너 갈 다른 방법을 간구해야 했다. 선박 건조를 할 기술도 시간도 없었던 왕도인들은 육탄 돌격 외에는 길이 없었다. 별 도리가 없어 침묵만 하고 있던 저항군에게 이윽고 산츄가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놓았다. 으릉 지방을 지날 때 통과한 숲이 아무래도 불독 시티의 해안선보다 더 깊이 바깥쪽으로 나가 있는 것 같고 잘 하면 여름의 섬까지의 최단 거리를 발견하거나 파도를 우회할 수 있고, 정 안 되면 그 숲의 나무를 베어 엉성하나마 배라도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썩 합리적인 의견은 아니었지만(하긴 지금까지 합리적인 전략을 채택한 적이 한 번 이라도 있었던가) 다른 방도를 택할 수 없었던 왕도인들은 으릉 지방을 향해 북상하기로 결정했다. 오늘날 우리는 꿈성 전도에서 왕도 대륙과 여름대륙을 잇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유명한 “절벽의 다리”이다. 후에 이것은 양 대륙 간의 교통량이 늘어나고 행인들의 안전을 확보할 필요성이 생기자 절벽의 양쪽에 그레이트 데인저 산맥에서 가져온 바위와 시멘트로 보강해서 길을 넓히고 포장을 해서 지금은 지도에도 나올 만큼 거대한 땅이 되었다.(길 양쪽에서 부딪혀 들어오는 파도에 의한 침식으로 조금씩 길이 파손되기 때문에 꿈성 정부가 왕국시대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보수를 해야만 하는 사업이다) 그러나 꿈기 일행이 으릉 지방의 깊고 깊은 숲을 한 달이나 걸려서 통과해 처음으로 절벽의 다리를 발견했을 당시는 그 “절벽의 다리”라는 이름 그대로 바다 한 가운데로 생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있고, 그 절벽의 꼭대기는 저항군이 일렬종대로 겨우 행군할 수 있을 만큼 좁다란 길이었다. 으릉숲이 얼마나 긴지 끝까지 가보기나 하자 하는 심정으로 숲을 통과하여 이렇게 환상적인 광경을 마주한 왕도인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을까. 정말 절벽의 다리는 전설 속의 고대인들이 남긴 불가해한 유적처럼 저쪽 대륙을 향해 끝도 보이지 않는 구불구불한 길을 열어놓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꿈성 전도를 펼쳐들면 우리는 우연히도 왕도 대륙과 여름 대륙이 절벽의 다리를 중심으로 묘하게 대칭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좁은 절벽 위를 위태위태하게 걸어가면서, 꿈기 일행은 마치 거울 속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주술적인 기분에 젖고 말았다. 절벽 위를 지나가면서 보이는 풍경들이 묘하게 절벽 저쪽과 대칭적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꿈기 일행이 여름 대륙으로 건너가 그곳을 탐사하면서 그레이트 데인저 산맥을 거울 속에 반사한 것처럼 체면 산맥이 있고, 눈물의 강과 실레노스 강이 꼭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진다. 아무튼 꿈기 일행은 그 끝도 보이지 않는 절벽 위를 조심스럽게 진군해야 했기 때문에 꽤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오리테스가 저항군의 본부를 찾아내고 불독 지방을 평정한 11월. 꿈기 일행은 꿈성인 최초로 여름의 섬-이제는 여름의 대륙이라고 불러야 할 전설의 땅에 도착했다는 벅찬 감동에 젖어 있었다.
성왕 꿈기 - B.R 7년에서 2년까지
여름대륙을 극적으로 발견한 덕분에 꿈기 일행은 앞으로 5년간의 귀중한 재정비 기간을 갖게 되었다. 여름 대륙은 그들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안식처이자 제2의 고향이 되었지만 그들이 처음으로 발을 디딘 실레노스 지방은 우거진 밀림과 무시무시한 동 식물 때문에 결코 정착하기 쉬운 땅이 아니었다. (이러한 실레노스 지방의 야생상태는 여름대륙에서 꿈성 인류가 출현하지 못한 원인으로 보인다.) 꿈기 일행은 그 오년 간 전사라기보다는 오지 탐험가의 활동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재질은 무르지만 높이가 수십 미터에 이르는 실레노스 지방의 나무는 하늘을 뒤덮어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온도는 왕도와 비교해 크게 높은 편은 아니었으나 거의 영원하다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계속되는 우기 때문에 늘 습해서 꿈기 일행은 언제나 축 늘어지고 끈적끈적한 느낌 때문에 우울해져 있었다. 더군다나 발밑은 안전늪 정도는 애교로 보일 정도로 깊이를 알 수 없는 늪과, 늘상 고여 있는 진창, 아니면 물웅덩이나 개천이 있어 2초에 한 번 씩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나중에는 아예 나무에 길게 늘어져 있는 넝쿨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일행이 대략 지금의 가가지방에 막사를 짓고 기거하면서부터는 오리테스의 아무런 위협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경비를 세워두는 방침이 정해졌는데, 실레노스 지방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맹수들이 날뛰어 왕도인을 물어 가는 사고가 잦게 일어났으며, 하다못해 이 지방에서는 맹수가 아니라 모기나 개구리조차 사람을 충분히 해칠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꿈기 일행은 교대경비제도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실레노스 지방에 와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농업이었다. 언제나 속성 종자를 품에 가지고 다니는 왕도인들은 새로운 땅에도 좋아라하고 속성 종자를 심었는데, 실레노스 지방은 어찌 된 영문인지 식물이건 동물이건 무조건 거대하고 괴력을 가진 존재로 만드는 땅인 것 같았다. 첫 수확을 하러 간 왕도인들은 낱알 하나가 어른의 발만하고, 심지어 꿈틀꿈틀 스스로 움직이기까지 하는 벼를 보고 그만 식욕을 잃어버렸다.(우주시대가 열려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는 행성들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생기자, 처음에는 이렇게 혐오식품에 가까웠던 실레노스 산 곡물이 고맙게도 전 우주의 구황식품으로 떠올랐다) 결국 실레노스 지방에서는 농사보다는 지천에 널려 있는 과일과 동물(이라기보다는 괴물에 가까웠지만)들로 식량을 해결하게 되었다. 실레노스 정착이 이 년째(B.R 5년)에 접어들자, 처음에는 생존에 급급해 정신이 없었던 꿈기 일행에게도 차츰 여유가 생겼다. 실레노스 지방의 야생을 열성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도 나왔고 캄캄한 밀림의 지리를 훤히 꿰뚫는 사람도 나왔다. 이제는 걷는 것보다 줄을 타고 날아다니는 것이 더 편하다는 사람도 있었고 드물지만 실레노스에서 농사를 지은 곡식의 맛에 심취한 사람도 나왔다. 실레노스에서의 정착이 자리를 잡아 가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적응을 잘 한 사람이든 적응이 불편한 사람이든 왕도 본토를 수복하겠다는 생각을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레노스로 들어 온 2만명이 정착지를 구했다고 해서 본토의 수백만 왕도인들이 오리테스의 노예농장에 잡혀있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저항군의 지도부에는 왕도인들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 하나로 고난에도 용감하게 맞선 영웅들이 있었다. 꿈기, 엑박, 불독, 산츄는 그 5년간 본토 탈환을 위한 준비에 매진하고 있었다.
저항군이 전투력을 향상 시킬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이나 자질을 실레노스에서 상당수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선적으로 밀림에 길들여져 체력이 크게 상승했으며 거대 잠자리, 거대 악어, 거대 뱀, 거대 물소 등을 상대하다보니 그런 괴물들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한 무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특히 언급할만한 것은 스틸레토라는 송곳 모양의 검과 각궁인데, 스틸레토는 지금도 우주에서 인기 있는 꿈성의 관광 기념품이며 실레노스에서의 생활을 위해 만들어졌고, 각궁의 경우는 그 시절에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실레노스의 밀림 속에서는 효용이 없었고(빽빽한 나무들이 활의 진로를 방해하기 때문이다)오로지 B.R 2년의 재결전을 위해 만들어졌다. 각궁은 동물의 뼈를 쪼퍼기라고 불리는 실레노스의 거대 개구리의 침으로 이어 붙이는데, 쪼퍼기의 침은 무시무시한 접착성이 있어 각궁을 끝과 끝이 닿을 정도로 구부러뜨려도 절대 떨어지거나 하지 않는다. 여기에 유습유습나무의 넝쿨에서 가느다란 심을 빼내 활시위를 거는데, 이 넝쿨은 쇠줄만큼 질기면서도 탄성이 좋다. 그밖에도 저항군들은 여러 가지 무기와 여러 가지 사냥기술, 함정기술을 개발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실레노스 이전의 저항군과 이후의 저항군을 단적으로 구별 짓는 부분은 실레노스의 온갖 괴물들과 상대하면서 저절로 얻게 된 강심장일 것이다. 실제로 그 공포의 오리테스 기마군단을 몇 년 만에 다시 마주한 저항군들에게 그 말들이 귀엽게 느껴졌을 정도니 말이다. 한편 이 지역에는 위에서 말 한 바처럼 나무가 많았으므로 꿈기는 매일같이 목재들로 얼핏 본 오리테스의 선박을 열심히 따라 만들었다. 처음에는 저항군들 중 아무도 꿈기의 배를 타고 싶어 하지 않을 정도로 실패작이 거듭해서 나왔으나(이것들은 모두 조리용 장작으로 장엄하게 산화되었다), 몇 년 후에는 모양뿐만 아니라 기능도 그럴싸한 배가 완성되었다. 꿈기는 자신이 개발한 함선을 포로로선이라고 이름 짓고 곧바로 양산에 들어갔다. B.R 3년 1월부터 꿈기는 거의 매일 같이 킬킥 반도 안쪽의 바다를 빙빙 돌며 항해술을 연구했다. 불독의 경우는 초대형 아나콘다를 마침내 한 마리 포획해 애완용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여 이참에 아나콘다 부대를 양성하려는 망상에 빠져 있었다.(일설에는 별명도 불독이 아니라 배암이라고 불러 달라고 간절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나콘다에게 있어서는 꿈성인들이 각별한 맛을 선사하는 먹이에 지나지 않았고, 불독의 애완 아나콘다의 배를 갈라 그간 실종된 것으로 알려 졌던 사람을 거의 초죽음 직전의 상황에서 구해내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기 때문에, 저항군들은 결국 불독 몰래 아나콘다를 다 내보내야 했다. 다행히 이 일로 인한 불독의 실의가 오래가지는 않았고, 불독은 곧 물소부대 양성으로 취미를 전환했다. 꿈기와 불독이 실레노스 생활에 별다른 불편을 느끼지 못한 반면에 엑박은 이 밀림 속에서는 오리테스와의 재결전에 더 이상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얻지 못하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앞서 말한 각궁을 개발한 것도 엑박인데(엑박의 직속부하들은 각궁을 만드는 과정에서 쪼퍼기의 침 때문에 서로 붙어 곤욕을 자주 치렀다), 아직 소년이라 새로운 환경에 모험심과 흥분을 느낄 수 있었던 꿈기보다는 다크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고 향수를 강하게 느끼던 중년의 엑박의 활동이 모든 면에서 좀 더 다크와의 결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던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엑박은 B.R 4년 9월경에 왕도와 비슷한 지형에서 전술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꿈기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꿈기는 조선술 연구가 한창이었고, 먼 곳까지 이동하면 실레노스의 목재를 운반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엑박의 제안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쉽사리 이동할 수 없었다. 불독의 경우는 자신의 애완동물과 한시라도 떨어질 수 없었고, 여정이 (그 괴물들에게!)고생스러울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주저했다. 반면에 산츄는 덥고 습한 실레노스의 공기 때문에 밤에 자다가 호흡곤란으로 여러 번 말썽을 일으킨 데다 덤으로 피부병까지 앓고 있었기 때문에 엑박을 지지했다. 어차피 산츄를 산송장으로 만들 수 없어 적당한 곳을 찾아 요양을 보내야 했던 꿈기는 여기서 부대를 둘로 나누기로 결정했다. 엑박과 산츄 휘하에 1만의 병력이 들어갔고 그들에게 실레노스 강을 따라 남하하면서 평원지대를 탐색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엑박과 산츄는 실레노스 중류를 지나자마자 평원지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순간 엑박은 오랜만에 왕도로 귀환한 듯한 느낌에 젖었고, 산츄는(그는 왕도에 가본 적이 없다) 자기가 익히 알고 있던 어떤 땅보다 드넓고 비옥한 실레노스 강 하류를 마음에 들어 했고 건강을 곧바로 회복했다. 둘은 곧바로 도도도지방에 자리 잡고 본연의 임무로 돌아갔다. 엑박과 산츄는 꿈기의 추수비상각 전법을 도도도 평원에서 수없이 재현하면서 갈고 닦았다. 밀집 대형과 산개 대형을 각각 몇 개씩 고안해 두었으며, 각궁의 성능을 테스트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산츄는 이때부터 보급과 병참, 그리고 군대 내의 여러 가지 사무와 행정, 그리고 군법과 지휘체계 등에 대한 연구에 몰입하기 시작한다. 비록 다크와의 재결전 당시 산츄의 연구는 미완의 단계였지만, 완성된 산츄의 연구는 등극 이후의 꿈기에게 지속적으로 큰 힘이 되었다. B.R 3년 1월 꿈기의 함대가 차츰차츰 대규모로 편성되기 시작하면서 엑박과 산츄의 평원전투 연습도 마치 재진격이 내일인 것처럼 실감나게 진척되어갔다. 불독은 그 많은 맹수를 다 함대에 실을 수 없다는 꿈기의 냉정한 말에 할 수 없이 가장 조련이 잘 된 물소부대를 중점적으로 육성했다. 때를 맞춰 산츄가 개발해서 보내 온 물소용 안장(모양은 말안장처럼 되어 있지 않고 마치 좌식 의자처럼 생긴 것을 물소 등에 얹게 되어 있다. 기수가 떨어지지 않도록 몸을 안장에 끈으로 고정시킨다)이 4월에 도착하여 불독 휘하 부대는 매일같이 물소 위에 앉는 것을 적응하는 훈련을 했다. 1년간의 집중적인 훈련을 통해 이제는 훈련도 신물이 날 만큼 했다는 말이 저항군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나오게 되자 지도부에서는 본격적으로 왕도 진격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함대를 양성한 꿈기인만큼 왕도 대륙 최북단에 등장하여 상당한 시일을 소요하면서 진격해 결과적으로 오리테스가 대비할 시간을 충분하게 벌게 할 육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꿈기는 어디까지나 말발굽전투에서 오리테스에게 당한 그대로 뒤통수를 치는 심리적인 효과를 주면서 극적으로 등장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B.R 2년 2월 2일. 207척의 포로로선에 승선하기를 기다리는 2만명의 저항군 앞에서 꿈기는 그간의 노고를 격려하고 함대가 출항하는 항구를 ‘압승항’이라고 이름 지어 사기를 고무시켰다. 결의를 다진 저항군들은 정든 여름 대륙을 뒤로 하고 왕도를 향해 출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성왕 꿈기 - 왕도로 진격
압승항에서 출발한 207척의 포로로선은 2월 13일에 제일 먼저 라이탈 지방의 해안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적의 해류와 순풍이 만나 항해는 비교적 빨랐다. 그러나 꿈기는 해안선을 끼고 우회하여 퇴각의 강 하류에 정박하는 길을 택했다. 2월21일에 꿈기가 상륙한 지점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희망항구”이다. 이 항구의 이름이 희망항구가 된 데에는 물론 승리에 대한 낙관이 작용하게 된 탓이지만 그 낙관에는 왕도인들이 겪었던 십년간의 불운이 보상이라도 받듯 여러 가지 호조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항구에 도착한 꿈기 일행은 제일 먼저 오리테스의 본대가 고대 유적 탐사를 위해 기자 지방으로 이동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것이다. 상륙을 위해 수많은 희생을 각오했던 꿈기는 그야말로 솜 한 톨 떨어뜨리지 않고 최대 최초의 난관을 통과했다. 이 무혈입성에 고무된 왕도인들은 오리테스가 신설한 항구 중에 하나로 4번 항구라는 부실한 이름으로 불렸던 이곳을 당장 희망항구로 고쳐 명명했다. 오리테스는 왕도의 고대 유적에 순수한 학문적인 관심이나 모험심의 발흥 때문에 찾아갔다기보다는 고대 유적에서 보물이나, 하다 못해 다량의 청동기나 석재 따위를 뜯어내 왕도에 세울 오리테스 전승 기념관의 자재를 충당할 생각이었을 것이다.(이미 B.R 4년경부터 대규모로 시작된 공사였으므로 상당한 진척이 있었지만 그때는 목재든 석재든 왕도 내륙에는 항상 자재 부족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오리테스는 그 먼 고 산맥이나 그레이트 데인져 산맥까지 가서 석재를 운반해왔다) 어쨌든 저항군으로서는 오리테스의 본대가 다른 부대와 합류하기 전에 이리지방의 2개 군단과 이조지방의 3개 군단 도합 5만의 병력을 속전속결로 제압할 기회를 얻었다. 희망항에서 정체불명의 다수 병력이 출현했다는 보고를 처음으로 받은 것은 거리가 가까운 이리 지방의 노호찹이었는데, 노호찹은 지체하지 않고 이조 시티에 전령을 보내는 한편 왕도로 곧바로 진격하는 꿈기의 진로를 교교 평원에서 차단하고 나섰다. 2월 25일, 왕도 탈환의 첫 신호탄이 될 교교 평원의 전투가 벌어졌다. 꿈기와 저항군은 근접전 전용의 보병 부대(이들은 믿을만한 밀림의 왕자들이다)로 이루어진 꿈기의 본대를 두 파트로 나누어 전면에, 그리고 평원 전에서 특히 위력적인 엑박의 각궁부대를 양 본대 사이에 배치하고 전면에는 이 전투만을 위해 양성한 물소부대(이들은 익숙지 않은 뱃놀이에 기분이 나빠져서 항해 기간 동안 온갖 난동을 부려 불독의 부대원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었다)가 위용도 당당하게 배치되었다. 다크군은 처음부터 그들의 방식대로 이열 종대로 늘어뜨린 기마 군단을 저항군의 본진 한 가운데로 출격시켜 진영을 양분해 다크군 양 측면에 배치한 제2 제3 기마군단과 함께 협공하여 섬멸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기마 군단에 맞선 것은 이름도 무시무시한 실레노스의 거대 물소였다. 거의 20일이나 채식주의자 꿈성인들과 항해 하느라 고기 맛을 못 본 물소들은 눈에서 살기등등한 빛을 뿜어내며 기마 군단을 덮쳤고, 그때까지의 꿈성에서 무패의 존재였던 다크의 ‘기마 군단’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들이 위력적인 전쟁 도구가 아니라 흉폭한 포식자 앞에 놓인 한낱 먹이임을 깨닫고 정신없이 도망치는 ‘말(Horse)’과, 그 말의 등 위에서 뛰어내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도주하는 신세가 된 ‘다크인’으로 양분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개 기마 군단이 패주하자, 다크 본대가 접근해왔다.(물소부대는 기마 군단을 계속 쫓고 있었고, 이제는 불독의 부대원들도 물소를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각궁부대를 과소평가하고 활의 사정거리 밖에서 별 다른 엄호도 없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는듯한 화살 세례에 첫 번째로 놀랐고, 놀라서 뒤늦게 치켜든 방패마저 푹푹 뚫어버리는 화살의 위력에 두 번째로 놀랐다.(이 통렬한 장면에 엑박의 부대원들은 밀림에서 쪼퍼기를 붙잡고 씨름하던 노고를 단숨에 잊어버릴 정도로 의기양양했을 것이다) 각궁부대의 공격에 의해 노호찹의 부대는 아까 패주한 기마 군단의 손실과 합쳐 60%의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각궁의 사정거리는 매우 길었으므로 저항군의 본대와 화살의 공격 범위 사이에는 넓은 공간이 있었고, 일부 다크군들은 화살세례를 피해 이 공간 안으로 들어와 본진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충분한 타격을 입혔다고 생각한 각궁부대는 다크군이 가까이 접근하자 양 본대 뒤쪽으로 물러났고, 그 공간을 마치 커튼을 닫듯 꿈기의 보병대가 한 부대로 합쳐져서 막아섰다. 불독과 엑박의 부대가 선전하는 것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본대는 자기 차례가 돌아왔음에도 흥분해 날뛰지 않고 침착하게 밀집하여 다크군의 육박으로 인한 1차 충격을 잘 견뎌 내고, 스틸레토와 글라디우스를 이용해 진영 사이사이로 끼어든 다크인을 무찌른 다음, 추수 비상각을 전개하여 거꾸로 다크 군대를 뒤로 몰아 붙였다. 이러기를 계속할 때쯤 불독이 (저마다 입에 고기 한 점씩을 물고 있는)물소부대를 데리고 귀환했는데, 물소부대는 배가 꽤 불러 있었지만 패주하던 노호찹의 군대를 식후 운동 삼아 짓밟아주었다. 교교 평원 전투는 대승으로 끝났다. 지휘관 노호찹은 난전의 와중에 실종되었고 (물론 그 후로도 발견되지 않았다) 2개 군단 2만 3천의 병력 중 4000명만 살아남아 이조시티를 향해 도망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저항군은 약 800명의 손실에 그쳤을 뿐이었다. 왕도인은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꿈기는 왕도인의 저항군에 대한 체념과 망각을 뒤엎고 그들의 기억에 다시 화려하게 등장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의 대승전보와 함께. 이제는 왕도를 수비하기 위해 달려오는 비핌의 3개 군단과의 결전이 남아 있었다.
성왕 꿈기 - 왕도 공방전
3월 2일. 거리 상 가까운 곳에 있었던 비핌의 군대가 먼저 왕도에 도착하여 꿈성강을 건너 올 저항군을 막기 위해 대기에 들어갔다. 그보다 좀 늦은 3월 5일 꿈기도 꿈성강 너머에 있는 황토시티에 도착했다. 꿈기는 왕도를 방어하고 있는 비핌의 병력이 3개 군단이라는 애초의 정보와는 달리 2개 군단만이 있다는 정찰 보고를 받고 나머지 1개 군단의 행보에 대해서 추측해야 했을 것이다. 1개 군단은 오리테스와 합류하기 위해 미나린 지방으로 갔을 수도 있고, 비핌의 열세를 대비해 복병으로 배치되어 있을 수도 있었다. 꿈기는 다크군이 협공을 좋아하는 그들의 장기를 살려 도강을 하느라 고생하는 저항군의 배후를 치기 위해 고강을 따라 왕도를 우회 중이고, 배후의 적을 소탕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왕도의 다크군이 도강하여 오히려 저항군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꿈기의 판단이 맞다면 다크군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꿈기는 다크군의 계획이 전적으로 타이밍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저항군이 앞뒤로 적을 맞을 시간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차례로 붕괴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꿈기는 도착하자마자 쉴 틈도 내주지 않고 부하들을 몰아댔다. 그러나 비핌의 군단은 오로지 꿈성강을 방어하겠다는 단단한 결심으로 대기하고 있던 참이었기 때문에 도강은 쉽지 않았고 시간을 자꾸 허비하게 되었다. 비핌이 그렇다고 해서 여세를 몰아 꿈성강을 건너 본영 쪽으로 들어오려는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꿈기는 정말로 다크군이 포위망을 완성하기를 기다리고 있거나, 최악의 경우 오리테스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초조해졌다. 3월6일 새벽, 꿈기는 각궁부대에게 강 건너로 화살을 쏘게 하여 다크군을 약간 뒤로 물러나게 하자마자 정예를 투입하여 도강을 개시했다. 그러나 너무 섣부른 진입이었던 탓에 금방 대열을 회복한 다크군이 밀려들어와 도강은 실패하고 말았다. 고민하던 꿈기에게 산츄가 한 가지 방안을 내놓았고, 아침 일찍 한 무리의 병력을 이끌고 황토 시티를 빠져나갔다. 몇 시간 후 비핌은 저항군이 곤룸 지방 방향으로 북상하여 보다 상류에서 도강을 하려는 것 같다는 보고를 받았다. 기만전술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강하게 품게 된 비핌은 망설이다가 삼천의 병력을 나누어 상류 쪽으로 보냈고, 산츄는 대군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잔뜩 요란하게 위장을 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론 천 명 정도의 병력이었을 뿐이었으므로 감히 부딪혀오지 못했다. 비록 산츄의 계략대로 다크군의 본영에서 일부의 병력을 빼내어 시시 지방에 묶어두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비핌이 신중하게 극소수의 병력만을 차출했기 때문에 다크군의 집중력을 크게 약화시키려던 그 계략은 실패나 다름없었다. 꿈기는 그제서야 상류에서 요란을 떨어 시시 지방에 남아 있던 유일한 꿈성강의 교각을 다크군이 파괴하게 만드는 것보다 비핌의 눈앞에 위장 막사를 남겨두고 상류로 올라가 신속히 다리를 건너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내고는 괴로워했다. 그러나 달리 선택할 길은 이제 남아있지 않았다. 꿈기는 대규모의 희생을 각오하고 전원 도강을 명령했다. 건설부대를 이용한 교각 건설은 이미 실패로 돌아갔으므로 여기서 다시 꿈기의 유명한 “가!”명령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듣도 보도 못한 섬을 향해 여름의 험난한 바다를 건넌 적 있던 꿈기의 군대는 아주 억지스러운 명령은 아니라며 차라리 다행이라는 마음을 품은 채 일제히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번의 헤엄은 비교적 질서를 갖추어 이루어 졌다. 일단 다크군 궁병의 사정거리 직전까지 무질서하게 헤엄쳐 온 저항군은 거기서 대오를 갖추어 잠시 누워 휴식한 뒤, 산개 대형을 펼친 채 구령에 맞추어 일제히 같은 속도로 전진했다. 이 과정에서 4천이나 되는 엄청난 희생이 생겼다. 그러나 도강에 성공한 저항군 선봉부대가 용맹을 발휘해 강 저편에서 휴식을 취하며 여유있게 기다리던 다크인의 부대를 상대로 대오를 교란시키는 믿을 수 없는 전과를 올렸으므로 전황은 급격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한편 저항군이 도강을 했다는 전령을 접한 상류 쪽의 다크군 3천이 다급한 나머지 구원을 서두르다 어느덧 패주하는 부대마냥 무질서해지는 바람에 산츄는 1천의 부대를 이끌고 이들의 뒤를 쫒아 절반을 괴멸시킬 수 있었다. 산츄가 내려오면서 흩어진 다크군을 격퇴시키고 본진과 합류했을 때는 후발로 도강에 성공한 꿈기가 (꿈기는 급히 제작한 전용 군선을 타고 도강했다) 비핌을 사로 잡아 다크군대의 항복을 막 받아내던 참이었다. 다크군대의 무장 해제가 한참 이루어질 무렵 도착한 비핌 분대 1만명이 꿈성강 너머에 도착했지만 희생을 무릅쓰고 속공을 택한 꿈기의 전략 때문에 무용하게 되어버려 강 건너에서 그야말로 불 보듯 멍청하게 서 있는 꼴이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1만명의 군대를 가지고 있는 분대의 지휘관이 즉시 공격을 개시했더라면 전황은 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 때 저항군의 잔여 병력은 1만2천명이 조금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크군 분대는 본대의 지휘관이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에 사기를 크게 꺾였으며(그에 반해 저항군의 사기는 파죽지세였다) 왕도에서부터 저항군의 배후로 크게 우회하는 동안 쉴 새 없이 재촉당하며 체력을 소모했기 때문에 이미 전의가 싹 가신 상태였다. 칼 한 번 부딪히지 않고 분대의 항복마저 받아 낸 꿈기는 포로들에게 왕도인의 법과 관습과 생활을 존중한다면 왕도인의 모든 특권과 지위를 보장하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다크군의 포로들은 그들의 앞으로의 삶과 가치관을 결정할 순간에 처해 막중한 선택을 해야했던 역사적인 인물이 되어버렸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순간 농사나 짓고 따분한 일이나 하며 테스팔리들의 특권과 존귀함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왕도에서의 삶을 받아들이지 못해 본국으로의 귀환을 희망한 다크인들은 현재 다크 본토에서도 소수집단으로 남아있는 테스팔리들의 명맥을 잇게 되었다. (이들은 폭정과 노예제 같은 폐단은 왕국시대 중반에 시정했으나 여전히 사회적으로는 권위적이고 귀족적인 테스팔리들의 지위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1만 8천의 패잔병 중에서 왕도인이 되기를 희망한 1만 3천의 다크인들은 꿈기의 진영에 가담했고 세월이 흐른 후에는 골수까지 왕도인이 되었다. 이 순간 꿈성 최초로 왕도군이 아닌 꿈성군이라고 불릴 수 있는 연합군이 탄생한 것이다. 이조시티에 접근한 오리테스는 이제 1만 2천에서 2만 5천으로 불어난 왕도군을 상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B.R 2년 3월 4일, 10년 만에 꿈성 왕도는 왕도인에 의해 탈환되었던 것이다.
왕도 공방전 2 -오리테스와의 재격돌
교교 평원 전투가 일어나기 전부터 기자 지방에서부터 귀환하고 있던 오리테스는 차례로 교교평원과 왕도에서의 패전에 대한 보고를 잇달아 받게 되었다. 3월 10일 왕도 시티 바로 아래쪽에 도착한 오리테스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였고, 진영을 구축할 틈도 없이 왕도로 들이닥쳤다. 양측의 군세는 오리테스의 본대 3만과 왕도군 2만 5천이었는데, 오리테스는 교묘한 전술을 동원하기 보다는 3만이라는 병력 상의 우위와 자신의 위용을 이용해 정면승부를 하려고 들었다. 그러나 왕도군 또한 10년 만에 되찾은 왕도에서 호락호락하게 물러날 수 없었다. 양 측에서는 곧 난전이 벌어졌으나 오리테스의 기마군단은 교교평원에서와 마찬가지로 불독의 물소부대로 인해 제압당했고 엑박과 꿈기의 협공은 가히 위력적이었다. 일생을 전장에서 보낸 오리테스에게 이렇게 백중지세의 전투는 일찍이 없었기 때문에 오리테스는 짜증과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다크군이 절대 불리한 조건에 있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에 오리테스는 사기의 저하와 질질 끌며 손발이 맞지 않는 공격에 대해 휘하 군사들을 더욱더 다그치며 위협했다. 이렇게 오리테스가 왕도의 주성을 공격하는데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성을 포위한 오리테스를 5만이 넘는 무리들이 한겹 더 에워싸게 되었다. 산츄가 왕도 전역의 의용병들을 규합하여 오리테스를 포위한 것이었다. 오리테스는 한 눈에 의용병들이 숫자만 많았지 성 안에서 저항하고 있는 꿈기의 정규군과는 상대도 안 되는 오합지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지만 다크군의 어수선한 심리에는 상당한 동요를 불러 일으켰다. 더 이상의 사기의 저하를 감당할 수 없었던 오리테스는 부하들을 닦달하여 성을 공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의용병들의 전력은 매우 약했으므로 오리테스의 한 차례 위맹한 공격에 금방 포위망이 깨졌기 때문에 미처 꿈기가 성 안에서 추격병들을 이끌고 나오기도 전에 오리테스는 도주에 성공하고 말았다. 엑박, 꿈기, 불독, 산츄가 신속하게 추격했지만 오리테스는 고강 유역에 있는 23 나루를 통해 바로 왕도항으로 빠져 나가 유유히 바다로 나아갔다. 오리테스를 놓쳤다는 아쉬움과 안타까움도 잠시, 곧 왕도인들은 사태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가를 깨달았다. 왕도 안에 있는 오리테스의 군대를 모두 깨뜨린 것이다. 해방이라는 어마어마한 기쁨에 휩싸인 왕도인들은 거국적인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누구보다도 왕도의 탈환으로 기쁨과 비감이 클 꿈기와 엑박은 초연한 태도를 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두 사람은 의견을 교환하지 않아도 다음의 행보는 다크섬 본토 공략이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때를 맞춘 것처럼 그때 왕도항에 꿈기의 포로로선들이 인양되었다는 소식이 날아왔고, 여름의 섬에서 돌아온 2만 명의 정예 중 살아남은 1만 명의 병사들은 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금방 숙연해졌다. 고향으로 막 돌아온 이들을 두고 다시 바다를 건너 외지로 출격하라는 명령을 내려야 하는 꿈기는 그런 상황에서도 이들을 고무시킬 만큼 충분히 영웅적인 인물이었다. 마치 자신들의 손으로 왕도를 수복했으니 이 기나긴 전쟁의 마무리도 자신들이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낀 듯 꿈기의 1만 정예는 두 말 않고 출정의 각오를 다졌다. 이 날 밤의 해방 축제는 이들의 이런 기분이 저절로 전염되어 사뭇 비장하고 굳센 기운마저 감돌았다. 이들이 왕도 본토에서의 치른 전쟁기간은 겨우 몇 개월이었으나 다크섬에 도착한 3월 29일부터 B.R 1년 9월 9일 다크섬 리냐 시티의 제일 평원 전투에서 오리테스를 붙잡아 항복을 받아내고 왕도에 편입시키기 까지 이들은 1년 6개월에 이르는 기간을 다크섬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싸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앞에 남겨 둔 전쟁의 나날들이나 그들의 생명과 운명에 대해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다만 왕도를 수호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있을 뿐.
다크 정벌
3월 29일, 오리테스를 뒤쫓은 2만 5천의 병력 중 선봉으로 나선 엑박의 부대가 제일 먼저 다크섬의 다크항에 상륙했다. 다크항은 뾰족하게 튀어나온 다크섬의 모서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면 다크섬을 옆에 끼고 한없이 지나쳐 망망대해를 해매다 이바노프와 톱섬 사이의 극지로 빠질 위험이 있다. 과연 대항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조난 사고가 다크항의 위치를 찾지 못해 일어났으며 얼마나 많은 선박 잔해가 빙하 사이사이에서 발견되었던가?(물론 그 덕에 오늘 날의 역사학자들이 얼음 속에서 꺼내 온 유령선의 잔해를 보고 적어도 800년 이상 된 꿈성의 복식, 무기, 음식, 그리고 당대 정세를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꿈기 일행은 처음의 항해임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상륙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귀화한 다크섬 출신의 왕도군이 한 몫을 했기 때문이다. 이때 엑박의 부대원은 5000 남짓했을 뿐이었지만 이미 엑박은 상륙부터 결전을 치르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해 두고 있었다. 오리테스는 이미 오래 전에 본국으로 돌아와 다크 시티의 정치적 동요(왕도군에게 패해 꿈성 전역의 지배권을 상실했다는 소식이 이미 왕도공방전 직후에 본국에 알려졌고, 불만과 책임론이 일어나 오리테스를 압박하고 있었다)를 수습하던 중이었는데, 하필 10년 동안 잠잠했던 욥테스 잔당이 다크 산맥에 있던 거점에서 기어 나와 론도시티를 장악했다는 과장된 소문이 전해지는 바람에 오리테스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왕도군이 다크섬 본토로 진격한 것이 오리테스에게는 국내 불만세력을 무화시키고 위기를 모면하게 할 기회가 되었다. 엑박이 상륙하기 전까지 오리테스는 아마도 회심의 미소라도 지으며 단단히 준비를 해 두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다크섬의 군벌들은 다크전쟁 초기의 정세에서도 말 한 대로 다크강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북파는 두 왕자의 내전 시절부터 오리테스를 지지한 세력이었으며 새로운 수도의 번영과 더불어 성장했고, 유명한 기마 군단의 본산이었지만 다크섬 전체 역사에 비추어 그들이 역사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반면에 남파는 유서 깊은 군벌들의 연합체로서 오리테스에게 눌려 다크강 이남으로 밀려나고 지도자들을 내전 중에 대거 잃었으며 병력에 있어서는 기마 군단에 눌려 승리의 영광을 맛본지도 오래 되었지만 그 오랜 기간의 중악섬 공방을 통해 벌어들인 재화는 용케 빼돌려 두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테스팔리로서의 오랜 지배의 역사가 있었던 탓에 노예의 비율이 어느 지역보다 높았다. 다크섬의 군벌들은 비록 국내에서는 양파로 나뉘어져 있기는 하나 원칙적으로 왕을 중심으로 엄격하게 조직되어 있는데, 다크섬의 5대 도시인 다크, 세팔, 론도, 리냐, 빡시 시티는 왕 다음 가는 세력을 지닌 지방 군벌이 거주하는 거대한 연병장이 도시화 된 것이다. 따라서 왕도의 경작지 위주로 되어있으며 자유롭고 약간 산만한 느낌마저 주는 도시와 비교했을 때, 이 다섯 도시의 구조는 총대장의 병영을 중심으로 질서 있게 조직되어 있는 것 같다. 원래 연병장을 기원으로 했으므로 상식 밖의 일로 보이지만 도시가 아예 몇 년 동안 고립되는 것을 가정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도시 안에 완전한 자족 체계와 방어 체계를 갖추고 있다. (결국 왕도군은 이 다섯 도시의 함락을 위해 많은 애로를 겪어야 했고, 그래서 또 왕도군 귀환병들은 이런 도시들을 전쟁 도구로만 보이지 도시 같은 면이라고는 조금도 없다며 진저리를 쳤지만 그것이 의외로 엑박 한 사람에게만큼은 대단한 영감과 인상을 준 모양이다. 자세한 것은 엑박의 요새도시 건설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해변을 따라 늘어선 농지와 농가들은 이런 요새 도시 밖에 있어서 전혀 병력의 보호권 안에 들어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이 대농장들은 테스팔리들에게조차 약탈지역이었고 노예가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도시 간 격리는 왕도인으로서는 처음 보는 사태였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꿈기의 본영에서는 과연 해변의 농가를 접수하는 것과 요새도시를 접수하는 것 중 어느 것을 전쟁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지 갈팡질팡했다. 다크인의 속성을 잘 알고 있던 엑박과 다크섬 출신 병사들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아마 본영의 의견은 쓸데없이 견고하기만 한 요새보다 인구가 많고 농지가 있는 해변 촌락 쪽을 공략하자는 쪽으로 결정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것은 나중의 일이고, 중요한 것은 3월 29일 벌어진 다크항 상륙작전일 것이다.
상륙작전
포로로선 대열에서도 선두에 있는 기함에 승선한 엑박은 해변을 따라 늘어선 목책과, 궁병을 보고 속으로 탄식을 내뱉고 있었다. 결국 대량의 희생은 불가피 한 것일까? 아군은 함대를 안전히 해변에 정박하는 것도 녹녹치 않은 일일뿐더러 함대에서 내려 정렬하는 것도 큰 빈틈을 내주는 일이다. 만일 꾸물거림 없이 바로 육박해 들어간다고 해도 오리테스는 지형 상의 이점과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오리테스는 그저 중구난방으로 달려드는 아군을 튼튼한 목책 안에서 간단히 무찌르기만 하면 되리라. 엑박은 잠시 생각한 후 해변에 이르러 수위가 어느 정도 낮아졌을 때 전군에게 갑자기 하선 명령을 내렸다. 순간 의아함에 멈칫한 장병들에게 엑박은 모질게 “가!”하는 명령을 내렸고 왕도군은 꿈기의 지휘를 받는 듯한 오싹함을 느끼면서 함선 밖으로 나갔다. 왕도군에게 내려진 명령은 각자의 무기와 짐을 등에 진채 해변으로 접근해 목책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왕도군이 어느 정도 진격해 목책과 가까워지자 곧 무수히 많은 다크군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크군의 화살은 왕도군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 못한 것이다. 바다로 뛰어들면서 푹 젖은 솜 때문에 방어력이 높아져 화살비로 인한 손실이 40%나 줄어든 것이었다. 5천의 병력을 가지고 엑박은 정말로 분투하여 다크군의 해변기지를 접수하고 패잔병들을 다크시티쪽으로 격퇴할 수 있었다. 엑박이 상륙에 성공하고 보니 진중에는 오리테스가 없었고, 따라서 오리테스가 해변에서 결착을 볼 만큼 신속하게 나라 사정을 수습할 시간은 없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어쨌든 엑박은 1000명의 손실로 상륙작전을 성공함으로써 뒤따라 올 꿈기의 본진 수 만 명의 안전을 확보한 것이다.
다크 시티 공방전
오리테스는 이렇게 쉽사리 상륙저지가 실패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당황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다크 시티 주변에 있는 측근 세력들이 건재했기 때문에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소집 명령에도 간헐적으로 반발하며 병력을 보내오지 않는 많은 지역들 때문에 다크 시티를 수비하는 오리테스의 병력은 왕도 공방전에서 데리고 온 1만 3천이 주력이 되었다. 오리테스에게 완전한 병력이 갖추어져 있지는 않았으나 아직 그에게는 위력적인 요새도시가 있었다. 다크 시티 앞에 진을 친 왕도군은 곧 바로 요새 도시의 분석에 들어갔다. 다크군이 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기는 했으나 현실적으로 그런 일을 기대하느니 여름의 섬의 그혼그리를 찾는 것이 더 가능성 있는 일이니 만큼, 왕도군은 가능한 침입 루트를 고심했다. 땅굴을 파자는 의견, 요새보다 더 높은 성을 쌓아 맞 공격을 하자는 의견 등이 나왔다. 불독이 낙하산을 만들어 고공침투를 하자고 제안했으나 그 당시는 비행기술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던 시절이었으므로 불독의 선진적이며 독창적인 제안의 가치를 생각해보기도 전에 좌중은 실밥이 쭈뼛 서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뒤 이어 산츄가 폭약으로 성문을 폭파하자고 제의해왔다. 그 때 참모진들은 이런 제안을 들었을 때 보통 우리가 느끼는 것 같은 거북함을 느꼈을까? 하지만 그 당시의 폭약이라는 것은 고작 천 년 전의 꿈신 노인이 아이들을 놀래켜 줄 때 쓰던 조잡한 폭약의 수준에서 좀 나아졌을 뿐이다. 산츄의 제안대로라면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의 폭약이 필요했고 그 많은 폭약을 설치하는 동안의 안전은 장담할 수 없으므로 자연히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가 되어 어느덧 그 의견은 수그러들었다. 다크성의 커다란 철제문을 뚫을 공성 병기는 왕도 본토에도 없는데 먼 바다를 건너 고립무원이나 다름없는 처지에 있는 그들이 아무 것도 없는 해변에서 무엇을 만들어낸단 말인가? 결국 첫 번째 공성전에서 왕도군은 다시 한 번 각궁과 유습유습 나무줄기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쪼퍼기의 침을 묻힌 무딘 화살을 각궁에 걸고 그 꽁무니에 유습유습 나무줄기를 매단 다음, 성벽을 향해 쏘아 지상과 성벽을 줄로 연결한다는 기특한 생각을 참모진 중 어느 누가 제안했는지 아쉽게도 현재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크성 공략의 성과는 마땅히 그의 공으로 돌아가야 함이 옳은데도. 어쨌거나 이 방법대로 신속하게 공격을 개시한 왕도군은 이 공격을 통해 약 10년 전 처음 왕도군과 다크군이 맞붙었을 때 왕도인이 겪은 놀라움을 그대로 다크인에게 돌려주었다고 볼 수 있다. 다크군은 떼어내려고 하면 자기 손이 달라붙는 기분 나쁜 점액(물론 쪼퍼기의 침이다)에 혼비백산하고, 잘라내려고 하면 칼로 적어도 두 시간을 썰고 앉아있어야 하는 유습유습 나무줄기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왕도군의 침입은 착실히 이루어졌고 성벽의 수비군을 다 처치한 후 성문이 활짝 개문될 무렵, 오리테스는 휘하의 5천기를 이끌고 간신히 남문으로 피해 달아났다. 오리테스가 미처 다크 성의 오리테스 집무관을 지키고 있는 8천의 병력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떠나야 할 정도로 제압은 의외로 빨리 이루어졌다.
왕도인의 남하
다크 성을 잃은 후 오리테스가 밟을 수순은 다크 성 내부의 고위 테스팔리 세력들과 다크 시티 주변의 군소 병력을 다시 규합한 후 다음 요새가 있는 세팔 시티로 향한 것이었다. 오리테스는 신속하게 세팔 시티로 이동해 세팔 시티 내의 위기의식과 불안감을 다독이고 병력을 규합하기 시작했으나 왕도군은 다크 성에서부터 느릿느릿하게 행군하다가 다음으로 오리테스와 맞붙는 장면을 10월경에야 연출하게 된다. 여기에는 왕도군이 특별히 게으름을 피웠던 게 아니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데, 꿈기는 아무래도 다크 성을 손에 넣고도 정복한 것 같지 않은 허전함을 느꼈던 것 같다. 사실, 요새 도시 안의 모든 것은 병기창고, 군영, 군량 창고 같은 것들을 중심으로 오직 군사행정을 위한 기능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병력이 있지 않은 요새 도시란 그야말로 유령 도시에 불과할 뿐이다. 꿈기는 주변 지역을 이참에 평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주변 지역이란 아까 말했듯이 대농장을 중심으로 있는 피지배계층의 거주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의 분위기란 그저 절망과 무기력이 대세라 지배자가 왕도인이든 테스팔리든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꿈기로서는 그저 관대한 처우와 사유재산, 그리고 투명한 공법의 실현 등을 약조하기만 하면 되었으나 그래도 다크인들은 왕도인에 비해 월등하게 체격조건이 좋았으므로 마음속으로 은근히 왕도인을 조그마한 종자라며 멸시하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협조적인 태도를 이끌어 내는 데에도 한계는 있었다. 이러한 어려움에 처한 꿈기에게 산츄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지켜만 보라고 그 답지 않아 보이는 무책임한 조언을 했다고 한다. 꿈기는 산츄의 조언에 따랐다. 처음에 테스팔리의 약탈이나 매질이 왕도인에 의해 중단되었을 때만 해도 피지배계층은 왕도인에 의해 그런 것이 반복되려니 하고 담담하게 여겼다. 그리고 꿈기가 몇 번 이나 왕도법과 왕도식 농사기술 등을 전파하려고 시도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도 그만두고 그저 다크 성으로 물러나 앉자, 피지배계층은 그제서야 지배세력의 부재라는 사회적 격변을 눈치 채고 슬금슬금 변하기 시작했다. 일단 대농장부터 그 수확물을 캐내 자기 집으로 가져가려는 사람들로 인해 급속도로 황폐화 됐다. 그리고 대농장의 수확물이 바닥이 난 다음에는 집집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도둑이 들었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 모두가 도둑질을 하고, 도둑질을 당한 것이었다. 산츄의 조언에 따른 결과가 이런 끔찍한 무법천지가 되자, 꿈기는 산츄에게 버럭 소리를 지를 정도로 화를 냈다. 그러나 산츄는 조급한 꿈기의 성정을 억누르려고 애썼는데, 이제까지 거의 의견을 확고하게 주장하고 나선 적이 없던 산츄의 성향으로 봤을 때 이것은 놀랄만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정말로 산츄는 믿는 구석이 있었고, 일을 성사시키려면 조금 더 지켜보아야한다고 꿈기를 설득했다. 그러는 동안에 대농장 지역들의 무법천지가 다른 양상으로 변모되기 시작했다. 피지배계급들은 그들 안에서 무력이 강한 자에게 의존하여 그들의 지배를 받는 식으로 다시 테스팔리들의 지배 형태를 재현하고 나선 것이다. 일이 이쯤 되자 꿈기는 그만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미 오랜 역사를 피지배 계급으로 살아 온 이들이었다. 아무리 테스팔리의 지배 형태를 재현한다고는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럴 만한 재력도 무력도 권위도 없었으므로 어제의 노예가 내일의 주인이 되는 식으로 극심한 부침이 일어났다. 그리고 산츄는 대농장에서 탈취한 곡물이 바닥날 때를 기다렸다. 마침내 곡물이 바닥나자, 이 지역은 혹심한 기아상태로 돌입해 테스팔리건 대충빨리건 도저히 흉내 낼 여력이 없었다. 이들은 대농장의 수확물을 두고 강탈하고 축적하는데 열을 올렸기 때문에 생산 활동에서 손을 놓아 버린 지 오래였고, 막상 농사라도 지으려니 대농장에 들어가 뭐라도 심는 것은 죽 쒀서 개 주는 격이었으므로 농사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었다. 바로 이 타이밍에 맞춰 드디어 산츄가 움직였다. 산츄는 왕도식으로 마을 자치 방위대를 조직하고 대농장을 세대 단위로 분배했으며, 왕도법을 다크섬의 법으로 선포하고 속성종자 농사법을 정식으로 보급하기 시작했으며, 꿈신 노인이 당부한 세 가지 약속도 빠뜨리지 않고 선서하게 했다. 이제 기아와 무법천지에서 벗어나게 된 다크인들은 안도감과 고마움에 기꺼이 왕도의 일원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꿈기의 다크섬 평정은 앞으로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하여 B.R 2년 12월 까지 다크 시티에서부터 세팔 시티에 이르는 지역이 이렇게 평정되고 봄이 되자 왕도군은 다시 오리테스와의 결전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팔 성 격전
B.R 1년 1월 7일. 꿈기가 이번에는 세팔 성을 앞에 두고 포위 진형을 짰다. 1년이 안 되는 기간 동안 오리테스의 군세는 8만으로 불어나 있었는데, 아마도 북부 지역을 성공적으로 장악한 왕도군의 선전이 위기의식을 불러 왔을 것이다. 여기에 세팔 지역의 군벌들이 모두 가세하여 ‘구국의 전선’을 이뤘다. 이들은 다음의 결전으로 군세의 우위를 내세워 평원에서 정면 전을 걸어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구국의 전선’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군세가 꿈기를 5배로 압박할 정도로 강해지자, 군벌들 내부에서는 벌써 승리가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분위기라 아직 있을 지 없을 지도 모르는 전공을 놓고 알력이 생겼다. 결국 이러한 견제가 너무 치열해 진 탓에, 누구도 성 문 밖으로 나가 꿈기를 최초로 맞서 싸울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세팔 지역 최초의 접전은 공성전이 되었다. 세팔 성 안에 10만이 넘는 군대가 방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한 꿈기는 그저 알 수 없는 미소만 흘렸을 뿐이었다. 왕도군은 성 밖에 진을 친 채 그저 대기하는 전술을 택했다. 싸움이 장기화 되어가자 10만이 넘는 병력을 감당할 수 없었던 세팔의 군량고는 가파른 하강곡선을 그리며 바닥을 드러냈다. 군벌들은 성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네 개의 성문은 불독의 맹수부대가 배회하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다크군이 왕도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성문을 수비하는 것이 아니라 왕도군이 다크군이 나오지 못하도록 수비하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마침내 성 안의 기아가 극에 달해 맹수부대마저 돌파할 용기가 생길만큼 다크군이 절박해지자, 불독은 실수한 척 하며 짐짓 북문의 경비를 풀어버렸다.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북문으로 쏟아져 나온 테스팔리들은 그 땐 이미 완전히 왕도인이 된 다크 북부의 자치 방위대의 손에 의해 제압당했다. 오리테스가 병력 10만을 모으는 동안 꿈기는 민간인 100만을 수중에 넣었고, 결국 이들이 세팔 성 전투 때에 과거의 해묵은 감정을 청산하기 위해 전장에 참가한 것이었다. 성 밖으로 나간 군세의 말로를 목격한 성 안의 잔존 병력은 일제히 삼면의 성문을 열고 탈출을 시도했다. 그것은 무수한 희생을 각오한 절망적인 탈출이었으며, 태반이 불독에 의해 사로잡혔다. 오리테스는 이번에도 만 오천 명 가량만 이끌고 론도 시티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꿈기는 여유 있게 이제는 유테스의 후손 중 어떤 자도 누려보지 못한 인기와 지지를 누리며 세팔 시티 주변을 왕도에 통합시켰다. 왕도인의 법과 정책들은 혁신적이고 공평하다는 평가가 쏟아졌으며 꿈신 노인의 이름은 젊은 다크인들에게 회자되며 그들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사회적으로는 엑박의 X모양 멜빵이나 불독의 애완동물 기르기 취미 같은 것들이 유행하고 왕도식의 농사법을 조금이라도 더 능숙하게 배우기 위해 왕도에서 농사법 교사를 초빙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크섬의 여성들 사이에서는 왕도 주변에서 쓰이는 왕도 표준어가 열풍을 일으켜 왕도어 구사의 능숙한 정도가 결혼이나 취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왕도문화의 붐(왕도류라고도 한다) 와중에서 다크에는 왕도식으로 가발이나 모자를 쓰지 않은 맨 머리가 유행한 반면에 왕도에는 다크식으로 갖가지 모양의 가발이나 모자를 착용하는 것이 유행을 하는 아이러니한 현상도 발생하게 되었다.
론도성의 참사
오리테스가 주름 잡던, 아니 수 만 년 간 다크인들만의 독무대였던 다크섬에서 유사 이래 최초로 연이은 패전을 맞자, 정말로 다크 진영의 분위기는 심각해졌다. 다크 진영의 수뇌들은 심각하게 나라의 존망을 걱정하며 왕도군 진영에 합류한 인사에게 비밀리에 연줄을 넣어 살 길을 모색하는 한편, 심각하게 왕도군을 다크 섬에서 몰아 낼 방책을 연구하며 몰래 재산을 동굴 속이나 지하에 숨겨두었다. 또 한 가지의 움직임이 있었다면 그것은 그들이 정말로 심각하게 오리테스왕의 안위를 걱정했다는 것이다. 앞서 론도 시티까지 육박한 욥테스의 잔당에 대한 소문은 과장된 것임이 밝혀졌다고는 했지만 오리테스왕을 보좌하는 측근들의 관점에서는 이 모든 위기와 패배가 오리테스왕의 왕도 침공 때문에, 아니 오리테스왕의 탄생 자체에서 비롯된 불행이었으므로 론도 시티의 대형 군벌들은 성 안에서 두 셋만 모이면 타인의 이목도 아랑곳 않고 오리테스왕의 축출을 의논했다. 부하들의 이러한 불온한 분위기를 오리테스가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이 시기의 오리테스는 울분과 증오가 극에 달해 있었다. 하필 이 때에 일을 어설프게 꾸미는 위인 하나가 오리테스 암살에 실패하는 바람에 오리테스는 이제 테스팔리들을 믿지 못하고 한 성 안에서도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기거했다. 오리테스는 다크 시티에서부터 여기까지 후퇴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다크인들의 거국적 단합에 호소했다. 그러나 그의 시도가 언제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사실에 대해 우리는 안타까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리테스는 분명 영웅에 가까운 인물이었으니까. 그러나 오리테스가 바란 대로 되기에는 상황이 모든 면에서 매우 좋지 않았다. 일단, 다크인들의 거국적인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왕도인이 위협적인 적이 아니었다. 왕도인의 유순하고 공정한 매너는 우주에도 정평이 나 있는 만큼 테스팔리 자신들이 자기편에게도 밥 먹듯이 하는 가혹행위와 차별 등을 생각하면 오히려 적은 분명히 테스팔리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다크인들의 애국심이나 민족적 자존심에 호소하기엔 그들은 너무 오랜 세월을 노예로서 길들여져 있었다. 테스팔리들은 그들이 애국심 같은 고상한 감정을 갖거나 윤리도덕을 익히는 일, 또는 학문이나 예술 같은 것에 접하는 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며 그들에게 그럴 권리나 능력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다크의 피지배 계급은 이기심이나 방어본능을 초월한 고상한 이념에 자극 받을 일이 거의 없었고, 개중에 있다 하더라도 교육의 부재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테스팔리들의 반목은 오리테스의 발목을 잡았다. 어쩌면 오리테스는 욥테스를 처형한 후 본국에 그대로 남아 자신의 기반을 확대하는데 더 힘썼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10년간의 원정을 부득이하게 청산하고 다크섬으로 돌아온 오리테스가 주변을 돌아보고 깨달은 것은, 자신의 골수 지지자들을 제외하고는 왕도에서의 대단한 선전에 눌려 일시적으로 관망하는 태세로 있기로 결정한 테스팔리들이 대부분이라는 점이었다. 사실 오리테스가 왕도를 헤집고 있던 그 때, 본국의 테스팔리들은 오리테스에 대해 관망하고 싶어서 관망한 게 아니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테스팔리들은 내전을 통해 한 차례의 세력 판도에 변화가 있었는데, 오리테스가 그 판도의 굳히기를 충분히 하지도 않고 왕도로 건너가 끊임없이 막대한 물산을 보내오는 바람에 테스팔리들은 국내에서 그 분배권을 두고 끊임없이 다퉈야만 했다. 오리테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테스팔리들에게서 어린 처녀에게 용돈을 주는 돈 많은 영감탱이나 어리숙한 스폰서 취급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사정이 바뀌어 오리테스가 처연한 처지로 전락하자, 테스팔리들은 오리테스를 한껏 경멸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한 성 안에 있는 다크인들끼리의 감정이 악화일로에 있을 때, 지금 생각해 봐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B.R 1년 8월 11일. 오리테스 관저의 우물에 테스팔리들이 독을 풀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리테스는 혐의자들을 족쳐서 진상을 엄중히 조사했고, 여러 사람이 초죽음이 되었는데도 우물에 푼 독에 대한 특별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리테스 진영에서는 물을 마신 사람들이 하나 둘 씩 쓰러지는 것이 누가 봐도 자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인성 전염병의 일종으로 생각되나, 오리테스와 그 측근들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테스팔리 귀족들의 거처에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가 난동을 부렸다. 오리테스는 아예 이참에 불온한 테스팔리들의 처형까지도 결정했다. 오히려 선수를 뺏긴 기분에 처한 테스팔리는 그간 논의만 했던 것을 결국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8월 14일. 일련의 테스팔리들이 오리테스 관저를 습격하여 일대 격전을 벌였다. 오리테스로서는 한 밤 중에 일어난 괴변이었으므로 부하들을 지휘하기는커녕 자기 한 몸조차 제대로 수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리테스는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필마단기로 난장판을 벗어나던 오리테스는 운 좋게 그를 찾아 관저를 들쑤시고 다니던 호위대를 만날 수 있었는데, 오리테스는 그들과 함께 반란을 진압하기보다 탈출을 선택했다. 그리고 오리테스를 따르고자 하는 자는 다크 산맥으로 오라는 전갈만을 남기고 론도 성을 떠났다. 오리테스를 놓쳤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크 산맥으로 들어간 오리테스를 처단하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한 시름 돌리고 오리테스의 후사문제와 공적문제, 그리고 앞으로의 처신이나 왕도군과의 관계 등에 대해 논의하던 테스팔리들은 곧 이어 닥칠 그들의 참혹한 운명을 알지 못했다. 론도 성은 다크 산맥의 동쪽 끝에 있는 아미오 산의 연장처럼 나란히 서 있다. 그래서 아미오 산의 정상에서 론도 성 내부를 훤히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론도 성의 방어선은 아미오 산까지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아미오 산에서, 오리테스는 다크 산맥으로 자신을 찾아 온 부하들을 규합하여, 투석기를 사용해 론도 성 안으로 낙석을 떨어뜨렸다. 론도 성 안의 사람들은 무방비로 있다가 마른하늘에 돌벼락을 맞고 말았다. 그 때 론도 성 안의 병력은 적어도 5만 이상으로 추정되고 있었는데, 이들이 모두 오리테스에 의해 참혹하게 죽거나 부상당했다. 후에 이 얘기를 전해들은 사람 치고 아무리 배신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같은 편을 자기 손으로 처단한 오리테스의 잔혹함과 강단에 몸서리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오리테스로서는 반역에 대해 군주가 응당 행사하는 처결권을 행사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많은 병력도 그의 손 안에 있는 병력이 아닌 이상 오히려 왕도군의 편이 될 공산이 높다는 판단을 한 것이리라. 어쨌든, 오리테스가 론도 성의 반란을 기괴한 방식으로 진압했을 때, 때 마침 꿈기와 왕도군도 론도 성에 다다라 뜻밖의 사태에 어리둥절해 있었다. 론도 성 안의 병력은 낙석을 피해 성문을 열고 뛰쳐나와 성 안에는 부상자와 시신만이 즐비했다. 꿈기는 영문도 모르고 성안으로 진입했는데, 그에 대한 보고를 받은 오리테스는 죽 쒀서 개 준 것 같은 분함과 씁쓸함을 안고 방향을 돌려 리냐 시티로 향했다.
12년 다크전쟁의 종결
리냐 시티로 돌아왔을 때의 오리테스는 5천 명의 직속 부하들만 조촐하게 거느린 상태였고, 리냐 시티 안의 병력은 3만이나 되었지만 친 욥테스파로서 내전에서 싸웠기 때문에 오리테스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았다. 오리테스는 갈수록 상황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론도성에서와 같은 발칙한 일을 막기 위해 리냐 시티 안의 지배권을 확실하게 해두고 싶어했다. 오리테스가 뒤늦기는 했어도 상당한 영지와 재물을 보장했으므로 리냐 지방의 군벌은 두 말 않고 오리테스를 지지하기로 했다. 사실 오리테스는 예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왕도군의 진격이 더딜 것으로 예상하고 리냐 지방의 장악은 물론 다크 강 이남의 세력까지 규합하여 다크강에서 승부를 결착 낼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9월에 접어들기가 무섭게 왕도군은 오리테스를 바짝 뒤쫓아 리냐 성으로 따라왔다. 이미 그 때 쯤에는 굳이 배후지역들이 무법천지가 되고 나서 산츄가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것을 기다릴 것도 없이, 소문이 퍼져 나가 다크인들 스스로 지역의 기반을 다져달라고 앞 다퉈 요청할 정도였으므로 평정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덤으로 론도성의 참사로 인해 꿈기는 한껏 분노까지 한 상태였다. 12년 간을 끌어왔던 왕도와 다크, 꿈기와 오리테스의 결전은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신속하게 개시되었다. 그리고 12년간의 결전에서 이 만큼 왕도군이 우세를 보인 적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다크항에 천신만고 끝에 상륙하던 1년 전의 왕도군의 모습은 이제 많이 변해 있었다. 리냐 성의 성벽을 공략하는데 산츄의 궁병부대가 맹렬한 기세로 성벽을 잇는 줄을 놓았으며, 불독은 다크섬을 남하하는 도중에 완성한 공성병기를 맹수들이 이끌게 하여 성벽을 직접 공략했다. 그런데도 오리테스는 전쟁의 귀재답게 이틀이나 왕도군의 맹공을 막아냈다. 그러나 이틀 째 되던 날, 성 안으로 흘러드는 물줄기가 말라붙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오리테스는 리냐 성과 이어져 있는 다크강의 존재를 깨달았을 것이다. 이쯤 되면 진중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엑박이 어디서 무슨 공작을 하고 있는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9월 8일. 하늘에서부터 곧바로 폭포가 떨어지는 듯한 우레와도 같은 물소리와 함께 다크강의 물줄기는 터진 둑의 잔해와 함께 리냐 성 안으로 휩쓸고 들어왔다. 다크왕국과 유테스의 왕조가 동시에 이 날 종말을 고한 것이다. 성 안에 난데없는 홍수가 일어나자 병력은 성문을 열고 뿔뿔이 뛰쳐나가 왕도군에게 항복했으며 오리테스와 소수의 친위대는 활로를 모색하려고 우왕좌왕했지만 상황은 이번에는 오리테스의 탈출을 허용하지 않았다. 리냐 성의 배후에는 거대한 다크강이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오리테스는 혼잡한 와중을 틈타 다크강 도강을 시도하다가 둑을 터뜨리고 내려와 미리 가능한 도강 지점을 지키고 있던 엑박과 맞닥뜨렸다. 오리테스 친위대와 엑박 부대원들과의 한 차례 교전이 있고 나서 엑박은 다크군을 거의 제압했다. 완전히 사로잡힐 위기에 처한 오리테스는 다급한 나머지 엑박에게 일 대 일 승부를 요청했다. 두 사람의 승부를 통해 오리테스의 탈출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왕도군들은 엑박의 명령에 따라 교전을 중지하는 순간까지도 절대적으로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엑박이 일기토에 응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엑박은 오리테스에 의해 모든 것을 잃은 남자였다. 오리테스에 대한 뿌리 깊은 증오는 전장의 와중에서 그들이 부딪힐 때마다 엑박에게 필생의 여력을 한 순간에 투입하여 두 사람끼리 결착을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숙명적인 느낌을 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꿈기가 리냐 성을 접수하고 달려오는 도중 엑박과 오리테스의 일기토가 벌어졌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당연히 꿈기는 엑박의 이런 막중한 전쟁을 개인의 사사로운 은원이나 감정으로 치부하는 듯한 태도에 대해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꿈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누구도, 설령 꿈신이나 그혼그리 조차도 이 둘의 싸움을 중지시키지 못 할 듯한 맹렬한 기세로 싸움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오리테스도 엑박도 이 때는 중년의 나이였지만 다크와 왕도 양 측에서 오랜 세월을 최고의 전사로 일컬어지던 사람들이었다. 지켜 보는 사람들은 막상막하의 승부에 팽팽한 긴장감을 느꼈다. 오리테스의 기술과 체격이 엑박보다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꿈기와 산츄는 엑박이 패배하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고 마음 속으로는 이 전쟁이 길어지게 되는 것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리테스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하반신만을 집중적으로 노리던 엑박은 마침내 다리를 걸어 오리테스를 쓰러뜨리고 목을 땅에 대고 꼼짝 못하게 누르는데 성공했다. 왕도군 진영에서 우레와 같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꿈기는 포박된 오리테스를 한 번 보고 어찌되었건 오리테스를 사로잡은 엑박의 무훈을 생각해서 오리테스의 처분에 대한 의견을 엑박에게 물었다. 엑박을 잘 알고 있던 꿈기, 산츄, 불독은 그가 오리테스를 갈갈이 찢어 죽이자는 제안이라도 할 것 같아서 약간 속으로 움찔하고 있었지만 엑박은 의외로 간단하게 오리테스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그것도 공손하고 간절한 태도로 꿈기에게 요청했다. 이 승부로 엑박은 12년의 원한을 완전히 청산한 듯한 초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엑박은 오리테스를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 포로로 삼아 왕도로 끌고 오는 대신 다크섬에 남겨두자고 덧붙였다. 꿈기는 생각에 잠겼다. 과연 오리테스를 다크섬에 남겨 둬도 후환이 없을까? 그러나 꿈기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이고 쾌활한 성격의 군주였다. 꿈기는 오리테스가 구 세력을 규합해 다크왕국이나 그런 종류의 비슷한 세력을 형성한다 하더라도 이미 열광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고 있는 왕도화의 추세는 과거의 테스팔리 전제정치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꿈기는 다크인을 신뢰하기로 하고 다크섬을 왕도에 정치적으로 복속시키는 조건으로 오리테스를 석방했다. 과연 오리테스는 그후 사사건건 개인적 불만을 터뜨리기는 했지만 다크 섬의 유력한 세력가로 남아 오랫동안 살았고, 왕도에 다시는 반기를 들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왕도군은 다크왕국을 무너뜨리고 다크섬을 평정했으며, 다크섬의 행정이나 정치, 경제 정책은 왕도법과 왕국어칙에 따라 수행하되, 관료는 다크인과 왕도인을 구별하지 않고 임명했다. 본격적으로 다크와 왕도는 이제 한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을 마무리 지은 꿈기 일행은 호로테스의 길을 타고 왕도로 귀환하여 왕도인들의 막대한 환영을 받으며 개선했다.
전쟁, 그 후
왕도로 돌아 온 꿈기는 바로 군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전후에 황폐화된 민생을 바로 잡았으며 전쟁에서 무훈을 세운 장병들에게 막대한 포상을 내렸으며 전사자들을 위해 2만 용사 기념비를 교교 평원과 왕도 광장에 설립했다. 엑박, 불독, 산츄는 이제는 평범한 전공자가 아니라 거의 공신 급이었으므로 꿈기는 각각에게 영지를 배정하려고 마음 먹었다. 엑박은 왕도 남부로 내려가 다크 전쟁 때 보아둔 요새도시를 건설하고 싶어했고, 불독은 자신이 다스리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물론 그곳은 불독이 이번 전쟁 때 아쉽게 놔두고 온 맹수들이 있는 실레노스와 가깝기도 했다) 산츄의 경우는 여름의 대륙 탐사 때 보아 둔 실레노스 남부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인지 그곳에 정착하기를 희망했다. 영지를 배정 받자 이 세 사람은 왕도에 대한 충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렇게 해서 11월 11일. 제 2차 원탁 회담이 열렸다. 제 1 차 원탁 회담 때와는 또 다른 엄숙함과 원숙함이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여기서 안치, 산츄, 불독 지방은 왕도의 영원한 우방임을 맹세하고 원탁 회담을 파기하는 배신자는 공동으로 응징하기로 결의했으며, 이 효력은 안치, 산츄, 불독 지방의 통치자가 대대로 이어지는 한 영원하다고 합의했다. 왕도의 세력과 영토가 이렇게 확장되자, 엑박, 산츄, 불독은 이참에 더 막강한 정부와 거대한 통치권을 수립해야겠다고 생각한다. 11월 20일, 제 2차 원탁회담에 이어 꿈기가 왕으로 즉위했다. 엑박, 산츄, 불독은 각각 안치공 산츄공 불독공으로 책봉되어 연말까지 왕도에 머물다가 각각의 영지로 떠났다. 다크섬의 경우는 제후 없이 왕도에서 임명한 행정관의 관할로 정해졌다.
끝마치며 - 진정한 꿈성인
이렇게 해서 다크 전쟁은 전쟁 초기의 충격과 불행만큼이나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기고 마무리되었다. 그 중 몇몇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우주 전역에서 우리에게 확신을 주는 원칙들이다. 꿈신 노인의 평화주의에 기반 한 제국 노선. 우주의 많은 종족들은 꿈성인에게 어떻게 해서 우주의 저 끝에서 저 끝까지의 차이를 지닌 그 많은 종족들이 하나 같이 꿈성인이라는 이름 하나로 융화되는지를 묻는다. 그렇다. 단결도 결속도 흡수도 아닌 “융화”이다. 왕국 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카이저 대륙과의 전면전을 통해 꿈성 역시 많은 어려움과 부작용을 겪었지만 최후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것은 왕도인의 영혼, 왕도인의 법, 왕도인의 긍지였다. 그리고 이것은 꿈레대왕 이후로 꿈성인과는 진화의 가지부터 크게 다른 종족들이 꿈성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효력이 약해지기는커녕 더욱 미스터리하게 들어맞고 있다. 결국 이런 것은 왕도적인 것이 우주적인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명에 다름 아니다. 왕도적인 것은 공정과 정의, 그리고 배려와 협조이다. 그러면서도 왕도적인 것은 조금도 규정되지 않은 것이다.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왕도인들은 다른 세상과 접촉할 때 마다 놀라고 당황하지만 언제나 자신들에게 미루어 타인에 대한 동정과 이해, 그리고 편의를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성향은 전쟁 같은 폭력적이고 무법적인 사태 앞에서는 다크전쟁의 경우처럼 무력감과 많은 피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으나 최후에는 적군과 아군 모두 왕도적인 것 안에서 보호받고, 활동하기를 원했다. 왕도인들은 보통 사사 건건 참견이 많고 질문하기를 좋아하며, 쓸데없이 도와주려고 하거나 끈질기게 관찰을 해서 사람들을 성가시게 한다는 평을 듣는다. 왕도인들은 한 번도 다른 세상의 사람들에게 왕도적인 것을 강요하거나 권장한 적이 없었다. 왕도인들은 언제나 다른 세상의 사람들처럼 행동해보고 생각해 보는 것을 좋아했으며 색다른 사람처럼 되는 것을 좋아했다. 바로 이런 것이 왕도적인 것의 실체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것들은 자체로는 조금도 왕도적인 것의 특성을 정의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융화하려는 순간, 그 자체가 왕도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왕도인의 정신은 곧바로 꿈성인의 정신이 될 수 있었다. 좁게는 꿈성 안에서부터, 트리플러스 항성계, 아니 더 나아가 서로 다른 정치적 영역에 속해있지만 다른 행성들과 교류하며 서로를 닮고, 서로를 도와주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꿈성인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이다.
첫댓글 ^^ 제 문체 아닌 것 아시죠? 그런데 이글 쓴 사람이 밝히지 말라 하네요, 챙피하데요, 누군지 짐작하시겠지요. 장난삼아 쓴거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