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칼럼> 유병현 장군
작성일: 2020-08-24 10:52:20
유병현은 1924년 청주 출신으로 동경 물리학교를 다니다가 1945년 일본군에 끌려가 일본의 패망을 목도하였으며 해방 후 육사 7기로 임관했다. 유병현은 특이하게 보병학교, 포병학교, 기갑학교 고등군사반을 이수하고, 국군 기갑병과 창설의 중심이 되었다. 국방대를 마친 다음에도 연대와 고대 등에서 계속 공부하여 지식의 폭을 넓힌 것은 앞으로 전개되는 전쟁의 폭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유병현은 대동아전쟁, 6.25 전쟁, 월남전쟁 등 전쟁에 세 차례 참여했다. 백선엽이 1951년에 벌써 참모총장이 되고 정일권과 함께 두 번이나 참모총장을 한 것에 비하면 유병현은 군의 성장과 더불어 두루 요직을 거쳤다. 합참 작전국장과 육본 작전참모부장을 지내고 채명신에 이어 맹호사단장이 되었는데 이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이 유병현을 발군의 장성으로 꼽았음을 알 수 있다. 5군단장 당시 제2땅굴을 발견해서 북한 침략 야욕에 치명타를 안겼다. 유병현은 5군단장과 합참본부장에서 이병형의 뒤를 이었고 이재전이 유병형의 뒤를 이어 이병형, 이재전의 가운데서 국군 작전의 중심이 되었다. 율곡계획도 육해공 참모총장 회의체인 합동참모회의가 아니라 합참 본부장이 대통령의 통제를 받는 모양새를 취한 방식을 박대통령이 취했다.
유병현은 한미연합사를 창설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고 초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되었으며 10.26 발생 시 글라이스틴 대사와 같이 사태를 수습했다. 12.12 당시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었다. 위캄 연합사령관은 미국 출장 중이었다. 미국은 5,16 당시에도 그렇지만, 12.12는 절대로 수용할 수 없었다. 정승화 참모총장과 김종환 합참의장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위기관리의 중심축이 되었다. 여기에는 유병현과 미군과의 전폭적 신뢰관계가 유효했다. 유병현은 파탄상태의 한미군사관계를 회복했으며 합참의장이 되었다. 예편 후 주미대사로 발탁되었으며 레이건과 전두환의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유병현은 현대의 전쟁을 모두 거쳤다는 것을 강조한다. 10.26과 12.12의 황당한 사태를 침착하게 수습한 것도 이러한 경험이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백선엽이 이승만 시대 군을 대표한다면 유병현은 박정희 시대 군을 대표한다. 유병현은 백선엽과 같이 탁월한 군사지식과 경험, 유창한 영어를 바탕으로 업적을 이루어내었는데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미연합사 부사령관 출신이 합참의장을 거쳐 국방 장관으로 발탁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미연합사가 한국 방어의 중심이며, 현재 진행되는 전시 작전권 전환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도 여기에 달려 있음을 국가통수기구와 정치권에서 알아야 할 것이다. 한국군은 자이툰 부대 등을 통해 작전술 차원에서는 우수하다. 문제되는 것은 전략 차원이다. 미군의 C3I 기능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야 대체할 수 있어야 되는 것이지, 의지와 수사만으로 대체할 수 없다. 미군이 한국군 능력 검증에 숙고를 거듭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후배들은 유병현과 같이 전쟁경험이 있는 선배들과의 저서를 숙고하고, 미군과의 부단한 협조를 통해 배워야 한다.
미군은 지금도 세계 어느 곳에서는 작전하고 있으며 교훈을 즉각 반영하고 있어 세계최고다. 중국은 도저히 미국에 미치지 못하는 점은 이것이다. 한국이 미국과 동맹관계에 있는 것의 최대 이점이 이 점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