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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 1: 4 환란 중에서 위로하사 ( 하 )
예수의 고난에 동참함이 복이다. (계 1: 9)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분주하게 살면서 주님이 성도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 십자가의 공로를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자.
(1)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
성경은 이사야 53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예언을 하였다.
* 사 53: 4-5 -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특별히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말씀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에게 평안과 화평과 자유 함과 허물과 죄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역사이다.
가시면류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꽉 누를 때, 그 가시가 살을 파고 들어가는 아픔, 양손과 양발에는 대못이 손과 발에 박힐 때 점점 뼈와 뼈 사이를 뚫고 들어갈 때 아픔과 고통 고난을 생각해 보라! 또 예수님 몸이 박힌 못에 의지하여 매달리는 고통을 받으셨다. 그 뿐 아니라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를 때 물과 피를 다 쏟아내신 그 십자가….
* 마 27: 45-46 - 45 제 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함이요, 우리는 그 십자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여기까지 왔어도 또 죄를 범하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또 범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다.
* 히 6: 4-6 –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다시 못 박는 범죄자가 나오지 않아야 하겠다.
* 히 9: 12-14 –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히브리서 기자는 황소의 피나 염소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함 받지 못하고 보배로운 어린양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했고,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다고 말씀한다.
* 계 1: 5 -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의 결과로 우리는 자유 함과 평안함을 얻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평안함을 얻어서 더 범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을 때, 예수님의‘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 한마디에 누구도 돌로 치는 자가 없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죄로부터 자유 한 사람은 없다. 오직 자유로움을 주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십자가의 공로이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으면서 또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죄에 대한 의식과 죄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지는 않았는지…. 자기를 살펴보는 자가 되자.
(2)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
* 계 6: 9-11 -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1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첫 순교자 아벨에서부터 우리 시대까지 순교자라 함은 주를 위해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하셨고, 그 말씀대로 제자들은 다 십자가를 지고 실제로 순교하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따라가려면 반드시 고난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가정적인 십자가, 개인적인 십자가라 표현하고자 한다. 순교자들은 자기의 가정이나 가족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다.
지나간 역사를 돌아볼 때 순교자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간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으며,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받고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움으로 삼았기에 순교할 수 있었다.
히 11: 35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라는 말씀은 첫째 부활로 살아나는 것을 말씀한다.
* 계 20: 4-6 – 4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 이는 첫째 부활이라.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순교자는 하나님의 인 맞은 종과 함께 살아나서 주의 재림을 맞이하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천년왕국에 들어가 왕과 제사장으로 참여하니 순교자에게 돌아가는 축복이 크다고 하겠다. 그 축복이 순교자에 대한 최고의 대우이다.
(3)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사도 요한
* 계 1: 9 -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자신은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했으므로, 그 나라에도 동참한다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증거로 밧모 섬에 와 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예수의 환난에 어떤 동참을 하였는가?요 19: 25-27에 예수님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시고 오천 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나타내실 때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곳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제자들마저도 겁이 나서 멀찌감치 따라왔다고 성경은 기록했다.
십자가 밑에 따라간 사람은 두 여인과 사랑하는 제자라고 말씀해 놓고, 요한복음 21장에 와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저 사랑하는 제자는 어찌 되겠습니까’? 물은 그 사랑하는 제자가 사도 요한을 말한 것이다.
제자 중에 가장 연소한 것으로 알려진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날 밤 만찬석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하실 때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여 내니이까? 하며 예수님을 팔 가능성을 보였는데, 사도 요한은 ‘뉘시오니까?’ 여쭈며 전혀 예수님을 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그런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가 예수님의 유언을 받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날부터 집에 모셨더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깨닫고 읽고 · 듣고 · 지키는 복 있는 사람은 요한의 형제가 되어서 예수의 환난과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동참하는 그 사람이계 11: 15 같은 그 나라(그리스도의 나라)에 참여하게 된다. 우리는 예수의 환난과 고난에 얼마나 동참을 하였는가?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아야 하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에 얼마나 동참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그 아픔과 슬픔은 컸지만, 밧모 섬에 오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큰 축복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접받고, 사랑받고, 영광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도 요한과 같이 주를 위해서 받는 고난이 있다면, 반드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로 복이 있을 줄 믿는다.
(4)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인 맞은 종들
* 계 14: 13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사도 요한은계 7: 1-4에서 하나님의 인 맞을 종 14만 4천에 예수의 환난에 동참할 것을 예시하고 있다. 인 맞은 종들이 계 14: 3 순교함으로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순교는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계 6: 9-11처럼 육체가 죽는 순교가 있고, 육체는 살아있지만, 그 속에 육체의 소욕(인간성, 죄악성)을 죽이는 산 순교가 있다. 그래서 산 순교는 죽은 자라 하지 않고 주안에서 죽는 자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말씀을 읽고·듣고·지키면서 얼마나 산 순교자의 길을 가고 있는가? 자기를 살펴볼 때다. 누군가는 될 일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은 복음으로 인해 오는 고통이나 어려운 일들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겪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나사렛 이단이란 소리를 들어도 그 사람들을 찾아가 따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두란노서원에 모여서 온 종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사명이 있어 지중해 연안에 있는 밧모 섬에 가서 범죄자 가운데 있었어도 우울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때 그에게 어떤 축복이 왔는가? 요한계시록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을 기록하는 축복을 주셨고,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과 제사장이 되는 축복을 주셨다. 그리고 그는 계시록을 마감하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을 하며 요한계시록을 마감할 수 있었던 사도 요한은 얼마나 기뻤겠는가.
행 4: 10-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어떤 죄악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는 회개할 수도 죄 사함 받을 수도 없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받고, 축복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 온 은혜와 축복은 오직 그 이름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인 맞은 종들에게 두 증인의 권세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왕과 제사장이 되게 하시는 축복을 주시는 것이 환난에 동참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다.
결론 :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는 축복이다.
* 살후 1: 5-10 -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6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9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10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 33)고 평안과 승리를 특별히 약속한 것은, 환란은 당연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는 것을 전제하신 말씀이다.
종말적인 환란과 고난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통, 복음과 함께 받는 고난이라는 은유적 의미로서 드맆시스(θλῖψις)를 사용한다.
바울은 자신과 사도들이 당하고 있는 핍박과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파데마 πάθημα)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고난을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모양으로 맞이하는 환란으로 이해하고 있다.
* 고후 1: 5 -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 골 1: 24 -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 빌 3: 10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 벧전 4: 13 -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나 요한계시록의 순교자들은 예수로 인하여 받게 되는 고난과 죽음을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고난과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 고후 4: 10 -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계 7: 14 -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바울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괴로움과 고통은 종말론적인 상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영적 현실임을 강조하였다.
* 딤후 3: 12 -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예수님은 이미 제자들에게 종말에 임할 큰 환란(θλῖψις μεγάλη)에 대해서 예언하셨다.
* 마 24: 21 -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여러 종류의 환란을 자신의 삶이나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는 상황들을 통해 예시하였다
* 롬 8: 35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고후 11: 23-27 –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성경은 환란이 가지는 중요한 역할을 시험(test)이라고 말한다.
* 신 8: 2 -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 살전 3: 3 -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 계 2: 10 -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환란에서 견디어 내고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며 이겨내는 자에게 주시는 열매와 복, 유업과 나라를 약속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환란에서 보이는 인내라는 품성, 환란을 통하여 견고하게 되는 연단, 그리고 궁극적 영광과 승리를 기대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하는 환란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이해하고, 이 고난에 참여하는 환란을 오히려 견디고 즐거워하도록 권면한다
* 롬 5: 3-4 –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에 둔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겟세마네는 올리브 열매의 ‘기름 짜는 틀’(oil press)이라는 뜻을 가진 장소이다. 환란을 의미하는 드맆시스(θλῖψις)의 어원이 ‘기름을 짜내다’(compress)라는 뜻에서 온 것이라면, 예수님은 기름을 짜는 곳에서 고난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신 것이다.
고난의 틀에 스스로 들어가시기 위한 순종의 기도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기에, 복음서 저자는 기도하는 주님의 땀이 핏방울처럼 땅에 흘렀다고 증언했다.
* 눅 22: 44 -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형틀에 들어가는 예수의 고난을 통해, 기쁨과 생명을 주는 포도즙과 올리브유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주어진 것이다.
* 히 5: 7-9 –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러나 이러한 환난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주어진다. 본 절의 '위로하사'(*, 파라칼론)는 '안위하다', `위로하다'는 뜻의 '파라칼레오'(*)의 현재 분사형으로,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중단없이 계속됨을 뜻한다. 연속되는 환난과 그에 상응하여 계속되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역설적으로 결합됨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규정하고 있다.
2]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바울은 복음을 증언하다 여러 차례 극심한 환난을 겪었으나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안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체험하였다.
* 행 14: 19 –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 행 16: 19-26 –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그리하여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12: 10)고 고백하였다.
3]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본 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환난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고 위로하시는 중요한 목적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뿐만 아니라 위로받은 자가 환난에 처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培養)시켜 주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함을 말한 것과 같다.
* 벧전 4: 10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