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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작은 베들레헴을?
1958-1228
이곳에서 인용된 성경은 GOOD TV 다번역 영어 킹 제임스(흠정) 역이며
메시지 책자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주제에서 최대한 벗어나지 않도록
편집하였음을 미리 알립니다.
오늘 아침 강단에서 외투를 걸치고 있는 것이 좀 어색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너무나 기뻐서 교회가
제게 준 멋진 외투를 내보이고 싶었습니다. 며칠 전 이 위에서 네빌 형제님이 그 멋진 양복을 입고 계신 것을
보았는데, 그 양복은 형제님에게 너무나 잘 맞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하기를, 어, 나도...그 양복이 너무나
멋지게 보였고, 회중들이 그 얘기를하기에 저는 “나도 강단에서 내 외투를 입고 있어야겠다,”하고 생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절대로 더 성장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항상...그런데 저는 성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루터 형제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정말 자라길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항상 어린애들로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네빌 형제님이, “브래넘형제, 저는 형제님이 이들 상류층의 목사님들처럼 그런 복장을 입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한 번 흘끗 보고는 형제님이 두루마기를 입으셨나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한다.
[브래넘 형제와 회중이 웃는다.] 그 멋진 외투를 칭찬하시는 거죠?
제가 말하겠는데 그것은...저는 외투가 정말로 필요했었는데, 그 외투는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외투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로 그 외투를 주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로이 로버슨 형제님, 오늘 아침 형제님이 이곳에
계신지 안 계신지 모르겠는데, 그 형제님이 그 외투를 고르시는 일을 맡았습니다. 정말로 잘 고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우리는 그 외투를 아주 아주 맘에 들어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아침, 다시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에 돌아오게 된 것과 그분의 귀한 말씀을 중심으로
교제를 나누는 이 멋진 시간을 즐길 수 있게 됨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이라면, 곧, 저는 해외로 나가야만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실업인들이 펴내는
보이스지(誌)에서 그것을 읽으셨을 지도 모릅니다, 저는 다음 달에 해외로 떠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떠나 있는 동안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사하고 사람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것입니다. 해외에서 여는
집회가 더 나은 것 같아 보이는데, 왜냐하면 거기서는 좀 더 나은 반응을 받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는...
저는 머써 형제님에게 제가 들었다고 말했는데... 머써 형제님이 제게 처음, 녹음기를 주셨는데,
그 녹음기와 함께 제 설교 녹음한 테이프를 몇 개 주셨습니다. 저는 누군가 제 설교를 들었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 임해야 했을 것이다. 라는 걸 그때 알았는데,
제가 좀 더 설교를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 분도 테이프에 녹음을 하고 계시는군요. 조금, 당신은 그 부분을 자를 수도 있습니다, 그렇죠.
아니면, 저 분은 엄지손가락을 누르고 있는데, 그 부분을 자르고 있는 가 봅니다.
하지만 제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제가 제 평생 들어본 설교 중에 가장 형편없는 설교가
제 설교였습니다, 맞습니다, 녹음된 설교. 저...그 사실에 너무나도 신경이 쓰여, 저녁도 먹지 못했습니다.
저는 아파서, 식탁에서 그냥 일어났고, 그 날 밤에 잠도 못 잤습니다.
어제 우드 형제님과 켄터키에 내려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저는 말했습니다, “우드 형제, 어떻게 내가 사람들로
와서 내 설교를 들을 수 있게 하는지 모르겠어요. 너무나 형편없이, 너무나도 말을 반복하고, 오, 문법도 맞지
않게, 구두법이라는 것도 전혀 없이.” 저는 그저...전 모릅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됨을
알고는, 한 편으로는 용기를 내었는데, 하나님이 아니시면 아무도 오지 않았을 거니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는 칼린즈 형제님에게 얘기했습니다. 칼린즈 형제님이 이 건물 안에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에게 말했는데...그가 왔을 때, 저는 그에게 그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말하길, “칼린즈 형제님,
내가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말하길, “난 목사로 서른 살 가량이 됩니다, 나는 설교가 뭔지 확실히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저는 말하길, “그 설교는 여태껏 들어본 설교 중에 가장 형편없는 설교였어요.”
그는--그는 감리교 목사인데, 그의 형제는 감리교 교파 내에서 꽤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하길, “어, 제 말씀 좀 들어 보세요, 브래넘 형제님,” 말하길, “구두법과 당신의 문장은 적절한
때에 끝나지 않고 그렇게 그럴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하길, “오순절 날 설교했던 그 사람은 자기 이름도
서명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봤습니까? 그의 이름은 베드로였죠?”
말하길, “저는 그 설교도 구두법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리라 상상해 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여러분 이 라디오 방송들을 들어보십시오, 그들은 눈을 거기 고정시키고, 그것은 다 써 온 것입니다, 아시겠죠?
그들은 그것을 적을 수 있고 구두법을 지키고, 그렇게,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읽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강대상을 대신한 이만한 말구유 뒤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 찰스 풀러와 함께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말한 모든 것은, 그는 그것을 쭉 읽어 내려갔습니다, 일 번, 이 번, 삼 번, 사 번, 그렇게,
그런 다음 그것을 다 잘 전하고, 시간을 쟀습니다. 그것은 다 검열을 받았고, 라디오 검열을,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그런데 빌리 그래함과 함께, 저는 그의 것을, 기타등등,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거기 서서,
그것을 말했고, 그저 최대한 빨리 그것을 읽었고, 그것은 다 준비해 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진 문제는, 저는 그것을 읽을 수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써 온다면, 저는 정말
그것을 읽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실 수 있는 일을 보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지금 이 구년을 마치고, 신년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됨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기도줄을 들었는데, 정말 기도줄에서도 불만을 느꼈습니다, 그것을 듣고. 저는 그렇게 제가 전한 메시지를
다시 들어보기는 처음인데, 저는 정말로 놀랐습니다, 기도줄이 제대로 다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네, 저는 조금
지난 후에는 그것을 통과하리라고 생각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믿기 전에 자기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새 해를 시작하면서, 저는 그것을 바꾸고 싶고, 그저 하나님께서 제게 말씀하시는 데서 기도줄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벗어나 있다,” 또는 뭔가 잘못된 일을, 저는 그 사람부터 시작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통과하게 하겠는데,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을 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시겠죠.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디에 있는지, 자기가 누군지, 자기들이 행한 일이 뭔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는 어떤 일을 발견하고, 그 때가 그 사람에게 멈추고서,
“이것이 그겁니다.”라고 말할 때입니다, 아시겠죠. 그래서 리오 형제님, 저는 녹음된 걸 들어봤기 때문에 어쩌면
좀 변경되는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저는 하나님께서 다가오는 새 해에 우리를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자, 오늘 밤 여기 성막에서는 예배를 드릴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밤, 저는 저 위 62 클럽에 올라가,
러들 형제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송년 철야 예배가 있을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러들 형제님은 제게 그 철야 예배를 맡아달라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날 밤에는 성막에 돌아와야
될 거라고 생각하고, 왜냐하면 저는 항상 신년 전야 때는 성막에 있으려고 노력해 왔고, 여기로 돌아와서 여기
있는 형제들과 함께 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금 타협 비슷한 것을 해서, 오늘밤, 62번,
교회로 개조된 그 옛 62 클럽에서 러들 형제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리고서 수요일 밤 우리는 여기로 돌아와서
송년 철야 예배를 드리도록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목요일에는 우리는 시카고로 떠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다음에는 필라델피아로, 다음에는 해외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우리는 여러분을 오래 붙들고 있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우리는 면담을 해야 하고, 예배가 연달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하길, 이곳에서 드린 지난 번 기도 예배 이후, 오, 저는 지난 번 기도 예배에서 나온 결과에 너무나도
감사히 여깁니다. 우리 주님이 그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 하실 수 있는 일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함께 모여서,” 저는 그렇게 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들으시리라.” 아멘.
그래서, 이제 잠시, 머리를 숙이고, 우리에게 이 메시지에 필요한 영감을 주시도록 주님을 바라봅시다.
주님, 당신은 만대에 우리의 피난처요 힘이 되셨습니다. 우리 앞에 살았던, 우리 열조가 당신을 의뢰하고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믿었고, 빛나는 빛으로 나왔고, 우리가 그들을 볼 때,
시인이 말했듯이, “시간의 모래 위에 새겨진 발자국들; 우리의 이별 뒤에 남는 것, 시간의 모래 위에 새겨진
발자국들.” 그 때 우리는 당신을 의지한 사람들은, 항상, 한 번도 어긋남이 없이, 올바른 모습으로 나왔음을
봅니다. 그들이 깊은 물을 여러 차례 건너고, 크나큰 시험들과 박해들을 겪었다 해도, 그러나, 끝에 가서는,
당신은 항상 그들을 “이기고도 남는 자들”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이 이 일을 하시겠다고 약속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이 이 조그만 교회를 축복하여 주시기를 우리는 기도합니다. 이 교회의 목사이신, 우리의 좋은 형제,
네빌 형제님을, 그의 가족과 함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다가오는 한 해에도 그와 함께 하시고 그를 더욱 더
많이 기름부어주시고 모든 일에 있어서 그를 축복하시기를 간구 드립니다. 그의 가족들, 자라나는 어린 자녀들도
더욱 건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네빌 형제를 계속 강하고 건강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교회와 이 교회 교인들을 모두 축복하소서. 재정 관리를 맡은 이사회와, 그들은 정말로 용감한 하나님의
사람들로 우리는 그들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집사회와, 그들도 역시 당신의 용감한 종들입니다.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 주님, 그들을 감사하게 여깁니다. 제 마음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은 옛날에는 조그만
연못이었고 여러 해 전에 있던, 잡초밭으로 모퉁이에 자리잡고 이곳이, 하나님의 나라에 등대 역할을 해 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등대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서 있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곳에 오는 많은 영혼들이 주님, 그날에, 어린 양의 피에 씻긴 모습으로 나올 수 있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오늘 아침, 본문 말씀을 읽기 위해 페이지를 넘겨서, 당신의 이 복된 말씀을 열 때에,
주님, 우리는 당신만이 문맥을 깨닫게 해 주실 수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 당신의 말씀에 기름 부어 주시고,
그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곧바로 와 닿고, 그들에게 유익한 말씀이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불신자들은 신자로 만드시고; 그리스도인들은 힘을 북돋아 주시고; 아픈 자들을 낫게 하시고; 낙심한 자들에게는
용기를 주시고; 당신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주님,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말할 입술과 들을 귀를 할례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옵나이다. 아멘.
지난 주 일요일 이후로 제가...제 마음 속에 자리 잡은 조그만 본문을 광고하고. 그런데 저는 예수를 보러 온
박사들에 대해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별을 보고 따라왔다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것을 공부하면서,
저는 한 성경 구절을 읽게 되었는데, 저는 감옥에서 드려야 했던 예배와 기타등등의 이유로 크리스마스 전야에
여기에 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오늘 “왜 작은 베들레헴을?”이라는 주제를 놓고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미가 선지자의 책에서, 소(小)선지자 중 한 사람이죠, 읽고 싶은데, 5장 2절입니다. 그 말씀은 이렇습니다.
2.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이스라엘의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거기 말씀에 얼룩이 있어서, 그 말씀이 뭔지 잠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있는 모든 장소들 중에서! 거기에는 너무도 많은 큰 성이 있었고, 지역들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승된 겉보기에 훨씬 많이 알려진 성들, 더 낫게 요새화되고, 더 큰 성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의 탄생지로 작은 베들레헴을 택해야 했을까요? 더 큰 곳도 많은데. 예를 들면,
역사적으로 알려진, 전통을 내세우는 예루살렘, 그 모든 곳의 수도이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성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탄생지로 그 쪼그만 마을 베들레헴을 골랐는지 궁금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했듯이, “하나님이 하시기로 작정하시는 일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그런 식이 되리라고 작정하거나 절대로 그런 식으로 되지 않으리라고 예정하셨습니다. 사도행전15장에서 성경이
말합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고. 하나님은 모든 일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그런 식으로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었습니다. 그 일은 그저 하나님이 그렇게 일어나도록 만드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그만 한정된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왜 하늘의 위대하신 왕께서 수도를 택하시지 그런 조그마한 곳을 택하셨을까?”라고. 어떤... 대신에...
베들레헴보다도 더 큰 영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던 많은 장소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실로와 같은 곳
말입니다. 실로는 이스라엘의 고대 경배 장소로서, 그들이 모두 해마다 여호와의 궤가 안식하고 있던 이 위대한
장소에 찾아오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실로에서 태어나지 않으려 하셨을까? 궁금하죠?
또 길갈이 있었습니다, 또 다른 위대한 영적인 경배 장소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그를 길갈에서 태어나시도록 하지 않으셨을까요? 또 다른 곳 시온이 있었습니다.
시온은 산꼭대기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럼 왜 그 예수님이 시온에서 태어나지 않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주님이 대대로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시는 커다란 역사적인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큰 축복들과 위대한 가르침들이 있었던 시온이나, 길갈, 또는—또는 실로,
아니면 다른 위대한 장소들 가운데서 한 곳을 택하실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다른 큰 도시들, 헤브론 같은 곳도 있었습니다.
그곳은 도피성을, 안전한 곳을 원하고 있는 사람을 위한 장소였습니다. 또 라못 길르앗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와서 피난처로 삼는 곳이고, 그가 태어나기에 정말로 적절한 곳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만일 제가 생각을 했더라면, 저는 그를 가데스바네아에서 태어나게 했을 텐데,
왜냐하면 거기는 심판의 자리이고 피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저는 그의 탄생지로 그 곳에 그를 데리고
왔을 거고, 어쩌면 우리는 또 다른 곳을 택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성경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조차도 너무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기쁘게 여깁니다. 저는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믿습니다,
“너희가 걸러내고, 율법의 더 중한 것을 행하도다,” 아니 “작은 것들을 걸러내도다.” 그런데 때때로 큰 것들을
묶어두는 것들은 작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전부 다, 그 커다란 톱니바퀴의 이는 하나님께서 부르도록...
정해주신 식대로 그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 한 개라도 정해진 위치에서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예정하셨고, 그것은 정확하게 그 위치에 적중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생각하기 시작할 때, “이 모든 일 뒤에 누가 있는가? 무엇이 이 커다란
하나님의 섭리를 돌리고 있는 큰 태엽인가?” 우리는 그것은 성령임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의 손에 일을 하도록
맡겨두시지 않았고; 성령의 손에 있습니다. 그가 큰 태엽이고, 그가 나머지 기구들을 가진다면,
그것은 완벽하게 작동할 것이고 하나님의 시간을 정확하게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그것을 보고 마음 가운데 궁금하게 여깁니다, 위대한 것들을 볼 때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그것들을 가질 것인지; 그 때 그것을 생각해 보면 우리들에게 많은 위로를 줍니다,
어쩌면 우리가 적은 무리들이라면, 어쩌면 우리가 세상이 보기에 또 더 큰 교파 교회들이 보기에 하찮아 보이는
무리라면, 하지만 하나님은 때때로 그런 작은 단순한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작은 양무리여 두려워 말라, 너희에게 그 나라를 주시는 것이 너희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이니라.” 얼마나 큰 위로의 말씀입니까? 저는 예수님이 작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했던 것처럼
확실하게,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주실 무리가 작은 양 무리일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성경 말씀은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고 성경 말씀은 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들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받을 자는 작은 양 무리, 작은 신실한 신자들의 무리이다.
라는 것을 알면, 그것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줍니다. 저는 그들 양무리 중 하나라고, 아니 이렇게 말해야겠군요.
그 작은 양 무리 안에 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다음에 우리는 그 이야기를 압니다, 우리들은 거의 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어떻게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여호수아가 각 지파에게 그들의 분깃을 분배한
사람임을 압니다. 그것은, 정말로, 우리가 지금부터 오늘밤 여섯시까지의 시간이 있다면, 이 주제에 대해서만
얘기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을 정리할 수 있고, 거기에서 진짜 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면; 그럴 시간은 없습니다,
한 삼 사십 분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중요한 점들만 봐야하는데, 성령께서 여러분들 성경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우리가 계속 얘기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것의 나머지를 넣어주시리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여호수아가 팔레스타인에서 그들에게 할당해주었는지, 그 분깃들은, 영감으로 주어졌음을
아셨습니까? 그들 족장들의 히브리 어머니들은, 애기가 태어날 때 그 아이를 낳는 진통 가운데서,
그들 족장들이 정착할 장소와 마지막 날에 있을 곳을 정확하게 예언했습니다.
영감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 성경은 영감을 받은 책입니다! 아무리 짧다 해도, 모든 짧은 성경구절은 성경에서,
커다란 그림 내에서 놀라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 모든 말씀이 영감을 받은 말씀이고,
그것에 영혼들의 종착지가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멸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어머니들조차도, 아이가 태어날 때 그 엄마는 말을 하였고, 그들이 수백 년 뒤에, 약속의 땅에서 어디에
있어야 할지 위치를 정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그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하지만 동일한 영감을 받아
그들이 위치해야 했던 바로 그 장소에 배치시켰습니다.
여호수아가 분배할 때, 유다의 분깃을 나눴습니다. 지도에서 보시게 되면,...지리학적으로 수도인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몇 마일 내려가고, 염해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의 부분을 차지할 때,
그 땅에서, 그의 지방이라고 부릅시다, 이상한 일입니다, 이 조그만 도시, 베들레헴은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들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아니, 리브가였죠? 리브가가 그 장소에 장사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은 아주 아주 조그마한 마을 같은 것이었나 봅니다, 여호수아5장을 읽어보시면,
유다의 영역 하에 백십오 개의 주요도시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촌락들과 조그만 읍들을
빼놓고도, 백십오 개의 도시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이 나누일 때, 베들레헴은 너무나도 작아서,
어쩌면 하나 나 두 가구가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베들레헴은 기업 내에서 언급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전혀 알려지게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을 세운 사람은 갈렙의 아들입니다, 갈렙의 아들, 살마라는 이름을 가진 아들이 베들레헴을 세웠습니다.
성경은 그가 베들레헴의 아비라고, 즉 베들레헴을 세웠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는 거기로 이주해서는
어떤 장사를 시작하고, 상업적인, 그런 무역업 같은 것을 시작해 그것을 번창시켰을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는 그 일의 진짜 이유를 알게 될 텐데, 나머지 땅들이 그 조그만 땅 조각을 시기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은 북쪽과 동쪽이 평지이고 남쪽으로는 그 돌출부에서, 약간 경사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전체 중 가장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옥수수 지대였고 밀 지대였고, 그 지역에는,
커다란 올리브 과수원, 기타등등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의 아니 팔레스타인의 그 지역, 유다 지방의 끝에 있는.
우리는 또 베들레헴은 기생 라합의 고향도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 경계선을 지나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기생 라합의 얘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 잠시만 그 여자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젊은 여자, 아름답고 젊은 여자인데 인생의 불행이 닥쳐 들어와, 이교도이니까?
그녀가 살고 있던 삶을 살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를 보면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그들이 사는
삶 가운데로 들어가게 됩니다. 저는 요전날 밤 형을 집행 받은 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서, 감옥에 갔다 왔습니다.
저는 그의 손을 잡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왜 그런 일을 저질렀습니까?” 그는 제 손을 잡더니 그는 말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말하길, “왜냐하면 당신이 그것으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강요하도록 당신을 허락했기 때문이죠. 당신은 그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건
술을 마실 필요는 없어요.” 저는 말하길, “나도 불안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에 대해 처음으로 들은 후, 하나님--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들은 후;
기도를 올리는 대상으로서의 하나님뿐 아니라, 듣고 응답해 주신 하나님;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기적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들었을 때, 바다를 말리고 하늘에서 떡을 비 오듯 내리시는 하나님, 마음이 떨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거기로 간 두 설교자로부터 첫 메시지를 들었을 때, 재빨리 그 메시지를 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을 보호하는, 붉은 줄이 창에 매여져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 메시지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마디 보탤까요? 여러분 그녀는 이방인 교회의 예표가 됨을 아셨습니까? 그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방인 교회의 예표였습니다, 이방인 교회가 메시지를 들었을 때. 우리는 모두 영적인 매춘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거스르는 영적인 음행을 저지르면서, 온갖 종류의 방법으로, 온갖 교파들과
종교들로. 하지만 여전히 살아 계시고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심을 들었을 때,
우리는 재빨리 그 메시지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주 예수의 피가 발라졌고, 그 피는 붉은 줄을 만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알아보지 않으려고
하는데, 여러분은 그녀가 공적으로 붉은 줄을 창에 매달아 내렸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피는 공적으로 전시되었습니다. 보혈은 그렇게 전시되어야만 합니다, 공적으로 벽 밖으로부터 매달아 내려서;
내부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이는 겁니다. 오늘 아침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실한 신자도 그래야
합니다; 내부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주 예수의 보혈의 전시가 밖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려다보시고, 진노가 떨어지고 나팔이 울리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그 붉은 줄이
기념으로 거기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피를 넘어가는 일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를 넘어 가리라.” 하나님은 그것을 보셨습니다. 진동과 성령이 땅을 요동시키고
그 성벽들을 흔들어 무너뜨릴 때, 한 칠십 센티미터 두께의 벽인데, 그 줄이 매달려 있는 곳은 돌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건 진실한 신자에게 있어서 진실한 하나님의 보호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발견할 때 여러분이 어떤 상태가운데 있다 해도, 여러분이 그 붉은 줄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를 쭉 엮어가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그녀가 이스라엘 사람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봅니다. 그녀는 유다의 장관이고
방백인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군대의 장관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살몬이었고, 왕이었던
솔로몬과 같습니다. 그런데 그는 장관이었고, 그녀는 유다의 방백이었던 이 장관과 연애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와 결혼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기업을 다 받고 안정되었을 때,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베들레헴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그것이 열리는 것을 보시기 시작하죠,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베들레헴에서 그녀가 살았음을 볼 때, 한 유대인에게, 이방인 신부가 되어, 그것은 열리기 시작합니다.
왜죠? 왜냐하면 그녀는 기적을 역사하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어디서 나왔는지 보시면,
나쁜 평을 받는, 매춘이 행해지는 집에서 나왔습니다; 개종과 하나님에 대한 꺾이지 않는 믿음을 통해서,
매춘부 집에서 베들레헴에 있는 아름다운 집으로 옮겨갔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우리들 모두에게도 그렇게 됩니다. 불신과 혼란과 그런 부도덕한 행위들과, 그런 모든 것들의 집에서;
지극히 아름다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치로, 장소로. 비천한 데서 숭고한 곳으로, 우리의 개종을 통해서
그러한 차이가 생깁니다. 기생 라합이 유다 집의 방백, 장관과 결혼했음을 보셨습니까?
그 장관은 이방인 신부를 취하신 그리스도를 대표했습니다. 가장 비천한 곳 중에서 가장 비천한 곳에서,
그 땅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좋은 곳으로, 나중에 이 설교 가운데 그것을 알아보겠지만,
그곳이 아니고는 다른 곳이 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겠습니다. 그녀는 이방인 교회의 예표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베들레헴에서 아름다운 가정을 꾸리고 있었음을 봅니다, 살몬이 베들레헴을 세웠을 때, 그곳은
정말로 좋은 장소가, 비옥한 땅이 될 곳이었습니다. 그 커다란 밀 재배 지역에 대해서, 세계의 떡을 제공하는
장소가 될 그곳을 생각하게 되면 참으로 멋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그곳에서 태어나셔야 했던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생명의 떡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나라 전체가 밀을 구하려고, 옥수수를 구하려고
만국이 모이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그 곳 베들레헴은 비옥한 땅들을 가진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 쪼그마한 곳이, 그냥 “오, 그곳은 밀이 나는 지방이었어요,”하고 말하지만,
그것은 뭔가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방인 방백이, 아니 이 유대인 방백이
자기 이방인 신부를 정착할 곳으로, 베들레헴으로 데리고 갔는지 아십니다, 살 곳으로, 떡이 풍부한 곳.
우리는 이 위대한 연애와 믿음에 대한 큰 순종을 통해서, 기생 라합을 통해, 그녀가 살몬에게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이름이 보아스였음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있는 이 맥락에서 예표하는 또 다른 위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보아스는 베들레헴에서, 살몬과 기생 라합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는...몇 해 후에, 나오미가 그 나라를 떠나 모압 사람들과 함께 떠돌아다니기 위해 떠난 후에, 그들이
그녀를 악하게 학대하여 나머지 신자들과의 교제에서 떨어져 나간 후에, 그리고 타국에서, 타 국민들 사이에서,
타락한 상태로 지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진실한 믿는 교회를 떠났고, 잠시 바깥세상으로
들어가, 그저 아무거나 괜찮다고 믿는, 어떤 사교적인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그녀는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육신적인 사망이 아니라 여러분은 남편이나 아내를, 영적인 사망으로 말미암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땅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보혈로 덮여져 있다고 알고 있는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어떻게 보이든지, 그들이 아무리 크다해도, 그들의 교회 위에
아무리 좋은 철탑을 세웠다 해도, 아무리 커다란 종이 울린다 해도 말입니다.
여러분은 보혈이 사람들의 죄들을 덮는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서로를 잃을 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주 예수님을 잃고 쫓겨날지도 모릅니다.
다음에 우리는 그녀의 아들들이 죽고 난 후, 그녀는 아들 둘을 다 잃었습니다,
그 당시 그 도시에는 부흥의 영이 더 이상 없었기 때문에 돌아왔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오, 잠시 여기서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서 그 얘기를 주제로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아무리 여러 교회들이 돌아갔다 해도; 보혈 아래 머무르십시오, 그곳이 거할 장소입니다. 들어가든지 나가든지,
기쁘든지 슬프든지, 형편이 좋든지 나쁘든지, 어떤 형편이 되든지 간에, 보혈 아래 머물러 계십시오.
하지만 나오미는, 가서 다른 무리에게 합류하는 것이 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영적인 떡--양식이 거기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내가 회복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것이 나오는 들에 (항상) 머무르십시오.
우리는 그들이 다시 커다란 부흥이 터졌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그녀가 돌아가기를 갈망하기 시작함을 봅니다.
보시면, 나오미는 “보리 계절에,” 성경이 말했습니다, 추수를 시작하는 때에 돌아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으로 적용시키자면, 커다란 부흥이 진행되고 있을 때에. 그녀는 바로 그 계절에 돌아왔습니다.
빈 손으로; (다시 들어올 때는) 그녀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며느리 중 오르바는, 그녀는 자기가 희생해야 될 것을 보게 될 때, 현대 교회의 예표입니다.
“내가 거기에 가면, 난 춤도 추러 다니지 못할 것이고, 재미있는 시간도 보내지 못할 것이고, 사교 모임에도
못 나갈 거야.” 그래서 그때 오르바는 울면서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돌아섰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아름다운 장면이 있습니다. 룻이라는 며느리가 나오미와 함께 있었습니다.
그것도 또한 이방인 신부의 예표입니다,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고 말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겠어요.
어머니와 함께 가겠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어머니의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어머니가 묻히는 곳에 나도 묻히렵니다.” (바로) 그겁니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경계선(가네스바니아)의, 중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절대적이고, 완전한 헌신을 바라십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입 맞췄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을 말리기 위해서, 말하길, “네 백성에게 돌아가는 게 났겠다. 나는 늙었고, 내게는 아들도
없다.” 율법으로 보면 그녀가 아들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길, “내게는 아들이 더 없다. 내가 남편을
맞아 아들을 낳는다면, 너는 너무 늙어서 그 아들과 결혼할 수 없을 것이니 네 백성에게로 돌아가도록 해라.”
하지만 룻은 말하길,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뿌리가 내리고, 마음 깊은 곳에 박힌 믿음, 완전한 믿음이 룻의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룻은 말하길, “난 반드시 어머니와 함께 가겠습니다.” 그리고는 나오미에게 꼭 붙어
매달렸습니다. “전 어머니가 계시는 곳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말이 좋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는데, 이 위대한 보아스는 추수의 주인이었습니다.
그 때 추수하는 가운데 있었고, 나오미에게는 근족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룻이 거기서 이삭을 주우면서 조그마한
사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룻은 거기에 밀이 조금이라도 달려 있다면, 작은 지푸라기 하나라도 다
주워서 담았습니다.(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 그녀는 그것은 생명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것에 매달렸습니다. 추수의 주인인, 보아스는 추수꾼들에게 가끔 그녀를 위해서 한 줌씩 떨어뜨리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그 시대 계시된 말씀을) 룻이 줍게 하고, 그 다음에 룻은 그 날 앞치마 가득히 이삭을 담았습니다.
추수의 주인인 보아스가 나와서 그런 룻을 보고, 그녀의 성실함을 보았을 때, 그는 룻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그리스도를 대표한다는 것을 잘 보십시오. 그가 어디에 있었죠? 베들레헴입니다. 룻이 어디로 왔죠?
베들레헴입니다. 룻이 어디에서 이삭을 주었습니까? 베들레헴에서 그것도 보아스의 밭에서 였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이것에 부여되는 그런 모든 영적인 의미들과, 일어나고 있는 이 위대한 장면의 배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것을 아시고 계셨습니까?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말세에 우리를 위해 기록하셨습니다.)
그런데 룻이 시어머니에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묻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룻은 보아스와 결혼했습니다,
이방인 여자가 다시 유다에 있는 방백과 결혼하고 베들레헴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미가5:2.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중에서 작을지라도...이스라엘의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그는 모든 것들을 아시고, 그것을 다 올바르게 역사하십니다. 거기서 룻은 보아스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룻과 보아스가 결혼했을 때; 우리가 거기 그 위대한 이야기를 다룰 시간이 있다면, 그 이야기는 모든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랑 장면 중 하나입니다, 룻과 보아스가 결혼했을 때. 그런데 명심하십시오...
여기서 잠시 멈춥시다. 너무나 좋은 내용이어서 그냥 넘어갈 수가 없군요!
룻은 이방인이었습니다. 룻은 유대인과 함께 기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아무런 기업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과 똑같이. 그래서 나오미는 실제로 기업을 받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처음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공적인 경매에서 모든 소유가 팔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파문을 당했고 떠났었습니다.
이제 나오미가 돌아왔을 때, 나오미의 잃은 기업을 무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즉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근족이었습니다. 보아스는 이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그녀는 이 이방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취해야만 했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해야 했죠? 이 소유를 얻기 위해서,
룻은 나오미의 소유 중 일부분이었습니다, 나오미의 재산 모두를 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는 친족, 근족인 사람이어야만 했습니다. 그게 무를 수 있는 유일한 법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타락한 이스라엘의 소유를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근족(친족)이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무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이 직접 (우리와 같은) 육신이 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근족이 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임마누엘이었습니다. 그는 근족이 되셨습니다.
그는 천사들의 형체를 가지지 않고 발을 씻어주고 살았던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들도 둥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머리 둘 곳도 없었습니다. 그는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잃어버린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서 근족이 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베들레헴에 있는 이 위대한 예표 가운데서; 인류의 이 근족이 태어난 장소를 보십시오, 그곳이어야만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위대한 보아스가 그녀를 구속했을 때, 그는 자기가 그녀가 잃은 재산을 전부 다 물렀다는 것을
공적으로 보여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들레헴 성문으로 갔습니다, 다시 그 조그만 도시가 나옵니다,
그는 성의 장로들을 불러놓고, 그날 그가 나오미가 잃었던 모든 것을 샀음을 알렸습니다. 그녀가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샀습니다. 그는 신발을 벗어 던져, 기(旗)로서, 사람들 앞에서 올렸습니다. “무슨 말을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지금 말해라, 이것은 내가 그녀가 잃었던 모든 것을 구속했다는 기념이기 때문이다.”
오, 주님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나사렛 예수, 우리 근족이 오셨을 때, 그는 골고다
언덕 위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높이 들어 올려 졌습니다. 그가 인류가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구속했다는 기념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치료하심과 주 예수의 부활의 능력을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갈보리에서 공적인 깃발이 높이 들어 올려졌는데 말입니다. “내가 전 인류와 그들이 잃어버린 모든 것들을
구속하였다.” 갈보리에서 우리 혼을, 우리 몸을, 우리가 타락함으로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구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친족 구속주께서 오셔서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사시다가, 깃발로 높이 올려졌고, “다 끝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뭐가 끝났습니까? 모든 것이 끝났습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의 기업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을 뿐입니다. 날이 갈수록, 우리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보아스와 룻은 결혼하여 시간이 좀 지나자 그들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는 그 가문에 수를 보탰는데,
그는 오벳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도 아들을 낳았는데, 이새였습니다. 그리고 이새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기름병을 가지고 온 사람은 위대한 사무엘 선지자였습니다, 이새에게 간 위대한 선지자는,
말하길,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중 한 아들을 택하사 내 백성을 다스리고 섬기게 하셨습니다.”
조그만 소년, 붉고 야윈 소년, 다윗이 있던 곳은 조그만 목초지, 들의 뒤켠이었습니다. 나이가 가장 어렸습니다.
사무엘은 그의 형들과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기름 부으셨음을 증명했습니다. 그 일이 어디에서 일어났죠? 베들레헴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곳이 베들레헴인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태어난 곳도 역시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아들, 예수도 역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만
했는데, 왜냐하면 둘 사이에는, 아버지와 아들로서, 그토록 친밀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위대한 아들은
아들이었을 뿐 아니라, 그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었고, 그는 다윗 전에 계셨었고, 다윗 후에 나올 분이셨고,
그는 영원토록, 영원 전부터 계셨던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육신을 따라, 성취될 모든 것들을 보면, 그는 다윗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이 동일한 베들레헴에서, 이 조그마한 버려진 도시에서 여러 해 후에 태어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거기에서는, 보시면, 아무도 이해하는 것 같지 않는 심히 커다란 비밀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베들레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비스런 징조가 일어나고 있는데, 아무도 그 것을 이해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이해를 벗어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 행해지고, 말해지든지 간에, 행해지고 있는 일들의 신비스러운 부분을, 사람들은 그걸 보고 말하길,
“오, 글쎄요, 그건 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러고는 그대로 지나쳐 버립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포착하지 못합니다. 파악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행하고 계셨던 일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작은 일들을 다 모아서, 한 위대한 머리에 이르도록, 역사하고 계십니다.
다윗은, 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작은 소년이었을 때, 그는 붉은 혈색을 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에게는
진짜로 보이는 뭔가를 안에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그 쪼그만, 가족 중에서 가장 작은 아들. 나머지 아들들은,
몸집이 크고 잘생긴 용모를 가지고 있었고, 왕복을 입었을 때 머리에 왕관을 썼을 때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이 보시는 것을 보여주셨는데; 밖으로 드러나는 외모가 아니라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마음을 보셨고, 그는 다윗의 마음 안에 있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다윗에게 왕관이 어떻게 보인다고 해도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을 찾고 계심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다윗에게
기름을 붓도록 시키셨습니다. 다윗이란 이름은 “사랑 받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여러 해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 안에서 잘 대표(표현)되었습니다;
약속된 모든 것들을 이루려고 오실 다윗의 아들. 이 조그만 베들레헴 성은 이 일이 일어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양을 친 곳은 이 조그만 유대 산들에서였습니다, 여러 해 후에는, 천사들이 유대 언덕 위에서
베들레헴을 내려다보면서 첫 번째 노엘을 불렀던 장소였습니다. 첫 번째 노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주께서 나셨도다.” 천사들이 처음에 그들의 노래로 모습을 나타냈을 때, 커다란 교회, 예루살렘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길갈에서도 아니었습니다; 항상 종교적인 교파 경배를 드렸었던 실로에서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움직이고 뭔가를 가져왔던 작은 베들레헴에서였습니다. 바로 거기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던 곳도 거기였습니다.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왕이 태어나신 그 작고 이름 없는 도시에서,
처녀인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은 곳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만왕의 왕이며, 만주의 주가 되신 분을 보호했고,
작은 성으로 둘렀습니다. 사무엘이 기름부음을 위한 기름을 부으러 온 곳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위에,
온 세상에, 겸손한 모습으로 주되신 그리스도를 탄생시킨 곳이었습니다. 천사들은 그의 오심을 미리 알렸습니다.
들에서 양을 치고 있던 목자들에게 노엘이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들은 여러 해 전 다윗 왕이 하던 일을
그대로 따르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과 그분의 방식을 보십니까? 얼마나 위대한 비밀입니까?
그는 이 풍성한 밀 지대에서 태어나셨는데, 밀알 하나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힘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그는 생명의 떡이었습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결단코 죽지 않고 또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웠느니라.”
베들레헴(Bethlem)! 베들이라는 이름. b-e-t-h, 베드(beth), 히브리 말로 베드는 “집”을 말합니다.
이(e)-엘(l)은 엘로힘(Elohim)을 대표합니다, 그 말의 약자입니다, 엘로힘이란 “하나님”을 뜻합니다.
비이-이-티이-에이취, 베드; 이-엘, 이-엘은 엘로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집, 생명의 떡이 있는 곳입니다.
이(e)-엘(l), 에이취(h)-이(e)-엠(m), 그것을 마무리하고 이(e)에다 다시 엘(l)을 붙이면, 히브리어 말로는,
“떡 한 덩어리”를 의미합니다, 엘헴. 이-엘은 하나님, 엘로힘이고. 비이-이-티이-에이취는 “집”입니다.
이-엘, 그것은 엘로힘의 약자입니다. 다음에 이-엘, 에이취-이-엠은 “떡”입니다. 그는 무엇이었죠?
하나님의 떡의 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떡집”이었습니다. 집은, 베드; 엘로힘은, 하나님; 엘헴은, 떡입니다.
“하나님의 떡집”이 베들레헴의 뜻입니다. 그분이 그 곳 말고 다른 어디에서 태어나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그 선지자 외에 모든 사람에게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선지자는 말하길, “베들레헴에서 그가 나오시리라.” 그들은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모든 큰 실로의 장소들을 보고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베들레헴에서
나오셨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생명의 떡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에게, 하나님의 떡 광주리이십니다.
거기에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태어나실 수 없었습니다.
왜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했는가에 대하여, 다른 영적인 면들을 이번 주 내내 공부했습니다.
많은 위대한 것들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이 몇 군데를 깨달았을 때, 성령은 또 저를 다른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말하길, “오 하나님,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그는 베들레헴 말고 다른 곳에서는 태어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곳은 그 나라의 떡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이스라엘 집의 떡이었습니다, 거기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었습니다,
영적인 만나였습니다; 베들레헴에서, 떡 노선, 떡이 있는 장소에서 나오셔야 합니다. 베들레헴, 떡을 굽는. 자,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신데, “그 떡을 먹는 자는, 결단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잊지 말고 말씀드리고 싶은 또 다른 위대한 사건은, 다윗이 가장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었을 때입니다.
그가 도피자가 되었을 때입니다. 그는 이미 기름부음을 받았고, 자기가 무엇이 될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왕이 될 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활활 타오르는 큰 두 불길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이 한 쪽에서는 블레셋인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이쪽에는 사울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라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서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살아있는 교회는 교파나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교회는 혼자 서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자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을 내모는 마귀가 양쪽에 있는 일이? 그는 광야에 있는
요새와 동굴 안에 들어가 피신했고, 그와 같이 믿는 몇몇의 사람들, 소수의 신실한 용사들과 함께 도피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그가 기름부음 받은 왕이 되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저기로 숨어 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왕으로 오실 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보다 더욱 더 그 때가 가까게 보입니다, 과학이 장악하려 하고, 말하길, “그들은 사람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일을 할 수 있고, 그들은 토끼를 가지고 꽃가루를 가지고 다른 토끼를 만들고 기타 등등,”
하나님의 말씀을 반증하려고 애쓸 때에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굳게 믿고, 전보다 더욱 더 굳건하게 버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 닥쳐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옳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불변하는 손을 잡습니다. 싸움이 맹렬할 때, 눈물이 쏟아질 때, 아픔과 사망이 몰아닥칠 때, 그런 모든 일이
있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불변하는 손을 잡습니다. 그들은 그가 왕으로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비웃고 그들을 조롱하고, 그들을 “홀리롤러(holy-rollers)”라고 부르고, 원하는 모든 말로
그들을 부르지만, 그들 하나님의 용사들은 맡은 바 위치에서 충실하게 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들을
“병고치는 무리”라고 부르든지, “광신자 무리”라고 부르든지,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들은 그 왕에게 매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그가 왕의 권력을 잡고 오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헛되이 그분의 이름을 취하고,
조롱하고 비웃고, 그를 믿는 사람들을 “박물관에나 있을 자들이니,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무리”라고 부른다해도,
그들은 거기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맡은 자기 위치에서 성실하게 행합니다.
다윗과 함께 있던 그 용사들은 다윗의 곁에 꼭 붙어 있었습니다. 블레셋 군이 일어나면, 그는 싸워야 했습니다.
그게 누구였든지 간에, 사방에서, 그들은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불쌍한 다윗은, 마음속으로, 온통 혼란에 빠져서;
“주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도자들은 때때로 회중들이 그들이 겪으리라고 알지도 못하는 일들을 겪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
하신 약속들을 생각할 때, 그럼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들은 자기 회중들에게 말하지 않고,
자기 측근의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지도자의 마음 안에는 많은 혼란이 생깁니다.
다윗은 거기에 앉아서, 그의 목이 타는 듯하고, 한여름이었습니다. 블레셋군은 다윗과 사울 사이가 벌어진 것을
이용하려 했습니다. 사울은 끝까지 다윗을 찾고 있었고, 블레셋군도 역시, 그리고 블레셋군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혼란스런 때에 대해서 말한다면; 지금과도 똑같습니다. 다윗은 이 조그만 장소에 피신했습니다.
이 조그만 안식처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곳은 어디든지, 그가 의지할 수 있던 작은 요새들. 그 다음에 그는
그 뜨거운 여름 한낮에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태양볕이 심히 뜨겁게 내리쬐는데, 목이 갈라지듯 불탔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는 혼란과 두려움이 있었고, 궁금해합니다. “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당신은 제게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제가 택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택하셔서 그리 하셨습니다. 왜 당신은 제가
저기 양떼를 치는데서 불러내서, 당신이 당신의 백성들을 섬기게 하려고 이 나라를 제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여기 당신은 저를 사방으로 둘러싼 불 가운데 있게 하셨습니까?” 그런 생각이 그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산 위에 올라가 앉아 내려다보았는데, 거기서 블레셋인들이 들어와 그의 작은 집, 베들레헴에서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조그마한 성은 적의 통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집,
이새의 집도 블레셋인들 밑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나라와 다윗의 교회가 또 그를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이쪽에는 다윗이 싸우고 있던 적이 있었고, 여기에는 다윗이 싸우고 있는 교회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윗이 싸우고 싶어서 싸우는 게 아니라,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우리도 어떤 일들을 해야 하고 말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야만 할 상황에 직면합니다,
진짜 영적인 지도자라면, 그러나 그는 하고 싶지 않아도 그런 말을 해야만 합니다. 그는 자기편을 취하고 자기
색깔을 드러내 보여야만 합니다. “나는 주님의 멸시받는 소수의 무리 편을 택하겠다,”고 작곡자는 말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다윗이 있습니다, 더운 날이었는데, 틀림없이, 이리저리 거닐면서, 그 긴 골짜기를 내려다보면서,
왕복, 아래로 한 이십 오 마일쯤 되는, 골짜기를. 자기 아버지의 집이 블레셋 군에게 포위당해 있었습니다.
저쪽 건너편에서는 사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 자가 옵니다, 정 가운데 앉아서, 그렇죠, 양쪽 편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분열된 때를, 교회가 말하자면, 다른 교파들로 분열된 심각한 때를 바라보면서. 여기 뒤에
다윗이 서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에게 기름부음이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기름부음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윗이 왕이 되리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누가 왕이 될지 알고 있습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누가 왕이 될지 알고
있으니까요. 그분이 이 세상의 왕이 될 것입니다. 저는 버티고 서 있으려면 뭔가가 필요하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로 교파들과 기타 다른 것들에게 제 눈을 감고, 저쪽 그 영적인 장면에, 그분이 장차 오실
왕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분을 섬기렵니다. 제가 죽어야 한다면, 떠떳하게
죽게 해 주십시오; 제 가족,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 제 교파가, 또 모든 게 없어야 한다면. 저로 그분을 섬기게
하여 주십시오. 저는 그분 곁에 있겠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전사들입니다, 다윗과 함께 있던 전사들처럼,
손에는 칼을 들고, 계속해서 앞만 보고 걸어 나간 자들. 그게 하나님의 용사들이 걷는 방법입니다, 준비하면서!
적은 말하길, “사교적이 되려면, 술은 조금 마셔야 합니다. 취하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나는 당신의 부정한 것들을 손도 대지 않겠소.” 아멘! 그렇게 적을 대적해야합니다. 그게 용사입니다!
“오, 당신이 믿고 있는 그 옛날식 낡은 홀리롤러 식들을 버리시지요. 그러면 당신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저는 굳게 서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용사들은 그렇게 합니다.
“오, 당신 그게 정말입니까? 하나님의 치료하심 같은 것은 없어요! 아프면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셔야죠?”
“그건 당신 생각이죠. 저는 다르게 알고 있어요.” 아시겠죠?
“성령 침례 같은 것은 없어요. 그건 사도시대에 있었어요. 그런 시대는 지나갔어요.”
“그건 당신 생각이죠. 저는 이미 성령을 받았어요, 그것을 너무 늦게 말하셨어요. 사도시대는 계속되고 있어요.”
그들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그 조그만 붉은 혈색을 한 자에게 임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앞으로 왕이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마음속에서는, 혼란된 상태에 있었습니다. 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잠시만 그를 지켜봅시다.
저 뒤로 가서 앉아서, 거기를 내려다보고 생각하기를, “내 사랑하는 베들레헴성, 저기를 보아라,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이 일어났던 곳, 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태어나셨고, 내 고조-고조-고조-고조 할머니께서 유다를
나을 때 말 하셨던 곳, 나는 유다 지파에서 나왔다. 저곳에는 초자연적인 것이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그들의
위치를 말했고, 여호수아는 그 아들을 바로 거기에다 배치시켰다. 그리고 거기를 통해 이런 모든 것들이 여기로
오게 되었다. 그래야만 한다. 나는 양치는 목자였는데, 당신이 제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나이다.
당신은 제가 왕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그 다음에 그는 돌아가서 거기를 내려다보고 생각합니다,
“어, 저 아래 내 조그만 성에서, 내가 태어난 곳, 내가 함께 했던 그 조그만 무리들, 그 좋았던 옛 시절.”
감리교인이 좋았던 옛 시절을 돌아본다면 좋을 것입니다, 그들은 소수였었고 이곳 미국에서 드물게 떨어진
조그만 학교 관사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 넘어지고, 얼굴에 물을 뿌리곤 했습니다.
침례교인이신 여러분들도, 나머지 분들도, 여러분이 나오신 곳을 돌아다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오순절교인이신 분들, 여러분이 나온 곳을 돌아다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여기서 싸움이 맹렬할 때, 다윗은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오, 저 언덕에서 밤마다 누워 있던 게 생각난다.
저 별들을 관찰하였고, 별들이 움직였고, 하나님이 내 어린 마음에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나는구나.
어느 날, 성령에 감동된 나머지, 구름과 그늘진 푸른 목장을 바라보고, 소리를 지르고 노래했을 때가 생각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그림자)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오, 세상에, 바로 그때 다윗은 사망의 문턱에 있었습니다, 양쪽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성령이 함께 했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했던 그 좋았던 옛 시절; 나는 주님을 찬양했고, 주님을 누렸었지.
“어느 날 아침 사자 한 마리가 와서 내 양떼 중에 양을 하나 물었었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여, 나는 가서 그 사자를 잡고 갈기갈기 찢었었다. 그 구원을 난 기억하고 있다. 오, 해가 지기 직전,
곰 한 마리가 들어와 내 양을 물었을 때, 그 곰도 죽였었던 그 저녁을 기억한다. 그 위대한 구원들을!”
“내 어린 시절, 양떼를 치면서, 내가 주님을 송축하며 노래하던 때를 기억한다. 오 하나님, 저를 다시 그 장소로
데려가 주십시오. 제게 그 첫사랑을 돌이켜 주십시오. 절 돌이키시고 제게 다시 목자의 지팡이를 주시옵소서.
제게 다시 제가 치던 양떼를 주십시오. 저는 당신을 경배하면서, 혼자 거기에 있겠습니다.”
때로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맹렬한 싸움 가운데 있습니다. 뭔가가 행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한때는 소년 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장한 남자입니다.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톱밥을
날리던 시절,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외치며, 사람들 때문에, 이곳에 전혀 들어오지 못했던 때를 기억하는데,
오늘날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싸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 더 이상 어린 청년목사, 윌리엄 브래넘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뭔가를 산출해야만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뭔가 다른 게 있어야만 합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싸움도 계속됩니다. 맹렬함도 계속됩니다. 책에 기록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때입니다.
지금 그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다윗과 그가 가진 모든 혼란들, 이리 저리 거닐면서 생각하기를, “오, 이 더운 날! 휴우, 오, 너무나 덥구나!
오, 사울은 이쪽 길에서 올라올지도 모른다, 블레셋군들이 저쪽에서 올지 모른다; 사방에 군대가 퍼져 있고,
우리는 이 동굴 입구에 앉아 있다! 그러나, 기름부음은 내게 있다. 오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오, 물을 좀 마실 수 있다면!” 그때 그의 마음은 저 아래 베들레헴 성문 곁으로 갔습니다.
거기에는 우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물은 다른 물과 같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팔레스타인에는 좋지 않은 물도 있습니다. 나쁜 물도 있어서,
흑수열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 물이. 그런 물의 성분은 알칼리여서, 사람들을 죽이는 물입니다.
하지만 베들레헴은 그 지방의 수맥이기도 합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물 같은 물은 없었습니다!
다윗은 생각하곤 했습니다, “내가 양떼를 데리고 아침을 시작할 때, 저 옛 우물에 가서 물을 마시곤 했었지.
오, 그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달고, 갈증을 풀어주었던가!”
이제 그의 목은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기름부음을 받은 몸이었습니다, “오, 내가 물을 좀 마실 수 있다면!”
그런데 그는 낙심한 가운데 외치기를, “오, 누군가가 저기 베들레헴에 있는 그 우물물을 가져다준다면 좋겠다!”
오, 자기의 어린 시절과 승리들을 꿈꾼 후에, 자기가 여기 불 가운데 앉아 있다는 것을 보고, 그는 외치기를,
“오, 누가 베들레헴 물을 가져다 줄 수만 있다면!” 그런데, 그의 용사들은 그의 생각을 풀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온 마음을 다해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다윗의 가장 작은 소원은 그들에게는 명령이었습니다.
다윗의 용사 중에 세 사람이 칼을 빼어들고, 진영 밖으로 빠져나갔고, 이십오 마일의 길을 헤치고 나갔습니다.
다윗은, 그들이 간 것을 보고, 분명히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을까?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그들이 어디엘 갔을까?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그들은 이십오 마일이나 되는
길에서, 사방에 복병이 있는, 사망의 문턱에 있었고, 칼들이 번쩍 불을 튀기고, 방패들은 요란하게 소리를 내고;
하지만 그들이 왕이 되리라고 믿고 있는 그들의 사람, 그들의 형제가 물을 마시기를 원했습니다.
오, 형제님, 저는 오늘날의 용사들이 형식주의와 의심과 불신의 길을 기꺼이 헤치고 나아가서 주님의 존전에서,
주님의 소원들을 해소시켜 드리기를 원하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의 가장 작은 소원이라도; 그게 아프리카라면,
인디아, 길거리, 아니면 어디든지 간에! 주님, 당신의 가장 작은 소원은 제게는 명령이나 다름없습니다.
죽음은 제게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기도, 제 현재 모습이나, 제 장래의 모습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주님. 당신의 소원들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그게 그분 옆에 서 있는 용사들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홀리롤러’라 부르든지, 내 이름이 소문이 나든지, 날거리에서 발길질하든지, 그건 상관없습니다.
당신의 소원은 내게는 명령입니다.” 그게 진짜 군인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죠? 그들은 그 우물에 이를 때까지 싸우면서 나갔습니다. 그들은 물을 한 양동이 퍼왔습니다.
그들이 싸우면서, 좌우로 자기 길을 헤치면서 돌아와, 다윗 앞으로 나아옵니다.
말하길, “내 주여, 여기 물이 있습니다!” 오, 세상에! 뭐죠? 치욕을 당한 사람, 교회가 미워한 사람,
왕이 미워한 사람, 블레셋 사람들이 미워한 사람, 거의 모든 곳에서 미움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던 작은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그가 장차 왕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멋진 노래들을 부르고, 커다란 교회를 세우고, 위대한 승리의 노래와 기타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주님을 찬양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마음으로는 내게서
멀도다, 너희가 사람의 계명을 교훈으로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령이 교회에 들어와 무슨 일을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보이게 해 보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을 문 밖으로 쫓아낼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그들이 경배하되, 너희가 헛되이 경배하며 사람의 전통을 교리로 가르치고 있도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전사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 곁에 서 있는 용사들이 있습니다,
저기 작은 베들레헴에서처럼, 영적으로 이해하는, 아시겠죠? 정말로 그렇습니다.
다윗은 이 물 양동이를 들어서, 쳐다보고는, 성경은 다윗이 그 물을 땅에 쏟았다고 했습니다.
말하길, “주님, 결단코 그 물을 마시지 않으렵니다. 이 내--당신의 용사들이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가서 이 물을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 물은 사람의 피 입니다. 저는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자기 목숨을 위태롭게 하면서 적의 진지를 뚫고 들어가 가져온 이 단 물을, 다윗은 주님께 자원하는
예물로서 부어 드렸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경을 이루는 행위였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나셔서, 생명의 떡이시긴 하지만, 생명의 물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죠? 그는 다윗과 용사들 둘 다 안에서 나타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왕이시면서 적의 진지를 뚫고 들어간 용사이셨기 때문입니다.
아멘! 사망과 음부와 무덤을 정복하셨고, 자기 피를 다 쏟아서 요한복음3:16절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 다음에 예수님은 그것을 대표했던 그가 (영생의) 물이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멸망하는 사람들이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죠? 자기 피를 가지고, 피를 부어주심으로써;
조금씩 흘리신 게 아닙니다, 그건 사고 였습니다. 그는 갈보리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피를 부으셨습니다,
그가 적의 모든 진영을 뚫고 난 후, 세상에게 떡 광주리가 되시기 위해서, 자기 생명의 피를 부으셨습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임마누엘 피로다, 이 샘에 죄를 씻으면, 정하게 되겠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곳이 떡의 중심지였고,
그분이 생명의 떡이셨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물의 중심지였습니다, 그게 뭐죠? 생명의 물?
예수님 안에는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이 다 있었고, 그래서 오셔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셔야 했던 것입니다.
“너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모든 위대한 방백들 중에 지극히 작지 아니하냐? 너는 그저 평범한 작은
설교자이다, 그저 조그만 사람이다; 하지만 너에게서 옛적부터 계시고,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는, 태초부터,
영원부터 영원히 계시는 치리자(통치자)가 나오시리라.”
그래서 그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요람이었습니다.
형제여, 그분이 오늘날 요람으로 삼고자 하는 곳은 당신 안, 당신의 마음속입니다. 여러분에게서 멸망해가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물을, 기아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떡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그는 생명의 떡과
물이십니다, 그 두 가지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떡과 물. 그것은 약속된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잠시 동안 머리를 숙입시다. 그러고 계실 동안, 주의를 집중시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여러분 오늘 아침에, 베들레헴에 가 본 적 있습니까? 베들레헴에 가시지 않았다면...
그것은 베들레헴 에브라다라고, 베들레헴 에브라다(Ephrath)로도 불렸습니다. 에브라다는 “뿌리”를 뜻하는데,
에이치-이-엠-피이 라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헴프는 “뿌리”를 뜻합니다. 거기 그 옛 고대 지역은 에브라다라
고 불리웠는데, “그곳은 생명의 근원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길,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하셨습니다. 그는 모든 생명의 뿌리이십니다.
여러분이 베들레헴 에브라다에, 베들레헴에 오시지 않았다면, 오늘 아침 오셔서 그분을 여러분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여러분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손을 들고, “주 하나님, 지금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지금 여기에 제가 전심으로 예수님께 옵니다. 저는 당신의 베들레헴으로, 생명의 물과 떡으로
나아옵니다. 지금 저는 주님을 제 구세주로 받아들입니다.”라고 말하시지 않으렵니까? 저 뒤에 있는 젊은이,
주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길. 주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길. 얘야, 하나님께서 너를 축복하시기를 바란다.
또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지금 제가 옵니다.; 아무 것도 팔에 들지 않고. 저는 목말라 하며 서 있고,
제 목은 말라 있습니다. 저는 제가 어디에 가서 진짜 생명을 찾을 수 있을지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궁금해 합니다. 저는 여러 교회들을 가 봤고...” 자매님, 하나님이 당신을 축복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여러 교회에 속해 봤고, 제가 알고 있는 모든 일을 행했습니다, 브래넘 형제님, 하지만 저는 한 번도
그 진짜 생명을 주는 근원을 만지지 못했습니다. 주님, 그것을 받으려고, 지금 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해서 여기 계십니다. 그냥 손만 들고 이렇게 말하시지 않겠습니까? “주님, 접니다. 저는 곤고한
가운데 서 있는 자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이 기도할 동안,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 주 하나님, 이 짧은, 의미가 잘 연결되지 않는 메시지가 성경에서 나갔지만, 당신이 거기에 두신 모든
상징들로, 그것은 어쩌면 슬기롭고 지혜 있는 자들의 눈에는 숨기우고 배우려고 하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졌을 겁니다. 어떻게 그 작은 베들레헴이, 그 땅 중 가장 작은 곳이! 선지자가 그것을 어떻게 말했습니까?
“너는 모든 방백 중 지극히 작지 아니하냐?” 그러나 그 조그만 하찮은 장소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나오게 하는 것을 하나님은 참으로 기뻐하셨습니다. 주 하나님, 그 붉은 피...주 예수님의 줄 피로 씻김을 받은
작은 무리의 사람들에게서, 당신은 이 세계 여기 저기에서, 어딘가에서, 주님, 그 무리에게 다시금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실 그리스도를 나타내실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 지금 이곳에 있는 우리들 각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로 당신의 베들레헴으로 나아오게 하여
주시기를 당신께 기도합니다. 우리는 “오 신실한 자들이여 모두오라, 베들레헴으로 오라.”는 찬송을 부릅니다.
주님, 한 때는 상징이었던, 저 조그만 성으로 가는 게 아님을 사람들로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생명의 떡과 물이
되시는, 실재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임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손을 든 사람들을 당신의 나라에 지금 곧 받아 주시옵소서. 주님, 왜냐하면 그들이 주님을 영접한 것은
그들의 믿음으로 한 것이고, 그들이 손을 든 것도 믿음으로 한 것이고, 제가 당신이 그들을 받아주시리라고
믿는 것도 믿음으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그들을 베들레헴에서 지키시고, 그들이 나오미처럼 결코
방황하거나 그곳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여 주시고, 형편이 어려워질 때, 그들이 베들레헴에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조금만 지나면, 형편은 나아질 것입니다. 주님, 들어주시옵소서.
지금 저는 당신이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 드립니다. 주님, 이곳에는 병을
낫게 하는 당신의 접촉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베들레헴에 이전의 모든 영광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당신은 나오미가 아플 때, 침체되어 있을 때에, 나오미를 회복시키셨습니다. 당신은 나오미를
보리 계절에 돌아오도록 돌이키셨습니다. 지금, 아버지여, 우리는 당신이 모든 나오미들을 돌이키시고 이 안에
있는 곤고한 모든 사람들을 돌이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기도하옵는 것은. 오 주님, 지금은 보리
계절입니다, 큰 보리떡 덩이가 보이고, 언덕을 굴러 내려가 적의 진영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나님, 지금 당신이
그 커다란 보리 떡덩이를 이 건물 안으로 들여와, 그것으로 사람들의 죄 뿐 아니라, 질병을 위해서도 대속하여
주시고 신성한 임재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낫게 하여 주시옵기를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느낍니다, 어쩌면 제 개인적인 느낌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이 가까이 계심을,
이 안에 지금 당신이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당신이 여기에 계심을 믿습니다.
저는 사람들 때문에 이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당신. 주님,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 아침,
사람들이, 그 용사들처럼, 그 환상을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당신의 위대한 전능하심, 당신의 위대한 권능,
당신의 위대한 임재, 당신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 왕,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 그런 당신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는 것; 그들이 그들의 영혼 안에서 그 사실을 보게 하시고, 고통으로부터 나음을 입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에게 그것을 넘기면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저는 하나님을, 그분의 모든 말씀을 믿고, 그의 말씀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그가 “나는 있었다.”가 아니라, , “나는 스스로 있느니라.” 항상 계시는 존재임을 믿습니다.
저는 지금 그 사실을 믿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손을 드신 분들, 교회를 하나 찾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죄를 씻고,” 예수님이 곧 오실 것을...그가 재림하여 나타나실 것을 믿는 교회를 찾으십시오.
저도 그분의 임재가 여기 있어 아픈 자들을 고치고, 곤고한 자들을 낫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은 꼭 일대일로 기도를 받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며칠 전, 사람들에게, 그것을 입증했습니다,
저는 그저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지금 앉아서, 저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데, 그는 여러 날 침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목이 너무 많이 부어 먹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할 정도였고, 열이 꽤 높이 올라갔습니다. 그는 자기 부모에게,
“사람을 보내, 브래넘 형제를 모시고 와서 날 위해 기도해 주게 하세요.”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가 바빴기
때문에 절 방해하고 싶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데 뭔가가 절 그들의 집으로 가도록 이끌었습니다.
거기에 앉아 있는 동안, 그들은 그 젊은이에게 접시를 하나 갖다 주었습니다, 아주 부드러운 달걀과 다른 뭔가,
으깬 부드러운 콩을, 그런데 그는 삼키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들을 뒹굴리며, 손가락으로 그것을
으깨려고 했습니다, 이빨은 온통 부어올랐고, 고름이 줄줄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으깨서,
그렇게 목으로 넘어가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한두 번 먹더니, 더 못 먹겠는지 접시를 밀어냈습니다.
저는 기도하지 않고, 거기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저 작은 뭔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못합니다. 저는 말하길, “주님, 주님, 지금 연말이 가깝습니다. 새로운 뭔가
또 오고 있습니다. 저로. 주님, 이게 그겁니까? 이게 그 일입니까?” 제가 그 말을 하기 시작하자마자,
자 마음속으로 말하는 겁니다, “저는 당신이 여기에 계심을 압니다,” 젊은이는 손을 뻗어 한 입을 더 먹었고,
한 입 더 먹고, 한 번 더, 한 번 더 먹더니, 한 그릇을 다 먹어치우더니, 차를 타고 어딘가 갔습니다.
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죠, 그의 임재, 그분의 임재하심이. 그들은 ...(기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그분을 참석하게 (해야) 합니다.
며칠 전 그들은 이 마지막, 최근에 사진을 찍었습니다. 제가 그분이 거기 서 계신 것을 보았을 때, 저는 그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어, 나는 그 위에서 주의 천사를 보았다, 나는 그게 참 좋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가
이 사진을 찍었을 때! 나중에 새벽 세 시 쯤, 그분이 절 깨워서 어떤 일이 있을 것을 말해 주셨고, 그 모든
것을 제게 설명해 주셨고, 갑주와 그런 모든 것이 어떻게, 그것에 대하여 제가 결코 깨닫지 못한 것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저는 들어가서 그것을 들고 보니까? 거기에 나와 있었습니다. 저는 전에는 그걸 보지 못했었습니다.
오, 그때 제가 느낀 기분은 정말로, 그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위안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여기에 계십니다, 그저 그분의 임재하심이. 그런데 주의 임재하심은 거기에서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여기 있는 주님의 임재하심은 병자들을 고칠 것입니다. 주의 임재하심은 여기에서 죄인들에게 마음의 찔림을
받게 할 것입니다. 주님의 임재는 그의 백성들 가운데 있고, 그는 떡과 물이 가득한 하나님의 베들레헴입니다.
저는 우리가 와서 먹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장소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너무나도 기쁩니다.
(여러분은 안 그렇습니까?)
자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하고 싶은 것 있어요, 형제님? [네빌 형제가 “아뇨.”한다.]
잠시, 일어납시다. 우리가 늘 모임을 마치기 전에 부르는 찬송, “슬픈 마음 있는 사람.”
몇 분이나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어디 여러분이 손드는 것을 좀 봅시다. 그럼 여러분이 손을 들었으니까?
손을 내려서 옆에 서 있는 누군가와 악수하십시오, “순례자여,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기를.”하고 말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다음에는 뒤로 돌아서. 좋습니다,
서로 서로 알고 지내기 위함입니다. 좋습니다. 자 하늘 쪽으로 쳐다보고 이제 이 찬송을 부릅시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면; 영원토록 변함 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예수의(예수의) 이름은 세상의 소망이요 예수의(예수의) 이름은 천국의 기쁨일세.
(이제 명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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