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진짜다
– 저 멀리
전창수 편집판
프롤로그
“총공격!”
내 눈앞에서 광선검들이 움직인다. 가느다란 빛을 내뿜고 있는 그 검들은 점점 더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리고 그 검 뒤로 검은 물체의 사람들이 스르륵 스르륵 소리를 내고 있다. 저들은 대체 누구인가? 사람인가? 악마인가? 귀신인가? 사람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저들은 악마? 그들의 검들이 내 배와 다리와 팔을 찔러댄다. 온몸이 쑤시다. 그리고 점점 더 정신이 흐리멍텅해진다. 흐리멍텅해지는 머리. 그리고 가느다랗게 들리는 그들의 말소리.
“이 녀석 죽이면 안 되잖아? 어떻게 하지?”
나는 왜 죽이면 안 되는 걸까?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머리 잡아 봐. 이 녀석 기억을 아예 없애면 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쳐 보지만 생각 속에서만 움직일 뿐, 꼼짝도 할 수 없다. 그들이 내 머리를 잡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뽑아내는 소리가 들린다. 엄청난 고통이 머리로 전해져 오지만 소리조차 낼 수 없다. 머리카락을 뽑은 그 자리에 뭔가가 찔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절대 기억하지 못하겠지?”
“이 녀석이 신이라면 모를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기억 못 하지.”
“진짜 신이면 어쩌지? 그럼 우리 다 죽는데.”
“진짜 신이 이렇게 쉽게 잡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리고 신이 인간으로 어떻게 태어나?”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신의 능력을 가졌을지도.”
“신의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신이 아니면 이건 못 풀어. 신이 직접 풀어야 되는데 그러려면 이 녀석 죽어야 돼. 이 녀석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한 절대
안 죽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 그럼 안심해도 되겠네.”
서서히 그들의 말소리가 멀어져간다. 그들이 내게서 멀어져가는 건지 내 기억이 지워지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점점점 잠에 든다. 그들이 내 기억을 지우면 지울수록 나는 오히려 편안해져간다. 내 마음이 온통 평온해져 간다. 편안한 잠이 내게 다가온다.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꿈은 온통 행복한 꿈이다. 내 기억이 지워져가는 건지 내가 행복해져 가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생전 보지도 못한 어느 낯선 곳에서 잠을 깬다.
1. 낯선 곳에서 깨어나다
아주 오랫동안의 숙면을 취한 듯하다.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다. 머리가 서서히 맑아지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너무 편안한 잠. 몸을 뒤척여 본다. 물컹한 게 손에 잡힌다. 또한 아주 보드라운 느낌이 나를 조금씩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눈을 뜬다. 검은 머릿결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이 나고 있었고 내 손에는 그녀의 우유빛 살결이 그녀의 유두와 함께 겹쳐져 있었다. 이게 뭔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이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이 여자는 누구인지! 그녀는 깊은 숨을 쉬며, 일정한 간격으로 호흡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하다. 윗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자, 반대편에 또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여자는 또 누구인가? 갈색머리에 구릿빛 피부가 돋보였고, 그녀 역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이 보였다. 족히 네다섯 명은 누워 있을 만한 크고 푹신한 실크침대가 눈에 들
어온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녀의 가슴을 더듬어 보았다. 숨을 더 크게 쉴 뿐, 이미 그 손길에 익숙한 듯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녀들이 알몸이듯, 나 역시 알몸이었다. 욕망의 크기가 나를 현실에서 도피시키는 듯 하고 그 욕망에 짓눌려 나는 그녀들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게슴츠레한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감았을 뿐, 나의 몸에 그녀들의 몸을 맡겼다. 한참 동안을 나는 그 욕망에 이끌리다가 퍼뜩 내가 뭐하는 건가 싶어 그녀들을 더듬던 내 손을 거두었다. 자꾸만 커져 가는 내 안의 욕망을 억누르는 대신,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비로소 해소해나가기 시작했다.
깊은 잠을 자려는 그녀들을 흔들어 깨웠다. 그녀들은 그저 귀찮다는 듯 꿈쩍도 하지 않고 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들의 잠을 방해하는 걸 포기하고 화려하게 덧칠해져 있는 철제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방문 밖에는 어깨가 벌어진 한 건장한 사내가 나에게 인사를 한다.
“주인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인님이라니. 나는 그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주인님. 여기는 주인님의 저택입니다. 주인님은 지난 밤에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셨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나실 것이니, 지금은 절대 안정을 취하시어야 합니다. 곧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우선,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그러더니 그 건장한 사내는 손뼉을 쳐서, 누군가를 부른다.
“주인님 깨어나셨으니, 요리를 준비하게”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무리 기억하려 애써도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왜 주인님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인님, 기억이 나는 것을 돕기 위해 집을 한번
둘러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더니 그 사내는 또 손뼉을 두 번 치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이번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주인님께 집안 구경 좀 시켜드리게.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신 거 같으니, 설명을 많이 해드려야 할 걸세”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주인님, 따라오시지요." 나는 그의 말대로 기억을 찾을 기대감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2. 진수성찬
요리가 준비되었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 한상 가득 차려졌다. 각종 해산물과 가재 요리, 그리고 육질이 부드러워 입에서 살살 녹는 소고기 요리까지. 이렇게 푸짐한 상을 먹어본 적이 있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요리들은 모두 처음 먹어 보는 맛 같았다.
요리를 먹는 것과,리를 대접하는 사람들과 나를 시중해 주는 사람들까지 모두 낯설다. 내가 요리를 하나씩 집어먹을 때마다 그들은 요리에 대한 설명까지도 빠짐없이 추가한다. 배부른 아침을 먹고 나니, 커피가 생각났다. 그래, 커피. 왜 커피가 생각이 났을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나는 하나씩 하나씩 음식과 디저트를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왜 커피가 생각났는지는 몰랐다. 그저, 단순한 습관 때문은 아니었을 것 같다. 내가 마시는 커피에도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그들에게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하자, 그들은 내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만들지는 않고 최고급 원두커피를 갖다 주었다. 나는 그냥 단맛 나는 보통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지만, 그들은 건강을 생각하시라면서, 원두커
피에 약간의 시럽을 넣어줄 뿐이었다. 왜 먹는 것도 내 맘대로 못하냐고 화를 내었지만, 주인님은 주인님 혼자만 생각하시냐며, 우리도 주인님 없으면 모두 죽은 목숨이니 제발 건강 생각하시고 몸을 좀 돌보시라는 핀잔이 올 뿐이었다. 그들이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입맛에 맞지 않는 그 커피를 들이켜야만 했다. 나는 또 궁금해졌다. 왜 그들은 내가 마시고 싶은 커피를 못 마시게 하는 것인지.
식사를 마치고 정원에 나와 밝게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정원을 거닐다가, 털이 복스러워 보이는 개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 개는 이름이 뭔가요?”
“떨리우스라고 합니다”
“떨리우스? 이름 한번 재밌네요”
“사람을 겁내하는 강아지이지요. 그래서 떨리우스라고 지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정말로 그 개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떨리우스. 왜 떨고 그래? 내가 무섭니?”
내가 그렇게 말을 걸자, 떨리우스는 나의 손등에 자신의 코를 갖다 대고는 냄새를 맡더니, 나의 손등을 이내 핥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을 부비며 나를 반가워했다.
“어? 이 개 주인이 원래 나였나요?”
“주인님, 여기는 주인님 집입니다. 이곳의 모든 것이 원래 주인님 것이었고, 떨리우스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당연히 주인님의 개입니다.”
그렇다. 말이 되는 소리였다. 모든 기억을 잃어 낯설기만 한 이 집이 원래 내 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주인 대접을 받는 것이겠지. 나는 떨리우스를 안았다. 떨리우스는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있었고 나는 그를 안은 채로 조금 더 산책을 즐겼다. 조금 더 걸으니,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멀리 해안가가 보
였다.
“여기는 바닷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주인님.”
나는 바닷가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몇 시간이 순식간에 갈 줄은 몰랐다. 귀여운 떨리우스와 함께, 바닷가 모래사장을 몇 번이고 돌아다녔다. 나는 지금 내가 무척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아, 이런 기분도 처음으로 느껴보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이 좋았지만, 한편에는 무거운 마음의 짐을 놓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의 머리 한쪽을 계속 갉아먹고 있었다.
3. 두려움 속으로
“철저히 감시해!”
저 쪽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를 주인님이라 모시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을 감시하라는 말인가? 저 바깥에서 들려오라는 <감시>라는 단어가 과연 나한테 하는 소리인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 안에는 여전히 낮의 그 여자들이 잠에 취해 있었으며 넓디 넓은 정원과 하늘이 보이는 창, 넓고 넓은 해변. 이 곳은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의 장소란 말인가?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나는 지금 만족스런 쾌락에 빠져 있는 듯 하고, 지금 이 순간이 즐겁긴 하지만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나를 주인님이라고 불리는 저들이 결코 편안하지 않다는 것 뿐. 그들은 나를 통해 무언가 얻으려는 듯한데,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이용가치가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방 안에 엎드려 있는 저 여자들은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은 약에 취해 있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이 귀찮은 듯 했다. 이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어 나는 문 밖으로 다시 나가 보았다. 나가자마자, 또다시 집사인 듯한 사람이 나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주인님, 어디 가시렵니까?”
본능적으로, 그들에게서 위협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나는 저 넓고 넓은 밤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바깥 세상 구경 좀 하고 싶네요”
“네, 주인님, 지금은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푹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이 세상을 구경시켜 드리지요. 주인님은 새로 태어나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이곳을 주인님의 파라다이스라고 부르지요. 아마, 다른 세상을 구경하시면 기분이 더 나아지실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주인님의 행복을 가리키는 시계가 되지요.”
진심으로 말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안 좋은 느낌이 드는 것일까? 나는 지금 진짜 행복한 것일까? 쾌락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그저, 오늘은 생각하지 말자. 내일 아침이면 무언가 하나라도 윤곽이 잡히겠지. 나는 잠을 청했으나, 잠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밤이 아주 깊었다. 바깥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린다. 또, 무슨 소리인가. 궁금증은 더 커져갔으나, 일부러 나가 보지는 않았다. 내가 잠든 것으로 알 터인데, 그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철저히 해!”
무슨 준비를 하란 말인가. 그리고 명령조로 말하는 저 사람은 내가 본 적이 없다. 그의 존재를 나에게 드러낸 적이 없다. 나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이 방안에도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 길이 없다. 어쩌면 나는 지금의 이 쾌락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나는 저들이 무섭다. 나의 호기심이, 내가 갖고 있는 이 자그마한 쾌락의 즐거움조차 누비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 밤은 지나갔고 비로소 아침햇살이 밝아왔다. 나는 그들이 차려주는 맛있고 푸짐한 아침식사를 하고 비로소 세상구경을 하러 출발했다.
그리고 거기엔 내가 아직 보지 못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었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어디선가 분명 본 듯한, 그러나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나는 그를 대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나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본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나는 그저 사진만으로 그를 보았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 얼굴이 기억 난 것이 나에겐 또 한 번 신기한 일이었고, 그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는 내가 아들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그저, 내게 주인님 하면서 운전을 할 뿐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현상이, 또한 이 세상이 더욱 더 궁금해질 뿐만 아니라, 더욱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의 아버지는 살아계셨던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내가 죽은 것인가? 나는 점점 더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리고 있었다.
4.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운전을 하는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마 사이에는 많이 찡그렸을 듯한 인상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내 옆에는 나를 주인님으로 모시는 건장한 사내가 그에게 갈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차는 길고 긴 바닷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검회색을 띤 바다. 바다가 원래 검회색이었던가? 나는 건장한 사내에게 물었다.
“바다가 원래 이 색깔이었나요?”
“바다 말입니까? 주인님? 기억 안 나십니까?”
“원래 이 색깔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색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주인님이 기억에 없으셔서 그렇습니다. 이 바다는 색깔이 수시로 바뀌는 바다입니다.어느 날은 파란 색이고 어느 날은 빨간 색을 띄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법의 바다로 불리기도 합니다. 주인님 기억이 돌아오신다면 정말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이 사람은 나를 감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정말 위해 주는 사람인가? 아직 내가 기억이 돌아와서 지금 나는 정말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음을 못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내 기억이 돌아온다면 나는 정말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뭐 하나 불편한 것이 없다. 내가 깨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불편한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주인님. 바다를 건너면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을 건너면 마을이 나옵니다. 주인님. 오늘은 거기에서 식사를 하시게 될 것입니다. 식사 예약을 해 두었습니다. 주인님만이 드실 수 있는 식당입니다. 이 모든 게 주인님의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큰 부자였단 말인가?
“정말 정말 제가 그렇게 큰 부자인가요?”
“주인님, 저희도 주인님의 기억이 빨리 돌아와서 주인님이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저희를 대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만, 너무 서두르지는 마십시오. 기억이란 게 그렇게 쉽게 빨리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님. 바닷가를 지났습니다. 이제, 산을 지나칩니다. 바깥 풍경을 좀 돌아보시죠”
“저건 무슨 나무인가요?”
“소나무입니다. 여기는 모두 소나무만 있습니다.”
“소나무요?”
“네, 그것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네, 소나무는 어떤 나무인가요?”
“주인님, 소나무는 생명력이 강한 나무입니다. 보시는 그대로 느끼시면 됩니다. 저 뾰족하게 생긴 것이 소나무의 잎으로 불리는데, 그 소나무 잎이 생명력을 강하게 합니다. 주인님처럼 소나무는 생명력이 강합니다.”
“저처럼요?”
“네, 주인님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력이 강한 분입니다. 소나무처럼 생명력이 강하신 것입니다.”
차가 소나무로 이어진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다. 양 길가에는 모두 소나무로만 이어져 있다.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화장실 가고 싶은데…”
“주인님, 여기는 어디서나 화장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참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러더니, 그 사내는 차를 세우게 하고는 바로 길가 옆에 텐트 같은 것을 치더니, 나를 불렀다.
“이게 뭔가요?”
“간이 화장실입니다. 항상 차 트렁크에 휴대하고 다닙니다. 여기서 볼일 보시면 됩니다.”
나는 급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고 급히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변기가 없이 단순히 칸막이만 막아놓고 일을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여기다가 일 처리 하나요?”
“일단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나는 일단 급해서 그 사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오줌이 땅바닥에 닿자마자 어딘가로 증발했다. 이게 무엇인가? 여기는 사람 사는 세상인가? 내가 깨어난 저택의 화장실에서는 오줌이 증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길래 오줌이 증발해 버린단 말인가.
볼 일을 보고 다시 차에 탔다.
“시원하십니까?”
“네, 그런데 왜 증발하나요?”
“여기는 신선의 산입니다. 마을에 가면 화장실이 따로 구비되어 있지만, 이 산에서는 화장실이 따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액체로 된 것은 모두 증발해 버립니다. 그런 곳입니다. 이 산의 신비함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산은 잘 오지 않습니다. 증발해 버리는 것이 무섭다고 합니다. 주인님은 이 산을 무서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주인님을 모시는 저희들 말고는 지나다니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5. 마을사람들
차는 이제 마을로 들어섰다. 나무와 벽돌로 지어진 주택가가 드문드문 보인다. 길은 마을로 들어서서도 한참 동안을 지나가더니,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 고층건물에 선다.
“주인님, 다 왔습니다.”
“이 창문들은 다 뭔가요?”
“태양열을 이용한 창문입니다. 태양이 내리쬐면, 그 시간 동안, 이 건물은 태양열을 안으로 저장해 놓습니다. 그 열을 이용하여 난방도 하고 전기도 쓰는 겁니다. 에너지가 전혀 들지 않는 절약형 구조입니다.”
그의 설명은 명확했지만, 나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신선의 산과 태양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곳인데, 도무지 설명을 해주지 않으니 답답해 미치겠어요.”
“주인님. 지금은 조금 답답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마십시오. 천천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주인님이 누구신지, 주인님이 사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 사내의 말은 점점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주인님, 올라가십시오.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여기는 몇 층이나 되죠? 마을에는 이런 곳이 없는데, 유일하게 높은 건물이네요?”
“네 맞습니다. 마을에서 유일한 고층건물입니다. 44층입니다. 주인님을 모시게 될 곳도 44층입니다. 이곳에서 보시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보이시니, 만족하실 겁니다.”
“44층? 44층까지 걸어서 가야 하나요?”
“아닙니다. 주인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실 겁니다.”
“아, 엘리베이터. 그런 게 있었지. 기억나요.”
나는 그 사내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주인님, 총개라고 부르셨습니다. 전에 총개라고 하면 제가 언제나 주인님 곁에 있었습니다.”
“총개요?”
“네, 주인님.”
“총개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종입니다. 님자는 빼시고 총개라고만 부르시면 됩니다.”
“네, 알았어요. 총개님. 익숙해지면 총개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44층에 도착했다. 그 넓은 홀에 원탁 테이블이 달랑 하나. 그리고 창가를 보니, 내가 왔던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나무가 우거진 숲에는 갈지자로 길이 뻗어 있었고 형형색색의 마을 지붕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검회색이었던 바다가 푸른 바다로 변해 있는 것도 보였다.
“식사를 대령하게.”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종업원인 듯한 사람에게 총개가 명령하고 있었다. 저 얼굴,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총개님. 어찌하여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나요?”
“주인님, 곧 보시게 될 것입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십시오.”
뭔가를 감추듯, 총개는 얼른 말을 가로채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운전사는 안 오나요?”
“운전사는 1층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할 것입니다.”
“왜 같이 안 오나요?”
“주인님, 여기는 주인님 전용 식당입니다. 주인님만 식사하실 수 있습니다.”
“총개님은 안 드시나요?”
“저는 미리 먹습니다. 주인님의 시중을 들 때는 식사하지 않습니다.”
또 혼자 먹게 되는 밥이다. 점점 밥맛을 잃어가고 있었다.
“식사 나왔습니다.”
“어, 어제랑은 완전히 다르네요?”
“주인님, 기억 안 나십니까?”
“네, 어제 먹었던 것은 뭐였는지 대충 알겠는데 이건 도무지 뭔지?”
“이것은 된장찌개이고, 이것은 김치전, 이것은 갈치구이, 이것은 탕수육이란 것입니다”
총개는 하나하나 음식을 가리키면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김치고 이것은 깍두기, 이것은 깻잎이라는 것입니다. 주인님은 한국이란 곳에서 태어나셨으며 한국에서 난 음식을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한국이요? 아 제가 태어난 곳이 한국이군요. 그럼, 여기는 어딘가요? 여기는 한국이 아닌가요?”
“주인님,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인님 스스로 기억해내지 않으면 주인님은 또 기억을 잃게 되실 것입니다. 주인님, 꼭 기억해내실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이건 또. 알고 있으면서 말씀드릴 수가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물어보면 안 될 것만 같은 긴박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디
선가 나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본다. 저쪽에서 아까의 그 종업원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것이 영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주인님, 어서 식사를…”
“그런데, 이건 뭔가요? 색깔이?”
“그것은 잡곡밥으로 주인님의 주식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나는 잡곡밥이라 불리는 것을 먹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그가 설명해준 된장찌개와 반찬들을 아주 맛있게 먹어치웠다.
“주인님, 어떠십니까? 이 모든 게 주인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은 왜 이리 우울하게만 들리는 것일까.
“내것이라구요? 맛있게 먹고 즐겁게 구경하고 하는데 왜 마음 한구석은 허전한 걸까요? 마을 사람들은 언제 보나요?”
총개가 잠시 고개를 숙여 딴 곳을 바라보다가, 몇 초 되지 않아 다시 나를 보며 대답했다. 나는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인님, 이제 마을 사람들을 만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1층에 모여서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주인님의 기업에서 주인님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네, 그들도 모두…”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은 허전한 채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기나긴 시간이었다.
“저기 온다”
1층으로 내려간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지막하게 수근거렸으나, 그들의 말들이 내 귓가로 들려오고 있었다.
‘절대 거기에 대해선 얘기하면 안 되네. 그러면 큰일 나니까’
‘알아. 절대. 우리를 위해서 하지 말아야 돼’
‘그저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네, 알았지?’
‘걱정하지 마.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총개는 나를 마을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여러분, 우리 주인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비록 기억의 많은 부분을 잃으셔서 여러분을 기억하지는 못하시긴 하지만, 우리 주인님을 위해 박수 부탁드립니다.”
나는 당황해서 총개에게 물었다.
“제가 박수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주인님. 지금은 그냥 묻지 말고 즐기세요.즐기다 보면 아시게 될 겁니다.”
더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맞아요. 우리의 주인님이세요.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는 주인님 덕분에 행복합니다. 그러니, 박수 받을 만 합니다.”
그와 동시에 박수 소리가 여기저기 터져나왔고, 길게 이어졌다.
“저, 마을분들이 몇 명이나 되죠?”
“여기 오신 분은 각 마을의 대표로 100명입니다. 그리고, 각 마을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죠. 하지만, 주인님은 그 고장으로 가실 수가 없습니다.”
“아니, 왜요?”
“마을 사람들이 주인님의 수고하여 오시는 걸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만약 주인님이 어느 마을은 가고 어느 마을은 가지 않는다면 섭섭해 할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인님은 즐겨야 하실 분이지, 고장을 방문하는 수고를 해야 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저는 여기를 벗어나면 안 되나요?”
“주인님. 그편이 저희를 위하는 길입니다. 주인님이 편안하셔야 하고 저희로서는 주인님의 안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마을로 가시다가 사고라도 나신다면 저희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니, 저희를 위해서라도 마을로 나가시겠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여기에서 필요한 모든 걸 해드리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주인님이 살아있는 걸 확인하셔야겠다고 하셔서 이리로 부른 것입니다. 이분들과 만나는 날도 1년에 한번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 법칙은 누가 정하는 건가요? 주인이 나라면서요? 그런데 왜 주인 맘대로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까? 저, 주인 맞아요?”
총개가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드리워졌다.
“주인님. 거기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설명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주인님인 것은 확실합니다. 주인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총개는 그러더니,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을.
나는 진짜다
– 저 멀리
전창수 편집판
프롤로그
“총공격!”
내 눈앞에서 광선검들이 움직인다. 가느다란 빛을 내뿜고 있는 그 검들은 점점 더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리고 그 검 뒤로 검은 물체의 사람들이 스르륵 스르륵 소리를 내고 있다. 저들은 대체 누구인가? 사람인가? 악마인가? 귀신인가? 사람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저들은 악마? 그들의 검들이 내 배와 다리와 팔을 찔러댄다. 온몸이 쑤시다. 그리고 점점 더 정신이 흐리멍텅해진다. 흐리멍텅해지는 머리. 그리고 가느다랗게 들리는 그들의 말소리.
“이 녀석 죽이면 안 되잖아? 어떻게 하지?”
나는 왜 죽이면 안 되는 걸까?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머리 잡아 봐. 이 녀석 기억을 아예 없애면 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쳐 보지만 생각 속에서만 움직일 뿐, 꼼짝도 할 수 없다. 그들이 내 머리를 잡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뽑아내는 소리가 들린다. 엄청난 고통이 머리로 전해져 오지만 소리조차 낼 수 없다. 머리카락을 뽑은 그 자리에 뭔가가 찔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절대 기억하지 못하겠지?”
“이 녀석이 신이라면 모를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기억 못 하지.”
“진짜 신이면 어쩌지? 그럼 우리 다 죽는데.”
“진짜 신이 이렇게 쉽게 잡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리고 신이 인간으로 어떻게 태어나?”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신의 능력을 가졌을지도.”
“신의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신이 아니면 이건 못 풀어. 신이 직접 풀어야 되는데 그러려면 이 녀석 죽어야 돼. 이 녀석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한 절대
안 죽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 그럼 안심해도 되겠네.”
서서히 그들의 말소리가 멀어져간다. 그들이 내게서 멀어져가는 건지 내 기억이 지워지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점점점 잠에 든다. 그들이 내 기억을 지우면 지울수록 나는 오히려 편안해져간다. 내 마음이 온통 평온해져 간다. 편안한 잠이 내게 다가온다.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꿈은 온통 행복한 꿈이다. 내 기억이 지워져가는 건지 내가 행복해져 가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생전 보지도 못한 어느 낯선 곳에서 잠을 깬다.
1. 낯선 곳에서 깨어나다
아주 오랫동안의 숙면을 취한 듯하다.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다. 머리가 서서히 맑아지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너무 편안한 잠. 몸을 뒤척여 본다. 물컹한 게 손에 잡힌다. 또한 아주 보드라운 느낌이 나를 조금씩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눈을 뜬다. 검은 머릿결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이 나고 있었고 내 손에는 그녀의 우유빛 살결이 그녀의 유두와 함께 겹쳐져 있었다. 이게 뭔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이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이 여자는 누구인지! 그녀는 깊은 숨을 쉬며, 일정한 간격으로 호흡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하다. 윗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자, 반대편에 또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여자는 또 누구인가? 갈색머리에 구릿빛 피부가 돋보였고, 그녀 역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이 보였다. 족히 네다섯 명은 누워 있을 만한 크고 푹신한 실크침대가 눈에 들
어온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녀의 가슴을 더듬어 보았다. 숨을 더 크게 쉴 뿐, 이미 그 손길에 익숙한 듯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녀들이 알몸이듯, 나 역시 알몸이었다. 욕망의 크기가 나를 현실에서 도피시키는 듯 하고 그 욕망에 짓눌려 나는 그녀들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게슴츠레한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감았을 뿐, 나의 몸에 그녀들의 몸을 맡겼다. 한참 동안을 나는 그 욕망에 이끌리다가 퍼뜩 내가 뭐하는 건가 싶어 그녀들을 더듬던 내 손을 거두었다. 자꾸만 커져 가는 내 안의 욕망을 억누르는 대신,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비로소 해소해나가기 시작했다.
깊은 잠을 자려는 그녀들을 흔들어 깨웠다. 그녀들은 그저 귀찮다는 듯 꿈쩍도 하지 않고 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들의 잠을 방해하는 걸 포기하고 화려하게 덧칠해져 있는 철제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방문 밖에는 어깨가 벌어진 한 건장한 사내가 나에게 인사를 한다.
“주인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인님이라니. 나는 그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주인님. 여기는 주인님의 저택입니다. 주인님은 지난 밤에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셨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나실 것이니, 지금은 절대 안정을 취하시어야 합니다. 곧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우선,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그러더니 그 건장한 사내는 손뼉을 쳐서, 누군가를 부른다.
“주인님 깨어나셨으니, 요리를 준비하게”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무리 기억하려 애써도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왜 주인님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인님, 기억이 나는 것을 돕기 위해 집을 한번
둘러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더니 그 사내는 또 손뼉을 두 번 치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이번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주인님께 집안 구경 좀 시켜드리게.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신 거 같으니, 설명을 많이 해드려야 할 걸세”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주인님, 따라오시지요." 나는 그의 말대로 기억을 찾을 기대감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2. 진수성찬
요리가 준비되었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 한상 가득 차려졌다. 각종 해산물과 가재 요리, 그리고 육질이 부드러워 입에서 살살 녹는 소고기 요리까지. 이렇게 푸짐한 상을 먹어본 적이 있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요리들은 모두 처음 먹어 보는 맛 같았다.
요리를 먹는 것과,리를 대접하는 사람들과 나를 시중해 주는 사람들까지 모두 낯설다. 내가 요리를 하나씩 집어먹을 때마다 그들은 요리에 대한 설명까지도 빠짐없이 추가한다. 배부른 아침을 먹고 나니, 커피가 생각났다. 그래, 커피. 왜 커피가 생각이 났을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나는 하나씩 하나씩 음식과 디저트를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왜 커피가 생각났는지는 몰랐다. 그저, 단순한 습관 때문은 아니었을 것 같다. 내가 마시는 커피에도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그들에게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하자, 그들은 내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만들지는 않고 최고급 원두커피를 갖다 주었다. 나는 그냥 단맛 나는 보통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지만, 그들은 건강을 생각하시라면서, 원두커
피에 약간의 시럽을 넣어줄 뿐이었다. 왜 먹는 것도 내 맘대로 못하냐고 화를 내었지만, 주인님은 주인님 혼자만 생각하시냐며, 우리도 주인님 없으면 모두 죽은 목숨이니 제발 건강 생각하시고 몸을 좀 돌보시라는 핀잔이 올 뿐이었다. 그들이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입맛에 맞지 않는 그 커피를 들이켜야만 했다. 나는 또 궁금해졌다. 왜 그들은 내가 마시고 싶은 커피를 못 마시게 하는 것인지.
식사를 마치고 정원에 나와 밝게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정원을 거닐다가, 털이 복스러워 보이는 개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 개는 이름이 뭔가요?”
“떨리우스라고 합니다”
“떨리우스? 이름 한번 재밌네요”
“사람을 겁내하는 강아지이지요. 그래서 떨리우스라고 지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정말로 그 개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떨리우스. 왜 떨고 그래? 내가 무섭니?”
내가 그렇게 말을 걸자, 떨리우스는 나의 손등에 자신의 코를 갖다 대고는 냄새를 맡더니, 나의 손등을 이내 핥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을 부비며 나를 반가워했다.
“어? 이 개 주인이 원래 나였나요?”
“주인님, 여기는 주인님 집입니다. 이곳의 모든 것이 원래 주인님 것이었고, 떨리우스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당연히 주인님의 개입니다.”
그렇다. 말이 되는 소리였다. 모든 기억을 잃어 낯설기만 한 이 집이 원래 내 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주인 대접을 받는 것이겠지. 나는 떨리우스를 안았다. 떨리우스는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있었고 나는 그를 안은 채로 조금 더 산책을 즐겼다. 조금 더 걸으니,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멀리 해안가가 보
였다.
“여기는 바닷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주인님.”
나는 바닷가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몇 시간이 순식간에 갈 줄은 몰랐다. 귀여운 떨리우스와 함께, 바닷가 모래사장을 몇 번이고 돌아다녔다. 나는 지금 내가 무척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아, 이런 기분도 처음으로 느껴보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이 좋았지만, 한편에는 무거운 마음의 짐을 놓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의 머리 한쪽을 계속 갉아먹고 있었다.
3. 두려움 속으로
“철저히 감시해!”
저 쪽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를 주인님이라 모시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을 감시하라는 말인가? 저 바깥에서 들려오라는 <감시>라는 단어가 과연 나한테 하는 소리인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 안에는 여전히 낮의 그 여자들이 잠에 취해 있었으며 넓디 넓은 정원과 하늘이 보이는 창, 넓고 넓은 해변. 이 곳은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의 장소란 말인가?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나는 지금 만족스런 쾌락에 빠져 있는 듯 하고, 지금 이 순간이 즐겁긴 하지만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나를 주인님이라고 불리는 저들이 결코 편안하지 않다는 것 뿐. 그들은 나를 통해 무언가 얻으려는 듯한데,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이용가치가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방 안에 엎드려 있는 저 여자들은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은 약에 취해 있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이 귀찮은 듯 했다. 이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어 나는 문 밖으로 다시 나가 보았다. 나가자마자, 또다시 집사인 듯한 사람이 나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주인님, 어디 가시렵니까?”
본능적으로, 그들에게서 위협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나는 저 넓고 넓은 밤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바깥 세상 구경 좀 하고 싶네요”
“네, 주인님, 지금은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푹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이 세상을 구경시켜 드리지요. 주인님은 새로 태어나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이곳을 주인님의 파라다이스라고 부르지요. 아마, 다른 세상을 구경하시면 기분이 더 나아지실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주인님의 행복을 가리키는 시계가 되지요.”
진심으로 말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안 좋은 느낌이 드는 것일까? 나는 지금 진짜 행복한 것일까? 쾌락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그저, 오늘은 생각하지 말자. 내일 아침이면 무언가 하나라도 윤곽이 잡히겠지. 나는 잠을 청했으나, 잠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밤이 아주 깊었다. 바깥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린다. 또, 무슨 소리인가. 궁금증은 더 커져갔으나, 일부러 나가 보지는 않았다. 내가 잠든 것으로 알 터인데, 그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철저히 해!”
무슨 준비를 하란 말인가. 그리고 명령조로 말하는 저 사람은 내가 본 적이 없다. 그의 존재를 나에게 드러낸 적이 없다. 나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이 방안에도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 길이 없다. 어쩌면 나는 지금의 이 쾌락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나는 저들이 무섭다. 나의 호기심이, 내가 갖고 있는 이 자그마한 쾌락의 즐거움조차 누비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 밤은 지나갔고 비로소 아침햇살이 밝아왔다. 나는 그들이 차려주는 맛있고 푸짐한 아침식사를 하고 비로소 세상구경을 하러 출발했다.
그리고 거기엔 내가 아직 보지 못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었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어디선가 분명 본 듯한, 그러나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나는 그를 대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나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본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나는 그저 사진만으로 그를 보았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 얼굴이 기억 난 것이 나에겐 또 한 번 신기한 일이었고, 그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는 내가 아들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그저, 내게 주인님 하면서 운전을 할 뿐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현상이, 또한 이 세상이 더욱 더 궁금해질 뿐만 아니라, 더욱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의 아버지는 살아계셨던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내가 죽은 것인가? 나는 점점 더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리고 있었다.
4.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운전을 하는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마 사이에는 많이 찡그렸을 듯한 인상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내 옆에는 나를 주인님으로 모시는 건장한 사내가 그에게 갈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차는 길고 긴 바닷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검회색을 띤 바다. 바다가 원래 검회색이었던가? 나는 건장한 사내에게 물었다.
“바다가 원래 이 색깔이었나요?”
“바다 말입니까? 주인님? 기억 안 나십니까?”
“원래 이 색깔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색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주인님이 기억에 없으셔서 그렇습니다. 이 바다는 색깔이 수시로 바뀌는 바다입니다.어느 날은 파란 색이고 어느 날은 빨간 색을 띄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법의 바다로 불리기도 합니다. 주인님 기억이 돌아오신다면 정말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이 사람은 나를 감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정말 위해 주는 사람인가? 아직 내가 기억이 돌아와서 지금 나는 정말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음을 못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내 기억이 돌아온다면 나는 정말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뭐 하나 불편한 것이 없다. 내가 깨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불편한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주인님. 바다를 건너면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을 건너면 마을이 나옵니다. 주인님. 오늘은 거기에서 식사를 하시게 될 것입니다. 식사 예약을 해 두었습니다. 주인님만이 드실 수 있는 식당입니다. 이 모든 게 주인님의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큰 부자였단 말인가?
“정말 정말 제가 그렇게 큰 부자인가요?”
“주인님, 저희도 주인님의 기억이 빨리 돌아와서 주인님이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저희를 대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만, 너무 서두르지는 마십시오. 기억이란 게 그렇게 쉽게 빨리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님. 바닷가를 지났습니다. 이제, 산을 지나칩니다. 바깥 풍경을 좀 돌아보시죠”
“저건 무슨 나무인가요?”
“소나무입니다. 여기는 모두 소나무만 있습니다.”
“소나무요?”
“네, 그것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네, 소나무는 어떤 나무인가요?”
“주인님, 소나무는 생명력이 강한 나무입니다. 보시는 그대로 느끼시면 됩니다. 저 뾰족하게 생긴 것이 소나무의 잎으로 불리는데, 그 소나무 잎이 생명력을 강하게 합니다. 주인님처럼 소나무는 생명력이 강합니다.”
“저처럼요?”
“네, 주인님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력이 강한 분입니다. 소나무처럼 생명력이 강하신 것입니다.”
차가 소나무로 이어진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다. 양 길가에는 모두 소나무로만 이어져 있다.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화장실 가고 싶은데…”
“주인님, 여기는 어디서나 화장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참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러더니, 그 사내는 차를 세우게 하고는 바로 길가 옆에 텐트 같은 것을 치더니, 나를 불렀다.
“이게 뭔가요?”
“간이 화장실입니다. 항상 차 트렁크에 휴대하고 다닙니다. 여기서 볼일 보시면 됩니다.”
나는 급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고 급히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변기가 없이 단순히 칸막이만 막아놓고 일을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여기다가 일 처리 하나요?”
“일단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나는 일단 급해서 그 사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오줌이 땅바닥에 닿자마자 어딘가로 증발했다. 이게 무엇인가? 여기는 사람 사는 세상인가? 내가 깨어난 저택의 화장실에서는 오줌이 증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길래 오줌이 증발해 버린단 말인가.
볼 일을 보고 다시 차에 탔다.
“시원하십니까?”
“네, 그런데 왜 증발하나요?”
“여기는 신선의 산입니다. 마을에 가면 화장실이 따로 구비되어 있지만, 이 산에서는 화장실이 따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액체로 된 것은 모두 증발해 버립니다. 그런 곳입니다. 이 산의 신비함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산은 잘 오지 않습니다. 증발해 버리는 것이 무섭다고 합니다. 주인님은 이 산을 무서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주인님을 모시는 저희들 말고는 지나다니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5. 마을사람들
차는 이제 마을로 들어섰다. 나무와 벽돌로 지어진 주택가가 드문드문 보인다. 길은 마을로 들어서서도 한참 동안을 지나가더니,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 고층건물에 선다.
“주인님, 다 왔습니다.”
“이 창문들은 다 뭔가요?”
“태양열을 이용한 창문입니다. 태양이 내리쬐면, 그 시간 동안, 이 건물은 태양열을 안으로 저장해 놓습니다. 그 열을 이용하여 난방도 하고 전기도 쓰는 겁니다. 에너지가 전혀 들지 않는 절약형 구조입니다.”
그의 설명은 명확했지만, 나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신선의 산과 태양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곳인데, 도무지 설명을 해주지 않으니 답답해 미치겠어요.”
“주인님. 지금은 조금 답답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마십시오. 천천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주인님이 누구신지, 주인님이 사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 사내의 말은 점점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주인님, 올라가십시오.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여기는 몇 층이나 되죠? 마을에는 이런 곳이 없는데, 유일하게 높은 건물이네요?”
“네 맞습니다. 마을에서 유일한 고층건물입니다. 44층입니다. 주인님을 모시게 될 곳도 44층입니다. 이곳에서 보시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보이시니, 만족하실 겁니다.”
“44층? 44층까지 걸어서 가야 하나요?”
“아닙니다. 주인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실 겁니다.”
“아, 엘리베이터. 그런 게 있었지. 기억나요.”
나는 그 사내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주인님, 총개라고 부르셨습니다. 전에 총개라고 하면 제가 언제나 주인님 곁에 있었습니다.”
“총개요?”
“네, 주인님.”
“총개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종입니다. 님자는 빼시고 총개라고만 부르시면 됩니다.”
“네, 알았어요. 총개님. 익숙해지면 총개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44층에 도착했다. 그 넓은 홀에 원탁 테이블이 달랑 하나. 그리고 창가를 보니, 내가 왔던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나무가 우거진 숲에는 갈지자로 길이 뻗어 있었고 형형색색의 마을 지붕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검회색이었던 바다가 푸른 바다로 변해 있는 것도 보였다.
“식사를 대령하게.”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종업원인 듯한 사람에게 총개가 명령하고 있었다. 저 얼굴,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총개님. 어찌하여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나요?”
“주인님, 곧 보시게 될 것입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십시오.”
뭔가를 감추듯, 총개는 얼른 말을 가로채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운전사는 안 오나요?”
“운전사는 1층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할 것입니다.”
“왜 같이 안 오나요?”
“주인님, 여기는 주인님 전용 식당입니다. 주인님만 식사하실 수 있습니다.”
“총개님은 안 드시나요?”
“저는 미리 먹습니다. 주인님의 시중을 들 때는 식사하지 않습니다.”
또 혼자 먹게 되는 밥이다. 점점 밥맛을 잃어가고 있었다.
“식사 나왔습니다.”
“어, 어제랑은 완전히 다르네요?”
“주인님, 기억 안 나십니까?”
“네, 어제 먹었던 것은 뭐였는지 대충 알겠는데 이건 도무지 뭔지?”
“이것은 된장찌개이고, 이것은 김치전, 이것은 갈치구이, 이것은 탕수육이란 것입니다”
총개는 하나하나 음식을 가리키면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김치고 이것은 깍두기, 이것은 깻잎이라는 것입니다. 주인님은 한국이란 곳에서 태어나셨으며 한국에서 난 음식을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한국이요? 아 제가 태어난 곳이 한국이군요. 그럼, 여기는 어딘가요? 여기는 한국이 아닌가요?”
“주인님,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인님 스스로 기억해내지 않으면 주인님은 또 기억을 잃게 되실 것입니다. 주인님, 꼭 기억해내실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이건 또. 알고 있으면서 말씀드릴 수가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물어보면 안 될 것만 같은 긴박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디
선가 나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본다. 저쪽에서 아까의 그 종업원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것이 영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주인님, 어서 식사를…”
“그런데, 이건 뭔가요? 색깔이?”
“그것은 잡곡밥으로 주인님의 주식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나는 잡곡밥이라 불리는 것을 먹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그가 설명해준 된장찌개와 반찬들을 아주 맛있게 먹어치웠다.
“주인님, 어떠십니까? 이 모든 게 주인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은 왜 이리 우울하게만 들리는 것일까.
“내것이라구요? 맛있게 먹고 즐겁게 구경하고 하는데 왜 마음 한구석은 허전한 걸까요? 마을 사람들은 언제 보나요?”
총개가 잠시 고개를 숙여 딴 곳을 바라보다가, 몇 초 되지 않아 다시 나를 보며 대답했다. 나는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인님, 이제 마을 사람들을 만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1층에 모여서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주인님의 기업에서 주인님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네, 그들도 모두…”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은 허전한 채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기나긴 시간이었다.
“저기 온다”
1층으로 내려간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지막하게 수근거렸으나, 그들의 말들이 내 귓가로 들려오고 있었다.
‘절대 거기에 대해선 얘기하면 안 되네. 그러면 큰일 나니까’
‘알아. 절대. 우리를 위해서 하지 말아야 돼’
‘그저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네, 알았지?’
‘걱정하지 마.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총개는 나를 마을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여러분, 우리 주인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비록 기억의 많은 부분을 잃으셔서 여러분을 기억하지는 못하시긴 하지만, 우리 주인님을 위해 박수 부탁드립니다.”
나는 당황해서 총개에게 물었다.
“제가 박수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주인님. 지금은 그냥 묻지 말고 즐기세요.즐기다 보면 아시게 될 겁니다.”
더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맞아요. 우리의 주인님이세요.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는 주인님 덕분에 행복합니다. 그러니, 박수 받을 만 합니다.”
그와 동시에 박수 소리가 여기저기 터져나왔고, 길게 이어졌다.
“저, 마을분들이 몇 명이나 되죠?”
“여기 오신 분은 각 마을의 대표로 100명입니다. 그리고, 각 마을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죠. 하지만, 주인님은 그 고장으로 가실 수가 없습니다.”
“아니, 왜요?”
“마을 사람들이 주인님의 수고하여 오시는 걸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만약 주인님이 어느 마을은 가고 어느 마을은 가지 않는다면 섭섭해 할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인님은 즐겨야 하실 분이지, 고장을 방문하는 수고를 해야 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저는 여기를 벗어나면 안 되나요?”
“주인님. 그편이 저희를 위하는 길입니다. 주인님이 편안하셔야 하고 저희로서는 주인님의 안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마을로 가시다가 사고라도 나신다면 저희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니, 저희를 위해서라도 마을로 나가시겠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여기에서 필요한 모든 걸 해드리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주인님이 살아있는 걸 확인하셔야겠다고 하셔서 이리로 부른 것입니다. 이분들과 만나는 날도 1년에 한번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 법칙은 누가 정하는 건가요? 주인이 나라면서요? 그런데 왜 주인 맘대로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까? 저, 주인 맞아요?”
총개가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드리워졌다.
“주인님. 거기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설명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주인님인 것은 확실합니다. 주인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총개는 그러더니,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을.
나는 진짜다
– 저 멀리
전창수 편집판
프롤로그
“총공격!”
내 눈앞에서 광선검들이 움직인다. 가느다란 빛을 내뿜고 있는 그 검들은 점점 더 나를 향해 다가온다. 그리고 그 검 뒤로 검은 물체의 사람들이 스르륵 스르륵 소리를 내고 있다. 저들은 대체 누구인가? 사람인가? 악마인가? 귀신인가? 사람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저들은 악마? 그들의 검들이 내 배와 다리와 팔을 찔러댄다. 온몸이 쑤시다. 그리고 점점 더 정신이 흐리멍텅해진다. 흐리멍텅해지는 머리. 그리고 가느다랗게 들리는 그들의 말소리.
“이 녀석 죽이면 안 되잖아? 어떻게 하지?”
나는 왜 죽이면 안 되는 걸까? 있는 힘을 다해 그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머리 잡아 봐. 이 녀석 기억을 아예 없애면 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쳐 보지만 생각 속에서만 움직일 뿐, 꼼짝도 할 수 없다. 그들이 내 머리를 잡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뽑아내는 소리가 들린다. 엄청난 고통이 머리로 전해져 오지만 소리조차 낼 수 없다. 머리카락을 뽑은 그 자리에 뭔가가 찔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절대 기억하지 못하겠지?”
“이 녀석이 신이라면 모를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기억 못 하지.”
“진짜 신이면 어쩌지? 그럼 우리 다 죽는데.”
“진짜 신이 이렇게 쉽게 잡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리고 신이 인간으로 어떻게 태어나?”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신의 능력을 가졌을지도.”
“신의 능력을 가졌을지라도 신이 아니면 이건 못 풀어. 신이 직접 풀어야 되는데 그러려면 이 녀석 죽어야 돼. 이 녀석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 한 절대
안 죽어.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래? 그럼 안심해도 되겠네.”
서서히 그들의 말소리가 멀어져간다. 그들이 내게서 멀어져가는 건지 내 기억이 지워지는 건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점점점 잠에 든다. 그들이 내 기억을 지우면 지울수록 나는 오히려 편안해져간다. 내 마음이 온통 평온해져 간다. 편안한 잠이 내게 다가온다.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꿈은 온통 행복한 꿈이다. 내 기억이 지워져가는 건지 내가 행복해져 가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생전 보지도 못한 어느 낯선 곳에서 잠을 깬다.
1. 낯선 곳에서 깨어나다
아주 오랫동안의 숙면을 취한 듯하다. 어둠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한다. 머리가 서서히 맑아지지만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너무 편안한 잠. 몸을 뒤척여 본다. 물컹한 게 손에 잡힌다. 또한 아주 보드라운 느낌이 나를 조금씩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눈을 뜬다. 검은 머릿결이 햇빛에 반사되어 빛이 나고 있었고 내 손에는 그녀의 우유빛 살결이 그녀의 유두와 함께 겹쳐져 있었다. 이게 뭔가?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누구이고 나는 지금 어디에 있고, 이 여자는 누구인지! 그녀는 깊은 숨을 쉬며, 일정한 간격으로 호흡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하다. 윗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자, 반대편에 또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여자는 또 누구인가? 갈색머리에 구릿빛 피부가 돋보였고, 그녀 역시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이 보였다. 족히 네다섯 명은 누워 있을 만한 크고 푹신한 실크침대가 눈에 들
어온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녀의 가슴을 더듬어 보았다. 숨을 더 크게 쉴 뿐, 이미 그 손길에 익숙한 듯 별다른 반응이 없다. 그녀들이 알몸이듯, 나 역시 알몸이었다. 욕망의 크기가 나를 현실에서 도피시키는 듯 하고 그 욕망에 짓눌려 나는 그녀들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고 그녀들은 게슴츠레한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감았을 뿐, 나의 몸에 그녀들의 몸을 맡겼다. 한참 동안을 나는 그 욕망에 이끌리다가 퍼뜩 내가 뭐하는 건가 싶어 그녀들을 더듬던 내 손을 거두었다. 자꾸만 커져 가는 내 안의 욕망을 억누르는 대신,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한 궁금증을 비로소 해소해나가기 시작했다.
깊은 잠을 자려는 그녀들을 흔들어 깨웠다. 그녀들은 그저 귀찮다는 듯 꿈쩍도 하지 않고 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녀들의 잠을 방해하는 걸 포기하고 화려하게 덧칠해져 있는 철제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방문 밖에는 어깨가 벌어진 한 건장한 사내가 나에게 인사를 한다.
“주인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주인님이라니. 나는 그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주인님. 여기는 주인님의 저택입니다. 주인님은 지난 밤에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리셨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나실 것이니, 지금은 절대 안정을 취하시어야 합니다. 곧 괜찮아지실 것입니다. 우선,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그러더니 그 건장한 사내는 손뼉을 쳐서, 누군가를 부른다.
“주인님 깨어나셨으니, 요리를 준비하게”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아무리 기억하려 애써도 내가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왜 주인님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인님, 기억이 나는 것을 돕기 위해 집을 한번
둘러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더니 그 사내는 또 손뼉을 두 번 치더니 누군가를 불렀다. 이번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여인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주인님께 집안 구경 좀 시켜드리게. 기억이 잘 나지 않으신 거 같으니, 설명을 많이 해드려야 할 걸세”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주인님, 따라오시지요." 나는 그의 말대로 기억을 찾을 기대감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2. 진수성찬
요리가 준비되었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음식들이 한상 가득 차려졌다. 각종 해산물과 가재 요리, 그리고 육질이 부드러워 입에서 살살 녹는 소고기 요리까지. 이렇게 푸짐한 상을 먹어본 적이 있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요리들은 모두 처음 먹어 보는 맛 같았다.
요리를 먹는 것과,리를 대접하는 사람들과 나를 시중해 주는 사람들까지 모두 낯설다. 내가 요리를 하나씩 집어먹을 때마다 그들은 요리에 대한 설명까지도 빠짐없이 추가한다. 배부른 아침을 먹고 나니, 커피가 생각났다. 그래, 커피. 왜 커피가 생각이 났을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나는 하나씩 하나씩 음식과 디저트를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왜 커피가 생각났는지는 몰랐다. 그저, 단순한 습관 때문은 아니었을 것 같다. 내가 마시는 커피에도 무슨 의미가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그들에게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하자, 그들은 내 취향에 맞는 커피를 만들지는 않고 최고급 원두커피를 갖다 주었다. 나는 그냥 단맛 나는 보통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했지만, 그들은 건강을 생각하시라면서, 원두커
피에 약간의 시럽을 넣어줄 뿐이었다. 왜 먹는 것도 내 맘대로 못하냐고 화를 내었지만, 주인님은 주인님 혼자만 생각하시냐며, 우리도 주인님 없으면 모두 죽은 목숨이니 제발 건강 생각하시고 몸을 좀 돌보시라는 핀잔이 올 뿐이었다. 그들이 눈물로 호소하는 바람에 나도 어쩔 수 없이 입맛에 맞지 않는 그 커피를 들이켜야만 했다. 나는 또 궁금해졌다. 왜 그들은 내가 마시고 싶은 커피를 못 마시게 하는 것인지.
식사를 마치고 정원에 나와 밝게 내리쬐는 햇살을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정원을 거닐다가, 털이 복스러워 보이는 개 한 마리를 발견했다.
“이 개는 이름이 뭔가요?”
“떨리우스라고 합니다”
“떨리우스? 이름 한번 재밌네요”
“사람을 겁내하는 강아지이지요. 그래서 떨리우스라고 지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정말로 그 개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떨리우스. 왜 떨고 그래? 내가 무섭니?”
내가 그렇게 말을 걸자, 떨리우스는 나의 손등에 자신의 코를 갖다 대고는 냄새를 맡더니, 나의 손등을 이내 핥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을 부비며 나를 반가워했다.
“어? 이 개 주인이 원래 나였나요?”
“주인님, 여기는 주인님 집입니다. 이곳의 모든 것이 원래 주인님 것이었고, 떨리우스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당연히 주인님의 개입니다.”
그렇다. 말이 되는 소리였다. 모든 기억을 잃어 낯설기만 한 이 집이 원래 내 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주인 대접을 받는 것이겠지. 나는 떨리우스를 안았다. 떨리우스는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있었고 나는 그를 안은 채로 조금 더 산책을 즐겼다. 조금 더 걸으니, 파도소리가 들려오고 멀리 해안가가 보
였다.
“여기는 바닷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주인님.”
나는 바닷가를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는 것만으로 몇 시간이 순식간에 갈 줄은 몰랐다. 귀여운 떨리우스와 함께, 바닷가 모래사장을 몇 번이고 돌아다녔다. 나는 지금 내가 무척 행복하다고 느껴졌다. 아, 이런 기분도 처음으로 느껴보는 것만 같았다. 이 순간이 좋았지만, 한편에는 무거운 마음의 짐을 놓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나의 머리 한쪽을 계속 갉아먹고 있었다.
3. 두려움 속으로
“철저히 감시해!”
저 쪽문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를 주인님이라 모시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무엇을 감시하라는 말인가? 저 바깥에서 들려오라는 <감시>라는 단어가 과연 나한테 하는 소리인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 안에는 여전히 낮의 그 여자들이 잠에 취해 있었으며 넓디 넓은 정원과 하늘이 보이는 창, 넓고 넓은 해변. 이 곳은 파라다이스가 아닌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를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의 장소란 말인가?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나는 지금 만족스런 쾌락에 빠져 있는 듯 하고, 지금 이 순간이 즐겁긴 하지만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나를 주인님이라고 불리는 저들이 결코 편안하지 않다는 것 뿐. 그들은 나를 통해 무언가 얻으려는 듯한데, 나는 그들에게 어떤 이용가치가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방 안에 엎드려 있는 저 여자들은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은 약에 취해 있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이 귀찮은 듯 했다. 이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어 나는 문 밖으로 다시 나가 보았다. 나가자마자, 또다시 집사인 듯한 사람이 나를 웃으며 바라보았다.
“주인님, 어디 가시렵니까?”
본능적으로, 그들에게서 위협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바람 좀 쐬고 싶어서요.”
나는 저 넓고 넓은 밤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려주시겠습니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바깥 세상 구경 좀 하고 싶네요”
“네, 주인님, 지금은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푹 주무시고 내일 아침에 이 세상을 구경시켜 드리지요. 주인님은 새로 태어나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이 없을 수 있습니다. 이곳을 주인님의 파라다이스라고 부르지요. 아마, 다른 세상을 구경하시면 기분이 더 나아지실 것입니다. 매일매일이 주인님의 행복을 가리키는 시계가 되지요.”
진심으로 말하는 것으로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안 좋은 느낌이 드는 것일까? 나는 지금 진짜 행복한 것일까? 쾌락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그저, 오늘은 생각하지 말자. 내일 아침이면 무언가 하나라도 윤곽이 잡히겠지. 나는 잠을 청했으나, 잠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밤이 아주 깊었다. 바깥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린다. 또, 무슨 소리인가. 궁금증은 더 커져갔으나, 일부러 나가 보지는 않았다. 내가 잠든 것으로 알 터인데, 그들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철저히 해!”
무슨 준비를 하란 말인가. 그리고 명령조로 말하는 저 사람은 내가 본 적이 없다. 그의 존재를 나에게 드러낸 적이 없다. 나를 철저하게 감시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이 방안에도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 길이 없다. 어쩌면 나는 지금의 이 쾌락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 나는 저들이 무섭다. 나의 호기심이, 내가 갖고 있는 이 자그마한 쾌락의 즐거움조차 누비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 밤은 지나갔고 비로소 아침햇살이 밝아왔다. 나는 그들이 차려주는 맛있고 푸짐한 아침식사를 하고 비로소 세상구경을 하러 출발했다.
그리고 거기엔 내가 아직 보지 못했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있었고 나는 그의 얼굴을 보고 놀라고 말았다. 어디선가 분명 본 듯한, 그러나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그 얼굴. 나는 그를 대번에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바로 나의 아버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들어본 것이었다. 아버지는… 아버지는…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나는 그저 사진만으로 그를 보았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 얼굴이 기억 난 것이 나에겐 또 한 번 신기한 일이었고, 그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는 내가 아들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그저, 내게 주인님 하면서 운전을 할 뿐이었다. 나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현상이, 또한 이 세상이 더욱 더 궁금해질 뿐만 아니라, 더욱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의 아버지는 살아계셨던 것이란 말인가? 아니면, 내가 죽은 것인가? 나는 점점 더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져버리고 있었다.
4.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운전을 하는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이마 사이에는 많이 찡그렸을 듯한 인상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내 옆에는 나를 주인님으로 모시는 건장한 사내가 그에게 갈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차는 길고 긴 바닷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검회색을 띤 바다. 바다가 원래 검회색이었던가? 나는 건장한 사내에게 물었다.
“바다가 원래 이 색깔이었나요?”
“바다 말입니까? 주인님? 기억 안 나십니까?”
“원래 이 색깔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색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주인님이 기억에 없으셔서 그렇습니다. 이 바다는 색깔이 수시로 바뀌는 바다입니다.어느 날은 파란 색이고 어느 날은 빨간 색을 띄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법의 바다로 불리기도 합니다. 주인님 기억이 돌아오신다면 정말 좋을 텐데 말입니다.”
이 사람은 나를 감시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를 정말 위해 주는 사람인가? 아직 내가 기억이 돌아와서 지금 나는 정말 행복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음을 못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내 기억이 돌아온다면 나는 정말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뭐 하나 불편한 것이 없다. 내가 깨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아무것도 불편한 것이 없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주인님. 바다를 건너면 산이 있습니다. 그 산을 건너면 마을이 나옵니다. 주인님. 오늘은 거기에서 식사를 하시게 될 것입니다. 식사 예약을 해 두었습니다. 주인님만이 드실 수 있는 식당입니다. 이 모든 게 주인님의 것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이렇게 큰 부자였단 말인가?
“정말 정말 제가 그렇게 큰 부자인가요?”
“주인님, 저희도 주인님의 기억이 빨리 돌아와서 주인님이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저희를 대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다만, 너무 서두르지는 마십시오. 기억이란 게 그렇게 쉽게 빨리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인님. 바닷가를 지났습니다. 이제, 산을 지나칩니다. 바깥 풍경을 좀 돌아보시죠”
“저건 무슨 나무인가요?”
“소나무입니다. 여기는 모두 소나무만 있습니다.”
“소나무요?”
“네, 그것도 기억이 안 나십니까”
“네, 소나무는 어떤 나무인가요?”
“주인님, 소나무는 생명력이 강한 나무입니다. 보시는 그대로 느끼시면 됩니다. 저 뾰족하게 생긴 것이 소나무의 잎으로 불리는데, 그 소나무 잎이 생명력을 강하게 합니다. 주인님처럼 소나무는 생명력이 강합니다.”
“저처럼요?”
“네, 주인님은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력이 강한 분입니다. 소나무처럼 생명력이 강하신 것입니다.”
차가 소나무로 이어진 도로를 가로지르고 있다. 양 길가에는 모두 소나무로만 이어져 있다.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다.
“화장실 가고 싶은데…”
“주인님, 여기는 어디서나 화장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참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러더니, 그 사내는 차를 세우게 하고는 바로 길가 옆에 텐트 같은 것을 치더니, 나를 불렀다.
“이게 뭔가요?”
“간이 화장실입니다. 항상 차 트렁크에 휴대하고 다닙니다. 여기서 볼일 보시면 됩니다.”
나는 급해서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고 급히 일을 처리하려고 했다. 그런데 변기가 없이 단순히 칸막이만 막아놓고 일을 보라고 하는 것이었다.
“여기다가 일 처리 하나요?”
“일단 보시면 아시게 될 겁니다.”
나는 일단 급해서 그 사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오줌이 땅바닥에 닿자마자 어딘가로 증발했다. 이게 무엇인가? 여기는 사람 사는 세상인가? 내가 깨어난 저택의 화장실에서는 오줌이 증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디길래 오줌이 증발해 버린단 말인가.
볼 일을 보고 다시 차에 탔다.
“시원하십니까?”
“네, 그런데 왜 증발하나요?”
“여기는 신선의 산입니다. 마을에 가면 화장실이 따로 구비되어 있지만, 이 산에서는 화장실이 따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든지 액체로 된 것은 모두 증발해 버립니다. 그런 곳입니다. 이 산의 신비함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산은 잘 오지 않습니다. 증발해 버리는 것이 무섭다고 합니다. 주인님은 이 산을 무서워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기를 지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주인님을 모시는 저희들 말고는 지나다니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나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들과 격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5. 마을사람들
차는 이제 마을로 들어섰다. 나무와 벽돌로 지어진 주택가가 드문드문 보인다. 길은 마을로 들어서서도 한참 동안을 지나가더니, 마을과는 어울리지 않는 한 고층건물에 선다.
“주인님, 다 왔습니다.”
“이 창문들은 다 뭔가요?”
“태양열을 이용한 창문입니다. 태양이 내리쬐면, 그 시간 동안, 이 건물은 태양열을 안으로 저장해 놓습니다. 그 열을 이용하여 난방도 하고 전기도 쓰는 겁니다. 에너지가 전혀 들지 않는 절약형 구조입니다.”
그의 설명은 명확했지만, 나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신선의 산과 태양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곳인데, 도무지 설명을 해주지 않으니 답답해 미치겠어요.”
“주인님. 지금은 조금 답답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마십시오. 천천히 알게 되실 것입니다. 주인님이 누구신지, 주인님이 사는 이곳이 어디인지도 곧 아시게 될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 사내의 말은 점점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주인님, 올라가십시오.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여기는 몇 층이나 되죠? 마을에는 이런 곳이 없는데, 유일하게 높은 건물이네요?”
“네 맞습니다. 마을에서 유일한 고층건물입니다. 44층입니다. 주인님을 모시게 될 곳도 44층입니다. 이곳에서 보시면 마을 전경이 한눈에 보이시니, 만족하실 겁니다.”
“44층? 44층까지 걸어서 가야 하나요?”
“아닙니다. 주인님.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실 겁니다.”
“아, 엘리베이터. 그런 게 있었지. 기억나요.”
나는 그 사내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나요?”
“주인님, 총개라고 부르셨습니다. 전에 총개라고 하면 제가 언제나 주인님 곁에 있었습니다.”
“총개요?”
“네, 주인님.”
“총개님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주인님, 저는 주인님의 종입니다. 님자는 빼시고 총개라고만 부르시면 됩니다.”
“네, 알았어요. 총개님. 익숙해지면 총개라고 부르도록 하지요.”
44층에 도착했다. 그 넓은 홀에 원탁 테이블이 달랑 하나. 그리고 창가를 보니, 내가 왔던 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소나무가 우거진 숲에는 갈지자로 길이 뻗어 있었고 형형색색의 마을 지붕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 검회색이었던 바다가 푸른 바다로 변해 있는 것도 보였다.
“식사를 대령하게.”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종업원인 듯한 사람에게 총개가 명령하고 있었다. 저 얼굴, 역시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총개님. 어찌하여 마을 사람들은 보이지 않나요?”
“주인님, 곧 보시게 될 것입니다. 우선, 식사부터 하십시오.”
뭔가를 감추듯, 총개는 얼른 말을 가로채고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운전사는 안 오나요?”
“운전사는 1층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할 것입니다.”
“왜 같이 안 오나요?”
“주인님, 여기는 주인님 전용 식당입니다. 주인님만 식사하실 수 있습니다.”
“총개님은 안 드시나요?”
“저는 미리 먹습니다. 주인님의 시중을 들 때는 식사하지 않습니다.”
또 혼자 먹게 되는 밥이다. 점점 밥맛을 잃어가고 있었다.
“식사 나왔습니다.”
“어, 어제랑은 완전히 다르네요?”
“주인님, 기억 안 나십니까?”
“네, 어제 먹었던 것은 뭐였는지 대충 알겠는데 이건 도무지 뭔지?”
“이것은 된장찌개이고, 이것은 김치전, 이것은 갈치구이, 이것은 탕수육이란 것입니다”
총개는 하나하나 음식을 가리키면서 설명한다.
“그리고 이것은 김치고 이것은 깍두기, 이것은 깻잎이라는 것입니다. 주인님은 한국이란 곳에서 태어나셨으며 한국에서 난 음식을 많이 좋아하셨습니다.”
“한국이요? 아 제가 태어난 곳이 한국이군요. 그럼, 여기는 어딘가요? 여기는 한국이 아닌가요?”
“주인님,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인님 스스로 기억해내지 않으면 주인님은 또 기억을 잃게 되실 것입니다. 주인님, 꼭 기억해내실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가 이건 또. 알고 있으면서 말씀드릴 수가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물어보면 안 될 것만 같은 긴박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어디
선가 나를 감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위를 둘러본다. 저쪽에서 아까의 그 종업원이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것이 영 기분이 내키지 않았다.
“주인님, 어서 식사를…”
“그런데, 이건 뭔가요? 색깔이?”
“그것은 잡곡밥으로 주인님의 주식입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나는 잡곡밥이라 불리는 것을 먹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그가 설명해준 된장찌개와 반찬들을 아주 맛있게 먹어치웠다.
“주인님, 어떠십니까? 이 모든 게 주인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말은 왜 이리 우울하게만 들리는 것일까.
“내것이라구요? 맛있게 먹고 즐겁게 구경하고 하는데 왜 마음 한구석은 허전한 걸까요? 마을 사람들은 언제 보나요?”
총개가 잠시 고개를 숙여 딴 곳을 바라보다가, 몇 초 되지 않아 다시 나를 보며 대답했다. 나는 그의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보았으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인님, 이제 마을 사람들을 만나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1층에 모여서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주인님의 기업에서 주인님을 위해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네, 그들도 모두…”
여전히, 내 마음 한구석은 허전한 채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기나긴 시간이었다.
“저기 온다”
1층으로 내려간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지막하게 수근거렸으나, 그들의 말들이 내 귓가로 들려오고 있었다.
‘절대 거기에 대해선 얘기하면 안 되네. 그러면 큰일 나니까’
‘알아. 절대. 우리를 위해서 하지 말아야 돼’
‘그저 우리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는 거네, 알았지?’
‘걱정하지 마.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총개는 나를 마을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여러분, 우리 주인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비록 기억의 많은 부분을 잃으셔서 여러분을 기억하지는 못하시긴 하지만, 우리 주인님을 위해 박수 부탁드립니다.”
나는 당황해서 총개에게 물었다.
“제가 박수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주인님. 지금은 그냥 묻지 말고 즐기세요.즐기다 보면 아시게 될 겁니다.”
더이상 물어볼 수 없었다.
“맞아요. 우리의 주인님이세요. 마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는 주인님 덕분에 행복합니다. 그러니, 박수 받을 만 합니다.”
그와 동시에 박수 소리가 여기저기 터져나왔고, 길게 이어졌다.
“저, 마을분들이 몇 명이나 되죠?”
“여기 오신 분은 각 마을의 대표로 100명입니다. 그리고, 각 마을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죠. 하지만, 주인님은 그 고장으로 가실 수가 없습니다.”
“아니, 왜요?”
“마을 사람들이 주인님의 수고하여 오시는 걸 바라지 않으시기 때문이기도 하고, 만약 주인님이 어느 마을은 가고 어느 마을은 가지 않는다면 섭섭해 할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인님은 즐겨야 하실 분이지, 고장을 방문하는 수고를 해야 하시는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저는 여기를 벗어나면 안 되나요?”
“주인님. 그편이 저희를 위하는 길입니다. 주인님이 편안하셔야 하고 저희로서는 주인님의 안전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마을로 가시다가 사고라도 나신다면 저희가 힘들어집니다. 그러니, 저희를 위해서라도 마을로 나가시겠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여기에서 필요한 모든 걸 해드리겠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주인님이 살아있는 걸 확인하셔야겠다고 하셔서 이리로 부른 것입니다. 이분들과 만나는 날도 1년에 한번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 법칙은 누가 정하는 건가요? 주인이 나라면서요? 그런데 왜 주인 맘대로 아무것도 못하는 겁니까? 저, 주인 맞아요?”
총개가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드리워졌다.
“주인님. 거기에 대해선 나중에 설명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설명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의 주인님인 것은 확실합니다. 주인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총개는 그러더니,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나는 보았다. 그의 얼굴에서 흐르는 눈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