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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금같이 나오리라† 원문보기 글쓴이: 켈로
▲김병삼 목사(만나교회) |
[고린도전서 4장 1-8절]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니라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공평하지 않아!”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글입니다.
우리가 세상 살면서 참 많이 주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관성’과 ‘공평성’이라는 것이죠.
특히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부분에서 확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은 제가 참으로 과격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진짜 믿음이 생기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되면 우리 삶이 뒤죽박죽되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발견한 사실인데,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일관성이 없습니다.
전혀 공평하지도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런 것이죠. 어느 날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 관원에게는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따라와야 영생을 얻을 거라고 말씀하시는데, 십자가 위에서는 죽어가며 막판에 무임승차하는 강도를 용납하시기도 합니다. 아니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다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누군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고치고자 하셨던 사람만 고쳐주셨습니다.
가만히 보세요.
예수님은 제멋대로였습니다. 딱 한 가지 예수님에게 일관성이란 그분이 만난 사람에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과격한 이야기가 되리라는 것은, 교회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일관성과 공평성이라는 것이, 혹은 질서라는 것이 참 예수님 닮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누구를 돕고자 할 때 “이 사람에게만 해주면 다른 사람은 어떡합니까? 공평하지 않아요.”라고 하면서 결국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누군가 큰 소리로, “그래도 기준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라고 외칠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방식은 그런 기준도 존재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한 가지 기준을 그래도 말하려면 그 순간에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었죠.
제가 목회를 하면서 제일 힘든 부분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형평성에 어긋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 어떡하나?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으로 한 일 때문에 누군가에게 비난을 받아야 한다면 그것 역시 예수님의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욕심과 죄로 인해 공평과 진리를 외면하는 것이 문제겠지요.
오늘은 고린도전서 4장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정체성과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더군요.
“우리 지도자들을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양 여기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지, 그분의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장엄한 비밀들로 여러분을 인도하는 안내인이지 그 비밀들을 보호하기 위해 배치된 경비원이 아닙니다. 좋은 안내인이 갖추어야 할 덕목은 믿음직스러움과 정확한 지식입니다.”
이 말씀도 이렇게 적용이 가능할 듯합니다.
“여러분이 한 일들로 인해서 공평하게 대접받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공평하게 대접을 받으려고 불림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종처럼 주인이 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불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종에게 공평함은 필요치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주인의 명령입니다.
오늘 아침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진정 주님을 따르는 공동체는 전혀 체계적이지도 공평하지도 않다. 가만히 역사를 보면 너무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교회가 되면서 하나님과 멀어져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민해야 할 일입니다.
어떻게 하면 전혀 일관성 없는 교회가 되어 가장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전혀 공평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며 가장 진실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오늘 한 번 우리의 공평의 잣대를 내려놔 보면 어떨까요?
그냥 은혜가 미치는 대로 살아가는 삶 말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무엇을 달라 하면 아무 소리하지 말고 주어라. 그들은 너희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을 달라고 하는 것이다.”
참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이야기는 만들어져 가고 있다는 생각을 깊이 하게 하는 새벽입니다.
사역자로서 충성한다는 것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사역자’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지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사도 바울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여겨지는 부분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잘 드러나는데, 그는 자신의 약함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어떤 위치에서 어떤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오늘 본문 1절과 2절에 나오는 단어 중에 우리가 좀 더 명확한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 무엇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란 무엇일까? 그리고 ‘충성’의 내용은 무엇일까?
먼저 원어에 나오는 ‘일꾼’이란 ‘배아래서 노를 젓는다.’는 의미로 종의 신분 가운데 가장 미천한 위치를 가리킵니다. 즉 사역자의 신분이란 그리스도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해야 하는 위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분명히 밝히기를 원했던 것은, 사역자인 자신과 아볼로가 그리스도의 일꾼이지 고린도 교인들의 일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역자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또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비밀을 맡았다’는 말도 집을 지키는 청지기라는 의미에서 비밀을 나누어 주는 자라는 해석이 타당합니다.
이제 Living Bible을 보면 그 내용이 더욱 명백해집니다.
“So Apollos and I should be looked upon as Christ's servants who distribute God's blessings by explaining God's secrets.
Now the most important thing about servant is that he does just what his master tells him to.”
그렇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옛날의 배는 지하에서 북소리에 맞춰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캄캄하게 사방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향도 모르는 곳에서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조건 없는 충성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그 충성이 자신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비밀을 나누어 주는 충성이라는 말이지요.
제가 설교할 때 자주 언급한 내용 중의 하나가 ‘충성’이란 헬라어의 ‘피스티스’ 믿음이라는 어원에서 나왔다는 것이지요.
충성이란 주인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의 차원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신앙의 차원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으실 때 ‘복’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났다고 해도 하나님 보시기에 미덥지 않으면 주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택함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돼도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불림을 받은 순간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을 보십니다.
돈을 주면 망치게 생겼는데 어떻게 돈을 주겠습니까? 명예를 주면 교만해지겠는데 어떻게 명예를 주시겠습니까? 저 인간을 잘살게 만들어 주면 신앙을 떠나고 하나님을 잊고 교회도 나오지 않게 생겼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충성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믿으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살아갈 때 나타나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충성이지요.
그런데 이 충성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은 ‘판단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세 가지 차원에서 충성이 판단과 연결되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사역자에게 판단이란
김상혁 목사님이 쓴 [하날에 사시는 우리들 아부지여]라는 책에 나오는 목회 단상입니다.
언젠가 TV 광고에서 예쁜 여자 탤런트가 이렇게 속삭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자는 무엇 먹고 살까요?” 대답은 “여자들은 이슬 먹고 살지요.” 하면서 나온 선전은 술 광고였답니다. 그 순간 목사님은 자신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목사는 무얼 먹고 살까요?”
그때 그 목사님의 대답은 “교인들의 사랑을 먹고 살지요”이었답니다.
너무나 진부한 대답 같지만, 이 사랑이란 마치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보여주는 그런 사랑, 조금 부족해도 눈 감아 주고, 때로는 무조건 믿어주고, 무조건 따라주는 그런 사랑 말입니다. 그런데 실상 교회에서는 작은 일들로 오해를 받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누구에게는 다정하게 하고, 누구에게는 눈길도 안 주더라.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자꾸 나를 쳐다보는 것을 보니 나에게 감정을 가지고 설교하나 보더라.
이런 일들로 오해를 받을 때 무척 난감하기도 하지요.
그러면서 강원도에서 실제 있었던 어떤 신부님의 이야기를 합니다.
개신교의 목회자들과는 달리 신부님들은 술과 담배를 자유롭게 하지요.
어느 날 어떤 문제가 있었는데, 한 신부님이 원주시에 있는 번화가의 어떤 술집에서 술을 먹고는 새벽 시간에 만취한 상태에서 탁자와 의자들을 비롯한 집기들을 부수고 난동을 부렸답니다. 참다못한 술집의 신고로 경찰들이 도착하기 바로 직전 그 성당의 교우들 몇 명이 현장에 나타났고, 지역의 유력한 유지였던 교우가 보상하고 절대 소문이 나지 않도록 단도리를 하고 현장을 떠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이 일을 문제 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상황을 알게 된 신부님은 스스로 사임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교인 중 대표가 찾아가 눈물의 호소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우리들의 아버지입니다. 실수했다고 해서 아버지를 버리는 자식들이 어디 있습니까? 사임하시려는 그 마음으로 더 독하게 성직의 길 정진하셔서 자식들을 위해 사랑해주시고 기도하시는 참 아버지가 되어 주십시오.”
저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참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에 말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에서는 계속해서 ‘판단’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가만히 문맥을 살펴보면 고린도에 있는 교인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 어떤 판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판단이란 것이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런 판단으로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한다는 것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먼저 이 ‘판단’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명확히 아는 것이 필요할 듯한데, 원어의 ‘아나크리노’라는 단어는 ‘조사하다. 심판하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좋은 판단도 있고 나쁜 판단도 있는 중립적인 의미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 악의를 가진 판단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판단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판단에 대하여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4절) 즉, 심판은 오직 주께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부분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지요.
교회의 담임목사, 교구를 담당하는 교역자들에게서 단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것으로 그 사람에 대해 판단을 하기 시작하면 신앙생활이 무척 어려워집니다.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서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내려지는 순간, 그 ‘판단’이라는 렌즈를 가지고 모든 사물을 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목회자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보다는 교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상처를 받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참 신기하지요.
성도들이나 사역자나 모든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서로의 판단으로 상처를 받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주 원론적인 답을 주고 있는데, 심판은 오직 주께 달린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조화를 이루기 위한 첫 번째는 ‘우선순위’(priority)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군 생활하는 데 가장 무서운 사람이 1주일 선임, 혹은 1달 선임입니다. 생활하다 보면 선임의 명령과 소대장의 명령이 상치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니 전쟁에서 중대장의 명령과 대대장의 명령이 상치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요? 쉽게 생각하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편합니다. 그러나 현명한 사람이라면 가장 높은 상급자에게 순종하는 것이 지혜롭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부분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말하지요.
고린도 교회를 떠나오고 난 후에 교인들이 서로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파당을 지었고, 자신들의 생각과 다르면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남에게 좋지 않은 평판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결국은 아무리 좋은 평판을 들으려고 해도 모든 사람을 만족하게 하지 못하고 누군가에게는 나쁜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우리 인생이 아닌가요?
사실 이 부분은 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제가 본래 성격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을 고쳐보려고 노력하다 보니 ‘착한 남자 콤플렉스’라는 게 있습니다. 누가 이야기를 하면 거절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결국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만족을 주지 못하다 보니 괴롭습니다. 그래서 힘들게 살아가고 마음의 병을 얻기도 하지요.
아마도 여기에 있는 사람 중에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안고 고민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무서운 것은 사람들의 평판을 의식하다가, 좋은 평판을 들으려다가 하나님의 법과 신앙을 떠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만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의 판단에 좌우되었다면 그렇게 위대한 사도가 되었을까요?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비난의 소리를 들었을지라도 그가 위대한 사도로 기억되는 것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 또한 이야기합니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결정하는 많은 일, 그래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결국은 여러분의 판단에 의해서가 아닌가요? 내 마음에 있는 나의 율법, 양심이라는 기준에서 말입니다. 아니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나의 문화적인 배경에서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좋습니다.
내가 그렇게 먹어왔기 때문에 그 음식이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라는 기준과 율법과 평판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제가 식사하는 교인들의 모습을 보면 음식을 권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몸에 좋다는 약을 권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음식들과 보약들은 다 자신에게 맞는 것입니다.
제가 아프고 보니까,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단지 자신의 경험과 자신의 체질에 맞는 것이지 모든 사람에게 맞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8체질 검사를 해보니까, ‘금음’체질이라고 나왔는데, 주의해야 할 사항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인삼이 좋다고 하는데 저는 산삼도 몸에 맞지 않는답니다. 많은 사람이 등산이 몸에 좋다고 하는데 저는 산에 가는 것이 해롭답니다. 많은 사람이 목욕탕에 가서 목욕하고 사우나를 하면 시원하다고 하는데, 저는 냉수욕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제가 요즘은 거의 채식주의자가 되었는데 고기가 저에게 매우 해롭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고기를 먹어야 힘이 난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소는 풀만 먹어도 힘 있게 일을 잘합니다. 만일 우리가 소를 힘세게 하려고 고기를 먹인다면 죽거나 광우병에 걸리게 될 것입니다. 사자나 호랑이는 채식을 하지 않는데도 사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맹수가 풀을 먹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기준이 판단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사도가 된 다음에 깨닫게 된 것이 있는데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깨닫게 된 것이지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체험했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지금껏 살아왔던 자신의 판단을 버리지 않았다면 올바른 신앙인은 아닙니다.
제가 설교하면서 가장 많이 인용하는 말씀이 요한복음 14장 26절의 말씀일 것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의 생각도 주장하시고, 우리가 행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다른 사람의 판단보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살아가며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훌륭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세운 기준을 따라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을 보면 ‘최선’을 다해 사는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선’이 ‘지고(至高)의 선(善)’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의 위대함이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4절)
얼마나 부러운 일입니까?
최선을 다했고, 적어도 자신이 생각하는 한 옳다는 일을 했습니다. 양심에 가책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참 철저했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의롭다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왔어도 ‘하나님의 객관적 의’와는 관계가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깨닫게 되고 자기 고백을 하게 된 것이,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입니다.
주님이 나를 판단하는 것, 그것이 완전한 판단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주관을 가지고 최선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그것이 얼마나 불완전하며, 때로는 비타협적인 삶을 살아가므로 불협화음을 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언제든지 내가 바뀔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생각할 때, ‘충성’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입니다.” 이것이 신실함입니다.
제가 이제 여러분들에게 조금 구체적인 삶의 지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다른 사람을 배려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조금 피해가 가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 좋은 평판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가능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양보한다든지, 여러분이 좋아하는 음식을 자제하고 상대방이 좋아하는 식당을 따라간다든지 하는 작은 일부터 말입니다.
2. 그러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의 목적을 침해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꿈을 이루어 가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여러분이 해야 하는 의무를 소홀히 하면서까지 남을 배려한다면 여러분은 ‘사람은 좋지만, 일은 못 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가족들과 경제적인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보증을 선다든지, 누군가의 말을 듣고 투자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친구가 좋아서 가족들과의 약속을 어기고 술을 먹는다든지 하는 것들은 남을 위해 배려가 아니라 소중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저는 삶을 살아가며 우선순위와 삶의 원칙을 정해 놓습니다.
“처음 한 약속이 가장 중요하다, 내가 만나는 이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
이런 삶의 좌우명은 우리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가도록 만들어줍니다.
3. 가장 중요한 것은 ‘priority number one’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여러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갖는 것보다 우선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과 기준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명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의 달란트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은사보다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자기 판단에 따라 우리 삶에 최선을 다해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다른 사람들을 세워주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우선순위를 아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요, 하나님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입니다.
기록된 말씀 안에서
6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 근거해 보면, 고린도 교회 분열의 책임이 목회자였던 바울과 아볼로보다는 교인들에게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몇 주 전 말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전3:6)는 말은 사역자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은사대로 감당하는데, 교인 가운데 서로 비교하며 판단하고 그 결과로 분열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교회를 세운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세워진 교회를 잘 돌보며 부흥 시킨 사람이 좋은 지도자입니까?
세우는 자가 없었다면 어떻게 교회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또한, 관리하고 부흥시키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지금의 교회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그 때와 시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지요.
다윗 왕이 아무리 위대했어도 하나님이 성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므로 아들 솔로몬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요즘 만나 교회가 아무리 부흥을 하고 알려진 교회라고 해도 15년 전 분당에 이 교회가 세워지는 결단과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 이 교회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목회를 좀 특이하게 하는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부목사님 그리고 전도사님들을 바라보며 늘 그들이 가진 은사가 무엇인지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은사를 사용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직책에 따라 상하 관계나, 나이에 따른 서열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 사람의 은사가 잘 사용되는지 생각합니다.
또한, 저에게 있는 생각 중의 하나는 부목사님들이 우리 교회에서 훈련을 받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사역자들이 가진 은사로 섬기는 것이라는 정의가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이 느끼셨는지 모르지만, 제가 없는 동안 주일 강단을 맡기는 목사님이 있고,
어떤 목사님에게는 수요일을, 어떤 목사님에게는 금요일 강단을 맡깁니다.
어떤 목사님은 심방을 하기도 하고, 어떤 목사님을 교육을 담당하며 어떤 목사님은 기획을 하기도 합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이분의 은사가 그곳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꿈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담임 목사가 되고 난 다음 모든 부목사님을 주일 강단에 세운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사회를 보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목사님이 설교에 적절한지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물론 저의 판단이 다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만나 교회의 리더로 세워주셨을 때는 판단하는 권한과 능력도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러고 나서 결론을 얻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좀 교만한지는 모르지만, 주일 설교는 부목사님보다는 제가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일 설교를 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함께 동역하는 목사님 중에 주일 설교를 탁월하고 은혜스럽게 한다면 제가 다 주일 설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함께 섬길 수 있지요.
그래서 저는 목사님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하는 사역에서 전문가가 된다는 것은 담임목사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래야 하나님의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가끔 금향로에서 저는 찬양을 인도하거나 기도를 인도합니다. 부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저는 사회를 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기도나 찬양은 설교하는 사람들 도와주고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은사로 섬기는 부분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교회는 동역이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나이와 관계없이 목사님들이 서로의 은사를 가지고 잘 섬겨주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관계를 해치는 사람들이 누구냐면 교인일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누구보다 설교를 잘한다!
누가 누구보다 성경공부를 잘한다!
이 모든 것이 개인적인 판단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6절에서 교린도 교인들을 향해 ‘교만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교만하다는 것은 ‘부풀게 하다 거만하게 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말씀을 넘어서서 자기 뜻대로 부풀리거나, 자기 자랑을 하기 위해서 과장하는 것을 경계하여 말씀합니다. 대개 교만하여 부풀리게 되는 경우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상대방과 분쟁하고 경쟁하다 보니 자기 자랑을 하게 되고, 자기 자랑을 하다 보면 인사불성에 빠지는 것입니다.
바로 고린도 교인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의 판단을 정당화하고, 자신들이 속한 분파를 자랑하기 위해 거짓으로 자기를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자 사도 바울이 7절에서 이렇게 질책합니다.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 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너는 교인 중의 하나일 뿐이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아니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너를 구별하여 성도로 삼아 주셨지만,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부르신 특권이지, 함께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 간의 특권이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너에게 특별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네가 받은 것인데 왜 자랑하느냐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은 것은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리고 양육을 받은 것은 아볼로를 통해서 받은 것인데, 자꾸 자랑하다 보니 사도 바울도 무시하게 된 것이지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구별됨, 교만함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을 깎아 내리고 무시하는 것이지요. 잠언서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미워하시는지 아십니까? 교만한 자에게서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이 어떻게, 사역자를 무시하지 않으며, 같은 성도들을 무시하지 않겠습니까?
오늘의 결론입니다. 8절의 말씀을 보세요.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힘이 드십니까? 표준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제쳐 놓고 왕이라도 된 듯이 다스리려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다스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처럼 다스리면 좋겠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얼마나 교만한지, 영적으로 얼마나 교만한지 배울 것이 없다고 스스로 자랑하며, 사도를 사도로 여기지 아니하며 만족해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도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도 바울이 권면합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왕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많이 등장하는 ‘우리’라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많은 사람이 아볼로의 편에 서서 사도 바울을 비난했습니다. 아볼로는 사도 바울의 제자입니다. 아볼로는 사도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지 아니하고 고린도를 떠나 바울에게 갔습니다. 아무리 교인들이 편을 갈라놔도 사도 바울과 아볼로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권면합니다. “너희도” “우리처럼”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충성스런 종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가난하거나 고통 때문에 망하지 않고 교만 때문에 망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모든 판단을 내려놓고,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