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당공파 예산종중의 교지
교지란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임명장 이다
교지는 4품 이상의 관직 임명장(고신).과거합격증(홍패와백패).추증교지.시호교지.면역교지.
사패교지가 있다
예산문중에 남아있는 백여장의 교지중에는 거의 모두가 관직 임명장인 관직교지이며 시호교지와 진사시에 합격한 백패교지
작위 즉 품계를 내리는 관작교지 직계 3대에 내려진 추증교지가 있다.그리고 配의 추증교지가 있다
추증교지에는 맨 마지막에 누구의 妻.父.祖父.曾祖父등 본인과의 관계가 표기가 되어있어 내용을 알수있다
예산종중에 전해져 내려오던 여러 자료들이 그동안 많이 소실이 되었지만 현재 이백여점이
남아있다
남아있는 자료는 교첩 교지 유지 시호서경 녹패 해유첩정 해유이관 호구단자 준호구 시권
명지 제문 행장초 서간문등 이다
아래의 교지는
19세 신계영(辛啓榮)의 시호교지 관작교지 관직교지와 配의 추증교지 그리고 직계 3대
父 18세 신종원(辛宗遠). 祖父 17세 신진(辛鎭). 曾祖父 16세 신의정(辛義貞)에게 내려진
추증교지 이다.
辛啓榮 시호 교지-사헌부 발행
시호:정헌 司憲府 시호교지
시호
졸 판부사 신계영 정헌 공
관락영종 왈 정(너그럽고 즐거워 하여 제명대로 편안하게 살다 죽음을 정 이라하고)
행선가기 왈 헌(행동이 착하여 본보기가 되는것이 헌이다)
건륭34년 6월 29일 출
당령 지평
대사언 이 0 0 당령 지평
辛啓榮 시호 교지-사간원 발행
시호:정헌 司諫院 시호교지
시호
졸 판부사 신계영 정헌 공
관락영종 왈 정(너그럽고 즐거워 하여 제명대로 편안하게 살다 죽음을 정 이라하고)
행선가기 왈 헌(행동이 착하여 본보기가 되는것이 헌이다)
건륭34년 6월 29일 출
정언 李 0 0
행 대사간 정 0 0 사간 獻納 정언
辛啓榮의 마지막 교지(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종1품)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자
강희 6년 정월 24일(1666년)
辛啓榮의 마지막 관직 교지(자헌대부 용량위 부호군 정2품)
신계영 위 자헌대부 행 용량위부호군 자
강희4년 5월 초1일
配 평산박씨 추증교지
정부인 박씨 증 정경부인 자
강의 6년 11월 초8일
숭정대부 전 판중추부사 신계영 처 의대전종부직
신계영의 부 신종원 추증교지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신종원
증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자
강희 6년 11월 초 8일
숭정대부 전 판중추부사 신계영 고 의대전추
신계영의 조부 신진 추증교지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 신진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자
강희 6년 11월 초 8일
숭정대부 전 판중추부사 신계영 조고 의대전추
신계영의 증조부 신의정 추증교지
증 통훈대부 사헌부 집의 신의정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자
강희 6년 11월 초 8일
숭정대부 전 판중추부사 신계영 증조고 의대전추증
신계영( 辛啓榮)
정의:조선 후기 충청남도 예산에서 활동한 문신.
개설 :신계영(辛啓榮)[1577~1669]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벼슬이 동부승지에 이르렀다. 문인으로서 예산의 정경과 생활을 노래한 가사 「월선헌 십육경가」를 지었다.
가계 :신계영의 본관은 영산(靈山)이며 자는 영길(英吉), 호는 선석(仙石),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아버지는 호조좌랑을 지낸 신종원(辛宗遠)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활동 사항 :신계영은 1577년(숙종 40) 서울 낙산에서 태어났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03년 예산군 신암면으로 낙향하였다. 신계영은 낙향한 뒤 학문에 전념하면서 부모를 봉양하며 살다가 1619년(광해군 11) 다시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병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통신사(通信使)로 일본에 가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 146명을 구해 왔다. 1634년 동부승지가 된 후, 1637년에는 속환사(贖還使)로서 청나라로 가 병자호란 때 잡혀갔던 포로 600여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2년 뒤인 1639년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를 맞이하는 부빈객으로, 1652년(효종 3)에는 사은부사로 청나라 심양에 다녀왔다.
신계영은 지방관으로서는 나주목사, 강화유수 등을 거쳐 전주부윤에 이르렀다. 1655년 관직을 사임하고 예산으로 돌아온 후 문인으로서 여유로운 말년을 보내며, 문학 작품을 다수 남겼다. 조정을 떠난 후인 1665년(현종 6)에 지중추부사 직을 받아 원로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된 기로소의 일원이 되었다.
1667년 현종으로부터 특별히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1669년(현종 10)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신계영의 저서로는 『선석유고(仙石遺稿)』가 있으며, 『선석유고』에 수록된 시조 「연군가(戀君歌)」·「탄로가(歎老歌)」·「전원사시(轉園四時歌)」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월선헌 십육경가」는 1655년 벼슬에서 물러나 예산으로 내려온 후 같은 해 10월에 지은 가사로, 신계영이 자신의 거처 월선헌에서 누린 예산의 사계절 모습을 아름답게 그려 낸 작품이다.
묘소 :신계영의 묘소는 충남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의 봉수산 자락 학정혈의 대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영모재에 신위가 모셔져 있고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