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 윤씨 소정공 종중 상호군 / 태안공파 해운대 후손
경기도 파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파평 윤씨의 시조는 윤신달(尹莘達)인데, 훗날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이다. 윤신달의 5세손에는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은 윤관이 있다. 파평 윤씨에서는 윤관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그의 아들 7형제는 16계파로 분파되었다. 16계파 중에서 판도공파(版圖公派)와 소정공파(昭靖公派)에서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그 가운데 부산의 입향은 소정공파에서 비롯된다.
소정공파는 윤승례(판도공)의 형 윤승순의 아들인 윤곤(15세 손)의 후손이다. 윤승순은 공민왕 때 요승인 신돈의 살해를 모의하다 발각되어 유배되었다가, 신돈이 주살된 후 풀려나 응양군 상호군이 되어 왜국의 침입을 막아냈다. 창왕 때는 권근과 함께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 명나라의 명에 의해 공양왕을 즉위케 하였고, 판개성부사를 지냈다. 윤곤은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태종)을 도와 좌명공신에 책록 되고 이조판서를 지냈다. 그의 손자 윤호는 성종의 장인으로서 딸이 성종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이다. 그 후 그는 돈령부영사를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윤곤의 후손 중에는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이 있다. 그는 문종 때 추장문과에 급제했다. 이시애의 난에 도승지로 왕명을 신속하게 처리하여 우참찬에 특진하였다. 성종 때 영의정에 오르고 부원군에 봉해졌으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하였다는 죄로 진도에 유배되고 사약을 받았다. 그의 증손인 윤현은 명종 때 호조판서를 지내고, 선조 때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돈령부영사에 이르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22세손 태안공 윤종충(尹宗忠,1503-1588)은 청도군 매전면 용산리에 정착하였다. 그의 입향 경위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후손들의 경남 양산 기장의 입향 경위는 선조들의 선영으로 알아본다.
27세손 윤필혁(尹弼赫,1685-1727 ) 선조의 묘는 기장군 철마면 고촌마을에 있으며 28세손 윤봉아(尹鳳阿,1703-1778)선조의 묘는 기장읍 시랑리 공수마을에, 29세손 윤처하(尹處和,1758-1825 )선조의 묘는 기장읍 소정동에, 30세손 윤효후(尹孝厚,1781-?)선조의 묘는 백자동 미인봉에, 31세손 윤상재(尹相宰,1827-1872)선조의 묘는 해운대구 장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소정공 종중 태안공파 27세손 윤필혁(尹弼赫,1685-1727) 선조는 청도군 매전면 용산리에서 기장군 철마면으로 이거한 소정공 윤곤(15세손)의 후손이며 윤곤의 7세손 태안공 윤종충(22세손)의 후손이다. 기장에서 해운대(우동, 중동, 송정)쪽으로 언제 이거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동마을 입향조 31세손 윤상재(尹相宰,1827-1872) 선조의 묘는 해운대구 장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1934년 조선 총독부에 발행된 『조선의 성(朝鮮の姓)』의 동래군조에는 파평 윤씨가 구포 화명리에 73호, 서면 용호리에 35호가 있다고 하였으며, 1937년 문기주(文錡周)가 편찬한 『동래군지』의 성씨조에는 파평 윤씨가 우거(寓居) 성씨로 기록되어 있다. 2000년 인구 조사에서 파평 윤씨는 1만 7284가구에 5만 6620명(남자 2만 8234명, 여자 2만 8386명)이 부산 지역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파평 윤씨는 부산진구 당감동, 남구 용호동, 북구 화명동·구포동, 금정구 선동, 강서구 녹산동, 연제구 거제동, 기장군, 해운대 등지에 세거지를 이루었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