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아직 있다
노춘기
파란시선 0119
2023년 1월 5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37쪽
ISBN 979-11-91897-45-6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이곳에서 너는 오직 가능할 뿐이야
[너는 아직 있다]는 노춘기 시인의 세 번째 신작 시집으로, 「곤란한 마주침」, 「붉은 얼굴」, 「정글엔 언제나」 등 51편의 시가 실려 있다. 노춘기 시인은 1973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났으며, 2003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오늘부터의 숲] [너는 레몬 나무처럼] [너는 아직 있다]를 썼다. 월하지역문학상, 남양주조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노춘기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너는 아직 있다]에서도 이전 시집들에서 엿보인 다양한 시선의 교차편집과 여러 시점의 혼재를 통한 다중초점의 엇갈린 ‘진실들’이 그 마디마디를 가로지른다. 이렇듯 어긋나고 조각난 진실들을 꿰뚫고 들어가, 좀 더 투명한 앎과 깨달음에 이르려는 시인의 ‘공들임의 함수’(김인환)는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이는 ‘인간중심주의’로 표상되어 온 의식 주체의 명석판명한 자아중심적 감각과 사유로부터 훌쩍 날아올라, ‘감각 너머의 감각’ 또는 ‘감각되지 않은 감각’을 상상하거나 되찾아오려는 모험적 시도를 동반한다. 노춘기 시인은 이번 시집 [너는 아직 있다]에서 지금까지 작업해 온 시점과 서술법의 형식 실험을 기반으로 삼아 ‘투명성의 모험’을 이어 가는 가운데서도, 우리가 한결같이 느낄 수밖에 없을 어떤 감응이 도래하는 보편성의 현현 순간, 흔히 운명이란 말로 일컬어지는 생의 보이지 않는 기미들을 예감하는 바로 그 순간적 ‘뉘앙스의 미감’을 새로운 예술 무대로 상연하고 있다. (이상 이찬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결국 이 피 튀기는 전쟁의 승자는 시간뿐이다. 주체와 세계의 비대칭 위에서 현실의 세계는 의미를 질식시키는 무의미에 가깝다. “차가운 금속의 난간이 피라냐처럼/손바닥의 축축한 살을 물어뜯고 있었다”는 섬세한 표현에서 보듯 “모든 것을 끝장낼 수 있는 힘”으로서의 폭력성과 그 결과인 ‘종말’은 이 세계에 편만하며 심지어는 너무나도 가까이에 있고 벗어날 수도 없다.(「골드버그 장치」) “출구 없는 공허”라니(「가능한 세계 2」) 이 세계는 얼마나 모순적인가. 하루의 끝은 이토록 먼데(고달픈데) 세계의 끝이 언제나 너무나 가까이 있다. 가령 호젓하고 아름다운 바그다드 카페와 (전쟁으로) 불타는 바그다드가 연결되고(「바그다드 카페에서」), 귀여운 아르마딜로는 야간 기습 공격에 눈을 뜨고 죽은 아르마딜로 부대 병사의 모습과 겹친다. 겹침, 유혈이 낭자한 이 비릿한 인식의 순간을 노춘기는 “곤란한 마주침”이라고 명명한다(「곤란한 마주침」). 어떻게 곤란한가. 거품에서 태어난 비너스의 탄생 모티프는 욕조 자살자의 모습과 겹치고(「비너스의 탄생」), 제 심연으로 자맥질하던 잠수부의 광기는 온통 죽음의 공포로 차오르는 병실의 이미지로 바꾸어진다(「Le Grand Bleu」). 나와 세계의 비대칭은 기억(앎)과 미지의 비대칭이고, 따라서 의미와 무의미의 비대칭이다. 그래서 곤란하고 힘겹지만 그 마주침의 결과로 ‘너’와 ‘당신’의 세계가 만들어진다. 죽음과도 같은 물성의 세계가 ‘나’라는 일인칭의 경험의 세계로 분열 생성되는 응시의 자리에 ‘너/그대/당신’이 있고 ‘얼굴’이 있다. 그래서 이 응시는 내부로부터의 응시이고 언제나 내려다보는 모양을 한다. ‘너’와의 마주침은 섬찟하고 유쾌하며 부드럽고 날카롭다. 노춘기의 이번 시집은 그렇게 처절하고 따뜻한 응시의 시집이다. 한 응시의 높은 자리에서 석양에 물든 얼굴처럼 인간과 태양은 같은 색깔의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본다(「붉은 얼굴」). 이렇게 아프고, 두렵고, 유쾌하며, 처연한 시집,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시집이다.
―이현승(시인)
•― 시인의 말
드라이아이스처럼 냉담한 안개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숨을 깊게 들이쉬어 본다.
인중까지 차오르는 이것,
견딜 만하다.
도망치지 않을 수 있겠다.
•― 저자 소개
노춘기
1973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태어났다.
2003년 [문예중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오늘부터의 숲] [너는 레몬 나무처럼] [너는 아직 있다]를 썼다.
월하지역문학상, 남양주조지훈문학상을 수상했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이 별에서의 오르페우스 – 11
하쿠나 마타타 – 12
그것이 나를 본다 – 14
고래에게 – 16
우물의 깊이 – 18
비행운의 뿌리 – 20
곤란한 마주침 – 22
스트로크 – 24
고잉 홈 – 26
누구나 시간을 멈출 수 있다 – 28
아직 너의 잎이 푸르다 – 30
가능한 세계 1 – 32
제2부
눈의 여왕 – 35
비너스의 탄생 – 37
골드버그 장치 – 39
바람이 불어오는 곳 2 – 41
타불라 라사 – 42
독 짓는 밤 – 44
붉은 얼굴 – 46
의심이라는 병 – 48
바그다드 카페에서 – 50
아르마딜로와 춤을 – 51
재떨이 – 54
Le Grand Bleu – 56
가능한 세계 2 – 57
제3부
정글엔 언제나 – 61
너와 함께 – 63
바람이 불어오는 곳 1 – 65
원더랜드에서 – 66
사냥꾼 일기 1 – 67
사냥꾼 일기 2 – 69
사냥꾼 일기 3 – 71
사냥꾼 일기 4 – 72
사냥꾼 일기 5 – 73
사냥꾼 일기 6 – 74
사냥꾼 일기 7 – 76
완벽한 시간 – 78
새들처럼 – 80
제4부
에우리디케, 별에게 – 85
여기에도 그것이 – 86
너는 말한다 – 88
왼쪽으로 – 90
밍키 이야기 – 92
도로시에게 – 94
국수의 맛 – 96
꿈에 – 98
레인보우 이펙트 – 100
돌아오는 사람 – 101
불안한 행복 – 103
버스를 타고 나에게로 2 – 105
가능한 세계 3 – 107
해설 이찬 투명성의 모험, 뉘앙스의 미감 – 109
•― 시집 속의 시 세 편
곤란한 마주침
와이퍼는 빗물을 밀어 올린다
라디오는 스스로 볼륨을 높이고
가까이 있는 것들이 크게 보이고
멀리 있는 것들이 흐릿하다
되새김질하는 외갓집 소처럼 나른하게
빗방울들이 움직이고 뭉쳐지고
둥글어졌다가 솟구친다
위험이 우리를 발견했어
네 눈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으로 이끌린다
첫 번째 방문을 여는 황동 열쇠를
너는 뜨거운 비스킷을 들어
거울 속으로 밀어 넣는다
너를 만지고 맛보고
비를 만지고 느끼고
어둠을 들이키고 맛보고 토해 버리는
아주 어렵고 곤란한 마주침이
이 순간의 우리를 찢고 있어
보이는 것들이 보고 있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잖니
볼륨을 잠깐만 줄여 봐
이빨을 드러낸 개들이 늘어나고 있어
물러서지 않고
전구처럼 뜨거워진 두 눈을
흔들고 있어 ■
붉은 얼굴
시곗바늘이 한 칸 한 칸
전진하는 사이
지구가 자전하는 톱니바퀴
소리를 듣는다.
눈앞의 지구에서 구름이
걷히면 길쭉한 여객선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인다.
어떤 이가 산 위에서
나를 올려다본다.
고래가 뛰어오른다.
지구가 돈다.
도는 지구는
네 엉덩이처럼 매끄럽고
부드럽다.
보이지 않는 뒤편으로 사라지는
저녁들에게
양 떼와 낙타와 전갈들에게
서둘러 산을 내려가는 소몰이꾼에게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눈빛을 보낸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
정글엔 언제나
이름을 모르는 식물들이
있다 지금 이곳에 맛을 모르는 식물들이
있다 그 육체의 형상을 모르는 소리들이
있다 겪어 보지 않은 기온과 습기
살에 닿아 보지 않은 미물들의 촉감
비가 그치면 어둠이 오고
매질하듯이 별들이 쏟아지고
우주를 채우는 곤충과 새와 짐승들의
숨결들 바람에 온몸을 부딪치는
빽빽한 나뭇잎들의 분노가
있다, 이름을 아는 사물들과 그 이름을 내게
알려 준 사람들과 그들 곁에서 조용히 숙제를 하던
너는, 삐걱거리는 나무 복도에서 새로 산 지우개를 건네던
주산학원 가던 길에서 한 번도 뒤를 보지 않던
한동안 사촌 누나였다가 한번은 플라타너스
높은 가지 끝의 하늘소였다가 라디오에서
들려오던 죽은 싱어송라이터의 노래였다가
노량진 학원가 빵집 창가 자리에 놓인
흰 접시였던, 노량진역에서의 식은
악수였던, 철문 앞에서의 오랜 기다림
이었다가 융단폭격 아래에서의 기도였던
너는, 저 빽빽한 어둠의 내부에서 붕붕거리는 것들의
뜨거운 호흡 소리를 뚫고 이 축축한 지상을
이 웅크린 육신을, 내려다본다
그리고 이곳에서
밤이 길고, 너는 별처럼 따뜻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