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에서
가장 슬펐던 연설
"여러분, 난 지금 여러분들과 마주 서 있으면서 몹시 부끄럽고, 가슴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과연 내가 무엇을 했나 하고 가슴에 손을 얹고 깊이 반성합니다."
"내가 바로 여러분들을 이곳으로 오게 한 죄인입니다. 우리 땅엔, 먹고살 것이 없어서 여러분들이 이 머나먼 타향에 와서 달러를 벌고 있습니다."
"이 외로운 시골, 끝도 없는 갱속에 들어가 석탄을 캐고 있습니다. 간호사 들은 자기의 체구보다 두 배나 큰 독일 환자들의 시중을 들다가 2년도 못돼서 허리디스크에 걸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왜 이래야합니까? 이게 다 나라가 못 사는 탓입니다. 그러나, 나한테 시간과 기회를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여러분들과 같이 다른 나라에 팔려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반드시 하겠습니다."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 주세요. 돈 좀 빌려 주세요, "
- 박정희 대통령,
서독 총리와의 면담에서 -
"독일 광산에서 노역하던 한국인 아버지들, 가족을 뒤로하고 서독으로 떠나는 간호사 어머니, 여러분 만리 타향에서 이렇게 상봉하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남의 나라 땅 밑에서 얼마나 노고가 많으십니까? 서독정부의 초청으로 여러 나라 사람들이 이곳에 와 일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한국사람들이 제일 잘하고 있다는 칭찬을 받고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여기저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대통령은 원고를 보지 않고 즉흥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광원 여러분, 간호사 여러분, 가족이나 고향 땅 생각에 괴로움이 많은 줄로 생각되지만 개개인이 무엇 때문에 이 먼 이국에 찾아왔는가를 명심하여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 만이라도 닦아 놓읍시다."
박대통령의 연설은 계속되지 못했다. 울음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이라는 신분도 잊은 채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육영수여사도... 수행원도... 심지어 옆에 있던 서독 대통령까지도 눈물을 훔쳤다.
결국 연설은 어느 대목에선가 완전히 중단되었고,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연설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오자 미처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 광부들이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우릴 두고 어디 가세요?"
"고향에 가고 싶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 올라탄 박대통령이 계속 눈물을 흘리자 옆에 있던 서독 뤼브케 대통령이 손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우리가 도와주겠습니다.
서독 국민들이 도와드리겠습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가 보낸 외환은 당시 대한민국 GNP의 2%에 달했다. 피와 땀으로 만든 경제성장의 종잣돈이었다.
박정희 : "우리도 중화학 산업하게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케네디 : "돈 못주겠다. 그냥 경공업 (다람쥐 가죽, 가발 등)이나 해라."
이후 서독에 가서 구걸, 베트남 파병으로 포항제철, 경부선 건설 등 산업화를 이룩했다. 대통령 눈도 붉게 충혈돼 "나라와 내가 부족해서 여러분이 먼 이국서 고생..."
경호 오토바이 독일이 붙여줘… 대통령도 우리도 그때는 너무나 초라했었죠.
"광산에 찾아온 박정희 대통령의 눈이 붉게 충혈돼 있었어요. 눈이 얼마나 충혈됐던지 흰자위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독일 쾰른에 사는 파독 광부 출신 유재천(73)씨는 지난 반세기 동안 사진 한 장을 소중하게 간직해 왔다. 지난달 16일 자택을 찾은 기자에게 유 씨는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였다. 1964년 12월 10일 파독 광부들이 일하던 함보른 탄광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연단에 서서 애국가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다.
1964년 12월 10일 독일 뤼프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방독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함보른 광산을 방문 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앞에 두고 박 대통령 내외는 목이 메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왼쪽은 당시 함보른 광산 사장. /유재천 씨 제공
당시 탄광회사 강당에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 250여 명이 모였다. 국민의례가 끝나고 애국가가 시작되자 앞자리 간호사들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모두 울먹이며 애국가를 불렀다. 대통령 내외도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찍었다.
박 대통령이 '여러분, 수고 많으십니다'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하자, 강당은 '꺼이꺼이'하는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 자리에 있었던 조립씨는 "대통령이 '참 국가가 부족하고 내가 부족해서 여러분이 이 먼 타지까지 나와 고생이 많습니다'라고 하던 게 지금도 생생하다"라고 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그때 독일에 돈 빌리러 왔던 거잖아요. 말이 차관이지 사실 구걸이었지요. 독일에서 대통령 경호 오토바이 다섯 대를 붙여줬는데 참 초라해 보였어요. 그때 우리는 가엾은 대통령이었고, 가엾은 국민이었지요"라고 말했다.
조 씨도 반세기 동안 고이 간직해 온 물건이 있다. 그는 장롱 속에서 주황색 수건을 꺼냈다. 수건에는 무궁화 그림과 함께 '대한민국 중추절'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한국 정부가 보낸 추석 선물이다.
"박 대통령 때는 해마다 김치 통조림 같은 선물을 보내주곤 했어요."
남은 것이라곤 사람밖에 없는 나라... 인플레이션 500% 라는 지옥 같은 나라.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 사는 가난한 나라.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 등... 이때, 한국의 국민소득은 76불이었다.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었고,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아프리카 가나보다 못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대한민국이었다.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보고 '독재자'라고 부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gG0JgUyObRc
나는 나라를 위한, 필요에 의한 독재라고 생각한다. 박정희만큼 국가와 국민을 생각한 대통령은 없을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산업화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이를 증명하였고 지금도 확증하고 있다.
보고 또 봐도 눈물 납니다. 기쁘고 행복한 대한민국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