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과 십자가 - 구원의 길을 찾아낸 사랑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서론 - 십자가는 영원한 현대진리
세상 사람들은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라는 이름을 들으면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이 떠오를까? 재림교인들은 소위 “현대 진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순종, 영적 성장, 그리고 안식일 등과 같은 소홀히 되어온 진리를 받아들이는 일을 강조하는 가운데, 십자가를 놓치는 경향이 발생할 수 있다. 1) 예수님의 하신 일보다 내가 할 일에 초점을 둠 2) 구원의 기쁨이 아닌 종교적 의무감이 앞섬
십자가의 복음은 영원한 현대진리이기에 부흥은 예수와 십자가를 깨닫고 경험할 때 온다. 그러므로 성경을 탐구할 때 마음에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한 가지 위대한 중추적인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세상 앞에 그리스도를 높이는 일에 으뜸이 되어야 한다. 셋째 천사의 기별의 선포는 안식일 진리를 제시할 것을 요구한다. 이 기별에 포함된 다른 것들과 아울러 이 진리는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끌어당김의 위대한 중심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제쳐놓아져서는 안 된다.”-복음교역자 156
재림교인들은 사명이 무엇이든, 무엇을 가르치든 구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내의 변화도 아니다. 구원은 갈바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기초된다. 우리가 한 일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신 일에 의해서이다. 구원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가 유일의 해답이다. “내가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 12:32).
1. 하나님의 정면돌파
사단은 하나님은 믿을 수 없는 분이시며, 하나님의 율법은 지킬 수 없는 법이며, 자신의 원리가 우주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고 하늘 천사들과 우주 거민들을 유혹했고, 하나님을 이기적인 분으로 비난해 왔다. 루시퍼는 하나님의 품성과 의도에 관하여 중상을 퍼부었으며, 우주 전역에 의심의 씨앗을 뿌리려고 했다. 결국 사단은 하늘에서 쫓겨났지만,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이 세상 임금이 되었다. 하와에 대한 사단의 시험의 핵심은 선악과 접근 금지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을 남겨놓으려고 하신 것이기에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이기적이라고 한 주장이다. 루시퍼는 하나님의 정부를 공격했고, 하나님의 율법을 독단적이라고 비난했다.
“대쟁투 초기에 사단은 하나님의 1) 율법을 순종하는 일은 불가능하며, 공의는 자비와 조화되지 않으며, 율법이 범해지면, 2) 죄인이 용서받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었다. 모든 죄는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하며, 만일 하나님이 처벌을 면제해 준다면 그분은 진리와 공의의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사단은 역설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고 그분의 뜻을 거역했을 때, 사단은 기뻐 날뛰었다. 율법은 순종되어질 수 없다는 것과,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고 그는 선언했다. 반역한 후에 자신이 하늘에서 추방당했기 때문에, 사단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총에서 영원히 차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면서 동시에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그는 주장했다”(시대의 소망, 761).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이나 범해진 율법에 대한 처벌, 그 어느 것도 무시하지 않는 방법을 강구하셔야 했다.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자신의 공의를 유지하시면서도, 동시에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게 할 수 있는 분이 되실 수 있게 하는 묘책? 결국, 하나님은 충분한 시간의 토대 위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기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의 품성에 조화되는 수단만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단 자신의 일이 그 자신을 정죄하게 만드실 것이었다. 대쟁투의 문제는 기만자 사단의 가면이 벗겨지는 것을 볼 때에만 해결될 것이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것, 하나님의 율법은 순종할 수 있고, 또한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해 영원토록 의문의 여지가 없게 만드실 것이었다.
하나님이 찾으신 해법은 바로 십자가였다. 하늘의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이나 타락한 천사들, 그리고 하늘 우주 거민들 가운데 그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해법, 곧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이 전제된 해법이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18, 25)
2. 죄인을 살리는 길
“사람의 타락은 온 하늘을 슬픔으로 가득 채웠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죄의 저주로 시들었고, 비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한 존재들이 살게 되었다. 율법을 범한 자들이 피할 길은 없는 것같이 보였다. 천사들은 찬양의 노래를 그쳤다. 하늘 궁정 전체가 죄가 가져온 황폐 때문에 통곡하고 있었다. ”(부조, 63)
금실 좋은 오돈 부부에게는 로렌조라는 5살난 아들이 있다. 하지만 어느날 불행이 닥쳐오는데, 원인도 치료법도 모르는 ALD라는 진단을 받게되고 곧 죽게 된다는 비보였다. 6살 때 로렌조가 ALD에 걸렸다고 진단한 의사들은 그가 8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내다봤었다. 부신백질이영양증(ALD)이란 희귀병 - X염색체 이상으로 발생하는 ALD는 뇌의 신경섬유를 둘러싼 지방질인 미엘린을 파괴해 뇌기능에 이상을 초래, 결국 죽음으로 이끄는 불치병이다. 그러나 이 치명적인 죽음 앞에 오돈부부는 굴복하지 않고 오직 지식과 논리를 바탕으로 아들의 병마와 싸우게 되고 마침내는 승리에 도달하게 된다. 오돈 부부는 ALD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관련된 서적도 적고 전문의들은 조직화 되어있지 않다고 느껴 그들은 ALD 심포지엄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어느날 우연히 폴란드 의학지에서 로렌조의 병과 비슷한 증세를 쥐에다 실험한 기사를 발견해 의사에게 자문을 구한다. 오돈부부는 ALD가 나쁜 지방산이 생기면서 생기는 병이므로 나쁜 지방산을 제거해 주면 되지 않겠냐는 논리에서 한발자욱 해결책 가까이 나가게 된다. 마침내 1984년, 오도네 부부는 아들 로렌조를 살리기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인 끝에 올리브유와 평지씨 기름을 섞은 기적의 치료약인 로렌조 오일을 만들어 내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어린 아들을 살리려 애쓰는 부부의 실화를 그린 영화 '로렌조 오일'의 실제 주인공 로렌조 오도네가 5월 30일 사망했다. 향년 30세.
이처럼 인류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하자 그들이 회복할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을 아셨다. 생명에서 끊어져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살리고자 하셨다.
● 제 아들은 올해 열두살 악성 뇌종양 환자입니다. 작년에 첫 진단받아 방사선치료 7주 받고 조금 낳았는데 다시 재발 하여 가망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중간에 감마나이프 치료도 1차 받았습니다. 병원에서는 항암치료를 하자고 하고 6개월에서 1년정도 생명이 유지할수있다고 말합니다. 지금은 오른쪽 팔다리 마비가 오고 시각 청각 장애가 나타납니다. 제발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요. 좋은 약이나 치료방법이 있으면 알려주십시요. 도와주십시요. 지금은 방법이 없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 자식이 귀하겠지만 어려울때 힘들게 얻은 예쁘고 귀한 제 아들입니다. 도와주십시요 부산 051-502-7433 핸드폰 010-3069-7433
여전히 세상에는 살 길을 찾아나선 이들로 가득하다. 살길이 막막한 이들이 몸부림치며 살길을 찾는 이들이 있다. 경제적, 사회적,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살고자 길을 찾아 나선 이들이 있다. 그러나 찾지 못하고 끝나는 이들도 많다. 피할 방도가 없는 것이 죽음의 문제이다. 아무 염려가 없고,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안정되었지만 어느 날 중병에 걸렸다는 진단은 인생의 희망을 허무하게 꺽는 사망선고일 때가 많다. 어디 그뿐이랴 부지불식간에 닥쳐오는 사건과 재난 앞에 맥없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지진으로 가옥이 무너져 내린 쓰촨성 마을. 진흙더미 속에서 숨진 모녀의 시신이 발견됐다. 어머니는 딸의 몸을 감싸 안았고 한 손에는 젓가락을 든 모습이었다. 식사를 하던 도중 갑자기 흙더미가 무너지자 딸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에 껴안은 것이다. 이 사진이 공개되자 중국인들은 안타까운 모성애에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보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 앞에 인생은 속절없기 때문이다.
3. 의미심장한 하나님의 자기희생적 사랑
예수님의 시험의 정점은 겟세마네였다. 여기서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의 공포와 정면으로 맞닥뜨리셨다.(막 14:33, 34; 26:37, 38). 그분은 다음과 같은 기도를 세 번 드리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42, 44). 그분은 그의 때와 그가 마시려는 잔을 두려워하셨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의 꿋꿋함과 달리 왜 그리스도는 두려워하신 것일까? 세상을 많이 사랑해서일까? 믿음의 부족 때문일까? 견딜 고통을 두려워해서일까?
그 답은 그분이 마실 잔의 본질에 있었다. 그분이 경험하실, 그 때의 의미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가 마시려는 잔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영화가 제시하는 것과 같은 매질이나 십자가의 육체적 고통에 있지 않았다. 그분은 세상의 죄를 지는 일의 영적인 고뇌, 즉 그 죄들이 받아 마땅한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시는 것을 두려워하셨다. 그처럼 겟세마네에서의 두려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적의에서 비롯되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으며, 하나님 보시기에 죄 되심은 그분에게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갈 3:13, 고후 5:1).
“그분은 죄로 말미암아 아버지에게서 분리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심연은 매우 넓고 매우 검고 매우 깊었으므로 그분의 심령은 그 앞에서 떨고 있었다. 이 고민을 피하기 위하여 그분은 그의 신성의 능력을 행사하지 말아야 하였다. 그분은 인간으로 인간의 죄악의 결과를 감당해야 하였다. 인간으로 그분은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어야 하였다”(시대의 소망, 686; 교회증언 2권, 213 참조).
자신의 뜻을 행하라는 사단의 시험과 십자가를 지지 말라는 시험을 물리치려는 싸움은 우리 인간이 희미하게 밖에 이해하지 못할 그런 압력이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44).
“죄의 무거운 짐, 죄의 무서운 흉악성과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게 됨을 느끼는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심장을 파열되게 하였다”(정로의 계단, 13).
1)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까지는 사단의 성격이 천사들과 타락하지 않은 세계에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었다. 대반역자는 매우 교묘한 속임수로 자기 자신을 가리웠기 때문에 거룩한 존재들도 그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의 반역의 성격을 분명히 알지 못했다.”(소망, 758)
2) “그리스도께서는 머리를 숙이고 운명하셨으나 그분은 당신의 믿음을 굳게 붙잡으시고 하나님께 복종하셨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계 12:10)다.
3)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는 그분의 자비를 손상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죄는 용서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율법은 의로우며 온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셨다. 율법에 대한 사단의 비난은 반박을 당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그분의 사랑의 명백한 증거를 주셨다.”(소망, 762)
사단은 자기의 가면이 벗겨진 것을 알았다. 그의 행적은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과 하늘 온 우주 앞에 공개되었다. 그는 살인자임이 판명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흘림으로써 그는 하늘 존재들의 동정을 더 이상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사단과 하늘 세계 사이에 연결되어 있던 마지막 동정의 고리가 끊어졌다.”(소망, 761)
그리하여 갈바리는 우주 역사에 전환점이 되었다. 예수님은 죽기 바로 전에, “다 이루었다”(요 19:30)는 승리의 외침을 외치면서 죽으셨다. 갈바리 십자가에서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적의, 완전한 선과 완전한 악이 대조되어 전시되었다. 온 우주는 사단의 원리가 어떻게 결과로 나타나는지를 명명백백히 보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은 그분의 거룩성과 공의를 유지하셨다. 그분은 죄 문제를 다루시면서 율법을 폐지하지도 아니하시고, 그 형벌을 누그러뜨리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율법의 요구 사항을 소홀히 하지 않으셨고, 그 공의로운 벌도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 모두 갈바리에서 해결되었다. “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롬 3:26) 십자가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도덕적인 토대 위에서 용서할 수 있게 해주었다.
결론 - 죄와 고통의 문제에 대한 해답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땅에 사는 우리 인간의 문제들과 죄의 우주적 딜레마, 둘 모두에 대한 답변이다. 복음주의 신학자 존 스토트 “나는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결코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 인류는 속임을 당했으며 사단의 궤변에 의하여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높이와 깊이를 알지 못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희망이 있었다. 하나님의 품성을 바라봄으로 인류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었다.”(소망, 761)
“바울에게는 십자가가 최고의 흥미를 가진 주제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하여 계시를 받았으며, 그의 생애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 그의 모든 계획과 목적이 하늘과 조화되었다. 바울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죄인이 일단 당신의 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나타난 아버지의 사랑을 바라보고 거룩한 감화에 복종할 때에는 마음에 변화가 일어나며 그 후로는 그리스도가 가장 귀중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사도행적, 245.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갈보리 그리고 십자가 / 중세 십자군 시대에 십자군전쟁에 참전했던 영국 청년 ‘길버트 베케트(Gilbert Beckett)’라는 사람이 사라센 왕국의 임금에게 사로잡혀서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임금의 딸인 공주가 그 청년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임금은 이슬람교도인 자신의 딸과 그리스도교도인 영국 노예와의 혼사를 허락할 수 없었기에 길버트 청년을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고 곧바로 영국으로 돌려보냈다. 사랑하는 애인 길버트가 떠나버리자 공주는 병들어 앓게 되었는데 아무리 유명한 의사가 다 치료를 해도 그 공주의 병을 고치지는 못하였다. 갈수록 병이 깊어진 공주는 자신의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토록 사랑하고 보고 싶은 길버트를 만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아버지에게 편지를 남긴 후 영국으로 자신의 연인인 길버트를 찾아 길을 떠났다.
그런데 공주가 아는 영어라고는 단 두 마디였는데 그것은 ‘런던’과 ‘길버트’였다. 천신만고 끝에 공주는 영국 런던에 도착 했지만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던 공주에게 있어 자신의 애인 길버트를 찾는 일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공주는 ‘길버트’라는 이름 한마디를 외워대며 하루 종일 런던 거리를 헤매고 다니게 되었고 사람들은 ‘길버트’를 목청껏 외치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공주를 보고 미친 여인으로 취급했으나 공주는 하루도 쉼 없이 계속해서 ‘길버트’를 외치며 시내를 왔다 갔다 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길버트의 하인 한 사람이 시내에 나왔다가 ‘길버트’를 외치는 여인을 보게 되었다. 이 하인은 주인과 공주와의 사실을 주인에게서 이야기 들어 아는지라 그 여인이 공주임을 알아보고 공주를 자기의 주인에게 데리고 갔다. 마침내 공주는 그렇게도 그리워하고 사랑하던 길버트를 만나게 되었고 이 두 사람의 기쁨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얼마 후에 이 두 사람은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뜻 깊은 결혼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길버트의 아내가 된 이 사라센 공주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영국교회의 위대한 인물로서 캔터베리의 대주교를 지냈으며 진리를 위해 순교한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t)’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