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나의 기도,`정말 감사합니다
임미정 - 대은심
호랑이해인 무인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IMF다 해서 모든 물가가 너무나 많이 올라
서 우리 서민들은 더욱더 삶이 힘겨워졌습니다. 이럴수록 열심히 정진하고 절약하
는 마음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백련암을 오게 된 것은 사촌 올케를 따라서였습니다. 삼천배를 하겠다
는 마음으로 집에서 하루 2백배를 두 달쯤 하고서 올라왔지만 이천오백배까지는
거뜬히 할 수 있었으나 남은 5백배는 너무나 힘이 들어서 100배씩 나누어서 겨우
삼천배를 채울 수 있었습니다. 뼈 마디마디가 너무 아파서 고통스러웠습니다. 부산
까지 오는 버스 안에서는 내내 온몸에 열이 나고 끙끙 앓으면서 왔지만 정신은 너
무 맑아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집에 와서는 일과를 계속하면서 능엄주를 어서 외워야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에 10
번씩 큰소리로 매일같이 열심히 했습니다. 그때 신심으로는 안 될 것이 없다는 생
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계획이 저에게는 용두사미격이었습니다. 우리집 처사
가 오랫동안 만성 간염으로 고생을 하다가 93년 8월에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
니다. 살아갈 날이 3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해서 정말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습니
다. 그로부터 8개월 뒤 94년 4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처사가 떠나가기 전 시동생
의 사업보증으로 사업하던 것과 집이 모두 경매 처분되고 저와 아이들은 단칸방으
로 나와 살아야 했습니다.
아이들 셋을 데리고 공부시키며 살아가기엔 저 혼자선 그일이 너무나 벅차고 힘이
들었습니다. 아이들도 매일같이 일과는 빠지지 않고 아침에 5시만 되면 일일같이
일과는 빠지지 않고 아침에 5시만 되면 일어나 일과를 끝내고 등교를 했습니다. 저
는 조그마한 가내공업을 하면서 하루일을 끝내고 저녁이면 해인선원에 나갔습니
다. 형편이 되면 나가고 그것도 계속 갈 수 없을 때는 일과만 하는 힘겨운 나날이었
습니다.
형편이 어려워 백련암 아비라 기도 역시 2년 동안 못 가고 96년 정월기도를 가려고
구정을 며칠 앞두고 준비를 하면서 저녁에는 선방에서 두 시간 정도 앉았다 오곤
했습니다. 하루는 꿈에 제가 선방엘 갔는데 선방 문이 조금 열려 있었습니다. 그래
서 들여다보니 덜컥 겁이 나서 살짝 나왔으나 큰스님께서는 어느새 제 앞에 서 계
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서 "큰스님"하고서 그 앞에서 삼배를 올리고 나
니 저만치에서 빨리 따라오라고 하시면서 앞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스님께서 너
무 빨리 가셔서 뛰어서 따라갔습니다. 한참 걸어가시며 스님께서는 계속 말씀을 하
셨습니다. 아마 백련암 올라오는 어느 길목에서 스님은 걸음을 멈추시고 "있제!" 하
시곤 "진달래꽃이 피거든 두 번 올라와서 꽃을 따먹어라!"하셨습니다. 저는 고개를
들어 산을 둘러봤더니 큰 소나무 밑에는 백련암 보살님들이 법복을 단정히 입고 모
두 합장을 하고서 많이 서 계셨습니다. 모두들 너무나 환한 얼굴로 서 계시고 그 주
위에는 진달래가 온산에 붉게 피어 있었습니다.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도 조금씩 피
어 있었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제가 감탄을 하면서 "스님, 이 꽃이 진달래 꽃이지
예"하고서 그 꽃잎을 따려고 하니 큰스님께서는 "지금은 따지 말고 태풍이 두 번 지
나가거든 따먹어라"하셨습니다. 저는 꽃이 너무 아름다워서 다른 사람들이 보게끔
조금 있다가 떠서 먹으라고 하신 것 같다 생각하고 그 꽃을 따지 않았습니다. 그리
곤 스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고는 "네, 간데이"하시길래 옆에 계시던 보살님들과
같이 합장을 하고서 "스님, 안녕히 가십시오"하고 인사를 드리고 가시는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이상하다, 지금은 제가 아프지도 않은
데 왜 큰스님께서 저에게 약을 가르쳐 주시고 가셨을까 하고는 정월 아비라 기도를
갔다왔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고 있는데 96년 3월달 쯤, 너무 피곤하고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어
일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감기도 오래 가고 목이 많이 아프고 해서
이비인후과에 갔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 진찰을 하시더니 목에 큰 혹이 있다고 하
시며 큰 병원으로 가라고 소견서를 써주셨습니다. 2차 진료기관에 가서 다시 검사
를 했더니 대학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너무 놀라 대학병원으로 갔더니 갑상선
종양, 2.5cm나 되는 혹이 성대를 박고 있어서 수술을 어서 해야 말을 할 수 가 있다
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저는
의사선생님께 돈이 안 된다는 핑계로 수술날짜를 미루었습니다. 4월 아비라기도
이후 날짜를 잡고 집으로 왔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아비라기도를 꼭 하고서 수술해야지 하고는 큰스님께서 꿈에 현몽
하신 말씀이 맞구나, 내가 아플 거라고 미리 약을 가르쳐 주셨구나 생각했습니다.
백련암을 올라오는데 길가에 혹시나 진달래가 있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이
미 다 떨어지고 꽃술만 남아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하고 원통전을 지나
서 관음전으로 가는데 백련암뜰에 진달래 참꽃 한 그루가 뒤늦게 피어 있었습니다.
저 꽃이 내 약이구나 생각하고는 관음전에다 짐을 풀었습니다. 전에 수월행 보살님
께 제 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보살님께서 꽃을 한번 따 먹어보라고 하셔
서 둘이서 꽃나무 가까이 가서 손이 닫는 데까지는 다 따먹었습니다.
다음날 아비라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오전기도를 하고 있는데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면서 소나기가 한 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소나기도 멈추었고 수월행 보살님과 저는 바가지를 가지고 꽃나무 밑으로 가서 떨
어진 꽃잎을 다 주워 모아서 깨끗이 씻어 먹었습니다. 다음 기도시간이 되어 관음
전으로 갔는데, 또 천둥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퍼부었습니다. 그리곤 휴식시간이 되
자 비가 멈춰 보살님과 저는 또다시 진달래 꽃을 주워다 씻어 먹었습니다. 큰스님
께서 꿈에서 '태풍이 두 번 지나고 나거든…'하시던 말씀과 같이 그 소나기는 두 번
으로 끝이 났습니다.
저는 그날밤 잠을 자고 다음날 몸이 가뿐함을 느꼈습니다. 아비라도 부를 수 있었
고 능엄주도 큰소리로 할 수 있었습니다. 전날은 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아
비라도 능엄주도 하지 못했는데 그날은 몸도 마음도 상쾌했습니다. 집으로 올 때쯤
에는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것 같았습니다. 집에 돌아와 이틀 후에 병원엘 갔습니다.
수술할 준비를 하고 병원으로 갔는데 의사 선생님께서 목을 만져 보시더니 혹이 없
어졌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이상하다며 동위원소 촬영을 한번 더 해보자고 하셨습
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 전에 촬영한 것과 비교해 보고서 혹이 없어져서 수술은
안 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얼마나 기쁘던지 그 자리에서 마음속으로 '큰스
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육신은 가셨지만 아직도 우리 곁에 계시면서 보
잘 것 없는 저에게 신통력으로 병을 낫게 해주셨습니다.'하고 몇 번이고 감사드렸
습니다.
그리고 두달쯤 지난 후에는 이웃에서 동사무소에다 생활보호대상자 신청을 해주셔
서 아이들 학비도 조금씩 나왔습니다. 또한 제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남구청에다
아마 수술비 신청을 했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라디오 불교방송 '거룩한 만남' 프로
에서 찾아왔습니다. 경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지방에는 오지 못하고 서울 경기지역
만 취재를 하다가 부산에는 보현희라는 모임에서 요청을 했다고 했습니다. 부산에
는 두 번째로 오게 되었다며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소개 받으려고 남구청에 들렀다
가 우리 가족을 소개 받았다며 몇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전혀 몰랐던 저로서는 "거룩한 만남에서 왔습니다."하였을 때 너무 당황했습니다.
저는 저희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시라고 거절했으나 그냥 방으로 들어오시
는 것이었습니다. 집에 있는 원상과 능엄주를 보시더니 불자집안이다 하시면서 기
독교, 천주교 신자도 너무 많이 도왔다면서 이번에는 보살님 가족을 한번 방송하자
고 하시더니 전화번호를 적어 가지고 서울방송에다 신청을 했던 것입니다. 저는 너
무 창피하고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전국에 소문을 내야 하나 하는 마음에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주에 서울 볼교방송에서 취재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방
송을 하고 나서 모금해서 모은 돈 7백 40만원을 가지고 진행하는 스님과 자원봉사
자 여러분과 저의 집에 오셨습니다.
저는 그 돈을 받았지만 큰짐을 진 것 같았습니다. 다음에 어떻게 저 빚을 갚을까 하
고 한푼두푼 정성스럽게 모금한 돈이기에 함부로 쓸 수가 없었습니다. 겁이 나고
남에게 또 빚을 지는구나 생각하니 정말 괴로웠습니다. 거룩한 만남의 진행자 스님
께서 "보살님, 이 돈을 꼭 아이들 학비에 써 주십시오"하시면서 다른 데는 쓰지 말
라고 하시길래 저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해 가을에 친정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나니 친정오빠께서
아이들 학비에 쓰라면서 이백만원을 주셨습니다. 저는 아버지 49재로 100만원은
첫재, 막재를 두 번 지내드리고 나머지는 큰아이 대학등록금으로 보태 썼습니다.
정말 너무 이상한 일은 꿈에 진달래 꽃 80%와 가을에 피는 코스모스 20%를 보았던
것같이 그해 들어온 돈이 같았습니다. 초여름에는 불교방송에서 7백 40만원, 법륜
사에서 50만원을 가을에는 친정오빠가 이백만원 해서 천만원이라는 큰 돈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큰스님께서 저의 어려움을 아시고 병도 낫게 해주시고 돈까지 보내
주신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제일 어렵게 살아갈 때 큰스님께서 그 어려운 시기를 잘 넘겨주셨습니다. 정
말 감사합니다. 큰스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또한 이 자릴 빌어 전국에서 모금
에 동참해 주신 불자 여러분, 거룩한 만남의 가족 여러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웃에게 저에게 항상 베풀어 주신 여러 불자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모두 모두 성불하십시오.
- 98년 정월 아비라기도를 앞두고 부산에서 대은심(임미정)올림 / 아비라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