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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오늘 또 급하게 또 오후 예배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정말 이렇게 아이들하고 찬양하고 또 제가 먼저 찬양하고 또 이렇게 막 정신없이 다녔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근데 사실 제가 많이 이렇게 떨립니다. 제가 수요 예배에서는 설교를 해봤지만 그것도 한 6~7개월 전이더라고요. 그래서 이 오후 예배는 우리 목사님도 계시고 우리 목사님 두 분의 목사님들과 우리 전도사님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우리 성도님들한테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할 수 있을까 지금 다리가 막 떨리고 시은땀이 나거든요.
네 지금 목소리에서 떨림이 조금 느껴지시나요? 저 많이 떨고 있습니다. 그렇게 안 보이시면 다행인데 많이 떨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해보겠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19장 1절에서부터 10절까지 말씀은 사실 삭개오라는 자가 등장하게 됩니다. 삭개오 여러분들 너무 수안이 들어서 삭개오라는 사람에 대해서 너무 잘 아시겠죠? 근데 저는 이 삭개오를 조금 다르게 보고 싶어서 오늘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이 삭개오는요 세례장이었으면서 부자라고 누가복음 19장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세리의 우두머리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그의 직책은 국민의 피를 빼앗아서 빼앗아가는 민족의 배반자라는 타이틀이 있었습니다. 낙인이 찍혀 있었는데요. 돈은 많았으나 동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엄청난 불을 얻는 대신에 사람들의 관심을 벗어나서 이런 말해서 죄송합니다. 아주 죽이고 싶은 인물이 아니었을까요? 사람들한테서는요.
근데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여리고로 들어가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려고 여리고를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근데 그 삭개오가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서 대체 예수라는 사람이 누구인가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가 하는 호기심으로 예수를 보기 위해서 달려가게 됩니다. 근데 거대한 벽들에 가로막히게 되는 것이죠. 사케오는 자신이 키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키가 작았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막 가로막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시장에 많이 갔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시장 많이 가셨죠? 지금은 대형마트 편의점 이런 게 너무 워낙 많지만 저 때는 진짜 엄마 손 잡고 가는 게 마트가 아니라 시장이었거든요. 그래서 엄마가 하는 말이 강훈아 여기 사람 너무 많으니까 엄마 손 단 뒤 잡아라 이렇게 말하시더라고요.
네. 강훈아 엄마 손 단 뒤 잡아라잉
이렇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또 어릴 때 우리 중학생 아이들 보시면 알겠지만은 말 더럽게 안 들었습니다. 그래서 엄마 손 단을 잡으려고 했는데 신발가게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신발가게를 지나가는데 너무나 막 반짝반짝하는 신발이 저의 눈을 시선 강탈을 딱 이끄는 거예요. 그리고 뒤에 바퀴 달린 뒤꿈치에 바퀴 달린 신발이 저의 눈을 강탈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엄마 손을 탁 내려놓고 이쁘다 저거 사고 싶다. 엄마한테 사달래야지 엄마 봤는데 엄마가 없는 거예요. 그러자 저보다 더 큰 아줌마 아저씨들이 저를 이상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하고 가는 거예요.
그때 엄마가 분명히 엄마 손 단디 잡아라 이렇게 했는데, 제가 그게 한눈이 팔아서 한눈이 멀면서 그냥 신발에 그냥 이끌려서 한눈을 팔게 되면서 나보다 더 큰 사람들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고 엄마 엄마가 울면서 이렇게 사실 얼마나 울었는지 기억은 안 나요? 네. 근데 그랬던 생각이 나서 아마 많이 울었을 것 같아요. 제가 어릴 때 엄마한테 내가 어릴 때 얼마나 많이 울었냐 하고 물어보니까 니가 뭐였다 이러더라고요. 네 물보였다.
근데 삭개오도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삭개오 자신이 키가 작았음에도 사람들이 앞에 있으니까 좀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을까요? 나 진짜 저 예수라는 사람이 궁금한데 내가 키가 작아서 볼 수 없다니 이런 이런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제가 엄마를 찾으려고 막 두리번 두리번거렸고, 키 큰 아줌마 아저씨들이 지나갔을 때 엄마를 찾으려고 이렇게 까치발도 들어보고 까치발 들어봤자 얼마나 높이 뜬다고 그렇죠 그렇게 삭개오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호기심이라는 그 단어가 있었기 때문에 사케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더욱더 달려나갔습니다. 그 마음이 그 삭개오가 앞으로 달려가서 보고자 했던 마음이 돌 무화가 나무 위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대단하죠. 머리를 쓴 것입니다. 이 사기가 이 세리의 우두머리, 이 세리의 우두머리라고 하는 이 세리장이 진짜 이 정도는 머리를 써야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머리를 썼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작은 호기심으로 시작된 용기가 우리도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삭개오와 같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자들은 그와 같은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리로 지나가게 내밀었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곳에 일어나 쳐다보시고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삭개오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예수님을 이제 영접하게 되는 거죠. 만나게 되는 거죠. 결실이 맺게 되는 거죠. 그래서 막 예수님을 보기 위해 발버둥쳤던 삭개오에 삭개오였는데 예수님이 삭개오를 바라보시면서 야 너 내려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거라 이렇게 말했던 것이죠. 다정하게 예수님이 삭개오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아셨을 겁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그 지역에서 유명 인사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기억할 수도 있지만 사실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은 굉장히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사랑하는 내 딸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 말도 너무나 기쁩니다. 그렇죠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내가 기도하는 와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서 사랑하는 내 딸아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 말도 굉장히 좋지만 사랑하는 내 아들 강우나 우리의 이름을 불러줬을 때 그 기쁨이 만 배가 되고 1억 배가 되고 정말 수많은 기쁨이 더 될 것입니다. 우리도 엄청 그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내 이름은 정강훈이에요. 내 이름은 뭐고 나이는 몇 살이에요?
하나님 내 이름 기억하셔야 돼요. 내 이름 꼭 불러주셔야 돼요. 이렇게 하지 않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소개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나의 이름을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예수님께서 내가 오늘 내 집에 유하야겠다 하겠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너희 집에 내가 오늘 같이 있어야 되겠다라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의 서명은요. 죄인을 불러주시고 겸손한 자를 이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약에 이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발버둥을 막 칩니다. 예수님이 나를 보시고선 나에게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이죠.
근데 갑자기 우리 집에 가야겠다고 하십니다. 모든 상황을 열어두고 볼까요? 갑자기 예수님이 우리 집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저희 집은 청소를 안 해서 좀 부끄러워요. 예수님 죄송해요. 다음에 오세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예수님 그건 좀 무슨 말 중요한 말씀 있으시면 지금 여기서 하세요. 나 예수님 영접할 준비가 안 됐어요. 우리 집에 오는 건 좀 좀 그런 것 같아요.
네 제가 지금 집에 경산 집에 안 간 지도 오래됐거든요. 경산 집에 지금 거미줄이 아마 쳤을 겁니다. 그 집에 갑자기 예수님이 온다고 하면은 예수님 제가 너무 부끄러워서 예수님 초대 못 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지금 그냥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이런 마음을 가질 것입니다.
모든 상황을 열어두면요. 그러나 예수님은 삭개오의 열심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에 머무르겠다고 말씀하신 것이죠. 여리고는 제사장의 성 중에서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제사장들 집에 머무시지 않고서 유대인 모두가 싫어했던 세리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삭개오는 버림받은 존재였는데, 사기와 같이 버림받은 자들을 찾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었고요.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또 본받아야 할 생활은 가난한 자와 병든 자, 그리고 아파하는 자들의 친구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가 급하게 내려와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데요. 그저 먼발치에서라도 예수님을 한 번 보고자 하는 그 마음뿐이었던 그 호기심뿐만이었던 그 삭개오가 지금은 그분의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서 만나보고 있다는 것이죠.
예수님과 삭개오 사이에서 친밀함의 발전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그 이상의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두드러지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머무르실 집과 집 주인에 대한 주님의 선택은 사실 사람들에게는 달가워 보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물 사람이 보고 수두근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여 들어갔도다라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이 예수님께서요 죄인의 집에 들어가셨다는 그 이유가 그들의 수근거림으로 돌아온 것이죠. 의인이기를 바라며 의인인 척하는 유대인들은 타인을 비판하기에 바빴습니다. 당시 세인들은요 죄인으로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모든 죄인들이요 아무도 그들과 교제하려고 하지 않았고요.
예수님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도 너 잘못했으니까 너 내가 싫어할 거야 이렇게 말씀하지 않고 예수님은 그에게 먼저 다가가 손 내미셨습니다. 이제껏 율법과 의를 외쳐온 유대인들은 놀람과 질투로 서로 불평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한테도 실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예수라는 사람이 어떻게 죄인과 함께 그 집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말이죠. 그들은 예수에 대한 확실한 사실을 알지 못하면서도 그들을 함께 다 묶어서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게 되고 고백을 하며 나아갑니다. 주님 이것을 보세요. 내 수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줄 것이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내가 내 배로 갚겠습니다. 말이죠. 이렇게 말이죠.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요. 예수님의 방문에 감격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참 회개를 하면서 자신의 절대적 가치였던 재물이 상대적 의미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새롭게요.
재물에 대한 자유함이나 포기가 구원의 표식에 대한 필요충분 조건은 절대 아니지만 하나님께 참으로 회개하는 자는 재물에 대한 바른 청직의 사명을 깨닫고 그것을 실행할 수밖에 없다는 누가 복음의 포괄적인 메시지가 여기서도 유효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자신을 따돌렸으나 예수님은 자신의 집에 들어왔습니다. 이 예수님이라는 분은요. 자기를 비난하지도 또 회개하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하신 말과 행동은요. 삭개오야 내가 너희 집으로 가서 같이 있어야겠구나 이렇게 다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집에 들어간 것뿐이었죠. 예수님께서 보인 이 언행은요. 조건 없는 사랑, 아무 조건이 없는 그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 행위를 하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이죠.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니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다라고 말이죠.
예수님의 권세가 현재적이고 즉각적인 표현 이 오늘이라는 단어 용어를 통하여서 나타나고 있고요. 또 삭개오가 하나님의 언약 자손임을 선언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반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 역사의 반전은 이 땅에 인자로 오신 예수님의 메시아적 사명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선포는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리 장인 그의 죄를 사하신다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허물로부터 자유를 의미하는 구원을 주신 것이죠. 삭개오에게 말이죠. 아무 볼품도 없고 키도 작고 그저 돈이 많았던 사교였음에도 예수님은 그것을 다 알고 참 회개를 통하여서 삭개오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어요. 그리고 신앙을 따르는 참 유대인임을 의미하는 말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삭개오가 죄와 허물로부터 자유는 물론이고요. 그가 진정한 믿음의 자손인 유대인임을 모든 이들이 메시아로 떠받드는 예수님을 통하여서 듣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은요.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이 잃어버린 자, 즉 잘못된 위치에 있는 자들을 찾아서 구원하려고 한다 이런 말입니다. 10절에 나와 있는 말이에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자들로서 죄와 허물로 인해 자유를 잃은 자들을 우리가 같이 기도하면서 사람으로 보살펴줘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마음으로요. 성도 여러분 눈을 한번 크게 뜨고 쳐다보세요. 눈을 막 이렇게 크게 뜨지 말고 마음의 눈을 열어서 나보다 더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은지, 나보다 더한 상처가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은지, 마음의 상처라든지 그런 회복이 필요한 정말 신앙적으로 예수님께 더 나아가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더 있는지 우리가 눈을 뜨고 확인해 보면 그런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삭개오처럼요. 발버둥쳐야 합니다. 누구를 보기 위해서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 위해서요. 제가 찬양할 때마다 찬양할 때마다 늘 하면서 늘 증거하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 목이 씌어라 씌어라 찬양해도 하나님은 하루 만에 다시 돌려주시더라고요. 제 목소리를 그렇게 학교에 가서도 진짜 수없이 많은 찬양합니다.
장신대학교 서울장신대학교 예배 찬양 새학 대학원에서 제가 예배 인도 전공을 하고 있거든요. 예배 인도 전공을 하니까 보컬들은 그냥 노래만 부르면 끝이에요. 근데 저는 지금 하는 것과 같이 할렐루야 아멘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근데 저 안에도 수많은 시련과 상처들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것들도 다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내 아들아 이 말에서 그치지 않고 사랑하는 내 아들 강훈아라고 말이죠. 내 이름을 예수님한테 고백한 적도 없었는데 우리는 이러한 사케어의 모습을 한 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남이 있었고요. 그 만남으로 인해서 사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변화가 일어나게 되죠. 삭개오가 거기 계신 예수님 나 삭개오예요. 나를 좀 바라봐줘요. 나를 좀 주목해줘요. 예수님 내 이름은 삭개요예요.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친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는 것은 이미 삭개오도 예수님의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과연 발버둥을 치고 있나요?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말씀해 주실 것이에요. 사랑하는 내 아들 누구 누구야 사랑하는 내 딸 누구 누구야 사랑하는 누구누구야 누구누구야라고 말이죠. 그 음성을 듣지 못한 성도님들이 혹시나 계시다면은 주님을 계속해서 우리가 불러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음에도 하나님 음성을 듣지 못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 부르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요. 하나님과 나의 1대 1 만남을 경험해야 합니다. 삭개오도 예수님을 만나서 회개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삭개오와 같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보다 크지는 않잖아요. 여기서 하나님보다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 다 손 드세요. 없잖아요. 우리도 삭개오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보다 키가 작고 예수님보다 키가 작고 수많은 사람들보다 세상에 잘난 사람들보다 우리가 더 작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계획 안에서 살아가고 우리의 이름과 모든 상황을 아시는 주님께 감사함으로 나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성도님들이 되길 간절히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