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개요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소백산 국립공원의 봉황산에 위치한 사찰이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이다.
2. 역사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세운 화엄종(華嚴宗) 사찰이었다.
부석사의 이름을 직역하면 '땅에서 뜬 돌'이란 뜻인데, 이는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의 설화와 관련이 있다.
의상이 당나라에 유학을 갔을 때, 그를 사모하던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의상은 승려라서 끝내 선묘의 애정을 거절했고, 의상이 신라로 귀국하자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어서 의상의 귀국 뱃길을 안전하게 지켰다고 한다.
이후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할 때 지역의 도적떼들이 이를 방해하자, 선묘가 큰 바윗돌이 되어서 하늘을 떠다니며 도적들을 물리쳤다. 그 바윗돌이 부석사 뒤뜰에 잇는 큰 바위인데, 지금도 땅에 살짝 떠 있어서 바위 밑으로 줄을 넣으면 통과된다 카더라. 그래서 절 이름이 뜰 부(浮), 돌 석(石)을 써서 부석사라고 전한다.(돌 석 자의 네모 안에 점이 하나 있는데, 바위가 하늘로 떠오르지 않도록 고정한다는 의미로 찍었다고 한다.) 이 설화에 따라, 부석사에는 선묘에게 제례를 지내는 선묘각이 있다.
삼국사기 궁예전에 의하면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립한 후 전국 시찰중에 부석사에 이르었을 때 주지승으로부터 이 곳에 신라 왕의 어진을 모셨다는 말을 들은 후 칼을 내리쳤다고 한다. 김부식은 (집필 당시인 고려 중기 기준으로) 아직도 부석사에 그 칼자국이 남아있다고 밝혔다. 2000년에 방영한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칼을 꽂은 자리에 피가 흘러 내리는 등의 무시무시한 연출도 나왔다. 후에 다른 승려들이 뽑으려 해도 뽑히지 않으나 왕건이 나서서 건들자 뽑히는 것을 보고는 주지승이 신기하게 여겨한다.
고려시대에는 흥교사(興敎寺) 혹은 선달사(善達寺)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공민왕 21년(1372년)에 주지가 된 진각국사(眞覺國師) 천희(千熙)가 크게 증축했다. 한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중 하나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과 조사당 또한 이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2018년 6월 30일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이 신청한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우리나라가 등재 신청한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등이다.
3. 가람
엄격한 양식을 가졌던 삼국시대의 평지가람(절)과 달리 산지가람이며, 보다 더 자유로운 건물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와 조선 시대로 갈 수록 점점 심해진다. 회전문, 범종각, 법당, 안양문, 무량수전의 차례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조는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부석사는 전성기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문헌과 그림 등에 나온 과거의 가람 구조가 현재와는 다르다. 1840년에 발간된 '순흥읍지'에는 10세기 중반의 부석사의 모습이 적혀 있는데, 지금은 없어진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1.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무량수전 건물보다 오래된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석등이다. 4면의 보살상과 석등의 하단의 연꽃 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고,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아주 뛰어난 걸작이다.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과 마찬가지로 본전의 중앙 앞에 놓여져 있는데, 이는 빛을 부처님의 진리의 상징으로 여겨서 석등이 본전 앞을 상징적으로 밝히는 광명등(光明燈)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면 석등이 가람 앞에 2개가 놓이는 형태로 바뀌었다. 석등이 광명등 역할을 상실하고 단순한 조명시설로 전락해버렸기 때문이다.
3.1.1. 국보 제17호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3.2.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된 목조건물로 단층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진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무량수전은 조선시대 건물과 비슷해 보이면서도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눈에 띄는데 우선 창호의 배치가 다르다. 원래 고대 건축인 삼국시대 건물에는 창호가 없었다. 당시에는 종이(한지)는 매우 소량 생산되되어 비싼 귀중품이었기 때문에 창에다 종이를 붙이기는 매우 사치스러웠다. 그래서 천이나 대나무 발 등으로 막아 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야 창호란 단어와 함께 종이를 창문에 붙이기 시작했다. 따라서 무량수전의 창호는 그 당시로서는 꽤 최신 유행을 따른 고급스러운 장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창호의 살 형태도 가장 기초적인 정자살이다. 조선시대가 된 뒤 16세기부터 한지가 대량 생산되면서 일반 가정에도 창호가 보급되었고, 절의 창호에도 각종 장식이 붙었다.
무량수전의 기둥 사이 창호는 크게 3부분으로 나뉘는데, 좌우 양쪽의 창호는 창문으로 기능한다. 그래서 들어올리는 방식으로 열리고, 가운데 두 짝의 창호는 문으로 기능하기에 좌우로 열리는 여닫이 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여닫이인 동시에 창으로 들어올리는 4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한 가지는, 무량수전은 원래 입식용 건축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무량수전 실내에 있는 나무 바닥 아래에는 원래 녹색의 유약을 칠한 벽돌인 녹유전(綠釉塼)이 깔린 바닥이 있다. 즉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건축물들처럼 실내에서 신발을 신고 지내는 입식생활이 일반적이었고, 무량수전 건축에도 반영됐다는 것이다. 그 뒤 조선시대에 들어와 온돌 등의 이유로 좌식생활이 일반화되고, 특히 절에서는 엎드려서 절을 하기 때문에 새로 나무 바닥을 깐 것이다. 현재 부석사의 성보박물관(유물관)에 원래 무량수전 바닥에 깔려있던 녹유전을 재현해 놓았다. 녹유전은 유리같이 광택이 뛰어난데, 이는 불국토의 수미산 바닥이 유리로 되었다는 구절을 형상한 것이다.
주심포 양식이란 점을 포함하여, 유난히 장식적인 부분이 적기 때문에 수수하면서도 가라앉은 느낌을 띠는 건물이다. 엣날에는 단청이나 녹유전으로 만든 화려한 바닥돌을 깔았지만, 세월이 지나며 어떤 까닭으로 인해 사라졌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현란한 단청을 싫어하는 사람이 특히 좋아하기도 하는 건물이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한국 전통 건축물 중 한 가지 전형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석사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게 '누하진입(樓下進入) '이다. 이는 누각 아래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안양루 밑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천장(안양루 바닥)에 시야가 가려지면서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낮추며 들어가게 된다. 부처님의 진신이 모셔져 있는 탑이나 서방극락세계를 뜻하는 무량수전에 몸을 낮춰 겸손함을 저절로 보이게 되는 구조다.
무량수전 내부에는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법당과 불상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도록 배치되지만 부석사 무량수전은 불단을 서쪽에 치우치게 두고 불상은 동쪽을 바라보게 배치해두었다. 또한 바닥에 상술했던 녹유전을 깔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아미타여래가 서쪽(극락세계)에서 중생들을 굽어보고 있으며 극락세계의 바닥은 유리라는 내용을 반영했다.
단, 이 불상이 아미타여래인지 아닌지에는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 무량수전은 아미타여래가 주존불로 봉안되는 법당인데, 이 불상의 수인이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는 장면을 상징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불상은 조성 양식을 봤을 때 고려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불상이 무량수전보다 대략 200년 정도 연대가 앞서게 되는 것이라 선후관계에 있어 무량수전의 본존불을 반드시 '아미타여래'라고 확신하기에는 무리가 있게 되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이 불상이 무량수전에 있다는 점과 내부 배치 구조, 그리고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에 그가 아미타여래불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어 일반적으로는 아미타여래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아미타여래가 왜 석가모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가 쟁점인데 통일신라 말, 고려시대 초(나말여초)에는 석굴암의 본존불을 모방한 불상들이 많이 만들어졌고 이 불상 역시 그런 당시의 흐름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어쨌거나 이 불상의 특이한 점 때문에 학계에 논란이 있자, 교과서에서는 쿨하게 '아미타'라는 접두사를 빼버렸다.
이와 관련해 지금은 무량수전이 부석사의 금당(절의 중심건물) 역할을 하지만 축조 당시에는 부석사의 강당이었으리란 의견이 있다. 절의 중심부가 아닌 절의 끝부분에 있거니와, 불상이 정면이 아니라 측면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 특이한 점 때문에, 아마도 과거에는 금당이 아니었지만 모종의 이유로 나중에 금당으로 역할이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선묘 낭자가 석룡으로 변하여 무량수전 앞마당에 묻혀있다는 설화를 검증하고자 1967년에 중장비를 동원하여 발굴한 적이 있었다. 그 결과 석등 밑에서부터 무량수전의 불상 아래까지 용의 꼬리 같은 형상을 한 긴 돌(암맥)이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발견 당시 이 돌은 윗부분이 깨진 채였는데, 부석사의 정기를 끊기 위해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가 끊었다고도 하고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끊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나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조선의 기운을 꺾어버리고자 조선의 산천에 풍수적 수작질을 부렸다는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01년에 역사스페셜에서 앞마당 전체와 무량수전 불상 아래까지 레이더로 탐사하여 12~13 m 남짓한, 용의 등 줄기처럼 보이는 커다란 돌이 땅 밑에 있음을 재확인하였다.
3.2.1. 여담
최순우의 유명 대중미술 서적인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덕분에, 무량수전에 배흘림기둥이 있다는 것은 유명하다. 배흘림기둥을 포함한 무량수전의 각 부분요소들은 전체적인 시각적 균형을 고려해서 실제 형태가 조금씩 왜곡되어 있다. 이러한 방법은 결과적으로 동북아시아 삼국 중에서 한국 건축에만 남은 것으로 한중일 삼국 중에서는 한국 건축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단 전 세계에서 한국만의 유일한 양식은 아니다. 궁금하면 배흘림기둥 문서 참조. 특히 이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을 배흘림 기둥으로 만든 이유는 일자로 생긴 기둥을 멀리서 보았을 때 안쪽으로 굽어보이는 착시현상을 방지하여 건물을 안정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라고 한다.
3.3. 영주 부석사 조사당
대한민국 국보 제19호
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로 345 (부석면, 부석사)
무량수전 뒤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면 나오는 건물. 의상대사가 생전에 거처했다고 하며 이후에는 초상을 모시는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무려 1377년에 세워진 건물로 무량수전만큼이나 굉장히 오래되었다. 일단 기록상은 그러한데 1201년에 단청을 했다는 기록도 있어 그보다 훨씬 더 오래됐을 가능성도 있다. 조사당 내부에는 사천왕, 보살상 등의 희귀한 고려시대의 불화가 있다.
조사당에는 정면 3칸 중 1칸을 차지하는 큰 철창이 있는데 그 안에 선비화(골담초)라는 작은 나무가 하나 있다. 내려오는 전설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았더니 거기서 뿌리가 나 지금까지 살아있다고 한다. 처마 아래에 있어 비나 이슬을 맞기 힘든데 그런 조건에서 수백 년 이상을 살아온 셈이다. 철창을 만든 이유는 이 나뭇잎을 따서 달여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고 해서, 하도 많이 잎을 따가는 바람에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단순히 전설로 치부할 수도 있고, 사실이라 해도 1300년 전의 일인만큼 믿기 어렵지만 의외로 이 나무는 이황이 지은 선비화라는 시에서도 언급된다. 이황은 1548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이 시기에 부석사에 들렸다가 남긴 시에 이 나무가 언급된다. 이 시는 지금으로부터 460년 전에 쓰여졌으니 지금의 나무가 그때도 있었다면 그만큼 오래됐다는 것이고 혹은 중간에 나무가 바뀌었다 해도 의상대사와 관련한 전설만큼은 지속적으로 유지된 것으로 보여진다.
擢玉森森依寺門(탁옥삼삼의사문) / 僧言卓錫化靈根(승언탁석화령근)
杖頭自有曺溪水(장두자유조계수) / 不借乾坤雨露恩(불차건곤우로은)
스님이 말하길, 지팡이가 신기하게 뿌리를 내렸다 하네
지팡이 머리에 저절로 조계수가 생기니, 비와 이슬의 은혜를 입지 않았네
3.3.1. 국보 제19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 (榮州 浮石寺 祖師堂)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는데, 『송고승전』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3.4.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대한민국 국보 제45호
무량수전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
소조(塑造) 불상은 목재로 뼈대를 먼저 제작한 후 흙을 빚어 붙여가며 모양을 만들고 마지막에는 금박을 덧입혀 금칠을 한 불상이다. 소조 불상이라는 조형 자체만으로도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은 형태인데 특히 이 불상은 높이 2.8 m로 현존하는 소조 불상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 가치가 매우 높아 유일하게 국보에 지정됐다.
고려 초기의 불상으로 추정되며 무량수전의 주불은 원래 아미타여래이지만 이 불상은 수인이 석가모니가 취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어서 아미타여래가 맞는지 논란이 있다. 일단은 이 불상이 무량수전에 봉안된 불상이고 불상의 배치, 남아있는 기록 등을 토대로 아미타여래로 명명되어 있다. 아미타여래가 왜 석가모니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부분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석굴암 문서 참조.
3.4.1. 국보 제45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3.5. 부석사 조사당 벽화
대한민국 국보 제46호
소재지: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 조사당 내벽에 있었던 벽화. 지금은 부석사 조사당에 가도 볼 수는 없고, 조사당 안에 있는 그림들은 스님들의 영정들이다. 벽화는 떼어내어 부석사 성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사천왕(四天王)이 6폭 벽화에 표현되어 있으며 이들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들이다. 특히 제석천과 범천은 호법신들 중 최상위의 신들로 이들의 직속부하가 바로 사천왕들이다. 이 벽화는 무덤벽화들을 제외하면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벽화로 조사당 안에 위치했던 의상대사의 초상을 보위하는 의미로 그려졌다고 한다.
사실 부석사 조사당 벽화말고도 예산 수덕사 대웅전에도 벽화가 있었어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고려시대의 벽화가 유이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수덕사 대웅전의 벽화는 20세기 중엽 한국전쟁의 동란 와중에 완전 소실되어서, 고려 시대의 벽화는 현재 남아 있는 부석사 조사당의 벽화가 유일하며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건물 보수를 이유로 떼어져 석고로 보존처리를 했는데[7],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균열이 더 생겨서 훼손과 손상이 심각해 2020년 6월부터 국립문화재연구원으로 옮겨서 2026년까지 보존 처리를 받을 예정이다.
3.5.1. 국보 제46호
부석사 조사당 벽화 (浮石寺 祖師堂 壁畵)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조사당(국보 제19호)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현재는 일제강점기에 해체 분리된 벽화를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다. 양쪽의 두 천부상은 우아한 귀족풍으로 양감이 풍만하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4. 문화재
국보 제17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無量壽殿 앞 石燈)
국보 제18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19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45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6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 벽화(祖師堂 壁畵)
보물 제220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北枝里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249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三層石塔)
보물 제255호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735호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高麗木板)
보물 제1562호 영주 부석사 오불회 괘불탱(五佛會 掛佛幀)
보물 제1636호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石造釋迦如來坐像)
보물 영주 부석사 안양루(安養樓)
보물 영주 부석사 범종각(梵鐘閣)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7호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30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三層石塔)
5. 부석사를 거쳐간 스님들
의상 - 부석사를 처음 세웠다.
종린 - 고려시대 부석사 주지를 하였다.
6. 여담
2010년대에 쓰시마 섬에서 도난당해 대한민국에 반입된 불상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부석사와는 한자가 서로 동일하다. 이는 영주 부석사와 서산 부석사 두 곳 모두 의상대사가 창건한 곳이기 때문. 영주 부석사가 676년, 서산 부석사가 677년으로 약 1년 먼저 지어졌다.
부석사 칭찬이 매우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으로는 뭐니뭐니해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이 있다. 또한 앞 책의 저자인 유홍준의 스승인 최순우가 지은 책 제목이 그 유명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이다. MBC 느낌표에서 이 책을 선정도서에 올렸던 적이 있어서, 책 내용은 몰라도 제목은 다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국내의 문학인들에게도 매우 사랑받는 명소이다. 시인 정호승이 이 곳을 탐방한 뒤 <그리운 부석사>라는 시를 남겼다. 이 시의 서두인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를 표제로 1997년 동명의 시집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소설가 신경숙의 <부석사>라는 소설도 있다. 이 소설로 신경숙은 제 2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해당 작품은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다만 소설 제목은 부석사지만, 소설에는 부석사가 나오지 않는다. 부석사를 향해 차를 타고 가는 주인공들의 여정 중 소설이 끝나버린다.
안양루 위에 걸린 부석사라는 현판은 1956년에 이승만이 이 곳을 방문하여 쓴 것인데 지금의 것은 그때 현장에서 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서울에 올라온 뒤 다시 써서 보내준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크리스천인데다 1954년에는 불교정화 유시를 내려 불교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적이 있음에도 현판은 지금도 걸려있다. 다만 이승만은 어린 시절 불자인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닌 적이 있다.
배낭여행 여행객이 찾아가기에는 교통이 불편하다. 이는 영주시 시내버스 집결지인 영주여객 차고지가 영주역과는 도보 20 ~ 30분 정도 떨어져 있고, 영주터미널과는 차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영주터미널은 풍기 경유 부석사행 버스가 다니기는 하지만, 영주여객에서 곧바로 가는 것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기차로 찾아간다면 풍기역으로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배차간격은 더 길지만, 역 바로 앞에서 버스를 탈 수 있기 때문이다. 풍기역 앞에서 27번 버스를 타면 동양대 캠퍼스를 관통하여 소수서원 - 영주 선비촌 - 순흥향교를 지나 부석사로 간다. 상당히 거리가 먼데다 배차간격이 길어 미리 시간 계산을 해둬야 낭패를 보지 않는다.
부기영화에서 국내 최고의 절밥 맛집으로 뽑혔다. 불교에서 주요 모티브를 따온 영화 사바하의 리뷰에서 절밥 맛집을 소개했다. 실제로 부석사 절밥이 맛있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소백산 등산가는 사람들이 새벽에 산에 올라 아침에 비로봉을 찍고 점심쯤에 내려와 절밥 얻어먹으러 많이 찾아온다. 부기영화 작가진이 부석사 등 여러 곳의 사찰을 가봤던 모양. 다만 2020년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일반인들에게 절밥을 제공하지 않게 바뀌었다.
7. 교통
영주 버스 27번이 1일 14회 영주여객에서 영주종합터미널, 풍기, 동양대, 부석 등을 거쳐 이곳까지 들어오며, 부석사에서 영주여객까지 소요시간은 1시간 10분 정도이다. 주말 및 공휴일에는 28번도 1일 6회 운행한다. 935번 지방도를 경유하는 55번도 1일 13회 운행한다.
8. 관련 항목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