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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 - 계명의 목적을 이루신 예수님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태복음 5장 17절).
시내산의 우레와 불꽃 가운데서 율법을 선포하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셨다. 하나님의 영광이 삼키는 불과 같이 산꼭대기에 머물고, 주님의 임재에 산이 진동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땅 위에 엎드린 채 두려운 마음으로 율법의 거룩한 교훈을 들었다. 축복의 산에서 있었던 장면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오직 새들의 노래만이 적막을 깨뜨리는 여름의 하늘 아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나라의 원칙을 설명하셨다. 그러나 이 날에 사랑의 음성으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분께서는 시내산에서 선포된 율법의 바로 그 원칙을 설명하고 계셨던 것이다. 율법이 주어졌을 때, 애굽에서의 오랜 속박 때문에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으로 감명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분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사랑의 하나님으로 계시하고 계셨던 것이다.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 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 도다 (신명기 33장 2, 3절).
하나님께서는 각 시대의 귀중한 유산으로 간직되어 온 이 놀라운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나타내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 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니(출애굽기 34장 6, 7절).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은 사랑의 원칙을 반포한 것, 즉 하늘의 율법을 땅에 계시한 것이었다. 그 율법은 중보자의 손으로 제정되고, 사람의 마음을 그 율법의 원칙과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에 의해 선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내게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출애굽기 22장 31절)라고 말씀하시면서 율법의 목적을 드러내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의 신성한 특성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너무도 자주, 그들이 공언한 순종은 사랑의 통치에 마음을 복종시켰다기보다는 형식과 의식을 따르는 것에 불과했다. 예수께서 당신의 품성과 사업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고 자비롭고 은혜로운 속성을 나타내시고 단순한 의식적 순종의 무가치함을 드러내셨을 때, 유대의 지도자들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예수께서 율법의 요구를 너무 경하게 여긴다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그분이 하나님께서 지정해 주신 그들의 봉사의 중심이 되는 진리를 제시하셨을 때, 그들은 다만 외적인 것만 보고 그분께서 율법을 파괴하고자 한다고 비난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조용히 말씀하셨으나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열성과 능력으로 말씀하셨다. 그들은 랍비들의 생명 없는 유전과 부당한 요구의 되풀이려니 하고 들었으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마태복음 7장 29절)에 놀랐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교수 방법과 그리스도의 그것에 큰 차이가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진리의 위엄과 순결과 미가 그 오묘하고 부드러운 감화력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붙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구주의 거룩한 사랑과 친절이 사람들의 마음을 그분께로 이끌었다. 랍비들은 그분의 가르치심 때문에 그들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모든 교훈의 취지가 무시되어 버린 것을 깨달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교만과 배타주의를 크게 만족시켜 온 분리의 벽을 무너뜨리고 계셨다. 그들은 만일 그냥 놓아 두기만 하면 그분께서 사람들을 그들에게서 완전히 끌어 갈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단호한 적의를 품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어떻게 하면 무리에게서 그분의 인기를 떨어뜨리고 산헤드린 회로 하여금 그분을 정죄하여 죽이도록 할까 하고 기회를 엿보았다.
산 위에서, 예수께서는 정탐꾼들에게 면밀한 감시를 받으셨다. 그분께서 의의 원칙들을 밝히실 때, 바리새인들은 그분의 가르치심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주신 계명과 반대된다고 서로 속삭였다. 구주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신앙과 제도에 대한 믿음을 동요케 할 말씀은 전혀 안 하셨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인 그가 백성들에게 전달해 준 거룩한 빛의 모든 광선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오셨다고 마음속으로 말하지만, 그분께서는 명백한 말씀으로 거룩한 계명에 대한 당신의 태도를 표명하신다. 그분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마태복음 5장 17절)고 말씀하셨다.
계명을 폐하는 것이 당신의 목적이 아니라고 선언하시는 분은 인류의 창조주이시며 율법의 시여자이시다. 천연계 속에 있는 모든 것, 곧 광선에 비치는 티끌로부터 하늘에 있는 세계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다 법칙 아래 있다. 천연계의 질서와 조화는 이 법칙을 순종하는 데 달렸다. 그러므로 지성적 존재의 생애를 주관하는 의의 큰 원칙이 있으며, 우주의 안녕은 이 원칙에 조화를 이루는 데 달렸다. 이 지구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의 율법이 존재하였다. 천사들이 이 율법의 원칙에 의하여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세상이 하늘과 조화되기 위하여서는 사람도 하늘의 법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쁘게 소리(욥기 38장 7절)할 때, 에덴동산에 있는 사람에게 율법의 교훈을 알려 주셨다.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사명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은혜로 사람들을 돌이켜 율법의 교훈을 따르게 하는 것이었다.
산 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랜 후에 성령의 감동으로 영감의 기록을 남긴 사랑의 제자는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마치 항구적인 의무에 대해 하듯 한다. 그는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한일서 3장 4절)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말한 율법이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요한일서 2장 7절)이라고 분명히 밝힌다. 그는 창조 때에도 있었고 시내산에서 다시 언급된 율법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셨다. 그분께서는 여기서 완전케 한다 는 말을, 침례 요한에게 모든 의를 이루기(마태복음 3장 15절) 위한 당신의 목적을 선언하실 때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셨는데, 그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표준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는 본을 보이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의 사명은 교훈을 크게 하며 존귀케 하(이사야 42장 21절)는 것이었다. 율법의 거룩한 특성을 보여 주고, 그 광범위한 영향력을 제시하며, 그 영원한 의무를 명확히 밝혀 주셔야 했다.
그리스도의 품성의 신성미를 두고 이야기하자면, 가장 고상하고 온유한 사람도 그분을 희미하게 반사할 뿐이다. 솔로몬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만 사람에 뛰어 난다 &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아가 5장 10-16절)라는 말로 그분에 관하여 기록하였다. 예언적 안목으로 그분을 바라본 다윗은 그분에 대해 왕은 인생보다 아름답다(시편 45편 2절)고 말하였다. 아버지의 본체의 분명한 형상이시며, 아버지의 영광의 광채이시요 극기의 구속주이신 예수님은 지상에서 사랑의 순례자로 지내시는 동안 하나님의 율법의 성격을 생생하게 나타내셨다.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하늘에서 난 사랑, 곧 그리스도 같은 원칙이 영원히 공정한 율법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예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율법에 순종 하심으로써 변경할 수 없는 율법의 성격을 증거하시고, 아담의 모든 자손이 당신의 은혜를 통하여 율법을 완전히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산 위에서 그분은 모든 것, 즉 인류와 관계되는 모든 것, 구원의 계획과 관련되는 모든 것이 성취되기 전에는 율법의 가장 작은 일획도 폐하지 않으리라고 언명하셨다. 그분께서는 율법이 결코 폐지될 수 없다고 가르치시며, 또 우리의 시계를 최대로 넓혀 그 끝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끝에 이르기 전에는 율법이 그 권위를 계속 보존하게 될 것이라고 확인하심으로써 아무도 율법을 폐지하는 것을 예수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천지가 존속하는 한, 하나님의 율법의 거룩한 원칙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분의 의는 계속 축복의 근원으로서 대지에 생기를 주는 시냇물을 흘려 보낼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은 변경이 필요 없을 만큼 완전하므로, 죄악적인 사람이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이 요구하는 표준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구속주로 오신 이유였다. 예수님의 사명은 사람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어 하늘의 율법의 원칙과 조화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때, 율법은 높여진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로마서 3장 31절)고 말한다.
새 언약의 약속은 내 법을 저희 마음에 두고 저희 생각에 기록하리라(히브리서 10장 16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그분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가리킨 표상적 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십계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 의의 원칙은 영원한 보좌와 마찬가지로 변치 않는다. 율법의 한 조목도 폐지되지 않고, 일점 일획도 변경되지 않았다. 에덴동산에서 생애의 큰 법칙으로 인류에게 알려진 그 원칙들은 회복된 낙원에서도 변치 않고 존재할 것이다. 에덴동산이 다시 지상에서 꽃 필 때, 태양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을 순종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시편119편 89절), 그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 무궁히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시편 111편 7, 8절),
내가 전부터 주의 증거를 궁구하므로 주께서 영원히 세우신 것인 줄을 알았나이다(시편 119편 152절).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5장 19절).
말하자면, 이러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은 한 계명이라도 고의적으로 범하는 자는 다른 계명도 신령과 진정으로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야고보서 2장 10절).
죄를 이루는 것은 큰 불순종의 행위가 아니고 지극히 작은 것에서 하나님이 나타낸 뜻과 충돌을 빚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이 아직 죄와 교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마음은 섬기는 바에 따라 나누어진다. 거기에는 사실상 하나님을 부인하는 일 곧 하늘 정부의 율법을 반역하는 일이 있다.
만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요구에서 떠나 스스로 의무의 표준을 세울 것 같으면, 각 사람의 마음에 따라 여러 가지 표준이 있게 되고, 주권도 주님의 손에서 빼앗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뜻이 최고의 것으로 여겨지고, 높고 거룩한 하나님의 뜻, 곧 피조물을 사랑하시는 그분의 목적은 업신여김을 받고 무시될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의 길을 택할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치에 이르게 된다. 그들은 하늘나라에서 있을 자리를 얻지 못할 것인데, 그것은 스스로 하늘의 원칙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인 사단의 편에 가담하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한 말씀이나 여러 말씀으로 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우리는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말씀 하나라도 무시하면 안전할 수 없다. 율법 가운데서 이생과 내세에서 다 같이 사람의 유익과 행복을 위하지 않는 계명은 하나도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울타리에 둘려 있는 것처럼 악에서 보호를 받게 된다. 하나님께서 구축해 놓으신 이 방호벽을 한 곳이라도 무너뜨리는 자는 그를 보호해 주는 그 능력을 파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수가 들어와서 황폐케 하고 멸망시킬 길을 열어 놓기 때문이다.
우리의 첫 조상은 한 가지 점에서 감히 하나님의 뜻을 무시함으로써 이 세상에 재난의 수문을 열어 놓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본을 따르는 사람은 하나같이 유사한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의 각 교훈은 그분의 사랑이 기초가 되어 있기 때문에, 계명을 떠나는 자는 불행과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5장 20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까지도 랍비의 의식과 관례를 무시했다는 이유를 들어 죄인으로 몰았다. 때때로, 제자들은 그들이 종교 지도자로 존경해 온 자들에게서 비난과 공격을 받음으로 난처해지고 곤란해졌다. 예수님은 그러한 기만의 정체를 폭로하셨다. 그분은 바리새인들이 매우 가치 있게 여기는 의를 무가치한 것으로 선언하셨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특별하고 충성된 백성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종교를, 구원하는 믿음이 없는 것으로 나타내셨다. 그들의 가장된 경건, 인위적 고안과 의식, 심지어 그들이 자랑하는 율법의 외형적 준수까지도 그들을 거룩하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음이 순결하지 못하고 품성이 고상하지도, 그리스도와 같지도 않았다.
율법주의적 종교는 사람을 하나님과 조화되게 하지 못한다. 바리새인의 까다롭고 완고한 정통, 즉 회개와 온유와 사랑의 결핍은 죄인들을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에 불과했다. 그들은 맛을 잃은 소금과 같았다. 그들의 감화는 이 세상을 부패에서 방지하는 아무런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일한 참 믿음은 심령을 정결케 하는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라디아서 5장 6절)이다. 그것은 품성을 변화시키는 누룩과 같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모든 것을 선지자들의 교훈에서 배웠어야 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 지고자 하는 심령의 절규와 이에 대한 답이 여러 세기 전에 선지자 미가에 의해 기록되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장 6-8절).
선지자 호세아는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호세아 10장 1절)는 말로 바리새인의 본질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지적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노라고 공언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의는 스스로의 사상에 따라 사리 사욕을 차리기 위해 율법을 지키려는 자신의 노력에 대한 열매였다. 그러므로 그 의는 그들 자신보다 더 나을 수 없었다. 스스로 거룩하게 되고자, 그들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끌어내려고 애썼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며, 그분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하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 사람의 본성은 타락하고 훼손되어 하나님의 품성과 전혀 같지 않으므로, 사람 스스로는 이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이기적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다 부정한 것 같고,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이사야 64장 6절)은 것이다.
율법이 거룩한 것은 분명하나, 유대인들은 스스로 이를 지키는 것으로써 의를 얻을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바리새인의 의와는 다른 성격의 의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완전한 율법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바로 하나님의 생명, 그분의 사랑이 그들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을 통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의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로마서 10장 3절)함으로써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청중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곧 자신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품성을 재현하는 것임을 계속해서 가르치셨다. 그것은 그분을 통해 하나님이 매일 그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