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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61. [역경의 열매] 김양수 <1-14> 어둠 속에 살다 맹학교서 찾은 ‘희망의 빛’
맹학교 새벽예배 내 신앙의 불씨… 내 안에서 발견한 ‘빛’ 세상에 전파
김양수 한빛재단 이사장이 1일 서울 강북구 한빛맹학교 교장실에서 점자성경을 읽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시각장애인들이 졸업하는 맹학교 졸업식에도 희망은 있다.
보통 장애인 특수학교 졸업식에는 학부모의 한숨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졸업하는 아이들의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한빛맹학교’ 졸업식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지난달 19일 진행된 한빛맹학교 졸업식에선 장애인들, 학부모들이 희망을 나눴다. 상급학교나 대학에 진학했다고 기뻐했고, 중도 실명한 중·장년들은 새로 배운 안마기술로 취업하게 됐다고 뿌듯해했다.
이날 한빛맹학교 교장으로 학생들에게 졸업장을 전달했지만 나도 30여년 전에는 저들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나는 약시와 야맹증을 갖고 태어났다. 고1 때는 완전히 실명했다. 이전에도 눈이 너무 나빠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보이는 것과 전혀 안 보이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실명은 내 삶의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들었다. 고1 때였으니 당장 공부를 하려면 점자를 배워야 했다. 점자는 생각보다 어렵다.
당시 나는 시각장애인으로서 살아갈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한빛맹학교를 만났다. 내게 한빛맹학교는 단순히 공부하는 곳이 아니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준비시켜준 곳이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예비하신 공간이었다.
한빛맹학교는 하나님을 만난 곳이기도 했다. 나는 실명 후 맹아원에서 지내면서 새벽예배에 참석했다. 의무사항이어서 빠지진 않았지만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그때의 예배가 내 신앙의 불씨가 됐다.
그렇게 만나기 시작한 하나님과 동행하며 나는 시각장애인이면서 시각장애인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장애인 교육과 재활을 위한 공동체인 사회복지법인 ‘한빛재단’의 이사장, 한빛맹학교 교장, 사회적 기업 ‘한빛예술단’ 단장을 맡고 있다. 한빛예술단은 안마사가 아니라 음악을 하고 싶다는 한 학생의 바람을 듣고 만든 시각장애인 예술단이다.
안마를 통해 생업을 이어가기를 원하는 장애인들을 위해 안마소인 ‘힐링센터’도 지었다. 장애 정도가 심한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경기도 용인에 중증장애인요양시설을 설립했다. 교회는 장로로서 서울 한빛교회(김하영 목사)를 섬기고 있다.
나는 어둠 속에 갇혀 살았다. 그러다 그 속에서 희망의 빛을 발견했다. 그 빛의 원천은 하나님이다. 나는 한빛재단을 통해 내 안에서 발견한 그 빛을 세상에 전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 빛이 어떤 이들에게는 희망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비전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진학과 취업으로 나타난다.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야기, 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정리=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양수 <1> 어둠 속에 살다 맹학교서 찾은 '희망의 빛'
* [역경의 열매] 김양수 <2> 일곱 살 때 술래잡기하다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
* [역경의 열매] 김양수 <3> 중학교 첫 시험부터 문제지 글자 안보여 절망
* [역경의 열매] 김양수 <4> 아들의 시각장애 인정한 아버지 맹학교 입학시켜
* [역경의 열매] 김양수 <5> 미국인 부흥사 안수 받으며 '영의 세계' 깨달아
* [역경의 열매] 김양수 <6> 시각장애인 최초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 [역경의 열매] 김양수 <7> 맹학교 후배 빨리 가르치고 싶어 대학 조기졸업
* [역경의 열매] 김양수 <8> 시각장애인으로 카이스트 박사학위 받은 동생
* [역경의 열매] 김양수 <9> 부모의 결혼 반대에 가족 몰래 짐 챙겨나온 아내
* [역경의 열매] 김양수 <10> 칙칙한 맹학교에 밀알관 신축 이어 환경개선
* [역경의 열매] 김양수 <11> "음악만 하고 싶다"는 제자들 위해 전문과정 신설
* [역경의 열매] 김양수 <12> 세계적 실력 '한빛예술단'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
* [역경의 열매] 김양수 <13> '맹학교 획기적 변화' 청와대서 직접 사례 발표
* [역경의 열매] 김양수 <14·끝> 주님 동행으로 '시각장애인 완전통합교육' 눈앞에
◇약력=1966년 경북 김천 출생. 시각장애인 첫 대입 검정고시 합격. 단국대 졸업, 서울대 대학원 석사과정 졸업, 박사과정 수료.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 초대 회장 역임. 현 한빛맹학교 교장, 한빛예술단 단장, 사회복지법인 한빛재단 이사장,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 회장, ㈔한국사회복지법인협회 부회장, 국무총리실 산하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 위원.
***[역경의 열매] 김양수 <2> 일곱 살 때 술래잡기하다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
눈이 지독히 나빠 낮에도 잘 안보여 초등학교 때 망막색소변성증 진단… 공부 잘해 그나마 위안
김양수 한빛재단 이사장이 중 1때 찍은 가족 사진. 아버지 김종삼, 어머니 최생님. 동생 용수. 한빛재단 제공나는 1966년 경북 금릉군 증산면 장전리라는 곳에서 세 살 터울의 동생을 둔 맏이로 태어났다. 금릉군은 행정구역상 지금은 사라져 버린 곳으로 아주 시골이다.
할아버지는 동네 유지셨고 5남매를 두셨다. 아버지는 막내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7세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는 사랑도 많이 못 받았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살았다. 제대로 공부할 기회도 얻지 못해 어릴 때부터 농사를 지어 가계를 도왔다. 아버지는 결혼 후 서울로 올라와 건설회사에 다녔다. 가세가 기울어진 탓에 먹고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부모님에게 나와 동생은 희망이었다. 우리는 둘 다 공부를 잘했다. 다만 둘 다 눈이 지독히 나빴다. 야맹증이 심해 밤에는 거의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나가게 되면 손으로 휘휘 저어 앞에 사물이 있나 확인하며 다녔다. 그 모습이 친구들 눈에는 동굴 속에 사는 박쥐처럼 보였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박쥐’였다.
낮에도 잘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7세 때는 오물 구덩이에 빠져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그 시절 흔한 놀이 중 하나가 ‘다방구’ 놀이였다. 전봇대 등을 거점으로 하는 일종의 술래잡기다.
그날은 내가 술래였다. 나는 친구들을 찾아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발을 헛디디면서 구덩이에 빠졌는데 오물 구덩이였다. 그 구덩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시각장애가 없는 아이들은 구덩이를 보고 잘 피해서 다녔지만 나는 그 구덩이가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늪에 빠진 것처럼 천천히 구덩이에 빠져들었다. 거의 목까지 잠겼다. 이러다 죽는구나 싶었다. 그때 내 눈앞에 긴 나뭇가지가 나타났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꽉 잡고 빠져나왔다.
근처를 지나던 어른이 나를 보고 나뭇가지를 찾아 건넨 것이었다.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몽둥이로 엄청 맞았지만 오물 구덩이에 빠졌을 때의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과 나는 초등학생 때 ‘망막색소변성증(Retinitis Pigmentosa)’이란 진단을 받았다. 어두운 곳에서 잘 보지 못하는 야맹증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시야가 점점 좁아져 실명하는 병이다.
그래도 초등학교는 다닐 만했다. 구로초등학교 시절 칠판 글씨가 잘 안 보이자 담임선생님은 나를 제일 앞에 앉혔다. 교과서 글자도 커서 공부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공부를 잘하자 부모님은 기뻐하셨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산수 시간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0’이 무엇을 나타낸 것 같니?”라고 물으셨다. 아이들은 아직 자연수나 정수에 대한 개념조차 몰랐다. 그런 아이들에겐 버거운 질문이었다. 막연한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0은 자릿수를 의미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자릿수라는 말은 어디서 들었냐”며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격려했다. 이 선생님의 격려는 두고두고 내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분은 유동찬 선생님으로 내 평생의 은사다. 어릴 때는 눈이 나빠 불편하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좋았고 신났다.
***[역경의 열매] 김양수 <3> 중학교 첫 시험부터 문제지 글자 안보여 절망
성적 떨어지자 불량학생들과 어울려… 3학년 되고서야 미래에 대해 걱정, 연합고사 준비 인문계고 진학
김양수 한빛재단 이사장(뒷줄 오른쪽)이 서울 우신고등학교 시절 생활관에서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한빛재단 제공많은 기대를 안고 중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첫날부터 좌절해야 했다. 중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에서 교과서를 받았는데 과목 수가 늘어난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교과서의 글씨가 너무 작았다. 초등학교 때 읽었던 책의 글씨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글씨를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또 이런 상황을 이해하고 나를 도와줄 친구도 선생님도 없었다. 나는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거의 첫 시험이었던 것 같다. 문제지를 받았는데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인쇄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감독 선생님께 문제지를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새로 받은 문제지도 보이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인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시험지 글자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눈이 나빠진 것이었다. “이제 끝이구나. 여기까지구나”라고 생각했다. 순간 두 아들에게 큰 기대를 갖고 살아온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일단 대충 시험을 마무리하고 앞으로 닥쳐올 인생에 대해 생각해봤다. 시각장애인으로 살아야 할 버거운 삶을 그려봤다.
지금은 여건이 좋아져 시각장애인도 충분히 공부할 수 있다. 컴퓨터 음성지원을 통해 공부할 수도 있고 ‘점자정보단말기’라는 시각장애인용 노트북을 이용할 수도 있다. 저시력 학생들은 휴대용 확대 독서기나 고정식 확대 독서기를 사용해 책을 읽을 수 있다. 본인에게 잘 맞는 보조기기를 사용하면 된다. 하지만 30여년 전에는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면 공부하고 싶어도 할 수 없던 때였다.
공부를 못해 성적이 떨어지자 주변에 소위 불량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어렸을 때는 태권도 등을 배웠고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름 몸은 탄탄한 편이었다.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들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게 없자 싸울 때는 겁도 나지 않았다. 소위 ‘학교짱’과 주먹다짐도 벌였다. 그러면서 나도 불량학생이 돼 갔다. 성적은 꼴찌에서 손가락 안에 꼽혔다.
그런데 막상 중학교 3학년이 되자 걱정이 앞섰다. 공부하고 싶었고 그러려면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이러다 갈 곳이 없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구석에 박아뒀던 교과서를 다시 꺼냈다. 친구들은 그래 봐야 소용없다고 비웃었지만 난 절박했다. 시력이 나빠 기술을 배울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은 내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답답했다.
당시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연합고사를 치러야 했다. 연합고사에서 점수가 나쁘면 거리가 먼 고등학교나 야간 고등학교에 가야 했다. 글씨를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연합고사는 양호선생님이 문제를 읽어줘서 보았다.
결과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수 있는 점수를 얻었다. 인문계 합격선 안에 들은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중학교에서는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한 자체로 한동안 화제에 올랐다. 나는 당시 동네에서 명문으로 통하던 서울 우신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역경의 열매] 김양수 <4> 아들의 시각장애 인정한 아버지 맹학교 입학시켜
대입 준비는 고사하고 활동 힘들어… 자신감 찾아준 인문계고 자퇴하고 맹학교에서 다시 배워
김양수 한빛재단 이사장의 구로중학교 졸업사진. 한빛재단 제공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내게 큰 자신감을 심어줬다. 하지만 여전히 눈은 잘 보이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오히려 힘든 부분이 더 많아졌다. 그중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 야외수업이었다. 야외수업은 중학교 때보다 늘었다. 중학교 때는 체육만 있었는데 고등학교 때는 교련이 추가됐다.
교련시간은 옷을 갈아입는 것부터 고역이었다. 정상 시력을 가진 친구들도 교련복을 갈아입고 발목보호대인 각반 등까지 차고 나가려면 휴식시간이 부족했다. 내가 제시간에 운동장에 집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눈이 잘 보이지 않아 제식훈련을 받는 것도 어려웠다. 군사훈련에 참여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공부는 둘째 치고 내겐 이런 것들이 더 큰 스트레스였다. 친구들도, 선생님도 내게 관심 가져줄 여유가 없었다. 다들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하느라 바빴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우리 두 아들의 시각장애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가 전혀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게 조금이나마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각장애는 사실이었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이처럼 힘겹게 생활하는 것을 보자 아버지도 현실을 직시하셨다. 게다가 동생 역시 점점 시력이 나빠지고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가 다량의 수면제를 구해 오셨다.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은 이 수면제를 나눠 먹고 방바닥에 나란히 누웠다. 아버지도 별말씀 없으셨고 우리도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이 세상에서의 모든 설움을 털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셨으리라. 조용히 마지막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이웃에 사는 사람이 집에 찾아왔다. 그분이 한곳에 누워있는 우리를 발견해 병원으로 급히 옮겼다. 우리는 위세척을 하고 모두 살아났다.
아버지는 이후 달라졌다. 이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일반 학교인 서울 우신고등학교에서 나를 중퇴시키고 여의도고등학교에 데려갔다. 여의도고등학교에는 약시학생을 위한 전용학급이 있었다. 그러나 학교는 내가 약시가 아니고 전맹에 가깝다며 입학을 거절했다.
아버지는 나를 종로에 있는 서울맹학교에 데려갔다. 하지만 서울맹학교는 내가 점자를 모른다며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대전에도 맹학교가 있었다. 하지만 그곳은 너무 멀었다. 그래서 찾다 찾은 곳이 서울 북한산 아래 한빛맹학교였다.
한빛맹학교는 고 한신경(1920∼1990) 권사가 설립한 특수학교다. 한 권사는 평생 시각장애인 복지와 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한빛맹학교에는 당시 고등학교 과정이 없었다. 또한 나는 점자를 잘 몰랐다. 그래서 중학교 2학년 과정부터 다시 배우기로 하고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다시 중학교 2학년 과정부터 배워야 한다고 하니 서러웠다. 아버지와 함께 한빛맹학교를 찾아간 날이 겨울이었다. 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다. 아마 당시 서러운 마음에 그 겨울이 더 춥게 느껴졌던 것 같다. 하지만 한빛맹학교에 입학한 뒤 비로소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김양수 <5> 미국인 부흥사 안수 받으며 ‘영의 세계’ 깨달아
집회서 구텔 목사가 안수할 때 특별한 체험… 하나님이 계심 확신하는 계기 돼
김양수 한빛재단 이사장이 한빛맹학교 입학 후 맹아원 후원자들에게 타자기로 감사편지를 작성하고 있다. 한빛재단 제공한빛맹학교 설립자 고 한신경 교장 선생님은 나를 특별히 아꼈다. 선생님은 내가 일반 고등학교에 다니다 왔기 때문에 잘 가르치면 뭐든 해낼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당시 한빛맹학교는 중학교 과정만 있고 고등학교 과정이 없었다. 학생들은 중학교 과정을 마치면 고교 진학을 위해 다른 맹학교로 옮겨야 했다. 교장 선생님은 제자들을 잘 키워 다른 학교에 빼앗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빛맹학교에도 고등학교 과정을 개설하려고 애를 많이 썼다.
당시 한빛맹학교의 한 선생님이 내게 한빛맹학교에서 공부하지 말고 고등학교 과정이 있는 서울맹학교에 가라고 권했다. 교장 선생님은 이를 알고 크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이 말을 한 선생님을 해고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후문이다.
한빛맹학교에 와 보니 내 장애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학교에는 나보다 장애 정도가 심하고 복합적인 이들이 많았다. 나는 이들이 측은해 용돈이 생기면 먹을 것을 사주곤 했다. 옥수수빵을 자주 사줬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보니 후배들은 나를 잘 따랐다.
한빛맹학교를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한빛맹학교의 기숙사 격인 맹아원에서 진행된 새벽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우리 집은 특별한 신앙이 없었다. 굳이 따지면 불교에 가까웠다. 교회라는 데를 다녀본 적이 없었다. 예배는 낯설었다. 또 그 시간이 아까웠다. 공부하거나 잠자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새벽예배에 꾸준히 나갔다. 그것이 학교 규율이었고 무엇보다 교장 선생님이 새벽예배 참석을 특히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84년 어느 날 특별한 체험을 했다. 나는 교장 선생님의 지시로 서울 잠실에서 열린 한 집회에 참석했다. 미국에서 오신 구텔 목사라는 분이 강사였는데 당시 이적을 자주 보여줬던 유명한 부흥사였다. 구텔 목사는 집회가 끝난 후 참석자들을 일일이 안수했다. 내 차례가 됐을 때 통역이 옆에 있었지만 영어로 이렇게 말했다.
“아임 블라인드(나는 시각장애인입니다). 벗 아임 낫 디스어포인티드 앳 블라인드네스(그러나 나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아이 원트 투 비 어 헬렌 켈러(나는 헬렌 켈러처럼 되고 싶습니다). 플리즈 기브 미 위즈덤, 커리지 앤드 인텔리전스(제게 지혜와 용기와 능력을 주십시오).”
구텔 목사가 안수하자 내 몸이 뒤로 확 밀렸다. 순간 확신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영의 세계가 있구나. 하나님이 계시구나!’
하나님은 내게 꿈을 통해서 위로해주시기도 했다. 어느 날 꿈속에서 내가 물에 빠져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물 위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삶의 역경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꿈은 생생했다.
처음에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닐 수 없어 맹학교에 온 것이 그렇게 속상하고 서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한빛맹학교에서 신앙의 토대를 세웠고 하나님을 만났다. 물론 늘 감사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역경의 열매] 김양수 <6> 시각장애인 최초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한빛맹학교 신설 고교과정 1기 입학… 고 강영우 박사 특강에 자극 받아 낮에는 학교서 밤에는 학원서 공부
1985년 8월 27일자에 실린 일간지 기사 내용. ‘김양수, 대입 검정고시 합격(맹인 수험생)’이라는 제목이 보인다.1985년 한빛맹학교에도 고등학교 과정이 생겼다. 나는 1기 입학생이 됐다. 학교는 처음에 여러모로 미흡했다. 대부분 선생님이 고등학교 과정을 가르쳐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학 진학을 위한 수업을 받을 수 없었다. 나도 준비가 안 돼 있었다. 점자를 늦게 배운 탓에 읽는 속도가 더뎠다.
하루는 한국인 최초의 시각장애인 박사로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차관보까지 지낸 고 강영우 박사가 한빛맹학교에서 특강을 했다. 나는 ‘저분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강 박사님이 연세대학교를 졸업하셨으니까 나는 한 단계 높여서 서울대학교에 가자’고 결심한 것이다.
고민이 생겼다. 고등학교 과정이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한빛맹학교에서는 서울대 진학이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고 한신경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대학 진학을 위해 낮에는 맹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학원에 다니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교장 선생님은 흔쾌히 허락하셨다.
하지만 한빛맹학교 선생님들은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맹학교에서 배우면 되지 왜 학원에 가느냐, 우리를 무시하느냐는 생각이었다. 선생님들은 내가 학원에 가는 것이 불법이라고 말했다. 당시는 5공화국 시절로 재학생은 과외가 금지돼 있었다. 맹학교 친구들의 반응도 싸늘했다. 시기하고 비아냥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한빛맹학교를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은 전적으로 내 편이었다. 모든 편의를 봐주셨고 저녁에 학원에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나는 검정고시 학원이 밀집한 서울 신설동으로 향했다. 처음에 그곳으로 가면서 시각장애인을 학생으로 받아줄 학원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고려검정고시학원 문상주 학원장님이 나를 받아주셨다. 특히 학원의 강성원 담임선생님은 나를 적극 지도해주셨다. 나는 이 학원에서 학원생 2000여명 가운데 1, 2위를 반복했다.
시각장애인 최초로 대입 검정고시를 보게 된 것도 원장님과 학원 선생님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이었다. 문 학원장님은 서울시교육청을 찾아가 민원을 했다.
1985년 8월 나는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검정고시는 서울 석관중학교에서 감독관 선생님이 문제를 읽어주는 방식으로 치렀다. 내가 처음으로 검정고시에 합격하자 시각장애인 검정고시 응시가 줄을 이었다.
이듬해인 1986년 11월엔 학력고사를 치렀다. 학력고사는 감독관이 옆에서 문제를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점자 시험지를 통해 치러야 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부족했다. 나처럼 중도 실명자는 점자로 빨리 읽는 게 쉽지 않다. 결국 문제를 다 읽지도 못하고 답안을 제출했다.
시각장애인 중에서는 성적이 전국 1위였지만 서울대에 입학하기에는 부족했다. 지금은 특별전형이라는 게 있지만 그때는 그런 것이 없었다. 교장 선생님은 단국대 특수교육학과에 가라고 했고 나는 순종했다. 선생님이 교사를 하도록 한 데는 다 뜻이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양수 <7> 맹학교 후배 빨리 가르치고 싶어 대학 조기졸업
모교에 부임후 학교 위해 고민·기도… 37세에 교장 선임돼 숱한 과제 떠맡아
김양수 한빛재단 이사장이 한빛맹학교 교사 시절 학생들과 수학여행 가서 찍은 사진. 한빛재단 제공대학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지금은 장애인을 위한 시설이 많이 갖춰져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못했다. 특수교육학과가 있는 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특수교사가 되려는 친구들이 주변에 있어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에게 계속 의지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하면 인간관계를 깨뜨린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움을 받으면 반드시 밥을 사거나 선물을 해 감사의 뜻을 전했다.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일찍부터 터득했다고나 할까.
친구들의 도움으로 나는 조기 졸업을 했다. 성적이 우수해 7학기 만에 학부를 마친 것이다. 내 안에 학교를 빨리 졸업하고 맹학교에 가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래서인지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고 내용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졸업했으니 이제 현장에 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좋은 교사가 될 자신이 있었다.
1992년 모교인 한빛맹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그런데 상황이 복잡하고 미묘했다. 그동안 기도해주시고 지지해주셨던 한신경 교장 선생님이 90년 암으로 돌아가셨다. 학교에는 이전에 나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선생님들만 계셨다.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암 투병 중에도 나와 동생 용수를 불러 장학금을 주시고 격려도 해주시곤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양수야, 네가 똑똑하니 한빛맹학교의 교장을 잘 맡아다오”라고 말씀하셨다.
서울 종로에 있는 서울맹학교에 비하면 한빛맹학교는 보잘것없었다. 지금 한빛맹학교는 학생 수가 140여명이지만 당시는 얼마 되지 않았다. 서울맹학교는 한빛맹학교를 ‘구멍가게’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한빛맹학교 학생들이 서울맹학교로 가는 예도 비일비재했다. 학생 수도 많이 줄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필요했다.
나는 설립자이자 교장이셨던 한 선생님의 유지에 따라 언젠가 교장을 맡을 것으로 생각하고 한빛맹학교의 발전을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맹학교 제자이자 후배들과 수시로 대화하며 미래지향적인 학교발전 방향을 설정해 나갔다. 내가 교장이 되면서 모토로 삼았던 ‘하나님 중심의 경영, 학생 중심의 경영, 청렴한 경영’이라는 학교 목표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2003년 한빛맹학교의 교장으로 선임됐다. 내 나이 서른일곱, 젊은 나이였다. 교장이 되고 나니 낙후된 학교 시설, 정체된 학교 분위기, 학생들의 이탈 상황 등 해결해야 할 현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고민하고 기도했다. 그즈음 아세아연합신학교 교수로 계셨던 학부모 한 분이 교장실에 찾아왔다. 장학금 50만원을 기부하면서 한빛맹학교를 위해 기도해 주셨다. 나도 모르게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나님의 격려였다. 막막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함께해주시며 도와주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김양수 <8> 시각장애인으로 카이스트 박사학위 받은 동생
17세때 실명하고도 일반대학에 진학 수학과 천체물리·철학 폭넓게 연구… “하나님은 있을 수밖에 없다”
김양수 한빛재단 이사장(왼쪽 뒷줄 네 번째)과 가족들이 1999년 한국과학기술원 학위 수여식에서 찍은 사진. 김 이사장의 동생인 용수씨는 이날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빛재단 제공10여년 전 동생 용수(47)가 지하철역 선로에 떨어졌다. 갈비뼈 서너 개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왜 우리 형제에게만 이런 시련이 닥치나”라며 서럽게 울었다. 동생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나도 지하철역 선로에 떨어진 적이 있다.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당황했다. 그 순간은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의 악몽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일이 동생에게도 일어났다는 게 가슴 아팠다.
동생은 열일곱 살에 실명했다. 나는 차마 동생에게 내가 다니는 한빛맹학교에 오라고 할 수 없었다. 맹학교에 두 형제가 같이 있다는 게 나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동생에게는 서울맹학교에 가라고 했다. 동생은 맹학교를 다니지 않기로 했다. 그냥 검정고시를 치렀다. 평소 활달하고 적극적이었던 나와 달리 동생은 내성적이었다.
동생은 순수과학에 관심이 많아 서울시립대 수학과에 원서를 제출했다. 대학 측 행정직원들은 시각장애인을 받을 수 없다고 완강히 버텼다. 아버지는 청와대에까지 민원을 넣어 동생이 시험을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대학 내에서도 공부를 한번 시켜보자는 의견이 우세했다. 동생은 실력대로 시험에 합격해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장애가 없어도 수학은 어려운 학문이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사실 불가능한 학문이다. 특수교육 대상자 특별전형이 보편화된 지금도 시각장애인들이 진학하는 학과는 거의 정해져 있다. 동생처럼 순수과학을 공부하는 시각장애인은 없다. 외국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동생은 시시때때로 주목을 받았다. 대학을 마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석·박사 학위를 차례로 취득하자 큰 화제가 됐다. 지상파 방송 세 곳이 동생을 저녁 주요 뉴스 시간에 소개했다. 심지어 대통령도 박사학위 취득을 축하하는 서신을 보냈다.
동생이 쓴 논문은 ‘F2 상위에서의 팽창치환 연구’라는, 제목부터 난해한 것이었다. 이 논문은 전자상거래에 필요한 암호체계에 관한 것으로 이를 연구하는 데는 공간감각이 필요했다. 시각장애인에게 공간감각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동생의 논문은 더 대단한 것이었다.
동생은 지금 수학을 넘어 천체물리, 우주, 철학까지 폭넓은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그가 가진 지식과 재능을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동생은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혼자 독자적인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한번은 동생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우주와 자연에 관해 연구해보니 결론은 하나님이 있을 수밖에 없어.” 동생은 자연, 우주, 수학, 노장사상 등에 빠져 아직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다. 그런 동생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 것이었다. 나는 소망한다. 동생도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함께 예배드릴 날이 곧 올 것이라고.
***[역경의 열매] 김양수 <9> 부모의 결혼 반대에 가족 몰래 짐 챙겨나온 아내
점자도서관서 만난 ‘천사표 아가씨’ 집안에서 장애인과의 결혼 반대에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
지난달 서울 한신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 찍은 김양수 한빛재단 이사장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둘째 동성, 아내 유경화, 막내 혜린, 김 이사장, 첫째 예린.아내 유경화는 점자도서를 만드는 점역사였다. 1987년 서울 상일동 한국시각장애인복지회 점자도서관에 갔다가 아내를 알게 됐다. 아내는 처음 만난 내게 기꺼이 팔을 내줬다. 보통 시각장애인을 안내할 때는 팔을 잡게 한다. 아내의 살결은 부드럽고 싱그러웠다.
아내는 천사표 아가씨였다. 대학시절 때 ‘책을 읽어 달라’ ‘책을 녹음하는 데 도와 달라’고 하면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만나기 시작했다. 자주 만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이 들고 가까워졌다. 하지만 아내와 가까워질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나는 시각장애인이고 가난했다. 동생도 시각장애인이었다. 결혼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6개월간 연락을 끊기도 했다.
나는 시각장애인대학생연합회 모임에 갔을 때 아내에게 내 마음을 고백했다. “당신을 사랑하지만 나는 맹인이고 가난하고 내 동생도 맹인이에요.” 아내는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말했다. 그해 겨울 서울 혜화동의 한 카페에서 정식으로 프러포즈했다.
아내의 부모님은 반대했다. 당연했다. 그래도 아내를 놓칠 수 없었다. 주변에선 그냥 둘이 먼저 결혼하라고 했다.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92년 2월 8일 오후 5시 서울 한빛교회에서 결혼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날 장인어른에게 들통이 났다. 아내는 가족 몰래 짐을 챙겨 나왔는데 이를 장인어른이 보셨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장인어른이 한빛맹학교에 전화를 해 알게 됐다. 장인어른이 아내를 붙잡아 집에 가뒀지만 아내는 도망쳤고 나를 찾아왔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우리는 예정대로 결혼하기로 했다. 교회 대신 주례를 하기로 한 목사님 댁에서 혼인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신혼여행을 가버렸다.
우리는 집에 가야 했지만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13일간 전국을 떠돌았다.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처가를 찾았다. 장인어른, 장모님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두 분은 모든 걸 포기하고 나를 받아주셨다.
하나님은 세 명의 자녀를 선물로 주셨다. 첫아이는 딸이었다. ‘예수님의 이웃’이라는 의미로 ‘예린’이라고 이름 지었다. 둘째 동성이는 서울대 대학원 입학시험 즈음에 낳았다. 서울대 대학원은 카이스트 석사를 졸업하고 박사과정에 입학한 동생 용수의 권유로 공부를 시작했다. 아내는 둘째를 임신한 몸으로 나를 도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입학시험 3일을 앞두고 병원에 들어가면서 “나는 이제 쉬러 병원에 갑니다”라고 했을까.
셋째는 내가 박사를 수료하고 8년 뒤 낳았다. ‘어진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혜린’이라고 불렀다. 현재 큰아이는 이화여대 4학년, 둘째는 한동대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막내 혜린이는 서울 불암중 1학년이다. 다들 기특하고 대견하다. 모두 아내 덕분이다. 이 기회를 빌려 아내에게 말하고 싶다. “그동안 고생 많았소. 사랑하오.”
***[역경의 열매] 김양수 <10> 칙칙한 맹학교에 밀알관 신축 이어 환경개선
밀알관엔 음악 교육 공간까지 마련… 증개축도 순탄하게 완공 랜드마크로
2004년 한빛맹학교의 밀알관 공사 현장. 건평 4958㎡ 규모로 50여억원이 투입됐다. 작은 사진은 완공된 밀알관 모습.이전 한빛맹학교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칙칙했다. 4층 건물 위에 가건물이 있었는데 원래 건물도, 가건물도 디자인이라고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눈이 잘 보이는 직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학생들이 시각장애로 볼 수 없다고 해서 학교의 외형과 분위기가 아무래도 좋은 것은 아니었다.
교장인 나는 전국 최고의 특수학교를 목표로 건물을 고치기로 했다. 허가도 허가지만 건축비가 없었기 때문에 정부 지원이 절실했다. 나는 교육청과 교육부를 찾아가 도와 달라며 호소했지만 모두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가고 또 찾아갔다. 그렇게 해서 2004년 특수학교 환경개선사업 차원으로 한빛맹학교 건물이 새로 지어졌다.
신축 건물은 건평 4958㎡(약 1500평) 규모로 50여억원이 투입됐다. 이곳에 연주도 할 수 있는 음악 전문 교육공간을 마련했다. 한빛맹학교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이 건물을 ‘밀알관’이라 불렀다.
증개축도 추진했다. 연이어 큰 공사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인허가부터 모든 게 순탄하게 풀렸다. 총 공사비 150억원이 들어간 두 건물은 현재 지역의 랜드마크가 됐다.
나는 시각장애인이라서 건축을 대충 한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설계 단계부터 꼼꼼하게 챙겼다. 설계도면의 선 위에 끈을 올려놔 달라고 해서 이를 손으로 만져 설계도면을 머릿속에 넣었다. 공사 때는 현장에 가서 손으로 벽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계도면과 비교했다. 설명을 듣고 잘 모르겠다 싶으면 이해될 때까지 질문했다. 나는 이런 내 모습에 놀라기도 했다. 내 안에 집요하다 싶을 정도의 집념이 있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2008년 8월 중증장애인 생활시설을 건립할 때도 최선을 다했다. 이 시설은 시각장애인 외에 다른 장애를 가진 이들도 생활할 수 있는 곳이다. 서울에서 가까운 장소가 필요했고 후보지를 고르기 위해 2년간 500여곳을 찾아다녔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의 양지바른 큰 길 가에 세웠다. 바로 ‘효정비전타운’이다.
건축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3년간 이런저런 건물을 건축한 것은 주변의 많은 분들이 함께 수고해줬기에 가능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전적인 도움이 있었다. 이들 건물은 나와 시각장애인들을 격려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시다는 증거였다.
한빛맹학교 학교기업인 ‘한빛힐링센터’ 이야기도 하고 싶다. 전국시각장애학교장협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시각장애인의 안마업 독점이 위헌 시비에 걸렸다. 만약 위헌으로 결정되면 시각장애인들은 일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었다. 안마 직업교육을 시키는 맹학교에도 직접적인 타격이 불가피했다.
맹학교 교장들은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 대책의 하나로 맹학교에 학교기업을 만들기로 했다. 재학생에게 직업교육을 하고 졸업생들에게 일자리도 줄 수 있는 대책이었다. 이 일을 회장인 내가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육부가 추진하는 장애학생 진로·직업교육의 일환으로 특수학교 학교기업이 생겼다. 한빛힐링센터는 이때 특수학교 학교기업 1기로 선정됐다.
***[역경의 열매] 김양수 <11> “음악만 하고 싶다”는 제자들 위해 전문과정 신설
음대 진학 대신할 2년제로 인가 받아… 졸업후 취업시킬 오케스트라도 구성
2005년 초창기 한빛예술단의 브라스밴드 공연 장면.전국의 많은 맹학교에 브라스밴드가 있다. 시각장애인 중에는 절대음감을 가진 이들도 많고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도 많기 때문이다. 이들 브라스밴드는 교내외 행사에서 많은 호응을 얻기 때문에 활동도 활발하다.
우리 한빛맹학교에도 1980년대부터 브라스밴드가 있었다. 브라스밴드 연주는 취미활동이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하면 활동도 그만뒀다.
내가 막 교장이 됐을 때 한 시각장애인 중학생 제자가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저는 트럼펫 부는 게 너무 좋아요. 시각장애인이지만 안마하며 살고 싶지 않고 죽을 때까지 트럼펫을 불고 싶어요.”
음악만 하고 살려면 우선 음대에 진학해야 한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뿐 아니라 모든 장애인들이 대학에 가서 공부하는 게 쉽지 않다. 특히 음악 분야는 더 그렇다. 시각장애인 학생을 받아주지 않는 학교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공부 잘하고 연주를 잘해도 지휘자를 볼 수 없다면 협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 친구의 꿈을 키워주고 싶었다. 그래서 음대에 진학시키고 싶어 시각장애인이 갈 만한 음대를 찾아봤으나 뽑는 인원도 적고 들어가서 배우기도 힘들었다. 시각장애인이 들어갈 수 있는 전공과는 안마를 더 전문적으로 배우는 곳뿐이었다.
그래서 아예 우리 학교에 음악 전문과정을 만들기로 했다. 나는 교육청을 찾아가 일본처럼 시각장애인들이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전문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 결과 2004년 특수학교로서는 전국 최초이자 유일하게 2년제 음악전공과 과정 설립 인가를 받았다.
교원을 배치하고 커리큘럼을 만들고 교육공간을 확보했다. 학생 중에는 40, 50대도 있었다. 음악에 관심과 열정이 있었지만 갈 만한 대학이 없어 음악을 포기했던 이들이었다. 우리 음악전공과는 빨리 자리를 잡았다.
졸업생 중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한 학생도 있었다. 서울시립대를 비롯해 서울 시내 유수의 음대에 편입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대학을 졸업해도 갈 곳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우리 전공과에서 음악을 공부한다고 해서 지휘자를 볼 수 없는 것이 달라지진 않았다. 지휘자를 볼 수 없다면 일반 오케스트라에 가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오케스트라를 만들었다. 한빛예술단이다. 단원들에게는 최저임금 이상의 급여를 주기로 했다. 전문대 과정도 만들고 오케스트라도 만들었는데 넘어야 할 산이 또 있었다.
제자는 계속 배출됐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인원은 한계가 있었다. 시각장애인 40∼50명에게 꾸준히 최저임금 이상을 준다는 것이 힘든 일이었다. 수익활동이 필요했다.
그때부터 나는 더 바빠졌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찾아 나섰다. 일본도 방문했다. 일본은 우리보다 앞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악전공과를 운영했다.
일본은 음악교육 과정은 잘돼 있는데 음악을 전공하려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취업할 수 없으므로 학생들이 외면했다. 결국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그들이 일할 여건을 만드는 것이라는 점만 확인하고 돌아왔다.
***[역경의 열매] 김양수 <12> 세계적 실력 ‘한빛예술단’ 사회적 기업으로 성장
40∼50여 장애인 월급 받으며 연주… 올해 독일서 파독 광부 등 위해 공연
한빛예술단이 2011년 10월 7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제6회 정기연주회를 하고 있다.장애인 예술 활동은 시장논리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지탱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회적 뒷받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올 1월에 장애인 생산품 우선구매 대상에 공연예술 분야가 처음으로 선정됐다. 각 기관이 의무적으로 구매해야 하는 중증장애인 생산품에 공연예술이 포함된 것이다. 공연예술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한빛예술단으로서는 더없이 좋은 소식이다.
한빛예술단은 한빛맹학교 동아리에서 출발했지만 현재는 어엿한 사회적 기업이다. 수익을 창출해 단원들에게 월급을 주고 있다. 한마디로 프로다. 한빛예술단의 음악적 수준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다. 우리 정기연주회에 이명박 전 대통령이 감상하러 온 적도 있다.
단원들은 각종 공중파 방송 프로그램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SBS 케이팝스타·스타킹, KBS 열린음악회 등에 출연했다. KBS 문화초대석에서는 한빛예술단이 정기연주회를 하기도 했다. 지난 10년간 장애인의 날 기념행사의 의전 연주는 모두 한빛예술단이 했다.
해외에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의 케네디센터와 로스앤젤레스에서 교민초청 무대를 가졌다. 일본·중국·홍콩·베트남·필리핀 등에서 초청 연주회도 했다. 지난해 7월에는 클래식 음악의 본 고장이랄 수 있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연해 호평을 얻었다. 올해엔 파독 광부나 간호사를 위로하기 위해 독일 방문 공연도 계획하고 있다.
이전에는 공중파 방송에 출연하고 해외 초청 공연을 하는 일은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하나하나 이루어지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 단원들은 날마다 예배로 하루를 시작한다. 저마다 독실하기 이를 데 없다. 나도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단원들에게 이야기하고 기도를 부탁한다.
우리 시각장애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더 하나님을 의지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은혜요, 더 많은 축복을 받게 되는 이유다. 돌이켜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가능한 일이 하나도 없었음을 고백한다.
지금도 한빛예술단의 수입이 많은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40∼50여명의 중증장애인에게 최저생계비 이상의 급여를 주려면 웬만한 중소기업 수준의 매출을 올려야 한다.
우리는 해마다 연초가 되면 걱정을 한다. 단원들에게 월급을 줄만큼 수익을 올릴 수 있을까 걱정한다. 하지만 한 해가 지나갈 때쯤 되면 걱정은 감사로 변한다.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께서 한빛예술단을 통해, 한빛예술단을 위해 하신 일들을 보면 인간이 계획하고 진행하려 해도 절대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적이다. 나는 한빛예술단이 믿음의 공동체로 운영되는 한, 하나님이 철저하게 간섭하시리라 믿는다. “주님 감사합니다. 한빛예술단을 통해 기도하게 하시니, 찬양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역경의 열매] 김양수 <13> ‘맹학교 획기적 변화’ 청와대서 직접 사례 발표
장애인 관련 단체·위원회서 활동… 정책 방향·의제 설정에 적극 참여
김양수 이사장이 2007년 3월 서울 한빛교회(김하영 목사)에서 장로로 장립된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가운데가 김 이사장 부부.나는 타고난 워커홀릭(workaholic)이다. 평소에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끊임없이 계획해야 한다. 일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끊임없이 일을 하다 보니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학교를 발전시키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2006년 5월 스승의 날에 ‘근정포장’을 받았다. 단기간에 학교를 혁신적으로 변화시켜 같은 해 5월 17일에는 청와대에서 직접 사례발표를 하기도 했다.
또 이런저런 직함도 맡게 됐다. 2007년 3월부터 5년간 전국시각장애학교장협의회의 회장을 맡았다. 시각장애인교육 현안 해결에 나섰다.
2012년 3월에는 직접 선거로 치러지는 제27대 ㈔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한특총)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
상대는 전 한특총 회장이었던 터라 쉽지 않은 선거였다. 하지만 젊음과 패기, 그리고 열정으로 회원에게 호소한 결과 총투표자의 73.3%를 득표해 역대 최연소이자 장애인 최초로 한특총 회장에 당선됐다.
한특총 회장으로 일하면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장애인 교육에 임하는 교직원들이 더욱 전문성을 가지고 즐겁게 일할 수 있는 풍토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자랑스러운 특수교육인상’을 제정하고 전국 단위로 특수교육 직원들이 교류할 수 있는 행사도 다수 진행했다. 그뿐만 아니라 특수교육 교사를 충원하고, 특수교육 관련법을 개정하기 위한 노력도 지속적으로 기울였다. 그 결과 제28대 회장에도 당선돼 현재 연임하고 있다.
2012년 8월 장애인 문화예술 진흥을 위해 관련 단체들을 모아 ㈔한국장애인문화예술단체총연합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회장으로서 장애인문화예술경진대회, 장애인문화예술축제 등을 개최하며 문화예술 분야에서 장애인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4년 3월부터는 국무총리실 산하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국내 장애인정책의 입안과 결정에 자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에는 국무총리, 국무위원, 민간 자문위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나는 이 위원회에 참가하면서 장애인 정책의 방향이나 의제를 설정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곳에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장애인들을 만나 여러 주제에 대해 논의하면서 장애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더 풍성해졌다.
이렇게 바쁜 일정을 살다 보니 2014년 4월 한 일간지는 ‘10년 뒤 세상을 바꿀 100인’의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나를 선정했다. 내로라하는 분들과 함께 이름이 거론돼 깜짝 놀랐다. 앞으로 그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겠다는 책임감도 느끼게 됐다.
최근에는 기독교계에서 ㈔한국기독실업인회(CBMC)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같이 기도하고 헌신하고 있다. 금요일마다 조찬기도회에 참석하는데 이 시간이 요즘 너무 기다려진다.
길지 않은 삶이지만 이제까지 달려오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사람이 자기 일을 계획해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다’라는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양수 <14·끝> 주님 동행으로 ‘시각장애인 완전통합교육’ 눈앞에
내년 영·유아 특수학교 개교 예정… 불가능을 가능케 하신 주님 계획 열매 맺도록 최선 다할 것
2009년 서울시 특수학교 교직원체육대회에 참가한 한빛맹학교 김양수 교장(뒤줄 가운데)과 직원, 학부모.나는 사실 꽉 막힌 사람이다. 좋은 말로 하면 이성적인 사람이다. 웬만한 논리가 수반되지 않으면 신앙을 갖기 어려운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다. 그래서 젊은 시절 한 부흥집회에서 강한 성령 체험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은혜를 베푸셔서 나를 인도하고 계신다. 앞으로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에 더욱 순종해 내게 맡겨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할 것이다.
우리 한빛맹학교에는 시각장애 유아를 위한 학급은 있었지만 영아를 위한 학급은 없었다. 부모들이 계속 요청했지만 여건이 안 됐다. 영아학급을 만들려면 법적으로 부지가 확보돼야 한다. 법을 개정하려 했지만 그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 이를 기대하던 부모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한빛맹학교 인근의 부지 330여㎡(약 100평)를 매입해 시각장애 영·유아 특수학교를 만들고 있다. 영아학급을 새로 만들면서 두 학급을 모아 영·유아 특수학교를 설립하는 것이다.
전체 예산 25억원 이상이 소요될 예정인데, 이 사업을 진행하면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 있다. 주변의 크고 작은 도움들이 모여 공사비가 점점 채워지고 있다. 이를 보면서 인간의 계획은 단지 계획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각장애 영·유아 특수학교는 내년 3월 개교한다. 이 학교는 감각 장애 영·유아교육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다. 특히 한빛맹학교가 시각장애인의 완전통합교육을 실현하게 되면서 시각장애 교육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 것이다.
한빛예술단은 이제 자립을 넘어 선교사역을 위해 일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재능을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 1월 ‘희귀난치성 환우 돕기 신년음악회’에서 연주했고 올 3월에는 ‘라이프호프’와 ‘생명보듬 희망음악회’를 공동 개최해 자살예방 캠페인에 동참하고 있다.
한빛예술단은 앞으로 북한 장애인을 섬기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북한 동포들의 열악한 삶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장애인의 삶이야 오죽할까. 그들의 삶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막힌 것처럼 답답하다.
나는 남북이 통일되면 북한에 특수교육학과가 있는 대학을 설립하고 싶다. 기회가 된다면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북한 동포들에게 나눠주는 일에 나머지 삶을 헌신하고 싶다.
시각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비장애인으로 사는 삶의 70∼80%를 포기하고 사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만큼 힘들다. 내가 처음 한빛맹학교에 발을 디뎠을 때가 생각난다. 몹시 추웠고 쓸쓸했다. 그 막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희망의 빛을 발견했으며 비전을 세우고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한빛재단 소속 가족들이 늘 나와 함께하고 있다.
며칠 전만 해도 날씨가 꽤 쌀쌀했지만 지금은 봄기운이 돈다. 내 삶도 봄을 맞은 기분이다. 지난겨울은 몹시 추웠다. 때로는 영하 수십도까지 떨어졌다. 폭설로 인해 고립되기도 했다. 하지만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는 법이다. 그동안 겨울을 버텨내기 위해 애썼다면 이제는 새싹을 피우고 전적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주님 안에서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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