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
Everything is Made from the Mind Alone 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는 우주 자연의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현상이라는 불교 유심론과 유식사상의 개념이다. 일체유심조와 능화제세간(能畫諸世間)은 마음(心)의 의식(識)을 절대화한다. 마음을 중심으로 인간 내부와 외부를 이해하는 기본개념인 일체유심조는 석가모니의 유아독존에서 유래한다.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에 나오는 ‘천상에서나 땅에서나 나 홀로 존귀하다. 모든 세상이 고통에 잠겨 있으니 내가 마땅히 편안케 할 것이다(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의 유아독존적 유아(唯我)가 나의 마음이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우주 자연의 모든 것과 나 자신까지도 나의 마음 안에 있다는 뜻이다. 마하야나 불교에서 수냐타(Sūnyatā) 공(空, emptiness)을 완성한 나가르주나 용수(Acarya Nagarjuna 龍樹, 150~250)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실재하지 않는 가상이다. 이것은 마음이 자기 자신과 우주 자연을 만든다는 뜻이다.
우주 자연의 모든 것은, 자성(自性)이 없는 연기(緣起)의 일시적인 현상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마음의 작용 때문이다. 마음의 작용이 식(識)이다. 마음의 식은 현상을 실재(實在)로 오인한 다음, 나타난 현상을 차별하고 경계 짓는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도 존재하고 저것도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이 만든 현상이고, 인간은 그 현상들을 나누어 경계 짓고, 차별하여 분류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우주라는 또 다른 가상을 만든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한 개념이 일체유심조다. 일체유심조는 [화엄경]의 게송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若人欲了知(약인욕료지) 만일 어떤 사람이 알고자 하면,
三世一切佛(삼세일체불) 삼세 일체의 부처를.
應觀法界性(응관법계성)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응시해야 한다,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
이 게송은 인식론과 존재론을 시적으로 표현한 다음 일체유심조를 결론으로 제시한 오언절구다. 원래 [화엄경(華嚴經, Avataṃsaka Sūtra)]은 고대 인도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작성된 경전이다. 이것을 당대(唐代)에 한문으로 번역할 때 송찬(頌讚)의 형식을 살려서 오언절구로 표현하면서 일체유심조가 상징적 개념이 되었다. 산스크리트어 원전 [화엄경] 자체도 은유와 상징이 많고 번역할 때도 문학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일체유심조는 직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일체유심조의 진정한 의미는 해탈과 열반으로 나가는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판본 중 당대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가 699년에 번역한 4만 5천 게송, 39품으로 구성된 [80화엄경]이 가장 많이 읽힌다.
일체유심조는 삼세, 불, 법계의 진리를 깨우친 상태를 말한다. 첫째 삼세는 전생의 과거세(過去世), 현생의 현재세(現在世), 내생의 미래세(未來世)다. 삼세는 현재의 나를 중심으로 하는 시간개념이다. 둘째, 불(佛)은 진리를 깨달은 성스러운 존재인 부다(Buddha) 또는 불타(佛陀)를 말한다. 불은 석가모니만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의 깨우친 존재들을 지칭한다. 불에는 보편적 본질과 절대적 진리라는 의미도 들어 있다. 셋째 다르마 법계(dharma-dhātu, 達摩馱都)는 인식의 대상인 모든 것을 말한다. 현상세계를 의미하기도 하고 현상세계의 본질인 (형상이 없는) 진여(眞如)를 의미하기도 한다. 법계성(法界性)은 우주 자연의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일시적 현상임을 의미한다. 삼세, 불, 법계를 인식하는 주체는 마음이다. 대상을 인식하고 차별하고 경계 짓는 것도 마음이다. 따라서 나를 포함한 모든 것은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식(識, cognition) 또는 인식은 대상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얻은 지식이나 지식을 얻는 과정 즉 ‘무엇을 아는 것’이다. 화엄사상에서는 나 자신도 실재가 아닌 일시적 현상이므로 마음이 인식한 것 역시 일시적 현상이다. 사실 마음도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진여의 진리는 공(空), 허(虛), 적(寂), 무(無)다. 일체유심조는 법계(法界)의 모든 것은 마음이 일시적으로 만든 현상, 허상, 가상임을 알려주는 교훈적 의미가 있다. 여기서 ‘나의 인식’인 코기토(cogito)의 주체 문제가 생긴다. 데카르트가 말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생각하는 나의 존재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극장에서 상영되는 모든 것이 허상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존재한다. 현대철학에서 보면, 일체유심조는 뇌신경이 모든 것을 만든다는 통 속의 뇌(Brain in a Vat, 缸中之脑)와 유사하다.★(김승환)
*참고문헌 老子, 『華嚴經(Avataṃsaka Sūtra)』.
*참조 <공/수냐타>, <관념론>, <리얼리즘/실재론[철학]>, <마야 환영>, <마음>, <무>, <석가모니 고타마 싯다르타>, <색즉시공>, <유식사상>, <의식>, <인드라의 그물>, <인식>, <적멸의 니르바나>, <제법무아⦁무아설>, <제행무상>, <주관⦁주관성>, <중관사상>, <통 속의 뇌>, <화엄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