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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제9회 지리책읽기대회 수상작 - 덕분에좋은세상
수상자: 광주 광덕고등학교 3학년 노*우
참가도서: <전쟁과 학살을 넘어>
결과물 종류: 소설
<결과물 소개>
독서란 한 페이지를 3시간 동안 들여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독’이란 문장과 맥락에 담긴 저자의 사고과정을 온전히 읽어낼 수 있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글자이다. ‘서’란 이러한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대상에게만 허락되는 글자이다. 읽음은 또 다른 사고로, 사고는 존재와 인식으로 다시금 피어난다. 이 책을 읽고 단순히 사건의 나열과 논제 해결의 주장을 도출하는 것은 큰 오독이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단순 지정학의 내용이라고 파악하기보단, 평화이며 인류 보편가치의 회복에의 흐름에 집중했을 때 비로소 독서로서의 전달에 가치가 있을 것이다. 평화와 인류 보편가치라는 아름다움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처절하고 잔혹한 삶들에서 비롯한다. 삶의 예술성이란 바로 이러한 것들을 가리키는 말 일지도 모른다. 다툼이 없다면 우리는 평화를 이야기할 수 없다. 기만이 없다면 신의를 이야기할 수 없다. 증오 없이는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기에 어떠한 크나큰 아픔을 막으려는 행위는 언제나 개인적 욕심으로, 순수를 앞세운 권력으로 변모하기 쉽다. 집단의 한계이자 공공의 모순인 것이다. 순수한 아름다움. 인류 보편의 가치. 우리가 진정으로 평화를 노래하기 위해선 이러한 것들을 지극한 ‘우리‘의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것은 언젠가 잊혀질 것들과 함께, 아련히 가슴 한켠에 자리잡고는, 미련한 사랑을 꽃피운다. 망자에 대한 기억과 축복을, 언젠가 찾아올 행복을 노래하는 꽃을 말이다. 모두를 위한 개인의 꽃을 피워내는, 생존을 넘어선 실존. 실존을 통한 인류 평화의 회복을 위해 담담히 순교의 길을 걷는 이름 모를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다. 이는 저자의 물음에 대한 독자로서의 답변이자 세계 시민으로서의 목소리이다. 각 소재들이 상징하는 해설을 달기엔 칸이 적어 차마 다 담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랍니다.
쓰라린 눈을 뜨자, 분진 가득한 방 안이었다. 벽이 무너져 햇살이 내리었다. 불쾌한 감각이 입안에 아렸다. 두어 번 가래를 모으듯 피를 머금고는 이내 바닥에 뱉었다. 바닥은 검게 그을려 불타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소년은 크게 심호흡을 여러 번 하고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장롱이 있어야 할 자리엔 불탄 흔적만이 아슴푸레 엿보였다. 창문 쪽 벽에 붙어있던 책상과 의자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살피며 흥분을 서서히 잠재우고서, 어젯밤 함께 눈을 붙인 가족들을 찾아 나섰다. 분명 자신이 자는 사이 갑작스럽게 시작된 폭격에 가족들이 저를 깨울 틈도 없이 어딘가에 훌쩍 숨어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 외의 불안한 가능성들을 애써 머릿속에서 떨어뜨리고자, 소년은 입술을 깊게 깨물었다. 코와 혀끝에서 옅은 훈제 고기 향이 느껴졌다. 소년은 이윽고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선 황급히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1층에는 소년의 가족이 운영하던 꽃집이 있었다. 여기저기 흩뿌려진 꽃잎들은 기묘하게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샛노란 빛의 천수국만은 제 자리에 오도카니 누운 채 오묘한 빛깔을 자랑하고 있었다. 소년은 잠시 자신이 더욱 비참해짐을 느끼곤, 이내 재빠르게 꽃에서 눈길을 돌렸다.
찬찬히, 그리고 유심히 화장실과 부엌, 현관과 거리를 넘어 마찬가지로 폐허가 되어가는 이웃집을 모두 뒤졌다. 그러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이 거리에 폭격을 피해 숨을 공간이 있을 턱이 없었다. 소년은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가슴 한 켠 에서 벽이 무너지는 듯 했다. 소년은 떨려오는 다리를 애써 부여잡고선 다시 2층의 방을 향했다. 방 문 앞에서 소년은 한참을 망설였다. 혹여 자신이 미처 뒤지지 못한 곳이 있진 않을까 다시 한 번 되새겼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었다. 양 손으로 얼굴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쓰라렸던 눈의 상처에서 끈적한 촉감이 느껴졌다. 속이 어지럽게 붕 떴다. 다리와 함께 이 부실한 복도도 붕괴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을 열면 마주해야만 할 것 같은, 아까의 정신적 혼란 속에서 미처 알아채지 못한 참상으로부터 소년은 도망치고 싶었다. 숨이 목 밑까지 차올랐다. 소년은 거친 숨을 내몰아 쉬었다. 눈이 내려오는 겨울임에도 그의 이마는 긴장과 불안으로 흥건했다. 소년은, 속으로 아까의 끈적한 촉감이 피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가벼운 안도를 위안 삼았다. 느끼하고 씁쓸한 용암이 뒤엉킨듯한 속에 한 방울의 냉수가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스쳐가는 듯 한 안도를 뒤로하고, 소년은 어제의 잠자리에서 눈이 감기기 까지의 찰나를 떠올렸다. 아마 폭격도, 그 이후의 난장판이 만들어진 것도 찰나였으리라. 결단이 필요했고, 이 역시 찰나의 용기가 필요했다. 한차례 얼굴을 쓸어내린 후, 소년은 거칠게 문고리를 잡았다. 김새는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은 맥없이 열렸다. 삐걱거리는 경첩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렸다. 그는 가능한 침착하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엉망이 되어 흩어진 넝마들이 자신의 가족임을 알아보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소년이 지옥과도 같았던 방에서 벗어난 것은 다음날 점심 즈음이었다. 소년은 마을을 떠나기 전 생존자들을 찾아 나선 마을의 주민들에 의해 자신의 방 침대 위에서 발견되었다. 가벼운 화상과 알 수 없는 복통. 그리고 갑작스런 삶의 붕괴는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소년이 견디기엔 너무도 버거운 것이었다. 소년은 문을 열고 나서 침대에 앉아, 내면을 울력해오는 무언가를 간신히 피로로 덮어 씌워야만 했다. 그리고선, 땀인지 눈물인지, 아니면 부엌을 뒤지다 묻은 잿물인지 모를 것을 연신 닦아내고는 이내 잠에 취해 쓰러졌던 것이었다.
정신을 차린 소년에게 피난민을 모은 이장이 입을 열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나? 괜찮은거야?“
소년은 반사적으로 뻐근한 몸을 일으켜 고개를 끄덕였다.
“웃 놈들이 마을에 폭격을 가했다. 가만히 있다간 언제 개죽음을 당할지 모른다. 시간이 없어.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4시까지 마을 광장에 모두 모인 후에 다 함게 마을을 떠나기로 했다.”
소년은 아직 피로를 걷어내기 어려운 듯한 기색으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큰 강 건너의 비상 대피소로 다들 건너가기로 했단다. 다른 마을의 피난민들도 그 쪽으로 몰릴게 분명하지. 우리가 먼저 가지 않으면 자리는 없을게야. 서둘러야 해.”
“..마을로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 건가요?”
“우리가 이 땅을 힘으로 되찾을 수 있을 때까진 아마 돌아오기는 힘들 것 같구나. 피난길에는 필요한 물건들을 따로 구할 수 없으니 집합시간 전까지 최대한 생필품을 챙길 수 있도록 하는게 좋을거야.”
소년은 한없이 아득해져만 갔다. 아직 모든 상황이 머릿속에 잘 정리되지 않았다. 어제의 일과, 그제의 잠자리는 소년의 시간관에서 아직 일련의 사건으로조차 느껴지기 어려웠다. 얼굴을 짓누르듯 쓸어 내리고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가족들의 일은 안타깝게 됐다. 하지만 산 사람들은 계속 살아가야 하는 법이야. 이제 그들을 기억해줄 사람은 너 뿐인거야.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한다. 분노든 증오든 무엇이든 좋으니 살아가야 한다는 거다. 뭔가 불편하거나 필요한게 있다면 언제든지 말해주렴. 그럼 나는 이만 다른 이웃들에게 가보마.”
이장이 떠나간 후 소년은 빠르게 움직였다. 닥쳐온 두려움이 무색할 정도로 소년의 눈가엔 한 방울의 눈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족의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았으며, 삶의 무게가 머릿속을 짓이겨 놓았기 때문이리라. 삶의 무게란, 눈물과 슬픔과 피로를 모두 감정의 지평선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할 만큼의 것이었다. 모든 일을 간신히 집어삼키고서, 소년은 책가방에 그나마 멀쩡한 옷가지와 식료품을 서둘러 담았다.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어느 정도 다 챙기자 30분쯤 지나 있었다. 집합시간까지는 아직 2시간이 남았다.
주민들은 피난길을 떠나기 전 저마다의 방식으로 마을과 작별을 준비했다. 대부분은 폭격으로 인해 사망한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데 바빴다. 소년 역시 가방을 다 싼 이후에는 이쪽의 작업에 합류했다. 자신의 가족도 그러했으므로.
작업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소년이 지쳐 쓰러져 있을 동안 대부분의 시신이 수습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직접 가족을 수습하지는 못했다. 차마 가족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싶지 않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마을 이웃들이 소년의 부모님과 어린 동생을 묻어주었다. 소년은 열 발자국 정도 ᄄᅠᆯ어진 거리에서 가족들의 조촐한 묘를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게 개어 마치 마을의 풍경을 가득히도 비출 것만 같았다. 하늘의 광활한 거울에 비친 무덤은, 그들이 만들어온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비해 너무도 조촐했다. 흙더미 옆의 작은 플라타너스 나무는 가지만 앙상한 채 뻣뻣하게도 자리 잡고 있엇다.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하늘은 분명히 마을을 비추고 있었다. 모두에게 저마다의 순간을 비춰주듯 소년은 거울 속에서 무덤과 단 둘 뿐이었다. 소년은 사건이 있고서 처음으로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확연히 느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볼에 스치우듯 지나갔다. 바람은 차갑다기보다는, 어루만져주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다시금 올려다본 하늘에 거울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만 이름 모를 검은 새떼가 구들과도 같이 날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마을을 떠나기로 한 약속시간까지 사십 분이 채 안되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소년은 가족과 운영했던 꽃집으로 향했다. 소년은 부서진 빗자루로 가볍게 분진을 쓸고선, 깨진 화분을 한 구석으로 치웠다. 어스름을 머금은 화분 파편은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천수국을 감싸듯이 쥐었다. 뿌리는 아직도 화창하던 모든 꽃들의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꽃들의 밝음을 천수국은 그 뿌리에 간직하고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선, 조심스레 작은 화분 파편에 그럴싸한 모양새로 포장했다.
꽃집 내부를 나름대로 다 정리해갈 때쯤 소년의 뒤에서 둔탁한 발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놀란 기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꺼멓게 탄 열쇠를 들고 있는 이장이 서 있었다.
“꽤나 깔끔해졌구나. 이거 다시 돌아와도 되겠는걸.”
소년은 멋쩍게라도 웃어 보이려 얼굴에 힘을 주었으나, 그렇게 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미안하다. 그런 말 할 분위기는 아니지.”
“아니에요. 다들 있는 일인데요.”
이장은 얇은 털조끼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왼손에 들고있던 열쇠를 조심히 닦아내듯 문질렀다.
“너희 부모님은 정말 좋은 분이었단다. 다들 그리워 할거야. 아까는 너무 냉정하게 말해서 미안했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해 주고싶었는데 오히려 못할 말만 해버린 것 같구나.”
“아뇨,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됐어요. 미안해 하실 것 없어요. 이해 해요..”
소년은 이해보단 체념과 수긍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보다도 속에 있는 공기가 가득히 빠져나오는 것만 같은 무겁고도 허심한 목소리였다.
“,,고맙구나”
소년은 꽃집 앞의 우편함과 간판의 먼지를 털려고 몸을 돌렸다. 이장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는 소년의 어깨를 잡고는, 소년이 뒤를 돌아보자 그에게 들고 있던 열쇠를 건네었다.
“아버지 주머니에서 열쇠가 나왔는데, 너에게 줘야할 것 같아서 왔다. 받으렴.”
이장은 열쇠를 건네주고는 말을 이었다.
“잊기 어려울 것도, 지금 상황을 견디기 어려운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너희 부모님은 네가 살아가는 것을 바라실 거야. 집합시간이 머지 않았어. 이만 작별인사를 해 둬. 기다리고 있으마.”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열쇠를 바라보았다. 이장은 급하게 광장 쪽으로 뛰어갔다. 소년은 열쇠의 용도를 알고 있었다. 우편통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끼워놓고는 힘껏 돌렸다. 빡빡한 감각과 함께 우편통이 열렸다. 안에는 작은 주홍빛 꽃이 그려진 종이 봉투가 있었다. 프렌치 메리골드의 씨앗이었다. 봉투의 뒷면에 날려쓴 글씨로 적힌 주소와 성명을 보고, 이제는 적국이 되어버린 마을로 전해졌어야할 씨앗임을 알 수 있었다. 소년은 무심하게 봉투를 쥐곤 가방의 앞쪽 주머니에 욱여넣었다.
집합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꽃집을 물끄러미 올려다 보며 가족과의 추억이 떠올렸다. 힘으로 다시 마을을 되찾을 적엔, 분명 또 다른 누군가의 가족을 앗아가리라. 그럴 바에야 차라리 되찾지 못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소년은 가만히 생각했다. 무덤에 올릴 천수국을 제외한 나머지를 곱게 길거리에 묻었다. 어리석게도 밝은 노랑은 주인이 떠나갈 때까지도 아른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을은 그렇게 모두와 함께하는 마지막 겨울를 보내었다.
피난의 행렬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큰 강을 건너기 위해선 4개의 산과 마을을 넘어야 했다. 첫 번째 날에 1개의 산과 두 개의 마을을 넘었다. 이장은 이대로라면 앞쪽의 마을보다도 빠르게 대피소에 갈 수 있을 것이라며 주민들을 다독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소년 쪽 무리는 수가 적어 이동에 용이한 편이었으며, 잠도 자지 않고 밤을 꼬박 세며 열심히 걸어왔기 때문이다.
모두가 심하게 지쳐있음에도 소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타는듯한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기억과 기억의 사유에 집중했다. 첫 날의 강행군을 마치고 모두가 휴식에 들어간 것은 새벽 즈음이었다. 고된 몸을 뉘여 잠을 청하는 무리 속에서 소년의 눈은 좀처럼 감기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아픈 기억들이 자신을 휘감을 것만 같았다. 몸은 뒤척이지 못하고 그저 눈을 치켜뜬 채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추운 날씨는 더욱이 잠을 청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걸어오는 길에 참으로 많은 사념에 빠졌다. 이런 일을 벌인 적국을 원망도 해 보았다.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신을 원망하기도 해 보았다. 그러나 모든 사념이 부질없다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어느 하나 완전한 것이 없었고, 모든 가능성은 그저 하나의 다면중의 일면에 불과했다. 막연한 피해자도, 사악한 가해자도 없었다. 분명 우리 나라의 군대도 언젠가 저들의 마을을 습격했을 게 분명했을 거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어재서, 왜 우리인가, 그랬더라면, 이랬더라면, 과도 같은 질문고 체념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하며 걸어온 몇 시간이었다. 그런 후에야 소년은, 모두의 속에서 다시 한번 자신이 혼자가 됐음을 느끼곤 이내 서글퍼졌다. 모든 것이 그립기만 했다. 어느 것이라도 좋으니 다시 한 번이라도 되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피소에 가도 상황은 별로 바뀌지 않을 것임을 소년은 알 수 있었다. 전쟁은 계속 될 테고 모두는 갈수록 무기력 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에 고통스럽지 않은 총알이 박히기를 기다리거나, 혹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군대가 상대의 머리에 총알을 박기를 기다리는 두 가지밖에는 없었다. 실제로 함께 피난길에 나선 이웃들 역시 대부분 이러한 무기력에 사로잡혀있음이 명백히도 느껴졌다. 대피소는 또 다른 전쟁의 굴레일 뿐임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어갈 즈음엔, 이미 서로는 서로이기를 포기하고 자신은 자신이기를 포기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새벽은 어느새 옷깃을 여며가고, 아스라이 내일을 손짓하는 어느 시간, 그렇기에 더욱 간절히, 소년은 이미 사랑해버린 모든 것들을 되찾고 싶었다.
어느 능선을 타고 온 듯한 강한 찬바람이 불어왔다. 소년은 옷가지를 꺼내 추위를 막고자 가방을 뒤졌다. 두꺼운 담요를 꺼냈을 때, 어느샌가 열려있던 가방 앞주머니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일전에 챙겨둔 메리골드 씨앗이었다. 소년은 무심결에 그 강렬한 바람에 휩싸임을 느꼈다. 분명 소년은 무언가 되찾고 싶었다. 여명이 밝혀짐이 선명했고, 폐에 신선한 공기가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내일은 분명 소년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소년은 씨앗의 봉투와 함께 열쇠를 꽉 움켜쥐었다. 기막히게 부조리한 이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 해(害)를 쫓아 달리울 수는 없었다. 애(愛)는 분명 두 걸음 뒤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소년은 봉투의 뒷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주소지는 현재 위치에서 북쪽으로 3마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3번의 여명. 소년은 힘차게 일어섰다. 머리 위에는 검은빛의 새떼가 무리 지어 날았다. 산천 모든 초목이 웃음을 지었다. 소년은 이에 화답하듯 북녘을 향해 유유히 발걸음을 옮겼다. 표정은 여전히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소년은 비로소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었다. 언젠가 돌아올 마을로의 작별을 소년은 다시금 여명에게 건네었다.
북쪽으로의 첫 번째 마을 길을 지나던 중이었다. 나무가 가득하고 스산한 기운이 도는 마을이었다. 어딨는지도 모를 부엉이들은 울음소리만으로 그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전쟁통 이기에 역시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잠시 적당히 바람을 막아 줄 수 있을 만큼의 크기를 가진 나무를 찾아 그 옆에 몸을 기댄 후, 나무 조각을 모아서는 불을 붙여 몸을 녹였다. 전날 잠을 자지 못한 까닭에 매우 피로해있던 소년은 잠시 눈을 붙이고자 가방을 베고 누웠다. 모닥불은 잔잔히 타올랐다.
이윽고 소년은 알 수 없는 인기척에 의해 잠에서 깨었다. 주변의 어둠으로 보아 시간은 진작 밤에 깊숙이 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의문의 인기척 역시 그 원인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검은색 코트를 입은 한 중년의 남성이 자신이 피운 모닥불의 맞은편에서 함께 몸을 녹이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놀란 채로 몸을 일으켜 남자를 주시했다. 남자는 두 손을 코트에서 빼내어 머리 위로 들고는 능청맞게 입을 열었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됐는걸. 놀라게 하고 싶은 맘은 없었어. 단지 몸이 좀 시려서 말이야. 정말이야. 봐. 난 아무것도 널 위협할만한 걸 갖고 있지 않다고.”
소년은 여전히 긴장을 조금 머금은 채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큰 키를 가진 적국의 인간이었다. 갈색의 목도리로 꽁꽁 싸맨 턱과 목은 도망자나 부랑자를 연상케 했다. 소년이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자 남자는 말을 이었다.
“원한다면 목도리 안이라도 열어서 보여주지. 자, 봐. 아무것도 숨기고 있지 않다고. 애초에 숨길만한 것도 없고 말이야.”
목도리 안으로 보였던 것은 코트 안에 껴입은 낡은 스웨터와 꽤 크고 오래된 듯한 흉터자국이었다. 소년은 그제서야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다행이라는 표정을 짓고선 다시 모닥불 쪽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보아하니 우리 쪽 사람은 아닌 것 같구만.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소년은 마을의 일과 자신이 겪었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남자는 앉은 채로 턱을 괴고서 소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게로군, 어린 나이에 안됐어. 혹시 나라도 괜찮다면 화풀이라도 하는 게 어때? 내가 일으킨 싸움은 이니지만 말야.”
“딱히 그러고 싶지는 않아요. 그럴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제법 미묘한 말을 잘 하는구나. 어린 애가 세상 이치를 아는 눈이 있어. 하긴 그러니까 무리에서 빠져나왔을 테지. 암. 그렇고 말고. 나 역시도 그랬으니 말이야.”
남자는 동류의 인간을 만났다는 것처럼 얼굴에 생기를 띄우고 말을 이었다.
“집단이라는건 도저히 믿을래야 믿을 수가 없는 것들이지.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들고 무리에 속해버리고 나면 그저 총알받이 아니면 장기말에 불과하게 돼 버린다구. 집단 자체가 하나의 생명체를 보는 것 같단 말이야. 난 이게 몹시도 기분이 나빠. 나는 나로서 존재할 권리가 있고, 또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해. 그러나 무리를 유지하는 부품이라면, 이건 사람으로의 보람이 없지. 지금 같은 시국에는 더욱 더 그래. 집단과 집단의 부딪힘. 이건 마치 맹수와 맹수의 싸움과도 같지 않나? 맹수들의 싸움에서 다치게 되는건 결국 그들의 발톱이고 가죽일 뿐이지. 그들은 아니야. 발톱과 가죽이 자아가 있다면 그게 우리와 다를게 무어인가 말이야.”
“발톱과 가죽이 다친다면 결국에 맹수가 다치는 것과 같지 않나요?”
“천만에! 맹수는 말이다, 발톱이 빠져도 가죽이 모조리 뜯겨져 나가도 절대로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 뼈가 모두 불타 없어지고 내장이 재가 되어 흙에 섞인대도 맹수는 절대로 죽어 없어지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겠나? 우리는 모두 중요한걸 놓치고 있다구. 집단이 생기는 이유가 뭔가? 무리를 지어 다니는 이유가 무어인가 말이야. 분명 자네도 무리를 떠나오며 이런 생각을 했을 거야. 암. 그렇고 말고. 반드시 했을 테지. 다만 자네는 지금 무리에 속해있던 자신의 관념을 벗어버렸기에 자세히 떠올리지 못하는 것 뿐이라네. 잘 생각해보게. 왜 자네 나라와 나의 나라가 이런 일을 당한단 말인가? 짐승으로 이뤄진 짐승, 맹수로 이뤄진 맹수인게야. 자네, 응? 무슨 말인지 알겠나? 대답을 해보게.”
남자는 여전히 능청맞은 목소라였지만 소년을 대하는 태도는 어딘가 약간 격양되어있는 모습이었다. 소년은 남자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확신에 차 있는 남자의 눈빛은 어느새 자신이 전쟁중인 땅의 부랑민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듯 알 수 없는 열의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소년은 남자의 말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저씨는 일종의 집단 광기나, 혹은 공동체의 허무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남자는 흡족한 듯 말했다.
“그래, 그런 느낌이야. 하지만 뭔가 부족하군 그래. 아무래도 자네는 말이야..”
소년은 남자의 말을 끊고 남자에게 되물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함께 했을 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지 않나요? 전체적인 협력이 없이는 커다란 과제를 이어나가기 어려워요. 제가 저희 마을에 살 때도 그랬었고요.”
남자는 잠시 침묵했다.
“어쨋든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가야만 해요. 좋은 일을 하려는 의직 있다면 분명 보답 받을지 몰라요.”
“그건 별개의 이야기지. 현실에서 그런 일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나?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우리를 보라구. 자원이니, 종교니, 무슨 파가 어쩌고 하는 것들애 뒤섞여 서로가 서로를 잊고 있지 않나?. 그러나 인간은 결코 그러한 저속함에서 벗어날 수 없어 특히 무리의 인간이라면 더더욱 그러하지.”
소년은 남자의 말에 일부 동의했다.
“그렇더라도 전 언젠가 다시 마을로 돌아가고 싶어요. 다시 옛날의 모두를 되찾고 싶어요. 우리는 짐승도 맹수도 아니었어요. 아저씨네도 아마 그랬을 거에요.”
“과연 그럴까 싶지만, 역시 무리는 모두 집승이고 맹수일 뿐이야. 실존보다 앞설 소유라니! 난 그런 것 따위와는 조금도 타협할 마음이 없다. 사람은 둘 이상 모이면 그대부터는 이기심이며 증오며 분노에 의지하기 쉽거든. 그편이 훨씬 편하니까 말이야. 또, 아예 틀린 것도 아니기도 하고. 그렇지 않나? 집단만큼이나 개인 역시도 이기적이지.”
시간은 어느새 훌쩍 지나갔다. 여명 이전에 다음 마을로 향해야만 했다. 그것이 자신과의 약속이었으므로, 소년은 남자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어요. 꼭 전해야 할 물건이 있거든요.”
“참, 그랬었지. 그래. 어서 가보도록 하렴.”
소년은 가방을 고쳐매고 혹여 떨어뜨린 물건이 있는지 확인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불은 아마도 이곳에서 밤을 보낼 남자를 위해 남겨놓았다.
“잠깐, 기다려봐.”
남자는 소년을 불러 잠시 잡아두고는 코트 안쪽에서 무언가 꺼내어 소년에게 건냈다.
“사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있다는 말은 거짓이지. 모닥불 값을 할 식량 정도는 갖고 있었다구. 이거 봐, 역시 인간은 둘 이상 무리부터는 믿을게 못 된다니까. 어서 받고, 가는 길에 군인들이나 들짐승들을 조심하도록 해.”
소년은 약간의 식량을 남자로부터 건네받았다. 소년은 왜인지 입가에 웃음이 머물는 것이 느껴졌다. 발걸음은 다시 북쪽으로, 눈길은 다시 하늘을 향했다. 북극성이 밝게도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북쪽으로의 두 번째 마을을 지나는 길이었다. 소년은 자꾸만 아려오는 복부의 통증을 더 이상 무시하기 어려웠다. 살갗이 아려오는 추위를 참고서, 윗 옷을 약간 들춰내 배의 상태를 확인했다. 어째서 이제것 눈치 채지 못한 것인가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들 정도로, 깊고 크게 패인 상처가 있었다. 소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앞으로의 여정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소년은 직감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여정이 끝나기 이전에 분명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방 안의 붕대와 소독약으로 약간의 응급처치를 한 후 소년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마을 부터는 황량한 들판을 지나는 듯 했다. 거리의 풀은 적갈색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마을 곳곳의 나무에는 알 수 없는 거적이 걸린 채 나풀거리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 이따금 흙으로 벽을 만든 하얀 집들이 보였다. 소년은 초원 마을의 선선한 바람이라면, 굳이 집으로 들어가 바람을 피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끝을 앞에 두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소년은 그저 어느 풀이 무성한 땅에 드러 누웠다. 올려다본 하늘엔 어느새 노을이 물들어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지평선에는 아름답게 오늘의 태양이 마지막 베일을 수놓고 있었다. 보랏빛. 그것은 죽음임과 동시에 탄생임이 틀림 없으리라. 주홍빛은 어느새 소년의 검은자위를 스쳐지나 내일을 약속했다. 또 다른 여명을 맞고자 소년은 밤을 지새웠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넓었다.
소년은 자신이 지새우는 밤에 누군가 발을 들여 놓고 있음을 깨달았다. 바지가 다소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소년은 몸을 말아 올려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얇은 거적을 걸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무언가 요구해오듯 소년을 툭툭 건드렸다. 꾀죄죄한 머리카락은 달빛을 받아 은은한 빛을 내었다.
“혹시 먹을거 있어?”
소녀가 입을 열었다. 소년은 소녀가 적국의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소년은 가방에서 어제 남자가 건넨 식량과 자신이 가진 물을 건네었다. 소녀는 밝게 웃으며 물과 음식을 받았다. 소녀는 음식을 다 먹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릴리는 이름의 작은 꼬마는 어딘가의 전투에 휘말려 가족과 떨어졌으며, 친척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 북쪽의 마을을 향해 하염없이 그 작은 발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릴리가 향하는 마을은 소년의 목적지와 같았다. 주소가 완전히 일치할 일은 없지만 행선지가 같은 일행이 생긴 것에 소년은 다소 안도했다. 소년은 어느새 자신의 다리 옆에 누워있는 철없는 아이를 향해 말을 건네었다.
“나도 마침 그 쪽으로 가는 길이야. 너 혼자라면 위험할 테니, 괜찮다면 같이 가지 않을래?”
소녀는 마치 그렇게 말을 걸어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대답했다.
“좋아. 대신 가는 길에 내 친구가 되어 줘. 계속 혼자라서 심심했거든.”
소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밤에 애를 데리고 길을 나서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몸을 뉘인 채 두 번째 여명을 맞이하기로 했다. 눈을 붙이자 금세 잠이 몰려왔다. 소녀도 어느샌가 말없이 그저 작은 숨소리만을 낼 뿐이었다.
날이 밝자 소년은 소녀에게 남은 식량으로 간단히 아침을 챙겨줬다. 소녀가 함께 먹지 않느냐고 물었으나 부드럽게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복부의 통증은 어제보다 한 층 더 선명했다. 소년은 가방을 챙길 때 진통제를 챙기지 않은 자신을 원망하려다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소녀의 식사가 끝나자 둘은 빠르게 서로의 짐을 챙긴 후 북쪽으로 발길을 향했다.
둘은 가는 길에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릴리와 이야기를 하고 있자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릴리는 기억력이 좋지 못했다. 금세 잊고, 금세 힘을 냈다. 소녀는 어린 나이에 자신의 방식대로 망자를 추억하는 현명한 방법을 알고 있었다. 릴리의 입을 통해 젼해지는 전쟁의 참상은 어딘가 아련해지는 앨범을 들여다 보는 듯 했다. 순수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했다. 설령 총알이 소녀의 머리를 뚫고 지나가더라도 소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남자가 말한 짐승이나 맹수와는 또 다른 양상이었으나, 어딘가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초인. 소년은 언잰가 읽은 적이 있던 책의 초인이라는 개념을 떠올렸다. 그것은 망각이며 창조이고, 허무이자 존재이며, 경멸이자 사랑이었다. 결정적으로 그것은 내면과 세계의 화해였다. 소년은 어딘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강렬한 충동적 감정에 휩싸였다. 소년은 의지로 가득해졌다.
어느새 마지막 여정의 어귀에 도달했다. 세 번째 마을의 입구가 보였다. 그 곳은 마을이라기엔 너무도 황폐해 차마 사람이 살거라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마을을 지나오며 가끔 보이는 고른 흙의 존재만이 과거 이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증명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내 친척이 있는 곳이 나올거야.”
릴리는 기쁜 듯이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몇 발자국 이후로 자신이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 역시 어떤 부분에서 의지임을 소년은 알고 있었다.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푸른 빛이 감도는 마을은 여기저기 파다 만 구멍이나 갈다 만 밭이 눈에 띄었다. 소년은 잠시 그곳에 앉아 쉬었다. 가장 부드러워 보이는 흙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가방을 앞쪽으로 고쳐 매고는, 무너지듯 풀썩 주저앉았다.
가방의 앞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냈다. 작은 씨앗 하나를 꺼내 자신이 앉은 흙에 조심스레 묻어주었다. 소년은 더 이상 힘들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머리 위로 검은 새떼가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다만 이번에는 무서운 기색이라곤 없었다. 소년은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거기엔 분명 거울이 있었다. 거울 속의 세상은 땅도 이념도 총알도 맹수도 없이, 모두가 그저 한없이 애틋했다. 소년은 소녀에게 손짓했다. 적국의 존재는 이미 한참 전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짐승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반대로 만들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그것은 집단을 겨냥하는 화살이 아님을 소년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소녀가 다가오자, 그는 그녀의 손에 봉투를 건내었다. 영원을 이야기하지 못할 소년은 그 봉투를 통해 그가 잃은 모든 것을 다시금 되찾을 수 있었다. 하늘은 맑게 개어 푸르렀다. 적어도 소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소년은 자신의 방식대로 존재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소녀에게 그것을 전해주고 싶었다. 메리 골드 씨앗은 하염 없이도 따뜻했다.
[부록-어느 땅의 기억에서]
땅은 본래 하나요. 짐승은 본래 한 뿌리라. 뜨거운 대지의 용오름 아래 만물은 서로가 똑같으며 똑같지 아니하고 비어있되 비어있지 않음이라. 이에 한데 뒤섞여 너덜겅을 굴러다니던 짐승 한 무리가 청컨대 ‘하늘이여 들어주소. 부디 우리 구르는 이 땅에 축복을 내리시어 우리 혈족 대대손손 땅의 영광을 알게 하시고 서로 사랑함이 더욱 돈독하게 하소서’ 하니, 이를 하늘이 어여삐 여기사 비탈길 깔린 돌을 바람으로 치우시고 못동 아래 물과 기름과 젖이 흐르게 하시니 땅별이 훤하여 짐승들이 기뻐하길 여러 해라.
땅이 본래 하나요. 짐승은 날로 여러 갈래라. 못동 아래로 내려간 짐승이 돌아오지 못하길 예삿일이며 터져 흐르던 물과 기름과 젖이 말라가길 여러 날인지라 어느 짐승 하나 이를 슬퍼하지 않는 놈이 없더라. 이에 목말라 울부짖던 한 마리 어린 짐승이 청하건대 ‘하늘이여 들어주소. 우리 아버지 살던 땅에 생긴 입들이 많아 마실 물도 먹을 젖도 없사오니 이를 어찌 하오리까. 서로 먹고자 다툼이 예사롭지 않으매 땅의 영광도 마음의 사랑도 잊어버림이 오래이나이다. 엎드려 빌건대, 부디 입들이 서 있는 곳을 갈라놓으시어 다툼이 없게 하시고 새로운 바람을 내리시어 먹고 마심에 부족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이를 하늘이 가엾게 여기사 땅별의 대지를 가르시고 새로이 구름과 무지개와 추위와 더위를 내리시니, 갈라진 땅 틈 사이로 물줄기 무수히 쏟아지며 땅과 땅의 사이가 짐승들이 건너기에 어렵게 되더라.
땅이 날로 여러 갈래요. 짐승은 날로 관영함이라. 땅이 갈라질 적에 지형이 솟고 꺼져가길 여러 번이니 흐르던 물과 기름과 젖이 한데는 모이매 어느 한데는 모이지 않더라. 더움과 추움과 배고픔을 피해 쏘다니는 짐승들이 노해며 풀벌이며 높게더미며 아니 차지한 곳이 없어 마침내 서로가 목숨을 빼앗기에 이르니 온 땅에 피가 가득하길 아득히도 여러 날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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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은 날로 여러 갈래되 그 주인은 가장 큰 짐승이요. 세월은 날로 복잡함이라. 일전의 혼란으로 피가 아니 묻어썬 땅이 없기에 짐승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길 무수히도 여러 날이라. 물과 젖과 기름과 힘이 넘치되 이에 그치기를 두려워하여 사랑하길 잊고 제 것을 탐하기 바쁨이라.
사랑하길 잊은 짐승들은 살과 살을 뜯어먹기에 땅의 은혜를 잊은지 오래며 산천초목은 온데 간데도 없음이라. 밤낮으로 불길과 쇳덩이를 퍼부으니 나뭇잎 대신할 종이가 나부끼고 짐승을 대신할 광물이 기어옴이라. 하늘이 보시매 매우 안타까이 여기사 짐승들을 멸하시고 새로이 마음을 지닌 흙을 빚으시니 그들로 하여 다시금 너덜겅을 구르게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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