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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 진영의 대립으로 두 나라가 분단되는 비극이 초래됐다. 하나는 독일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이었다. 독일은 2차대전의 전범국가이며 미소 양국의 적이었다. 독일의 분단은 승전국의 패전국에 대한 점령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국으로서 왜 독일과 같은 분단 국가의 비극적 운명에 처하게 되었는가?
미국인과 소련인 어느 누구도 한반도가 평안무사할 거라고 믿지 않았다. “전쟁은 조만간 발생할 것이다. 단지, 언제 발생할지 모를 뿐이다”라고 주한미대사 무초는 말했다.
1948년말, 미군의 남한 철수를 압박하기 위해 소련군은 먼저 북한에서 철수했다. 소련군의 철수이후 한반도 정세는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단지 몇 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38선에서 남한이 도발한 군사 충돌은 37건이었고, 이승만이 38선 부근에 비밀리에 이동 배치한 병력수는 이미 4만1천여명에 달했다.
미군은 남한에서 철수 이전에 이승만 정권에 모두 1.9억달러에 달하는 무기와 군사장비를 제공했다. 이중에는 미제와 일제 소총 15만정, 각종 대포 2,000여문, 차량 5,000대가 제공되었으며, 미군은 85만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인천-서울, 서울-부산간 국도 및 김포비행장을 확장하였으며, 38선상 전략적 도로들을 정비하고 김포비행장의 항공기지를 확대했다. 또한 거액의 비용을 지출하여 인천, 포항, 여수 등 항구를 개조하였으며, 묵호, 목포 등지에 해군기지를 건설했다. 중요거점에 대한 반영구적 군사시설을 건설하는 동시에 38도선상 수백km에 걸쳐 참호와 교통호를 구축했다.
1947년 여름 미국 대통령 특사 웨이더만 장군이 남한을 시찰하면서부터 남한군의 확대계획은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2년안에 15만명의 “국방군”을 창설할 계획이었다. 그는《병역법》법률을 반포하여 17세부터 60세까지 노동력이 있는 모든 남한 남자는 병역의무 대상에 포함시켰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미국에 돈과 물자 지원을 요청했다. 이승만의 과욕에 트루만 대통령은 “너무 도가 지나치다”라고 느꼈다.
미국의 지지하에 이승만은 “북진통일” 기도를 전혀 숨기지 않았다. 그는 매번 북한의 평화적 방법에 의한 한반도 문제 해결 제의를 거절하고, “남북분단은 반드시 전쟁을 통해 해결할 것”이라고 큰소리 쳤다. 전쟁 폭발 이전에 먼저 내부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국 군사고문단의 지휘하에 이승만은 남한내 인민유격대 및 애국지사에 대한 대규모 “토벌”을 감행했다. 이때 남한에서 살해된 사람만 10만명을 초과했다.
1949년 이승만은 준비가 대략 마무리됐다고 판단했다. 그는 4월에 남한의 주유엔특사 조병옥에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지금과 같은 정세에 대해 당신이 극비리에 연합국 및 미국 고위관리들에게 흉금을 터놓고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을 위해 무기와 탄약이 부족한 것을 제외하고 우리는 기타 방면의 모든 준비를 끝냈다는 것을 말입니다.”
1949년 7월, 이승만은 기자들에게 발표한 담화에서 “북한을 점령해야 통일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0월에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또다시 “피를 흘리지 않고 통일 독립은 불가능한 것이다. 실현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0월 31일, 이승만은 미 순양함 “성풀호” 함상에서 행한 연설에서 “남북분단은 반드시 전쟁을 통해 해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1950년에 이르자 이승만은 “북진통일”의 최후 준비 단계에 돌입했다. 2월에 그는 군 고위인사들을 대동하고 동경으로 날아가 맥아더에게 공격계획을 설명했으며, 맥아더는 경청한 후 군사적으로 “구체적 지시”를 하였다. 4월, 38선 부근에 집결한 5개 사단은 직속 포병과 기타 기술병과를 보강했다. 동시에 남한의 “북진통일”정책에 협력하기 위해 브래들리 합참의장, 샤어만 해군참모총장, 보걸 공군참모총장 등의 미국 군부 고위층들이 잇달아 일본을 방문하여 극동지역의 미군 부대 배치를 강화했다. 이중 미7함대는 2척의 항공모함 및 2척의 순양함, 6척의 구축함으로 증강했다. 미공군은 3개 B-26 및 B-29 폭격기 부대, 6개 전투기 부대, 2개 수송부대를 일본기지에 집중 배치했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8군 예하 각 사단은 일체 전쟁 준비를 끝마쳤다. 극동에서 전쟁 시스템이 이미 작동하기 시작했다.
남한의 전쟁준비에 대해 김일성은 고도의 경각심을 갖는 가운데 깊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왜냐하면, 이때 김일성은 작전 가능한 부대는 단지 무기장비가 부족한 3개 사단만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이승만은 미국 무기장비로 무장한 6개 사단이 있었다. 국가 안전을 고려하여 김일성은 두차례에 걸쳐 스탈린에게 《조소우호호혜조약》체결을 요구하였으며 소련이 북한에 군사원조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1949년 3월,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하여 직접 스탈린에게 조선의 국가 안전 문제를 제기했다. 스탈린은 조선이 필요로 하는 군사원조를 승인했다. 그러나 명확하고 구체적 내용이 없었다.
1949년 5월,김일성 특사는 극비리에 중국 북평 서산의 “쌍청”별장에서 모택동을 만났다. 특사는 모택동에게 한반도의 일촉즉발의 전쟁 정세에 대해 설명하였다. 모택동은 특사에게 김일성이 편지에서 언급한 견해에 동감을 표시했다. “한반도에서 총돌은 피하기 어렵다”, “당신들에 대해 말하자면 지구전은 불리하다. 왜냐하면 설사 미국이 개입하지 않는다고 해도 일본이 남한에 전쟁물자를 원조할 것이다.“라고 모택동은 분석했다. “당신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 중국과 소련이 당신들 옆에 있다. 일단 상황상 필요하면 중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당신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이때가 모택동이 처음으로 김일성에게 만약 조선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중국은 출병하여 참전할 것이라고 표명한 때였다. 북한의 방위를 협조하기 위해 모택동은 심지어 인민해방군중 2개 조선인 사단을 김일성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목전의 조선정세에 대해 모택동은 전쟁이 즉시 발발하는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표명했다. 왜냐하면 첫째, 국제정세가 불리하며, 둘째, 중국공산당이 아직 효과적으로 북한을 지지할 능력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중국통일 임무가 완성되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모택동이 말한 “중국 통일의 임무”는 바로 대만섬의 해방을 말한다.
모택동에 비해 스탈린은 김일성 내부의 북한 지도자들에 대해 더 신임했다. 이것은 김일성이 소련 극동군에서 작전했던 것과 일정한 관계가 있었다. 남한의 공격태세에 직면하여 김일성은 정치가 및 군사가로서 더욱 강렬하게 의식했다. : 조선 공산당원으로서 조국통일 및 독립, 자주적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자기의 당연한 책임으로 여겼다. 그러나, 스탈린은 여전히 한반도에서 전쟁 발발후의 후과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유는 미국이 중국에서 실패한 상황에서 한반도 문제에 직접 간섭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북한이 전쟁에 관련되면, 군사상으로도 우위를 점할 수 없을 뿐더러 정치상으로도 “미국의 조선에 대한 무장간섭 구실”될 것으로 봤다.
이때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반도와 대만은 미국의 극동방위선 범위밖에 있다고 전세계 면전에 발표했다. 김일성은 즉시 재차 소련에 자기의 계획을 제시했고, 이번에 스탈린은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와 대만의 두 미해결 현안중에 스탈린은 당연히 한반도 문제에 대해 더 관심을 가졌다. 소련의 안전과 대만문제와는 직접적 관련성이 적었으나, 한반도의 지리적 위치는 줄곧 극동에서 일본과 균형점을 이루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또한 김일성이 요청한 것은 무기장비였지 소련군 병력이 아니었다. 기왕 애치슨이 명백히 선언한 이상 더 이상의 근심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1950년 1월 8일, 스탈린은 북한주재 소련대사에게 전보를 쳤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원조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며 이 문제에 대해 언제든지 김일성을 만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3월 30일,김일성은 재차 모스크바를 방문하였다. 북한에 대한 소련의 원조는 유상원조로 진행되었다. 북한은 황금 9톤, 은 40톤, 기타광물 1.5만톤을 제공하고, 소련은 1.38억루블어치의 무기장비를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이 무기장비는 3개 보병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분량이었다. 스탈린은 남한의 전쟁위협시 완벽한 북한의 작전준비계획을 청취한 후 만족을 표시했다.
마지막으로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당연히 계획을 모택동에게 통지할 것을 요청했다. 북한군대가 전쟁발발 상황하에서 작전 준비를 이미 완성했을 때 스탈린은 계속해서 김일성에게 모택동의 의견을 구할 것을 요청했다. 1950년 5월 13일,김일성은 모택동과 모스크바에서 함께 스탈린과 회견한 후 반년만에,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1개여월을 남겨둔 시점에 김일성은 북경을 방문했다. 모택동은 김일성의 작전준비계획이 이처럼 완비되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당시 중국은 북한에 주재대사를 파견하지 못했으며, 또한 조선군대 시찰요원도 없었다. 모택동은 김일성의 준비상황에 대해 거의 몰랐다. 이때 모택동은 소련이 김일성에 대해 일정한 군사원조를 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냈다. 다음날 스탈린은 회신해 왔다. 회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택동 동지, 조선동지와 담화중에 필리포프(스탈린 가명)와 그의 동지들은 아래와 같은 의견을 표명하였음 : 국제정세에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에 그들은 조선인이 새로운 통일 착수 건의에 동의함. 단 몇가지 부대 조건이 있는데, 즉, 문제는 중국동지와 조선동지들이 공동으로 최종 결정함. 만약 중국 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문제 해결은 당연히 연기될 것임. 다시 토론을 진행하면 조선동지들이 자세하게 당신들에게 설명할 것임."
모택동은 중공중앙정치국 소집하여 회의한 후, 김일성에게 중공중앙은 북한의 작전계획 의견에 동의한다고 전달했다. 회의를 끝낸 후 모택동은 선생님처럼 정치준비부터 군사준비, 그리고 전쟁의 구체적 방법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설명을 김일성에게 전달했다.
이때 중국군대는 대만공격에 대한 수많은 기술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었으며, 군사준비 공작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설령 조선전쟁이 발발하는 상황일지라도 가장 늦어도 1951년까지 대만 해방을 위한 작전 조건은 이미 기본적으로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한가지 걱정이 있었다. 조선에서 일단 전쟁이 발발하면, 미국정부는 대만에 대한 기존 정책을 바꿀 가능성이 높았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1950년 6월 7일,조선전쟁발발 18일전, 김일성은 재차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명의로 《조국평화통일 촉진방안 호소문》을 발표하여 남북 각 정당, 사회단체대표 협상회의를 개최할 것과 통일 조건 및 총선거 일정 등의 문제, 그리고 8월 전국 총선거 실시 등을 협의할 것을 제의했다. 6월 11일, 전쟁개시 14일전, 남한은 김일성의 평화통일 호소를 거절했다. 6월 17일, 전쟁개시 8일전, 미국 트루먼 대통령 고문 덜러스는 38선 진지에서 망원경으로 북쪽지역을 조망했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날 덜러스 진지에서 남한의 “북진통일” 작전계획을 검토했다. 6월 19일, 전쟁개시 6일전, 김일성은 재차 조국통일을 위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와 남한 국회가 연합하여 단일적 전조선 입법기구를 수립할 것을 제의했다. 남한은 재차 거부했다.
남북한중 도대체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가” 이 문제는 지금까지 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조선전쟁과 관련된 각국의 전쟁 문건이 아직 완전히 비밀 해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가” 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 왜나하면, 조선전쟁 발발의 성격은 민족내부 통일문제 해결을 위한 내전이며, 조선전쟁 발발의 근원은 미소 양대국이 일본 패망후 조선을 분할 점령한데 있기 때문이다. 딘 러스크 대령이 조선 지도위에 38선을 긋지 않았다면 극동에서 이 전쟁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처 : 왕수증(인민해방군 대좌)의 '극동, 조선전쟁(해방군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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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댓글이 없지만,
그러나 아주 귀한 글임을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일부만 발췌해서 일부 내용 전개가 매끄럽지 못합니다.
대부분 미중중심의 내용전개여서 많은 부문의 번역이 좀 주저됩니다.
다만, 우리가 잘 몰랐던 역사적 사실들은 시간나는대로
계속 발췌해서 소개해 드릴 예정입니다.
진짜 중요한 자료네..
누가 이땅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렇게 만들었는지 분명이 할필요가 있는..
귀중한 역사입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지구라는 동네는 참 웃기는 동네야...ㅋ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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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사변--6.25전쟁--한국전쟁---남북전쟁--?
명명을 어느 것으로해야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하더군요!
정말 바보들이더군요. 61년이 지나도록 헤매고 있어요~~
잘 보았읍니다.
잘 읽었씀니다,
시야를 넓히면 한민족의 참역사와 의식에 혼란을 야기하려고
장기판을 움직이는 거대한 음모세력들이 존재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