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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휴게소(사인보드)1
황산전통한옥마을(왼위)은 수승대 앞에 위치하며 1540년(중종35년) 요수 신권선생이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던 집성촌이다.안에는 1.2km의 옛담장(등록문259호)이 있다.
(거창 위천면 황산리)
거창사건추모공원(오위)은 6.25전쟁 중 51년2월9일에서 11까지 신원면에서 국군에
의해 양민이 집단 희생당한 넋을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매년 10월 국화전시
회가 열린다(거창군 위천면 신차로)
월성계곡(왼아래)은 1507m 남덕유산 삿갓봉에서 발원되어 서출동류한다.거창의
소금강으로 불리며 사선대.분설담.강선대 등의 빼어난 경관들이 있는 곳이다.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명승수승대(오아래)(명승제53호)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 사신을
근심스럽게 송별하는 곳이라 수송대로 부르다가 1543년 퇴계 이황이 수승대라
개명했다.원학동의 맑은 물과 거북바위가 유명하다.(거창군 위천면 은하리길)
중앙의 사진은 광주-대구고속도로 중 지리산 휴게소로 많이 쉬어가는 곳이다.
필암서원(유물전시관 입구문 현판 元眞閣)2
장성 필암서원(集成館)3
전통예절.한학교육.선비체험을 위한 교육관으로 적극 활용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원진각(청렴의 상징 해치.매미.연꽃)4
해치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동물로 청렴을 대표하는 상상의 동물이다.옛부터
해치를 궁궐 앞에 세우는 목적은 관원들이 깨끗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라는 의미
이다.신하들이 광화문을 드나들 때 해치꼬리를 쓰다듬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매미는
옛 사람들은 매미를 군자가 지녀야 할 5가지의 덕을 갖춘 곤충이라 여겼다.
이슬.진액을 먹으니 성품이 높고 맑음(淸)이고.곡식.채소를 안먹으니 염치(廉)
가 있고 집이 업고 나무그늘에 사니 검소(儉)하고 늦가을에 일찍 목숨을 버
리니 믿음(信)이 있고 매미의 입은 선비의 갓끈을 닮아 학문(學)을 갖추었다.
임금도 매미의 덕을 본받으라는 의미에서 익선관 꼭대기에 매미의 날개를
붙였고 신하들이 쓰는 사모에도 매미날개가 달려있다.
연꽃은 蓮과 廉의 중국식 발음이 같은 점을 인용해 청렴의 상징으로 본다.
인도.중국은 생명창조.생식 번영의 의미를 가진 꽃으로 고결함과 仙의 경
지를 상징했다.
원진각(세속을 벗다 배롱나무.청렴의 상징 아욱.베틀.청렴과 절조 동백꽃)5
배롱나무는 백일홍.목백일홍.자미화.간지럼타는나무로 화무십일홍을 무색
하게 하니 신비롭다.사찰에 많이 심는데 나무가 모두 껍질을 다 벗으니 스님
들이 세속을 벗으라는 의미를 담고 선비들이 사랑채 앞이나 향교의 앞뜰에
즐겨심는다.이유는 100일이나 넉넉하게 꽃을 피우는 넉넉한 마음가짐과
청렴함을 배우라는 의미이다.
아욱은 영양이 풍부하고 양기를 돋우는 작용이 있어 정자나 누각을
헐고 심었다하여 破樓草라 불렀고 중국고사에 발규거직(拔葵去織)이
있다. 아욱을 뽑아 버리고 베틀을 부순다 라는 뜻인데 백성들과 이익을
다투지 않는 淸白吏를 상징한다.
동백은 선비들이 매화와 함께 높이 기렸다.그래서 동백을 儼寒之友에
넣어 치켜세웠다. 동백은 한겨울에도 꽃을 피움으로써 잎보다는 꽃으로
추위를 견디는 그 기개를 높이 찬양하였다.
원진각(호남 제일의 사액서원 필암서원)6
筆巖서원이란 이름은 그의 고향 맥동마을 입구에 붓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그렇게
지었으며 이 바위의 기운을 타서 하서 선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筆巖書院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액서원으로 호남의 儒宗인 河西 金麟厚(1510년
-1560년)와 제자이고 사위인 鼓巖 梁子澂(1523년-1594년)을 모신 서원이다.
하서 김인후는 본관(울산).자(厚之).호(河西.澹齋) 하서는 성균관에 들어가 퇴계와 학문
을 닦았고 인종의 스승이었다.1545년(인종1년) 인조이 승하하자 을사사화로 장성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했다.문집에 하서전집.저서에 주역관상편.서명사천도.백련초해 등이
있다.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고 이항의 이기일물설에 반론해 이기는 혼합에
있음을 주장했다.천문.지리.의학.산수.율력에 능통했다.
고암 양자징은 본관(탐라).자(仲明).호(鼓巖) 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아들로 창평출신
이다.하서의 제자로 소학을 충실히 실천했으며 퇴계에게 수학했고 이이와 성혼에게도
강의를 받았다.임란 때 아들 양천운을 시켜 의병장 김천일.고경명에게 금전과 양식을
보냈다.
원진각(서원의 성립과 발달과정.철폐후 남은 서원)7
서원의 효시는 1543년(중종38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말 학자 안향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세운 일이다.서원은 제례와 교육 두가지의
의무가 있다.1550년 이황의 건의로 이름을 바꾸어 사액 소수서원이라는 현판과
서적과 노비를 보낸 것이 효시가 되었다.
서원의 발달은 초기(명종).발전기(선조-현종).濫設期(숙종-영조).쇄퇴기.철폐기
(영조17이후)로 나눈다.서원은 당쟁의 소굴로 변해 대원군에 의해 만동묘철폐
미사액서원철폐.사액서원철폐로 47개만 남기고 모두 정리되었다.
고종8년(1871년) 철폐 때 남은 이름난 전국의 서원
(경기도)
개성 숭양서원(정몽주) 포천 용연서원(이덕형) 과천 노강서원(박태보)
김포 우저서원(조헌) 파주 파산서원(성혼) 양성 덕봉서원(오두인)
용인 심곡서원(조광조) 과천 사충서원(김창집)
(충청도)
연산 돈암서원(김장생)-세계문화유산
(전라도)
장성 필암서원(김인후)-세계문화유산 노성 노강서원(윤황)
태인 무성서원(최치원)-세계문화유산
(경상도)
경주 서악서원(설총) 순흥 소수서원(안향)-세계문화유산
선산 금오서원(길재) 현풍 도동서원(김굉필)-세계문화유산
경주 옥산서원(이언적)-세계문화유산 예안 도산서원(이황)-세계문화유산
상주 흥암서원(송준길) 상주 옥동서원(황희)
안동 병산서원(류성룡)-세계문화유산 함양 남계서원(정여창)-세계문화유산
(강원도)
영월 창절서원(박팽년) 금화 충렬서원(홍명구)
(황해도)
배천 문회서원(이이) 장연 봉양서원(박세채)
(함경도)
북청 노덕서원(이항복)
원진각(청백리 정척.이후백)8
鄭陟은 1390년(공양왕2년)에서 1475년(성종6년) 살았으며 호(整菴).시호(공대恭戴)
집안에 영리를 추구하지 않아 여러차례 세종도 칭찬했고 삼대가 청백리(아들
정성근.손자 정매신)이다.
李後白은 1520년(중종15년)에서 1578년(선조11년)까지 살았고 호(靑蓮).시호(文淸)
인재라 이름난 사람이라도 청탁을 하면 반드시 끊어 버리는 엄격함을 보인 청백리
이다.
원진각(四不三拒)9
조선시대에 공직자들이 지켜야 할 규범
四不은 공직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4가지는 一不은 부업을 갖지 않는다.
二不은 땅을 사지 않는다.
三不은 집을 늘리지 않는다. 四不은 재임지의 명산물을 먹지 않는다.
三拒는 공직자로서 거절해야 할 3가지는 一拒는 윗사람의 부당한 요구를 거절한다.
二拒는 부득이 요구를 들어줬다면 답례를 거절한다.三拒는 경조사의 부조를 거절한다.
원진각(서원의 교육내용.교육방법.교육평가)10
교육내용은 이황의
이산원규에서 사서오경을 본원을 삼고 소학.가례를 문호로 삼는다.
소학.가례.대학.논어.맹자.중용.시경.서경.주역.춘추
이단시 되던 책은 불학.서학.음사.도참.미신에 관한 책은 금하였다.
교수방법은 배운 글을 소리 높여 읽고 의리를 문답하는 講이 있다.
강은 旬講.望講.月講 등이 있고 암송낭독인 背講과 臨文낭독인 面講이
있다.낭독 뒤의 질의응답은 암송위주의 학습법을 극복하는 단계이다.
강의 평가는 大通.通.略通.粗通.不의 4단계로 평가했다.대통은 구두에
밝고 막힘이 없어야 하며 불은 낙제이다.강학활동과 제향기능도 교육
적 의미가 높다.향사시에 출입.승강.제례의식 등 기본적인 법도와 몸
가짐을 익혀야 한다.
원진각(서원의 기능.서원의 건축구조.서원의 조직)11
제례와 교육이 주목적이고 도서도 간행한다.
제례는 정기적(춘추제향제-중월 2월과 8월로 향교의 석전제와 같다) 외에
(삭망분향제-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원임과 유생이 향촉을 밝힌다)
(正謁-정초에 유생들이 서원에 모여 참배한다)
부정기적 제례는 이안제.환안제.위안제.예성제.사액례 등이 있다.
교육은 거접.강회.순제.백일장 등이 있다.
서원제례의 거행은 제관은 헌관과 집사로 나눈다.
제관이 정해지면 제기와 제수를 마련한다.제수는 대부분 관에서 지급했다.
제례를 마친 뒤에는 음복을 하고 제수를 나누어 가졌다.이를 복주라 한다.
유희를 연다.유희는 서원과 고을의 여러가지 일을 의논한다.
교수자(임원조직)은
원장.원이(원장보조).전신장의(지방관.도장의.掌議대표).
유림장의(양반유림.공부하는 유림대표).유림색장(양반유림.서원인근거주자)
강수재강장(경학예절강의책임자).당장(서재원생.원생의 사무를 담당)
학습자(유생조직)는
동재유생은 양반으로 정해진 수가 없으며 서재원생은 30명 평민으로 서원유지에
보조역할을 하였다.
서원입학자격은 사마시(생원.진사) 합격자에게 우선권을 주었다.초시합격자
에게도 허락을 했다.
필암서원지에 의하면 남자(奴)30명 여자(婢)30명이 있었다.
원장선생안은 역대원장 9명의 인적사항이 적혀있고 필암서원집감안은 전체
소임을 맡은 사람의 명부이다.
원진각(필암서원의 장서)12
필암서원의 문서일괄(보587호)는 1624년(인조2년)부터 1900년까지
자료로서 총14책64매 이다.
역대원장을 기록한 (원장선생안).수업교관.강의참석 인물명단을 기록한 (보강안)
강회참가자 명단인 (문계안).유생의 명단인 (서재유안서).재산기록인 (필암서원원적)
장성부사가 내려준 (부사하첩). 노비의 족보인 (노비보) 유림의 사회 경제 사정을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원진각(서화와 책을 읽는 유생)13
원진각(선생과 제자)14
원진각(서화와 다기법)15
원진각(제례)16
원진각(守墨世家)17
원진각(敎旨)18
1796년(정조20년) 10월16일 김인후의 시호를 文正으로
추증하고 품계를 정1품인 대광승록대부로 올린다는 교지이다.
원진각(象徵筆)19
상징필은 하서 김인후를 상징하는 붓이다.
원진각(세자시강원에서 교육)20
인종이 세자시절 하서 하서 선생이 세자시강원 설서로 있으면서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면서 각별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다고 한다.
원진각(하서 김인후-18현 중 유일한 호남인)21
원진각(경장각과 장판각.봉심록.서원의 방문자)22
奉審錄(보587-13호)은 필암서원문서일괄 중 제13호인 문서이다.
필암서원 방문객의 명단으로
1624년(인조2년)에서 1701년(숙종27년)까지 필암서원을 방문한
1520여명의 명단이다.
원진각(하서의 제자.배향인물안내)23
하서의 제자들
여윤 변성온. 백고 기효간. 월계 조희문. 송강 정철. 덕계 오건. 고암 양자징. 고반 남언기
달부 노적. 양보 윤기. 신각. 대로 서태수. 김종호(선생의 자). 안증. 죽헌 김제안
무흥 양산해. 청계 박원순
스승과 수제자의 일화
스승 김인후가 일찌기 자석벼루 하나를 양자징에게 주자 양자징은 그것을 잘 보관하여
가전의 보배로 삼으니 세상 사람들은 服齋 奇遵이 하서 김인후에게 붓을 준것과 동일한
아름다운 일이라 여겼다.사위인 양자징(양산보의 아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받았기에 행장을 지었다.
원진각(고암 양자징 선생의 연보와 가계보)24
고암 양자징(1523년-1594년)은 15세 때 하서의 둘째 딸과 결혼하고 장인으로부터
학문을 수학했다.1560년 하서가 서거하자 정철과 협의하여 선생의 행장을 지었다.
1592년 임란이 일어나자 삼자인 천운을 의병장 김천일.고경명부대에 보내어 병사
들의 식량을 조달했다.1594년 향년72세에 졸하였다.1596년 부인 광주김씨도 졸
하였다.1596년 우암이 양자징의 행장을 썼다.그 행장이 송자대전에 실려있다.
담양 소쇄원 제월당과 소쇄원 광풍각
양자징은 양산보의 둘째아들로 세고을의 현감을 지냈다.부인은 울산김씨로 하서
김인후의 둘째 딸로 일찍죽었다.광주김씨 김송명의 딸과 결혼해서 3남3녀를 두었다.
본관은 탐라.자는 중명.호는 고암으로 양산보의 둘째아들로 창평에서 출생했다.
5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피를 토하는 슬픔으로 병을 얻었다.소학공부를
철저히 실천하였으며 15세에 경사에 통달하였고 침잠하여 홀로 이치를 깨닫고
연구해서 스스로 마음으로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다.하서를 깊이 존경하여 그의
딸을 아내로 삼고 하서의 제자가 되었다.이황 문하에서 수학했고 이이와 성혼에게
강의를 받았다.선조 때 정종영의 천거로 거창과 석성현감을 역임했다.
아들 둘이 기축옥사에 죽고 양자징도 파직되어 집으로 돌아와 두문불출했다.
1594년 향년72세에 졸하였고 그 행장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그리고 정조10년
필암서원에 배향하게 되었다.
원진각(하서 김인후의 생애.하서 김인후의 연보)25
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은 공자를 모신 사당(문묘)에 신주를 모신 우리나라 18현에
한분으로 유일하게 호남출신이며 장성현 대맥동에서 1510년(중종5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울산.자는 후지.호는 하서.담재.1560년(명종15년)51세에 돌아가셨다.
22세에 사마시.31세에 문과에 급제.34세에 세자시강원 설서가 되었으며 1796년
(정조20년)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10세에 김안국에게 소학.1531년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이황과도 교우가 두터웠다.
기묘사화.을사사화로 병을 이유로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誠과 敬의 실천궁행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논설과 의리가 맹백했으며 내실
에 소홀한 선비를 꾸중하며 도의와 절개를 선비의 표상으로 삼았다.선생은 지방의
향교에 있는 문묘와 성균관에 모셔진 호남출신의 유일한 어른이시다.
하서 선생의 가계는 1세 시조는 신라 경순왕의 자 金德摯(김덕지)로 하서는 22세이다.
부인은 驪興尹氏로 2남(종용.종호).3녀(사위-조희문.양자징.류경염)를 두었다.
1510년(중종5년)장성현 대동맥에서 출생했으며 5세 때 부친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10세 때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다.14세 때 여흥윤씨 현감 임형의 딸과 혼인했다.
18세 때 신재 최산두를 찾아가 논학을 했다.24세 때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이황과
강학했다.30세에 차운시를 짓고 31세에 별시문과에 합격해 권지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32세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34세에 김안국의 부음을 듣고 만사를 지었다.
박사겸 설서가 되었다.세자가 그린 묵죽도를 하사받았다.옥과 현감이 되었다.
36세(인종1년)인종이 승하하자 방상을 입고 이후로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귀향
하였다.37세 효경간오 발문을 짓다.40세 대학강의 발문을 짓다.40세에 부친상
42세 모친상을 당하다.45세에 직강이 되었다.
48세에 주역관상편.서면사천도를 저술했다.49세에 기대승과 태극도설을 강론
했으며 50세에 이황에게 편지를 보내 태극음양이 일물이라는 잘못됨을 논했다.
기대승과 사단칠정설을 강론했다.나흠순의 인심도심설을 논박했다.1560년 51세에
졸하였다.장성 원당산에 장사지냈다.
1662년(현종3년)필암서원에 사액되다.1669년(현종10년)文靖의 시호를 받다.
1796년(정조20년)영의정에 증정되고 文正으로 시호를 고쳐받다.문묘에 배향되다.
원진각(하서의 출생과 성장.필암바위와 백화정)26
하서 김인후 선생의 영정과 하서 선생의 필첩(왼)
하서 김인후 선생의 출생과 성장(오)
5세 때에 천자문을 통달하여 시를 지었는데 그 시가 지금도 남아있다.
上之夕(대보름 저녁)
高低隨地勢(높고 낮음을 땅의 형세일 따름이오)
早晩自天時(이르고 늦음은 하늘의 때로 부터 일세)
人言何足恤(사람들 말이야 무슨 근심이 되랴)
明月本無私(밝은 달은 본디 사가 없도다)
8세에 전라관찰사 조원기(조광조삼촌)로부터 장성신동 천하문장이란
칭찬을 받다.
9세에는 복재 기준에게 우리 세자의 신하가 될 만하다 고 칭찬을 들으며
붓 한자루를 선물로 받았다.
10세에느 모재 김안국으로부터 소학을 배웠다.김안국은 하서에게 나의
어린 벗이니 삼대(중국 하은주)에나 있을 어진 인물이다 라고 감탄
했다고 전해진다.
18세에는 신재 최산두에게 10일간 어려운 질문을 하고 답을 구했다고
한다.
19세에는 성균관에 가니 용재 이행이 홍문관 대제학으로 있었다.칠석날
성균관에서 시험을 쳤는데 선생이 일등으로 합격해 그 글장이 입에 오르
내려 혹시 남이 지어준 것인가 의심해서 거처를 성균관 근처에 제한해
놓고 일곱가지 제목으로 다시 시험을 봤는데 즉석에서 답안을 작성해 제
출하였는데 글이 완벽하고 모자람이 없었다고 한다.그 중에서 염부와 영
허부는 본집에 함께 실려있다.
원진각(하서의 문학과 예술.하서의 친필.하서의 학문정진)27
하서는 약1600여수의 시를 남겼다.16세기 호남에는 면앙정시가단과 성산시가단이
형성될 만큼 가사문학이 융성했다.하서는 송순의 문인이며 성산시가단의 정철의 스승
으로 시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를 하였다.중국의 칠언율시 100수를 골라 음과 훈을
달고 (백련초해)를 지었다. 국문학 작품으로는 단가 3수(백구가)(悼林士遂寃死歌)
(자연가) 등이 있다.
소쇄원 48영 중에서(매대요월).(광석와월)
梅臺邀月(매대요월)
林斷臺仍豁(임단대잉활)(숲끊기자 대도 따라 활짝트이니)
偏宜月上時(편의월상시)(달 떠오를 그 때가 유달리 좋아)
最憐雲散盡(최련운산진)(어여뻐라 검은구름 다 흩어지고)
寒夜映冰姿(한야영빙자)(차가운 밤에 고아한 매화 자태 비치네)
廣石臥月(광석와월)
露臥靑天月(로와청천월)(푸른 하늘 달 아래 누우니)
端將石作筵(단장석작연)(넓은 돌이 돗자리 대신 이로세)
長林散靑影(장림산청영)(긴 숲에 흩날리는 맑은 그림자)
深夜未能眠(심야미능면)(밤 깊어도 잠이 오지 않네)
평생을 바친 실천적 도학은 중국 송나라 정주학에서 우리나라 포은 정몽주
정암 조광조로부터 학통을 이어받은 도학자이시다.평생 소학.대학.중용
효경.서명.역경을 평생동안 연구하여 실천적 도학을 추구했다.
우주관.인성관.수양론.경세론.의리론이 집약되어 있는 (주역관상편)과
(서명사천도).(천명도) 등을 저술했다.현재는 (천명도)만 남아있다.
선생은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예학에 밝았으며 필법은 진서.초서.전서
예서에서 모두 극치를 이루었다.명사들과 교류하고 백화정.훈몽재.낙덕정
소쇄원.면앙정.식영정.환벽당 등에 출입하며 한시와 부 등 1600여수를
지어 전하여 오는데 경구와 고사를 많이 활용했다.
선생의 국문학시는 (자연가).(도임사수원사가).(백구가) 등 3수가 있다.
특히 선생이 지은 (백련초해)는 고대 명시 100수를 모아 국문으로 음을
달고 해설하여 쓴 것이라 국어 어문학적면에서 귀중한 자료로 1610년(광해
2년)에 판각하여 필암서원에 보관되어 있다.
원진각(인종과 하서선생.호남가단에서 하서의 위치.호남학파 학맥형성)28
각별헀던 하서와 인종
하서는 인종의 세자시절 세자를 모시고 공부하는 곳인 세자시강원에서
인종에게 글을 가르쳤다.인종은 하서에 매료되었고 의가가 상통하여 그
정표로 묵죽도를 하사했다고 한다.
묵죽도 하단에는 하서가 지은 시가 있다.
根枝節葉盡精徵(근지절엽진정징)(뿌리 가지 마디 잎새 모두 다 정미롭고)
石友精神在範圍(석우정신재범위)(굳은 돌은 벗인양 주위에 들어있네)
始覺聖神侔造化(시각성신모조화)(성스런 우리 임금 조화를 짝하시니)
一團天地不能違(일단천지불능위)(천지와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셔라)
인종이 재위 9개월만에 병사하자 충격으로 하서는 낙향하고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다.인종이 서거한 칠월 초하루가 되면 술병을 가지고 집 남
쪽 산으로 올라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거듭해 밤을 지새고 내려 오
기를 평생동안 거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묵죽도와 묵죽도판이 있다.
호남가단에서 하서의 위치
호남가단의 최초는 면앙정 송순으로 그의 가르침을 받았고 완성을 시킨
송강 정철은 그의 제자였다.호남가단의 주요인물로는 면앙정의 주인 송순
식영정 四仙으로 알려진 석천 임억령.서하당 김성원.제봉 고경명.송강 정철
을 들 수가 있다.국문학으로서는 송순과 정철에 뒤지지만 한시는 두사람을
능가하였다.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魚巖雜詠 20수와 소쇄원 48영
면앙정 30영 등의 자연시를 들 수가 있다.
호남사림의 형성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로 호남학파 김식.최산두.양팽손.박상.고운.윤구.유운
유성춘.임형수.유희춘.송순 등 많은 인물들이 유배 파직 죽기까지 하였다.
당시 호남사림을 여섯계열로 나눌 수가 있다.김굉필계열(김인후.유희춘)
최부계열(최부.이중호).송흠계열(송흠.송순).박상계열(박상.송순.임억령)
이항계열(이항.김천일).김안국계열(김안국.김인후.유희춘)
원진각(하서의 관직생활.통곡대)29
하서의 관직생활은 1543년(중종38년) 홍문관 박사(정7품)겸 세자시강원 설서(정7품)
로 발탁되어 인종과 사제의 관계를 맺었다.경영검토관이 되어 백성이 잘살고 나라가
부강하게 되는 왕도정치를 할 것과 기묘사화 때 죽은 사람을 용서해 줄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중종이 크게 뉘우쳐 소학의 교육과 향약보급을 허락했으며 인종 원년
기묘명현을 용서하고 잘못된 폐습을 바로 잡았다.하서가 귀향하니 중종이 옥과현감
에 임명했다.1545년 인종이 즉위한후 왕이 허약하기에 약을 의논하는 일에 참여하
기를 자청했으나 거절당해 옥과에 귀임했다.그해 7월 인종의 변고로 옥과현감을 사
직하고 교향으로 내려왔다.그후 명종이 즉위한 후에 여러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았다.오로지 학문에 정진하여 효경간오발.대학강의발을 저술하며 후진양성에만
힘을 썼다.후진으로는 송강 정철.월계 조희문.고암 양자징.금강 기효간.호암 변성온
등이 있다.
원진각(하서의 가르침)30
하서는 공부를 할 때 반드시 소학을 읽고 대학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20대의 양자징에게 논어.맹자.대학.태극도해 등을 가르쳐 주었다.하서는
특히 대학에 몰두하였다.그안에는 격물.치지.성의 정심의 공력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효험이 모두 들어 있어 이것을 버리면 그 어떤 것도 정할 수가
없다고 했다.송강 정철에게도 점안촌에서 대학을 강의했다. 그 때 그가 노닐
던 바위를 대학암으로 불렀다.또한 양자징에게 송사를 가르쳤는데 깊이 이해
를 한듯 하였다.文史哲이라고 하여 선비에게 역사공부는 중요했다.학문은
하늘이 내려준 理를 밝히는데 힘써야 한다고 하였다.그의 학문은 두 사위
(조희문.양자징)에게 준 연작시 21수에 잘 나타나 있다.
학문이란 배를 밀어 나가게 하는 것과 같아 노를 한번 늦추면 문득 뒤로 물러
난다고 하여 부단한 정진만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원진각(고암이 하서를 그리며 쓴 시)31
고암 양자징이 하서 김인후를 그리면서 行狀을 쓰고 난 후에
河西生應世(하서생응세)(세상의 부름을 받아 하서가 나니)
維岳降英靈(유악항영령)(산악이 내려 보면 영령이로세)
道義天年重(도의천년중)(도의는 전년두고 중하다며는)
文章一代傾(문장일대경)(문장을 한 시대를 기울렸다오)
因心敦孝友(인심돈효우)(효우에 돈독할사 타고난 마음)
戀主盡忠誠(임 그리워 충성을 다했더라오)
實錄吾何敢(실록오하감)(실록을 내 어찌 감당하리요)
抽毫只費精(추호지비정)(붓대들고 정신만 허비했을 뿐)
사위이자 제자인 양자징이 행장을 썼는데
자신의 재주가 미치지 못함을 겸손해 하면서 쓴 시이다.
(2018.10.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