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못된 욕망(마 4:1-11)
<본문 속으로 들어가기>
* 오늘 본문은 2주 전 설교의 본문이었던 눅 4:1-13과 평행을 이룬다. 거의 같은 내용이기 때문에 본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다음 몇 가지를 언급하고자 한다. 먼저 예수가 당한 시험, 즉 빵,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은 그 자체가 문제가 되기보다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것을 가리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잘못된 욕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래서 예수가 당한 시험의 내용이 된 것이다. 그리고 악마가 제시한 방법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 기적으로 포장된 비정상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거부해야 마땅하다.
* 수잔 R. 가렛이 쓴 <시험당하신 예수>라는 책은 우리가 어떻게 좁고 곧은 길 즉 주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초기 기독교의 관점에서 예수가 시험/유혹을 당한 것은 비정상적이거나 불경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 시대의 기독교인들(& 유대교인들)은 좁고 옳은 길을 가려고 애쓰는 모든 사람들은 다 시험을 받게 될 것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처럼 불의한 세상에 맞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그에 걸맞는 시험/유혹을 당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겼다.
* 특히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받은 시험/유혹이 공생애가 시작된 광야에서 뿐만 아니라 공생애 전 과정에서 이루어졌고, 그 시험/유혹과 유혹은 악마뿐만 아니라 유대 권력자들, 심지어 제자들에 의해서도 이뤄졌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복음서는 악마, 유대 권력자들 그리고 제자들을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좁고 옳은 길에서 예수를 멀어지게 하려는 시험/유혹의 대리자로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좁고 옳은 길이 요단강에서부터 십자가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이며, 예수는 시험을 받았으나 이겨낸 존재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삶에 적용하기>
* 욕망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가지거나 하고자 간절하게 바람’을 의미한다. 즉 욕망이라는 말 자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정적인 의미로 이 단어를 사용할 때 그 앞에 ‘잘못된’ 또는 ‘지나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설교 제목이 ‘잘못된 욕망’인데 그렇다면 잘못되지 않은 욕망, 즉 올바른 욕망도 존재한다는 전제가 성립한다. 그러나 올바르고 올바르지 않고는 욕망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지나친가 지나치지 않은가의 문제이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욕망은 적절하고 올바른 반면 지나친 욕망은 잘못된 것이다.
* 욕망은 선천적인 것이며 일종의 본능과 같은 것이지만 후천적인 경우도 있다. 먼저 본능대로 살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때로 우리는 그 본능을 절제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하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만다. 심리학자 빌헬름 분트나 윌리엄 맥도갈은 식욕·성욕·군거(群居)·모방·호기심·투쟁·도피 등을 이런 선천적 욕망, 즉 본능으로 간주했다. 이 중 칼 마르크스는 식욕을 강조했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성욕을 강조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니체나 알프레트 아들러는 권세욕을 강조하면서 각각 이를 근본으로 하여 자신들의 학설을 수립했다.
* 식욕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다. 기아는 수천 년 동안 인류 최악의 적이었다. 출애굽기에 소개된 요셉의 이야기에서도 보여지듯 고대 이집트나 중세 인도에 심한 가뭄이 들면 인구의 5%에서 10%가 사라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식량이 동이 났는데 교통수단이 너무 느렸기 때문에 주변 국가에서 값이 비싸더라도 충분한 식량을 수입할 수 없어, 아무리 강력한 정부라도 이런 경우 굶어죽는 사람들을 무력하게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아보다 과식이 문제가 되는 세상이다. 물론 지금도 굶주리고 영양실조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 2014년 영양실조를 겪는 사람이 8억 5천만 명이었던 반면, 과체중이었던 사람은 21억 명 이상이었다. 2010년에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은 사람이 총 100만 명 정도였던 반면, 비만으로 죽은 사람은 300만 명이었다. 현대인들에게는 기아와 영양실조보다 비만이 더 위협적인 셈이다. 2030년에는 인류의 절반이 과체중이 될 것으로 예상되기도 한다. 비만과 과체중은 필요 이상으로 먹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당연히 식욕이다. 생존을 위해 먹는 것은 올바른 욕망 충족이지만 필요 이상을 먹어 비만과 과체중이 되는 것은 잘못된 욕망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개인적인 얘기를 잠깐 하겠다. 제가 작년에 비해 배가 많이 나왔는데 스테로이드라는 약의 부작용 때문이다. 위염의 원인이 호상구이고 그걸 치료하기 위한 약이 스테로이드인데 부작용 중에 식욕 증진이 있다. 그래서 고민인데 식욕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 마르크스가 강조한 식욕으로 인해 생기는 폐해가 비만과 과체중, 그리고 단명이라고 한다면, 프로이트가 강조한 성욕으로 인해 생기는 폐해는 사회적 지탄과 패가망신일 것이다. 얼마전 미투 운동이 세차게 불면서 예술계와 학계, 법조계 등에서 그동안 감춰졌던 성폭력 사례들이 드러났고 그로 인해 사회적 저명인사로 누리던 명예와 사회적 기반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 와중에서 검찰의 경우는 서로 봐주기 관행으로 인해 진상이 덜 밝혀진 편이었는데 최근 윤석렬 검찰총장의 성접대 문제가 불거져 다시 문제가 되고 있다.
* 부장 검사를 중심으로 롬살롱에서 회식을 빙자한 단합대회를 하며 결속을 다지는 검찰 속성상 크고 작은 성접대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목사들의 경우 역시 대형교회 목사나 지명도가 높은 목사들의 성범죄가 계속 밝혀지고 있어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목회자들의 성범죄는 재정문제와 함께 가장 심각한 문제인데 대표적인 목회자 성범죄 사례인 전병욱 목사의 경우처럼 노회나 총회에서 엄단하지 않고 솜방망이 처벌을 하는 등 검찰과 같이 제 식구 감싸기 행태를 보이고 있어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기 힘든 실정이다.
* 니체나 아들러가 강조한 권세욕의 경우, 형태에 따라 대통령이나 총리, 국회의원처럼 가장 높은 권력을 노리는 경우들부터 우리 주변의 크고 작은 조직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경우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인간의 타고난 욕구를 강도와 중요성에 따라 하위단계에서 상위단계로 계층적으로 배열해 5단계로 분류한 아브라함 매슬로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 그 다음 단계의 욕구가 발생한다. 즉 인간의 욕구는 행동을 일으키는 동기요인이며, 인간의 욕구는 낮은 단계에서부터 그 충족도에 따라 높은 단계로 성장해 간다는 것이다.
* 욕구 5단계설에서 1단계 욕구는 생리적 욕구로 먹고 자는 등 최하위 단계의 욕구이다. 2단계 욕구는 안전에 대한 욕구로 추위·질병·위험 등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욕구이다. 3단계 욕구는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로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애정을 주고받는 욕구이다.(충족되지 않으면 성범죄로 연결) 4단계 욕구는 자기존중의 욕구로 소속단체의 구성원으로 명예나 권력을 누리려는 욕구이다. (명예욕, 권력욕과 연관된다.) 5단계 욕구는 자아실현의 욕구로 자신의 재능과 잠재력을 발휘해 자기가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성취하려는 최고수준의 욕구이다.
* 우리 각자는 지금 이 5단계 중 어느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그 단계에 해당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 욕구가 크면 클수록 우리의 행복지수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H = C/D라는 공식 때문이다. 우리의 경제 능력이 아무리 좋아 C가 높아진다 해도 D가 그만큼 또는 그보다 높다면 우리의 행복지수는 1을 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의 소비능력(C)보다 욕구(D)가 1/10이라면 우리의 행복지수는 10이 될 것이다. 어느 쪽이 더 행복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망을 줄이기보다 물질이나 권력 등 소유를 늘리려고 노력한다. 이는 종교인들도 마찬가지인데 그 이유는 종교의 본질적 가치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나 불교를 비롯한 모든 고등종교는 욕망을 줄이거나 욕망에서 벗어나라고 가르친다.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이 죄이고 번뇌이니 그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고 해탈이다. 물론 어느 종교도 기본적 욕구의 충족조차 부정하지는 않는다. 일부 극단적인 금욕주의는 특정 가르침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향일 뿐 종교 전체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 특히 기독교는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창세기의 창조이야기에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부족장들에 대한 물질적인 풍요 보장 등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생존과 번영을 금하지 않는다. ‘정상적인 성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중세시대 및 청교도 시대 등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금욕을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적은 있지만 보편적인 형태는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인간을 비롯한 자연 전체의 존재 이유와도 같은 것이기 때문에 성적 욕망 자체가 죄가 되거나 금기시되는 것은 아니다.
* 문제는 지나친 욕망이다. 과유불급이라고 뭐든 지나쳐서 좋은 건 없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욕망에 있고, 모든 권력은 욕망에서 나온다”라는 소설가 이외수의 말처럼 대한민국을 ‘욕망공화국’이라고 불릴 만큼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다. 이외수에 따르면 한국인은 자기의 과거 정치신념이 좌나 우를 가리지 않고, 아파트 32평을 사는 순간, 가장 보수적인 정당에 표를 던지는 경향이 생긴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기 아파트 값을 유지하거나 올려주는데, 보수정당이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모두 그렇다는 말이다.
*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기독교인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겉으로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정죄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런 욕망들을 추구해 오고 있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의 차이는 크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에 대한 책임은 절제하기보다 욕망을 부추기는데 앞장 선 교회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70년대 산업화와 도시 밀집화(특히 아파트 붐) 덕에 초고속 성장한 대형교회들은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복인양 선전하면서 교회 다니면 복 받는다는 요설을 늘어놓았다.(“예수 믿고 복 받으라”는 전도)
* 그 결과 이제 겨우 130년의 선교역사를 갖고 있는 한국교회가 세계최대 50대 교회 중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등 외형상 엄청난 성장을 이뤄냈지만, 그런 교회들은 세상의 존경은커녕 근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절정이 이주 전에 언급했던 대형교회의 세습이다. 이처럼 절제보다 욕망을 부추기는 선봉장 역할을 계속하는 한 한국 교회의 미래는 매우 어두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욕망 자체를 부정하기보다 지나치고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히는 일을 경계하며 절제의 미덕을 배우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 우리가 예수의 시험 이야기에서 배워야 하는 자세는 바로 그런 절제의 미덕이라고 믿는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절제할 수 있을까? 먼저 욕망의 절제로 인해 더 큰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래 전 출판된 베스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주인공 조나단이 찰리에게 들려준 '마시멜로 실험'은 스탠퍼드 대학의 월터 미셸 박사가 심리학과 부설로 세워진 빙(Bing) 유치원의 네 살짜리 653명의 유아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마시멜로 실험'을 토대로 한 것이다.
* 1966년에 실시된 '마시멜로 실험'은 대략 다음과 같다. 연구원이 네 살짜리 꼬마들에게 마시멜로, 쿠키, 그리고 프레첼을 내놓으며 그 중 하나를 고를 것을 제시했을 때 대부분 유아들은 마시멜로를 골랐다. 다음 단계로 "지금 마시멜로를 먹는다면 한 개만 먹을 수 있고, 15분을 기다릴 수 있다면 두 개를 먹을 수 있다"는 상황을 설정했다. 실험에 참가한 모든 인원 중 15분 이상을 기다린 어린이는 대략 30%에 불과했다. 70%에 해당하는 어린이들이 30초도 채 지나지 않아 마시멜로를 먹어버렸다. 전체 어린이들의 총 평균 기다림 시간은 3분 정도였다.
* 그런데 실험 이후 15년이 흐른 1981년, 아주 놀라운 사실들이 입증되었다. 마시멜로 실험에서 '기다린 그룹'과 '기다리지 않은 그룹'을 대상으로 문제해결 능력, 계획수행 능력, SAT(수능시험) 점수 등을 조사 비교하였다. 그 결과, 15분을 기다렸던 아이들의 SAT 성적은 30초를 넘기지 못한 아이들보다 무려 210점이나 높았다. 그리고 가정과 학교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 걸쳐 매우 우수하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실험 결과, 인종이나 민족에 따른 차이는 거의 없었다. 지능지수보다도 더 정확한 실험임이 증명되었다.
* 성인이 된 이후에도 '기다린 그룹'은 현재에도 성공한 중년의 삶을 살았지만 '기다리지 않은 그룹'은 약물중독, 비만 등의 여러 문제들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마시멜로 실험'이 주는 교훈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욕구 조절' 내지는 '참을성'의 중요성이다. 이는 자신의 어떤 욕구나 감정을 무조건 이유 없이 억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목적을 위해 사소한 욕구들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기다림을 선택한다거나, 또는 더 나은 것을 얻기 위한 사려 깊은 숙고의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 둘째, '자기통제' 능력의 중요성이다. 이는 앞뒤 또는 선후의 상황을 더 잘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즉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할 줄 알고 실천할 줄 아는 분별력을 의미한다. 욕망을 절제한다는 것은 이처럼 일상의 크고 작은 일에서 조절하고, 참으며, 통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를 핑계 삼아 아무 생각 없이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삶이나, 세상 풍조를 핑계 삼아 잘못된 방향으로 휩쓸려 살아가는 삶은 예수가 가르친 좁고 옳은 길과 상관이 없다.
<마무리하기>
* 예수의 길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욕망 이외의 불필요한(화려하게 보이지만 허망한)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더 가치 있고 본질적인 일에 매진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필요 이상 소유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나누며 섬기는 삶이다. 성경에서 그런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이 삭게오다. 삭게오는 돈밖에 모르던 세리장이었지만 예수를 만난 후 자신의 잘못된 욕망을 극복하고, 자기 재산 절반을 나누어주었으며, 토색한 것은 4배로 갚겠다고 선언했다. 자고로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에는 이런 변화가 따라야 하는 것이다.
* 삭게오가 최고의 존재 이유라 생각했던 재물을 포기하고 나눴던 이유는 그의 영혼이 돈으로 인해 만족되지 않는다는 허전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허전했던 영혼의 빈 공간, 물질로 도저히 채워지지 않던 그 공허함이 예수가 가르치고 보여준 사랑으로 채워지자 그가 욕망했던 대상이 재물의 축적에서 나눔과 섬김으로 변화됐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결국 잘못된 욕망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 욕망을 절제하는 것과 더불어 다른 방향의 욕망, 즉 올바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 삭게오처럼 나만을 생각하며 악착같이 재물을 모으려는 욕망을 재물에 집착하지 않고, 더 나아가 이웃을 위해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섬기려는 욕망으로 대체한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평화스러워질 것이다. 요한 웨슬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영혼을 가득 채우면, 죄를 지을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완전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가능한 많이 벌어라, 가능한 많이 저축하라, 그리고 가능한 많이 베풀어라”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웨슬리의 가르침처럼 나누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