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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반란사건 14연대 반란과 제주4.3사건 무장폭동
<제주 4.3 폭동 사건>
1. 제주 4.3 폭동 사건 발발
1945년 9월6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여운형)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자 제주도에서도 공산좌익들이 9월 15일에는 제주읍 인민위원회, 9월 22일에는 제주도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여 제주도를 선점하여 장악하고 있었다.
미군정청은 본토와 다르게 뒤늦은 9월 28일에야 제주도에 상륙하여 도지사대리로 김누희를 임명하여 제주도청을 설립하고, 감찰청(청장 김대봉) 및 제주경찰서(서장 강동효)와 22개의 지서를 발족시켰으며, 제주지방법원(법원장 최원순)과 제주지방검찰청(검찰청장 박종훈)을 설치하였다.
여기에다가 제주 인구는 해방 후 불과 3년여만에 15만명에서 30만명으로 급속하게 증가한데서 알 수 있듯이, 일본 중국에서 살던 동포들이 제주로 대거 몰려 들어 급작스러운 인구팽창이 이뤄지면서 이중에는 일본군에 복무했던 친일파, 중공 의용군과 팔로군 부대원과 그 가족들도 많았다.
따라서 제주도는 순수한 토박이 15만명 이외 나머지 외부인 15만명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의용군과 팔로군 출신들과 섞이면서 자연스럽게 활발한 공산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실제로 본토와 다르게 제주도의 친북좌파들은 일본군 무기로 무장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남노당의 지시에 따라 제주도 지구당(총책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군사부 예하 제주인민해방군(사령관 이덕구, 김달삼 월북이후 승계)을 조직하고, 인민해방군 예하로 각 면단위에 중대를 편성해서 일본군 무기를 소지한 500여명의 무장부대원을 보유함으로써 언제든지 공산주의 무장폭동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무수한 양민을 학살하고 제주도에서 달아 난 김달삼(본명 이승진)은 해주 남노당 인민대표자대회(1948년 8월 21~26)에서 북조선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국회의원)에 선출되고 북조선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 9월에는 북조선민주주인민공화국 헌법위원(총49명)이 되고, 테러분자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을 나와 인민유격대 제3병단 태백산지구사령관(1949년)이 되어 영덕, 봉화, 태백, 울진, 청송 등에서 테러활동을 하다 1950년 3월 21일 저녁(6시 이후)에 국군진압대에게 사살되었다.)
반면에 제주도에서는 공산좌익들의 세력에 비해 민족주의 보수 애국세력들은 매우 약했다. 친일파 타도, 반공을 내세운 자생적 조직인 한라단이 있었으나 정치적 역량은 미미했다. 46년 7월 이후 정치적 역량을 가진 대한독립촉성회, 한국독립당, 비상국민회, 광복청년회(대동청년단) 등이 결성되거나 지원이 이뤄졌다.
공산좌익들이 해방직후부터 불법 군사무장을 갖춘데 반해 46년 11월 16일에야 국방경비대 제9연대(부대장 장창국, 모슬포 대촌)가 창설되어 제주도 방위를 담당하게 되었고, 해안경비대도 뒤를 이어 제주도의 해안을 방어하게 됐다.
1948년 2월 7일 친북좌파 전평이 일으킨 노동조합 태업 폭동사태(2.7구국투쟁)는 제주도에서도 발생했으며, 뒤이어 북한으로부터 내려온 5.10 총선거를 방해하라는 지령에 따라 제주도에서도 폭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 이전에 제주 9연대에도 친북좌파들이 침투하여 활동했는데, 대표적으로 대위 문상길을 들 수 있다. 문상길은 음식에 독약을 풀어 소령 이지업을 암살하려고 했다. 이렇듯 제주도에서는 서북청년단 같은 반공애국세력과 친북좌파세력의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전남 8관구 경찰청 1개 중대와 각 경찰청에서 1700여명을 파견하고, 부산 5연대 2대대가 출동했으나 대대장 소령 오일균이 좌익 김달삼에게 포섭되고 만다. 이로 인해 진압작전은 회피되어 좌익척결에 실패하면서 경찰관 18명 전사 22명 부상 2명 납치, 공무원과 민간인 42명이 피살됐다.
이에 따라 제주9연대와 파견 부산5연대 2대대를 통합하여 제11연대로 재편성하여 부대장으로 중령 박진경을 부임시켰다. 하지만 박진경은 6월 19일 새벽 3시경에 친북좌파 대위 문상길의 암살 지시를 받은 좌익 상사 최 모의 세포인 좌익 위생병에게 M1소총으로 막사에서 암살당했다.
1948년 5월 4일 교육훈련대 수준으로 미약하나마 14연대가 창설(초대연대장-일본해군 출신으로 4연대 1대대장 역임한 소령 이영순) 됐다. 일제가 중학생들을 강제노역시켜 건설한 일본해군항공부대였던 여수읍 신월리에 위치했다.
여수14연대에서 반란을 일으킨 핵심인물들은 제4연대(1948-광주) 1대대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경비사관학교와 4연대 1기 동기생들로 평소에 친북좌파 사상으로 인해 군기대(헌병대)의 관찰대상이었는데, 신설연대로 착출해 보냄으로써 무마하려던 방법이 여순반란사건을 가져오는 비극이 되고 말았다.
당시 사회상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애국심의 결여로 인해 서로가 군입대를 극도로 기피함으로써 한국 군대는 기본 병사 숫자도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다. 병역기피가 만연한 상태에서 탈영마저 수 없이 일어 난 까닭은 열악한 복무지원과 함께 너무나 엄격한 일본군식 내무반 생활 때문이었다.
이렇게 되자 신병모집에 있어서 신원조회는 극히 형식적이었고, 너무나 간단해서 형사범 수배자를 비롯해서 경찰에게 쫓기던 친북좌파들이 대거 군대로 피신할 지경이었다. 여수주둔 14연대에도 전국에서 몰려든 친북좌파들이 피신해 왔는데 그 숫자가 다른 연대에 비해 많았다.
("그 때 좌익청년을 쫓다 보면 으레 경비대에 입대했다는게 핑게처럼 되었죠. 그러면 차 사정이 형편없던 때라 말을 타고 14연대를 찾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문에서 연대장 면회를 요청하면 30분은 기다려야 했습니다. 겨우 만나 문제된 사람을 체포해 가야겠다면 상대방 대답은 이미 경비대에 입대했기 때문에 자체조사를 하고 상부에 연락해 결과를 회신해 주겠다는 공식적인 대답만 듣고 되돌아서기 일쑤였죠" - 당시 여수경찰서 정보과장(사찰과장) 박명규)
5.10선거 방해공작 실패와 남북적화협상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최능진, 서세충, 김규진 등이 남노당과 결탁하여 소련 10월혁명기념일에 반란을 일으키려다 거사 20일 전에 일망타진된 '혁명의용군사건'에 14연대 부대장 소령 오동기가 김규진과 접촉하여 김규진의 세포 3명을 불합격되었는데도 제1연대와 제8연대에 입대시켜줬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소령 오동기는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따로 광주 5여단이 군부내의 좌익분자 색출작업을 진행해 광주4연대와 여수14연대 내부의 좌익 계보를 파악하여 4연대에서 50여명, 14연대에서 40여명을 색출해 체포하고 핵심분자 3명은 광주로 이송했다. 14연대의 친북좌파들은 소령 오동기와 부대원 40여명이 체포되자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중위 김지회는 5여단에 호출되자 불안에 떨며 철도전화로 순천의 중위 홍순석과 연락을 해 홍순석도 5여단의 호출명령을 받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밤마다 막사주변에 좌익 선동지가 뿌려지고 산에서는 좌익들이 피운 봉화가 자주 일어나는 가운데,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14연대에서 좌익세력 색출작업이 진행되면서 재편작업에 돌입하자 남노당은 제주폭동 진압 출동 직전에 반란을 일으킬 것을 이재복을 통해 상사 지창수에게 지령을 내렸다.
(1948.10.19 점심 무렵 중국 음식점에서 이재복은 상사 지창수에게 - 당시 경비대와 경찰과의 세력 알력을 이용해서- 경찰이 습격한 것처럼 가장해 봉기 직후 병사들을 참여시킬 것과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내려 오고 있다는 선전활동을 펴라는 지령을 내리고, 14연대의 반란이 성공하면 전국 군부대에서 호응하여 봉기하도록 계획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제주 출동 시각이 연기되어 24시 정각으로 미뤄지자 상사 지창수는 1948년 10월 19일 밤 10시 정각에 40여명의 친북좌익 병사들을 동원해 1대대 본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밤 10시가 되자 계획대로 M1 소총 한 발을 발사하고 위병소에서 비상나발을 불었다. 규정에 따라 병사들은 완전무장을 갖춘채 중대본부 앞에 집결하여 종합연병장으로 집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통신장교 소위 김정덕은 구타당한채 도망가다 총탄에 맞아 팔이 관통 당하고, 소위 조병모는 총검에 복부를 등 뒤까지 관통당해 죽고, 주번사관 소위 박윤민은 총살 당했다. 작전관 소위 전용인은 현장탈출에 성공했다.)
친북좌파 병사들 일부는 일본 해군이 시설물로 사용하던 산허리 동굴에 마련된 무기고와 탄약고를 점령하고, 종합연병장에 완전무장 병사들의 집합이 끝나자 상사 지창수는 연단에 올라가 '경찰이 14연대를 포위한채 공격해 왔음으로 응징하기 위해 경찰을 타도해야 하고, 제주도에 가서 동족상잔을 할 이유가 없으니 반대해야 한다'고 하면서 '북조선인민군이 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중에 있음으로 반동장교들을 소탕하여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 행동하자'고 선동했다.
병사들의 호응을 얻어내자 건물 수색작업에 들어가 1,2,3 대대장을 모두 사살하고, 장교 20여명을 사살해서 부대를 완전 장악했다.
(종합연병장에서 하사관 3명이 안된다고 나섰다가 현장에서 총살당했다. 소위 전용인은 1중대장실에 있던 대대장 대위 김일영에게 반란 사실을 알리고 지시를 받아 여수읍에서 하역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연대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연대본부로 달려 갔지만 읍내와의 유일한 통신수단이었던 전화선은 이미 절단되어 있었다. 전용인은 통신소로 달려가 광주5여단에 연락을 시도했지만 일일 통화량이 1~2회에 불과해 광주 5여단 통신대는 전화기를 차단하고 취침하고 있었기에 보고에 실패했다. 무전기 교신도 시도했지만 역시 5여단에서는 호출에 응하지 않았다. 최후수단으로 전국 군부대로 전파되는 SOS 신호를 송출했으나 이 마저도 응답이 없었다.
- 당시 비상나발 소리나 총성은 부대내에서 개인적인 다툼이나 경찰과의 마찰로 인해 엄포용으로 자주 발생하던 상황이라서 거의 대부분이 심각하게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반란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기 한국군의 편성 상황을 볼 필요가 있는데, 국군이 창설되기 이전에 대한민국에는 무려 30여개나 되는 사설 군사조직이 난무하면서 서로 견제 충돌 했었다. )
부대 장악에 성공하자 1대대 외곽에 잠복해 있던 친북좌익 23명(민청, 민애청, 인민위원회 소속)이 길잡이로 가세하여 여수읍으로 향했다.
반란 첩보를 입수한 여수 경찰서는 서장 고인수, 정보과장 박명규, 수사과장 이위용, 경비과장 김만수, 총무과장 정홍수 등이 참석한 긴급 대책회의를 진행하고, 비상소집에 따라 본서와 지서에서 150여명의 경찰관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반란군들은 봉산 지서 부근에서 1차 저지선을 형성하고 있던 경찰관들과 지원나온 보조군기대원(보조헌병대원) 40여명을 학살하듯 전멸시키고 밤 11시 10분(30분) 경에 여수읍 중심가에 진입해서 22명의 경찰관이 사수하고 있던 여수 경찰 본서를 포위했다. 치열한 총격전이 진행되다 10월 20일 새벽 3시 30분 경에 반란군이 경찰서 건물진입에 성공하면서 여수경찰서마저 반란군에게 점령 당해 태극기가 내려지고 인공기가 게양되면서 여수는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서장 고인수는 정보과장 박명규에게 팔목을 잡혀 뒷문으로 억지 탈출하게 되지만 오전 11시경 경찰서를 사수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경찰관 정복차림으로 다시 본서로 향하다 읍사무소 앞 공터에서 총으로 무장한 남학생 2명의 검문에 걸려 끌려간다. OB암살대장(유달산 호랑이) 서종현(후에 빨치산 활동하다 국군토벌대에게 사살됨)에 의해 본서 후문에서 표적이 되어 첫 발에 오른팔, 두번째 발에 왼팔을 총탄에 맞고서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다 연이은 3발의 총탄에 의해 순직했다.
20일 오전 10시 반란군들은 조선은행 여수지점을 습격하여 남조선이 해방되어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음으로 조선은행을 인민공화국 중앙은행이 관리하게 됐다며 장악에 나서 반란군이 섬멸당하던 26일 오후 5시경까지 총2천1백만원을 강탈해 갔다.
20일 오후 3시 여수읍 중앙동 로타리에는 강제로 각 가구마다 1명씩 강제동원된 수 천명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유목윤(남노당 전남도당 서남지구 올구 연락책)은 '인민해방군이 여수에 상륙했으며, 38선을 돌파한 인민군이 남진중에 있고, 이승만은 일본으로 도망갔다'고 선동했다.(이승만은 맥아더와의 면담을 위해 19일 일본으로 출발했다.)
호명방식으로 미리 정해진 인물들로 인민위원회 의장단을 선출하고 군중집회를 마쳤다. 여수읍내에는 일체의 방송청취를 금지한다는 좌익들의 포고문이 나붙었다. 여수일보를 장악한 좌익들은 인민일보라는 신문을 발행해 '인민해방군 여수상륙, 인민군 38선 돌파, 이승만 일본으로 도피'라는 내용의 기사를 연일 실어댔다.
좌익들의 경찰 색출난동으로 여경 정운자(23세)는 상무관에서 죽창에 찔려 죽었다. 반란 소식을 모르고 입항했던 정기여객선 태완호에 승선해 있던 수사과 정형채 형사는 읍사무소에서 총살, 한복으로 갈아입고 한재고개를 넘던 정보과 심찬호 순경은 충무동 파출소 앞으로 끌려가 몽둥이 구타로 순직했다. 정보과장 박명규를 잡는데 실패한 좌익들은 총살시킨 경찰관 시체 한구를 트럭 뒤에 매달고서 박명규를 처형했다며 시내를 끌고 다녔다. 총74명의 여수 경찰관들이 살해 당했다.
인민대회 인민재판으로 호남 재벌이었던 천일고무공장 사장 김영준, 여수 독촉국민회의 의장 차호인(어머니,아내,자녀2명 포함), 노총 여수지구 위원장 김창업 등과 더불어 서종병, 김옥동, 김동준, 박귀환 등 수 많은 애국적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여수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30여명의 민간인들은 뒷산에서 기관총 난사로 학살당했다. 이중 철도경찰 소우석과 소라 지서장은 1만원씩 뇌물을 주고 학살현장에서 가짜 총질로 살아 남았다. 읍사무소 2층 회의실에 갇혀 있던 민간인 200여명은 10월 23일 제5사단 군함에서 박격포 사격을 시작으로 진압작전에 돌입하던 순간 포격에 놀란 반란군에 의해 집단학살 당하고 말았다.
10월 26일 진압군에게 위기감을 느낀 반란군은 마지막으로 여수경찰서에 갇혀 있던 양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OB암살대장 서종현은 M1소충을 든 학생 3명을 데리고 들어와 1.2.3.4.5감방을 돌며 양민학살을 지시했다. 6감방에 갇힌 민간인들만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살아 남았다.
19일 밤에 시작된 반란은 다음 날인 20일 아침에 순천역에 진입한 반란군들에 의해 순천마저 장악당하고 만다.
(순천, 벌교, 고흥, 보성으로 확대된 상황은 생략한다. 순천에서도 많은 양민들이 반란군 세력에게 학살당했다.)
4. 반란군 진압작전 실시
주력 진압부대인 군산12연대는 광주4연대와 합류, 대전2연대는 전주3연대와 합류, 마산15연대는 하동방면에서 투입되어 친북좌파 반란세력 소탕작전에 나섰다. 해군 302호 함정(충무공호)는 여수 연안 봉쇄에 돌입했다. 전투사령부에서는 L-4기 3대를 동원해 정찰과 전단살포 업무에 나섰다.
자수를 하면 관대하게 대하겠다는 벽보가 사방에 붙었으나 친북좌파들은 극악하게 저항했다. 4연대 2대대(대위 유정석)가 소대급 특공부대를 조직해 순천 경찰서를 탈환했을 때, 사무실과 후문에는 시체가 층층히 쌓여 있었는데 경찰관들과 가족들로서 한 처녀는 손톱이 짓뭉개진채로 국부가 칼로 난도질 당해 벌거벗겨져 죽어 있었다. 인민재판으로 총살 사격직전의 신문사 기자 윤 모는 진압군에게 구출되어 살아 남았다.
친북좌파들의 가족인 어린 중학생들까지 캘빈소총으로 무장해서 골목길에서 난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12연대 3대대가 중앙동 입구 골목길 수색에 나서자 교복을 입은 한 여중학생(순천읍 남노당 조직책 김 모의 딸)이 수색대 하사에게 고생한다며 시원한 물 한잔 마시고 가라고 하면서 물을 들이키는 순간 권총으로 죽이고 확인사살까지 두 발을 쏘고 달아났다.
순천이 장악당한 20일 오후 5시께 구법원 앞에는 농업학생 50여명, 사범학생 60여명, 순천중학생 50여명, 매산중학생 30여명이 모인 것을 계기로 점차 무장반란학생조직으로 변해 갔다.
여수에서도 심각했다. 여수여중 교장이자 인민위원이었던 송도에게 쇄뇌된 여수여중 여학생들은 일본 99식 소총으로 무장해서 게릴라전을 폈다. 서국민학교 지역 수색작전에서 상사 나 모가 5학년 전 모양의 칼빈총에 피격당했으며, 12연대 장갑차에 탑승했던 상사 유 모와 하사 박 모는 말을 걸며 접근하는 3명의 여학생들을 제지하기 다가갔다 근처에 숨어있던 남학생 2명에게 저격당해 숨졌다.
진압된 이후 4천7백여명의 친북좌파 군인들이 숙군되고 119명의 교사들도 반란 가담죄로 구속 파면됐다. 박정희는 남노당에 가입하여 반란을 기도하고 반란 병력을 제공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사과정에서 조직명단을 넘기고 전향해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14연대 주둔지였던 여수읍 신월리에는 반공 자활촌이 건설됐다.
5. 제2여순 반란사건 시도
반란세력 일부가 산악지대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했다. 산성(山城정치지도기관)을 중심으로 철성(鐵城)-1성(1城) 2성, 금성(金城)-3성 4성, 암성(岩城)-5성 6성으로 3개 지역으로 나누고, 총사(總社인민군 총사령부)는 철사(鐵社)-1사 2사, 금사-3사 4사, 암사-5사 6사, 영사(營社)-별동대로 편성하여 테러활동에 돌입했다.
1949년 6월 하순. 남노당 군사 5부 지령하에 광주로 피신한 20연대 좌익분자들이 제2여순반란 추진하여 50인 주동세력을 확보했다. 심부름꾼으로 포섭된 수피아 여중 김 모양은 갈등을 겪다 20연대 작전과장 대위 송대후에게 신고하고 2중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5여단의 체포작전 실시로 척결했다.
여순반란 사건의 여파로 1948.11.30 14연대를 해체하고, 광주 주둔 4연대는 불길한 숫자라 하여 20연대로 개칭했다.
6. 대구 6연대 반란사건
1948.11. 2 대구 대명동 주둔 6연대 친북좌파 특무상사 곽원진이 체포과정에서 소위 조장필을 사살하면서 시작됐다. 동조한 친북좌익 200여명과 함께 하사관 10명과 군기대 6명을 사살하고 팔공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했다.
12월 6일에는 숙군을 두려워한 6연대 친북좌파 상사 이상백과 하사관 28명 병사 14명이 장교 9명을 사살하고 팔공산 빨치산이 됐다.
1949.1.30 6연대 4중대 친북좌파 상사 곽종진 등이 소위 백달현과 하사관 1명을 사살한 후 선동하다 실패하자 탈주했다.
아울러 3차례나 반란을 일으킨 대구 주둔 6연대는 해체후 1949.4.15에 22연대로 재편했다.
친북좌파들의 무장 반란과 폭동은 수 많은 애국 여수 순천 시민들과 양민들을 학살하여 죽음으로 몰아 넣었으며, 어린 학생들까지 동원하는 만행을 저지름으로써 진압작전시 피아구별을 어렵게 하여 무고한 양민들마저 친북좌익으로 몰려 억울하게 희생되는 사태까지 초래했다.
14연대 반란에 의한 여수의 피해 최남근 중령(12연대장) 김학림 소령 박정희 소령 표무원 소령 최병모 소령 강태무 소령 노재길 대위 최정호 대위 유병철 대위 남재목 대위 김 연 대위 김진원 대위 김병환 대위 소완섭 대위 황용찬 중위 김경회 중위 육군사관학교 3기: 김응록 중위 이기종 중위 김남근 중위 등 3기생 6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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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謨시대 ( 247-256 ) 1948년 10월 20일 수요일 저녁. 박정희는 조직원의 레포(연락)를 받고 서울 신당동(新堂洞) 377의 29번지에 있는 이재복의 아지트로 급히 달려갔다. 용산의 육군관사에서 사복을 갈아입고 신당동 으로 갔을때는 가을 해가 벌써 기운 저녁 6시였다. 이재복의 아지트는 그동안 효자동 전차종점 근방에 있었는데 한곳에 오래 머물면 의심의 눈길이 미친다면서 달포전 이리로 옮긴 것이었 다. 여기서도 이재복은 포항에서 올라온 건어물 오데(大手·큰손 장사꾼)로 위장하며 처인 길 공주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재복의 집에는 이재복을 '외삼촌'이라 부르며 심부름도 하고 살림도 거드는 최숙희(崔淑姬)라는 19세의 예쁘장한 처녀가 있었다. 손님이 초인종을 누르면 대문틈으로 살핀뒤 믿을만한 사람이면 문을 따주곤 하는 것이 최숙희의 주 일과였다. 어느날 박정희가 고향 말씨인 최숙희가 언제 보아 착실하고 무던하다싶어 고향을 물어 보았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재복이 반 가워하고 신임하는 사람이다 싶어서인지 순순히 대답했다. "원적은 경북의 울릉도이지만 가족 들은 대구에서 30리 밖인 달성군 화원면(花園面)에 삽니더" "화원이라. 그러면 아버님은 농사 를 지으시나보군?" "아입니더. 의사로 계셨습니더" "의사라? 화원에서 의사를 했다면 내 친구 형님도 의사라던데, 그럼 혹시 최무학이란 사람과 어떻게 되는 사이는 아닌가?" "바로 지 삼촌입니더. 박소령님은 우째 아십니꺼?" 반가움과 경탄이 뒤섞인 얼굴로 최숙희가 반문했 다. "그랬구나. 최무학군은 내하고 대구사범학교의 동기이지. 그러면 아버지가 화원에서 안과 (眼科) 한지의사(限地醫師)로 계시던 최문학(崔文學)씨란 말이지? 거 참 묘한 인연이군. 이재복선 생과는 정말 외숙질간이 되나?" "언지예(아니예요), 그냥…" "알았어. 그런데 아까 아버지 께서 의사로 계셨다 캤는데, 그럼 지금은 은퇴하셨단 말인가?" "아입니더. 재작년의 10·1사건 으로 삼촌이 붙들리자 아부지도 연루되어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갇혀 계십니더" 박정희는 최 무학이 재작년 연말 체포되어 재판결과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소식까지는 알고 있었다. '영남폭동 주동자, 38선에서 체포'라는 제목으로 월북을 기도하던 최무학을 파주군의 38선 근처에서 체포했 다는 신문기사도 읽은 기억이 났다. 그러나 의사였던 그의 형이 구속되었다는 사실은 뜻밖이었다. 그는 안됐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최숙희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그것 참 몰랐구나. 최군은 사심이 없는 열정가였는데…. 자네 아버지께서도 환자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는 분으로 들었 지. 곧 풀리(려) 나시겠지" 이런 대화가 있은 이후, 최숙희는 박정희를 대할때면 전보다 한결 반가움과 존경의 눈길을 보내곤 했다. 이날도 그녀는 대문간의 그림자가 박정희인줄 알자 재빨리 빗장을 따주며 인사를 했다. "인제 오십니꺼? 오늘은 다른 장교님들도 일찍 와 계십니더" 박정희는 "응, 그래. 수고가 많지?" 간단히 응수하곤 급한 걸음으로 현관쪽으로 다가갔다. 보 나마나 여수·순천의 14연대 반란사건 관계로 긴급소집한 것이겠지. 그렇지만 이번 일은 무엇인 가 이상해.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있을수없는 일이야. 반란을 일으킬 시기도, 지역도 아니란 말이야. 박정희는 레포를 받고 달려오면서 속으로 내내 되씹어본 의문의 생각을 다시금 뇌이며 헛기침을 했다. 기침소리를 듣고 안방에서 안주인인 길공주가 급히 나와 박정희를 안내했다. 방안 에는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여느 때와는 달리 어서오라는 인사도 없이 모두들 정신나간 표정으로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이재복을 중심으로 조병건(趙炳乾)중령, 오일균(吳一均)중령, 이수진(李秀 鎭)중위 등이었다. 뒤미쳐 초인종소리가 나는가했더니 김종석(金鍾碩)중령이 땀을 닦으며 들이닥 쳤다. 올 사람이 대강 온 줄 알자 이재복이 담뱃불을 끈뒤, 무겁게 입을 열었다. "동지들, 이 사건을 도대체 누가 지시한 것이오? 누가 당의 지시도 없이 불장난을 했단 말이오?" "우리의 당에선 시키는 일을 따르지 않는 자들도 반당분자로 엄격히 다 스리지만, 시키지 않은 일을 멋대로 저지르는 행위는 더욱 악질의 해당행위로 간주하고 있소. 어 제 여수(麗水)와 순천(順天)에서 일어난 병란(兵亂)은 분명히 우리당의 지침과는 반하는 행위였소. 유사시를 위해 조직력을 기르고 잠복해 있으라 했지 상부선(上部線)의 지시도 없었는데 누가 제 멋대로 봉기하라 했단 말이오? 마산(馬山)의 15연대장으로 근무중인 최남근동지는 거리 관계로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어 알수 없지만, 여기 계신 누군가가 혹시라도 여수에 주둔한 14연대의 우리 조직원들에게 기회를 봐서 봉기하라는 은밀한 지령이라도 내렸단 말이오? 아니라면 최소한 그런 언질이나 암시라도 주었다는 말이오?" 그러면서 이재복은 다시금 노한 얼굴로 한사람씩 표정을 살피는 것이었다. 박정희를 포함하여 방안의 사람들이 별다른 반응없이 여전히 침울한 표 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살핀 뒤 이재복의 말이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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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소. 나도 물론 여기 계신 여러 동지들이 당의 정책을 정면에 서 우롱하는 저따위 우를 범했으리라곤 믿고 싶지 않소. 14연대내의 일부 몰지각한 하부조직원들 의 경거망동이 이런 엄청난 사태를 불렀다고 믿지만 결과는 너무나 참혹하오. 우리당의 군사조직 이 3년여동안 천신만고로 쌓아온 적공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게 되었소. 뿐만 아니라, 이번 일 로 반동들의 역습이 무자비하게 자행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오. 자칫하면 우리의 조직이 송두리 째 뽑히고 유능한 조직원들이 상당수 유혈을 볼 지 모를 위험에 처했소. 동지들. 이왕 엎질러진 물이지만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주워 담을 수 있을지 각자의 의견을 말해 보시오. 먼저 오른쪽 에 앉아 계신 오일균동지부터 말해 보시오. 오동지는 사관학교 3기생들의 생도대장으로 있었으니 까 이번 여순사건의 주동자로 알려진 김지회(金智會) 홍순석(洪淳錫) 두 중위의 신상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것 아니오? 우선 그들에 대해서부터 아는대로 말해 보시오" 충북 청원(淸原)출 신으로 청주중학을 나오던 1945년 4월에 일본육사 61기로 입교한 오일균은 4개월만에 해방을 맞 았지만 박정희등 일본육사 졸업 선배들로부터는 '막내동문'으로 대접을 받아왔다. 해방 직후 곧바 로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감으로써 군번 72번으로 임관했던 오일균은 박정희가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조병건이 맡은 A중대장에 이어, B중대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박정희를 가르친 선생(교관)의 위치에 섰던 셈이다. 그러나 이무렵 만22세이던 오일균은 사석에선 9세 연상이며 일본육사의 4기 선배인 박정희를 깍듯이 선배의 예우로 모실줄 알았다. 박정희도 솔직하고 깨끗 한 오일균의 성품이 마음에 들어 친동생처럼 아꼈다. 두 사람은 청원군에 있는 오일균의 고향집 에도 함께 내려가 하룻밤을 자고 올 정도로 형제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오일 균이 사관학교 중대장시절부터 이따금 보여준 좌익언동에 대해 박정희가 묵시적으로 수용하며 동 조한 탓도 없지 않았다. 조병건과 함께 오일균이 사관후보생들을 은밀히 중대장실로 불러내어 군 내 좌익조직에 가담하도록 회유해온 것도 박정희는 듣고 있었다. 3기생중 여순사건의 주동자로 알려진 김지회와 홍순석이 바로 그때의 핵심멤버였음을 보고 받아왔던 이재복이 이날 그들의 신 상에 관해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둘다 함경도 출신으로 몸집이 단단하고 성격이 괄괄한 편 입니다. 그러나 조직을 잘 따르고 있어 상부선의 명령 없이는 단독으로 움직일 사람들은 아닙니 다. 이건 제 생각인데 혹시 하사관급에서 우발적으로 사건을 벌이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 누가 그럴만한 사람으로 짚이는 이름이 있소?" 이재복이 물었으나 오일균은 대답을 못했다. 그러자 이재복은 수첩을 꺼내어 무엇인가 읽어내려갔다. 이재복은 한참동안 수첩을 뒤적이더니 자신의 왼쪽에 앉은 이수진중위를 돌아보며 말했 다. "14연대의 하사관 오르그(조직책)는 누구요?" "지창수(池昌洙)상사입니다" 이수진이 대답했다. 일찍부터 통위부(統衛部·국방부의 전신)의 부관실에 근무해온 이수진은 이재복의 비서 라 할 정도로 화합때마다 가까이서 보좌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같은 통위부에 소속된 군기대(軍 紀隊·헌병대)의 선임하사관인 이승권(李承權)상사와 보통학교 동창이었다. 이승권이 남로당조직 부장 이중업(李重業)의 비밀경호대장을 맡고 있으면서 군내 하사관조직을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그를 통해 최소한 각 연대 하사관오르그의 신상에 관한 정보는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 상사에 관해 뭘 좀 알아본 것이 있소?" "예. 하사관과 사병들을 상대로 비교적 활발한 조직활 동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공명심이 많고 참을성이 없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 장교들과 사전 모의도 없이 우발적으로 사건을 일으켰을 공산이 큽니다" 이수진의 설명을 들으며 박정 희는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해, 하사관조직이 얼마나 중요한데 그것 하나 관리하지 못했다니 말이 돼, 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동시에 남로당군사책인 이재복이 당황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이것 참. 지창수가 주도했다면 14연대내의 우리당 장교급 비밀당원들을 무차별로 해쳤을 공산이 다분해. 지창수로선 옥석을 가릴만한 정보가 없었을테니까. 우리측 희생자만도 대 여섯명이 넘겠는데…. 허, 참" 이재복의 이같은 탄식에 찬 우려는 나중에 사실로 판명되었다. 사건 당일 살 해된 19명의 위관급 장교중, 6~7명이 남로당 비밀당원이었다. 점조직으로 포섭돼 있던 이들은 저 항은커녕 변명 한번 제대로 못해 보고 자기들 편에 의해 현장에서 속절없이 사살된 셈이었 다. 이날 밤 늦게까지 회의를 거듭했으나 한번 쏟아진 물을 주워담을 뾰족한 계책이 나올리 없었다. 당에서 은밀하고 신속하게 조사단을 파견해 진상을 조사하는 한편, 사후 지휘체계를 가다듬는게 고작이었다. 이어 다른지역에서 더 이상 경거망동한 행동을 못하도록 통제할 것과, 세 불리하면 가까운 지리산으로 도피토록 지시할 것, 끝으로 지난번 4·3사건과 이번 여순사건을 계 기로 군내에 대대적인 숙군바람이 불것인바, 조직원들을 더욱 깊숙이 은신시키되, 만에 하나 체포 되는 사태가 오더라도 철저히 함구토록 하여 조직전체를 다치지 않게끔 산하 조직원들을 독려할 것 등을 결의하고 헤어졌다. 긴급회합이 끝나고 박정희와 함께 같은 방향으로 걸어오면서 오일균 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박선배님.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이러다간 저는 장가도 한번 못들어보고 당하는게 아닐까요? 숙군바람이 불면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버티어 야 합니까, 아니면 36계라도 놓아야 합니까?"오일균은 아직 미혼이었다. 사귀는 여인은 있나 보았 으나 제대로 생활대책이 설때까지 결혼을 미루고 있노라 말한적 있었다. 그런 오일균이 토해놓은 풀죽은 목소리를 들으면서 박정희는 36계라니, 도망친들 어디로 간단 말인가. 월북? 오일균이나 나나 이남이 고향인데 가족을 두고 그게 쉬운 일인가 하고 속으로 반문해 보았다. 또 36계란 당 원으로선 할 소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일균이 주저없이 그런 말을 꺼 내는 것은 그만큼 박정 희 자신을 믿고 의지하니까 하는 물음이라고 생각되었다. "사태가 매우 불길하게 돌아가는 것 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미리 의심받을 짓을 사서 할수야 없지않소? 예의주시하면서 당분간 몸조 심을 합시다. 그러나 저러나 당이나 조직에서 하는 짓을 보면 꼭 무슨 날잡아 잡수소 하는 것처 럼 머리도 기획도 없이 덤벙댄단 말이야. 이번 사태만 해도 일개 인사계 상사가 선동해 대사를 그르치게 했다니, 말이나 돼? 이거야 말로 머슴 운수에 소 죽는 꼴이 아니고 뭐겠소. 그리고 무엇 보다 내편, 니편을 가리지 않고 사람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해치는 놈들이 무슨 대사를 하고, 혁명 을 해? 나 참, 더러워서" 그러면서 박정희는 정말 역겨워 못견디겠다는 듯 칵하고 가래침을 뱉었다. 오일균 앞에서는 제법 대범한척 큰 소리를 쳤지만 여순반란사건 이후 박정희의 나날은 사실 불안 의 연속이었다. 군특무대(CID)나 미군방첩대(CIC)가 언제 무슨 낌새를 맡고 덮치러올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잖아도 여순사건 이후 군내의 공기가 나날이 긴장감을 더해 가는 것이 실감되었다. 누구 누구를 은밀히 뒷조사하고 있다는 소문과 수상한 그림자가 부대와 집 주변을 미행하고 있다는 소문들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다. 언행들을 조심한다고 하지만 현재의 거동 이 문제가 아니라, 과거의 행적을 추적·조사하는 것이고 보면 결코 편안한 마음이 아니었다. 혹 시 동료들 가운데 누군가가 밀고를 하거나 잡혀서 자백이라도 할 양이면 혼자서는 아무리 처신을 잘 한다한들 속수무책으로 붙들려 갈 판이었다. 그런 불안의 나날을 보내던 중, 11월1일 여순 지구 토벌사령부의 작전참모로 긴급발령을 받게되자 박정희는 참으로 다행이라 싶은 심경으로 육 사교관부를 떠날수 있었다. 원용덕 토벌사령관을 보좌하고 있던 김점곤소령이 일손이 딸리자 유 능한 요원을 찾던 중, 8연대시절 일솜씨가 뛰어났던 박정희를 떠올리고 그를 천거해 불렀던 것이 다. "박소령 잘왔어. 여기 미리 온 유양수(柳陽洙·뒷날 육군소장·사우디대사)소위, 이기건(李 奇建)소위와 함께 김점곤소령을 도와 작전관련 내무업무정리를 맡아주게" 원용덕은 업무지시를 내린 후 곁에 있던 미 군사고문인 하우스만대위도 소개했다. 미국 뉴저지주 출신으로 박정희보다 한살 아래였으나 1m85 ㎝의 큰 키인 제임스.H.하우스만대위는 제2차세계대전때 발지전투에서 쌓은 공로로 동성무공훈장 을 받은 역전의 용사였다. 1946년 여름 미군정요원으로 한국에 파견되어온 그는 박정희가 첫 발 령을 받고 부임하기전 보다 먼저인 1946년 8월부터 2개월간 춘천의 제8연대에서 미군측 창설연대 장(고문관)을 역임했었다. 그해 10월부터는 미군사고문단(KMAG)의 참모장으로 있으면서 한국군 의 각연대 창설작업도 도운 사람이었다. 따라서 한국군내의 창군멤버들을 거의 알고 있었으며, 군 내부의 인적구성이나 고위장교 개인의 신상이며 성격까지 훤히 알고 있는 미군의 정보통이기도 했다. 하우스만은 박정희를 소개받자 경례를 한 뒤 손을 내밀며 조크를 했다. "하, 박 念헛 나는 그때 대위계급으로 8연대의 창설연대장 노릇을 잠시 했기 때문에 박소령이 그때 신임 소위 로 조금만 일찍 부임했거나 내가 조금만 늦게 전출돼 갔었더라면 신임 소위로 부임하는 당신으로 부터 경례를 먼저 받았을 건데 아쉽게도 그렇지 못해, 지금 소령이 된 당신에게 내가 경례를 먼 저부치게 되었군요" 옆에서 고정훈(高貞勳·뒷날 중령예편·사회당당수)대위가 통역을 하자 주위에서 웃음이 터졌다. 하우스만은 박정희가 그 뒤에도 영어를 천천히 말하면 대강은 알아듣는 실력을 지닌듯 보였으나 좀처럼 영어로 말하려 들지 않았고 영어를 조금 안다는 티도 내색하지 않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하우스만과의 이날 만남 이후 박정희는 그에 대해서 `미국놈 가운데 별나고 재미있는 놈'이란 인식 한가지를 갖게 되었다. 또 뒷날 두고두고 하우스만으로부터 눈에 보이지않는 도움과 정치적 조언을 받게도 된다. 하우스만으로서도 박정희가 유달리 외국인기피증 이 있고, 특히 미국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전정보쯤은 갖고 있었다. 그는 박 정희가 8연대 고문관인 브라운 중위를 빗대어 "미국놈이 웬 간섭인가"라는 말을 했다는 것과, 원 용덕이 영어를 배우라고 하자, " 이것이 미국군대입니까, 조선군대 입니까?"하고 받아치더란 소문 도 듣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뒷날 어려울때 자신을 구해준 선후배·동료들의 발뒤꿈치를 사정없 이 물어뜯는 사람이라고해서 미군들 사이에서 가끔 `스네이크 박'(박뱀·박독사)이라고 불리게 되 는 박정희를 찬찬히 훑어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가 그의 생애 후반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인물이 될것인가에 대해선 이무렵으로선 전혀 가늠하지 못했다. 여순반란사건은 1천6백여명의 인명피해와 1천5백여명의 중.경상자, 9천8백여명의 이재민을 낸데 그치지 않고 지리산으로 도피한 반란군일부의 계속된 준동으로 신생 대한민국의 국방력과 치안력 에 막대한 손실을 끼친 사건이었다. 4.3사건때 제주 11연대장 박진경대령을 암살한 배후에 문상길 (文相吉.경북출신.육사3기)중위가 조종한 죄익계사병 4명이 개입했음을 파악했던 군당국은 여순반 란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숙군작업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가 토벌대의 작전참모 일을 보기 시작한 며칠 뒤였다. 사령부 안이 술렁대길래 영문을 알아보니 마산주둔 15연대장 최 남근중령을 압송해왔다는 이야기였다. 최남근은 반란군의 지리산 입산을 저지하기 위해 10월21일 1개 대대를 이끌고 하동방면으로 출동했다가 조시형(趙始衡.뒷날 무임소장관) 제1중대장과 함께 반군의 포로가 된 몸이었다. 그런 그가 엿새만에 탈출했다며 화개(華開)장터에 나타난 것이 수상 해 토벌사령부가 그를 심문하기 위해 압송해온 것이었다. 최남근에 대해서는 미군 CIC도 그 동안 미심쩍은 꼬투리를 잡고 미행을 계속하던 중이어서 이번의 탈출사건은 최남근을 더욱 궁지 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도 지켜보는 가운데 진행된 심문에서 최남근은 그간의 경위를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자술서에도 그렇게 썼다. "나는 결코 스스로 반군에 합류한 것이 아니 고 부대 지휘 중 실수로 포로가 되었고 그들에게 끌려 다니던 중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러나 심문책임자인 김점곤은 최남근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았다. 최 남근은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직후에도 가족을 데리고 온다면서 두달 동안이나 이북을 다녀온 사실을 김소령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수갑도 채우지 않고 상사로서 예우하며 자술서를 쓰 도록 한뒤, 이적혐의가 짙다는 자신의 소견서를 첨부해 백선엽(白善燁)정보국장(대령)에게 보고했 을 뿐이었다. 심문이 일단락되던 날 밤 김점곤은 모른척 했더니 박정희가 구치되어 있는 최남근 의 숙소로 찾아가 밤새도록 소근거리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정희가 대담하게 구치숙 소로 찾아 갔을 때 최남근은 뜻밖의 방문에 당황하면서도 무척 반가워하며 말하는 것이었다. "박소령. 내 문제는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소? 구속되는 건 아인갑세?" "아직은 그렇지 않 을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선배께서 어쩌다 그런 경솔한 짓을 하셨소? 그렇잖아도 의심을 잔뜩 사 고 있을 때인데 말입니다" 그러자 최남근이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 도 좀 경솔했소. 그러나 박소령은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이오. 반군인 김지회부대와 접적(接敵)했을 때 사실 김지회를 죽일 수도 있었소. 그러나 같은 말이고, 같은 얼굴이고, 거기다가 같은 함경도 출신이라 인간적인 양심에서 차마 죽일 수 없었소. 그래서 차라리 내가 손을 들었던 것이오. 내 말을 이해하겠소?" 괴로운 표정으로 거듭 한숨을 쉬어대며 내뱉는 최남근의 말을 박정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정이 많고 호걸풍인 최남근의 인간성으로선 충분히 그럴수 있다고 생 각되어서였다. 그렇지만 시국이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데 그따위 어린애같은 감상주의에 빠진단 말인가. 반란으로 엄청난 살상이 빚어졌고, 모두들 독이 올라 벼루는 판인데, 같은 함경도출신이 어서 대신 손을 들었다니, 현행법으로는 완벽한 이적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정서를 지닌 사람이 군내 좌익조직의 수뇌급이라니, 여기 저기서 기워 놓았던 것이 터질 것은 시간문제이리라 고 박정희는 생각했다. 동시에 공포심으로 전신이 오싹했다. 박정희가 두려움과 허망감에 사로잡 혀 아무말을 못하고 있자 최남근이 고개를 떨구면서 말을 이었다. "박형. 나는 어디 조용히 숨어서 농사나 짓고 살았으면 좋겠소만…" 그러나 그것 역시 그다운 현실도피의 허망한 꿈에 불 과했다. 곧이어 피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토벌사령부는 최남근의 1차 진술만 믿고 11월8일자로 그를 수색(水色)에 본부를 두고 있던 유재 흥(劉載興·뒷날 중장·국방장관)여단장 휘하의 제4여단 참모장으로 전보발령을 내렸다. 이후로부 터 최남근이 마음을 고쳐 먹고 자신의 처지를 적극적으로 변호하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면 어쩌면 목숨만은 건졌을건지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애쓰기는 커녕, 제4여단에 부 임조차 하지 않았다. 뒤늦게 미군 CIC의 보고와 함께, 김점곤 소령이 올린 소견서를 읽게된 육본의 백선엽정보국장이 4여단의 최남근중령에게 출두토록 지시를 했다. 그러나 4여단에선 부임 조차 하지 않았다는 보고였다. 이제는 다른 변명을 들을 것도 없었고 더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전국에 비상수배령을 내린 결과 대전에서 체포, 군법회의에 회부할수 있었다. 군법회의에서 최 남근은 그날밤 박정희에게 털어놓았던 심경 그대로를 실토하게 된다. 같은 말, 같은 얼굴에 같은 함경도여서 인간적인 양심에서 김지회를 죽이지 못하고 대신 자신이 손을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김지회의 처인 조경순(趙庚順·간호원출신·뒷날 체포)의 묵인 아래 탈출할 수 있었다며 그 탈출동기를 이렇게 진술하게 된다. "비록 내 자신이 좌익사상을 가졌다 하지만 반란이 일 어나 어제까지의 전우들이 골육상쟁을 한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또 나를 아껴준 상관이 나 동료부하들에게 더 이상 배신할 수 없어 탈출했다" 그런 뜻에서 탈출했다면 왜 4여단에는 부임하지 않았으며, 출두명령을 받고도 도피했느냐고 재판관이 묻자 최남근은 괴로운 표정을 지 으며 힘없이 대답했다. "내가 이미 국군을 배반한 반역 자가 되었으므로 출두하면 군법회의에 회부될 것이 뻔하지 않은가. 그렇게 되면 김지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고, 이중의 배반자가 되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따라서 군인생 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파묻혀 조용히 살까하고 도피했던 것이다" 최남근 다운, 인간적인 고뇌 를 펼쳐보인 최후진술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엄했다. 머리 좋고, 인간미 좋으며, 동료나 상·하 모두에게 존경의 대상이기조차 했 최남근이었지만 지나친 이상론에 빠진 나머지 현실의 차가운 벽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만셈이었다.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9년 5월26일 오후2시 수색현장에서 총살형으로 삶을 마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최남근은 그의 동생 최남오 앞으로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남오야. 큰 형은 좌익 손에 맞아 죽고 나는 우익 손에 죽는다. 이럴때 너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생각해 보고 아무쪼록 부모님에게 잘 해드려라 " 또 그의 사형집행에 입회한 군후배들과도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는데, 특히 만군시절 건국동 맹군사분맹원이었던 절친한 문용채(文容彩·뒷날 육군준장)소령과 악수를 나눌 때 최남근은 남자 답게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고 한다. "문형, 나 먼저 가요!" 사형당일에 있었던 최남근에 얽 힌 이같은 비극적인 일화에 대해선 박정희는 한참 지난 뒷날에야 들을 수 있었다. 최남근이 제4 여단으로 전보발령을 받고 자취를 감춘 3일뒤, 박정희도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며칠 전 토벌 대의 작전참모업무에서 해방되어 육사교관부로 돌아와 있을 때인 11월11일이었다. 이날은 육사 7 기의 졸업날이었다. 육사7기는 이주일, 윤태일등 특7기와의 인연도 인연이려니와, 중대장으로 있 을 당시 생도 2명이 훈련중 사망한 사건도 있어 박정희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이었다. 또 정 부수립후의 첫 졸업이었으므로 '육사'란 이름아래 처음 갖는 졸업식이었던 만큼, 졸업생 당자들은 물론, 한때 중대장이었던 박정희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울어나는 졸업날이었다. 졸업식준비로 분망 하던 이날 오전, 누군가가 다가와 기엣말을 하는 것이었다. 교관부에 일하는 하사관이었는데, 남 로당세포였다. "박소령님, 빨리 피신하여야겠습니다. 곧 덮치로 온답니다!" 듣는 순간 박정 희의 가슴은 철렁했으나 웬지 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결국 졸업식도 보지 못하고 체포되었다. 박정희가 11일 오전 헌병 5명에 의해 연행되어 간곳은 남산에 있는 옛 조선신궁 자리였다. 취조 실로 연행되어 가자 나타난 사람은 조사과장 김득룡(金得龍·뒷날 소령예편)중위였다. 육사 2기로 박정희와 동기였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박정희를 앉으라고 권한뒤 담배를 권했다. 한모금 담배를 빨아 보이자 김득룡이 입을 열었다. "박형 어떻게 해서 오게된 줄 아시겠소? 박정희가 대 답이 없이 담배만 피워대자 김득룡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박형, 박형과 나는 동기생으로 한솥에 삶은 고구마범벅을 먹으며 졸업한 동기요. 그러나 오늘 이 마당에서는 나는 박형을 조사 하지 않으면 안되는 입장이고 박형은 조사를 받아야 할 피의자입장인 점을 피차간에 분명히 해놓 고 이야기 합시다. 내가 박형을 여기까지 데리고 오라고 했을때는 아무 혐의없는 사람을 추측으 로 데리고오라 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증거를 입수했기 때문이요. 그러니까 태도를 분명히 해주 면 좋겠소." 김득룡이 증거가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충분한 근거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당시 최석(崔錫·뒷날 중장·군단장)헌병사령관밑에서 조사과장(제2과)으로 있었던 김득룡은 헌병사령부의 선임하사 권수전(權秀全)상사가 남로당프락치라는 제보를 받았었다. 그를 잡아 족친 결과 헌병사령부 내에는 물론, 국방부, 육군본부내의 좌익조직계보도 파악할 수 있었 다. 그 중에는 놀랍게도 초대헌병사령관(김종갑)의 보좌관으로 있었던 나학선(羅學善·군영출신· 뒷날 숙군)소령이 이들 조직의 정점에 있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백선엽정보국장의 승인을 받아 나소령을 체포한 헌병대는 이어 잡아온 장병들을 족친 결과 육사에도 조직이 깔렸으며 거기서 박 정희의 이름을 발견하고 연행해 오기에 이르렀던 것이었다. 확실한 증거를 포착했는데도 아무말없기냐 투로 김득룡조사 과장이 추궁하는 가운데도 박정희는 심각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런 대꾸없이 입을 봉하고 있었 다. 공산당을 피해 월남 즉시 군문에 뛰어 들었던 반공주의자인 김득룡은 이번에는 약 30분간에 걸쳐 이북에서 체험한 자신의 공산주의관을 피력하며 박정희의 심경을 움직여보려 했다. 그리고 여순사건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생긴 것 역시 누구를 위한 비극이었느냐며 거듭 추궁해 보았다. 그럼에도 박정희는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을뿐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박형한테 알아들을 만큼 산철학을 이야기했는데도 아무런 대꾸가 없는 것은 나와 학술적으로 공산주의를 논하겠다는거요, 뭐요?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는 지금 더 이상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할 수 없소 박형이 정히 내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나도 원칙대로 일을 처리할 수밖에 없 소 " 김득룡의 최후통첩에 가까운 말에 박정희는 한동안 대답이 없다가, 한숨을 크게 쉰 뒤 입을 열었다. "나한테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 박정희가 무엇인가 결심하려는 태도를 보이자 김득룡은 혼자 있게 해두고 흔쾌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실내에 혼자 남자 박정희의 가슴은 착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먼저 생각나는 것은 며칠전에 만나 들었던 최창윤의 충고였다. 만주군관학교 시절 이유없이 혹독한 기합을 받은 끝에 친해진 최창윤은 얼마전 이북에서 탈출해 와 이북의 실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여운형의 밀명을 받고 북의 군사동태를 알기위 해 박승환(朴承煥) 박임항(朴林恒) 박창암(朴蒼岩)등 동지와 함께 인민군 창설요원으로 비밀입대 했다가 탄로가 나 박승환은 옥사하고 나머지 4명은 석방되어 가까스로 탈출한바 있었다. 그는 그 길로 최남근을 만나 이북의 실정을 전하며, 공산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도록 간곡히 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남근이 "나는 뭐, 별로 깊이 간여한바 없소 하며 발뺌을 하는 바람에 더 이상 설 득을 포기하고, 이제는 절친한 박정희만이라도 좌익계열들과 손을 끊게 해보겠다며 찾아왔었던 것이다. 박창암(뒷날 준장·혁명검찰부장)도 동석한 자리에서 최창윤은 박정희에게 진심에 서 우러나는 충고를 했다. 박형, 이북에서 나나 박창암군이 함께 보고 온 공산주의는 완전히 김일성 한 사람 만을 위한 우상화놀음의 시작이었어. 거기에는 인민의 권리나 자유는 눈을 씻고 보 아도 찾아 볼 수 없었어. 공산당이 모든걸 지배하고 있어 왜정때보다 더 지독한 독 재가 펼쳐지고 있더군. 최창윤의 충고에 박정희는 별다른 반론을 펴지 못했다. 다소 극단적인 관점으로 들 리지 않은바 아니었지만 사선을 넘나들며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충고인 데는 반론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최창윤의 언행에는 평소 사나이다운 성실성이 배 어있다고 믿어온 터이기도 했었다. 거기다가 실상 박정희 자신도 뚜렷한 좌익사상 의 이론이나 이념을 매개로 이재복이나 그 조직원들과 접촉해온 것이 아니었다. 단 지 그들의 정의감이나, 개혁에 대한 열정, 순수한 인간미 등에 끌려 어울리고 동조 하다보니 어느새 조직내의 영향력있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는 편이 옳았다. 그 랬기 때문에 최창윤의 우정깊은 충고를 들은 이후 마음이 흔들린 것도 사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동안 때가 묻어온 조직의 찌꺼기를 훌훌 털어버렸으면 싶기도 했 었다. 그럼에도 지금껏 쌓아온 우정이며 인간관계가 쉽사리 그런 용기있는 결단을 허용하지 않았고 어영부영 어떻게 잘 풀려 가겠지 하던 중 체포되고 만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제 자신이 관여해왔고, 알고 있는 한의 조직전모를 밝히지 않으면 안될 절박한 순간에 몰린 셈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조직의 내막을 분다면 말할 나위 없이 조직에 대한 배신일 터였다. 배신이라…, 하고 박정희는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단순하게 보면 그것은 배신임에 틀림없었다. 평소 사나이다움을, 그리고 무사다움을 지고지선(至高至善)의 가치로 알아온 자기자신에 대한 배신임을 부인할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해보면 자신이 무슨 큰 신념이나 철학, 혹은 이론을 바탕으로 그들과 혈맹을 맺어온것은 아니었다. 입당원서를 정식으로 받아 적은 기 억도 없었다. 상희형의 일로 인해 형처럼 대하던 이재복의 인간미에 끌려 함께 일 하는데 묵시적으로 동조하고 참여했던 것이 그럭저럭 비밀당원으로 추인된 것이 아 닌가. 아니 설혹 내 손으로 도장을 찍었다 한들 몇 사람만의 단위조직의 놀음에서 무슨 절체절명의 의미가 있단 말인가. 상부선의 지령도 없었는데도 여순반란사건이 터지는 저따위 지리멸렬상 하나만 보아도 철통조직 이란 평소의 구두선은 허세가 아니고 무엇인가. 거기다가 박정희는 무엇보다 현실적인 인간이었다. 졌으면 깨끗이 졌다고 포기할 줄 알았다. 자신은 이미 사로잡힌 장수였다. 여기서 죽음을 택하거나 아니면 깨끗이 항복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양자택일 뿐이었다.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다. 만영일뿐 누구도 의리있고 가치있는 죽음으로 보아주지 않을 것이다. 죽이고 죽는 자가 모두 들 제정신이 아닌 이 혼란기에 죽음을 택한다고 의리있는 죽음이라고 불러줄 후세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사람은 죽어도 이름을 남겨야한다는 것이 나의 좌우명인 데 이름도 남지않는 헛된 죽음을 택할 이유는 절대로 없다.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 이땅에 자취를 남기고 갔다는 큰 이름을 반드시 남겨야한다. 만주의 신경 거리에서 중국인 관상쟁이가 한 말이 있지 않은가. 치천하지 대두령(治天下之 大頭 領)이라던 점괘! 나는 이 위기를 극복하고 반드시 살아남아 뒷날의 더 큰일을 도모 하고 말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내가 아는 조직계보쯤은 얼마든지 불어줄 수 있다. 수사를하면 내가 불지않아도 언제인가 누구의 입에서도 터져나올 것이다. 깨끗이 불어주자. 그리고 여기서부터 나 자신도 새롭게 전향(轉向)하여 현실적이고 이성적 인 새로운 박정희로 탈바꿈하자... 결단을 내리자 박정희는 김득룡을 불러 펜과 종이를 달라고 했다. 김득룡이 반가운 마음으로 재 빨리 가져다 주고 다시 자리를 비우자 박정희는 약 2시간에 걸쳐 꼼꼼히 작성한 조직계보를 건네 주며 김득룡에게 말했다. "김형 미안하오. 내가 그동안 눈을 못떴소. 사실 여순사건도 위에서 지시한 것이 아니라 김지회와 홍순석 등이 제멋대로 일을 저지른 것이었소. 내가 여기 아는대로 조직표를 적어놓았으니 숨김없 는 나의 고백으로 받아 주시오" 김득룡은 박정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박형, 정말로 고맙소. 일단 고생하고 계시면 내가 힘닿는한 도와드리겠소" 당시 정보국 특무과장은 김안일(金安一·뒷날 준장)소령이었고 부과장은 김창룡(金昌龍·뒷날 소 장·특무대장)대위였다. 헌병대로선 일이 끝나 정보국특무과로 박정희를 인계하면서 김득룡은 다 음과 같은 소견서를 붙였다. "이 사람은 공산당으로 볼 때는 반역자이지만 우리국가로 볼때는 이 사람의 협조로 빨리 알맹이 를 뽑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사람에 대해서는 다른 피의자보다 선처를 해주었으면 한다" 서대문형무소에는 이무렵 천여명의 숙군피의자들이 수감되어 있었다. 헌병대의 수사와는 별도로 김창룡대위가 지휘한 특무팀들도 이때는 이미 이재복을 비롯하여 김종 석, 오일균, 강창선, 이병주, 이상진, 조병건, 황택림, 김학림 등 좌익관련 장교들을 상당수 체포했 거나 수배중에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가 밝힌 조직표가 아니더라도 육사내의 조직계보는 어느정 도 파악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김득룡이 박정희를 인계하면서 전해준 조직표를 받아들고 김안일특무과장이 고맙다는 말 을 거듭하면서 몹시 기뻐하더란 김득룡중위의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박정희의 문건이 특무팀들 에게는 상당히 고무적인 자료였음이 분명하다. 헌병대와는 달리 특무대는 엄한 심문과 혹독한 취조가 자행되는 곳이었다. 처음에는 같은 정보국 에 근무하는 김점곤 소령으로부터 "때리지 말고 먹을 것도 주어가며 차근차근 조사하라"는 부탁 도 있고 해서 심하게 닦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상관의 지시나 부탁은 취조당사자인 수사 실무진 에게 고루 통하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이한진(李漢晋)이었다. 학병 출신에 육사5기로 박정희와는 육사의 사제지간이기도 했던 이한진소위는 덩치도 컸고 우직한 성격이었 다. 그는 윗사람들이 잘 봐주라고 부탁한 것이 비위에 거슬렸는지 일부러 심한 고문을 골라서 하 는 듯했다. 육사의 좌익조직표 외에, 알고 있는 모든 조직세포를 불라는 강요였다. 박정희는 평소의 과묵한 성격 그대로 묻는 말에 재빨리 대답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상대가 열마 디로 물으면 한두마디로 '예'나 '아니오'로 대답할 따름이었다. 또 구속되어 취조를 받는 입장이 라고 해서 비굴한 표정을 짓거나, 아첨하는 언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직한 취조관으로 볼 때는 그의 이런 무뚝뚝한 태도가 상대를 깔보는 행위로 비쳐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한진과 그의 몇몇 수하들이 매질을 하다 못해 전기고문까지 자행한 것도 이때문이었다. 일설에는 김창룡이 뒷날 박정희를 살려주자고 상부에 건의한 사람중의 한사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수사종결시점의 일이었고, 수사초기에는 적어도 김창룡의 지시나 묵인아래 혹심한 고문을 가한 것만은 분명했다. 먼 뒷날 박정희가 술자리에서 흥분할 때이면 가끔 자신의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곤 "김창룡이놈한테 내가 이렇게 당했다"며 정강이의 흉터를 내보이더란 목격자들의 증언이 그것을 방증한다. 이 무렵의 조사방법은 증거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인 권우선개념도 없었지만 잡아서 족치면 간단히 부는 것을 괜한 시간낭비를 할 것 있느냐는 것이 손쉽게 고문이 자행되는 근거였다. 모진 고문에도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여 혐의를 벗는 사람도 있었지만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몽둥이 찜질에다, 목욕탕에 넣고 전기를 연결한다든지, 곧바로 전기고문을 해대면 당장에 살기 위 해서라도 덮어놓고 불지 않을 장사가 없었다. 먼저 불게되는 이름은 동기생이고, 술친구이며, 같 은 부대의 동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생각다 못해 부대내의 방화편성표에 적힌대로 이름을 부는 웃지못할 일도 있었다. 따라서 좌익으로 처형된 장병들 가운데는 진짜도 있었지만 고문에 희생된 억울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총살당하면서 '대한민국만세'나 '이승만대통령만세'도 불러, 숙군의 의미가 어디 있었나는 회의를 일게도 했었다. 물론 거시적으로는 이때의 숙군이 없었더라 면 6·25의 악몽이 더욱 비극적이었을지 몰랐다. 자신이 구속되dafsdfasd. 또 박정희와 동기인 2기로는 노재길(盧載吉)대위, 강우석(姜佑碩)소령, 안흥만 (安興萬)대위, 최정호(崔正浩)대위, 유병철(兪炳哲)대위, 황택림(黃澤林)대위, 표무원(表武源)소령, 최형모(崔炯模)소령, 남재목(南再穆)대위, 소완섭(蘇完燮)대위, 강태무(姜太武)소령, 김련(金鍊)대위, 김보원(金普源)대위, 김병환(金炳煥)대위, 황용찬(黃龍贊)중위, 김경회(金鏡會)중위 등이 있었다. 3 기로는 김응록(金應錄), 이기종(李祈鍾), 정양(鄭襄), 김남근(金南根)중위 등 무려 60여명에 이르고 있었다. 만주군관학교 동기인 이병주와 이상진도 이미 구속되어 있었으며 14연대장이었던 오동기 (吳東起)소령은 엉뚱한 누명을 쓰고 구속되었다가 뒷날 석방되기도 했다. 김지회와 홍순석이 속했던 3기생들은 총 2백81명의 임관자 중 23명을 뺀, 2백58명이 조사를 받았 고 이중 60명이 숙군되는 '비극의 기(期)'로 불리게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3기생의 재 학시절 생도대장이 오일균이었고 구대장이 조병건과 김학림이었으며 그 배후에서 잠시 김종석이 교장으로 앉아 의식화작업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 이들 사관학교 교관들은 생도들의 신상파 악을 한다면서 밤중에 불러내어 은밀히 좌익사상을 심어주고 조직원을 포섭토록 강요한 것으로 숙군수사팀에 의해 밝혀졌다. 숙군바람이 한창 회오리칠때는 자고나면 가까운 동료나 선배 부하들이 붙들려가곤 했다. 고문에 못이겨 아무나 찍어대면 그길로 연행되어가는 판국이었다. 오죽했으면 채병덕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 구속품신서류를 들고 온 김창룡을 보고 "야, 이러다간 너하고 나밖에 안 남겠다야"하고 농담아 닌 농담을 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채병덕도 좌익이란 중상모략을 받은바 없지 않았다. 평양이 고 향인 그는 평양에 있는 부모형제에게 다이아찐을 비롯한 의약품을 보낸다는 핑계로 연락원을 북 에밀파하거나 임정계(臨政系)와 모의하여 정부전복을 꾀하고 있다는 모략을 받기도 했다. 또 정일권참모부장(副長)과 백선엽정보국장, 강문봉작전국장, 원용덕행정참모부장(副長)도 북과 연 결되어 있거나 인공9人共)의 비밀당원이란 풍문이 끊임없이 돌았다. 이밖에 실제로 구속되어 고생 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김용배(金容培·뒷날 대장·육참총장)는 그의 여동생이 학생위원장 감 투를 썼던 악연으로 징역 5년의 구형을 받았다가 무혐의로 풀려난 경우였다. 뒷날 공군참모총장이 되는 박원석(朴元錫)도 바로 박정희 자신이 찍었던 바람에 잠시 구속되었다가 김정렬(金貞烈·뒷 날 중장·국방장관)의 해명으로 겨우 풀려났었고, 김도영(金道榮·뒷날 대령)은 단순히 김창룡에 밉보여 고문과 옥고를 치른 끝에 가까스로 좌익 혐의를 벗었던 사람이다. 이밖에 이주일(李周一), 윤태일(尹泰日), 김용순(金容珣·뒷날 중장·중앙정보부장), 박기병(朴基丙·뒷날 소장), 양찬우(楊 燦宇·뒷날 소장·내무장관), 김현옥(金玄玉·뒷날 준장·서울시장)등도 한때 의심을 받고 고생을 했던 사람들인데 이들중에는 박정희가 잘못 적어낸 명단에 올랐던 탓도 없지 않았다. 숙군의 수사는 일제시대의 헌병출신이거나 경찰출신들이 주로 맡았었다. 이들은 일제때 배운 고문 의 악습을 그대로 답습해 무고한 사람들을 다수 희생시킨 과(過)를 적지 않게 남겼다. 그 바람에 군을 적화의 위험에서 구해냈다는 공을 퇴색시키는 결과도 낳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창룡이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일단 공산주의자로 의심한 뒤 그렇지 않은 점을 가려내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였다. 일제때 관동군의 헌병오장(伍長·하사)이었던 김창 룡은 월남하기전 모진 고문을 받고 탈출해온 경력을 지니고 있어, 빨갱이거나 그 동조자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가 거느린 수사팀 역시 같은 인식아래 고문을 예사로 자행하고 있 었다. 비록 헌병대에서 조직계보를 자백했지만 김창룡팀에 인계되면서 박정희 역시 새로 취조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김점곤소령이 때리지 말고 자술서를 받아보라고 충고했다지만, 수사실무자 선에는 그런 외부청탁이 잘 먹혀들지 않아 심한 고문을 피할 수 없었다. 박정희가 전기고문을 받 고비명을 지르는 광경이 뒤늦게 애매하게 잡혀간 김도영소령의 눈에도 목격된 사례가 있다. 김창 룡은 고문에 앞서 박정희가 그의 형 박상희의 사인을 알아보기 위해 선산경찰서로 찾아갔던 정보 를입수하고 이점부터 추궁하며 박정희의 사상전력을 캐내려고 달려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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