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 스님
잘못된 정신을 바꾸는 일, 그 일을 처음으로 시작한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바꾸고자 한 그 정신을 이해하고 생활한다면 좋은 일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고자 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부처님은 출가 전에 사성계급 때문에 핍박받고 고생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고민 끝에 결국 물질적인 방법으로는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정신을 바꾸는데서 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출가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출가해서 고행하고 깨달으신 것이 불교이고,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그 깨달음을 우리가 인식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생활하면 개인적으로 행복할 뿐만 아니라 갈등과 대립 없이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나(我)’라는 존재의 원리를 깨달으신 분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전해주기 위해 일평생 노력했습니다.
인간 존재의 원리를 100% 깨달은 부처님은 마음을 허공(虛空)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라는 생각에 마음이 갇혀 있습니다. 때문에 그 공간이 좁은 분은 마음으로 갈등을 많이 하실 테고, 또 그 갈등으로 인해서 상처도 많이 받으시게 됩니다. 그 공간이 조금 넓은 분은 그보다 조금 더 나을 것이고, 더 넓은 분은 그만큼 더 나을 것입니다. 존재의 원리를 이해하면 할수록 자기로부터의 해탈을 하게 되고, 나라는 작은 세계에서 점점 더 그것을 넓혀나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공간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중도(中道)’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하고 그런 것들이 다 그 공간을 넓히는 하나의 방법들입니다. ‘법화경 보문품’에서는 “관세음보살을 한 마음으로 부를 때 자기 소원을 성취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 마음, 즉 일심으로 하는 그것이 공간을 넓혀가는 방법입니다. 또한 ‘염불할 때 망상하지 말고 일심으로 해라, 참선할 때 망상피우지 말고 일념으로 해라, 봉사할 때 나라는 마음을 비우고 보살행을 해라.’ 라고 하는 말들도 모두 그 공간으로 우리가 진입해서 넓혀가는 방법들입니다. 그리고 이때 어느 수행이 ‘좋고’, ‘나쁘다’ 하는 것은 없습니다. 자기에게 맞은 것을 하면 됩니다. 그리하여 염불할 때 일심으로 하고, 봉사할 때 보살심으로 하면 됩니다. 보살심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다’, ‘너다’ 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일념으로 가는 길과 같은 길입니다. 그렇게 일념으로 수행하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 ‘내 존재가 중도로서 존재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팔만대장경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전들이 모두 이거 하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도만 이해하고 알면 가정에서 부부간에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도 없어집니다. 또 자식과 부모간의 갈등도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사회에서 무수히 일어나는 갈등도, 또 지금 저 바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일들도 이 중도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가정에서의 갈등이나 바다에서의 일이나 다 같은 원리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입니다.
여기서 옛날이야기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기 속에 불교의 핵심인 중도가 들어 있습니다. 어느 때 한 스님이 도인스님을 찾아가서 묻습니다.
“도대체 도가 무엇입니까?”
이에 도인스님이 답합니다.
“네 눈앞에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다시 묻습니다.
“눈앞에 있는데 왜 못 봅니까?”
도인스님이 다시 답합니다.
“너는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이다.”
이 스님이 이번에는 대들듯이 다시 묻습니다.
“그럼 스님은 보이십니까?”
도인스님이 다시 답합니다.
“나라는 것이 있어도 못 보는데 너와 나로 나누면 더욱 못 본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묻습니다.
“너와 나를 나누지 아니하면 보입니까?”
이때 도인 스님이 마지막 답을 합니다.
“나와 너가 없는데 뭘 보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이 마지막 대답이 중요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전부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깨달으신 것입니다. ‘나’와 ‘너’가 없어요. 본래부터 나와 너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나와 너를 나누면서 이기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사회가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원인입니다. 앞의 이야기에서 마지막 도인스님이 했던 “나와 너가 없는데 무엇을 보려고 하느냐”에 답이 있습니다. 내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법회 처음 시작할 때 반야심경 봉독하셨지요. 오온이 뭡니까. 색수상행식(色授相行識) 아닙니까. 색은 이 몸이고, 수상행식은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공한 줄 알면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라는 것이 없는데도 내가 있다고 착각하고 생활합니다. 그래서 항상 나와 너를 나눕니다. 부부도, 부모자식도 그래요. 자꾸 구분합니다.
지금 우리사회도 진보니 보수니 나눠서 매일 갈등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정치하는 분들에게 쓴 소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들 저능아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아마 기분 나빴겠지요. 그런데 진보와 보수가 뭡니까. 국민을 잘 살게 하겠다고 만들어 놓은 거 아닙니까. 그러면 그것은 수단이고, 목표는 당연히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수단과 목표를 구분하지 못하고 오히려 괴롭히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도 수단과 목표는 구분을 하는데, 그렇게 매일 진보다 보수다 해서 갈등하니 저능아라고 했던 것입니다. 스님들도 그렇습니다.
스님 노릇하는 이유는 도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스님들에게 왜 스님 노릇하느냐고 물으면, 도통하려고 한다는 스님이 과연 몇 분이나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지금 총체적으로 수단과 목표를 가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모든 것을 돈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을 우리가 이해를 하면 수단과 목표도 분명하게 가릴 줄 알고, 어떻게 해야 인생을 잘 사는 것인지 목표의식도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삶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젊어서 결핵에 걸려 지금도 한쪽 폐가 기능을 못하고 있는데요. 절에서 요양하다가 불교를 알게 되고 출가를 했는데, 출가 후에는 경전도 열심히 보고 하면서 약을 먹지 않고 살게 됐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 갈등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 귀중함을 알아가니까 이런 이야기라도 해야겠다 생각해서 이렇게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존재원리를 바로 보셨다고 했습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오온개공을 다시 한번 예로 들겠습니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색은 몸이고, 수상행식은 우리의 정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신과 몸 이것이 공한 줄 알면 되겠는데, 이것이 어렵지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해서 공인 줄 알면, 그때부터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사고도 바뀌게 됩니다. 이 바뀐 사고를 중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참 이해하기가 어렵지요.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지요. 외형은 남자의 모습이고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다르지요. 신체구조도 다르고요.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이 외형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시골에 가면 새끼라는 것이 있습니다. 가마니도 있고, 덕석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양도 다르고 크기도 다르고 쓰임새도 다릅니다. 그런데 그 재료가 뭡니까. 짚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외형도 다르고 하는 역할도 다르지만 그 본질에서 보면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습니다. 그래서 외형만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질을 보면 인종, 이념, 민족, 종교도 다 초월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인 짚을 이해하면 갈등, 대립, 투쟁 이런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것입니다. 멀리보지 마시고 집에서 남편이나 부인을 보면서 한번 그렇게 생각을 해 보세요. 본질에서 보면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근본입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금강경’에서는 태란습화, 유정, 무정까지 나옵니다. 이 모두의 존재원리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예로 강아지를 이러한 시각으로 본다면 우리 주변에서 유기견이 생기지 않겠지요. 모든 존재의 외형은 다를지언정 본질은 하나라는 말을 깊이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앞에서 짚을 이야기했는데, 짚이 있다는 것을 체험한 분을 우리는 도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짚을 이해했을 때 비로소 불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 이 짚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형만 바라보지 말고, 이 외형 이외에 공이라고 하는 짚의 존재도 항상 함께 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내를 볼 때도 나하고 둘이 아니구나, 자식을 볼 때도 나하고 둘이 아니구나, 직장 동료를 볼 때도 ‘나하고 둘이 아니구나’ 라고 생각할 때 서로 도움도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갈등이나 대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
중도연기를 이해하지 못하면 불자도, 스님도 모두 껍데기일 뿐입니다. ‘남자’ ‘여자’, ‘옳다’ ‘그르다’, ‘있다’ ‘없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짚에서 보면 하나입니다. 중도에서는 그것을 쌍차(雙遮)라고 합니다. 여기서 쌍은 아내와 남편이 없는 것입니다. 또 차는 차단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로 구분하는 것을 차단한다는 것이고 이것을 쌍차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차단한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서로서로 교류하고 생활하는 것을 쌍조(雙照)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도를 쌍차쌍조(雙遮雙照)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알아서 남편과 내가 둘이 아니다, 아내와 내가 둘이 아니다, 자식과 내가 둘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서 생활하면 마음이 굉장히 넓어지게 됩니다. 불교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고, 부처님이 깨달은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쌍차쌍조, 우리의 존재원리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행복해지고 마음도 넓어집니다. 생활하시다보면 속상한 일들 많으시지요. 그 속상한 것을 붙들고 있으면 결국은 자기 손해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중도의 원리를 잘 이해하셔서 마음에 맺힌 것도 다 풀어내십시오. 그래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시고 즐겁게 하세요. 그것이 불교이고 자기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환경이 여의치 않더라도 부처님 법에 의지해서 마음 평수를 조금씩 넓히시고 행복하게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출처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