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저문 날의 삽화>
박완서의 연작소설 <저문 날의 삽화>에는 1931년생인 작가가 한국 사회에서 겪어야 했던 여성의 삶에 대한 다양한 시선이 담겨져있다. 작가가 살았던 시기, 여성들은 일제 강점기의 수난을 누구보다도 폭력적으로 경험했고, 한국전쟁의 혼돈 속에서 가족들을 지키고 돌보면서 강인하게 살아온 존재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조금은 살만해지고 자식들의 뒷바라지에서 벗어난 시기에 바라본 한국 사회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1980년대 민중이 호명되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는 수많은 구호가 넘치던 시절, 여성들의 시선은 시대의 대의에 찬동하면서도 어쩌면 그 속에서 소외받은 또다른 차별의 움직임을 파악했는지 모른다. 작가의 소설 속에서도 그것은 분명하게 나타나있다.
소설 속 작가의 낮으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표현되는 분노는 ‘가부장적 질서’가 지배하는 한국사회이다. 부부는 가정의 문제를 공통으로 협의하고 공동의 권리와 책임을 분담하는 관계임에도 한국사회에서 남성들은 더 많은 책임을 핑계로 권리를 장악했고 여성에 대한 의무만을 강요했다고 본다. 그것은 과거의 남성들뿐 아니라 사회운동을 하는 젊은 남성들의 의식에도 끈질기에 남아있는 병폐였던 것이다. 운동권 남성의 아내는 그런 남성의 태도를 지적한다. “강하게 지배할수록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일거예요. 그가 저항하는 부패한 권력의 지배논리를 그대로 여자에게 적용하고 쾌재를 부를 정도이니까요.” 권력에 저항한다는 명분으로 자행되는 가족에 대한 폭력은 가부장적 질서라는 분위가가 허용되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현상인 것이다. 가부장적 질서는 이렇듯 인간적 관계와 가족간의 애정 속에도 남성중심적 구조가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것이다. “내가 공경할 의무가 있음은 그들이 남편을 있게끔 했기 때문이거늘 나를 있게끔 한 내 조상에 대해선 어째서 남편이 공경의 의무를 지려 들지 않는가.”
가족이라는 가장 친밀하고 애정을 근간으로 이루어지는 관계에서도 상대를 존중하지 않고 자신의 편의와 이익만을 강요하는 사회운동가는 ‘저항’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파멸시키는 존재에 불과하다. 권력에 대한 저항은 그것이 가져오는 정치사회적 의미만이 아니다. 그런 정치적 폭력 속에서 무너지는 일상의 파괴와 인간의 실존적 위험이 더 큰 것이다. 그러나 운동권 남성은 그가 그토록 증오하다고 입으로 떠버린 폭력을 가정에서 아무런 반성도 없이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분노는 그것을 향하는 것이며, 진정한 혁명은 거대한 구조가 아니라 일상에서 완성됨을 강조하는 것이다. “소위 민중을 위한다는 친구가 여성처럼 오랜 세월 교묘하게 억압받고 수탈당한 큰 집단이 민중으로 안보인다면 그를 어떻게 믿냐? 저는 남자의 기득권ㅇ르 안 내놓으려 들면서 권력자의 기득권을 내놓으라고 외치는 것도 가짜답고 도대체 제 계집을 종처럼 다루면서 일말의 연민도 없는 자가 민중을 사랑한다는 소리를 어떻게 믿냐.”
연작소설 속에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함께 시대적 한계 속에서 겪어야 했던 작가의 잘못도 정직하게 표현되어 있다.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이 모두 사회적 악을 저지른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자식에 대한 개인적인 방어막 때문에 그들을 구분하지 않고 범죄자로 취급한 점, 사망한 친구의 아들을 돌볼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남편이 집안으로 데려왔을 때 본능적으로 느낀 남편에 대한 불륜에 대한 의심, 과거 집안일을 도와준 사람을 만나 인사치례로 한 집안초대가 실제로 이뤄졌을 때 그것을 책임지지 못하고 행한 이기적인 행동 등 일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위신을 높이고 좋은 모습을 보이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듯하지만, 결국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그것의 경계를 넘어설 때는 관용을 잃어버리는 보통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한계와 반성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 속에서 많은 것이 있는 그대로 수용될 수 없다. 기술적 변화는 물질적 조건을 바꾸며 일상적 생활 패턴을 변모시키고 결국은 내적인 안정과 심리적 변화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한 변화가 생뚱맞고 수용하기 쉽지 않지만 그것은 분명 자연스런 시대의 변화이며 적응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진정 소중한 것을 보전하려는 태도와 의지일지 모른다. 그것은 남아있는 삶에 대한 희망이라 표현할 수도 있는 인간의 변할 수 없는 본질의 지킴일 것이다. 작가는 새로 산 자동차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지녔다가, 우연히 길에서 차가 고장나서 차를 밀게 된다. 남편와 함께 행한 그 일은 과거 리어카를 밀었던 때를 회상하게 만들었고 중요한 것은 같이 차를 밀고있는 두 사람의 연대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그 옛날, 그 곤궁하고 씩씩하던 날이 협려을 해서일까. 오르막길도 그닥 힘들지 않았다. 더 신나는 건 처음으로 내 차를 소유한 것처럼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가 마구 휘둘리고 끌려다녀야 할 하낱 애물단지가 아니라 우리 힘에 순종하는 우리의 소유물이었다. 소유한 이상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자유루워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작가의 연작 소설에는 이제 장년을 맞은 여성의 내면 속에 축적된 아픔과 아쉬움 그리고 회한이 담겨져 있다. 60년 가까운 시간 속에서 삶은 많은 것을 우리에게 남겨줄 것이다. 그것을 냉정하면서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힘은 남아있는 날들을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동기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시간은 분명 수많은 역사적 아픔이 우리를 압도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생존에 대한 본능으로 살아야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은 더 많은 책임과 과제를 부여받았음에도 그에 합당한 권리와 대우를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한 여성적 자각은 이 소설이 발표된 1980년대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패미니즘’이라는 용어가 특정 집단의 이기적인 보호막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나 페미니즘을 특정화화하여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사람들 모두 페미니즘을 곡해하는 자들이다. ‘패미니즘’은 그동안 은폐되왔고 억압받았던 사람들의 인간적 권리의 자연스런 회복인 것이다.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우대받아서도 소외되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인 것이다. 박완서의 소설은 여성에 대한 페미니즘적 주장에 대한 일종의 접근방법을 제시하는지 모른다. 인간적 관심을 가지고 이기적 태도를 버렸을 때만이 사람들을 보았을 때 무엇이 잘못되고 올바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 과거의 시간은 분명 수많은 역사적 아픔이 우리를 압도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생존에 대한 본능으로 살아야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들은 더 많은 책임과 과제를 부여받았음에도 그에 합당한 권리와 대우를 획득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