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小傳」 편집자 윤상홍 글 퍼옮(예안중 15기 카톡방 금창석동기 올린글 다운받음 2020.11.20)
<14회> 退溪小傳
教育者로서의 退溪
퇴계가 관직(官職)에 종사했던 이력(履歷)은 대략 다음과 같다.
•34세 과거(科擧)에 급제﹐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
•36세 호조좌랑(戶曹佐郞)
•40세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도관겸 기주관(司諫院正言,承文院校檢,經筵侍讀
兼 記注官)
•41세 세자시강원문학 겸 성균관전적, 형조정랑(世子侍講院文學兼 成均館典籍刑曹正郞)
•42세 홍문관부교리, 의정부검상(弘文館副校理、議政府檢詳)
•43세 종친부전첨 예빈시부정(宗親府典籤禮寶寺副正)
•45세 내섬시첨정﹐ 군자감천정, 통례원상례(內隱寺僉正(軍資監僉正、通禮院相禮)
•47세 예빈시정﹐ 홍문관응교 의빈부경력(禮賓寺正。弘文館應敎,儀賓府經歷)
•48세 단양군수(丹陽郡守)
•49세 풍기군수(豊基郡守)
•52세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56세 부제학(副提學)
•58세 성균관대사성 재임(成均館大司成 再任)
•58세 공조참판(工曹參判)
•66세 대제학(大提學)
•67세 예조판서(禮曹判書)
•68세 우찬성﹐ 판중추부사 대제학겸임(右贊成,判中樞府事、大提學兼任)
•69세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상과 같은 이력을 종합해 보면 퇴계는 마치 평생을 관리생활로 종신한 사람처럼 보여
지기는 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판단이다.
퇴계는 52세에는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고﹐ 66세에는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을 통솔하는 부제학(副提學)이 되었고﹐ 66세에는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는데 성균관이란 본시 유생(儒生)들을 길러내는 교육기관이요﹐ 대제학은 오늘날로 치면 대학총장(大學總長)에 해당하는 직책으로서 국가의 두뇌(頭腦)들을 길러내는 최고 교육기관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퇴계는 젊은 시절에만 일시 행정관(行政官)으로 시무했을 뿐 50세가 넘으면서부터
는 순전히 교육직(敎育職)에만 종사해왔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56세 때에는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고향인 안동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의 기지(基地)를 마련하여 독자적으로 서당을 짓기 시작했던 사실을 보면, 퇴계는 젊어서부터 관리생활에는 뜻이 없고 인재 교육에만 큰 뜻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후에도 공조참판(工曹參判),예조판서(禮曹判書)﹐ 이조판서(吏曹判書) 등등의 고관 자리가 제수되기는 했으나 퇴계는 그때마다 관직을 사양하고 오로지 도산서당에서 인재를 길러내는데만 전력을 기울여 왔었다.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십년지계(十年之計)로서는 나무를 심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백년대계(百年大計) 로서는 인재를 양성하라는 말이 있거니와 퇴계는 관직 따위에는 추호도 미련이 없이 오로지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교육사업에만 전념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퇴계의 진면목을 알아보려면 무엇보다도 교육자로서의 퇴계의 태도를 알아 볼 필요가 있을 것같다.
퇴계의 제자의 한사람인 김성일(金誠一)은 교육자로서의 퇴계의 자세에 대해 이렇게 말하
고 있다.
「선생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에도 친구처럼 대하고 끝까지 스승으로 자처하는 일이 없
었다. 젊은 선비들이 멀리서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면 선생은 그 사람의 깊고 얕음을 따라
가르치되 학문을 연구하기에 앞서 뜻부터 확고하게 세우는 것이 소중하다고 다정하게 타일러 주셨다.」
[선생은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동(動)﹐ 정(靜) 어(語) 묵(默)이 아주 쉽고 분명하여 지나치게 높고 먼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모든 행동이 저절로 예절에 맞아서
다른 사람이 따르지 못할 묘한 점이 있었다.」
[선생은 욕심을 이기고 마음을 기르면 어떤 일을 당해도 결코 당황하지 않고 마음에 여
유가 생기는 법이라고 말씀하셨다.」
[선생의 가르치심을 듣고 있노라면 사심이 절로 없어지고 하늘의 이치가 해처럼 밝아와
서 물(物)과 나사이에서 피차의 구별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마음은 바로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로 융합되는 새로운 경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상은 김성일이 퇴계에게 글을 배우는 동안에 느낀 인상의 일부이었다. 역시 제자의 한사
람인 우성전(禹性傳)은 퇴계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생의 학문은 대개 주자(朱子)를 근본으로 삼았다. 따라서 공리(功利)에도 그 뜻을 빼앗
기지 않았고﹐ 이단(異端)에도 그 소견이 현혹되지 않았다. 널리 알면서도 잡되지 않았고﹐ 간락하면서도 고루하지 않았다. 학문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성현(聖賢)을 근본으로 삼아 거기서 새로운 진실을 찾아내었고﹐ 남을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사람의 윤리를 기본으로 삼았다.
예법을 의논할 때에는 옛것을 끌어오면서도 당시의 제도와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자기 몸 닦기를 소중히 여기면서도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았고﹐ 남의 좋은 점을 따르기에 성실하여 자신의 모자람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사람 대하기를 화(和)로써 하니, 사람들이 절로 공경하였고 아랫사람 대하기를 너그럽게 하니 아랫사람들이 절로 조심하게 되었다. 선생은 모든 일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많은 제자들을 절로 교화(敎化)되게 하셨으니 선생의 바르신 교육법은 아무리 구해보아도 선생과 겨룰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선생은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서 반드시 충신(忠信)﹐ 독실(篤實)﹐ 겸허(謙虛)﹐ 공손(恭遜)으로써 하셨다.」
제자들의 이상과 같은 몇가지 이야기를 들어보더라도 교육자로서의 퇴계의 태도가 얼마나 성실하고 공손했던가를 알 수 있는 일이다.
사실 퇴계는 누가 무슨 말을 물어오든간에 문제가 깊고 얕음을 가리지 아니하고 그 사람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알려주기를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만년에 퇴계는 중병이 들었을 때에도 그와 같은 태도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어서 제자들에
게 강론을 할 때에는 평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선생이 중병에 들렸음을 훨씬 나중에야 알고 강론을 자진하여 중단하게
되었는데﹐ 퇴계는 강론을 못하게 된 지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 한가지 사실만 보아도 퇴계는 제자를 길러내는데 얼마나 희생적이었던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14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