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챙기기 이건희·홍라희 마스터피스
이건희가 세상에 알린 ‘낙원’…이중섭 스승, 전설의 女화가
2024.02.15
이건희·홍라희 마스터피스
매년 전 세계에서 700만명이 찾는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하 메트).
지난해 말 이곳 한국실에 새 그림이 걸렸습니다. 백남순(1904~94)의 1936년작 ‘낙원’입니다. 한국실 개관 25주년 특별전 ‘계보: 메트로폴리탄의 한국 미술’에 출품된 거죠.
백남순은 20세기의 노마드였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도쿄ㆍ파리에서 공부했고, 만년은 뉴욕에서 보냈습니다. 고국에선 사실상 잊혀진 화가였습니다.
‘낙원’도 비슷합니다. 78년 동안 많은 곳을 떠돈 끝에, 뉴욕에 와서 세계인들을 만나게 됐습니다. 백남순과 ‘낙원’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메트 현수아 큐레이터는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서 ‘낙원’을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이번 주 ‘이건희ㆍ홍라희 마스터피스’는 ‘계보: 메트의 한국 미술’이 엄선한 30점 가운데 단 한 점의 이건희 컬렉션, 백남순의 ‘낙원’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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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순, 낙원, 1936, 캔버스에 유채; 8폭 병풍, 173x372㎝.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목차
1.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린 이건희 컬렉션 ‘낙원’
2. 보스턴 마라톤 손기정ㆍ서윤복의 재정보증인, 백남용의 동생
3. 파리의 첫 여성 미술 유학생, 부부 화가
4. 평북 오산학교에서 15년…‘이중섭의 스승’
5. “오늘은 꼭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부속. 결혼선물로 보낸 덕에 살아남은 그림, ‘낙원’ 발굴기
1.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린 이건희 컬렉션 ‘낙원’
캔버스 천으로 짠 8폭 병풍이다. 화가는 여기 표구라도 한 듯 테두리까지 그려 넣었다. 병풍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본다. 맨 오른쪽 낙원 입구에 결혼 서약을 하듯 남녀가 서 있다. 폭포수 쏟아지는 낙원으로 들어간 여자는 아이를 낳아 키우고, 남자는 고기잡이를 한다. 서로 보듬고 성장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리라 기원하는 것 같다. 쏟아지는 폭포수와 야자수, 험산 준령과 푸른 초원, 누드의 인물과 서양식 집…. 맨 왼쪽 위에 영어 서명이 있다. ‘N.S.Paik’.
‘낙원’ 부분. 병풍 왼쪽 위에 ‘N.S.Paik’ 서명을 했고, 표구한 것처럼 테두리도 그려 넣었다. 그림 한가운데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올 법한 인물과 서양식 건물이 보인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동서양의 이상향이 뒤섞인 기묘하고 신비로운 그림이다. 조선의 화원이었다면 ‘몽유도원도’나 ‘무이구곡도’를, 17세기 유럽의 화가라면 아르카디아를 그렸을 텐데. 20세기 초 식민지 조선의 몇 안 되는 파리 유학파 화가 백남순은 병풍 캔버스에 하이브리드 낙원을 그렸다.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의 ‘아르카디아에도 나는 있다’(1637~38). 푸생은 이상향 그림에도 ‘죽음을 기억하라’는 교훈을 남겼다. 그리스의 한 지역인 아르카디아는 서양 미술에서 이상향으로 즐겨 묘사됐다. 사진 루브르박물관
메트 한국실은 ‘낙원’ 옆에 16세기 ‘계회도(契會圖)’를 걸었다. 같은 해 태어나 비슷한 시기 과거에 급제한 사대부들이 환갑에 모여 함께 시를 지으며 남긴 그림이다. 미국서 나고 자란 현수아 큐레이터는 “일제 강점기에 파리 유학을 하고, 후에 미국에 이민 온 백남순의 이야기에 끌렸다”며 “조선시대 이상향을 묘사한 ‘계회도’와 20세기 백남순의 유토피아 풍경화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여겨 함께 걸었다”고 설명했다. 백남순은 ‘낙원’에 어떤 소망을 담았던 걸까.
‘낙원’ 옆에는 메트 소장품 계회도(1551년경)를 걸었다. 당시 사대부들은 풍광 좋은 곳에 모여 시 짓고 즐기는 모임(오른쪽 아래)을 그림으로 남겼다. 폭포수 쏟아지는 이상화된 풍경은 ‘낙원’과 나란히 두고 볼 만하다. 사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낙원’은 백남순이 셋째 딸을 낳은 이듬해인 1936년 작품이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그린 후 친구의 결혼 선물로 전라남도 완도로 보냈다. 반세기 가까이 친구가 간직하던 것을 삼성가에서 사들였고, 2021년 이건희 컬렉션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2022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마련한 ‘사이의 공간: 한국 미술의 근대’에 전시됐고, 두 전시를 눈여겨본 메트 현수아 큐레이터에 의해 뉴욕에 오게 됐다.
2022년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LACMA)에서 마련한 ‘사이의 공간: 한국 미술의 근대’ 전시 당시의 ‘낙원’. LA=권근영 기자
2. 보스턴 마라톤 손기정ㆍ서윤복의 재정보증인, 백남용의 동생
백남순은 1904년 사업가 백낙준의 2남1녀 외동딸로 서울서 태어났다. 큰오빠 백남칠은 광복 후 초대 관재청장(지금의 국세청장)을 지내다 6ㆍ25 때 납북됐다. 둘째 오빠인 백남용은 3ㆍ1운동 후 미국에 정착해 보스턴에서 통조림 공장을 운영했다. 그는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당시 한국 선수단의 재정 보증을 섰다(윤범모, ‘백남순 여사의 뉴욕 화실 탐방’, 「가나아트」, 1988년 창간호).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이었다. 미군정하의 한국은 국제대회 참가도 어려운 ‘난민국’이었다. 손기정 감독이 인솔한 한국 선수단은 백남용 덕에 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고, 서윤복은 이 대회에서 세계 신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영화 ‘1947 보스톤’에서 마라톤 국가대표팀의 재정보증인으로 나선 현지 교민 백남현(배우 김상호). 백남순의 오빠 백남용을 모델로 했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백남순은 화가가 되기 위해 신중하게 준비했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현 조시비여자미술대학)에 갔지만 관동대지진으로 1년 만에 중도 귀국했다. 1924년 가명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약현성당에서 운영하던 프랑스 가톨릭계 학교다. 여기서 프랑스 신부에게 불어를 배우며 파리 유학을 준비했다.
3. 파리의 첫 여성 미술 유학생, 부부 화가
교사로 일해 번 돈에 가족들의 후원을 합쳐 4년치 생활비를 마련한 백남순은 1928년 서울을 떠났다. 기차편으로 시베리아를 횡단해 보름 만에 파리에 도착했다. 여기서 아카데미 그랑 쇼미엘에 등록했고 후에 스칸디나브 아카데미로 옮겼다. ‘살롱 데 튈르리’ 같은 현지 공모전에 입선해 전시도 가졌다. 파리에 여행자 신분으로 와 있던 나혜석(1896~1948)은 본격적으로 미술 수업을 받는 백남순을 부러워했다. 그래서 백남순에게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내 남편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관철하지 못하고 귀국했다.
임용련과 백남순. 중앙포토
백남순은 파리에서 화가 임용련(1901~50)과 결혼했다. 임용련은 배재고보 학생 시절 3ㆍ1운동에 적극 가담해 경찰의 수배를 받자 중국으로 피신했다. 상해임시정부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갔고, 예일대 미대를 수석 졸업하며 유럽미술연구 장학생으로 파리에 갔다. 거기서 백남순을 만난 것이다.
김주원 기자
결혼 당시 백남순은 26세, 임용련은 29세였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기차로 40분 거리의 별장지인 에르블레에서 혼배식을 올렸고, 신접살림을 차렸다. 임용련의 ‘에르블레 풍경’(1930)에 그때의 추억이 담겨 있다.
임용련, 에르블레 풍경, 1930, 카드보드에 유채, 24.2x33㎝.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귀국한 두 사람은 1930년 11월 서울서 ‘임용련ㆍ백남순 부부 유화전’을 열었다. 금의환향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미술학도가 일본서 공부한 것과 달리 구미(歐美)에서 공부한, 그것도 부부의 전시로 대중의 관심을 모았다. 그러나 1930년대 서울에 이들이 화가로 꿈을 펼칠 곳은 없었다.
4. 평북 오산학교에서 15년…‘이중섭의 스승’
임용련은 평북 정주 오산학교에서 영어와 미술을 가르친다. 정주역에서도 30리 떨어진 외딴 곳이었다. 임용련 못지않은 이력이었지만 백남순에게 주어진 역할은 내조, 남편을 도와 미술부 학생들을 지도했다. 그중엔 이중섭도 있었다.
백남순은 “담배 은박지를 손으로 구겼다가 펴 보이며 많은 선에서 제 나름의 독창적인 선과 형상을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여 년 뒤 이중섭이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 때 내게 ‘선생님이 말씀하신 대로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습니다’라고 인사했다”고 돌아봤다 (김재혁, ‘백남순 취재기’, 「계간미술」 1981년 여름호).
1930년대 백남순의 ‘낙원’(탁자 뒤)이 전시된 오산학교 박물관. 사진 오산학교 70년사
‘낙원’도 이때 그렸다. 임용련이 캔버스 천으로 8곡병 한 쌍을 짠 뒤, 부부가 병풍을 하나씩 나눠 그렸다. 백남순이 ‘낙원’을 그릴 때 임용련도 낚시하는 노인, 바둑 두는 사람 같은 동양화 소재를 서양화 방식으로 그렸다고 한다. 하지만 임용련의 병풍은 사진조차 찾을 수 없다.
‘화가로 생활할 수 있게 될 때까지만 하자’던 부부의 오산학교 생활은 광복 후까지 15년 동안 이어졌다. 그러다 38선으로 남북이 갈리자 백남순은 정주 고읍역 창고에 그림을 보관해 두고 서울로 피란을 떠났다.
미군정기 서울에서 임용련은 서울세관장 겸 경제협조처 세관 고문으로 일했다. 6ㆍ25 발발 후 남침해 온 공산군에 끌려가 중구청에서 처형당했다는 게 백남순의 회고다. 백남순은 이후 일곱 자녀를 이끌고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유학 시절, 또 줄줄이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화가의 꿈을 놓지 않은 오산학교 시절 그림들은 챙길 겨를도 없었다. 후에 그림을 모아둔 고읍역이 폭격으로 전소했다는 소식을 접한 백남순은 “우리들의 작품이 지구상에 한 점도 남아 있지 않게 됐다”고 통곡했다.
부산에서 백남순은 서울대 미대 강사로 지내다가 1953년 성심공민학교를 설립했다. 의무교육이 실시된 1962년 폐교될 때까지 전쟁고아와 빈민교육 사업에 헌신한다. 이후 자녀가 있는 미국에 이민 가 뉴욕에 정착해 뒤늦게 다시 붓을 들었다.
5. “오늘은 꼭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뉴욕에 정착한 백남순은 혼자 지냈다. 전쟁 통에 사별한 남편의 예일대 시절 사진과 십자가를 걸어둔 아파트 거실에서 “오늘은 꼭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그림 그리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하며.
국내 화단에서 완전히 잊혔던 그의 존재는 그가 팔순을 바라보던 1981년 「계간미술」(지금의 「월간미술」) 기사를 통해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계간미술」을 대신해 그를 인터뷰했던 중앙일보 뉴욕 특파원은 백남순이 “(나는) 화가라 할 수도 없는 늙은이”라며 인터뷰를 한사코 고사했다고 전했다.
1981년 뉴욕의 원 베드룸 아파트 거실의 백남순. 가운데 벽에는 남편 임용련의 사진이 십자가 목걸이에 둘러싸인 채 걸려 있다. 중앙포토
1930년 ‘부부 유화전’으로 엘리트 부부의 금의환향을 알린 「동아일보」 기사에 춘원 이광수는 이런 축사를 남겼다.
아직 두 분이 다 서른 이내시니, 두 분은 아직도 내일의 사람이요, 어제의 사람은 아니다. 무한한 진보와 향상이 앞에 있는 것을 믿거니와….
‘내일의 화가’를 꿈꾸던 20대 부부의 꿈은 어지러운 시절을 만나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백남순이 ‘어제나마 화가’였음을 알려주는 그림만이 극적으로 남아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결혼선물로 보낸 덕에 살아남은 그림, ‘낙원’ 발굴기
1981년 용산 한강아파트에서 발견 당시의 ‘낙원’. 옥상에서 촬영해 배경에 남산타워가 보인다. 중앙포토
이번 인터뷰로 앞으로 남한에서 단 한 점일지라도 임용련ㆍ백남순 작품이 발굴 또는 발견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얼마나 다행일까.
1981년 백남순이 반세기 만에 입을 연 「계간미술」 기사의 마지막 문장이다. 기사를 본 민영순(당시 76세) 씨가 계간미술에 연락해 왔다. 백남순의 큰 그림을 간직하고 있다는 거였다. 당시 계간미술 윤범모 기자는 민 씨의 용산 자택을 찾아가 병풍을 확인했다.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폭 372㎝에 달하는 병풍을 거실에서 펼칠 수가 없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에서 병풍을 짊어지고 옥상까지 올라간 게 한여름이었죠. 사진을 찍는데 뒤에 남산타워가 같이 나왔어요”라고 윤 전 기자는 돌아봤다.
하필이면 이 묘한 거작을 나의 결혼 선물로 보내 주었는가. 그때 나는 완도에서 병원을 개업한 남편을 따라가 있었는데 해농(백남순의 호)은 이 작품을 화물편으로 부쳤던 것이다. 그 후 여러 지방으로 이사해 살면서도 좋은 징표로 간수해왔다. (민영순, ‘백남순 작품 첫 출현’, 「계간미술」, 1981년 가을호)
1920년대 가명학교 교사 시절의 민영순(왼쪽)과 백남순. 사진 계간미술
그리고 반년 뒤, 민영순의 집에서 또 한 점의 그림이 나왔다. 임용련의 ‘에르블레 풍경’이었다. “언니가 결혼 선물로 귀한 그림을 보내줬듯 이번에는 내가 미국으로 그림을 보내겠다”며 연락해 온 민영순에게 백남순은 “임용련의 미술사적 존재를 작품으로 되새기게 해 달라”며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을 부탁했다.
후에 윤범모는 호암미술관 학예사를 거쳐 뉴욕으로 가 백남순과 가까이 살며 인연을 이어갔다. ‘낙원’은 삼성가에서 사들였다가 2021년 이건희 컬렉션으로 기증됐다. 윤범모는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이었다. 기증을 받을 당시 못다 한 이야기를 그는 최근 출간한 『현대미술관장의 수첩』에서 아래와 같이 풀어냈다.
삼성 측이 기증 의사를 밝힌 뒤 1차 기증목록을 받고 그 숫자와 내용에 경악했다. 총 네 차례에 걸쳐 용인 수장고를 다니며 실제 작품을 봤고, 수증심의 회의를 가졌다. 모든 과정은 대외비였다… 용인에서 과천으로 가는 길. 이 길에서 우리는 세기의 기증을 맞이했다. 5톤 무진동 트럭 18대의 행렬… ‘낙원’을 비롯해 내가 발굴ㆍ매입 등에 관여했던 그림들도 있었다.
다음 주는 백남순의 제자, 이중섭 이야기다. 이건희 컬렉션에서 유영국 다음으로 많은 것이 이중섭의 그림이다. 국립현대미술관뿐 아니라 이중섭이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도 기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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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간 남편 70년 그리워하다 사랑꾼 이중섭 ‘구애 엽서화’
에디터
숱한 역경을 견디고 현존한 작품이 담은 이야기가 참 재미있고 흥미롭네요~ 감사합니다.
루브르 박물관은 푸생의 그림을 어떻게 수집했는가? 화가는 왜 국립 미술관에 바로 기증하지 않았을까...
이번 글은 목차가 있어 읽기 전부터 궁금하고 기대되었습니다. 백남순 작가의 더 많은 작품이 궁금한데 볼 수 없다는게 안타깝고 남편이자 동료였던 임용련 작가의 죽음에 작가가 얼마나 비통했을지 마음이 아픕니다. 묻힐 수 있는 작가들을 발굴하고 세상에 다시 소개하는 미술관과 미술사가, 기자 등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다시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감사합니다.
이 기사를 읽고 망연자실해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달고 기도했던 화가의 절박함이 가슴을 아프게 하네요. 백남순 작가를 몰랐고 이중섭의 스승이라는 것도, 낙원이란 작품도 몰랐습니다. 정말 소중한 기사를 접했습니다. 다음 이중섭의 기사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병풍같이 큰 사이즈의 그림이구나, 라는 생각 부터 시작하여 기사를 다 읽었을때쯤에는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이 생각나서 다시 스크롤을 올려 보았습니다. 그림이 있으면 화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20세기 암울한 시절에 미국과 프랑스 등 구미 유학을 거친 엘리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꿈을 펼치지 못하는 가슴 아픈시절의 젊은이 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세상의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게도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하게 됩니다..수원에서 태어나, 한국인 최초 서양화가 나혜석과 백남순의 만남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이중섭 화가의 스승이 백남순 이었다는것이너무도 신기할 따름 이다..낙원에서 표현된 두 남여의 사랑은, 암울한 시기 였지만, 이상형의유토피아를 꿈꾸었던 1930년대의 젊은 엘리트의 마음도 담겨있는그림으로 보였다.한국 미술사에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를 발굴해서 많은 독자들에게스토리와 귀중한 작품을 소개해 주신 권근영 기자님께 다시한번 진심으로감사 드립니다.남은 이야기도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구구절절 사연없는 작품이 없구나..지금은 낙원에서 부부가 해로하고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