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죽으면 연미복으로 내 몸을 덮어 주시오...'' 1941년, 그는 숨을 거두며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1941년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홍난파...그가 바로 한국최초의 가곡으로 불리는 봉선화의 작곡가이다.
바이올리니스트, 평론가, 교향악단 지휘자, 음악교육가, 음악전문지 발행인 또한 소설가로도 활동하며 다재다능한 활동을 펼친 난파는 3.1운동이 나던 다음 해인 1920년 그의 나이 22세때 ''처녀혼''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한 그는 이 소설집의 서장에 ''애수''라는 곡명의 바이올린 곡을 실었다. 5년 뒤 김형준(작년에 작고하신 피아니스트 김원복의 선친)이 이 곡에 가사를 붙여 ''봉선화''가 탄생된 것이다.
가사의 내용을 보면 울밑에 핀 봉선화의 가련한 모습이 마치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움을 표현한 듯 하다. 민족의 노래로,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 노래로, ''봉선화''는 한많은 겨레의 아픔을 대변하는 노래였다.
봉선화는 최초의 한국가곡이라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그 중요성을 부인할 수 없고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민족의 애환을 같이한 민족의 노래라는 점에서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봉선화의 가사를 붙인 시기가 1925년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보다 3년 앞선 박태준의 ''사우''(동무생각)가 한국 최초의 가곡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봉선화''는 애수를 띤 멜로디와 가사의 애절함으로 우리 민족의 애환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노래임에 틀림없으나 초창기 한국가곡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예를 들면 못갖춘 마디로 시작하는 멜로디에 가사를 얹을 경우, 우리 말은 강세가 첫 박에 와야 한다. 그런데 ''봉선화''는 약박으로 노래를 불러야하는 모순이 생겨 음악적 엑센트를 무시하고 언어의 엑센트를 살려 노래해야 가사의 느낌을 전달 할 수 있다.
즉 ''울밑에선 봉선화야''에서 ''울밑에''까지가 못갖춘마디로 시작되어서 약박으로 노래를 불러야하고 오히려 ''선''이 강박에 있어서 ''선''을 강하게 불러야하는 리듬상의 문제점이 있다.
''애국가''에서도 ''동해물과''의 ''동''이 약박으로 시작되어 ''동해''에서''해''를 강박으로 불러야하는 난센스를 빚고 있다. 동해의 물이 아니고 동쪽의 해물로 들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초창기 한국가곡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한계라고 하겠다.
당시 소프라노로 일본에 유학 중이던 김천애는 도쿄의 히비야 공원에서 한복을 입고 처음으로 ''봉선화''를 불러 한국인 유학생을 오열케 했다. 김천애는 일본 경찰에 붙잡히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봉선화''는 가을에 졌다가 새봄에 다시 피는 봉선화처럼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은 조국이 환생하기를 바라는 민족의 염원을 담은 듯 하다. 이러한 내용으로 ''봉선화''는 삽시간에 온겨례의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다. 소프라노 김천애가 빅터와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봉선화를 취입한 것이 커다란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홍난파의 가곡에는 봉선화 이외에도 ''조선 가요작곡집''에 수록된 ''상시의 봄처녀'', ''사랑'', ''옛동산에 올라'', ''고향생각'', ''성불사의 밤'', ''금강에 살으리랏다'', ''사공의 노래'' 등 19곡이 있다. 홍난파는 ''오빠생각'', ''고향의봄'', ''낮에 나온 반달'' 등 100여곡에 달하는 동요를 썼으며 신민요와 대중가요를 쓰기도 했다.
경기도 화성군 남양면 활초리에는 홍난파의 생가가 있다. 1954년에는 난파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매년 경기도 수원에서 난파음악콩쿠르를 비롯하여 갖가지 행사를 개최하여 난파의 넋을 기리고 있다
- 청석 옮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