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2:4~19)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들짐승과 공중의 새는 어떻게 지으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하나님께서 들짐승과 공중의 새들은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지으셨는지 7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도 땅의 ‘흙’으로 지었다고 한글성경은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전혀 다른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절에서 들짐승과 공중의 새는 ‘흙’ 즉
아다마(אדמה)로 지었다고 했으나, 7절에서는 ‘흙(아다마)’이 아니라 ‘흙의 먼지(아파르 עפר)’로
지었다고 했습니다. 재료 면에서 보면 사람은 들짐승들보다 못한 ‘흙의 먼지’로 지은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물론 그 이유는 하나님께 물어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아무 쓸모 짝도 없는
먼지로 지으신 이유는 ‘자만하지 마라! 겸손하라!’는 뜻이 숨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16:26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즉 사람의
목숨은 천하보다 귀하다는 거예요.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 해답이 오늘
본문 7절에 나옵니다. 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지으셨습니까? ‘흙의 먼지’에다가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어서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생령’이 되었습니다. 즉 살아 있는 영(靈)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하보다 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들짐승이 죽어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서로 주어가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주은 사람은
횡재를 했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것을 보면 모두가 피해갑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은 죽으면 먼지가 되는 거예요.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아이들 중에는 아토피피부염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피부가 빨갛게 부어오른
것을 보면 너무나 불쌍합니다. 그러나 옛날에는 아토피피부염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왜 없었을
까요? 옛날에는 사람들이 흙하고 함께 살았기 때문입니다.
첫째 흙집에서 살았습니다. 일터도 논과 밭 즉 흙속에서 일했습니다. 또 모든 놀이도 흙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딱지치기, 구술치기, 고무줄놀이. 공기놀이, 땅따먹기 등등 모두가 흙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몸이 흙으로 만들어졌는데 사는 집도, 일터도, 놀이도 모두 흙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즉 삶이 친환경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는 흙하고 격리되어 살고 있습니다. 집은 아파트즉 콘크리트 속에서 살고,
길은 보도블록으로, 도로는 아스팔트로, 학교도 콘크리트로, 자동차는 쇳덩어리로... 모든
생활터전이 흙하고는 격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의 피부가 문제를
일으키는 거예요. 아토피피부염을 고치는 비결은 약이 아니에요. 흙하고 가까이 지내도록
만들어주는 거예요.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이유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짐승의 생명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짐승들은 창조를 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처럼 창조를 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인류문명은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평택시의 한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4층에는 30세 된 젊은 어머니와 4살, 3살, 1살 된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이 젊은 어머니는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고 때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로저스라는 미 여군이 그 소리를 듣고는 4층으로 뛰어올라 갔습니다. 그러나 철제 현관문은
이미 뜨거워져서 열수가 없었습니다. 로저스는 방범창을 발로 차고 뛰어 들어가 네 가족을
베란다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때 이미 십여 명의 미군과 동네주민들이 이웃집에서 빌려온 이불 을 붙들고 뛰어내리라고
소리쳤습니다. 네 명의 가족은 이불 위로 뛰어내려 모두 목숨을 구했지만 마지막으로 뛰나온
로저스 하사는 이미 심한 화상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본국으로 귀국해 치료를 받았지만
애석하게도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 신문기사에 수많은 댓글들이 달렸는데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댓글은 “그야말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하셨습니다”라는 글이었습니다.
살신성인...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는 뜻입니다. 며칠 전 내셔날지오그래픽 TV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습니다. 수많은 아프리카 들소 떼가 개울을 건너가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가 낙오가 된 거예요. 그때 어디선가 사자 무리가 나타나 낙오된
들소를 공격했습니다. 어떤 놈은 들소의 목을 물었고, 어떤 놈은 다리를 또 어떤 놈은
꼬리를 물었습니다.
들소는 사자보다 몇 배나 크고, 힘도 세고, 공격무기인 뿔도 갖고 있습니다. 만일 들소
몇 마리가 힘을 합친다면 사자 몇 마리를 물리치는 것쯤은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친구가 사자들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처했는데도 들소 무리들은 그냥 언덕에 서서
눈만 껌뻑이며 구경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은 “살신성인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만 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천하를 얻었습니다. 내가 평생에 소원하던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내게 유익이 될 것은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금 병원에 누워 있는 환자들
대부분은 그러다가 누워있는 사람들입니다. 타익타닉호가 침몰 할 때의 일화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업가는 금궤를 허리에 차고 바다로 뛰어내렸습니다. 그 순간 금궤가 내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내 목숨을 앗아간 원흉이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놀음을 끊지 못하는 이유는 ‘놀음이 내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마약을 못 끊는 이유도, 담배를 못 끊는 이유도 그것이 내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치가들이 부정, 부패를 못 끊는 이유도 그것이 내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배설물로 여겨야 끊을 수 있는데 유익하다고 생각하니까 못 끊는 겁니다.
대체로 임종에 가까운 사람들은 두 가지를 후회합니다. 첫째는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많이
가져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합니다. 두 번째는 가치 있는 일을 해보지도 못했던 것을 후회합니다.
별로 한 것도 없이 내 생명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너무 허무하고 눈물이 나는 거예요.
작년에 전 미국인들을 울렸던 기사가 있었습니다. 레이트켑라는 39세 된 여성에게 6남매가
있었는데 남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암에 걸린 거예요. 그녀의 암세포는 이미 뇌와 척추까지
전이된 상태였기 때문에 의사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선언한 거예요. 레이트켑 씨는
자신이 죽고 나면 아이들이 모두 고아원으로 보내질 것을 생각하니 잠이 오질 않았다고 합니다.
자기 없이 고아로 살아갈 아이들을 생각하니 매일 눈물이었다는 거예요.
레이트켑 씨에게는 高敎 단짝인 컬리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자기 병상에서
간병을 해주었다는 거예요. 병원에 오래 누워있어 보면 누가 진짜 내 친구인지 드러납니다.
‘의무적’으로 한두 번 문병하는 것으로 끝내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퇴원할 때까지
문병해주는 친구도 있습니다.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두 번 의무적으로 문병하는
목사님이 있는가 하면, 퇴원할 때까지 문병해주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임종 며칠 전 그녀는 친구 컬리에게 자기 아이들 6명을 부탁해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에게는 이미 세 자녀들이 있는 상태였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6명을 맡게 되면 그 친구는 9명의 아이들을 키워야 합니다. 이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학비까지 부담도 해야 합니다.
레이트켑 씨는 며칠 후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숨을 거두기 전 친구로부터 확답을 받고
편안히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컬리 부인은 워싱턴포스트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신이 6명의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는 거예요. “만일 너희 엄마에게 병에서
낫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너희는 누가 너희들의 엄마가 되길 원하느냐?” 그때 아이들은
모두 자신을 지목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친구의 마지막 부탁을 수락하게 되었다는 거예요.
이게 어디 보통의 희생이겠습니까? 이런 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