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동귀(與子同歸-조국이 독립되면 우리 모두 함께 돌아가자)
(광복회관 중앙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법무총장, 외무총장, 임시의정원 원장,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홍진(洪震, 1877년~1946년)
본관은 풍산(豊山). 초명은 홍면희(洪冕熹), 일명 홍진(洪鎭). 아명은 봉근(鳳根) 또는 우봉(又鳳)으로 불렸다. 자는 성무(聖武)이고, 호는 만호(晩湖) ・ 만오(晩悟)이며, 필명으로 경환(警寰)이라 한 적도 있고, 서울시 차동(현재 서소문)에서 출생했고 충북 영동에 거주했다.
고조부는 증의정부좌찬성 병조판서 홍명주(洪命周), 증조부는 의정부좌참찬 홍우순(洪祐順), 조부는 승정원우부승지 홍승유(洪承裕), 부는 홍재식(洪在植), 모는 한수동(韓壽東) 사이에서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학을 수학했고, 1903년 2월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입학하여 1년 6개월 동안 공부한뒤 1904년 7월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졸업한 뒤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성재판소 주사로 근무하다가 1905년 평리원 판사로 승진하였고, 1906년 시험을 통해 검사가 되었고, 충청북도 충주재판소 검사로 발령받아 검사로 근무하게 된다. 투철한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는 선생이 일제에 저항한 의병에 대한 논고(論告)를 거부한 것이 알려졌다.
1908년 변호사 인가장을 받고, 1909년부터 평양에서 사무소를 차리고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나라가 일제에 강점당하자 검사직을 사임하고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일제의 관리가 되어 민족을 지배하고 수탈하는데 앞장설 수 없기 때문이었다. 1919년 2월까지 독립운동가를 위해 법정투쟁을 계속하였다. 그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여 충청북도 청주군 연락책임자로 활동하였다. 일제를 타도하고 자주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남수. 이규갑. 김사국등과 한성정부 수립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인천시 만국공원에서 비밀리에 13도 대표들과 국민대회(國民大會)를 열고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를 조직한 뒤 법무차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한성정부 수립사실을 알리기 위해 상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임시의정원의원·법제위원장(法制委員長)을 지냈고, 또한 충청북도 충주군 조사위원과 충청도선거위원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921년 4월 상해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단장에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였으며, 8월 대태평양회의외교후원회를 조직하여 간사장,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임되었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는 열강들이 모여 태평양회의를 개최하기로 한다. 임시정부에서는 파리평화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독립을 다시 한번 관철시키고자 이승만을 전권대사, 서재필을 전권부사로하는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여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벌였다. 선생은 태평양회의에 참석하는 각국(미.영.불.이 등)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
1922년 7월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조소앙(趙素昻)·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노백린(盧伯麟) 등 1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회 간의 반목·갈등·마찰을 해소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2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총장에 선임된 뒤 내무총장·외무총장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926년 7월 국무령에 임명되어 김응섭(金應燮)·이유필(李裕弼)·조상섭(趙尙燮)·조소앙·최창식(崔昌植) 등과 국무위원회(國務委員會)를 조직하였고, 9월에는 외무총장까지 겸임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시정 3대 강령을 제시하였다.
1923년 10월에는 김동삼(金東三)·김좌진(金佐鎭)·오동진(吳東振)·조성환(曺成煥) 등을 국무원으로 보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1927년에는 유일당운동에 앞장서서 상해·베이징(北京)·광둥(廣東)·우창(武昌)·난징(南京) 등에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를 조직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11월 각지 대표연합회 예비회담을 상해에서 개최하고 유일당을 조직하게 하였다.
1927년 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동북 지방에 파견되어 3부(신민부·정의부·참의부)와 교민단 등 여러 단체의 지도자들을 설득하고 회합을 가져 의견을 교환한 뒤 큰 단체를 형성하였다. 이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1930년 7월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그 당수로서 군민회의(軍民會議: 위원장 김동삼)의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931년 김동삼이 하얼빈에서 일경에 피검되고 군민회의의 활동이 침체되자 이를 수습한 뒤, 황학수(黃學秀)·지청천(池靑天)·신숙(申肅) 등과 함께 당세를 확장하여 한국독립당을 민족 대당으로 발전시켰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당군(黨軍)을 한국독립군으로 개편하고 총사령에 지청천을 선출, 항일 중국군과 연합전선을 펴 치열하게 싸웠다. 한편 경혜춘(慶惠春) 등 여러 동지와 함께 만주중동선 연변 동부 일대의 교포들을 설득하여 무장 독립항전에 적극 가담하게 하였다. 1932년 일제가 만주국을 세우자 1933년 난징으로 가 산해관 이남과 미주·노령 등지에 흩어져 있는 각 혁명단체들이 하나로 합쳐 항일전선을 펼 것을 절규하였다.
1934년 동삼성에서 조직된 한국독립당과 난징에서 조직된 한국혁명당을 통합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재조직하고 조소앙과 같이 지도하였다. 1937년 7월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이 남경에서 대표자회의를 열어 연합회의 결성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미주에 있는 대한독립단동지회·국민회·부인애국단·단합회·애국단 등과 교섭하여 1937년 8월 1일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 이칭: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이 출범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 단체가 되자 조소앙·엄항섭(嚴恒燮)·조경한(趙擎韓) 등과 함께 직접 선전공작을 전개하였다.
1940년 광복진선의 9개 단체가 통일하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자 중앙감찰위원장에 선임되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데 전력, 총사령부를 설치하였다.
1942년 10월 26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장에 선출되었다. 세 번째였다. 이후 해방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인사들이 임시의정원에 합류하자 약헌수개위원회(約憲修改委員會)를 조직하여 헌법의 개정을 추진하였고, 1944년 4월 임시헌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943년 5월 8일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5월 10일 충칭(重慶)에 있던 각 정당 및 한인들이 모여 재중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할 때, 주석단 총주석에 선출되어 미국과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던 전후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에 대한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결의안」 「동맹국 원수들에게 보내는 전문」 등을 채택하였다.
1944년 1월 3일 임시의정원 부의장 최동오(崔東旿)와 함께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헌법 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무위원 선출 방식을 위한 투표에서 여야 동수가 되었을 때, 의장으로 야당측이 주장하는 무기명투표안에 찬성하였고, 이 사건을 계기로 탈당한 것이다. 헌법개정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여야의 대립을 수습하고, 4월 20일 헌법개정안인 「대한민국임시헌장」을 통과시켰다. 헌법개정안이 통과되면서, 좌우연합정부가 수립되었다. 4월 26일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이 취임할 때 임시의정원 의장 자격으로 취임선서를 받았다.
1945년 2월 8일 신한민주당을 창당하고 유동열(柳東說) ・ 김붕준(金朋濬)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신한민주당은 한국독립당과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인사들이 결성한 정당이었다. 2월 28일 제37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소집하고, 정부측에서 요구한 「대독일선전요구안(對德宣戰要求案)」을 통과시켰다.
1945년 4월 11일 제38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을 거행하면서 의장으로 정부의 각원과 의원들에게 ‘행동’과 ‘희생’의 길로 나아가 주기를 독려하였다. 그리고 신한민주당의 안으로 의정원 의장, 임시정부 주석, 광복군 총사령이 주체가 되어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추진하자는 독립운동자대표대회안을 제출하였다.
1945년 8월 10일 충칭에서 일제가 항복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의 항복에 따른 향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8월 17일 제39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여, ‘화평공제(和平共濟)의 새 정신’으로 당면문제를 잘 해결해 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회의에서 야당측이 국무위원 총사직을 요구하고, 이를 둘러싸고 여야가 대립하다가 회의는 종결되고 말았다.
1945년 11월 5일 주석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 29명과 함께 충칭을 출발하여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11월 23일 주석 ・ 부주석 등 제1진이 국내로 출발한 후, 12월 1일 제2진으로 조성환(曺成煥) ・ 황학수(黃學秀) ・ 조소앙 등 22명과 함께 상하이를 출발하여 이튿날인 12월 2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1946년 2월 1일 서울 명동 천주교회당에서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고 의장에 선출되었다. 의장으로 과도정권 수립을 추진하던 중 1946년 9월 9일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